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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의인이 죄인과 함께 벌을 받아야 하나요? Publish on June 12,2019 | 홍삼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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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홍삼열
댓글 0건 조회 514회 작성일 19-06-12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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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서로 상반되는 듯한 구절들이 등장한다. 한쪽에서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심판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다른 쪽에서는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무고한 사람도 심판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에스겔서를 보면 몇 장 사이를 두고 위의 두 가지 상반된 내용이 함께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 에스겔 18장 19~20절을 보자. 각자가 자신에게 합당한 상벌을 받도록 해야지 남의 것을 대신 받게 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고 있다. “아들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내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였으면 그는 반드시 살려니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반면에, 에스겔 21장 3~4절을 보면 악인의 죄 때문에 의인도 함께 심판 받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땅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를 대적하여 내 칼을 칼집에서 빼어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지라 내가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 터이므로 내 칼을 칼집에서 빼어 모든 육체를 남에서 북까지 치리니.” 이 구절을 읽을 때 우리에게 이런 의문이 생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심판하실 때 악인만 심판하시면 되지 왜 악인과 함께 의인도 심판하신다고 하는가? 의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살려 주셔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런 식으로 무차별적으로 악인과 의인을 함께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는 해당 구절이 배경으로 하고 있는 특정 상황을 살피는 데 있다. 표면적으로 보면 위의 두 구절은 분명히 서로 상충되는 내용이다. 서로 정반대의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각 구절이 배경으로 하는 특정 상황을 알고 나면 그 구절들이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첫 번째 경우부터 살펴보자. 사람이 각자 자신이 행한 데 따라 상벌을 받게 해야지 남의 것을 대신 받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형사법정을 배경으로 하는 말이다. 가령, 법정에서 재판관이 어떤 범죄에 대해 형벌을 내릴 때, 형벌을 받아야 하는 아버지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해서 아들이나 딸을 대신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신명기 24장 16절도 동일한 법정의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아버지는 그 자식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두 번째 경우는 다른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의인이 악인과 함께 칼의 심판을 받는다는 내용은 개인사에 관계하는 형사법정의 상황이 아니라, 민족 전체에 관계하는 공동 운명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여호수아 7장에 나오는 아간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아간은 여리고와의 전투에서 얻게 될 모든 전리품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명령을 어기고 값나가는 물건을 따로 떼어서 몰래 감추어 두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이 그다음 이어지는 아이성 사람들과의 전쟁에서 패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왜 그러셨을까? 아간만 처벌하시면 되는 것을 왜 온 이스라엘을 처벌하신 것일까? 그 이유는 아간의 범죄는 그 사람 혼자만의 범죄가 아니라 온 이스라엘의 범죄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범죄가 가지는 사회적 파장성을 여호수아 7장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7:1).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7:11).

 

여기에 범죄의 주체로 아간이라는 개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들” 혹은 “이스라엘”을 언급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명령하신 내용은 아간 개인에게 주신 명령이 아니라 이스라엘 모두에게 주신 명령이다. 여리고는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것이기 때문에 백성 중 어느 누구도 전쟁을 통해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사사로이 취하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것이 되어서 신성모독의 죄를 짓는 것이 되고, 이에 대해 당연히 엄중한 처벌이 내리게 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간의 범죄는 개인에게 주신 명령을 어긴 것이 아니라 전쟁의 상황에서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주신 명령을 어긴 것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아이성 사람들과 전투하기 전에 아간의 범죄를 발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형사법정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아간에게만 엄중한 형벌이 내렸을 것이다. 전체 공동체에는 큰 악영향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아간의 범죄에 대해 모르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군대가 아이성 사람들과 전쟁을 하게 되고, 이때 참패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항의할 수 있다. 왜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간의 죄를 밝히셔서 그 사람만 죽게 하지 않으셨는가? 다른 사람들이 아간의 범죄를 모르는 상태에서 전쟁을 시작했다가 패배 당하는 것은 너무 부당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엄격히 따져서 그것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신경 써야 할 문제이지 하나님이 신경 쓰실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신 것을 가지고 항의하면 안 된다. 사람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공동체가 함께 대응해야 하는 문제이다. 전쟁이 벌어질 때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동체만이 존재한다. 전쟁에서 사람이 죽을 때 악인만 죽지 않는다. 악인과 의인이 무차별적으로 함께 죽는다. 이것이 현실이다. 여호수아 7장과 에스겔 21장은 의인과 악인이 함께 죽는 공동체적 현실을 있는 그대로 설명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왜 그런 전쟁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의인을 따로 보호하고 살려 주시지 않느냐고 불평하면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께 공평한 요구가 아니다. 우리는 공동 책임 혹은 공동 운명에 대해 우리에게 유리한 것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한 사람이 죄를 지어서 그가 속한 전체 공동체가 함께 벌을 받을 때 우리는 그것이 부당하다고 항의한다. 그러나 정반대의 상황에서는 침묵한다. 한 사람의 특별한 순종으로 그가 속한 공동체 전체가 큰 복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불공평하다고 항의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서,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이 복을 받고 더 나아가 세상의 많은 민족이 복을 받게 되었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항의하지 않는다.

 

형사법정의 경우같이 사람이 관여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의인과 죄인이 서로 상벌을 공유하게 해서는 안 된다. 의인은 상을 받고 죄인은 벌을 받게 해야 한다. 그러나 전쟁의 상황같이 사람이 개인사에 개별적으로 관여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의인과 죄인이 서로 상벌을 공유하는 것이 현실이다. 경우에 따라서 죄인이 의인에게 주어질 상을 받기도 하고 의인이 죄인에게 주어질 벌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개인 영혼의 구원은 공동체의 운명과 상관이 없다. 하나님의 영원한 법정에서는 개인이 행한 것에 대해서 자신만이 책임을 진다. 비록 육신적으로는 부당하게 고난 받고 무고한 죽음을 당할 지라도,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내가 지옥 가지 않고 다른 사람의 선행 때문에 내가 천국 가지 않는다. 의인과 죄인이 함께 벌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법정을 배경으로 하는 당위이고 의인과 죄인이 함께 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인간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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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양칼럼] 3월 6일 2023 Publish on March 06,2023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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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양칼럼] 2월 27일 2023년 Publish on March 02,2023관리자
    지난 주 한 매체를 통해 사고로 딸을 잃은 아버지가 일기장에 적힌 딸의 꿈을 알고 이를 대신 이루어 주었다는 이야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2014년 경북 경주에서 일어난 ’마우나 오션 리조트‘ 붕괴 사고로 딸을 잃은 희생자의 가족이었습니다. 부산외국어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되던 도중 리조트 지붕이 눈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면서, 그곳에 있던 학생 10명이 숨지고 214명이 부상을 입은 참사였습니다. 딸은 당시 그 대학의 아랍어 학과 신입생으로 오리엔테이션에 참여하다 그만 생명을 잃고 만 것이었습니다. 이후 아버지는 딸의 유품을 정리하다 우연히 일기장에 적힌 이야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신앙심이 깊었던 딸이 일기에 ‘세계를 돌고 선교활동을 하며 어려운 이들을 돕고 싶다‘는 꿈을 적어 놓은 포부를 읽게 된 것입니다. 아랍어 학과에 진학한 것도, 선교에 대한 꿈을 펼쳐 보이기 위해 선택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사망 보상금으로 받은 돈을 인구 30만명의 남태평양 섬나라인 ‘바누아투’에 보내기로 결심합니다. 그 돈으로 바누아투 정부는 딸의 이름을 따서 ‘국립 혜륜 유치원ㆍ초등학교’를 세웠습니다. 비록 딸은 일찍 가족들 곁을 떠났지만, 아버지는 딸 이름을 딴 교육시설을 기독교 국가인 바누아투에 지으면서 딸의 못다한 꿈을 어느 정도 이뤄준 것 같아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고 합니다. 지난 2016년 7월에 문을 연 국립 혜륜 유치원은 바누아투에 들어선 첫 유치원입니다. 놀라운 건이 소식을 듣고 여러 도움의 손길이 이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한 대학의 연구센터를 통해 빗물을 식수화 할 수 있는 시설이 설비되고, 기업체를 통해 학용품을 지원하는 등 딸의 꿈을 실현시켜 줄 도우미들이 마치 선한 영향력의 메아리가 퍼져나가듯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아버지는 남은 보상금으로 몇 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어 채 꿈을 펼쳐 보지도 못하고 떠나 버린 딸의 소망을 이루고 싶었다고 합니다. 일확천금을 꿈꾸며 불나방처럼 욕망의 빛을 쫓는 이들에게 세상은 어둠 그 자체입니다. 욕망하는 빛만큼 그림자도 짙게 드리워질 뿐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빛을 머금지 못하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빛을 잃은 등처럼 사랑이 없는 세상은 어둡고 쓸쓸하기 마련입니다. 세상의 빛인 그리스도인을 주께서 부르신 까닭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28절을 통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딸의 안타까운 소망이 꺼지지 않고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될 수 있었던 건 아버지의 애틋한 사랑과 이를 곁에서 도운 온정의 손길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빛으로 부르신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우리도 여전히 어둡고 차가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메아리처럼 퍼뜨려 나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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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양칼럼] 2월 20일 2023 Publish on February 23,2023관리자
    금주부터 사순절이 시작합니다.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에 시작하여 부활절 전날인 성토요일까지의 사십 일을 뜻합니다. 사순절 기간 중에 있는 여섯 번의 주일은 그 안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사순절의 의미를 묵상하며 부활의 소망을 고백하는 "작은 부활절”로 지키도록 교회전통은 가르쳐 왔습니다. 사십 일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이겨내고, 공생애를 준비하신 기간과 같습니다. 그래서 사순절은 부활의 소망을 기다리며, 회개와 금식과 같은 영적 훈련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성찰하는 시간으로 삼아야 합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사순절 기간 동안 성도들이 자신을 절제하고 세상을 돌보는 봉사와 섬김에 보다 더 관심을 가지고 헌신하도록 권면해 왔습니다. 우리는 재의 수요일 예배를 통해 사순절의 의미를 묵상하며 다짐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예배 중에는 재를 이마에 바르며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말씀을 되새기며 고백도 합니다. 재를 이마에 바르는 의식을 통해 부끄러웠던 옛 삶을 청산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려는 신앙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생명을 구성하는 원초적 기원인 흙의 의미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성경은 첫 사람인 아담을 흙에서 나와서 흙에 속한자라고 규정합니다. 인간이 흙을 떠나서는 살 수 없듯이, 생명이 붙어있는 그 어떤 것도 다 흙에서 나와 삶을 영위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성경말씀은 과학적으로도반박이 불가한 진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서양 속담 중에 "흙은 풀을 길러내고, 풀은 가축을 기르고, 가축은 인간을 기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풀, 가축, 인간은 독자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그들 사이에는 생태계의 순환적 흐름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각자의 생명이 다하면 흙으로 돌아가 또다른 생명의 흐름을 이어가는 역할을 하게 되지요. 그 때 흙은 모든 생명들을 품은 아기집이 되어 새생명을 잉태하는 수고를 하게 됩니다. 그런 이유로 어떤 이들은 땅을 태초에 하늘에 의해 수태된 생명의 산실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생명의 터전을 내어 주며 포용하고 베푸는 풍요로운 안식처와 같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흙을 밖으로 쓸어 버리면 복이 나간다고 해서, 으레 마당을 쓸 때면 집 안쪽으로 쓸라고 한 것도 다 그런 인식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흙과 땅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긴 까닭이지요. 하지만 흙이나 땅도 생기를 잃어버리면 헛된 것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재처럼 사라져 버릴 허망한 운명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나 제 본분을 지키지 못하거나, 의미없이 거기에 그저 존재하는 정도라면 쓸모를 언급할 필요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흙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운명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잃어버리는 순간, 육신은 한낫 잠간의 티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재를 이마에 바르며 다짐한 신앙 고백의 무게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미풍에 날아가 버릴 재처럼 가벼운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땅을 옹골지게 딛고 서 있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이 묵직한 말씀의 의미를 마음에 새기고 세상의 풍조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성도의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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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양칼럼] 2월 13일 2023년 Publish on February 16,2023관리자
    튀르키예와 시리아에 지난 6일 발생한 대지진으로 인해 현재 사망자가 2만4천명을 넘어섰다는 외신 보도가 있었습니다. 병원으로 이송된 부상자의 수도 8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특히 국경 근처인 시리아 북서부는 지속된 분쟁으로 수많은 난민들이 모여 살던 지역입니다. 지진 피해와 더불어 겨울철 강추위까지 엄습한 탓에 제대로 된 거처와 식량 그리고 생활 필수품조차 구하지 못해 발만 구르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시리아의 경우는 지진 위기 전에도 이미 1,500만 명의 사람들이 인도적 지원에 의존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마저도 제대로 제공되지 않아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터라, 지진 피해는 그들에게 화불단행(禍不單行: 재앙은 한 번만 일어나지 않는다)을 경험하게 한 최악의 고통이라 할 만합니다. 지금도 악천후와 구조 인력 및 기반시설의 미비로 인해 구조환경이 썩 좋지 않은 실정입니다. 첫번째 지진이 발생한 시각부터 사흘을 훌쩍 넘기면서, 생존자 구조의 희망도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초기 72시간이 지나면 건물 잔해 속에 묻혀 있는 이들이 살아서 구조될 가능성이 희박해 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시민들과 각국의 구조대원들은 한명이라도 더 구조하기 위해 수색 작업에 안간 힘을 쓰고 있습니다. 간혹 구출된 생존자의 소식이 희망을 갖게 만들고는 있지만, 튀르키예의 지진 과학자인 오브군 아흐메트에 따르면, 현재 붕괴한 건물 아래에 갇혀 있는 사람이 약 20만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합니다. 추위와 공포 속에서 애타게 구원의 손길 만을 기다리고 있는 그들을 생각하며, 함께 간절한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일찍이 역사가인 아놀드 토인비는 튀르키예를 가리켜 “인류문명이 살아 있는 거대한 옥외 박물관“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구원과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전도여행을 떠났던 바울 일행의 행적에도 튀르키예와 시리아는 늘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쌓아 올린 문명의 유산도 자연의 거대한 위협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는 것은 한 순간입니다. 복음을 들고 넘나 들던 국경도 인간의 탐욕과 정치적 이익 앞에서는 맥맥하게 막혀 버린 장벽이 되어 버렸습니다. 실제로 피해 지역 중 하나인 시리아 북부 이들리브는 시리아 정부군과 반군이 대치하고 있어 구조의 손길조차 미치지 못하는 곳입니다. 생명을 유린할만큼 정치 경제적 이해타산이 더 높은 장벽을 쌓아 버린 결과입니다. 다행히 튀르키예의 국경 지대를 개방하여, 유엔의 구호품이 이제야 지원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생명을 구하기 위해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연 셈입니다. 경계를 넘어선 건 정치적 반목 세력만이 아닙니다.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세계 여러 나라의 시민들이 마음을 모아 필요한 구호 물품과 인력을 보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종교 간의 갈등도 잠시 제쳐 두고, 생명을 향한 보편적 인류애를 실현한 것도 경계를 넘어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가 전하려 했던 복음의 핵심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경계를 무너뜨리고, 사랑으로 가득 찬 하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 그게 바로 진정한 교회의 소명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도 세상의 경계를 넘어선 생명의 사역에 함께 동참하고자 합니다. 물리적인 거리를 극복하기는 어렵겠지만, 기도와 물질적 지원으로 이 선한 사역에 마음을 다해 협력해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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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양칼럼] 2월 6일 2023년 Publish on February 09,2023관리자
    고대 근동지역에서 볼 수 있는 농경문화의 재미있는 풍습 가운데 멍에의 위치를 두고 붙이는 ‘소싸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쟁기나 마차를 끌기 위해서 두 마리의 소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한 쪽에 멍에를 멘 소가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하거나, 다른 쪽 소가 말을 듣지 않고 따르지 않으면 어려움을 겪곤 했습니다. 그래서 멍에를 멜 소를 결정하기 위해 먼저 소들 간에 싸움을 붙여서 일종의 서열을 정해주었습니다. 싸움에서 이긴 소가 마부의 오른 편에 위치하여 멍에를 메고, 진 소는 왼쪽에서 멍에 진 소를 따르게 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마부는 자신의 오른 쪽에 있는 소만 집중해서 몰면, 왼 편의 소는 자연스럽게 따라와서 한 번에 통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께서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우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제자로 삼으시려는 예수님의 의도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라고는 하지만, 멍에를 메라는 말의 어감이 어쩐지 내키지 않는 이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가뜩이나 삶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수고를 가중시키는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우리를 무거운 짐과 멍에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쉬게 하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그 증거입니다. 물론 이 약속은 만병통치의 묘약처럼, 모든 걸 단숨에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희망고문‘ 같은 기대를 가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멍에를 메고 무작정 고난의 길을 가라고 등 떠다 미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 십자가를 진 이들의 고통을 함께 분담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혼자 세상 모든 무거운 짐을 지고 가게는 하지 않으실 것이란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인 것이지요. 주님이 주신 멍에는 세상의 것과는 달리, 홀로 감당해야 할 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멍에는 삶을 멍들게 하고 짓누르는 죄의 예속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평안과 사랑으로 이끄는 구원의 증표입니다. 그것도 함께 만들어 가는 공동의 작품입니다. 그러니 참소망은 저 멀리에서 기약없이 찾아오는 우연한 기회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함께 멍에를 지며, 하늘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세우려는 이들에게 필연적으로 나타날 선물입니다. 새해의 한 달을 지나온 우리에게도 주님은 함께 멍에를 메고 하늘의 참소망을 이루어 보라고 요청하고 계십니다. 여전히 세상의 멍에와 벌일 힘든 씨름을 멈출 수는 없겠지만, 주님이 주신 새 멍에를 지고 주님의 동행 안에서 참된 소망의 열매를 서로 함께 맺어가는 복된 한해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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