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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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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양칼럼] 10월 31일 2022년 Publish on October 31,2022관리자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lich Beck)은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를 일컬어 ‘위험사회‘라고 규정한 바 있습니다. 세상은 예측하기도 어렵고 통제할 수도 없는 위험 상태라는 거에요.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다양한 요인들을 고도로 발전한 과학기술로 통제하거나 사회제도로 보완하는 방식으로는 극복하기 힘든 사회가 되었다는 경고입니다. 월스트리트에서 시작한 금융 위기가 전세계의 주식 폭락과 경제 침체를 야기하고, 중국 우한에서 시작한 코비드 바이러스가 전세계를 몇 년간 마비시킨 위험을 직접 체감하며, 우리는 문명의 파멸 가능성을 공공연하게 염려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무서운 건, 우리는 스스로 운명의 시계를 단축할 걸 알면서도 언제든지 이해 조건만 맞으면 기꺼이 핵폭탄을 제조하고, 이를 아무 죄의식 없이 실험 감행할 수도 있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자기 머리 위에 떨어지는 것만 아니라면, 언제든 다른 사람들의 머리 위에 떨어뜨릴 궁리를 할 대책없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실상 우리 주변에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서, 공포와 불안이 일상화 된 시대를 사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쾌락을 탐닉하거나, 소유와 소비를 추구하는 물질주의에 빠져서 허우적 대던가 아니면 모든 것에 시큰둥한 냉소주의 주변을 서성이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또 우리의 삶이 어디로 향해 가는 것인지 불분명하니까 말이지요.때맞춰 신흥종교가 나타나 수많은 사람들을 현혹할 수 있게 된 배경이기도 합니다. 역사학자인 유발 하라리(Yuval Harari)가 명명한 ‘데이터교‘도 그 중 하나입니다. 이 종교에서는 컴퓨터 알고리즘이 ‘신’의 역할을 대신하고, 데이터가 그 ‘말씀‘이라는 거에요. 이미 구글이나 네이버와 같은 포털 서비스가 제공하는 인공지능 데이터의 정보에 의존하여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게 그 증거라는 겁니다. 이제는 자신의 중대한 선택을 앞두고, 밤새워 무릎 꿇어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모습을 찾아 보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눈을 뜨자마자 스마트 폰부터 켜고 데이터의 정보로 하루를 시작하는 현대인의 일상에서 신앙의 현주소를 냉정하게 점검해 보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데이터가 정확한 정보를 주는 시대를 살고 있어도, 삶의 궁극적인 이유와 데이터 너머의 세상을 향해 가는 길은 결코 말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여전히 전기 없는 어두운 골방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두 손 모아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삶의 자세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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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양칼럼] 10월 23일 Publish on October 24,2022관리자
    할로윈이라는 대중적 축제에 묻혀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0월 31일은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으로 촉발된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보통 개혁이라 하면 새로운 것으로의 변화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개혁이라는 한자만을 봐도 그렇지요. 개혁은 고칠 개(改)와 가죽 혁(革)이라는 단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고서에 따르면 이 말은 본래 짐승의 가죽에서 털을 다듬어 없애는 과정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털을 없애는 이유는 가죽을 원래의 쓰임새에 가장 적합한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개혁이라는 말은 고쳐서 완전히 새로운 다른 성질로 변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원래 가죽의 형태나 기능을 더 잘 살리기 위해 원상태로 회복시키는 과정에 가까운 의미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교회 개혁도 없던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역할과 기능을 회복하는 의미를 함축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복음의 사역에 대해 율법의 폐기가 아닌 율법을 본래의 의미로 회복시켜 완성하기 위함이라 말씀하셨지요.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본래 그대로 가장 잘 보여주는 방법은 없을까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 중 가장 으뜸 계명을 궁금해 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면죄부를 팔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상품화시켜 버린 교회를 개혁하려고 안간힘을 다한 사람들도 똑같은 질문을 했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알아야 할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해답으로 사랑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랑만이 생명을 창조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원모습 그대로 가장 잘 보여주는 힘이라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종교 개혁의 참뜻도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가 다시 그 사랑을 회복해 가는 과정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교회도 그리스도인도 다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린 꼴이나 다름 없습니다. 채색 옷으로 갈아 입 듯 물들어 가는 가을 이파리를 보며 자연의 아름다음을 느끼듯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세상의 빈틈을 채워가는 사랑을 볼 수 없다면 생명도 이내 그 가치를 잃어 버리게 되겠지요. 그래서 이 맘 때만 되면 이해인 수녀의 ‘10월의 기도’란 시가 떠오릅니다. “10월에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더욱 넓은 마음으로 서로 도와가며 살게 하시고, 조금 넉넉한 인심으로 주위를 돌아 볼 수 있는 여유있는 마음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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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양칼럼] 10월 17일 Publish on October 17,2022관리자
         성큼 가을이 다가 오니 뜨거운 열기가 식어서 좋기도 하지만, 내심 찬 기운에 몸 상할 일 생길까 노심초사하는 요즘입니다. 비켜갈 수 없는 게 세월이라 하는데, 지긋한 연세의 교인들을 보면 가더라도 좀 더디게 가라고 떼라도 쓰고 싶은 마음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아이들이 변해가는 것처럼, 어르신들의 하루도 예전 같지 않게 변화가 큰 것 같아 가슴 한 켠이 먹먹해 집니다. 그래서 요즘은 새벽 제단 앞에 아이들 재롱 좀 더 오래 볼 수 있어서  천천히 자라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 뭐가 급하다고 쏜살같이 달려가는 세월의 발목 좀 잡아달라고 기도합니다.   바람 소리에 잠자던 세월도 놀랄까 마음 태우다 보니, 가끔 울리는 전화벨도 반갑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말없이 떠나간 서운함 만큼이나, 아파서 한동안 얼굴 보지 못할 것 같다는 말에 한없이 마음도 무거워지기 때문입니다. 수화기 너머로 느껴지는 미안함이 고스란히 전달될 때면, 만병통치되는 약손을 갖지 못한 제 손이 너무나 부끄러워 집니다. 그저 살포시 손을 포개어 기도하는 것 외에 해 드릴 게 없다는 아쉬움 때문인지 쉬이 잔상이 떠나질 않습니다. 주님을 예배하기 위해 오는 발걸음 마저 막으면 어떡하냐며 애꿎은 하늘에 찜부럭을 내고 싶은 심정입니다.   시인 유상희의 <내 허락 없이 아프지마>는 사랑하는 이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이렇게 전합니다. “꽃이 필 때는 불어오는 바람에게 아프다고 말하잖아. 진주조개는 상처가 쓰리면 파도에게 하소연하는데, 아프려면 사랑하는 당신 물어보고 아파야지. 그래야 아픈 상처 바람에게 호~ 불어 달라 부탁하지. 쓰라린 가슴, 비에게 일러, 어루만져주라 얘기도 하지. 정말이야 이제는 당신, 내 허락없이 아프지마” 디베랴 바다에서 밤새 물고기를 잡던 제자들을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은 뭍에서 조반을 준비하고 그들을 기다리셨습니다. 고된 하루를 보내고 돌아 올 자식을 위해 따뜻한 밥상을 정성스레 준비한 어머니의 마음처럼 말이지요. 그 달콤한 손맛이 어디 입으로 들어갈 음식 때문 만일까요? 기다림에 더해진 어머니의 간절한 사랑만 할까요? 부족하지만 정성을 담아 간절한 마음으로 생명의 양식을 준비하며, 곧 돌아올 성도들을 기다립니다. 좀 늦더라도, 염려 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아프지만 마세요. 건강하게 만나서, 생명의 식탁에 도란도란 둘러앉아 함께 예배할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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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양칼럼] 10월 10일 월요일 Publish on October 10,2022관리자
    어느새 찬바람이 가을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살랑이는 바람이 마음을 간지럽히는 계절이되었지만, 지난 2월 푸틴(Vladimir Putin)의 침공으로 벌어진 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화되어서 여전히 지구촌 한 곳을 멍들게 하고 있습니다. 소설가이자 사회운동가인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타인의 고통>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개입할 능력을 잃어가고 있는가”라는 화두를 던진 바 있습니다. 지난 몇 달 동안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전달된 수많은 전쟁 영상과 메시지를 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폭력적이고 참혹한 순간을 촬영한 이미지만 기억할 뿐, 그 아래 담긴 무고한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편입니다. ‘나’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그들’에게 벌어진 일인 탓입니다. 오히려 지속적인 자극과 충격에 점차 감각 조차 무뎌져간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수도 있을 겁니다. 이렇듯 전쟁과 폭력은 우리의 양심을 무디게 만들고, 모두에게 엄청난 희생과 불필요한 대가를 요구합니다. 이에 반해 기독교의 복음은 갈등과 분쟁의 해결책으로 전쟁과 폭력이 아니라 화해의 길을 제시합니다. 악에 직면해서 싸움을 부추기는 감정적이고 즉각적인 대응을 하기 보다 기도와 공감의 정신으로 갈등의 축소(De-escalation)를 위해 화해를 촉구하는 것이지요. 우리 연합감리교회의 사회원칙만 봐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전쟁을 개탄하고 국가 간의 모든 분쟁의 평화로운 해결을 촉구합니다.” 전쟁을 개탄하는 것은 우리에게 속한 일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다윗도 고백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할 일을 인간이 자의대로 일으켜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처음부터 기독교적 양심은 폭력과 전쟁이라는 가혹한 현실과 맞서 왔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악의 세력이 끊임없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좌절시키지 못하도록 막아왔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싸움은 영적 전쟁이지 서로의 생명을 해하는 폭력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누군가를 적으로 삼고 그를 제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성전(聖戰)이라는 주장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를 신의 영역으로 격상시키려는 욕망이 빚어낸 악의 화신일 뿐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며, 이스라엘의 역사가인 유발 하라리(Yuval Harari)는 막강한 화력을 앞세운 러시아가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은 전쟁에서 패배할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전쟁은 그들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승리는 일시적인 욕망의 충족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인 듯 보이나 십자가에서 이룬 사랑의 열매만이 영원한 승리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우리의 고통을 십자가 위에서 대신 지신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도 타인의 고통에 동참하며 사는 길만이, 이 가혹한 싸움을 승리로 끝낼 수 있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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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양칼럼] 10월 3일 월요일 Publish on October 06,2022관리자
    미국은 “생명과 자유, 그리고 행복의 추구”라는 인간의 기본권을 뿌리로 삼아 공동체의 기초를 세운 국가입니다. 그러나 1890년 “짐 크로우 법 (Jim Crow Law)”이 제정되어 흑인들의 투표권을 박탈하고 불평등한 인종분리정책이 실시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극심한 인종차별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2013년 시작된 “Black Lives Matter” 운동은 경찰 폭력과 제도적 인종주의가 얼마나 미국 사회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례입니다. 미국의 산업화가 본격화 되기 시작한 1820년대에 광산 및 철도 노동자들로 이주해 온 중국인들도 기존 백인들로부터 심한 차별의 대상이 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황화론(黃禍論, Yellow Peril)이라는 말의 근원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백인 우월주의자들에게 아시안은 불치병을 일으키고 질병을 백인들에게 전파시킨 불결하고 더러운 인종처럼 인식되었습니다. 미국 본토에서 사망자가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던 2003년 사스(SARS) 발병 때도 아시안에 대한 혐오가 발생하여, 많은 아시아계 소규모 영세업자들이 경제적인 타격을 입은 바 있습니다. 2019년 중국 우한에서 첫 발생해 전 세계로 확산된 코로나19 사태는 아시안에 대한 증오범죄를 급증시킨 계기가 되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미국 사회에서 아시안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도 최근의 혐오 범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확산과 연관이 있습니다. 흔히 미국을 청교도 정신으로 세운 국가라고 말하는데,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편견과 차별이 아니라 돌봄과 나눔의 정신에 있습니다. 타인을 나와 다른 존재로 구별해야 할 대상으로 삼기 보다 사랑으로 포용하고 돌봐야 할 한 몸의 지체로 보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인종차별의 문제를 극복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토대 위에 세운 미국사회가 중점을 두어 해결해야 할 제일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금주 뉴저지에서 열리는 한인목회강화협의회 산하 반인종차별 위원회의 모임을 주재합니다. 미국 사회의 소수 인종으로 살아가는 한인 공동체에게 인종차별은 더이상 남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을 키우는 교회라는 우리 교회의 표어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라도, 인종문제는 선결되어야 할 과제가 분명합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은혜로 돌보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후손들에게 남겨주어야 할 신앙의 유산도 더이상 인종차별로 소외되는 일 없이 돌봄과 나눔의 정신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도록 돕는 일이 되어야 할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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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칼럼 09-14-2020 Publish on September 14,2020관리자
    샬롬!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들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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