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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3월 13일 2023년 Publish on March 15,2023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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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83회 작성일 23-03-15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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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떽쥐베리의 작품 속에서 어린 왕자는 조종사가 그린 모자 그림을 보고서 단박에 코끼리를 삼킨보아뱀이라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어른들은 모르는 상상과 순수의 세계를 어린왕자는 볼 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린 왕자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득도한 성자의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신선하게 인식한다고 해서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기발한 발상과 해박한 지식이 늘 비례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보아뱀 속의 코끼리를 생각해 낸 어린왕자도 정작 자기 별에 있는 장미꽃의 존재에 대해서는 난딱 깨우치지 못합니다. 어디에선가 날아와 싹을 틔우고 자라나 피운 꽃은 어린왕자에게 여간 까탈스러운 존재가 아닙니다. 바람막이를 해달라, 유리덮개를 씌워 달라며 답작이는 꽃에 어린왕자는 마음이 이내 상해 버립니다. 그래서 실망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다른 별로 여행을 떠난 어린 왕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모두가 하나같이 어린 왕자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어른들의 모습일 뿐입니다.


그러다 아무도 살지 않는 사막에서 뱀을 만난 어린 왕자는 자신의 ‘쓸쓸한 감정’을 고백합니다. 그 때 뱀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도 외롭긴 마찬가지라고 알려 줍니다. 쓸쓸함의 원인은 상대가 없어서가 아니라, 관계의 부재 때문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이를 통해 어린 왕자는 자신의 별에 다 두고 온 꽃이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자기만의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작은 여우의 말대로 꽃을 위해 자신이 소비한 시간 만큼 자기에게 소중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값없다는 말은 그만큼 소중하다는 의미입니다. 한 생명을 위해 아낌없이 내 주신 영원한 시간을 생각하면 당연한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시대는 하나님의 은혜를 진짜로 값없이 여기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곤 합니다. 도저히 갚을 수도 없는 그 큰 은혜를 현실의 가치 보다 값싼 연민 정도로 매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하나님에게 자신의 시간을 소비하는 데에도 인색합니다. 데면데면하며 쉽게 눈길을 딴 데 두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서로 간에도 쓸쓸한 마음을 호소하며 헛헛한 세상을 염려하는 소리가 제법 커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고 사람들도 서로 사이 좋게 지내는 법을 잊은 결과입니다. 소중함을 잃어버린 세상 만큼 쓸쓸한 삶이 또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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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양칼럼] 5월 22일 2023년 Publish on May 26,2023관리자
    탈무드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랍비가 제자에게 묻습니다. "두 아이가 굴뚝 청소를 하고 나왔는데 한 아이의 얼굴은 시커먼 그을음이 묻어 있었고, 다른 아이의 얼굴에는 그을음이 없었네. 그렇다면 두 아이 중에서 누가 얼굴을 씻었겠는가?" "그야 물론 얼굴이 더러운 아이겠지요." 제자의 대답에 랍비는 고개를 저으며 말합니다. "그렇지 않아. 얼굴이 더러운 아이는 깨끗한 아이를 보고 자기 얼굴도 깨끗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씻지 않지. 하지만 얼굴이 깨끗한 아이는 얼굴이 새까매진 아이를 보고 자기 얼굴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씻는다네." 이 대답을 한 후, 랍비는 뜬금없이 제자에게 똑같은 질문을 다시 던졌습니다. 그러자 앞서 스승의 대답을 들은 제자는 겸연쩍게 웃으며 대답합니다. "말씀하신대로 얼굴이 깨끗한 아이겠지요."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랍비는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아이 모두 굴뚝 청소를 했는데, 어떻게 한 아이는 얼굴이 깨끗하고, 한 아이만 더러울 수 있단 말인가?"’조금 엉뚱하면서도 이해가 쉽지 않은 이야기 같지만, 그 핵심은 아주 명료합니다. 첫번째 질문은 상대방의 더러움을 보고 자신의 얼굴을 씻는 아이를 강조한 이야기입니다. 남의 잘못을 반면교사로 삼아 자신의 잘못을 정정해 나가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두번째 질문은 근본적으로 자기 성찰에 관한 중요성을 강조한 이야기입니다. 더러운 곳을 지난 뒤에는 남과 상관없이 묻은 그을음을 씻어내는 게 당연한 것처럼, 자신의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한 자기 성찰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이 탈무드의 가르침을 우리의 신앙생활에 그대로 적용해 보아도 좋을듯 합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의 얼굴에 그을음이 묻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든지 묻은 그을음을 씻어 내야 한다는 교훈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입니다.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회개하고 이전과는 다른 변화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남을 보고 타산지석으로 삼아 변화되든 아니면 극적인 체험을 통해 스스로 변화되든, 그 방식은 변화의 본질적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삶의 방향을 전환하여, 새로운 영적 피조물로 거듭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말씀이라는 거울에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하며, 영에 묻은 그을음을 씻어내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인생이란 여정은 수도 없이 많은 굴뚝을 지나치면서 죄와 오점으로 그을린 우리의 영을 씻어내는 수련의 연속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만일 날마다 시험을 치뤄내듯 이 과정을 반복한다면 버텨낼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통해 이 여정을 동행하며 인도해 주시리라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금주는 그 언약대로 성령이 우리에게 강림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령의 임재를 통해 어두운 굴뚝에 그을린 우리의 영이 온전히 씻김 받는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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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0
    [목양칼럼] 5월 15일 2023년 Publish on May 18,2023관리자
    시인 정연복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배우고, 마지막 세상 떠날 때 가장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엄마”라고 한 바 있습니다. 부르기만 해도 따뜻해지는 “어머니”, 그 이름이 고된 삶 속에 몸부림치는 현대인들에게 더없이 크게 느껴지는 까닭은 그만큼 현실의 벽이 차갑게 애워싸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겠지요. 예전에 어머니들이 “배부르고 등 따순 게 으뜸”이라고 말씀하던 일이 생각납니다. 배고픔만 면해도 행복하다고 생각할만큼 다들 춥고 배고팠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밥심으로 산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시대에, 어머니들은 아무리 고된 일상을 보내더라도 가족들이 먹을 따뜻한 밥을 짓는 일에 소홀한 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식의 입에 들어가는 밥한술을 보면서, 자신의 주린 배를 대신 채우려는 게 어머니의 마음이었습니다. 둥지를 떠난 자식들의 소식이 궁금할 때도, 영락없이 어머니는 “밥은 제때 챙겨먹고 다니는지“를 묻곤 합니다. 사는 게 바빠서 제곁을 좀처럼 내주지 않는 자식에게 행여 짐이 되지는 않을까 문앞에 한보따리 음식을 몰래 두고 가면서도 서운한 기색이 없습니다. 심드렁하게 ”왜 힘들게 시키지도 않은 일 하냐“며 핀잔을 주는 자식들도 그마음이 따뜻해 식은 찬밥도 한 술에 넘어 갑니다. 먹고 나면 왜 그렇게 힘이 나는지, 그 어떤 보약 보다 효능이 좋은 게 엄마 손맛입니다. 세상살이로 '찬밥 신세’를 한 두 번 겪다 보면, 이골이 날 법도 한데 쉽사리 서러움을 억누르기가 쉽지 않을 때도 어머니의 밥상 만한 위로가 없습니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밥솥의 열기가 차가워진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져주는 것이지요. 육신의 어머니가 따뜻한 밥상으로 마음의 위로를 준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매일의 양식으로 취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메마른 영혼을 살게 하는 힘인 것이지요. 말씀으로 인해,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듯 찬밥 신세가 되어 살아가는 우리의 영혼에 생명의 기운이 돕니다. 차디 찬 현실의 벽에 얼어 붙은 우리의 영혼을 언제나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힘이 말씀 안에 있는 까닭입니다. 그러니 철이 들어 보이지 않던 어머니의 뒷모습을 한 눈에 담을 때가 오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날마다 마음에 새기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도록 영적으로 깨어 있는 신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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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9
    [목양칼럼] 5월 8일 2023년 Publish on May 11,2023Office
    네덜란드 철학자인 요한 호이징아는 노동과 놀이의 차이를 이렇게 규정한 바 있습니다. 행함에 있어 수단과 목적이 일치하면 ‘놀이‘이고, 반대로 일치하지 않을 때 ‘노동’이라고 말입니다.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혼자 공부하며 즐거워 한다면 그건 ‘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이‘로 공부하는 아이에게 과제를 내 주면서 결과에 따라 응당한 보상과 대가가 따를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공부는 더이상 놀이가 아니라 노동으로 바뀌게 됩니다. 공부는 이제 보상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되고, 공부가 아닌 보상이나 대가가 목적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때부터 그에게 공부는 더이상 제맘대로 즐기는 놀이의 대상이 되기 어렵습니다. ‘놀이’는 하기 싫으면 그만이지만, ‘노동‘은 재미없다고 해서 마냥 그만둘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세상을 살면서 놀이로서의 삶을 지향할 것인가 아니면 노동으로서의 삶을 영위할 것인가를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반드시 어느 쪽이 옳은 선택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은근히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영화의 제목 같기도 한 말인데,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라는 표어는 특히 현대인들에게 특정한 삶의 지향점을 제시해 준 일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 안에는 한가지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을 희생해도 좋다는 일종의 회유입니다. 예를 들어, 학생들은 내일의 진학을 위해 오늘을 희생합니다. 다 그런건 아니지만, 적어도 놀이처럼 공부하는 사람이 아닌 한 대부분은 진학이라는 목적을 위해 재미없는 노동을 오늘 감내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식으로 계속 반복되다 보면,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을 또 희생해야 하는 불행을 늘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일은 내일 맞이하게 될 또다른 오늘이기 때문이지요.이와는 달리 ‘내일은 없다‘는 심정으로 사는 사람은 오늘의 행복을 내일에 결코 양보하지 않는 삶을 살 가능성이 큽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결과는 늘 오늘을 행복하게 사는 셈이 됩니다. 내일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오늘 하루를 노동으로 일관하는 삶이 아니라, 오늘 자체를 즐기며 놀이하듯 산 결과입니다. 예수님도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계획없는 마구잡이 삶을 부추긴 것이 아니라, 오늘을 즐기며 사는 삶을 통해 진정한 행복의 길을 발견하라는 권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건, 오늘을 그 자체로 누리며 사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하루를 향유하며 사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날마다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는 부활의 기쁨입니다. 그러니 내일로 미루지 마시고 오늘 믿음대로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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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8
    [목양칼럼] 5월 1일 2023년 Publish on May 04,2023관리자
    시인 홍수희는 친구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오랜 침묵을 건너고도/ 항상 그 자리에 있네/ 친구라는 이름 앞엔/ 도무지 세월이 흐르지 않아/ 세월이 부끄러워/ 제 얼굴을 붉히고 숨어 버리지/ 나이를 먹고도/ 제 나이 먹은 줄을 모른다네” 애써 기억을 소환하지 않더라도, 늘 거기에 머물러 있을 것만 같은 친구에게 세월도 낯 부끄러울 지경이라는 시인의 말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도 마주보며 웃을 수 있는 친구는 체면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묶어 놓을 이유가 없어, 질투 없는 우정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찬양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다만 친구는 어디에서건 서로의 삶에 충실하기를 바라며, 마음 허전할 때마다 기억할 수 있는 존재라고 시인은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오랜 세월을 무심코 흘려 보내 다가도 문득 떠오를 때 전혀 거리낌 없이 연락해도 좋은 친구는 신이 부여한 고귀한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때는 함께 웃고 떠들며 성장한 동년배들만이 친구라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친구를 그렇게만 한정하기에 사람의 관계는 한계가 뚜렷하면서도 풍성한, 모순성을 안고 있습니다. 동네에서 같이 자란 친구들이 하나 둘 제 갈길 가며 흩어지다 보면, 주변에 남는 친구는 늘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마음 편히 나눌 상대가 없다고 투덜대기도 어려운 게, 사람은 결코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만 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랜만에 고향을 방문한 저를 잊지 않고 연락하는 친우들이 있습니다. 철없던 시절의 놀이 친구부터 목회 현장에서 만난 동료에 이르기까지 참 다양한 길벗들입니다. 인생길을 걸으며,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마음 열어 편히 할 말 전해도 좋은 길벗이 있다는 게 정말 소중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세월이란 장벽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걸 보면, 친구란 시간을 초월한 존재가 맞는가 봅니다. 만나면 반갑고, 헤어지면서도 서로의 건투를 빌어줄 든든한 벗을 신의 선물이라고 표현한 시인의 고백에 수긍이 가는 이유입니다. 그러고 보면,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고백이 꽤나 애처롭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같이 갈 제대로 된 친구 하나 없다는 게 얼마나 쓸쓸한 일인지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사실 친구라고 해서 모두가 진짜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필요한 순간에, 그리고 가장 위급한 때에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친구가 진정한 벗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신 예수님이 우리의 진정한 친구인 것처럼 말이지요. 함석헌 선생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라고 물은 일이 있습니다. 이제 저는 고향의 옛기억을 나눈 친우들을 남겨 두고, 예수님의 길을 함께 걷는 신앙의 벗들에게 돌아가려고 합니다. 아쉬움 속에서도, 마음 한 구석이 왠지 뿌듯해 지는 건 오랜 침묵을 건너고도 늘 거기에서 ‘저 맘이야’라고 이해해 줄 것만 같은 그 사람들이 제게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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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7
    [목양칼럼] 4월 24일 2023년 Publish on April 27,2023관리자
    아무리 좋은 말도 자주 들으면 싫증이 난다고 합니다. 하지만 천만번 들어도 싫증은 커녕 들을 때마다 언제나 마음 한 구석이 따습고 포근해 지는 말이 있습니다. 어머니. 이 땅에서 마주할 수 있는 가장 그지없는 사랑의 근원인 존재. 가슴을 찢듯 애달픈 고통 속에서도 자식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삶의 본향같은 존재.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를 위해 독생자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면, 혼자 덩그러니 버려진 우리가 돌아가 쉼을 얻을 대지로 보내 주신 존재. 알 수 없는 미지의 우주처럼 아무리 헤아리려 해도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저 우주의 끝같은 존재. 그처럼 어머니는 지친 우리의 진정한 안식처와 같은 분입니다. 둥지 떠나 제 갈길 가는 자식을 위해 있는 것 없는 것 찾아 정성 들여 먹을 것 만들어 놓고, 본인 입은 말라도 주고 줘도 부족해 왠지 못내 아쉬워하는 어머니 마음을 누가 감히 형언할 수 있을까요! '부모 마음 만분지일을 아는 자식이면 효자'라는 말이 늘 가슴 한켠에 응어리로 남고 나서야 깨닫는 것이 그 사랑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다음 생에라도 제발 자신의 자식으로 만나 그 사랑 되돌려 줄 수 있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다고 하지요.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오는 내내 제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한 모녀가 있었습니다. 제 옆 칸에 앉은젊은 엄마와 딸이었습니다. 아직 서너살 밖에 되 보이지 않는 앳된 딸은 긴 비행 여정에 심드렁해졌는지 엄마에게 떼를 쓰며 계속 칭얼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내에 불이 꺼진 뒤 옆자리가 조용해 져서 살며시 돌아보니, 놀라운 광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성인이 다리를 다 뻗기도 벅찰 만큼 좁은 좌석 공간을 등지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쪼그려 앉은 엄마가 아이를 재우는 모습이었습니다. 아이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주고, 엄마는 그 긴 비행 시간을 보기에도 불편한 자세로 서서 잠이 든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니, 저 아이에게도 엄마의 고된 시간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만한 때가 오기를 실없이 빌고 싶어졌습니다. 늘 머릿속 스치고 지나가는 기억 같던 고향이 자식의 실루엣만 보고도 버선발로 뛰어 나온 어머니와 함께 다가왔습니다. 다사로이 포근하게 감싸 안는 그 품 속에서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어머니의 고된 시간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푸접없이 그 품에 꼭 안겨 있을 수만도 없었던 건, 가없는 엄마의 품에 안길 수 없는 이들에 대한 조그만 배려였는지 모릅니다. 의식없이 누워 있는 어머니의 병상앞에서, 그토록 단아하고 해사했던 우리 엄마 그립고 보고파 멀리 미국에서 왔다는 딸을 더는 안아 주지도 못하는 그 마음이야 오죽할까요. 차라리 애지중지 아껴주며 고되게 보냈을 시간이 그리워 질 뿐입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듯이, 서로 품 안에 안을 수 있는 것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서로 사랑하는 것만이 살아가는 존재의 이유라고 가르쳐 주셨나 봅니다. 이제 잠시 어머니의 땅에 머무는 것도 기한이 차 오지만, 하늘이 맺어준 믿음의 식구들을 볼 수 있다는 마음에 한결 발걸음이 가벼울 것 같습니다. 서로 사랑하며, 아직 안아 줄 시간이 남아 있다는 기대 때문에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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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6
    [목양칼럼] 4월 17일 2023년 Publish on April 20,2023관리자
    부활의 참뜻은 눈으로 보여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역사적 예수의 부활 사건을 경험한 지 2천년의 시간이 지난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뜻을 깨단하는 일은 신앙의 뿌리를 세우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사랑이 하나의 말장난과 같은 개념적 정의가 아니라 삶의 실천을 통해 이루어야 할 결실인 것처럼, 부활도 말뜻의 정의 보다 삶의 현장에서 실현되어야 할 신앙의 증거입니다. 날마다 죽음을 맛보는 실존적 종말을 고백한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옛사람의 흔적을 지우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의 역사적 사건을 보았다는 고백은 눈으로 목격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각자의 삶 속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부인하는 체험이 되어야 하듯이, 부활의 사건은 우리의 삶과 전존재가 탈바꿈하는 역사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개인에게 혹은 우리 시대의 현실 속에서 부활의 증거를 볼 수 없다는 이야기가 들린다면, 부활을 의심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아야 할 성찰의 시간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것도 타인에게 시선을 돌리기 전에 우리 자신의 삶부터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나는 부활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현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닮아 있는가? 부활의 증거로 제자들에게 보이신 예수의 상처는 사랑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깊은 상처만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지극했습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 지시고 구원하신 사랑이야말로 부활의 진정한 증거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내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을 새기며 사는 사람이 부활의 증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 깊은 상처를 새기고 살아갈 만큼 사랑하며 살고 있는 것이 맞을까요? 부활 이후 제자들을 직접 다시 찾아주신 예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은 “너희를 보낸다”는 파송의 선언이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어 부활의 참뜻을 세상에 새겨 주신 것처럼, 이제 부활의 열매를 맺는 대사역은 남아 있는 우리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비록 내 몸에 생채기가 남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누군가를 위해 상처마저 감내하는 사랑을 행할 때 비로소 부활이 이 땅 위에 증거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 위에 교회가 세워진 것처럼, 그리스도의 상처를 새기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존재하는 한 부활의 참뜻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이 우리를 살리는 힘입니다. 그러니 후회없이 서로 사랑하는 일에 자신의 삶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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