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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1월 9일 2023년 Publish on January 09,2023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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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21회 작성일 23-01-09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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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 문화(Zodiac Culture)에 따르면, 금년은 계묘년(癸卯年) 토끼띠 해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계(癸)는 흑색이고 묘(卯)는 토끼를 의미하니까 ‘검은 토끼의 해’입니다. 예부터 우리 전통문화에서 토끼는 꾀가 많은 동물로 간주되었습니다. 실제로도 지능이 다른 동물에 비해 높은 편이기는 하지만, 그보다 천적을 피할 수 있는 토끼만의 생존 방식은 민첩성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두 눈이 양 옆을 향해 있어 360도를 모두 볼 수 있을 정도로 시야가 넓은 데다 소리에 민감해서 재빠르게 도망갈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사주 팔자를 따지는 것으로 잘 알려진 명리학의 기준으로 보면, 계묘년은 ‘새싹에 비가 살살 뿌려지는 모습’에 가깝다고 합니다. 뭔가 파릇파릇하고 싱그러운 느낌을 주어서, 그 어느 때 보다 희망적인 일들이 많이 생겨날 것이라는 신년 운세를 내놓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꿈 보다 해몽이라는 말처럼, 토끼띠 해가 주는 싱그러운 기운이 실제로도 올 한 해 모든 이들의 삶에 새로운 희망과 기대를 갖게 해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 어떠한 희망과 기대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법은 없습니다. 그것은 한자로 새로울 신(新)자의 의미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서(立) 있는 나무(木)를 도끼(斤)로 잘라내는 모양을 형상화한 것인데, 나무에 도끼로 생채기를 내어 새순을 돋게 한다는 뜻입니다. 말 뜻 그대로, 새로워지는 것은 기존과는 다른 변화를 의미합니다. 게다가 그 변화는 생채기를 내는 아픔을 수반합니다. 잘려나가는 고통을 겪은 뒤에야 새 살이 돋아나는 이치입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고난 없는 부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바울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옛 사람은 죽고, 다시 새 사람으로 부활하는 것이라고 말한 까닭입니다. 이처럼 새로운 변화는 진통의 관문을 지나기 마련입니다. 포기해야 할 현실적 편리와 익숙함이 다소 불안과 염려가 되겠지만, 새싹에 움이트기 위해선 진통을 피할 길 없습니다. 대신에 탐욕으로 그늘 진 세상의 풍조에 먹힌 바 되지 않기 위해 꾀와 민첩성을 갖춘 토끼 같은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변화되기 위해 겪어야 할 진통은 감내하면서, 토끼처럼 지혜롭게 희망의 결실을 맺어가는 것이지요. 계묘년인 금년 한 해가 여러분 모두에게 삶의 풍성한 열매를 거두기 위해 새싹 위에 또 다른 땀과 눈물을 뿌리는 신앙의 변곡점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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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양칼럼] 7월 17일 2023 Publish on July 17,2023관리자
    독일 격언 중에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 결국 꼬이고 만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패한 왕권을 몰락시키고 들어선 새 정권이 무능해서 나라 살림이 더 피폐해지거나, 민중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들어선 혁명 정권이 오히려 독재 권력을 휘둘러 민중을 위협하는 비수가 되었던 역사를 우리는 수없이 목도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구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자긍심과 달리 그들의 삶은 세상의 천덕꾸러기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도자는 서툴고 무능하기 일쑤였고, 백성들은 심각한 건망증을 앓고 있는 환자처럼 신앙의 결단을 밥먹듯 뒤집어 버리곤 했습니다. 하늘 아래 둘도 없는 민족이라는 선민 의식이 무색할 정도로, 주변 열강의 눈칫밥 신세를 면하기 어려웠던 이유입니다.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성전이 훼파되는 아픔을 경험한 뒤에도 크게 개선될 기미가 없었습니다.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이 지켜지던 시대에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 있는가“를 고민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이 행하는 일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임할 것이라는 믿음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그들은 은밀한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라 “안식일에 빨래를 하는 것이 적법한 일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무너진 건 거룩한 하나님의 집만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견고한 믿음도 함께 무너져 버린 결과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통곡의 벽‘ 앞에서 주문을 외듯 몸부림치는 그들의 심령에, 과연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까를 묻는 게 어색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러고 보면, 제대로 하나님의 집 하나 짓지 못한 그들의 심령을 찾아 오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머물 곳이 없어 빈 마굿간을 가야 했던 건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주님이 거처할 곳을 예비해 놓지 않은 영적 태만이 부른 참사입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사람들은 여전히 언제 메시아가 찾아오실 것인가만을 묻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는 게 다 그런거지 뭐‘라고 이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에는 져야 할 무게가 여간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그 짐 내가 다 져주마” 약속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말할 수 없는 위로로 다가오는 까닭입니다. 그저 우리가 할 일이라고는 사람의 일로 행하려는 구습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배우는 것 밖에 없다고 하시니 이 보다 더 큰 은혜가 또 있을까요?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은 결코 실패가 없을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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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양칼럼] 7월 10일 2023년 Publish on July 15,2023관리자
    한때 한국교회의 영성을 통성기도로 축약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말못할 삶의 설움을 일거에 토해내듯 하나님께 열정적인 간구와 호소를 통해 신비한 감동을 체험하던 때입니다. 한많은 세월의 무게를 마음의 짐처럼 지고 살던 시절이라 그래서인지, 효험이 더 배가되는 느낌을 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언로가 자유로워진 요즘은, 말이 가진 긍정적 힘보다 부정적 영향 력이 더 커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 결과 침묵을 “지혜의 울타리“라고 부르던, 현자들의 가르침에 오히려 더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말수가 는건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가 주요한 사역 중의 하나라 해도, 온라인 방송이나 다양한 교회 프로그램 운영으로 인해 말의 횟수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물론 말의 질을 양이나 빈도로 평가할 수는 없겠지요. 좋은 말을 더 많이 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바람직한 일도 없을 겁니다. 그런데 뒤집어 생각해 보면, 좋은 말을 자주 할 만큼 세상이 변하지 않았다는 건 말의 질이나 영향력도 그만큼 떨어진다는 반증이 아닐까요? 구약의 성전 제사장들을 보면, 그들의 업무는 늘 침묵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물을 바치는 동안 레위인들처럼 노래를 하거나,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광야에서 은둔하며 영적 수련에 매진하던 수도자들도 묵언으로 금식하며 명상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침묵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소리에 경청하는 것을 최고의 신앙훈련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세상을 이해하고, 깨달으며 자기 삶에 적용하기 위해서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귀 기울여 듣는 일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19편은 침묵에 관한 고백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소음과 불필요한 함성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자기 마음 안에 적막한 광야를 만들어야 할 이유입니다. 고요한 적막 속에서 우리 가운데 지금도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려면 말이지요. 신앙생활의 핵심은 귀를 기울이고, 들은 것을 삶으로 응답하는 것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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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6
    [목양칼럼] 7월 3일 2023년 Publish on July 15,2023관리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하나의 말로 규정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지만, 일면 그런 시도 자체는 무례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누가 여러분을 한마디로 규정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생각만 해도 불쾌한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삶이라는 건 수많은 기억의 흔적을 남기며 지나 온 여행길 같은 것인데, 그 모든 걸 깡그리 무시해 버리는 태도는 생명을 향한 모욕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그래서 철학자인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지요. 그만큼 말의 한계를 인정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랑에 대한 규정 조차 여러 가지 단어를 사용하여 그 미묘한 차이를 보여주려고 한 건 성경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와 같이 다양한 이름을 붙여 사람 사이의 관계를 설명해 주고자 합니다. 사랑이 하나의 몸통이라면, 이걸 묘사하는 다양한 표현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이름이 많다고 해서 존재의 본질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의자의 디자인이나 형태는 여러가지라 해도 앉지 못하는 걸 의자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사랑도 기독교적 본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 아닌, 존재하는 모든 것을 향한 의지의 행위라는 정의입니다. 예수께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이를 한마디로 요약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감정적으로 좋아하거나 배려하는 것도 거기에서 크게 벗어난 행위는 아닙니다. 하지만 감정적 느낌은 언제든 변하기 쉽습니다. 환경이나 필요에 따라 개인의 감정은 확연히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반면에 기독교적 사랑은 감정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방향과 목적을 강조합니다.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 타자(他者)를 향해, 그것도 의지를 가지고 타자를 위해 행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지요. 자신이 좋아하는 감정으로 행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에게 좋을 수 있는 일을 행하는 게 사랑입니다. 그러고 보면, 정제되지 않은 말로 다른 이의 감정을 상하게 하거나, 자신의 생각으로 다른 이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행태는 사랑의 본질에서 저만치 떨어져 있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는 것이라는 바울의 말이 묵직한 울림을 주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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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양칼럼] 6월 26일 2023년 Publish on July 15,2023관리자
    ‘플로팅 크리스천(Floating Christian)’이란 말이 있습니다. 말뜻 그대로 하면 “여기저기 떠도는 크리스천“이라는 의미입니다. 팬데믹을 겪으면서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에도 부침이 많았습니다. 어딘가에 고정되지 못하고 방황하는 부유(浮遊)현상이 신앙인들에게도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신앙의 중심이 무너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신앙의 뿌리를 잃어버렸다는 의미라기 보다 신앙생활의 고정적인 패턴이 변화되었다는 의미가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신앙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팬데믹 이전처럼 고정된 신앙 패턴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추세라는 뜻입니다. 이와 비슷한 신종 용어 중에 ‘가나안 성도’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가나안은 특정 지명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안나가‘라는 우리말을 풍자적으로 비꼬아 거꾸로 쓴 말입니다. 기존 교회와 신앙 방식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교회 밖에 머무는 현상을 두고 한 말이지요. 플로팅 크리스천과 차이가 있다면, 선택의 자발성을 꼽을 수 있습니다. 반면 플로팅 크리스천은 전염병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외부 요인에 의해 비자발적으로 발생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란 보고서에 따르면, 플로팅 크리스천은 가나안 성도와 달리 교회에 등록되어 있지만 예배 참석에 비교적 자유롭고, 교회에서의 대면활동도 거의 하지 않는 양상을 보인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비대면 방식의 온라인 예배 활성화는 플로팅을 가능케 한 배경요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온라인 예배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현장 예배의 대체재로 신앙생활 자체를 변화시켜 버리는데 큰 역할을 한 셈입니다. 시장으로 치자면, 소비자인 신자들에게 그만큼 선택의 폭을 다양하게 만들어 준 기폭제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신앙생활에서 뚜렷한 소속과 꾸준한 교제가 없다는 건 늘 불안한 요소입니다. 게다가 수많은 정보의 홍수 시대에 무분별한 선택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학교 생활은 제쳐두고 자기 마음에 드는 온라인 수업만 골라 듣다 보면, 공교육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인 것처럼 말이지요. 시대 상황에 맞추어 신앙생활에도 패러다임의 변화가 있어야 하는 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선택을 자기 입맛에만 맞추려는 플로팅 현상을 바람직한 신앙 태도라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아무리 시대 상황이 달라진다 해도, 자기를 부인하고 중심을 하나님께 고정해야 한다는 신앙의 본질 만큼은 결코 변함이 없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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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양칼럼] 6월 19일 2023년 Publish on June 22,2023관리자
    “Following Jesus, thriving in community, healing the world” 예수님을 따라, 공동체의 성장을 이루고 세상을 치유하자. 지난 주 새크라멘토에서 열린 2023년도 캘리포니아-네바다 연회(California-Nevada Annual Conference)의 핵심 비전 선언 내용입니다. 이 비전 선언문에 따르면 우리는 ‘그 누구’나 ‘그 무엇’의 추종자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변화되는 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신앙공동체를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개인적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 그분의 말씀을 배우고 그분처럼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깨닫고 나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목적과 방향도 명확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라는 정체성을 확신하고 이를 삶으로 실천하는 것은 공동체의 본질을 이해하고 선교적 사명을 이행하는데 가장 근본적인 출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스스로 제자가 되는 것은 철저히 개인적인 일이니, 타인을 제자로 만드는 사역도 별개로 완수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것처럼, 혼자의 능력만으로는 결코 그 모든 것을 원만하게 성취하기 어렵습니다. 교회 자체가 서로 함께 힘을 합하여 만들어 가는 공동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새로운 동력을 발판 삼아 성장하려면 이러한 공동의 노력은 불가피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장이라 해서 수나 양의 증가만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서 영적인 성장을 이루는 것이 더 중요한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성장하지 않는 공동체를 건강하다고 보기도 어렵지만, 내실을 기하지 않은 성장은 무모할 뿐입니다. 결국 공동체의 내실과 성장의 관계는 결코 서로 별개의 문제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 이유로 신앙 공동체가 서로 합력하여 끊임없는 혁신과 적응을 통해 변화된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갈 때, 내실 있는 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 주변환경의 변화와 악조건으로 인해 교회가 몸살을 앓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풍랑에 만나 두려움에 빠졌던 제자들처럼 우리도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는 위기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세밀히 돌아 보면, 잔잔한 물가에 파장을 일으킬 만한 바람은 한번도 멈춘 때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위기는 늘 우리 주변을 바람처럼 맴돌고 있었고, 그저 대처하는 이의 태도에 따라 체감의 정도만 달랐던 것 뿐입니다. 따라서 금번 우리 연회의 핵심 가치를 들으며, 저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 받은 성도와 교회도 변화된 환경에 무작정 동화되기 보다 능동적으로 헤쳐 나가기 위해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몰아치는 풍랑에 대한 두려움에 빠져 있기 보다,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 주님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하는 신앙생활의 회복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건강하게 성장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리라는 희망은 믿음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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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3
    [목양칼럼] 6월 5일 2023년 Publish on June 06,2023관리자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말로 잘 알려져 있는 문장이 있습니다. 바로 “너 자신을 알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문장은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니라 당시 아폴론 신전 현관 기둥에 새겨져 있던 문구를 인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다만 이 문장이 소크라테스를 통해 유명하게 된 까닭은 이 짧은 문장이 가진 숨은 의미를 잘 파악하여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제시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원석을 잘 가공하여 그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한 수사학적 기술의 결과라 할 만 합니다. 그가 “너 자신을 알라”는 문구를 보고 발굴해 낸 첫번째 의미는 자기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는 것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모든 깨달음의 시작은 자기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보았습니다. 자기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순간에 비로소 지혜를 향한 첫 발걸음도 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너 자신을 알라”는 문구에 보다 적극적인 두번째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무지함과 불완전함을 깨닫는 것에서 그대로 멈추어 서 있는 게 아니라, 그 한계를 뛰어 넘어 지경을 넓혀보라는 권면입니다. 모른다는 한계를 인정하는 것과 그 한계에 굴복하여 그만 둔다는 말은 완전히 다른 의미입니다. 한계를 깨닫는 지혜와 그것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을 정도면, 한계를 뛰어 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보라는 것이지요. 진리를 향해 가는 길은 그만큼 지난한 과정입니다. 그렇다고 그 길에서 마주치는 암초에 멈추어 포기할 것이 아니라, 진리를 향해 계속해서 나아가라는 주문을 했던 것입니다. 사실 소크라테스의 명언에 숨겨진 의미를 우리의 신앙에 적용해도 크게 문제가 될 바 없을 정도입니다. 결국 신앙의 여정도 자기 자신의 허점과 불완전함을 깨닫고, 새롭게 변화되기 위해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가는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창조주 앞에 서 있는 허물 많고 유한한 피조물인 자기 자신을 자각하는 것에서부터 신앙의 여정도 출발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 후에는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철저히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거듭나는 성화의 길을 가는 것이지요. 그것은 바울 사도의 고백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길 줄 아는 삶의 변화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결단을 통해 우리는 진리를 향해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명확하게 깨닫는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께 다가서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하루도 “너 자신을 알라”는 질문으로 신앙 여정을 시작해 보시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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