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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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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는가? 요즘 세상에... Publish on November 16,2014홍삼열
    성경에 보면 현대인의 시각으로 볼 때 받아들이기가 힘든 명령들이 있다. 그 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이 아내들에게 주어진 명령, 즉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명령이다. 고린도전서 11:2절에 보면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분명히 일정한 위계질서 혹은 억압적 명령체계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에베소서 5:22-23절에 보면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고 하였다. 아니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도 받아들이기가 힘든데 “주님께 복종하듯” 그렇게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건 더더욱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성경을 믿는 아내는 무조건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 경우 다양한 반응들이 나오게 된다. “정말 복종할 만한 가치가 있는 남편이라면 복종할 수도 있을 텐데 우리 남편을 보면 절대 그러고 싶은 생각이 안 난다”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런 명령은 여자의 인권이 철저히 무시되던 고대사회의 도덕률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다”라는 주장까지 다양한 반응들이 나오게 된다.   아내는 자신의 머리가 되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말씀,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선 우리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는 말은 남편이 아내를 지배하고 아내는 무조건 남편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남편이 머리라는 말은 그런 강압적인 지배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질서를 뜻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로서 교회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자신을 희생한 것처럼 남편도 아내와 가정에게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사랑을 보여주신 것처럼 남편도 아내에게 그렇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다”는 구절의 의미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남편이 아내를 위해 해야 하는 일이 너무나 크다. 남편은 아내를 위해 죽는 희생까지 감수하며 사랑해야 하지만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성경은 절대 아내보고 남편을 위해서 죽으라고 명령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한 성경의 대전제는 한쪽이 한쪽을 향해 일방적으로 복종하라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복종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부분이 포함된 에베소서 5장의 단락이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21절)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남편과 아내에 대한 권고는 이 21절의 대전제에 입각하여 설명되고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당시 그리스-로마 사회는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을 당연한 규범으로 여겼다. 물론 당시의 가부장적인 규범체계 하에서 이런 복종은 일방적인 것이었다. 아내에게는 복종을 요구하지만 남편에게는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 그런 일방적인 복종이었다. 당시 문헌에 보면 여성에 대한 차별과 비하가 대단히 심각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아내는 자녀를 출산하고 종족을 유지하는 역할을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생각되었다. 남자들은 그런 목적을 위해서는 아내가 필요하지만 쾌락을 위해서는 정부가 필요하다고 공공연히 이야기를 하였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남자들은 자기가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신께 감사드리는 글을 많이 남겼다.   이런 불평등 사회에서 기독교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복종하라고 명령을 한 것인데 이것은 당시 사회가 받아들일 수 없는 혁명적인 선언인 것이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고 동시에 남편도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은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그런데 기독교는 남자들에게 그런 엄청난 사랑을 요구하고, 그게 안 되면 적어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큼만이라도 아내를 사랑하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에베소서 5:28절)   창세기에 보면 하와는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 왜 그 많은 부분 중에서 하나님은 아담의 갈비뼈를 사용해서 하와를 만드신 것일까? 어느 주석가는 이런 해석을 내놓았다. 만일 하나님이 아담의 머리를 사용해서 하와를 만드셨다면 그건 아담이 하와의 지배를 받으라는 의미일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아담의 발을 사용해서 하와를 만드셨다면 그건 아담이 하와를 지배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담의 심장에 가장 가까운 갈비뼈를 사용해서 하와를 만드셨다. 둘이 동등하게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에게 복종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자발적으로 서로에게 복종하는 사랑의 관계이어야지 어느 한쪽이 무조건 다른 쪽에 복종해야 하는 굴종의 관계가 아닌 것이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할 때 그리스도가 교회를 너무나 사랑해서 교회를 위해 자신이 십자가를 지는 희생을 한 것처럼 그 정도로 남편은 아내를 위해 희생적인 사랑을 하라는 것이 성경의 정신이다. 남편이 이렇게 할 때 아내는 자발적으로 남편에게 복종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평등의 종교이다. 기독교는 모든 인간관계의 근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원칙을 믿는다. 이 원칙을 선언하는 대표적인 성경구절이 갈라디아서 3:28절이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당시 로마제국은 체계적인 불평등구조로 지탱되는 사회였다. 저급 문화와 대비되는 헬라/그리스문화를 지향하고, 전쟁을 통해 잡아온 노예들의 노동력에 기초하여 번영을 구가하며, 여자와 아이의 인권을 무시하면서 모든 방면에서 남자/아버지/남편의 우선권을 존중하는 불평등한 사회구조였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런 불평등의 체계를 부정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구원받아야 할 죄인이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이 필요한 존재이고, 또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는 사람은 누구나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절대 평등성을 강조하는 사상체계인 것이다. 따라서 남편과 아내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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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은 얼마나 믿을만한 책인가? Publish on October 23,2014홍삼열
    구전전통의 정확성의 문제: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성경의 신적 권위를 인정한다. 성경은 몇몇 특별한 사람들이 상상력을 동원하여 쓴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사람에게 감동을 주어 쓰게 한 책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성경의 원저자(原著者)는 하나님이지만 사람은 필자(筆者)가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문화적 배경이 다르고 각자 독특한 문체를 사용하는 여러 필자들이 성경을 기록하였지만 성경 전체의 내용에는 통일성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기본 이해를 가지고 진지하게 성경을 읽기 시작할 때 의문이 생긴다. 창세기에 보면 분명히 문자가 생겨나기 이전의 사건들이 많이 나오는데 (예를 들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 노아의 홍수 이야기, 바벨탑 이야기 등등), 몇 천 년 혹은 최소한 몇 백 년 이후의 사람/사람들이 이 내용을 기록으로 남기게 되는데 이것이 얼마나 정확한 내용일까 라는 의문이 생긴다. 사실 동시대에 사는 사람들끼리도 남의 말을 전할 때 한 다리만 건너면 단어도 바뀌고 표현도 바뀌고 심지어는 내용도 바뀌는 현상이 벌어지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글로 기록된 것을 우리가 얼마나 신빙성있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과연 고대인들의 구전전통을 정확한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것일까? 구전전통의 정확성을 믿어줄 만큼 당시 사람들의 암기 능력이 그렇게 탁월한가?   구전문화의 신뢰성에 대한 의심은 사실 글자문화에 익숙한 현대인들이 가지는 편견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기록문명의 발달이 인간의 생각하고 암기하는 능력을 많이 퇴화시킨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문자와 파피루스의 발명은 사람들의 암기 능력을 많이 떨어뜨렸다. 또 근대 계산기의 등장은 사람의 계산능력을 저하시켰으며 스마트폰의 등장은 우리가 전화번호나 주소를 기억하는 능력을 많이 퇴화시켰다. 또한 현 시대에서도 종교경전을 대단히 귀중히 여기는 전통을 들여다보면 구전전승이 얼마나 신뢰할 만한 것인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예를 들어 브라만 교도들 중에는 예레미야의 일곱 배 분량이나 되는 “리그베다”를 완전히 암송하는 사람들이 상당수가 있고, 유대인들 중에도 구약의 두꺼운 책 한 두 권쯤은 틀리지 않고 외우는 학생들이 있다. 인간의 암기 능력과 구전전통의 정확성에 대한 의심은 현대인의 괜한 걱정인 것이다.   성경사본의 정확성의 문제:   구전의 방법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신뢰할만한 전달체계라는 것을 인정한 후에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책은 성경 저자가 처음 히브리어나 그리스어로 쓴 원본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에게 전해진 여러 필사본들을 종합하여 번역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필사본들이 과연 얼마나 정확한 것일까 라는 의문이 생긴다. 예를 들어 신명기나 마태복음 등의 성경책은 처음 기록될 당시의 문서의 형태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 원본을 누군가가 손으로 정성을 다해 베꼈고 그렇게 완성된 필사본을 후대의 사람이 또 베꼈고 이 필사본을 다른 사람이 또 베끼고 해서 현재 우리 손으로 전해졌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여러 번 베껴 쓴 성경필사본이 정말 하나님이 주신 “원래”의 말씀이라고 믿어도 되는 것일까? 문서를 베끼다 보면 온갖 종류의 실수들이 들어가기 마련인데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필사본이 역사에서 자취를 감춘 원본과 같다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을까?   성경의 여러 복사본들 중에서 원문을 가리는 작업을 본문비평(textual criticism)이라고 하는데,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성경은 오랜 기간의 본문비평 작업을 거쳐서 완성된 결과이다. 여러 필사본들을 펼쳐 놓고 비교를 해보면 쉽게 원문을 찾아낼 수 있는 경우들이 있다. 가령 같은 줄을 반복해서 두 번 베꼈든지 아니면 한 줄을 통째로 빼먹고 베낀 경우에는 무엇이 원문인지를 쉽게 찾아낼 수 있다. 또 사본들을 탄소연대측정 방법을 통해 비교해보면 그 중 더 오래된 필사본이 나오는데 이것이 원문에 더 가깝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사본들간에 다른 단어/표현을 사용한 경우나 특정한 단어/표현이 첨가되었거나 삭제된 경우 어느 것이 원문인지를 가리기가 쉽지 않다. 이럴 때 사용하는 기본 방법들이 있다. 쉬운 표현과 어려운 표현이 있으면 어려운 표현이 원문일 가능성이 높다. 또 짧은 표현과 긴 표현이 있으면 짧은 표현이 원문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짧은 표현을 풀어서 길게 설명하는 경향은 있어도 쉬운 표현을 일부러 짧고 어렵게 고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사해사본의 발견:   성경의 정확성에 대한 논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1947년 이스라엘 사해 근처의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사본(Dead Sea Scrolls)이다. 이 사본이 발견된 경위는 이렇다. 당시 그곳에서 양을 치던 베두힌이 있었는데 양을 치다가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 어디에 있을까 하고 찾던 중에 혹시 동굴에 들어간 것이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그곳에 돌을 던졌는데 동물의 울음소리는 안 들리고 항아리 깨지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그래서 동굴 속에 무엇이 있는가 확인하기 위해 들어가보니 여러 항아리들이 보이고 그 중 한 항아리에 성경이 쓰인 양피지가 담겨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일명 쿰란사본으로 불리는 성경사본인데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것은 이 동굴이 예수님 당시 사막에서 공동 금욕생활을 하던 쿰란공동체에 인접해 있기 때문이다. 1947년에 이 동굴에서 성경사본이 처음 발견된 이후 사람들이 계속 사해근처의 다른 동굴들을 점검하기 시작했는데 1956년까지 총 11개의 동굴에서 대략 600부의 성경사본들이 발견되었고, 이렇게 여러 동굴들에서 발견된 사본들을 일괄적으로 가리켜 사해사본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 사본이 발견되었을 때 전세계의 성서학자들은 대단히 흥분하였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성서학자들이 구약성경을 위해 사용한 가장 오래된 사본이 10세기 경의 마소라 텍스트였는데, 이 사해사본은 대부분 예수님 이전에 기록된 사본으로서 이것의 발견으로 사본의 역사가 적어도 1000년을 거슬러 올라가게 된 것이다. 만일 당시 그들이 사용하고 있던 성경과 이렇게 1000전에 만들어진 필사본을 비교해 볼 때 그 동안 너무나 많이 변질이 되었다고 한다면 이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런데 자세히 비교를 해보니 1000년이 지나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 성경을 필사했지만 차이가 나는 것이 대단히 미미한 수준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만큼 성경 필사자들이 정확히 성경을 베껴 썼고, 설령 개중에 실수하는 예들이 나타나도 다른 사본들과 비교함으로써 다시 올바르게 교정된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이 된 것이다.   외경(外經, Apocrypha)과 위경(僞經, Pseudepigrapha):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 66권은 한꺼번에 그 형태로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오랜 기간 동안 많은 성경작가들의 손을 통해서 완성된 것들이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필연적으로 진짜 성경과 가짜 성경을 구별하는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개중에 정통 선지자나 사도의 이름을 사칭(詐稱)하는 누군가가 자기 맘대로 성경을 기록한 예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히브리어(구약) 성경을 타나크(TANAK)로 불렀다. 율법서(Torah)와 예언서(Nevi’im)와 성문서(Ketuvim)의 첫 글자를 연결시켜서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타나크가 유대교 경전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 AD 90년 경의 얌니야 회의에서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미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히브리어 성서대신에 그리스어 번역본인 70인역을 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70인역에는 타나크에 들어있지 않은 부분, 즉 토빗, 유딧, 마카비서와 같은 외경(外經)이 포함되어 있었다. 중세의 가톨릭교회는 이 70인역의 전통을 따라서 공식 라틴어 성경에 외경을 포함시켰고, 개신교는 원래 히브리어 성서에 외경이 없다는 이유와 그곳에 연옥설이나 자살을 인정하는 등 개신교가 받아들일 수 없는 비성경적인 사상이 들어가 있다는 이유로 개신교 성경에서 외경을 완전히 제외시켜버렸다. 그래서 현재 개신교가 사용하는 성경과 가톨릭교회가 사용하는 성경이 다른 것이다.   그런데 공식 성경도 아니고 외경도 아닌 정말 100% 가짜 성경들도 있었다. 이것을 위경(僞經)이라고 부르는데, 예를 들어 모세승천기, 마리아복음, 야고보계시록 같은 책들이다. 이런 책들은 저자가 신분을 숨기고 마치 구약의 선지자의 말을 자기가 직접 인용한 것처럼 주장하든지 아니면 사도가 이 성경을 쓴 것처럼 기록하지만, 이게 너무나 가짜인 것이 분명해서 유대교나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할 것 없이 이런 것들을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성경 66권은 개신교나 카톨릭이나 정교회나 할 것 없이 모두 정경(正經)으로 인정하는 정말 믿을 만한 성경이라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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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나요? Publish on September 30,2014홍삼열
    혹시 여러분들 중에 이런 의문을 가진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죽으면 곧장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게 될까? 아니면 그 전에 어떤 중간 지점에 들어가서 일정기간 기다리다가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서 최후의 심판을 받고 나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게 될까? 역사적으로 정통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는 사람이 죽으면 이생에서 자신이 행한 결정에 따라 곧장 지옥이나 천국으로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기동 계통의 이단들은 이른바 “중간상태”의 이론을 가지고 성경을 왜곡한다. 즉 사람이 죽으면 곧장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중간단계인 낙원이나 무저갱(혹은 음부)에 가서 예수님의 재림때까지 기다리는 기간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성경이 “그리스도 안에서 잠을 자는 것”(고전 15:18)이라고 표현한 것이 바로 이 중간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입장을 혼합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전에 살았던 구약의 사람들은 죽으면 그 중간상태로 먼저 들어가게 되지만, 예수님 이후에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사람은 곧장 천국으로 직행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중간상태”의 이론을 주장하는 김기동은 낙원을 천국으로 가는 중간단계로, 무저갱을 지옥으로 가는 중간단계로 설명한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이론을 제시하는가? 우선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한 3:13절)라는 구절을 근거로 예수님 이전의 사람들 중에 천국에 간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여기에 보면 인자/예수님만이 하늘에 올라간 경험이 있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같은 구약의 신앙인들은 다 죽어서 어디에 갔다는 말인가? 김기동의 이론에 의하면 그들은 천국에 간 것이 아니라 낙원 혹은 스올에 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잠자고 있다가 예수님의 재림때 육체로 부활하여 마지막 심판을 받고 나서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구약의 의인들과 신약의 신앙인들이 죽으면 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낙원에 간다고 하는 성서적 근거가 무엇인가? 누가복음 23장에 보면 두 행악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서 형을 받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때 한 강도는 예수님을 조롱하지만 다른 강도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예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요청한다. 그가 이렇게 요청할 때 예수님이 그에게 무엇을 약속하셨는가? 낙원을 약속하셨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 23:43) 그리고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사흘 후에 부활하시는데 그때 무덤 앞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신다. 마리아가 너무나 기뻐서 예수님을 붙들려고 했을 때 예수님이 그녀에게 말씀하신다.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요한 20:17) 이상의 두 성경구절과 이미 앞에서 언급한 요한복음 3:13절의 말씀(“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을 종합하면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아직 예수님 이외에 어느 누구도 천국에 들어간 사람이 없고, 예수님은 돌아가신 날 곧장 행악자와 함께 "낙원"에 가셨고, 예수님 본인도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는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사흘 동안 계셨던 곳은 아버지 집(천국)이 아닌 다른 곳, 즉 낙원이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흘 후 예수님은 부활했지만 그날 함께 낙원으로 간 행악자는 부활했다는 말이 전혀 없으므로 그 행악자를 비롯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낙원에서 천국에 갈 날을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또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나온다. 부자는 죽어서 음부에 들어가 불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고 있고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로를 받는다. 그러면 이 아브라함의 품이 위에서 말하는 낙원일까? 김기동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낙원은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 신자들이 들어가는 곳이고, 아브라함의 품은 예수 이전의 의인들이 들어가는 곳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주장하는 “중간상태”의 이론이다. 그렇다면 이런 이론이 정말 성경의 가르침일까? 정말 천국과 낙원과 아브라함의 품이 각기 다른 것인가? 그렇지 않다. 김기동의 “중간상태” 이론은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엮어서 쓴 소설에 불과하다. 우선 김기동은 요한복음 3:13절의 말씀,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라는 구절을 예수님 이전에는 천국에 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런데 이 구절이 정말 그런 뜻일까? 그렇지 않다. 만일 그렇다면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들려 올려진 에녹과 엘리야는 어디에 갔단 말인가? 김기동의 주장대로 천국이 아닌 “아브라함의 품”에 간 것일까? 요한복음 3:13절의 문맥을 제대로 이해하면 그런 해석이 나올 수가 없다. 유대인의 선생으로 알려진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와서 구원에 대한 가르침을 요청했을 때 예수님은 거듭남의 진리, 즉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는 진리를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는 이 가르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이 어떻게 다시 한 번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느냐는 의문을 표시하며 육체적인 차원의 이해에 갇혀 있는 한계를 드러내었다. 이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이것이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하늘에 있다가 내려온 인자만이 하늘의 비밀을 가르쳐줄 수 있는데, 아직 너는 수준이 안 되기 때문에 (육체적 수준에 갇혀있기 때문) 하늘의 비밀을 알려주어도 그것을 감당할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의 요점은 “나만 하늘에 올라갔다”가 아니라 “나만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현재 누구에게 말씀을 하고 있는가? 아직 죽어서 천국에 올라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닌가? 만일 천국에 올라갔던 에녹이나 엘리야가 다시 내려와서 지금 예수님 앞에서 이 말씀을 듣고 있다면, 그들도 이 “하늘에 올라간 자”에 포함될 것이다. 그래서 이 구절은 현재까지 하늘에 있다가 내려온 존재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고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구절에서 다른 사람들이 하늘에 올라가지 못했다는 주장을 도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구절을 기초로 예수님 이전의 신앙인들은 천국에 간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인 것이다.   또 한 가지 김기동이 주장하는 것은 낙원/음부(=중간상태)는 영혼의 활동이 완전히 정지하는 “수면상태”라는 것이다.(요한 11:11, 고전 15:18, 살전 4:13-14) 그런데 정말 이곳에 있는 영혼은 아무 활동도 하지 않는 완전 수면/대기상태에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누가복음 16장을 보면, 나사로가 음부의 불 가운데서 너무나 심한 고통을 받을 때 낙원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그의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자신의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과연 이것이 영혼이 수면을 취하며 아무 활동도 하지 않는 중간상태 이야기일까? 이건 분명히 죽은 영혼의 다양한 활동이 설명되어 있는 천국과 지옥 이야기이다. (참고. 계시록 2:7절에 보면 요한이 환상 중에 본 낙원 이야기가 나오는데, 역시 여기에서도 구원받은 영혼의 활동이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김기동은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실제 이야기가 아니라 비유라고 해석한다. 자신에게 불리한 구절은 비유적으로 해석해버리는 전형적인 이단의 수법이다. 또한 김기동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나서 부활하시기 전 사흘 동안 가 계셨던 곳이 바로 이 낙원/음부라고 주장한다. 베드로전서 3:19절과 4:6절에 보면 예수님이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고”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셨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이 예수님이 중간상태에 가신 것을 의미하는 구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만일 그곳의 상태가 정말 영혼이 잠자고 있는 무활동의 상태라면, 예수님이 그곳에 가서 메시지를 전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어차피 다들 잠자고 있어서 듣지 못할텐데...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 성경에서 죽음을 자는 것으로 표현한 것은 사람이 죽으면 중간/대기상태로 들어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죽으면 인간의 모든 현세적 활동이 정지한다는 의미이다. 현상적으로 볼 때 사람이 잠이 들면 모든 활동이 정지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래서 성경에서 “주 안에서 죽은 사람”을 잠 자는 것으로 표현한 것은 “잠자는 기간”을 염두에 둔 표현이 아니라 단지 “깨어나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임을 알아야 한다. 이쪽에서 자고 저쪽으로 깨어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런 이유로 성경은 예수 믿지 않고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절대 잠잔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예수와 상관없는 죽음은 수면이 아니라 다시 깨어날 가망이 없는 인생의 종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기동은 불신자도 죽으면 중간상태로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성경은 사람이 죽으면 곧 바로 영원한 기쁨인 천국이나 불의 고통이 있는 지옥으로 간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품이나 낙원은 천국과 다른 표현이 아니라 동일한 한 가지를 의미하는 표현들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김기동의 중간상태 이론은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도 아니고 성경의 관심사도 아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생에 사는 동안 예수믿고 구원받게 하는데 관심이 있지 죽고 난 후에 정확히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육신이 죽고 나면 절대 운명이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백번 양보해서 김기동이 주장하는대로 중간상태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치자. 그렇더라도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이 이론을 우리가 꼭 알 필요가 있을까? 김기동 식으로 생각을 하더라도 낙원에 간 사람은 무조건 천국으로 가고 음부에 간 사람은 무조건 지옥으로 간다. 중간상태에서 운명이 바뀌는 일은 절대 없다. 그렇다면 왜 성경이 알려주지 않는 이론을 굳이 설명하려고 할까? 단순히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이런 식으로 성경에도 없는 내용을 마치 성경의 가르침처럼 제시함으로써 혹세무민(惑世誣民)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것일까? 우리는 성경이 알려주는 것으로만 만족하면 된다. 그러면 구원받는데 지장이 없다. 오히려 성경이 알려주지 않는 것을 굳이 알려고 하고 설명하려고 하다가 이단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이 알려주는 분명한 사항이 무엇인가? 이생에서 예수 믿고 구원얻는 사람은 죽어서 천국에 가고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죽어서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죽은 영혼이 부활하여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서 마지막 심판을 받고 그런 후에 영원한 천국이나 지옥으로 보내진다고 기록된 내용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때 최후의 심판을 받고 가는 천국/지옥과 사람의 육신이 죽고 난 직후에 가는 천국/지옥(혹은 낙원/음부)이 같은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 성경은 이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다. 이런 것들이 성경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그 둘이 같다면 동일한 내용을 다른 개념으로 설명한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만일 다르다면 육신의 죽음 직후에 가는 천국/지옥은 최후의 심판 이후에 가는 천국/지옥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상태, 즉 각각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천상의 기쁨과 꺼지지 않는 불 속에서 영원히 고통을 당하는 경험의 시작일 것이다. 이 정도만 알아도 구원받는데 지장이 없고 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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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5
    이단이 만든 제품을 사는 것은 죄인가요? Publish on September 30,2014홍삼열
    언젠가 이런 이메일을 받은 적이 있다. 모모 제품은 이단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그 제품을 사지 말라는 내용이다. 아울러 이 이메일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달해서 함께 이단제품 불매운동을 벌이자는 것이다. 이것을 읽을 때 한편으로는 이단을 도우면 안 되지 하는 생각이 들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과연 이런 식으로 우리가 이단의 세력에 대항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오히려 이런 종류의 이메일 때문에 비기독교인들이 기독교를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혹시 여러분들도 이런 종류의 이메일이나 요청을 받고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우리가 조금만 조사해봐도 예상외로 상당히 많은 제품들과 서비스들이 기독교 이단들과 관련되어 있다. 이단이 직접 사업체를 경영하면서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우들이 있다. 예를 들어 안식교에서 운영하는 삼육대학교나 위생병원, 통일교에서 운영하는 일화식품, 세계일보 같은 경우가 이에 속한다. 또 어떤 경우에는 사업체가 특정 이단과 직접적으로 관련은 없지만 그 이단에 속한 사람이 최고경영자의 위치에서 그 사업체를 이끄는 경우가 있다. 유명한 호텔체인인 메리엇호텔이 이 경우에 속한다. 메리엇호텔에 가면 객실마다 성경과 몰몬경이 함께 있는데 이 호텔의 최고경영자가 몰몬교인이기 때문에 그런 정책이 시행되는 것이다.   과연 이런 경우에 우리는 그런 제품이나 서비스가 이단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소비하지 말아야 할까? 우리가 그것을 소비하면 그 이단을 돕게 되고 더 나아가 그 이단의 교주에게 헌금하는 꼴이 되기 때문에, 이단에 관련된 제품이나 서비스를 일절 멀리하고 더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불매운동을 해야 하는 것일까?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몇 가지 있다. 우선 과연 현재 이 복잡한 세상에서 이단이 만든 것을 꼭 집어서 구별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 한대를 만들 때 수 만가지 부품이 들어간다고 하는데 그 중 이단과 관련된 부품이 들어갈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 그럴 경우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설령 안다고 할 때 그 자동차를 사면 안 되는 것일까?   또 한 가지 고려해야 할 사항은 우리가 이단과 관련된 제품을 사지 말아야 한다면 불교나 유대교나 모슬렘 같은 타종교에서 만드는 제품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요즘에는 회교권에서 막강한 오일 머니를 사용하여 전세계를 대상으로 공격적으로 선교를 해오는데 우리가 그들의 석유를 소비한다면 결국 모슬렘 선교를 돕는 결과가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인이 그런 전세계적인 거대문제는 도외시한 채 “자그마한” 이단제품에 대해서만 불매운동 운운한다면 이것이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또 한 가지 우리가 고려해야 할 사항은 이단제품 불매운동이 실제적으로 이단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효력이 없이 정반대의 결과, 즉 기독교인은 비합리적이고 꽉 막힌 사람들이라는 인식만 세상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 역작용을 일으키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점들을 고려해볼 때 이단제품을 보이콧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종교적 신념만 가지고 결정할 사항이 아니라 실제적인 득과 실을 따져서 결정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잘못하다가는 이단세력을 약화시키고 정통기독교의 세력을 강화시킨다는 원래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다음의 세 가지 원칙에 따라 이단제품을 살 것인지 사지 말 것인지를 결정할 것을 제안한다.   첫째 원칙은 이단에 속한 개인과 이단이 운영하는 기업을 구분하자는 것이다. 어느 개인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고귀한 존재로서 (아무리 이단에 빠진 사람일지라도) 정직하고 성실하게 경제활동을 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그것을 소비해주는 것에 큰 문제가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는 이단에 속한 사람이나 정통에 속한 사람이나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귀한 영혼이기 때문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다. 비록 잘못된 사상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이 부여한 기본 능력을 가지고 경제활동을 하는 인간으로서의 기본 역할까지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떤 이단이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신앙이란 명목으로 신도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반사회적인 활동을 조장하거나 아니면 직장에서 적극적으로 이단 교리를 가르치며 강요하는 경우라면, 기독교인은 인권의 차원에서 그리고 신앙의 차원에서 이를 거부하고, 거부하는 표시로서 불매운동을 전개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단이 운영하는 사업체일지라도 윤리적으로 운영을 하며 이단 사상을 강요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업체에서 제공하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거부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물론 이런 것도 결국 기독교에 해를 끼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개인적으로 그것을 거부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남에게까지 강요하는 것은 선을 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몰몬교에서 운영하는 대학교에 다닌다든지 안식교 회사에서 판매하는 건강식품을 먹는 것도 기독교에 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것들까지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개인의 신앙의 양심상 그런 것들을 피하면 되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며 그런 것에 가까이 하면 죄를 짓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좀 지나친 태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둘째 원칙은 선교적 입장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자는 것이다. 옛날에는 기독교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바깥 사회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인터넷과 매스컴이 발달하여 교회에서 무슨 논쟁이 있는지 바깥 사람들이 다 안다. 그런데 그들 눈에는 교회에서 어느 특정 집단을 “사소한” 이유로 이단으로 정죄하고, 더 나아가서 그 이단이 만드는 제품을 보이콧 하자는 것이 기독교의 편협성을 증명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인들이 이단에 대해 그런 행동을 취하는 것이 아무리 신학적인 이유로 정당화된다고 하더라도 비기독교인들에게는 그것이 기독교선교의 장애물로 작용하니 우리가 더욱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말 정통교회가 이단의 세력을 약화시키기를 원한다면 이단성/정통성을 갖고 시비하는 것보다는 되도록 일반 사회가 수긍할 수 있는 합리성과 윤리성을 가지고 시비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방법일 것이다.   셋째 원칙은 이단을 부정하는 것보다 정통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기독교인들이 이단제품 불매운동을 하는 근본 목적이 무엇인가? 이단은 잘못된 사상이기 때문에 그 세력을 약화시키자는 것이 아닌가? 만일 그런 목적이라면 이단을 부정하고 이단제품을 불매운동 하는 것보다 정통 기독교인들이 똑바로 사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인 방법이다. 왜 요즘 들어 이단들이 더욱 활개를 치는가? 자칭 정통이라고 하는 교회들이 세상에서도 하지 않는 편법, 불법을 자행하고 그런 것들을 하나님의 뜻으로 호도(糊塗)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자기들은 실제 행동에 있어서 꼭 사이비 이단처럼 행동하면서 다른 집단을 향하여 이단으로 정죄하고, 이에 더 나아가서 그런 이단 집단이 만든 제품을 보이콧 하고 이단이 사장으로 있는 회사의 제품을 사지 말라고 하는 것이 비기독교인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까? 기독교인들은 이를 정말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단제품 불매운동을 하는 것은 분명히 기독교에게 플러스보다는 마이너스가 된다.   사도바울은 이방신전에서 제물로 드려졌다가 시장에 나온 고기를 기독교인들이 소비하는 것에 대해 분명한 원칙을 제시하였다. 음식/상품은 가치중립적이다. 문제는 어떤 이해를 가지고 그것을 소비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그 음식이 우상숭배와 연관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먹는 사람의 영혼에 해가 된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것을 피하면 된다. 그러나 무슨 음식이든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함으로 받을 줄 아는 사람은 그것을 자유로이 소비하면 되는 것이다. 단지 그럴 경우 믿음이 연약한 사람을 고려한다는 차원에서 자신의 신념을 남에게 강요하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무조건 이단과 연관된 제품을 멀리해야 하는가? 그것을 소비하면 죄가 되는가? 그렇게 하면 자기 영혼에 해가 되고 기독교에 해가 된다고 믿는 사람은 그것을 멀리하면 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제품은 가치중립적이라고 믿는 사람은 (이단이 반인륜적이고 반인권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만들고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제품을 자유로이 사용해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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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4
    애완동물도 천국에 갈 수 있나요?(답글) Publish on September 30,2014홍삼열
    필자가 일년 전쯤에 “애완동물도 천국에 갈 수 있나요?”란 글을 쓴 적이 있다. 글의 논지는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천국에는 애완동물을 위한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에서든지 하나님이 애완동물을 천국으로 인도해주신다면 그건 우리가 하나님께 정말 감사해야 할 사항이라는 것이다. 이 글을 자세히 읽어보기를 원하시는 분은 산타클라라연합감리교회 웹사이트(www.santaclarakumc.org)에 있는 목양칼럼으로 들어오시면 된다. 최근에 어떤 분이 이 글을 읽고서 필자에게 질문을 해오셨다. 로마서 10:13-14절에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여기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복음을 듣는 사람이 생기는 것이고, 이렇게 사람이 복음을 들을 기회가 주어져야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이고, 또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구원의 기본 과정에 대한 설명이다. 이런 논리로 따지자면 개는 억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고 천국 가는데 개에게는 전혀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또 그런 이유로 개가 천국에 못 들어간다면 이게 너무 억울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이에 대해 보충 설명을 해달라는 이메일이 저에게 전달되었다. 그래서 필자가 그분께 소견을 보내드렸는데 다음이 그 내용이다. “저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 질문하신 사항, ‘누가 가서 개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가? 개의 입장에서는 복음을 전달받지도 못했는데 천국에 가지 못한다면 좀 억울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저의 소견입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일반적"인 답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은 사람만 천국에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기록된 당시의 선교적 상황/입장에서 볼 때)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은 언제나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선교사가 어느 지역에 들어가기 전에 살았던 그 수많은 사람들의 경우, 혹은 선교사가 어느 지역에 들어갔어도 여러 가지 상황상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 이 경우는 로마서 2:14-15절에 나오는 말씀을 적용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양심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는 것이죠. (www.santaclarakumc.org 목양칼럼 “옛날 우리의 선조들은 다 지옥에 갔나요?”를 참조) 이것을 확대해석하면, 이 기준이 동물에게도 적용된다고 가정할 수 있지 않을까요? 혹시 하나님이 천국에 동물들을 위한 자리도 계획하셨다면 아마 이 기준으로 동물들도 천국행과 지옥행을 가르시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성경에서는 동물들에게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당시에는 여자나 어린이들도 사람 취급을 하지 않고 사람수를 셀 때도 껴주지 않은 상황에서 더구나 동물들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의 구원을 위해 주신 사람을 위한 책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사람의 언어로 사람의 이해방식에 맞게 기록될 수밖에 없겠죠. 만일 사람의 언어와 이해방식에 맞지 않게 성경을 주셨다면 사람이 구원받을 길이 없을 겁니다. 같은 논리로 만일 하나님이 동물들을 구원하실 계획이 있으셨다면 동물들이 이해하는 언어와 방식을 반드시 사용하실 겁니다. 그러고 이런 경우 사람들에게는 이것을 알려주실 수도 있고 안 알려주실 수도 있겠죠. 동물의 구원이 사람의 구원과는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으니까요. 따라서 동물의 구원의 문제에 관해서는 하나님이 알아서 처리해주실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하나님은 이 문제에 관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일이 없으니 (천국에는 원래 동물을 위한 자리가 없기 때문에 전혀 언급을 하지 않으셨든지, 아니면 동물들도 천국에 갈 수는 있는데 우리 인간이 알 바가 아니기 때문에 안 알려주셨든지)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할 사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동물을 너무 사랑해서 그 동물들과 함께 천국에 가고 싶으신 분들의 경우에는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여전히 열려 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시면 될 겁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선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하게 창조하신 동물들도 천국에 받아주실 가능성은 다분히 있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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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모습 이대로”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Publish on September 30,2014홍삼열
    교인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 중에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그 구원 허락하시사 날 받아주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아주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아주소서”(새찬송가 214장) 라는 찬송이 있다. 얼마나 은혜로운 찬송인가? 내가 무너진 마음으로 주님께로 갈 때 주님은 어떤 자격요건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그냥 그 모습 그대로 받아주신다는 기독교 복음의 기본 메시지인 것이다. 282장 “큰 죄에 빠진 날 위해”도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 엘리옷(Charlotte Elliott)이 자신의 회심의 경험을 노래한 것인데, 그녀가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말란(Malan) 목사님께 물었을 때 대답이 “Just come to Him as you are”(현재 당신의 모습 그대로 오시면 됩니다)라는 것이었다. 이런 저런 자격 따질 것 없이 현재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주님께로 오기만 하면 주님이 다 용서해주시고 품어주신다는 은혜의 메시지인 것이다. 이런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찬송이기에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부흥사로 알려진 빌리그래함 목사가 이 찬송을 통해 회심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상은 항상 자격 요건을 따진다. “우리 그룹에 들어오려면 수입이 얼마 이상은 되어야 하는데 너는 안 돼.” “우리 회사에 들어오려면 평가점수가 80점은 넘어야 해.” “나하고 상대하고 싶으면 이거 이거 고치고 와.” 이런 식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복음은 어떤가? 재정상태가 엉망이어도 시험점수가 한참 미달이어도 실수가 많고 흠이 많더라도 현재 그 상태대로 하나님께 오면 하나님이 다 용서하시고 받아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천국 가는 데에는 그런 세상적인 자격요건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말씀이다. 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인가? 그런데 이 “내 모습 이대로”의 의미가 정말 아무런 조건 없이 “무조건” 하나님이 다 받아주신다는 의미일까? 자신의 현재 상태에 별 문제가 없고 하나님이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죄로 인정하지도 않는 상태에서, 즉 전혀 고칠 의향이 없는 사람도 하나님이 그대로 다 받아주신다는 의미일까?   비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들을 못마땅해하는 주요 이유가 기독교인은 위선적(hypocritical) 혹은 비판적(judgmental)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본받지 못하고 “내 모습 이대로”의 은혜의 복음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비난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같이 겉과 속이 다르고, 자기도 지키지 못 할 율법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잘못을 분명히 현대 기독교인들도 반복하고 있는 것을 부인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들이 “내 모습 이대로”의 의미를 오해하기 때문에 그런 비난을 하고 있다고도 생각한다. 성경에서 아가페적인 사랑을 이야기하고 “내 모습 이대로”의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야말로 “무조건적”으로 죄까지도 인정해준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보통 우리가 금언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 그 죄 지은 것에 대해서 처벌을 하면 되는 것이지, 그 사람을 영원히 “죄인”으로 규정하여 옭아매지는 말라는 말이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죄인은 받아주시지만 죄는 받아주시지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 죄를 짓고 나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면 하나님은 무조건 받아주시고 다시 한 번 그에게 희망을 걸고 믿어주신다. 그러나 죄를 지은 사람이 죄를 인정하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데 하나님이 그를 “무조건” 받아주시는 법은 없다. 예를 들어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예수님이 받아주셨는데 그 간음죄까지 받아주셨는가? 아니다. 다시는 간음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받아주셨다. 또 예수님은 옆에서 십자가형을 받는 강도를 천국으로 받아주셨는데 절대 그 사람의 죄를 받아주신 것이 아니다. 그 강도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은 그 회개의 마음을 보시고 그를 천국으로 받아주신 것이다. 그래서 “내 모습 이대로”는 “무조건”의 의미가 아니라,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태도를 전제로 하는 은혜의 메시지라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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