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의인이 죄인과 함께 벌을 받아야 하나요? Publish on June 12,2019 | 홍삼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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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서로 상반되는 듯한 구절들이 등장한다. 한쪽에서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심판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다른 쪽에서는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무고한 사람도 심판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에스겔서를 보면 몇 장 사이를 두고 위의 두 가지 상반된 내용이 함께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 에스겔 18장 19~20절을 보자. 각자가 자신에게 합당한 상벌을 받도록 해야지 남의 것을 대신 받게 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고 있다. “아들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내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였으면 그는 반드시 살려니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반면에, 에스겔 21장 3~4절을 보면 악인의 죄 때문에 의인도 함께 심판 받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땅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를 대적하여 내 칼을 칼집에서 빼어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지라 내가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 터이므로 내 칼을 칼집에서 빼어 모든 육체를 남에서 북까지 치리니.” 이 구절을 읽을 때 우리에게 이런 의문이 생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심판하실 때 악인만 심판하시면 되지 왜 악인과 함께 의인도 심판하신다고 하는가? 의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살려 주셔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런 식으로 무차별적으로 악인과 의인을 함께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는 해당 구절이 배경으로 하고 있는 특정 상황을 살피는 데 있다. 표면적으로 보면 위의 두 구절은 분명히 서로 상충되는 내용이다. 서로 정반대의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각 구절이 배경으로 하는 특정 상황을 알고 나면 그 구절들이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첫 번째 경우부터 살펴보자. 사람이 각자 자신이 행한 데 따라 상벌을 받게 해야지 남의 것을 대신 받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형사법정을 배경으로 하는 말이다. 가령, 법정에서 재판관이 어떤 범죄에 대해 형벌을 내릴 때, 형벌을 받아야 하는 아버지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해서 아들이나 딸을 대신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신명기 24장 16절도 동일한 법정의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아버지는 그 자식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두 번째 경우는 다른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의인이 악인과 함께 칼의 심판을 받는다는 내용은 개인사에 관계하는 형사법정의 상황이 아니라, 민족 전체에 관계하는 공동 운명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여호수아 7장에 나오는 아간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아간은 여리고와의 전투에서 얻게 될 모든 전리품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명령을 어기고 값나가는 물건을 따로 떼어서 몰래 감추어 두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이 그다음 이어지는 아이성 사람들과의 전쟁에서 패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왜 그러셨을까? 아간만 처벌하시면 되는 것을 왜 온 이스라엘을 처벌하신 것일까? 그 이유는 아간의 범죄는 그 사람 혼자만의 범죄가 아니라 온 이스라엘의 범죄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범죄가 가지는 사회적 파장성을 여호수아 7장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7:1).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7:11).
여기에 범죄의 주체로 아간이라는 개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들” 혹은 “이스라엘”을 언급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명령하신 내용은 아간 개인에게 주신 명령이 아니라 이스라엘 모두에게 주신 명령이다. 여리고는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것이기 때문에 백성 중 어느 누구도 전쟁을 통해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사사로이 취하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것이 되어서 신성모독의 죄를 짓는 것이 되고, 이에 대해 당연히 엄중한 처벌이 내리게 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간의 범죄는 개인에게 주신 명령을 어긴 것이 아니라 전쟁의 상황에서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주신 명령을 어긴 것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아이성 사람들과 전투하기 전에 아간의 범죄를 발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형사법정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아간에게만 엄중한 형벌이 내렸을 것이다. 전체 공동체에는 큰 악영향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아간의 범죄에 대해 모르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군대가 아이성 사람들과 전쟁을 하게 되고, 이때 참패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항의할 수 있다. 왜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간의 죄를 밝히셔서 그 사람만 죽게 하지 않으셨는가? 다른 사람들이 아간의 범죄를 모르는 상태에서 전쟁을 시작했다가 패배 당하는 것은 너무 부당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엄격히 따져서 그것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신경 써야 할 문제이지 하나님이 신경 쓰실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신 것을 가지고 항의하면 안 된다. 사람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공동체가 함께 대응해야 하는 문제이다. 전쟁이 벌어질 때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동체만이 존재한다. 전쟁에서 사람이 죽을 때 악인만 죽지 않는다. 악인과 의인이 무차별적으로 함께 죽는다. 이것이 현실이다. 여호수아 7장과 에스겔 21장은 의인과 악인이 함께 죽는 공동체적 현실을 있는 그대로 설명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왜 그런 전쟁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의인을 따로 보호하고 살려 주시지 않느냐고 불평하면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께 공평한 요구가 아니다. 우리는 공동 책임 혹은 공동 운명에 대해 우리에게 유리한 것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한 사람이 죄를 지어서 그가 속한 전체 공동체가 함께 벌을 받을 때 우리는 그것이 부당하다고 항의한다. 그러나 정반대의 상황에서는 침묵한다. 한 사람의 특별한 순종으로 그가 속한 공동체 전체가 큰 복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불공평하다고 항의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서,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이 복을 받고 더 나아가 세상의 많은 민족이 복을 받게 되었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항의하지 않는다.
형사법정의 경우같이 사람이 관여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의인과 죄인이 서로 상벌을 공유하게 해서는 안 된다. 의인은 상을 받고 죄인은 벌을 받게 해야 한다. 그러나 전쟁의 상황같이 사람이 개인사에 개별적으로 관여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의인과 죄인이 서로 상벌을 공유하는 것이 현실이다. 경우에 따라서 죄인이 의인에게 주어질 상을 받기도 하고 의인이 죄인에게 주어질 벌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개인 영혼의 구원은 공동체의 운명과 상관이 없다. 하나님의 영원한 법정에서는 개인이 행한 것에 대해서 자신만이 책임을 진다. 비록 육신적으로는 부당하게 고난 받고 무고한 죽음을 당할 지라도,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내가 지옥 가지 않고 다른 사람의 선행 때문에 내가 천국 가지 않는다. 의인과 죄인이 함께 벌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법정을 배경으로 하는 당위이고 의인과 죄인이 함께 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인간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