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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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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6
    [목양칼럼] 4월 17일 2023년 Publish on April 20,2023관리자
    부활의 참뜻은 눈으로 보여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역사적 예수의 부활 사건을 경험한 지 2천년의 시간이 지난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뜻을 깨단하는 일은 신앙의 뿌리를 세우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사랑이 하나의 말장난과 같은 개념적 정의가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 이루어야 할 결실인 것처럼, 부활도 말뜻의 정의 보다 삶의 현장에서 실현되어야 할 신앙의 증거입니다. 날마다 죽음을 맛보는 실존적 종말을 고백한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옛사람의 흔적을 지우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의 역사적 사건을 보았다는 고백은 눈으로 목격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각자의 삶 속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부인하는 체험이 되어야 하듯이, 부활의 사건은 우리의 삶과 전존재가 탈바꿈하는 역사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개인에게 혹은 우리 시대의 현실 속에서 부활의 증거를 볼 수 없다는 이야기가 들린다면, 부활을 의심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아야 할 성찰의 시간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것도 타인에게 시선을 돌리기 전에 우리 자신의 삶부터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나는 부활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현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닮아 있는가? 부활의 증거로 제자들에게 보이신 예수의 상처는 사랑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깊은 상처만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지극했습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 지시고 구원하신 사랑이야말로 부활의 진정한 증거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내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을 새기며 사는 사람이 부활의 증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 깊은 상처를 새기고 살아갈 만큼 사랑하며 살고 있는 것이 맞을까요? 부활 이후 제자들을 직접 다시 찾아주신 예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은 “너희를 보낸다”는 파송의 선언이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어 부활의 참뜻을 세상에 새겨 주신 것처럼, 이제 부활의 열매를 맺는 대사역은 남아 있는 우리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비록 내 몸에 생채기가 남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누군가를 위해 상처마저 감내하는 사랑을 행할 때 비로소 부활이 이 땅 위에 증거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 위에 교회가 세워진 것처럼, 그리스도의 상처를 새기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존재하는 한 부활의 참뜻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이 우리를 살리는 힘입니다. 그러니 후회없이 서로 사랑하는 일에 자신의 삶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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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5
    [목양칼럼] 4월 10일 2023년 Publish on April 13,2023Office
    우리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삶의 높은 봉우리를 향하고 있는 자기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 보다 남들이 추구하는 삶을 모방하며 따라가는 경우에 그럴 가능성이 더 커지지요. 하지만 일단 목표로 삼았던 봉우리에 올라선다 해도, 주변에 더 높은 봉우리가 서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상대적 낭패감에 빠져 들기 십상입니다. 내가 오르던 봉우리만이 세상의 전부라고 여기던 사람에게, 그것은 깊은 생채기를 내기도 합니다. 무작정 높은 봉우리를 향해 오르려 하는 이에게 봉우리는 그저 고갯마루에 불과한 것이라는 말처럼, 모든 것을 허사로 만드는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방향은 알 수 없지만, 매순간 우리의 삶은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인생을 긴 여정에 비유하기도 하고, 그 여로에 서 있는 스스로를 나그네로 부르는 까닭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자로 ‘도(道)’라는 글자가 있습니다. 말 그대로 길이란 뜻입니다. 한자를 풀이해 보면, 도는 머리카락 휘날리며 걸어가는 모양의 ‘착(辵)’이라는 글자와, 생각을 의미하는 ‘머리 수(首)’자로 이루어진 회의문자 입니다. 걸어가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사람의 형상을 문자화한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인생이라는 길을 걸어간다고 할 때, 그 의미는 삶을 돌아보며 생각해 본다는 것과 같은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인생의 여정은 높은 봉우리에 오르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기 보다, 매순간 성찰하며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는 과정에 더 무게 중심을 가진 말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이는 인생을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죽음을 향해 시간을 소비해 가는 과정이라는 말입니다. 육신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비관적인 시각입니다. 그렇다고 틀린 말이라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여정의 최종 목적지를 생각할 경우,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볼 수도 있습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날마다 죽음으로써, 새롭게 거듭나는 실존적 종말을 겪는 사람에게 생명은 시간의 한계를 뛰어 넘어 영원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깨달은 바울은 세상의 높은 봉우리가 아닌 십자가의 좁은 길을 선택했습니다. 눈에 띠지만 고갯마루에 불과한 봉우리의 허상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생명의 길을 향해 간 것입니다. 남들이 다 가려고 하는 봉우리를 오르기 보다, 오히려 기피의 대상이 될 만큼 좁은 길을 가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일종의 모험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편한 걸 포기하고 불편한 걸 선택하는 모험이라는 것이지요. 물론 편리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입니다. 반면 신앙은 자기 중심에서 주님 중심으로의 이동을 의미합니다. 두렵다고 주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신앙 만큼 합리적 선택도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생명을 꿈꾸는 이들에게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사는 것처럼 합목적적인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고갯마루에 불과한 봉우리의 주변을 맴돌며 방황하는 삶에서 벗어나 믿음의 자리로 과감히 한걸음을 내딛는 주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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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4
    [목양칼럼] 4월 3일 2023 Publish on April 06,2023관리자
    부활은 온 인류에 전한 소망과 기쁨의 선물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모두가 영원한 생명을 소망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부활을 일시적인 육체의 소생이나 윤회처럼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환생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모두가 현실에 기반한 생각일 뿐입니다. 현재의 삶을 지속시키거나, 지금 보다 나은 형태의 삶을 바라는 욕망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뜻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은 십자가의 죽음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새순이 돋기 전에 웃자란 가지를 쳐내야 하듯, 씨앗이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알곡을 맺을 수 없는 법입니다. 부활의 아침 마리아와 제자들이 목격한 빈무덤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부활의 전제인 죽음을 완전히 비워낸 텅 빈 무덤이 잘 표상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공간인 무덤이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위한 부활의 장소가 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부활은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그 껍데기를 벗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열매와 같습니다. 새 생명의 탄생입니다. 존재의 완전한 탈바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어두운 그림자에 갇혀 있던 삶에서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로 나와 광명을 찾는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구원을 얻는 것이니, 육신의 환생이나 욕망의 집착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부활은 거두는 게 아니라 버림으로 이루어지는 생명의 역사입니다.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죽어야 사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날마다 죽노라’는 바울 사도의 절규는 부활의 문턱을 넘기 위한 감사의 고백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죄와 허물에 감싸인 몸이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부활절을 맞이하며 우리가 점검해야 할 삶의 현주소도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거듭남의 시간을 일상에서 체험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어야 합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마주하는 하루가 날마다 새롭고 소중한 기쁨으로 다가오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동력일 뿐만 아니라, 매 순간 감사의 마음으로 후회없이 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근거가 되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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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3
    [목양칼럼] 3월 27일 2023년 Publish on March 30,2023관리자
    미국 작가인 에드나 빈센트 밀레이(Edna St. Vincent Millay)의 시 ‘봄‘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4월, 그대는 무엇 때문에 다시 돌아오는가? 아름다움만으로 충분한 건 아닌데. 끈적거리며 피어나는 작은 이파리의 붉은색으로 더 이상 나를 달랠 순 없지. 나도 알 만한 것은 다 아니까.‘ 어김없이 찾아오는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난스레 차가운 공기에 움츠러든 어깨를 펴면서, 맑고 투명한 봄공기가 다가 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립니다. 시인의 말대로 알 만한 걸 다 아는 사람이라면, 계절의 환원은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데도 말입니다. 그건 아마도 기다리는 게 봄소식만은 아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길가에 부풀어 오른 꽃잎만 봐도, 봄이 성큼 다가온 것을 누구나 알아채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유 없이 다시 찾아오는 계절을 맞이하기란 마뜩찮은 단골을 대하듯 반갑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돌아온 건지 스스로 납득하기 어려운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겠지요. 그저 나이의 햇수만 늘어나는 헛헛한 마음만 더해 질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인지 시인은 시의 말미에 “4월을 천치”라고 불렀습니다. 마실 것도 채우지 않은 빈 잔처럼 무방비 상태로 계절을 맞이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먼저 사방에 꽃을 뿌려대는 봄이야 말로 바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봄은 아름다운 것만으로 충분치 않아야 한다는 보챔이라고나 할까요? 사실 봄을 탓하는 것 같지만, 정말 시인이 꾸중하고 싶은 대상은 애꿎게 꽃을 피워내는 계절이 아니라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맞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정작 무엇 때문에 돌아오는 것이냐고 물어야 할 대상은 우리 자신입니다. 어떤 의도로 돌아오는 이 봄을 맞이하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백성들에게 선포하신 하나님의 한결같은 메시지 가운데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제 갈길로 가고자 하는 죄인들에게는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죄에서 벗어나 생명을 얻으려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비록 반복해서 삶의 유혹에 빠져 정도에서 벗어나는 일이 생기더라도, 회개하고 돌아서기를 멈추지 말라는 강력한 권고입니다. 언제 새벽이 다시 찾아오느냐며 파수꾼에게 묻는 것이나, 언 땅을 녹이고 생명의 싹을 틔울 봄기운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모습은 일맥상통합니다. 막연한 기다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점에서 매한가지입니다. 제 아무리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새벽 여명이 밝아오더라도, 내 마음에 봄이 오지 않고 빛도 없으면 그저 남의 일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채워야 할 잔을 빈 채로 내버려 두는 것과 같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봄기운과 함께 매번 찾아오는 부활의 소식을 준비 없이 맞이하는 것처럼 미련한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 곧 우리가 맞이하게 될 부활의 날은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기쁨의 날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알 만한 건 다 안다고 자부하던 사람들 조차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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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
    [목양칼럼] 3월 20일 2023년 Publish on March 23,2023관리자
    지난 해 소천한 이어령 박사의 저서 중에 “생명이 자본이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중에 “양에게 이름을 붙이고 만 소년”이라는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일본의 한 공장에서 식용으로 출하할 양을 기르다가 정이 들어 버린 소년이 양에게 이름을 붙여 준 에피소드입니다. 저자는 소년이 양에게 이름을 붙여준 순간 그 양은 더이상 식용 가축이 아니라 생명을 가진 소년의 친구가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를 사랑하는 것(love)과 좋아하는 것(like)의 차이라고 이어령 박사는 규정합니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양을 먹는 것은 좋아하는 것이지 사랑하는 행위와는 구별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양이가 쥐를 좋아하는 것은 잡아 먹기 위한 라이크의 감정이지 사랑 때문이 아닙니다. 이 때 좋아하는 감정을 사랑의 행위와 구분시켜 주는 것이 소유의 욕구입니다. 잡아 먹는 건 자기를 충족하기 위한 일종의 소유 욕구에서 비롯된 행위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소년처럼 잡아 먹을 양에게 이름을 붙여주게 되면 오히려 자기 먹을 것조차 나누어 주고 싶은 감정이 발생합니다. 식용이 아니라 사랑 “애(愛)”자가 붙은 ‘애완용’ 펫 (pet)이 된 결과입니다. 일방적으로 나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소유의 수단이 아니라, 아껴주며 생명의 교감을 나누는 사랑의 대상으로 전환이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을 그가 가진 배경과 재산 혹은 명예를 보고좋아한다면 그건 라이크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한 상태입니다. 결코 사랑의 감정에 이르지 못한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가진 것 하나 없고, 내게 돌아오는 어떤 대가도 없는데 마음이 움직인다면, 그 때 사랑의 증세를 의심해 봐도 좋습니다. 일단 사랑앓이가 시작되면, 상대방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아니라 내 것 조차 나누어 주고 싶은 이상한 마음이 생겨납니다. 본능적으로는 자연스러운 소유에 대한 집착을 오히려 내려놓는 중증 현상이 발현하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 자기 소유를 내려놓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오르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제자의 길을 가는 것은 엄격한 규율과 원칙을 통과한 소수의 강성 신앙인을 위한 등용문이 아닙니다. 가까운 혈육 조차도 매몰차게 내칠 만큼 지독한 신념에 사로잡힌 맹목적 순종을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사랑이 없으면 그딴 건 다 소용없는 짓일 뿐입니다. 오직 신념 하나만 붙들고 무소의 뿔처럼 가려 했던 이들 중에는 히틀러와 같은 무자비한 독재자들이 수두룩합니다. 예수님이 요청한 제자의 길도 신념과 그에 걸맞는 강직한 실천에 무게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 건 다 라이크의 감정에서 나오는 것일 뿐입니다. 모든 것을 욕망하는 라이크의 감정을 누르고 생명을 향한 애틋한 사랑을 품을 때, 진정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길을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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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
    [목양칼럼] 3월 13일 2023년 Publish on March 15,2023관리자
    생떽쥐베리의 작품 속에서 어린 왕자는 조종사가 그린 모자 그림을 보고서 단박에 코끼리를 삼킨보아뱀이라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어른들은 모르는 상상과 순수의 세계를 어린왕자는 볼 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린 왕자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득도한 성자의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신선하게 인식한다고 해서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기발한 발상과 해박한 지식이 늘 비례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보아뱀 속의 코끼리를 생각해 낸 어린왕자도 정작 자기 별에 있는 장미꽃의 존재에 대해서는 난딱 깨우치지 못합니다. 어디에선가 날아와 싹을 틔우고 자라나 피운 꽃은 어린왕자에게 여간 까탈스러운 존재가 아닙니다. 바람막이를 해달라, 유리덮개를 씌워 달라며 답작이는 꽃에 어린왕자는 마음이 이내 상해 버립니다. 그래서 실망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다른 별로 여행을 떠난 어린 왕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모두가 하나같이 어린 왕자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어른들의 모습일 뿐입니다. 그러다 아무도 살지 않는 사막에서 뱀을 만난 어린 왕자는 자신의 ‘쓸쓸한 감정’을 고백합니다. 그 때 뱀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도 외롭긴 마찬가지라고 알려 줍니다. 쓸쓸함의 원인은 상대가 없어서가 아니라, 관계의 부재 때문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이를 통해 어린 왕자는 자신의 별에 다 두고 온 꽃이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자기만의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작은 여우의 말대로 꽃을 위해 자신이 소비한 시간 만큼 자기에게 소중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값없다는 말은 그만큼 소중하다는 의미입니다. 한 생명을 위해 아낌없이 내 주신 영원한 시간을 생각하면 당연한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시대는 하나님의 은혜를 진짜로 값없이 여기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곤 합니다. 도저히 갚을 수도 없는 그 큰 은혜를 현실의 가치 보다 값싼 연민 정도로 매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하나님에게 자신의 시간을 소비하는 데에도 인색합니다. 데면데면하며 쉽게 눈길을 딴 데 두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서로 간에도 쓸쓸한 마음을 호소하며 헛헛한 세상을 염려하는 소리가 제법 커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고 사람들도 서로 사이 좋게 지내는 법을 잊은 결과입니다. 소중함을 잃어버린 세상 만큼 쓸쓸한 삶이 또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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