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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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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인의 제사를 거부한 하나님은 불공평한 하나님? Publish on July 06,2015홍삼열
    창세기에 보면 인류의 1대 조상인 아담의 바로 그 다음 대에서 벌써 살인 사건이 일어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아담과 하와에게 가인과 아벨 두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가인이 돌을 들어 아벨을 쳐서 죽였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가인이 아벨에 대하여 분노하였기 때문이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기 때문에 곡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목축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양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신 것이 너무나 분했던 것이다. 납득할 만한 아무런 이유 없이 하나님이 불공평하게 자기를 차별대우한 것이 너무나 분해서 홧김에 동생 아벨을 살해하게 된 것이다.   이 첫 번째 살인 사건을 접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했다. 성경을 읽어보면 특별히 가인이 잘못한 일이 없는 것 같은데 왜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시면서 그에게 큰 모욕감을 주셨을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불가예측성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나쁘게 말하면 원래 하나님은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람을 차별하시는 분이고, 좋게 말하면 사람의 수준으로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당연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한편 어떤 기독교인들은 성경에도 없는 나름대로의 개연성 있는 이유를 첨가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가인이 곡식을 준비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정성을 다하여 드리지 않고 대충 고만고만한 것을 가지고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 것이고 아벨은 양으로 드릴 때 최선을 다해서 최상품으로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으신 것이라는 이유를 댄다. 아니면 이 사건에 특별한 영적 의미를 부여해서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은 신약의 예수님을 예표하는 양으로 희생제사를 드렸기 때문이고 (종종 신약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지칭되었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은 복음의 중심인 예수님 없는 곡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라는 해석을 제공한다. 그런데 이런 류의 해석들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왜냐하면 해석의 열쇠는 제물의 성격이나 종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물을 드린 사람에게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이유는 하나님이 원래 곡물을 싫어하시는 분이기 때문이 아니라 가인이라는 사람을 받지 않으셨기 때문이고, 아벨의 제물을 받으신 이유는 원래 하나님이 양을 좋아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아벨이라는 사람을 받으셨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와는 다르게, 만일 아벨이 곡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가인이 양을 가지고 제사를 드렸다면, 하나님은 여전히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창세기 4:4-5절에 보면 이런 흥미로운 표현이 나온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하나님이 제물을 받으실 때는 그 제물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제물과 그 제물을 드린 사람을 함께 받으신다는 뜻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이 제물을 받으시는 이유는 그 제물 때문이 아니라 그 제물을 드린 사람을 받으셨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를 드리기 원한다면 제물의 종류와 성격에 신경을 쓸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이 받으실 만큼 신실하고 믿음 있는 사람이 되는 것에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11:4절에서도 같은 맥락에서 이 사건을 설명하고 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이유가 바로 믿음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인이 드린 제사와 비교하여 아벨이 드린 “더 나은 제사”는 양으로 드린 제사가 아니라 바로 “믿음으로 드린 제사”인 것이다.   오늘도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중요한 것은 어느 특정 예배형식이 아니라 예배자/사람이다. 예배자가 믿음의 사람이 되면 그가 어떤 예배의 형식을 따르더라도 하나님은 그의 예배를 받으신다. 그러나 예배자가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가 어떤 화려한 방법으로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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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9
    평신도는 성경을 너무 많이 알면 안 되나요? Publish on June 30,2015홍삼열
    교인들이 목사의 설교에 대해서 혹은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질문을 한다. 그럴 때면 성경은 따지지 말고 그대로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혹은 교인은 목사가 성경에 대해 설명해주는 만큼만 믿으면 된다는 대답을 듣는 경우가 있다. 여기에서 좀 더 지나치면 교인이 성경을 너무 많이 알면 위험하다든가 평신도들이 신학을 알면 목사의 목회에 방해가 된다는 이해하기 힘든 반응을 보게 된다. 왜 목회자들이 이렇게 의문을 제기하는 성도들에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까? 잘 생각해보면 이해가 된다. 필자의 경험으로도 보면 평신도들 중에 아주 단편적이고도 제한적인 지식을 가지고 (많은 경우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목사의 성서해석과 신학을 문제 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신학 전반에 대해 전문교육을 받은 목회자의 머리 위에 올라서서 생각하고 행동하려는 사람들까지 있다. 그래서 더 이상 이런 사람들이 생겨나지 않게 하기 위해 교인들에게 “필요한 만큼만” 성경공부도 시키고 교리공부도 시키자는 생각이 굳어질 수 있다. 더 나아가 성도가 교회에서 제공하는 성경공부의 수준을 넘어서 스스로 성경을 연구한다거나 신학서적들을 읽고 자기 나름의 신학체계를 세우는 경우 잘못된 신앙의 집을 세울 위험성이 다분히 있다. 어떤 경우에는 잘못된 성서해석을 통해 이단으로까지 빠질 수 있다. 사실 이단 교주가 된 사람들 중에 처음에는 성경을 깊이 알려는 선한 의도로 시작했다가 마지막에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빠진 경우가 많은 것을 보면, 목회자의 지도를 벗어나서 성경을 공부한다거나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위험의 소지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런 “부작용” 때문에 교인들이 성경을 깊이 알고, 더 나아가 신학을 공부하는 것을 나쁘게 봐야 할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성경을 깊이 아는 것은 목회자들은 물론 성도들에게도 꼭 필요한 것이다. 특히 개신교인들은 성경을 정말 제대로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개신교 운동을 시작한 16세기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원리가 바로 ‘오직 성서로’(sola scriptura)이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에서는 평신도가 성경을 읽는 것을 위험하게 생각했다. 정식 신학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 혼자 성경을 읽으면 잘못 읽게 되고, 그러면 생명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도리어 해를 입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신부가 성경을 읽고 해석해주는 것만 이해하면 신자가 구원을 얻고 구원의 삶을 사는데 충분하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같은 근거에서 일반인들이 쉽게 성경을 읽을 수 없도록 라틴어 성서를 고수하였고 성경이 각국 언어로 번역되는 것을 금지시켰다. 반면에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은 목회자의 것이 아니라 일반 성도들의 것이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성경이 구원을 주는 책이라면 하나님이 일부러 성경을 어렵게 만들어서 전문교육을 받은 성직자만 그걸 읽고 구원받게 하시지는 않았을 거라는 것이다. 이런 이해 하에 종교개혁자들은 모든 일반인들이 자유로이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을 한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개신교 신자들은 성경을 많이 읽고 많이 공부해야 정상인 것이다. 그런데 왜 일부 목회자들은 평신도들이 성경을 많이 공부하여 아는 것을 경계할까? 긍정적인 시각에서 보면, 평신도가 성경을 잘못 읽을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조심시키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마치 어른들이 읽어야 할 것을 아이가 읽어서 잘못되는 일이 없도록 부모가 미리 신경쓰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비판적인 시각에서 보면, 이건 일종의 우민화(愚民化) 정책이다. 교인들에게 필요한 만큼만 가르쳐서 목회자가 하는 일을 아무런 비판 없이 따르도록 만드는 장치인 것이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뜻을 스스로 분별하여 순종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고 목회자의 해석을 통해 전해지는 것만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좋지 못한 정책인 것이다. 이런 경우 목회자가 정통교리를 가르치고 그렇게 가르치는 의도가 선하다면 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목회자가 이단교리를 가르치거나 의도가 선하지 못하다면 이건 너무나 큰 문제인 것이다. 성도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데 성도는 이걸 깨닫지 못하고 그저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다가 마지막에는 멸망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최근에 극성을 부리는 신천지가 추수꾼을 침투시켜서 포교 대상으로 삼는 교회가 주로 근본주의 성향을 지닌 개신교회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스스로 성경을 읽고 깊이 생각하는 훈련을 받지 못하고 목회자가 가르쳐주는 내용만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야 믿음 좋은 신자가 되는 교회문화에서는 성경을 왜곡되게 해석하면서 공격해 들어오는 이단을 막아내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 이는 마치 아직 비판적 사고능력이 없는 미숙한 아이들에게 불순한 의도를 가진 어른들이 접근할 경우 아이들이 그들의 왜곡된 논리를 당해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성경에 대한 좋은 의미에서의 비판적 사고까지 불신앙으로 정죄하면서 무조건 목회자의 권위에 복종한다면 이는 대단히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가정에서도 보면, 부모가 자녀들에게 합당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무조건 부모의 권위에 복종하도록 강요하고 부모가 시키는 일에 절대 토를 달지 말라고 하는 경우, 얼마 동안은 아이가 부모의 뜻대로 잘 자라는 것같이 보인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그게 아닌 것을 알게 된다. 비판적 이성으로 수용할 수 있는 설명이 없는 강요, 설득 없는 무조건적인 복종의 강요는 자녀들에게 건강하지 못한 자아상을 만들어내고 자립심이 없는 인격을 만들어내어 장차 아이가 행복한 인생을 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이다. 인간의 제한된 이성으로 다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 읽고 성령의 빛이 없는 상태에서 읽으면 성경을 제대로 깨달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은 그런 준비 없이 억지로 읽다가 생명을 주는 성경에서 오히려 해를 입게 된다. 그래서 2000년의 역사적 검증을 거친 교회가 성경을 읽은 방식대로 그런 역사적 성경해석을 배운 목회자의 지도하에 성경을 읽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유아의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비판적 이성을 통해 어른의 수준으로 자라서 이단의 공격도 거뜬히 물리칠 수 있기 위해서는 성경을 깊이 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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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인들끼리는 사회법정에서 재판을 하면 안 되나요? Publish on June 30,2015홍삼열
    가끔 교인들 사이에 법적 문제가 발생했을 때 교회 내에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사회 법정으로 가지고 가는 경우가 있다. 더 나아가서 교단 차원에서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잘잘못을 따지기 위해 교단 문제를 사회 법정으로 가지고 가는 경우를 본다. 기독교인으로서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미 초대교회에서도 교인들 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세상 법정으로 가지고 가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6:2-3절에서 이렇게 책망하였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이것은 마지막 날에 구원받은 성도가 주님과 함께 세상을 심판하게 되는 상황을 전제로 하는 말인데, 그런 위치에 있는 성도가 이 세상의 “지극히 작은 일”을 스스로 처리하지 못하고 결국 성도의 심판 아래에 있게 될 세상 사람들에게로 가서 그들에게 판결을 요청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교회 내의 문제는, 더 나아가서 성도 사이의 문제는 교회 내의 기구에서 해결해야지 절대로 세상 법정으로 가서 해결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 성경의 기본 가르침인 것이다. 이런 가르침을 접할 때 우리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니까 현재에도 우리는 이런 저런 상황을 고려할 필요 없이 무조건 교회에게 이런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구하고, 교회가 어떻게 판결을 내려주든지 그것이 마지막 결론이라고 생각하여 무조건 수용해야 할까? 아니면 그런 성경의 가르침은 고대 신정(神政)사회의 단순한 사회 시스템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현대의 복잡한 사회체계와 구성원 간의 세분화된 역할 분담의 상황에서는 잘 맞지 않는다는 논리하에 그런 규정을 사문화(死文化)된 것으로 취급해야 할까? 아니면 성경의 가르침은 영원무궁토록 우리에게 유효하니까 성경에서 그런 가르침을 제공했다면 우리는 그 가르침에 담겨 있는 본질적 원리를 추출하여 그것을 현시대에 맞게 적용해야 하는 것일까? 고린도전서 6장에 기초하여 원론적인 설명을 하자면 교인들은 서로간의 문제를 가지고 세상 법정으로 가지 말아야 한다. 그 이유가 두 가지이다. 첫째는 교회/교인은 ‘신분적으로’ 세상/세상사람보다 우월하기 때문이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2절) 그리스도인은 기본적으로 하늘나라에 속한 사람이고 비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재판을 받을 때 어디에서 관할하는가(jurisdiction)의 차이가 있다. 즉 그리스도인은 비록 세상에 살지만 원래 신분이 하늘나라 소속이기 때문에 교회에서 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이고, 세상 사람들은 원래 소속이 세상이기 때문에 세상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이는 마치 미국 군인이 해외에 파견되어 활동할 때 어떤 범죄의 혐의가 발견되는 경우 종종 현지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대신에 원래 소속인 미국 관할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것에 비교할 수 있다. 둘째로 교인들이 세상 법정에서 서로를 상대로 소송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교회는 ‘윤리적으로’ 세상보다 우월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윤리 수준에 따라 서로에게 소송을 걸어도 되지만 교인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6:7절에 보면 교인들은 서로간에 소송거리가 생겼을 때 차라리 한쪽이 희생함으로써 세상 법정에서 소송이 이루어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교인들 사이에 소송이 일어나는 것 자체가 허물이라는 것인데 그 이유는 성도들은 믿음 안에서 한 가족이 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같은 아버지를 모시는 한 가족의 형제자매들이기 때문에, 옳고 그름의 차원 이전에 서로를 향하여 자기 양보와 희생이 없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 경우 차라리 본인이 불이익을 당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해도 적어도 그리스도인은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신분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세상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교인간의 소송의 문제를 교회 밖으로 가지고 가지 말라는 것이 고린도전서 6장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21세기의 현실을 보면 그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인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 간에 일어나는 사건이 꼭 신앙과 교회에 관련된 것뿐만 아니라 그것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복잡한 형사 민사상의 사건들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사실 고린도전서 6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곳에서 다루는 문제도 이미 교회의 영역을 넘는 사안들인 것이다. 즉 사람들 간에 불의를 행하고 속여 빼앗는 문제를 비롯한 “이 세상의 일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일상에 관계된 분쟁사건들, 신앙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사안들에 대해서도 교회에서 재판권을 행사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맞는 일일까? 교회 정치에 관한 사안이라면 당연히 그 문제를 교회 법정에서 해결하는 것이 맞다. 신앙에 관해서 어떤 것이 정통이고 어떤 것이 이단인지를 판결하는 것도 당연히 교회 법정에서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신앙과 별 상관이 없는 민사, 형사상의 사건은 경우가 다르다. 가령 교회 안에서 성폭력의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자. 그럴 경우 교회 법정에서 사건을 심리하고 판결하고 처벌도 하는 것이 맞는 일일까? 더 근본적인 차원으로 들어가서 성경의 권고를 따른다고 하면서, 피해자에게 세상 법정에 가지 말고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라고 권하면서 그냥 꾹 참고 넘어가라고 하는 것이 맞는 일일까? 교단 정치의 문제나 신앙의 문제를 교회 내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신앙을 이해하지 못하는 비기독교인들에게 가서 판결을 요청하는 것은 수치스런 일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법질서상 교회가 다룰 수 없는 복잡한 민사, 형사 사건들까지도 교회 법정에서 해결하려 하는 것은 현실에 맞지 않는 태도이다. 이런 상황에서 혹시 예수님이라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원칙을 적용하시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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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7
    성형수술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입니까? Publish on April 27,2015홍삼열
    한국이 성형 천국이 된 지가 한참 되었다. 중국인들 중에 성형수술을 받을 목적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기사를 자주 접한다. 또 대학교에서 방학이 끝난 후 새학기가 되면 친구들의 얼굴이 너무나 많이 바뀌어서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그만큼 얼굴성형이 일반화되었다는 말이다. 성형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 중에 이런 것이 있다. 한 중년 여성이 심장마비에 걸렸다고 한다. 그녀는 수술대 위에서 비몽사몽간에 하나님을 만나서 질문을 했다. “이제 제가 죽을 때가 된 겁니까?” 하나님의 대답은 “아니다. 아직 40년이 더 남아있다” 였다. 이 여성은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온갖 종류의 성형수술을 했다. 이유는 앞으로 40년을 더 살아야 할 텐데 최대한 남은 인생을 멋지게 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여인이 마지막 성형수술을 하고 퇴원하던 날에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차에 치어서 죽고 말았다. 하나님 앞에 선 그녀가 따져 물었다. “아직 40년은 더 남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은 예상 밖의 대답을 해주셨다. “미안하다. 네가 너무 변해서 못 알아 봤다. 딴 사람인 줄 알았다!”   현재 나 자신의 모습보다 더 잘 보이고 싶은 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기본 욕망일 것이다. 얼굴 화장을 하는 것, 헤어 스타일을 바꾸는 것, 옷을 차려 입는 것, 혹은 손님들을 초대할 때 집을 깨끗이 청소하는 것 등은 나 자신의 일상의 모습보다 뭔가 약간 더 잘 보여주고 싶은 욕망의 표현들이다. 사실 이렇게 하는 것은 꼭 나쁜 것이 아니라 남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기 위한 최소한도의 예의일 수 있다. 또 사회가 무의식적으로 요구하는 “교양”의 수준에 맞추려는 선의의 노력일 수 있다.   그런데 성경의 입장에서 보면, 진짜 나와 내가 보여주고 싶은 나 사이에 차이가 나는 것은 근본적으로 타락한 인간에게 공통으로 발견되는 가식(假飾)의 발현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겉모습 뒤에 숨으려는 죄인의 모습, 마치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부르실 때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나서지 못하고 나무 뒤에 숨는 모습인 것이다.   성형의 문제에 대해 기본적으로 성경이 말해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외형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는 사실이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사무엘상 16:7) 그래서 신앙인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외면보다는 내면의 영성을 관리하는데 신경을 더 많이 써야 한다. 외모를 아름답게 꾸미고 더 나아가 얼굴을 영구적으로 변형시키는 성형을 하는데 관심을 가지는 것보다 우리의 내면에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이 만들어지도록 힘써야 하는 것이 맞다.   물론 그렇다고 얼굴이나 몸을 관리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몸을 최대한 깨끗이 하고 최상의 건강의 상태, 미의 상태를 유지하도록 힘써야 한다. 또 의료적인 이유로 꼭 성형이 필요한 경우 성형을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사고를 당해서 얼굴이 심한 화상을 당했다던가 몸이 비정상적으로 뒤틀어졌을 경우, 턱이 비뚤어졌거나 치아가 잘못 자라서 얼굴 형태가 일그러진 경우, 혹은 태어날 때부터 발가락이나 손가락이 기형인 경우, 이런 종류의 문제를 교정하기 위해서는 성형이 필요할 수 있다. 특히 유년기나 청소년기에 그런 몸의 문제로 인해 인격발달에 장애가 생길 위험이 보일 경우 당연히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성형을 해주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이해할 만한 이유가 아니라 외모지상주의에 편승해서 성형을 통해 자기만족을 추구하려 한다거나, 아니면 남들은 다 괜찮다고 하는데 스스로 자기비하에 빠져서 자기는 관상이 나빠서 따돌림을 당하고 인생에 성공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성형을 시도한다면 이는 건강하지 못한 모습이다. 그런 이유로 성형을 하는 사람은 사실 얼굴이나 몸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인 것이다. 건강하지 못한 자화상이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 한 번 성형을 한 사람이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성형을 계속 시도하다가 몸이 완전히 망가지는 예들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성형을 하고 싶을 때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인정하실 만한 정당한 이유와 동기가 있는 것인지를 먼저 심각하게 생각하고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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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할 때 꼭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하나요? Publish on April 14,2015홍삼열
    기독교인들은 대개 기도를 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고 마친다.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6:23-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자 그렇다면 이 “예수님의 이름으로”가 정확히 무슨 뜻인가? 기도의 마지막에 꼭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란 구절을 붙여야 하나님이 들어주시고, 그렇지 않으면 기도가 무효라는 뜻일까? 또 자기 식대로 열심히 기도하고 나서도 무조건 예수님의 이름만 붙이면 하나님이 그 기도를 다 들어주신다는 뜻일까?   우선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라고 명령하는 것이 기도뿐이 아닌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의 이름은 우리가 기도할 때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의 영역에 적용되어야 할 신앙의 근본원칙인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기적을 행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했고, 세례를 베풀 때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고, 예배를 드릴 때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을 할 때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했던 것이다. 사실 성경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모두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골로새서 3:17절,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그러면 우리가 왜 이렇게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우리는 죄악으로 이미 죽은 몸이지만 예수님의 희생의 대가를 치르고 얻어진 귀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6:19-20,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나의 생명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에 성도는 그렇게 변화된 신분에 걸맞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제 범위를 좁혀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끝을 맺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름 자체에 마력이 있어서 하나님도 꼼짝없이 이런 기도를 들어주셔야 하기 때문일까?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에 합당한 기도를 드릴 때,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기도는 우리가 필요할 때 마치 도깨비 방망이를 두드리는 식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도구가 아니다. 그 반대로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에 나의 뜻을 굴복시키고 하나님께 순종하겠다는, 즉 하나님의 뜻에 나의 뜻을 맞추어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내용의 기도를 한다면 이건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을 기도의 마지막 부분에 갖다 붙여도 그건 “나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이지 절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가 아닌 것이다. 그런 기도는 당연히 하나님이 들어주실 수 없는 기도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이름”이란 표현이 아니라 기도의 실제 내용이다. 예를 들어서 차안에서 속으로 기도를 하는 도중에 갑자기 전화가 와서 기도를 그칠 경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이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한 기도는 다 무효가 될까? 아니다. 기도의 실제 내용이 “예수님의 이름”에 부합한 기도였으면 그게 바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 것이 되어서 하나님이 들어주신다. 그러나 아무리 기도를 근사하게 하고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해도 실제 내용이 “내 맘대로” “내 이름으로” 하는 기도였다면 그건 하나님이 들어주실 수 없는 기도인 것이다.   따라서 기도할 때 일부러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을 뺄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꼭 그 어구가 들어가야 하나님께 전달되는 기도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나님은 쩨쩨하게 그런 문구 하나를 가지고 문제 삼으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예수님의 이름에 부합하게 기도를 했다면 하나님은 그 내용을 보시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사정상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마치지 못했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 내면의 의도와 기도의 실제 내용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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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지으면 절대 용서받지 못하는가? Publish on April 14,2015홍삼열
    기독교는 용서의 하나님을 믿는다. 우리가 아무리 심각한 죄를 지었어도 자신의 죄를 깨닫고 진심으로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다 용서해주신다고 믿는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하나님께서 글자 그대로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외가 있는 것 같은 구절들이 있다. 히브리서 6:4-6절이 좋은 예이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하늘의 세계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들어가고 성령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이 나중에 되돌아서서 타락하는 경우에 다시 용서의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행위는 곧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고 예수님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회생 불가능의 상태에 빠지는 것을 마가복음 3:28-29절에서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여기서 말하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 즉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육신적으로, 정신적으로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악한 귀신 들린 사람들에게서 귀신들을 쫓아내어 주셨을 때,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종교 지도자들이 그것을 사탄의 역사라고 주장하며 예수님 안에는 사탄의 왕인 바알세불이 들어 있는 것이라고 비난했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명백한 성령의 역사를 가지고 그걸 뒤집어서 사탄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향해 그들이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런 상태에 빠진 사람은 영원히 용서받을 가망성이 없고 오직 멸망을 기다리는 것 밖에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총이 미치지 못하는 죄의 영역이 있다는 뜻이 아닌가? 또 그렇다면 예수님의 대속은 완전한 대속이 아닌 것이 되지 않는가?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진심으로 회개하기만 하면 무슨 죄를 지었든지 무조건 용서를 받는다.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는 글자 그대로 “완전한” 은혜이기 때문이다.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고 모든 죄에 적용되는 은혜인 것이다. 그러면 마가복음 3:28-29절에 나오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사람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고 한 구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히브리서 10:26-27절에서 해답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여기에 보면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게 되는 경우를 말하는데 그것은 “짐짓” 즉 “고의적으로” 죄를 범하는 경우인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난 후에도 고의적으로 계속 죄를 짓는 사람은 가망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경우는 인간의 연약함이나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의도적으로 대적하는 악의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은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도 않고 돌아서지도 않는다.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용서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회개를 하지 않는데 어떻게 용서가 있을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을 거역함으로써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사람은 절대 용서를 받지 못한다고 할 때, 그 의미는 하나님이 회개하려고 하는 사람의 기도를 억지로 듣지 않고 무조건 그를 지옥에 보낸다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고의적으로 죄를 짓는 사람은 스스로 죄를 회개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히 하나님의 용서도 있을 수 없게 된다는 뜻인 것이다.   하나님께 용서 받지 못하는 죄도 있는가? 이론적으로는 없다. 주님의 보혈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죄의 영역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있다. 스스로 용서의 은혜를 거부하는 사람, 즉 고의적으로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스스로 용서받을 길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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