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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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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도 사람을 속이시나요? Publish on September 27,2016홍삼열
    열왕기상 22장에 보면 하나님이 거짓말하는 영을 시켜서 북이스라엘의 선지자들에게 잘못된 것을 예언하게 하신다는 내용이 나온다. 당시 북이스라엘 왕은 악명 높은 아합왕이었는데 그가 아람 나라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 했다. 마침 사돈을 맺은 유다의 왕 여호사밧이 방문하고 있을 때였는데, 아합은 그에게 함께 전쟁을 일으켜서 옛날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자고 제안하였다. 여호사밧은 좋은 생각이라고 하면서 자기도 돕겠다고 하는데 우선 하나님께 물어보자고 하였다. 이때 아합은 언제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예언해주는 어용 선지자 400여 명을 불러서 하나님의 뜻이 뭐냐고 물었다. 이때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반드시 승리하게 하실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서 전쟁을 일으키라고 하였다.   이때 여호사밧이 다른 선지자는 없냐고 물을 때, 아합이 말하기를 딱 한 사람 미가야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언제나 불길한 예언만 해주는 사람이어서 자기가 그를 미워한다고 하였다. 여호사밧은 그래도 그 사람을 불러서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물어보자고 해서 아합이 그를 불렀는데, 예상대로 그는 하나님이 이 전쟁을 통해서 아합을 죽이고 이스라엘이 패하게 하실 거라는 불길한 예언을 해주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본 하늘에서 있었던 회의의 한 장면을 말해주었다. 하나님께서 누가 가서 아합을 꾀어 전쟁에 나가서 죽게 하겠느냐고 물으니, 한 영이 나와서 제가 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다고 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결국 아합은 선지자 미가야의 말을 무시하고, 거짓의 영이 아합의 400여 명의 어용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거짓 예언해준 것을 믿고서 전쟁터에 나갔다가 그곳에서 죽고 이스라엘이 패하게 된다.   이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는 의문이 생긴다.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정말 거짓의 방법도 사용하시는 분일까?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은 하나님에게는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은 언제나 참되신 분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렇게 성경에 하나님이 거짓의 방법을 사용하신 것 같은 표현을 읽을 때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성경의 독특한 어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성경은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실제로는 아닌데) 마치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어떤 악을 행하시는 것처럼 표현한다. 예를 들어서,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지 않고서 계속 그들에게 극한 고난을 줄 때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셔서 그렇게 되었다는 표현이 여러 번 등장한다. 또 이스라엘의 주변 강대국이 침공하여 이스라엘에게 큰 비극이 일어날 때 하나님께서 그 강대국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징벌하신 것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정말 그렇게 능동적으로 이스라엘에게 고난을 주시고 악을 행하셨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런 차원에서 그런 일들도 결국 하나님이 행하신 것이라고 표현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실제 내용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는 표현의 실제 내용은 하나님이 선한 바로를 강요하여 그의 마음을 억지로 완악하게 만드셨다는 뜻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자기 마음을 완악하게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가 원하는 바대로 이루어지도록 허용하셨다는 뜻이다. 이미 자기 마음을 완악하게 만든 바로를 그냥 내버려두셨다는 의미인 것이다. 또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주변 강대국들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벌주셨다는 표현도 실제 내용은 하나님이 항상 말씀에 순종하는 선한 이스라엘을 부당하게 벌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이 스스로 멸망의 길을 선택해서 갈 때 그걸 그냥 놔두셨다는 의미인 것이다. 스스로 멸망의 길을 가는 것을 허용하셨다는 뜻이다. 물론 그들은 스스로 살기 위해 그 길을 선택했을 테지만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그들이 스스로의 꾀에 넘어가는 것을 보고 계셨던 것이다. 이렇게 성경은 사람의 악한 의도와 상관없이 그것까지도 사용하셔서 당신의 섭리를 이루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이런 식으로, 즉 하나님이 능동적으로 어떤 악한 일을 행하신 것 같은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다.   마태복음 8:28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무덤 사이에 거하는 귀신 들린 사람 두 명을 만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들은 너무나 사나워서 다른 사람들이 그곳을 지날 수가 없었다. 그들 안에 있는 귀신들은 예수님을 보았을 때 더 이상 그들 속에 지낼 수 없음을 깨닫고 예수님께 요청하였다. “저희들을 쫓아내시려거든 저기 있는 많은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이때 예수님은 명령형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가라”는 표현만 보면 불쌍한 돼지 떼에게 귀신을 들여보내신 분은 예수님이다. “가라”고 능동적으로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이 능동적으로 그런 악을 행하신 것이 아니라 허용하셨을 뿐이다. 또 요한복음 13:27절에 보면,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내가 떡을 한 조각 주는 사람이 나를 팔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유다에게 떡을 건네주시고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표현만 보면 예수님이 유다에게 죄를 지으라고 명령하신 것이 된다. 그러나 실제 내용은 이미 사탄에게 마음이 팔려서 예수님을 배반하려고 결심한 유다에게 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고 허용하신 것이다. 전체 상황을 아시고 전체를 섭리하시는 예수님은 유다의 악한 선택까지 사용하셔서 온 인류를 위한 구원의 계획을 이루시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능동형 혹은 명령형으로 어떤 악행을 행하신 것처럼 성경에서 표현할 때, 그것은 섭리의 하나님에 대한 기본 믿음 때문에 그렇게 표현된 것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열왕기상 22장의 이야기를 읽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합을 속이신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이미 사탄에게 팔려 있는 아합이 원하는 바대로 허용하신 것뿐이다. 즉 거짓 선지자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육신의 욕망을 채워왔던 그에게 하나님은 그 동일한 방법을 통해서 스스로 멸망에 이르도록 놔두신 것이다. 스스로의 꾀에 넘어가도록 하신 것이다. 정말 하나님이 그를 속이기를 원하셨다면 참 선지자 미가야를 통해 하늘에서 이루어진 일을 미리 알려주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 거짓을 사용하시지 않는다. 단지 스스로 사탄에게 팔려서 죄악의 길을 선택한 사람이 자신의 꾀에 넘어가도록 허용하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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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시대의 일부다처제는 하나님의 뜻이었나요? Publish on August 30,2016홍삼열
    구약성경에 보면 여러 아내를 둔 사람들 이야기가 나온다. 그것도 악한 사람들이 여러 아내를 둔 경우 말고 우리가 신앙의 모범으로 존경하는 사람들, 예를 들어 아브라함, 야곱, 다윗 같은 위인들이 여러 아내를 두었다는 기록이 성경에 나온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9:4절 이하에서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를 하나님의 뜻으로 가르치신 것을 안다. 창세기 2장 21절 이하에 나오는 대로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이고 이것을 통해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부일처제인 것이다. 물론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게 된 상황은 사람들이 구약의 율법을 근거로 마구잡이로 이혼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원래 하나님의 뜻은 그렇지 않다고 하시면서 이혼을 하지 말라고 하시고, 한 남자와 여자의 결합으로서의 결혼, 즉 영원한 일부일처제를 강조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신약시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구약시대에는 사람들에게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를 정상적인 사회규범으로 허락하신 것이 아닐까? 우선 아브라함의 예를 보자. 아브라함이 사라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할 때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자기 몸종인 하갈을 후처로 들여보냈다.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해 아들을 얻으면 그 아들은 정식으로 사라의 아들이 되어 대를 잇는 것이 당시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또 창세기 29장에 보면,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여 7년 동안 외삼촌 라반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마침내 결혼식을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결혼식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야곱 옆에 누워 있는 사람은 라헬이 아니라 그의 언니 레아였다. 너무나 놀라고 분한 마음에 당장 라반에게 가서 왜 자기를 속였냐고 따졌다. 이때 외삼촌 라반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우리 지방에서는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시집 보내는 예가 없다. 그러니 이렇게 하자. 일주일 후에 네가 좋아하는 라헬과 결혼식을 올려줄 테니 앞으로 7년 더 나를 위해서 일을 해주어라.” 이 구절을 보면 당시에는 일부다처제가 정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라반이 아무 거리낌없이 자기 두 딸을 야곱에게 줄 생각을 하지 않았겠는가?   한편 신명기 21:15-17절에 보면 여러 부인들을 통해 낳은 자식들 중에 누구에게 장자권을 주어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법이 나온다. 어느 한 남자에게 두 명의 아내가 있는데 그가 미워하는 아내로부터 아들이 태어나고 그 다음에 그가 사랑하는 아내로부터 다른 아들이 태어났다면 장자권은 무조건 먼저 태어난 아들, 즉 그가 미워하는 아내로부터 태어난 아이에게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성경구절을 읽을 때 깨닫는 것이 이런 법의 존재 자체가 이미 일부다처제가 시행되고 있고 있는 현실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일부다처제를 정상적인 사회규범으로 인정하셨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 아닐까?   성경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일부다처제는 어떤 사람에게도 어느 경우에도 하나님의 원 뜻이 아니다. 성경의 결혼관은 철저히 창세기 2:21절 이하에 나오는 일부일처제이다. 만일 하나님이 구약시대에는 일부다처제도 좋다고 생각하셨다면 그것이 성경 어디엔가는 분명하게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구절이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에는 창세기 2장의 말씀을 따라서 일관되게 일부일처제를 강조하였다. 우선 아브라함이 하갈을 후처로 받아들인 사건을 생각해보면,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께 불순종의 죄를 지은 것으로 설명한다. 두 번째 부인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이다. 그런 이유로 현재까지 이삭 계열과 이스마엘 계열이 서로 목숨 걸고 싸우는 비극이 계속되는 것이 아닌가? 또 잠언 5:15절 이하에도 보면, 아내를 우물물과 샘물에 비유하면서 이걸 절대 소홀히 하지 말고, 남과 나누지도 말고, 젊어서 취한 아내로 만족하며 살라는 교훈이 나온다. 성경은 일관되게 일부일처제를 가르친다.   따라서 구약성경에 여러 아내를 둔 사람들의 예가 나온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걸 옳은 것으로 인정하셨다고 이해하면 안 된다. 성경은 단지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일어난 현실 이야기를 기록한 것뿐이고 하나님은 당시의 낮은 영적 수준을 감안하여 일부다처제를 참아주신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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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단 목사를 통해서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가? Publish on August 23,2016홍삼열
    우리 주변에 보면 이단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이 있는데 그들은 구원받지 못하고 다 지옥에 갈까? 과거에 이단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지금은 정통 교회에 다니는 사람의 경우 이단 교회에서 받았던 은혜는 다 가짜일까? 정통 교회인 줄 알고 가서 한참 은혜를 받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교회가 이단 교회로 판명되었다면 그런 교회에 가서 은혜받은 나는 신앙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인가?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어떤 목회자의 설교를 듣고 큰 깨달음을 얻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윤리적으로 대단히 문제 있는 사람이었다면 하나님이 그때 주셨던 것으로 생각되는 은혜는 다 가짜일까?   우선 우리는 이단 교회와 그런 교회에 다니는 교인을 구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어떤 교회가 이단이 되는 것은 초대교회 이래로 모든 정통 교회가 믿고 고백한 신앙고백에 동의하지 않고 기독교의 기본 교리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단 교회에 나가는 것은 꼭 그 교회가 가르치는 잘못된 교리를 믿기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충분히 다른 이유로 이단 교회에 나갈 수 있고, 개중에 이단 교회에 다니면서도 정통 교리를 믿고 있을 수도 있다. 물론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하다. 마치 썩고 냄새나는 웅덩이에서 건강하게 살아 있는 물고기를 찾는 것만큼 이단 교회에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신자를 찾기가 힘들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가능성을 완전히 닫아 놓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누구를 구원하실 지는 우리가 짐작은 해도 절대 단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재 상황에서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느 교회의 이단성이 심각하면 할수록 그런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구원받을 확률은 상대적으로 작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같은 논리를 정통 교회에 적용하면 아무리 정통 교회에 다닌다고 해도 그런 교회에 다니는 교인이 자동으로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정통 교회에 다니면서도 이단 사상을 가지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단지 정통 교회는 살아있는 물과 같아서 그 안에는 죽은 웅덩이와는 달리 건강하게 살아있는 물고기/영혼이 상대적으로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단 교회는 썩은 웅덩이와 같기 때문에 이단 교회 혹은 이단 목회자를 통해 전달된 지식은 구원에 이르는 건전한 지식이 아닐 확률이 높다. 그런 통로로 은혜 받은 사람은 자신이 올바른 교리를 배웠는지를 꼭 확인할 필요가 있다. 자신은 천국의 복음을 이해했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지옥의 가르침에 현혹되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윤리적으로 문제가 많은 목회자를 통해 전달된 가르침은 판별하기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런 목회자가 설교하는 내용은 적어도 겉으로 볼 때는 이론적으로 큰 문제가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들의 문제는 대개 잘못된 성경 이론이 아니라 위선적인 삶에 있다. 물론 정말 악질적인 사람은 성경의 의미를 직간접적으로 왜곡해서 자신의 불법을 정당화하겠지만 적어도 공개적인 설교의 자리에서까지 그렇게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따라서 비윤리적이라고 밝혀진 목회자를 통해 은혜를 체험했다면 그 사실 자체만으로 무조건 자신이 받은 은혜를 부인하거나 의심할 필요는 없다. 그 가르침이 교리적으로 건전한지 아닌지를 따져서 건전하지 않은 경우에만 문제의식을 가지면 된다. 어쨌든 하나님 앞에서는 100% 윤리적으로 완전한 목사는 있을 수 없고, 그런 이유로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부족함을 넘어서 역사할 수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23:3절에 보면 우리가 바리새인의 가르침과 행위를 구분해서 그들의 가르침은 받아들이지만 행위는 받아들이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바리새인들은 말만 잘 하지 그 말대로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문제는 잘못된 신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학대로 행동하지 않는 데 있다. 이럴 경우 사람들이 바리새인의 가르침에서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만 않으면 그들의 가르침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위선 때문에 지옥에 간다. 그러나 그들의 “정통적인” 가르침을 받아서 그 가르침대로 순종하는 사람은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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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신자는 절대 판단하지 않는가? Publish on August 08,2016홍삼열
    예수님의 산상설교에 보면 남을 판단/비판하는 것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나온다. “비판(krino)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태복음 7:1-2) 따지기를 좋아하고 남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가 남에게 하는 것보다 더한 비판을 받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본인은 비판 받을 일이 없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정반대로 더 큰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예수님은 아주 충격적인 표현을 들어서 강조하셨다. 남을 비판하는 행위는 마치 자기 눈 속에 들이 있는 대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 속에 있는 아주 자그마한 티를 보고 그걸 가지고 판단하는 꼴이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남들은 이 사실을 다 아는데 자기만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정신 차리게 하기 위해 예수님은 그들을 위선자로 부르시며 아주 강하게 경고하셨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비슷한 내용이 야고보서에도 나온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krino)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야고보 4:11-12) 하나님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오히려 비방하고 이웃의 흠을 잡아 판단하면 결국 그것을 금하는 율법을 무시하고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성경구절들에 의하면 하나님 앞에 진실한 신자는 절대로 남을 판단하면 안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당장 우리에게 이런 의문이 생긴다. 분명히 누군가 잘못된 일을 하고 있다면 그걸 잘못으로 판단하고 그것을 교정해주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아닐까? 잘못된 것을 보고도 그냥 넘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성경에 보면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구절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악을 행할 때 신자는 선과 악을 구분하여 이 둘 사이를 판단해야 한다는 구절도 많이 나온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5:12절을 보자.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또 15절에 이렇게 이어진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우리가 정말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면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고 모든 것을 그냥 좋게만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 아니다. 정반대로 우리는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 자신을 위해서 옳은 것을 선택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옳은 것을 선택하도록 독려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도 옳고 그름을 판단하셨다.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판단의 연속으로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의 잘못된 종교 시스템에서부터 시작하여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 율법에 대한 잘못된 해석, 개인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 박은 죄성, 입의 고백과 행동의 불일치 등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셨고 우리에게도 옳은 것을 선택하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따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역시 교회와 세상에 대해 판단하였다.   결국 이렇게 보면 판단은 가치 중립적인 행위, 즉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이성의 역할인 것이다. 그걸 악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면 나쁜 판단이 되는 것이고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면 좋은 판단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 똑같은 판단을 해도 남을 살리려는 선한 목적으로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도구가 된다. 그러나 남을 죽이기 위한 목적으로 한다면 아무리 합리적인 비판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옳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더 나아가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세상에 대하여 올바로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건강한 판단이 없어지면 교회도 타락하고 세상도 타락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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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심은 죄인가? Publish on July 31,2016홍삼열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가지는 이유 중 하나가 기독교는 모든 종류의 의심을 정죄하고 무조건 교회의 가르침을 믿으라고 강요한다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따져서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의심하지 말고 믿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거고 믿음이 없으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일종의 억압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교회에 다니는 기존 신자들 중에서도 역시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이런 저런 불이익의 위험성을 고려하여 그런 생각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의심이 정말 죄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마음속에 남는 것이 현실이다.   의심을 죄로 규정할 때 주로 사용하는 성경은 요한복음 20장에 나오는 도마의 이야기 부분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 자리에 마침 도마가 함께 있지 않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시고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면서 복음전파의 사명을 맡겨주셨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제자들은 도마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나타나셨다고 알려주는데 이때 도마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했을 때 특별히 놀라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단지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자기가 직접 과학적 관찰을 하기 전에는 판단을 유보하겠다는 뜻이다.   이 일이 있은 지 일 주일이 지났다. 도마가 다른 제자들과 함께 방에 들어와 있을 때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그들 앞에 나타나셨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께서는 도마를 책망하지 않으셨다. 믿음이 없다고, 의심은 나쁜 거라고, 절대 의심하지 말고 무조건 믿으라고 그를 다그치지 않으셨다. 대신 그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의 의심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고 그의 궁금증을 풀어주셨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의심하는 도마에게 주신 말씀, 즉 부활한 몸을 직접 만져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에게 가능한 방법으로 사실 여부를 검증하고 의심의 문제를 해결하라는 격려의 말씀인 것이다. 이에 도마는 예수님께서 진실로 부활하신 것을 확인하고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란 고백을 했고, 주님은 그에게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이 되는 진리를 가르쳐주셨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신앙의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보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믿는 것이 먼저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앙의 세계에서는 경험적 증명이 가치가 없는 것일까? 신자는 의심하지 말고 무조건 믿어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만일 그래야 한다면 우리는 이단에 대해서 무방비가 될 것이다. 신자는 교회의 가르침을 무조건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이 올바른 것인지 확인하는 “건전한 종류”의 의심을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의심이라고 해서 다 나쁜 것이 아니라 신앙에 도움이 되는 의심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긍정적으로 보면 의심은 신앙생활에 필수적인 이성(理性)의 일부인 것이다.   사사기 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부르실 때의 장면이 나온다.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부르셨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인지 아니면 어떤 사악한 귀신이 천사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것인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께 증명을 요구하였다. 그때 천사는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기드온이 준비한 제물에 대었는데 이때 불이 바위에서 나와서 그 제물을 다 태우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 다음 기드온이 미디안과 아말렉에 대항하여 전쟁하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을 때 재차 하나님께 증명을 요구하였다. 양털 한 뭉치를 마당에 둘 테니 다음날 새벽에 이슬이 양털에만 내리고 주변 땅은 바싹 마르게 해달라고 요구했는데 새벽에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 다음 날에 그는 다시 한번 증명을 요구했는데 이번에는 정반대로 주변 땅에는 이슬이 내리고 양털은 바짝 마르게 해달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대로 응답해주셨다. 이로 보건대 의심이라고 다 나쁜 것이 아닌 것이다.   의심하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다. 사실 마음속에 의심이 없으면 발전이 없다. 사람의 마음속에 자연히 일어나는 의심의 사항들을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해결 받을 때 더욱 믿음이 튼튼해진다. 그러니 마음속에 의심이 생길 때 자신이 “신앙의 시각”을 가지고 있다면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그 의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할 것을 권한다. 끝까지 진리를 찾는 자세를 가지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앙의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정기적으로 기도도 하고 성경공부도 열심히 하기를 바란다. 그러면 의심의 문제들이 많이 해결될 것이다.   또한 우리 주변에 의심하는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을 정죄하기보다는 사랑으로 용납하는 자세를 가지기를 권한다. 예수님께서 의심하는 도마를 어떻게 대우하셨는가? 그를 무시하거나 책망하지 않으시고 사랑의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가셨다. 사실 의심하는 도마에게 주님께서 다시 나타나셨다는 것은 그 자체로 도마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받아주셨다는 뜻이다. 받아주셨기에 다시 그에게 나타나셔서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신 것이다.   예수님의 관심은 도마같이 의심하는 자를 제자그룹에서 몰아내서 “순수한 믿음”의 그룹을 유지하는 데 있지 않았다. 예수님의 관심은 그 의심하는 도마를 어떻게든 도와서 다시 믿음의 자리로 회복시키는 데 있었다. 따라서 우리도 현재 우리 주변에 의심하는 분들에 대해 비판이나 정죄의 태도보다는 사랑으로 용납해주는, 이해해주는 태도를 지녀야 할 것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약간이라도 의심의 말을 하면 믿음 없는 사람으로 낙인 찍히는 것이 두려워 절대 그런 말도 안 하고 또 서로 간에도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데 이것은 사실 아주 불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의심이 있고 질문이 있어야 신앙이 성장하기 때문이다. 사실 마음속에 아무런 질문도 없고 결코 질문하는 법이 없는 학생이 공부 잘하고 나중에 큰일 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는가? 질문이 많아야 많이 배우는 법이다. 기독교 신앙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좋은 의미에서의 의심이 필요하다. 따라서 의심을 두려워하지 말고 신앙의 시각을 가지고 계속 의심의 문제와 씨름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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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룩성을 잃어버린 교회를 계속 다녀야 하나요? Publish on June 20,2016홍삼열
    교회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자연히 다른 일반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이 똑같이 발생한다. 그런데 교회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할 때면 교회 내적으로 외적으로 지대한 관심이 모아진다. 왜냐하면 교회는 일반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함이 기대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교인들도 그걸 기대하고 교회 밖의 비기독교인들도 똑같은 것을 기대한다.   그런데 우리가 쉽게 접하는 미국과 한국의 현실을 보면 거룩성을 잃은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인들의 충격적인 모습이 자주 매스컴에 오르내린다. 정치적, 경제적 부정으로 인해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킨 사람들 중 교회 중직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심지어는 가장 거룩해야 할 목회자들도 일반 사람들이 상상하지도 못할 그런 정도의 심각한 성적, 사회적, 경제적 중죄를 저지르는 것을 볼 때 많은 사람들이 실망한다. 이제는 실망감이 극에 달해서 기독교의 거룩성에 대한 기대감마저 없어진 느낌이다.   물론 우리는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변명할 수 있다. 어떤 비윤리적인 의사가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 발각되었다고 해서 의사들 전체가 다 그렇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몇몇 비윤리적인 기독교인들이 악행을 저지른다고 해서 기독교인들이 다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고 변명할 수 있다. 대다수는 선하고 거룩한 사람들인데 “예외적인” 미꾸라지가 맑은 물을 흐려 놓았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정말 미꾸라지 한 두 마리가 문제일까? 그렇다면 교회가 제도적으로 그런 사람들을 징계하고 전반적인 거룩성을 유지하면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 심각한 고민이다. 당장 내 눈앞에 윤리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이 멀쩡히 교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더 나아가 심각한 죄를 저지른 목회자가 죗값을 치르지 않고 계속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많은 사람들이 절망감에 빠진다. 정말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라면 예수님의 거룩함을 따라 그 모습도 거룩해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것을 볼 때 이런 상태에서 교회를 계속 다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에 이미 같은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성 어거스틴이 있다. 어거스틴은 당시의 교회 모습을 보면서, 이 모습 그대로는 예수님이 만드신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교회를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현재의 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늘의 교회” 즉 완전한 교회가 아니라, “보이는 교회” 즉 좋은 곡식과 가라지가 혼합된 형태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13:24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라지와 곡식의 비유를 말씀해주셨다. 천국은 마치 좋은 씨를 밭에 뿌린 것과 같은데 사람들이 잘 때 사탄이 와서 곡식 가운데 몰래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처음 곡식을 뿌릴 때는 좋은 곡식만 자랄 것으로 기대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곡식과 더불어 가라지도 자라는 것이 보인다. 그래서 하인들이 주인에게 의견을 낸다. 우리는 좋은 곡식을 심었지만 사탄이 와서 몰래 가라지를 뿌려서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우리가 가서 당장 가라지들을 다 뽑아버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때 주인이 뭐라고 대답하는가?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좋은 곡식까지 뽑을 위험이 있으니까.”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면 마지막 추수 때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와서 가라지는 거두어 불사르고 곡식은 모아서 곳간에 넣게 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해 가르치시는 것이 무엇인가? 이 땅의 교회는 불완전한 교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완전한 교회는 마지막 심판 이후에야 모아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거스틴의 표현대로 이 땅의 “보이는 교회”는 언제나 불완전하다.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는 모습이다.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섞여 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이 땅에서 완전히 거룩한 교회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 교회의 상태에서 누가 정말 구원받은 알곡이고 누가 구원받지 못한 가라지인지를 모른다. 그러나 마지막 때가 되면 이 둘이 확연히 구분되는데 그때에야 비로소 온전한 알곡만으로 이루어진 “보이지 않는 교회” “진짜 교회”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현재 교회의 모습, 교인들의 모습을 보고 지나치게 절망할 필요는 없다. 아직 마지막 심판의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의 교회는 필수적으로 가라지들이 섞인 불완전한 가시적 교회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가시적인 교회가 온전한 거룩을 지향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이 땅의 교회는 어차피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냥 현실에 만족하며 체념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교회는 아무리 부족하더라도 여전히 거룩하신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지상의 유일한 교회이기 때문이다. 불완전하나마 우리는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님 때문에 이미 거룩한 교회인 것이고, 실제적으로도 우리는 그런 거룩한 교회가 되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데살로니가전서 5:23-24)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온전히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도 우리가 한 순간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다시 강림하실 때까지 그 거룩의 상태를 지속하는 것이고, 이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부르심인 것이다. 즉 교회의 존재 목적인 것이다.   현재의 교회는 완성품이 아니라 거룩을 향해 끊임 없이 자라가는 현재 진행형이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당연히 예수님의 교회에는 죄인들이 들어와 있어야 하는 것이고 기독교인들은 매일의 회개를 통해 주님의 거룩을 배우고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교회가 거룩하기 때문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같이 거룩해지기 위해서 다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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