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나님은 죄 없는 웃사를 죽이셨나요? Publish on October 01,2018 | 홍삼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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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6장에 보면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여호와의 궤는 아비나답의 집에 있었는데 그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다윗왕의 명을 받들어 소가 끄는 새 수레에 여호와의 궤를 싣고 다윗 성으로 출발하였다. 그런데 중간에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 소들이 갑자기 뛰는 것이다. 그래서 궤가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웃사는 급히 손으로 궤를 잡았는데 이것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자 다윗은 여호와의 궤를 다윗 성으로 가지고 오는 것을 중단하고 궤를 오벧에돔의 집에 두도록 하였다.
이 이야기를 읽을 때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뭔가 불공평한 일을 하신 것처럼 느낀다. 웃사는 하나님의 궤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비상조치를 취한 것뿐인데 왜 하나님은 선한 일을 한 웃사를 죽이신 것일까? 또한 웃사가 이렇게 소가 끄는 수레를 몰게 된 것도 자기가 계획해서 한 일이 아니고 다윗왕의 지시에 따라서 했을 뿐인데 하나님이 책임을 물으신다면 다윗에게 책임을 물으셔야 하지 않을까? 한편, 다윗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여호와의 궤가 당연히 있어야 할 성전에 있지 않고 다른 곳에 있을 때 마음이 너무나 불편했다. 그러던 중 어느 정도 정치적 안정을 되찾았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궤를 성전으로 옮겨오는 일이었다. 다윗은 오로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여호와의 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도록 명령한 것인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선한 마음을 보시고 웃사의 실수 같은 것은 눈감아 주셔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떻게 보면 웃사가 비상조치를 취한 것이 그렇게 심각한 죄가 아니고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일이라면 하나님도 정상참작을 해 주셔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웃사를 죽이신 것일까? 왜 하나님은 웃사를 죽이시고 다윗에게 큰 좌절감을 안겨주신 것일까?
우선 다윗이 잘못한 것을 먼저 살펴보자. 사무엘하에서 웃사의 사건 바로 전에 나오는 이야기는 다윗이 블레셋과 전쟁을 하는 이야기이다. 다윗이 블레셋과 전쟁하게 될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이었나? 바로 하나님께 물어보는 것이었다. “지금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려고 와서 진을 치고 있는데 적극적으로 나가서 그들과 싸워야 합니까 아니면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까?”(삼하 5:19) 하나님은 다윗에게 나가서 싸우라고 하셨고 다윗은 그대로 순종하고 나가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다음 블레셋이 다시 한 번 전쟁을 하러 올라왔다. 이때도 역시 다윗은 하나님께 여쭈었다.(삼하 5:23) 이때는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을 치실 테니 좀 기다렸다가 그들을 치라고 하셨고 다윗은 그대로 순종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 이야기가 끝나고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것이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꼭 있어야 할 내용이 빠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다윗은 하나님께 물어보는 일을 하지 않았다. 당연히 이 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니까 물어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위기에 처했을 때는 열심히 기도하다가 평안해지니까 기도를 잊은 것일까? 같은 내용을 다루는 역대상 13장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해서 물어보지 않았지만 부하들과는 의논했다고 되어 있다. “다윗이 천부장과 백부장 곧 모든 지휘관과 더불어 의논하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온 회중에게 이르되.”(13:1-2)
다윗이 실수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런 중요한 일이 있으면 당연히 하나님께 물어보고 또 성경에(당시에는 모세오경에)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먼저 찾아봐야 하는데 그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결정한 것이다. 민수기 7:9절에 보면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운반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여호와의 궤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천으로 덮고 네 사람이 어깨에 메고 운반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 나름대로 더 좋은 생각이 있었다. 새로운 수레를 사용해서 운반하는 것이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생각이 블레셋에게서 배운 것이라는 사실이다. 블레셋이 여호와의 궤를 이스라엘에게 반납할 때 바로 그 방법을 사용했다.(삼상 6:7)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본인의 선한 뜻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 겸손히 물어보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법대로 순종해야 한다. 사실 하나님의 방법이 엄연히 있는데도 하나님께 물어보지도 않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를 생각도 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선한 의지”가 없는 것이다. 정말 선한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뜻대신에 하나님의 뜻을 따를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
다윗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의지로 여호와의 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는 일을 했다고 하지만사실은 자신의 의지대로 일을 추진한 것이다. 그래서 일을 망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웃사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 다윗을 처벌하시면 되지 왜 시키는 대로 했던 웃사를 죽이신 것일까? 그 이유는 웃사도 역시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봤어야 하는 것이다. 민수기 4:15절에 보면 여호와의 궤를 메는 직무를 맡은 고핫 자손도 절대로 그것을 만지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만질 때는 죽는다고 되어 있다. 여호와의 궤를 20년 동안 자기 집에 모신 웃사는 당연히 이것을 알고 더욱 조심했어야 했다. 한편, 하나님의 계명을 전혀 알지 못하는 블레셋 사람들의 경우는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가서 그것을 보고 만지고 나중에 수레로 옮길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처벌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웃사의 경우는 다르다. 당연히 율법을 알고 그 방법대로 순종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는 사람에게 더 큰 책임을 물으신다. 제사장 교육을 받은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 이상한 향불을 드려서 죽임을 당했다. 자기 생각에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더 좋아하실 향불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생각을 앞세웠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웃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했어야 했다. 기도로 구하고 말씀으로 구했어야 했다. 하나님은 많이 받은 자에게 더 많은 것을 기대하신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는 자에게 그에 합당한 순종을 요구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