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주의 소그룹 운동이 웨슬레에게 끼친 영향
Publish on August 13,2010홍삼열
이 글은 제가 수년 전에 소그룹운동을 주제로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내용을 정리한 글입니다. 소그룹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들은 이 글을 통해 경건주의 소그룹운동에 대해, 그리고 존 웨슬레의 속회운동에 대해 기본적인 역사적 정보를 얻으시기를 바랍니다.-------------------------------------------------------------------이 글은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선 경건주의가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고, 그 다음 경건주의 운동의 대표자인 스페너와 프랑케가 이끈 소그룹 운동을 살펴보고, 그 다음 웨슬레의 속회운동을 생각해보면서 경건주의가 어떻게 웨슬레에게서 발전되었는지, 어떻게 수정되었는지 설명드리고, 마지막으로 웨슬레와 경건주의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설명드리겠습니다. I. 경건주의 소그룹 운동의 배경 1. 16세기 종교개혁기: 루터를 비롯한 개혁가들은 가톨릭전통 대신 성경을 강조하면서 오직 성경만이 진리의 기준이 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이것을 sola scriptura의 원리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가톨릭에서 가르치는 교리를 믿어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가톨릭 교리의 중심은 penance system 즉 보속의 체계입니다. 죄를 지었으면 외형적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가들이 외친 것은 외형적인 종교에서 내면적인 종교로의 전환이었습니다. 즉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에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으로의 전환, 그리고 정통교리에 대한 지적인 동의(assensus)를 하는 것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fiducia)으로의 전환이었습니다. 2. 초기 종교개혁 이후의 시기(1648년 까지)는 가톨릭과 개신교 진영이 열심히 싸우던 시기입니다.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것이 30년 전쟁인데, 당시 유럽이 양파로 나뉘어서 계속 밀고 밀리는 싸움을 했습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결론이 나지 않는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유럽 사람들이 전쟁에 진절머리가 나서 싸움을 그만두고 협정을 맺었는데, 그것이 1648의 Westphalia 조약입니다. 가톨릭과 루터교와 칼빈주의 중 하나를 믿으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조약입니다. 단 이것은 각 지역 군주가 결정할 사항이고, 일반 백성들은 그 군주의 결정을 따라 가톨릭이 되던지, 개신교가 되어야 합니다. (cuius regio eius religio) 군주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은 고향을 떠나서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면 됩니다. 3. 1648년 이후의 시대는 이성의 시대입니다. 18세기에 이것이 절정에 이르는데, 이때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은 종교가지고 싸우지 말고 상식적으로 살자는 것입니다. 이런 배경 하에 Deism(이신론(理神論))이 나온 것입니다. 진정한 종교는 성경의 계시에 기초한 종교가 아니라, 인간의 이성/자연법에 기초한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주장하는 대표적인 이론이 일명 Watchmaker God(시계제조자로서의 하나님)의 개념입니다. 시계제조자가 시계를 만들고 나면 시계가 자동적으로 잘 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지만 그 창조물이 너무나 완벽해서 더 이상 하나님이 이 세상에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이 아니라, 자연질서에 따라서만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4. 개신교에서는 이때를 정통주의(orthodoxies)의 시대로 부릅니다. 정통주의의 특징을 세 가지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4.1 루터/칼빈 시대에는 종교적 열정이 있었는데, 이 시기에는 그들의 사상을 교조화하는 작업이 진행됩니다. 즉 우리 선생님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루터교 사람들은 루터만이 진리를 가르치고 칼빈은 이단사상을 가르친다고 주장하고, 칼빈주의자들은 그 반대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이 당시에 칼빈주의자들과 루터란들은 서로를 원수 보듯 했습니다. 루터를 뒤이어 루터란 진영의 대표적 사상가 역할을 한 Philip Melanchthon이란 교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adiaphora(비본질적인 것)는 다른 교단에 양보해도 diaphora(본질적인 것)만 지키면 된다는 온건한 입장을 취했는데, 그 당시 그리고 이후에 이런 온건파는 루터교내에서 배척을 당했습니다. 일반 루터교 사람들은 Philip을 배신자라고 공격했습니다. 그들은 “루터의 사상은 구구절절이 진리다. 하나도 양보할 수 없다! 루터가 최고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얼마 후에 Georg Calixtus란 사람도 Philip과 비슷한 온건한 주장을 했는데, 그는 syncretist(혼합주의자)란 딱지가 붙어서 배척당했습니다. 한편 칼빈주의 쪽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칼빈 선생님이 최고다. 절대 양보 못해!” 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교파와 사이좋게 지내자는 의견들을 묵살했습니다. 교단별 신앙고백(confessions)은 이 시기에 이런 교조화의 경향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각 교단은 이 신앙고백을 통해 자신들이 어떻게 다른 교단과 다른지를 확인, 강조하는 것입니다. 4.2 이 시기에 나온 개신교 책들은 굉장히 두껍습니다. 시리즈물로 된 방대한 작품들입니다. 그리고 루터가 그토록 싫어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방법론을 다시 도입해서 신학을 교리화하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종교적 열정대신 종교를 학문화, 체계화, 교조화하는 정통주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4.3 그리고 이때의 보통 개신교 목사는 아주 지적인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의 내용이 올바른 칼빈의 교리, 혹은 올바른 루터의 교리를 설명하는 것에 치중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설교를 지루해하고, 설교에 은혜를 받지 못하게 되고, 그러니 자연히 경건생활에서 멀어지게 된 것입니다. 5. 그러나 이런 이성주의의 풍조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16세기의 원래의 종교개혁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외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경건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신앙신조도 좋지만 개인 경건생활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개인 경건생활이 없기 때문에, 사회에 악이 만연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소그룹의 개념이 여기에 연결이 되는데, 경건주의자들은 교회와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바로 이 소그룹 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소그룹이 개인과 교회와 사회를 개혁하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5.1 소그룹은 언제 시작되었을까요? 소그룹은 초대교회의 가정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당시의 필요에 의해서 소그룹으로 모인 것이지, 소그룹의 중요성을 알고 그 제도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후에 교인들이 많아지고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이 가정교회의 형태는 자연스럽게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이 소그룹의 개념이 다시 생겨나게 된 때는 16세기 종교개혁기였습니다. 루터는 1525년 그의 "독일미사"(Deutsche Messe) 서문에서 참 신자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초대교회 식으로 가정에서 소규모로 모여서 기도하고, 성경 보고, 세례와 성찬식 등을 행하는 제도를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시행하려고 별로 노력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21년 후 마틴 부처(Martin Bucer)는 스트라스부르크 시의회에 소그룹을 만드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는데 거절당했습니다다. 한편 쥬리히의 쯔빙글리는 그리스어로 신약성서를 배우고 싶어 한 재침례파 사람들을 모아서 성경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이들이 쯔빙글리와 결별하게 되면서 자기들끼리 계속 소그룹으로 모였는데, 그 이유는 당시 그들이 시의회로부터 박해받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대규모로 모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17세기 말에 영국과 독일에서 거의 동시대에 소그룹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이때는 “의도적으로”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소그룹으로 모였던 것입니다. 이 “의도적” 소그룹 운동을 시작한 사람이 바로 영국의 Homeck과 독일의 Spener입니다. 5.2 영국의 Anthony Homeck은 원래 루터란 목사였다가 성공회 목사가 된 사람인데, 이 사람은 경건주의의 환경에서 자랐고 젊을 때 Spener의 친구였습니다. Homeck은 교인들이 보다 규칙적인 영성훈련을 하도록 돕기 위해, 특히 자기성찰을 통해 거룩에 도달하도록 돕기 위해 소그룹을 만들었습니다. 얼마 안 되어 이 소그룹 운동이 유명하게 되어서, 바깥 사회에서도 이 소그룹을 본 따서 Societies for the Reformation of Manners 같은 비영리단체를 창설할 정도였습니다. (웨슬레는 영국에서 유행하던 이 Homeck의 소그룹 운동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5.3 Philipp Jakob Spener는 당시 17세기 신학이 점점 교조화되고, 내면적 신앙 대신 외형적 신학체계를 강조하는 분위기가 이는 것에 반대하여, 다시 내면의 경건생활에 집중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원래의 종교개혁이 성서연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우리도 성서연구에 집중해야 한다고, 경건의 연습을 해야 한다고, 그리고 개인적인 영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스페너는 자신의 이런 주장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Collegia Pietatis(거룩한 무리들)란 소그룹을 만들어 운영했고, 이 단체의 이론적 토대로서 Pia Desideria(거룩한 소원들)란 책을 저술, 출판하였습니다. 스페너의 소그룹운동 덕분에, 독일 지역에 종교적 부흥운동이 퍼졌는데, 이 운동은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좋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런 영향 때문에 스페너와 그의 제자들은 경건주의 (Pietists)란 이름을 얻게 된 것입니다. II. 17세기 독일 경건주의 1. Spener (1635–1705): 스페너는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에서 가르칠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않게 1666년에 Frankfurt로부터 그곳 루터교 목회자들의 관리자(senior ministerii)로 부름을 받게 됩니다. 스페너는 이 부름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그곳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해 보니 도시가 너무 세속에 물들어 있는 것을 보고 대단히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그는 회개와 갱신에 대해 자주 설교를 했고, 매주일 오후에 아이들과 어른들을 위한 교리반(catechism class)을 개설해서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타락해가는 도시에 새 바람을 불어 일으키기 위해 Collegia Pietatis를 만들었습니다. 1.1 Collegia Pietatis: 이 단체 결성의 시작은 그의 1669년의 설교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이 설교에서 그는 사람들에게 주일 오후에 모여서 술 마시고, 카드놀이하고, 도박하는 대신, 함께 모여 그날 아침 설교를 다시 한 번 생각하며 요점들을 토의하고, 경건서적을 읽고, 자신이 은혜받은 것을 나누면서 초신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장이 마련되었으면 얼마나 좋겠냐고 희망했습니다. 그리고 설교자가 주일 아침에 설교하는 것으로 개개인의 영적 필요를 채워주지 못하는데, 평신도 중 은사가 있는 사람이 루터의 만인사제설의 정신을 가지고 그런 모임에서 교인들을 신앙으로 지도했으면 얼마나 좋겠나 하는 희망을 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교회 개혁은 항상 "남은 자"(the remnant of true Christians)에게서 시작되는데, 이 Collegia가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소그룹을 통해 사람들을 잘 훈련시키면 이들이 거룩한 누룩이 되어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1.2 그 이듬해 1670년에 스페너는 몇 명의 교인들의 요청에 부응하여, 매주일과 수요일에 자기 집에서 경건모임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모였지만 따로 앉게 하였고, 남자만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모임은 언제나 기도로 시작했고, 주일설교 내용을 가지고, 아니면 경건서적의 한 구절을 읽고 토론을 한 후에 관련 성경구절들을 중심으로 삶의 적용에 초점을 두며 토의를 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소그룹 모임에서는 성만찬 하는 것은 금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면 이것이 곧 다른 교회를 만드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페너의 소그룹 운동은 기본적으로 기존체제를 인정하는 보수적인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웨슬리도 속회에서 성찬식은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1.3 스페너 밑에 있는 목사들 중 이 Collegia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 경건운동은 삽시간에 널리 퍼져서 독일경건주의 운동의 대표적인 특징이 되고 맙니다. 스페너는 “Spiritual Counselor of All Germany”로 불리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가 귀족들에게 나라 전체의 경건에 대해 쓴 그 수많은 편지와 (예, 주일에 장사를 금해달라는 것; 야한 옷을 입지 못하게 법을 만들어 달라는 등) 그가 출판한 글들 때문이었습니다. 이중 대표작이 그가 1675년에 쓴 Pia Desideria (Pious Desires)입니다. 1.4 Pia Desideria: 이 책은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4.1 책의 첫 부분은 당시 교회의 상황에 대한 비판입니다. 1) 세속 군주의 지나친 교회 간섭 (즉 목회자 선정에 깊숙이 개입); 2) 목사들의 비윤리성, 그리고 자기를 위한 이기적인 목회, 그리고 신앙과 정통교리 받아들이는 것을 같은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것 (참 기독교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이지 어떤 교리를 믿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 3) 평신도에 대해서: 독일 사람들이 습관으로 술을 마신다고 하는데 이것이 술 먹는 핑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함; 간음, 동성애, 강도행위 등등을 비판함. 1.4.2 이 책의 두 번째 부분에서는, 종교개혁이 가능하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교회의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교회가 “더 나은 상태”가 될 수 있다고 믿으면서, 그냥 팔짱끼고 앉아 있어서는 안 된고 적극적으로 개혁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1.4.3 다음 세 번째 부분이 이 책의 중심부분인데, 여기서 그는 6가지 개혁 프로그램을 제시합니다. 1) 성경을 잘 알아야 한다.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읽혀지는 성경에 만족해서는 안 되고, 각자가 개인적으로 읽고, 소그룹에서 함께 토론하고, 가정기도회를 통해 성경을 읽고 공부해야 한다. 성경은 개혁의 중심 도구가 되어야 한다. 2) 루터의 만인제사장설을 실천해야 한다. 즉 평신도의 “만인제사장”으로서의 권리만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그들을 신앙으로 지도하는 것은 목사들에게만 해당하는 책임이 아니라, 평신도에게도 해당되는 책임이다. 3) 기독교는 지식이 아니라 삶이다. 기독교인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면 실천해야 할 것은? 그것은 이웃 사랑이다. 4) 불신자나 이단들과의 종교적 논쟁은 피할 수 없는데, 논쟁을 할 때는 “사랑의 정신”을 잃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당시 orthodoxy에 대한 간접적 비판. 5) 신학교육이 개혁되어야 한다. 교수들은 장래 목회자들에게 신학적인 지식만 가르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영적으로 헌신되고 준비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즉 신학생은 지식과 더불어 철저한 경건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것. 6) 설교자는 신자들의 내적 경건을 목표를 두고 설교해야 한다. 사람의 지성에 호소하는 설교 대신에 감성에 호소하는 설교를 하라는 말. 어려운 설교를 하지 말고, 일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덕을 세우는 설교를 하라는 말. 1.4.4 이 책은 일반 대중에게 아주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이 책이 출판된 지 수년 내에 스페너는 300통 이상의 감사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목사들은 스페너가 너무 평신도에게 힘을 실어준다고 위협을 느꼈고, 신학교 교수들은 그가 신학 교과과정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불만이었습니다. 특히 신학자들이 문제삼은 것은 그의 Collegia가 옛날의 Donatism같이 “성직자의 거룩성”을 외치며 기존 루터교회에서 분리되는 방향으로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ecclesiolae in ecclesia(교회안의 작은 교회들)가 되어서 교회의 분열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사실 스페너의 의도와는 달리, 이미 그의 통제권을 벗어난 소그룹들이 사방에서 생겨났고, 그들 중 몇이 기존 교회를 “바벨”이라고 부르면서 “거룩하지 못한” 목사들의 설교를 듣거나 성찬 받는 것을 거부하는 일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러자 이런 극단적인 집단들과 스페너의 Collegia를 싸잡아서 공격하는 황당무계한 루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모임들에서는 여자들이 설교하게 하고, 아이들에게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가르치고, 부인들이 이 모임에서 만난 새 사람들에게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느라 집에 있는 남편을 굶기고, 남자들과 여자들이 옷을 벗고 아직도 그들이 음욕을 품고 있는지 확인한다는 루머들이 만들어졌습니다. 1.4.5 이런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스페너는 1682년에 모임 장소를 개인 집에서 교회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스페너와 상관없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개인 집에서 모임을 갖는 사람들은 제어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또 한 가지 스페너가 비판자들에 대응한 방법은 “영적 성직제도”(1677, 성직자와 평신도의 차이를 설명한 글)와 교회론(1684)에 대한 글을 써서 출판한 것입니다. 그는 이 둘째 글에서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교회가 여러 가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서, 곧 교회의 가르침이 거짓이라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에, 교회의 예배와 성례전에서 분리되어 나가는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입니다. 스페너의 소그룹 운동은 절대 교회의 분열을 원하는 운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후에도 스페너를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과 열렬히 반대하는 사람들이 대립하였는데, 흥미로운 점은 Wittengerg(루터사상의 본거지)의 신학자들은 스페너의 경건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는 사실입니다. 2. August Francke: 프랑케의 집안은 독일 경건주의를 믿고 실행하는 집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Leipzig대학을 다닐 때 스페너의 사위집에서 기숙하면서 다녔는데, 자기 동료들과 함께 Collegium Philobiblicum을 만들었습니다. 이 단체는 대학의 교수들과 학생들로 구성되었는데, 40년 후 웨슬레가 옥스퍼드에서 만든 holy club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Collegium이 유명해지자 스페너가 이 단체를 직접 방문해서 Francke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스페너가 방문해서 보니까, 이 모임에서 너무 지나치게 원어를 해석하는 데 시간을 쓰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겁니다. 그리고 난해한 구절들을 이해하는데 시간을 너무 많이 소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그러지 말고 성경을 "경건하게" 읽으라고 충고하였습니다. Francke는 이 충고를 받아들여서 이 모임의 성격을 어학적인 데서 경건한 데로 방향수정을 하였습니다. 또한 Francke는 개인적으로 조직신학적인 관심에서 성서해석 쪽으로 방향을 돌려 성서해석에 대해 주로 강의를 하였습니다. 후에 Franke는 Halle대학에 교수로 임용되었는데, 스페너의 추천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Franke는 이 대학에서 경건주의 운동을 체계화하고 확장시켰는데, 그런 이유로 우리는 스페너가 경건주의 운동을 시작했다면, 프랑케는 그것을 제도화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내립니다. III. 존 웨슬레의 소그룹 운동 1. 독일지역의 Collegia Pietatis와 비슷한 형태의 모임들이 영국에서도 있었는데 (Homeck의 소그룹 운동), 웨슬레의 아버지 사무엘 웨슬레가 이 모임에 계속 관여하고 있었습니다. 사무엘 웨슬레와 수잔나는 이 경건주의 소그룹운동의 정신에 따라 매주일 저녁에 집에서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하인들도 포함한 예배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웨슬레가 이 Homeck의 소그룹 운동에 영향을 받아 속회제도를 만들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비록 웨슬레가 스페너의 Collegia를 직접 모방하지는 않았지만, 독일 경건주의의 기본 개념이 그의 속회조직에 그대로 들어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웨슬레의 작품에는 스페너나 collegia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웨슬레는 스페너에게 크게 영향을 준 Johann Arndt의 글을 읽었고, 스페너의 제자인 Franke의 글도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독일 경건주의 전통이 웨슬레의 소그룹 운동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는 없을 겁니다. 2. 스페너에 비교하여 웨슬레의 특징을 들라 하면, 평신도의 역할의 차이를 들 수 있습니다. 둘 다 평신도의 사역권을 인정하지만, 이론적으로 다른 토대를 가지고 있고, 사역의 한계도 다르게 설정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스페너는 만인사제설을 그 이론적 배경으로 두지만 (즉 평신도와 성직자의 차이를 직무의 차이로 설명하지만), 웨슬레는 평신도 설교자를 특별한 복음선포자 (extraordinary messengers)로 규정합니다. 웨슬레는 이 개념을 감리교 운동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것으로 설명하는데, 그의 설교 "The Ministerial Office"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평신도로서 설교의 권한이 주어졌다면 성례도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질문에 대해, 웨슬레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평신도 설교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시기심”을 불러일으키도록 선택된 특별한 복음 선포자들 ("extraordinary messengers, raised up to provoke the ordinary ones to jealousy")이기 때문에 그 일만 하면 되는 것이지, 목사가 하도록 되어 있는 성례를 집행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즉 평신도 설교자들이 목사가 하는 일의 일부를 담당한다고 해서 목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웨슬레는 전도자/교사와 목사/감독을 구분하면서, 전도자/교사의 임무를 목사/감독을 도와서 설교와 전도를 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웨슬레는 만인사제설을 기초로 한 교직제도, 즉 목사를 단순히 직무의 측면에서 보는 교직제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3. 웨슬레가 속회를 만든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모임의 규모가 작아야 서로 실제적으로 신앙의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규모로 모여 예배를 드리는 형태로는, 서로의 신앙의 상태를 점검하거나 어떤 실제적 도움을 주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기존 일반 교회에서 신앙의 의미를 전혀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에게 기독교의 진리를 가르치고 행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교회에 오기 힘든” 일반 사람들에게 교회로 나오라고 하는 대신에,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교회의 형태를 구상한 것입니다. 4. 웨슬레 속회운동의 4가지 특징 4.1 초교파적(ecumenical). 웨슬레는 속회에 가입하는 조건으로 한 가지만을 요구했습니다. Homeck의 소그룹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성공회신자여야 했지만, 웨슬레는 그것 대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싶은 사람” “죄에서 구원받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가입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래서 웨슬레의 속회에는 성공회 신자뿐만 아니라 어떤 교파 교인이라도, 불신자라도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독일 경건주의의 소그룹 운동과 비교하자면, 독일 경건주의도 초교파적인 성격이 짙습니다. 사실 “마음의 종교”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초교파적으로 활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독일 경건주의와의 큰 차이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은 가만히 앉아서 자기 그룹으로 찾아들어오는 사람들을 받았지만, 웨슬리의 속회는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찾아 그곳에서 속회로 모였습니다. 4.2 실용적(pragmatic). 전통에 구애받지 않고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과 제도를 고안해서 이용한 것이 웨슬레의 속회제도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웨슬레는 신도회(society), 속회(class), 밴드(band) 등의 제도를 처음부터 자신의 지시 하에 일괄적으로 제시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필요에 따라 하나씩 만들어갔습니다. 여기서 웨슬레의 중심개념은 접근용이성(accessibility)입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고 그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구조를 변형시켜야 한다는 것이 웨슬레의 신념입니다. 그래서 웨슬레는 밴드를 구성할 때, 비슷한 삶의 상황, 관심, 배경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게 했습니다. (남녀 구분, 기혼/미혼 구분, 나이 구분 등등). 또한 속회가 처음에 생긴 배경을 살펴보면 웨슬레가 얼마나 실용적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교회건물이 건축되었는데, 빚을 감당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이때 리더중 하나가 기발한 제안을 했습니다. 신도회를 12명씩 나누고 책임자를 한 사람씩 선정하여 그 사람이 12명의 집을 다니면서 매주 1페니씩 갹출하게 하자는 안이었습니다. 그리고 만일 속장이 일주일에 12페니를 못 걷으면 차액은 자기 돈으로 채우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좋게 생각되어 이제 속장들이 돈을 걷으러 집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각 가정에 예상치도 않았던 많은 문제들이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가정 폭력, 자녀문제, 술주정 문제 등등 수많은 문제들을 보게 된 것입니다. 웨슬레는 속장들로부터 이런 사실을 보고받고 이것이 좋은 목회적 기회라고 느껴서 방법을 강구는데, 그것이 바로 속회제도였던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속장이 집집이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속원들을 매주 한 자리에 모아서 단체로 성경공부도 시키고 삶을 나누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속장에게 속원들을 영적으로 돌보는 목회적 임무가 부여되게 된 것입니다. 4.3 체계적(systematic). 대개 속회는 12명 정도로 구성되는데, 신도회에 속한 사람이면 강제적으로 이 모임에 참여해야 합니다. 속회에서 하는 주요 임무는 각 회원의 영적 성장을 체크하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당신의 현재 영적 상태가 어떻습니까?"가 주요 질문입니다. 그러나 속회는 성격상 밴드에 비해 아직 기독교인의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속회에 열심히 참여하라는 의미에서, 속회를 3개월간 꾸준히 참석한 사람들에게는 표를 주게 되는데 이 표를 받은 사람은 나중에 애찬식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3주 이상 무단결석하는 사람은 속회에서 제명당하고, 이 사람은 자동적으로 참회자반으로 가게 됩니다. 한편 밴드는 신도회에 속한 사람들 중 그리스도의 완전을 향해 열심을 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따로 모여서 죄의 문제를 나누고 서로 기도로 도움을 주고받는 모임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모임이기 때문에 속회의 경우와는 다른 직접적인 질문이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어, “당신은 지난주에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란 질문에, 각자 정직하게 고백을 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줍니다. 밴드모임에는 다음과 같은 원칙이 있습니다: 1) 5-10명으로 구성된다; 2)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모일 것; 3) 시간을 정확히 지킬 것; 4) 찬송이나 기도로 시작할 것; 5) 지난 번 모임 이후에 말이나 생각이나 행동으로 지은 죄들, 마음에 유혹을 당한 것들을 서로 고백할 것; 6) 리더가 먼저 자세하게 자기 이야기를 하고, 다른 사람들이 차례로 이야기 할 것. 이 밴드조직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은, 웨슬레는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따로 참회밴드(penitential band)도 만들었고, 죄를 회개한 후 모범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을 모아서 선발밴드(select band)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한편 애찬식 (Love Feast)에서는 신자들이 친교와 간증을 나누게 하고, 새신자들을 밴드에 배정하고 소개하는 일을 했습니다. 애찬식은 세 달에 한번 씩 저녁때 모여서 시행하는데, 한 주는 남자들, 다른 한 주는 여자들, 또 다른 한 주는 남자들 여자들 모두 모여서 애찬식을 시행하였습니다. 4.4 평신도 지도력(lay leadership): 웨슬레는 평신도들에게 설교와 성경공부와 목회상담의 역할을 맡겼습니다. 웨슬레가 말하는 속장의 임무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속회원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고 권면하기 위해,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구제금을 받기 위해 속회원을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씩 방문하는 것이고 (나중에는 속회원들을 한 장소에 모아서 이 일을 했습니다), 둘째는 병자가 누구인지, 책망을 거부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등 속회원에 대해 웨슬레에게 보고하고, 재정회계에게 지난주에 걷힌 헌금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웨슬레의 속회사역에서 주목할 점은 웨슬레는 여자 속장들을 선별하여 여자들로 구성된 속회를 맡겨서 리더십을 키웠고, 애찬식 때가 되면 그들의 노고를 공식적으로 치하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상관이 없다”는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여자도 리더가 될 수 있다는 설교를 하였다는 점입니다. IV. 결론 요한 웨슬레는 경건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특히 소그룹 운동에서 경건주의의 모델을 수용했고, 그것을 발전, 변형시켰습니다. 웨슬레와 경건주의와의 공통점은, 이 둘이 모두 교리보다는 삶에 중점을 둔다는 것,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특정 교리를 강조하는 대신, 삶의 적용을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소그룹을 통해 개인의 경건생활을 돕는 것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소그룹에서는 죄의 문제를 필수적으로 다뤘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의 중요한 차이는, 1) 경건주의의 소그룹은 스스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개방된 모임인데 반해, 웨슬레의 소그룹은 적극적으로 사람을 찾아가는 구조라는 것이고, 2) 웨슬레는 하나님이 여자 설교자들을 통해서도 강하게 역사하시는데 이를 인정해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여자 설교자/지도자들을 키웠다는 것이고, 3) 경건주의의 소그룹은 루터의 만인사제설에 기초하고 있지만, 웨슬레의 소그룹은 기존 성직제도의 테두리 내에서 평신도 전도자 혹은 설교자의 개념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웨슬레가 경건주의 전통에서 사용하던 소그룹 구조를 받아들이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당시 영국의 상황에 맞게 창조적으로 개선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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