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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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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그런 하나님을 믿습니까? Publish on October 22,2012홍삼열
    성경을 읽다 보면 여러 가지 의문들이 생기는데 그 중 하나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왜 그렇게 잔인할까? 파괴적인 전쟁을 너무 좋아하는 것같다. 또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특별히 본받을 만한 고상한 존재가 아닌 것처럼 종종 묘사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신들을 섬길 경우 심하게 질투하고(출애굽기 20:5), 마치 혈기 있는 사람처럼 크게 분노하고(스가랴 8:2), 타당한 이유 없이 이스라엘을 편애하는 등 신의 품격에 잘 맞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이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선 우리는 성경이 수 천년 전에 생긴 문서라는 사실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성경은 당시 사람들의 윤리수준과 상식을 배경으로 하여 생겨난 문서이기 때문에 현대윤리와 상식의 잣대를 사용하여 비판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세계로 들어가서 그들의 현실과 윤리와 상식 수준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당시의 상황을 알면, 예를 들어, 성경에 나타난 전쟁의 잔인성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또 한 가지 우리는 신인동형론(anthropomorphism)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신인동형론은 신이 사람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성경에서 하나님을 어떤 인간적인 감정을 가진 것처럼 설명할 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인 표현이 아니라 제한된 능력을 가진 우리 인간들을 위한 표현인 것이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신에 관한 이야기를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자연히 사람 수준에 맞는 “유치한” 내용과 형식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아이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때 아이의 수준으로 내려가서 아이가 이해할 만한 내용과 형식으로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하나님이 질투하고 분노하고 편애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인간을 교화하고 인간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표현일뿐 하나님이 그렇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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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타클라라 연합감리교회를 위한 비전 Publish on January 21,2013홍삼열
    제가 지난 3월 23일 수요예배 때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교회의 비전을 함께 나눈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해서 이곳에 올려놓습니다. 그때 설교를 듣지 못하신 분들,  또 현재 우리가 3부 예배의 시작을 준비하는 시점에서 교회의 방향에 대해 알기를 원하시는 분들께 이 글이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 1. 예배가 살아 있는 교회 저는 우리 교회의 모든 예배가 살아 있는 예배, 하나님을 충만히 경험하는 예배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지난 주간에 Santa Rosa에 있는 수도원에 가 있었습니다. 주일이 되어 가까운 곳에 있는 미국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는데, 예배실이 5-600명이 들어가는 예배실이었습니다. 예배가 토요일 저녁; 주일 9:30; 11시에 세 번 있었고 box형 교회입니다. 예배형식이 굉장히 간단합니다. 10분 찬양; 5분 광고; 15분 찬양; 설교 30분; 마지막 찬양 5분. (헌금은 현관 여러 곳에 헌금함에 각자 넣게 합니다). 그리고 끝 (축도도 없습니다). 제가 예배를 드리면서 받은 인상은 찬양이 가수의 공연 같다는 점입니다. (회중이 따라 부르기 힘든 곡들, 그러나 듣기는 좋은 곡들을 연주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따라 부르지 않고, 찬양팀은 완전 professional들이고, 회중석 깜깜하게 하고, 무대는 색색 조명들을 바꾸어 가면서 분위기를 띄웁니다. 이렇게 한 동안 예배드리고 나서 밖에 나가니까 눈이 부셨습니다. 저는 이건 좀 문제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사람들의 참여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응이 없습니다. 그냥 시간 되어서 공연 보고 예배드렸다고 생각하고 집에 가는 것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여기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출석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 성인만 1000명은 족히 될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드리는 것은 일명 “구도자 중심의 예배”(seekers oriented worship)를 극단화시킨 것입니다. 좀 과하게 말하면,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철저히 비즈니스 마인드를 가지고 예배를 계획한 것입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 가기는 싫습니다.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은 좋지 않지만, 그렇다고 예배의 기본을 버리면서까지 이렇게 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방향으로는 가지 않을 것입니다. 구도자 중심의 예배이지만, 이렇게 극단으로 나가지 않은 한 예가 밴나이스의 church on the way라고 생각합니다. 오순절 계통의 교회인데 제가 밴나이스에 있을 때 여러 번 참석했던 교회입니다. 이 교회도 공식 예배가, 토요일 저녁이 1부 (주일에 봉사할 사람들 위주로); 그리고 주일에 여러 번 예배가 있습니다. 이곳의 예배 형태도 아주 간단한데, 한 30분 찬양을 하고 (찬양 중간 중간에 합심기도의 시간들이 있다); 30분 설교를 하고; 영상으로 광고를 하면서 동시에 헌금을 하고; 그 다음 찬양하고 축도하고 끝이 납니다. 이 교회에서는 찬양팀이 공연을 하지 않습니다. 회중석을 절대 어둡게 하지 않고, 극장식으로 조명을 바꾸지도 않습니다.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곡을 회중과 함께 합니다. over하지 않습니다. 저는 예배의 형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형태이든지 예배가 살아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완벽한 예배, 근사한 예배를 드렸어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으면, 그 예배는 망친 예배입니다. 전통적인 예배이든 구도자예배이든 극장식 예배이든 그 예배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그 예배는 무조건 망친 예배입니다. 그런 예배는 결국 교회를 죽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역에 따라, 문화에 따라, 연령층에 따라,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한국의 선교 초기에는 남자와 여자가 옆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면 절대 안 되었습니다. 이런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면 은혜가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만일 여자만 모이는 교회, 남자만 모이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다면, 이게 은혜가 안 되는 것입니다. 현대에는 이런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 특정한 예배 형태가 잘못된 것이라기보다는, 시대가 변했는데도 이런 변화를 조금이라도 수용하는 “겸손함”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의 본질을 생각하기보다 옛날부터 그래 왔으니까 당연히 지금도 그래야 한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교회 ministry의 본질을 망각하는 태도입니다. 교회가 왜 존재합니까? 교회는 기본적으로 남을 섬기라고 부름을 받은 것이지, 나 자신의 것을 즐기고 고집하라고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변화가 필요할 때는 변화에 순응하는 것이 예배의 본질을 지키는 신앙의 자세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전체적으로 봐서 젊어지기를 원한다면, 젊은 사람들이 원하는 예배의 형식과 내용을 도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손한 자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젊은이들에게 어필하는 예배를 하나 만들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열린 예배로 부를 수도 있고 젊은이 예배로 부를 수도 있고 구도자 예배로 부를 수도 있는데,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현대 젊은이들에게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는 형식을 우리가 도입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키타 치고 드럼 치고 청바지 입고 일어서서 찬양 드리면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이런 예배를 시도한 많은 교회들이 실패를 경험했는데, 그 이유가 본질을 취하는 대신에 형식만 따라했기 때문입니다. 열린 예배는 형식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의도에 관한 것입니다. 교회 ministry의 기본 방향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 편한 대로 자기중심의 ministry를 고집하면, 아무리 열린 예배 백 개를 만들어도 소용없습니다. 다 실패합니다. 우리가 내부지향적이 아니라 외부지향적이 되고, 현대의 젊은이들을 교회로 끌어들이는데 관심이 있다면, 우리의 마음가짐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궁극적으로 현재의 교인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라면, 밖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내부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그들을 편하게 해줄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밖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어떻게 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보다 잘 경험할 수 있게 도와주는가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되면 교회는 활기차게 성장하는 것이고, 이게 안 되면 아무리 많은 시도를 해봐도 해보나 마나 실패로 돌아갑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런 교회는 제 구실 못하는 단체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산타클라라 교회가 예배가 살아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노년층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젊은 층도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고, 2세들도 하나님을 경험하는 예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되면 우리 교회는 성장합니다.   2. 차세대를 키우는 교회 우리교회 인터넷 웹페이지에 보면, 산타클라라 연합감리교회 “사람을 키우는 교회”로 되어 있습니다. 이성호 목사님 때부터 있던 표현인데, 너무 적절한 표현이어서 저도 그대로 사용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 이민교회의 공통된 고민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 문제입니다. 1세대와 2세대가 함께 조화를 이루어 신앙생활하는 교회가 거의 전무합니다. 오랜 역사를 가진 이민교회들이 교회에서 2세들을 키웠는데, 이 1세들이 자라서 30대 40대 50대가 되었는데, 이들을 포용하고 함께 가는 교회가 거의 없습니다. 우리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가 차세대를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정의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가 집에서 아이를 사랑으로 키운다고 할 때, 그 의미는 그들에게 우선권을 준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조금 못 먹어도 아이의 미래를 위해 기쁘게 아이에게 투자하고, 내가 좀 멀리 드라이브해도 아이가 좋은 학교에 다니게 하기 위해 직장에서 멀리 집을 구하고, 내가 바쁘지만 아이의 학교에서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그쪽에 시간을 먼저 할애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아이를 사랑으로 잘 키우는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시각으로 볼 때, 우리는 우리의 2세들에게 충분한 배려를 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교회가 실수하고 있는 것이, 말로는 자녀들에게 신경 쓴다고 하고 그들이 우리의 미래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그들에게 우선권을 주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예배 시간 중 가장 편한 시간은 부모세대가 차지하고, 가장 좋은 공간도 부모가 차지하고, 아이들은 남은 것만을 줍니다. 재정도 배정을 할 때 아이들에게 우선권이 없습니다. 한인교회들이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자녀세대를 길렀으니 아이들이 스스로 움직이는 자유를 얻었을 때, 떠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제가 올해 교회수첩을 준비하면서, 우리 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하는 교회, 균형있게 성장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썼습니다. 사람의 몸에 특별한 병이 없고 건강하면, 자연히 자랄 수밖에 없습니다. 자라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균형있게 먹고 균형있게 운동하고 병이 없으면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우리 산타클라라 교회가 잘 자라기 위해서는 불균형을 치료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자녀 세대와 1세대의 불균형, 오래 믿은 사람과 새로 믿는 사람의 불균형, 나이 드신 세대와 젊은 세대의 불균형, 이것이 치유되면 자연히 우리 교회는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2세대를 키울 수 있을까요? 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녀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입니다. 건물과 시간과 재정에서 자녀들에게 우선권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들 세대가 큽니다. 현재 우리 교회는 공간의 제약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모임 공간이 부족합니다. 그럴 때 자녀들에게 우선권을 주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자녀들에게 필요하다면, 성가대 실도 양보하고, 대예배 시간도 양보하고, 친교실도 양보할 수 있는 마음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런 마음 자세가 아니면, 절대 우리 교회는 2세대를 품을 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 산타클라라 교회가 1세와 2세와 더 나아가 3세가 함께 신앙생활 하는 큰 그릇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오늘부터 자녀들에게 우선권을 주는 자세, 우리가 그들의 미래를 위해 기쁨으로 희생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되면 우리 교회는 반드시 2세를 품는 풍성한 교회가 됩니다.  3. 제자를 키우는 교회보통 교회성장에 대해서 의견이 갈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성장 하면 양적인 성장을 떠올립니다. 교인수가 늘고 매주 들어오는 헌금이 늘고 등등... 반면에 어떤 분들은 그런 양적 성장을 곱지 않은 눈으로 보면서, 진짜 성장은 그런 양적 성장이 아니라 질적 성장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배우고 세상에서 더욱 신자답게 사는 것, 이것이 교회의 진정한 성장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두 가지가 함께 가는 것이 정상적인 성장이라고 믿습니다. 요즘 현대인들은 편안히 교회에 다니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작은 교회는 더 작아지고 큰 교회는 더 커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지난 몇 년간 depression으로 사회전반이 어려워지고 교회들도 재정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는데, 이런 기간에도 꾸준히 성장하는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교회들일까요? 바로 대형교회들입니다. 작은 교회에 다니면 더 많이 헌금하고 더 많이 헌신해야 하는데 이게 부담이 되어서, 그런 거 안 해도 되는 대형교회들로 사람들이 몰리게 된 것입니다. 전체 교회들의 분포를 볼 때, 이런 식으로 양극화되는 것은 절대 건강하지 않은 현상입니다. 만일 어떤 나라에 중형 사이즈 기업은 거의 문을 닫고, 대기업과 소규모 기업만 주종을 이룬다면, 그 나라의 경제는 보나마나입니다. 아주 허약한 형태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중형교회들이 많이 있는 것이 건강한 형태인 것입니다. 숫자적으로 보면, 장년 200명 정도의 교회들이 주종을 이루면 이는 아주 건강한 형태인 것입니다. 그러면 현재 산호세 지역의 상황은 어떤가요? 이런 정도의 교회가 대부분인가요? 아닐 것으로 추측됩니다. 몇몇 큰 교회들이 있고 나머지는 작은 교회들일 것입니다. 교인수가 많다고 자동적으로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장을 이룬 교회는 아닙니다. 또 그렇다고 큰 교회는 항상 어떤 비윤리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그렇게 된 거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교회가 양적으로 커졌다면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함께 공존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산타클라라 교회의 성장을 출석인원이나 헌금의 양으로 재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얼마나 많은 제자가 양성되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싶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주님의 제자들을 키우고 그들이 맘껏 사역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교회에 주님의 제자들이 많아지면, 자연히 전도되는 숫자도 늘고 헌금도 늘게 되는 것이지, 그런 외적 현상을 목표로 추구하면 곤란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교회가 제자를 키우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말씀으로 훈련하고, 사역을 훈련하고, 직접 사역분야에서 도움을 받으며 일을 하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물질로 봉사로 헌신하는 이런 제자들이 많아지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가 제자를 키우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가 우리 교회를 생각해볼 때 현재로서 가장 필요한 것이 서로를 섬기는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시기도 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좇아내라고 하시기도 하셨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으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지만, 우리 교회의 현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서로를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발을 씻기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죠? “선생이 이렇게 했으니 너희도 이렇게 따라서 하라.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라.” 또 마태복음 20:28절에 보면, “주님은 섬김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제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남을 섬기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라기는 교회의 중직들이 먼저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목사와 장로님들이 먼저 섬겨야 다른 사람들이 섬깁니다. 정책을 결정하는 위원장님들이 먼저 섬겨야 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섬깁니다. “자기는 섬기지 않으면서 왜 나보고 섬기라고 해!” 이런 말이 자주 나오는 교회는, 예수님의 제자를 키우는 교회와는 거리가 먼 교회입니다. 그래서 목사와 장로님과 교회의 임원들이 먼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주차자리를 양보하고, 새신자들을 위해 편안한 예배시간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편안함을 포기하는 등등의 섬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럴 때 교회가 성장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의 상황에서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일자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내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남들, 특히 우리 교회에 경험이 많지 않은 사람들을 섬기는 방법입니다. 새로 교인이 오면 어느 시간이 지나면 교회에 봉사하고 싶어 합니다.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새로 봉사하려고 하면, 기존에 이미 봉사하고 있는 분들이 이걸 못 받아들입니다.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나설라고 해!” 교회마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이런 것이 교회의 전체 분위기이면 그 교회는 망합니다. 새교우들이 볼 때, 자기들끼리 꽉 쥐고 다른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되면, 아예 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이 반복이 되면 그 사람은 교회를 떠납니다. 그래서 비록 내 마음에는 안 들고 실수가 있을지라도, 새로운 사람들, 아직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일할 수 있도록 내 자리를 내주어야 교회가 성장합니다. 부엌일에서, 꽃꽂이에서, 성가대에서, 각종 봉사의 기회에서, 어떤 분야이든 기존에 열심히 일 하시던 분들이 자기 것을 남들에게 넘겨주는 섬김의 자세가 있을 때, 교회에 새사람들이 붙고 교회가 부흥합니다. 또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은 각 사역분야별로 boundary에 너무 지나치게 신경쓰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진짜 전도하고 기도하고 배우고 양육하는데 힘을 집중하지 못하고 (즉 ministry에 집중하지 못하고), 사소한 것이나 절차를 가지고 싸우고 변호하는데 시간과 힘을 낭비하면 교회가 성장하지 못합니다. 각 위원회에서 집중해야 할 것은, 내 위원회가 교회의 전체 방향에 부합하여 잘 가고 있는가? 더 잘 그쪽 방향으로 가기 위해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 이런 것들에 신경쓰며 힘을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위원회나 사람이 내 영역에 침범을 했다고 느낄 때,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런 실수가 한 두 번이고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일을 열심히 하려고 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라면, 교회의 덕을 위해 절대 소모적인 싸움을 시작하면 안 됩니다. 한두 번 실수는 그냥 넘어가주는 아량, 즉 섬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교회 전체에 이런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으면, 이 boundary 침범의 이슈로 공격을 당할 때 몸을 사리게 되고, 그 다음에는 아예 일을 하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더 이상 성장하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예배가 살아있는 교회, 차세대를 키우는 교회, 그리고 주님의 제자를 키우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하고, 그런 교회를 만드는 방향으로 목회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여러분들이 이 비전에 동참을 하신다면, 하나님은 우리 산타클라라 교회를 부흥 발전시켜 주실 것입니다. 제가 판단하기에 성인 1000명 정도가 되면 (아이들까지 1300정도가 되겠죠) 이곳에서는 교육관 2층을 올려도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 정도 되면, 제 소망은 저희 교인들 200가량을 떼어서 지교회를 세워 개척시키고 싶습니다. 이렇게 하면 좋은 점은 자동적으로 지도력이 갈려서 일할 기회가 많아진다는 점입니다. 이 정도 사이즈면 충분히 자체적으로 활동할 수 있고 경쟁력도 있게 됩니다. (또 이정도 사이즈의 교회가 많아지면 우리 산호세 교회들을 전반적으로 건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교회를 개척시키면, 하나님이 더 많이 채워주실 겁니다. 그 다음에 또 그 숫자가 차면 또 개척시키고, 이런 식으로 3-4번을 하고 싶은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저의 목회방향과 vision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었는데,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면 여러분이 기도하시는 중에 동일한 음성을 들려주실 것입니다. 함께 한 마음으로 비전을 추구함으로 이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더욱 굳건히 더욱 풍성히 세워나가게 되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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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ristian Denominations 3: Presbyterian Church Publish on February 20,2011홍삼열
    Presbyterian Church (Romans 8:28-30)   Today we continue the denominations of Christianity series. For the last two Sundays, we considered the Roman Catholic Church and the Lutheran Church as the first Protestant denomination. Today we will consider the Presbyterian Church, the church that follows the lead of John Calvin.   First let us consider the word presbyterian. This word presbyterian came from the Greek word presbuteros (πρεσβύτερος), which means “elder.” In the early church, the office of elder and the office of bishop were identical and weren’t differentiated until later. The fact that the early church operated based on the plurality of elders or bishops is the basis upon which the Presbyterian Church has developed its distinctive system of church government, i.e., the elder system, as opposed to the bishop system of the Catholic Church. According to this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 elders are chosen by the people and ordained for special services. One interesting fact about this system is that not only pastors but also lay people are elected and ordained as elders. So in the Presbyterian Church, we see two kinds of elders: 1) teaching elders who are the ministers of the Word and Sacrament, and 2) ruling elders who representing the laity of a local church, exercise leadership, government, and discipline, and have responsibilities for the life of the church.   Now let us talk about Calvin, the founder of the Presbyterian tradition. Like the case of Luther who began the Lutheran Church, Calvin was the one who provided the specific DNA for the Presbyterian Church. It is quite interesting to compare Calvin and Luther, because their differences determined in considerable part the future differences that would exist between the Lutheran Church and the Presbyterian Church. To speak of Luther, the best description of him would be that he was a first generation reformer. He started new things when such things were non-existent. He boldly changed some Catholic practices when the majority of Christians saw no problems in them. And of course, creating this kind of new culture required a strong character, and in Luther’s case, the character of an effective demagogue. His words were straightforward and inflammatory. People who read or listened to him were almost forced into agreeing with him and following his reform movement, or they were angered in such a way to attack him back.   But Calvin, a second generation reformer, had a different character. As a humanist scholar himself, he always valued reason and common sense. His strength was to think clearly and to arrange the new Protestant thoughts and practices in such a way to create a complete theological system. One good example was his master piece,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This book was written when he was 26 years old and included all possible aspects of the Protestant theology. And due to its coherent and complete nature, it has become the authority for all Presbyterian and Reformed churches.   Another important thing about Calvin is that Calvin’s reform program far exceeded Luther’s. From the perspective of Calvin, Luther’s program was incomplete for he was seen not progressive enough. Of course, when Luther started his reform movement, it was already a great novelty in the Catholic Church because nobody had seen or experienced what Luther was doing. So it would be too harsh or even anachronistic for later people to say that Luther should have gone farther. But that was what the second generation reformers felt anyway about Luther. They felt that Luther was too conservative, that he compromised on so many things against his original spirit of reformation. The case in point was the use of an organ. Luther’s position was that if any aspect of church practice did not contradict the scriptures, we should value tradition and continue to use it, and so he continued to use organs in his churches. But Calvin and other reformers did not agree. Since they believed that they should reject any Catholic tradition not explicitly commanded in the Bible—and of course there is no mention of an organ in the Bible—they banned it from their churches. This is how Lutheran churches came to preserve more of a Catholic “look and feel” while their Presbyterian counterparts became quite different from the Catholic Church.   So this is a chart explaining the Presbyterian position. According to the Presbyterian tradition, Luther started very well; he was on the right track in the beginning but did not go far enough. So here in this chart, the Lutheran Church is described as being a little bit out of track. It is the Reformed or Presbyterian Church that has corrected this error and put the reformation program back on track.   Now let us consider the distinctive marks of Presbyterianism. If someone asks me what distinguishes the Presbyterian Church from others, I would say these two things. First is the elder system, which we’ve already discussed above. The highest administrative authority resides in the council of elders, both preaching elders and ruling elders. The second is their Reformed theology which is conveniently summarized with the acronym TULIP. Let me explain this.   T stands for total depravity. This doctrine asserts that, as a consequence of the fall of Adam and Eve, every person born into the world is totally corrupt and enslaved to the service of sin. Thus, all people by their own abilities are morally unable to choose to follow God and be saved. The only hope for them would be a help coming from outside, that is, the free grace of God. Then we may want to ask this question: “If every person is totally corrupt and thus unable to choose to follow God, then how can we be saved?”   This question leads to the next letter of the acronym U, which stands for unconditional election or predestination. According to this doctrine, God chooses people to be saved not because He sees some excellent qualities in them. Rather, He chooses them because of His mysterious will for them regardless of their good faith or behavior. In fact, the decision about salvation is made even before their birth, even before the creation of the world. So there’s nothing that man can change about this decision. The distinction between the elect and the non-elect are not in themselves but in God’s divine will, and this is why election is called unconditional.   The next letter in the acronym is L, limited atonement, which means that Jesus died only for the elect. This doctrine is driven by the concept of the sovereignty of God in salvation. If God is all powerful and He knows everything, especially who will be saved and who will not, then it doesn’t make any sense that Christ should die for those who will not be saved. If the price has to be paid for the sins of those in hell, it should be paid by themselves, not by Christ.   The fourth letter in the acronym is I, and it stands for irresistible grace. This doctrine asserts that when God gives His grace to someone and wills to save him, this individual cannot resist it but has to accept it so that he may finally be saved. But this does not mean that every influence of God’s Holy Spirit cannot be resisted. Yes, it can often be resisted. But ultimately, the Holy Spirit is able to overcome all resistance and make the elect saved. This is what they mean by irresistible grace.   The final letter in the acronym is P, which stands for perseverance of the saints. This doctrine teaches that once a person has been elected to be saved by God, he is eternally secure, that is, he cannot lose his salvation. For God will continue to give him a special grace that will sustain his faith until the end. Then how should we understand those who first believed and then apparently fell away from faith? According to Calvin, they either never had true faith to begin with, or will return before they die.   Now what is the Methodist position about these five points of Presbyterianism? We Methodists only partially agree with them. We agree that every human being is too corrupt to achieve salvation of their own. Without the grace of God, salvation is impossibility for us. But we do not agree that human beings are totally corrupt, that our ability to seek God is totally shattered. Instead, we believe that in spite of the fall of Adam, God still preserved in us an ability to respond to His grace. To use the expression of John Wesley, we have the prevenient grace with us, the grace that comes before us to make us prepared and receptive to a further grace of God. So we have the free will to respond to God’s grace. If we accept this grace and believe in Jesus Christ, then we are saved. If we resist the grace, then we are not saved. So as opposed to the Presbyterian doctrines of irresistible grace and unconditional election, we say we are responsible for our own salvation: it is we who should accept the offer of salvation; it is we who should believe in Jesus Christ to be saved.   Again concerning the concepts of limited atonement and the perseverance of the saints, we Methodists have a different opinion. We believe that Jesus died literally for all people as 1 Timothy 2:4 says “God wants all people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and 2 Cor. 5:15, “He died for all, that those who live should no longer live for themselves but for him who died for them and was raised again.” We also believe that any believer, if he does not continue to strive to follow Jesus, could fall out of salvation. That is the case of those who made spiritual shipwreck in 1 Timothy 1:19, “Hold on to faith and a good conscience. Some have rejected these and so have shipwrecked their faith,” or the case of those branches cut off from the Olive Tree in Romans 11:20-21, “Do not be arrogant but be afraid. For if God did not spare the natural branches, he will not spare you either.”   In this way, we do not agree with our Presbyterian friends. Especially we do not accept their doctrine of unconditional election or predestination. If by that doctrine they simply mean that God foreknows who will be saved and who will not, we can gladly accept that. But if they mean that God predetermines some people for eternal salvation and others for eternal damnation regardless of their faith, we cannot accept that. For if that is true, why evangelize? Why make an extra effort to live a holy life?   But please don’t get me wrong here. By saying this, I do not mean that what they believe is false. Rather, I would say that what they believe is as true as what we believe, because the Bible supports not only our Methodist position but the Presbyterian position too. As much as we can quote from the scriptures to support our position, they can do the same to support theirs. One good example is the scripture reading for today, Romans 8:28-30, “We know that all things work together for good for those who love God, who are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For those whom he foreknew he also predestined to be conformed to the image of his Son, in order that he might be the firstborn within a large family. And those whom he predestined he also called; and those whom he called he also justified; and those whom he justified he also glorified.”   If the Presbyterian position is as true as ours, then how should we understand this difference and at the same time hold the integrity of the Bible? I think part of this difficulty originates in our fundamental limitation as created beings. As such, we have only a limited capacity to know the truth, and so one person or one party cannot simply say, “We know the Bible completely. We have the whole truth. But you don’t!” Rather I believe we need to take a humble attitude as Paul confessed in 1 Cor. 13:12, “Now we see but a poor reflection as in a mirror, but then we will see face to face. Now I know only in part, but then I will know fully.”   Now to better understand the Presbyterian position and learn from our friends in that tradition, we need to turn our attention to the concept of the sovereignty of God. The confession that God is the sovereign of all is the basis for all Presbyterian theology. For it is the confession that God is the king of our lives, that God takes care of all things that happen to us. Especially in relation to our salvation, it is the confession that salvation is not our own achievement but only the grace of God.   But sometimes it is difficult to accept the sovereignty of God because we see so many evil things happening in this world, like the indiscriminate killings in Africa, many children being kidnapped and raped in this country, huge tsunamis devastating many coastal cities, etc. When these things happen, we doubt the sovereignty of God; we question if God is really in control. But in spite of such doubt—this may be the necessary, inescapable result of our limitation as human beings—there is one thing that we can be absolutely sure about, which is the redemptive aspect of the sovereignty of God, in other words, that nothing is beyond the redemptive power of God. By faith we know that whatever happens to us, it is never outside the power of God to use it for His good purpose and for our own benefit. God is so powerful and so sovereign that he can include even many evil things in his work of salvation. This is the sovereignty of God we confess and believe. And so let us trust God in all circumstances. Let us have assurance of this great power of God, the power that can use and change even the worst situations for His glory and for our own benef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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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5
    크리스마스가 진짜 예수님 생일이 아니란 말이 있던데... Publish on January 05,2012홍삼열
    이 글은 제가 [섬기는 사람들] 10:6 (http://www.koreanumc.org/site/apps/nlnet/content3.aspx?c=kqLSIYOxGnF&b=5687987&ct=8059177)에 기고한 내용입니다.------------------------------------------------------------------------------초대교회 때부터 예수님의 생일에 대해 최소한 두 가지 전통이 있어왔다. 하나는 현재 우리가 성탄절로 지키는 12월 25일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주현절로 지키는 1월 6일이다. 그러나 역사적 고증을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바는 그 두 날짜가 예수님의 생일과 별로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 성경의 기록과 당시 팔레스타인의 기후를 고려해 볼 때 예수님이 겨울에 태어나셨을 확률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복음서에서 목동들이 양떼들과 함께 들에서 잠을 자야 하는데 이스라엘의 겨울은 비가 많이 오는 추운 계절이기 때문이다. 또 당시 호적 등록을 위해 유대인들이 대규모로 각자 고향으로 이동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것도 우기(雨氣)인 겨울에 일어났을 확률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우리에게 세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첫째, 왜 성경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중요한 예수님의 생일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았을까? 둘째, 어떻게 해서 12월 25일이 예수님의 생일이 되었을까? 셋째, 성탄절이 실제 예수님의 생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이상 우리가 성탄절을 계속 지켜야 할까?우선 첫 번째 의문점은 생일에 무관심한 초대교회의 독특한 문화를 이해하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초대교회가 생일에 별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로 증명이 가능한데, 우선 초대교부(敎父)인 이레니우스나 터툴리안은 교회의 주요 절기들을 다룰 때 성탄절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넘어갔다. 3세기 교부인 오리겐은 바로(창 40:20)나 헤롯(막 6:21)같은 죄인들만 생일을 지키지 훌륭한 신자들은 절대 생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주장하기까지했다. 이런 분위기는 현재 가톨릭교회에서 지키는 성인축일(祝日)의 전통에 그대로 남아있는데, 성인축일은 성인들의 생일이 아닌 순교일을 기념하는 것으로서 생일에 관심이 없는 교회의 분위기를 잘 말해주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의 탄생일도 교회의 관심사항이 아니었고, 그렇기 때문에 정확한 성탄날짜가 역사기록에 남지 않게 된 것이다.이제 두 번째 의문점으로 넘어가자. 어떻게 해서 12월 25일이 예수님의 생일이 되었을까? 12월 25일은 전통적으로 태양의 탄생(Natalis Invicti)을 기념하는 로마의 겨울축제일이었다. 당시 달력으로 12월 25일이 동지(冬至)가 되는데, 사람들은 태양이 이날을 기점으로 다시 커지는 것을 축하하여 대규모 파티을 열었던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4세기경부터 이 날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지키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태양이 그리스도를 설명해주는 아주 훌륭한 상징이 되기 때문이었다. 사실 세상의 빛(눅 2:32), 공의의 태양(말라기 4:2)으로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태양 축제일보다 더 적합한 날이 어디 있겠는가? 또 장차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실 예수님을 경축하기 위해 “정복되지 않은 자”(Invicti)보다 더 나은 상징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12월 25일에 예수님의 생일을 축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참고로 현재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바로는 Julius Africanus가 221년에 그의 [연대기]에서 처음으로 12월 25일을 예수님의 생일로 제시했다. 그러나 당시 이 주장은 다른 날짜들에 비해 그리 우세한 입장은 아니었고 최초의 종교회의인 325년의 니케아회의 이후에야 점차적으로 전반적인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한편 태양 탄생일이 예수님의 생일이 된 데는 토착화(土着化)의 의도가 다분히 있다. 태양 축제일이 이미 로마인들의 삶의 일부가 되어버렸다면, 기독교에서는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 그 문화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기독교화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당시 로마 사람들은 동지를 지내면서 대단한 술파티를 벌였다. 교회에서는 교인들에게 절대 거기에 가거나 술 취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였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목회적 차원에서 내부적으로는 신자들을 보호하고 외부적으로는 세속 문화를 기독교화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이 태양축일을 예수님의 생일로 정하게 된 것이다.이제 세 번째 의문점을 생각해보자. 우리가 성탄절이 실제 예수님의 생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우리가 성탄절을 계속 지켜야 할까? 여호와의 증인은 성탄절을 지키지 말아야 할 이유로 다음의 두 가지를 말한다. 첫째로 성탄절 날짜는 원래 이방축제에 해당하는 날이기 때문에 그 날을 지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로 기독교가 옛날에 흥청망청 즐기는 이방축제의 습성을 채택한 결과 현재의 상업화된 성탄절의 모습이 생긴 것이므로 성탄절을 지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그러나 위의 두 가지 주장은 잘못된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 우선 성탄절이 태양축제일과 같은 날짜이기 때문에 지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탄절을 지킬 때 중요시하는 것은 날짜가 아니라 성탄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이지 "날짜"가 아닌 것이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성탄의 의미를 무시한 채 노는 데 관심을 갖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교회절기의 상업화를 이방축제에 기원을 둔 날짜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근거가 부족한 논리이다. 왜냐하면 만일 성탄절이 다른 날짜에 지켜졌다면 현재와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었을까? 아닐 것이다. 신학적으로 볼 때 날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시간을 초월하신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시간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사실이다. 엄격히 말해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은 매일 기념해야 마땅하다. 우리가 매일 성탄일로 지켜야 마땅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하기는 힘들고 한 날을 정해서 특별히 기념을 해야 할 텐데, 그렇다면 이미 전통으로 굳어버린 성탄절을 굳이 거부할 필요가 있을까?둘째로, 기독교가 태양축제일을 성탄절로 정함으로써 타락한 이방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 결과 현재의 타락한 형태의 성탄절까지 생겨났다는 논리도 역사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이방축일을 성탄절로 바꾼 데는 정반대의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타락한 세상 문화와 타협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세상 문화를 거룩한 교회문화로 바꾸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술 파티의 문화를 예배의 문화로, 미신축제의 문화를 그리스도 축제의 문화로 바꾸기 위한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성탄절 날짜가 원래 태양축제일이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절대 창피스런 일이 아니다. 도리어 자랑거리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종의 문화선교의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세속문화를 기독교화 함으로써 세상에 거룩한 기독교적 삶을 전파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탄절을 지킬 때 날짜보다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고, 세속문화를 기독교의 문화로 변화시키는 문화선교의 입장에서 성탄절을 자랑스럽게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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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4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나요? Publish on September 30,2014홍삼열
    혹시 여러분들 중에 이런 의문을 가진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죽으면 곧장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게 될까? 아니면 그 전에 어떤 중간 지점에 들어가서 일정기간 기다리다가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서 최후의 심판을 받고 나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게 될까? 역사적으로 정통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는 사람이 죽으면 이생에서 자신이 행한 결정에 따라 곧장 지옥이나 천국으로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기동 계통의 이단들은 이른바 “중간상태”의 이론을 가지고 성경을 왜곡한다. 즉 사람이 죽으면 곧장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중간단계인 낙원이나 무저갱(혹은 음부)에 가서 예수님의 재림때까지 기다리는 기간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성경이 “그리스도 안에서 잠을 자는 것”(고전 15:18)이라고 표현한 것이 바로 이 중간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입장을 혼합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전에 살았던 구약의 사람들은 죽으면 그 중간상태로 먼저 들어가게 되지만, 예수님 이후에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사람은 곧장 천국으로 직행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중간상태”의 이론을 주장하는 김기동은 낙원을 천국으로 가는 중간단계로, 무저갱을 지옥으로 가는 중간단계로 설명한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이론을 제시하는가? 우선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한 3:13절)라는 구절을 근거로 예수님 이전의 사람들 중에 천국에 간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여기에 보면 인자/예수님만이 하늘에 올라간 경험이 있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같은 구약의 신앙인들은 다 죽어서 어디에 갔다는 말인가? 김기동의 이론에 의하면 그들은 천국에 간 것이 아니라 낙원 혹은 스올에 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잠자고 있다가 예수님의 재림때 육체로 부활하여 마지막 심판을 받고 나서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구약의 의인들과 신약의 신앙인들이 죽으면 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낙원에 간다고 하는 성서적 근거가 무엇인가? 누가복음 23장에 보면 두 행악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서 형을 받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때 한 강도는 예수님을 조롱하지만 다른 강도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예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요청한다. 그가 이렇게 요청할 때 예수님이 그에게 무엇을 약속하셨는가? 낙원을 약속하셨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 23:43) 그리고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사흘 후에 부활하시는데 그때 무덤 앞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신다. 마리아가 너무나 기뻐서 예수님을 붙들려고 했을 때 예수님이 그녀에게 말씀하신다.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요한 20:17) 이상의 두 성경구절과 이미 앞에서 언급한 요한복음 3:13절의 말씀(“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을 종합하면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아직 예수님 이외에 어느 누구도 천국에 들어간 사람이 없고, 예수님은 돌아가신 날 곧장 행악자와 함께 "낙원"에 가셨고, 예수님 본인도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는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사흘 동안 계셨던 곳은 아버지 집(천국)이 아닌 다른 곳, 즉 낙원이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흘 후 예수님은 부활했지만 그날 함께 낙원으로 간 행악자는 부활했다는 말이 전혀 없으므로 그 행악자를 비롯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낙원에서 천국에 갈 날을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또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나온다. 부자는 죽어서 음부에 들어가 불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고 있고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로를 받는다. 그러면 이 아브라함의 품이 위에서 말하는 낙원일까? 김기동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낙원은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 신자들이 들어가는 곳이고, 아브라함의 품은 예수 이전의 의인들이 들어가는 곳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주장하는 “중간상태”의 이론이다. 그렇다면 이런 이론이 정말 성경의 가르침일까? 정말 천국과 낙원과 아브라함의 품이 각기 다른 것인가? 그렇지 않다. 김기동의 “중간상태” 이론은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엮어서 쓴 소설에 불과하다. 우선 김기동은 요한복음 3:13절의 말씀,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라는 구절을 예수님 이전에는 천국에 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런데 이 구절이 정말 그런 뜻일까? 그렇지 않다. 만일 그렇다면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들려 올려진 에녹과 엘리야는 어디에 갔단 말인가? 김기동의 주장대로 천국이 아닌 “아브라함의 품”에 간 것일까? 요한복음 3:13절의 문맥을 제대로 이해하면 그런 해석이 나올 수가 없다. 유대인의 선생으로 알려진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와서 구원에 대한 가르침을 요청했을 때 예수님은 거듭남의 진리, 즉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는 진리를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는 이 가르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이 어떻게 다시 한 번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느냐는 의문을 표시하며 육체적인 차원의 이해에 갇혀 있는 한계를 드러내었다. 이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이것이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하늘에 있다가 내려온 인자만이 하늘의 비밀을 가르쳐줄 수 있는데, 아직 너는 수준이 안 되기 때문에 (육체적 수준에 갇혀있기 때문) 하늘의 비밀을 알려주어도 그것을 감당할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의 요점은 “나만 하늘에 올라갔다”가 아니라 “나만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현재 누구에게 말씀을 하고 있는가? 아직 죽어서 천국에 올라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닌가? 만일 천국에 올라갔던 에녹이나 엘리야가 다시 내려와서 지금 예수님 앞에서 이 말씀을 듣고 있다면, 그들도 이 “하늘에 올라간 자”에 포함될 것이다. 그래서 이 구절은 현재까지 하늘에 있다가 내려온 존재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고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구절에서 다른 사람들이 하늘에 올라가지 못했다는 주장을 도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구절을 기초로 예수님 이전의 신앙인들은 천국에 간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인 것이다.   또 한 가지 김기동이 주장하는 것은 낙원/음부(=중간상태)는 영혼의 활동이 완전히 정지하는 “수면상태”라는 것이다.(요한 11:11, 고전 15:18, 살전 4:13-14) 그런데 정말 이곳에 있는 영혼은 아무 활동도 하지 않는 완전 수면/대기상태에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누가복음 16장을 보면, 나사로가 음부의 불 가운데서 너무나 심한 고통을 받을 때 낙원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그의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자신의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과연 이것이 영혼이 수면을 취하며 아무 활동도 하지 않는 중간상태 이야기일까? 이건 분명히 죽은 영혼의 다양한 활동이 설명되어 있는 천국과 지옥 이야기이다. (참고. 계시록 2:7절에 보면 요한이 환상 중에 본 낙원 이야기가 나오는데, 역시 여기에서도 구원받은 영혼의 활동이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김기동은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실제 이야기가 아니라 비유라고 해석한다. 자신에게 불리한 구절은 비유적으로 해석해버리는 전형적인 이단의 수법이다. 또한 김기동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나서 부활하시기 전 사흘 동안 가 계셨던 곳이 바로 이 낙원/음부라고 주장한다. 베드로전서 3:19절과 4:6절에 보면 예수님이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고”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셨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이 예수님이 중간상태에 가신 것을 의미하는 구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만일 그곳의 상태가 정말 영혼이 잠자고 있는 무활동의 상태라면, 예수님이 그곳에 가서 메시지를 전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어차피 다들 잠자고 있어서 듣지 못할텐데...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 성경에서 죽음을 자는 것으로 표현한 것은 사람이 죽으면 중간/대기상태로 들어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죽으면 인간의 모든 현세적 활동이 정지한다는 의미이다. 현상적으로 볼 때 사람이 잠이 들면 모든 활동이 정지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래서 성경에서 “주 안에서 죽은 사람”을 잠 자는 것으로 표현한 것은 “잠자는 기간”을 염두에 둔 표현이 아니라 단지 “깨어나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임을 알아야 한다. 이쪽에서 자고 저쪽으로 깨어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런 이유로 성경은 예수 믿지 않고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절대 잠잔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예수와 상관없는 죽음은 수면이 아니라 다시 깨어날 가망이 없는 인생의 종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기동은 불신자도 죽으면 중간상태로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성경은 사람이 죽으면 곧 바로 영원한 기쁨인 천국이나 불의 고통이 있는 지옥으로 간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품이나 낙원은 천국과 다른 표현이 아니라 동일한 한 가지를 의미하는 표현들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김기동의 중간상태 이론은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도 아니고 성경의 관심사도 아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생에 사는 동안 예수믿고 구원받게 하는데 관심이 있지 죽고 난 후에 정확히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육신이 죽고 나면 절대 운명이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백번 양보해서 김기동이 주장하는대로 중간상태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치자. 그렇더라도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이 이론을 우리가 꼭 알 필요가 있을까? 김기동 식으로 생각을 하더라도 낙원에 간 사람은 무조건 천국으로 가고 음부에 간 사람은 무조건 지옥으로 간다. 중간상태에서 운명이 바뀌는 일은 절대 없다. 그렇다면 왜 성경이 알려주지 않는 이론을 굳이 설명하려고 할까? 단순히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이런 식으로 성경에도 없는 내용을 마치 성경의 가르침처럼 제시함으로써 혹세무민(惑世誣民)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것일까? 우리는 성경이 알려주는 것으로만 만족하면 된다. 그러면 구원받는데 지장이 없다. 오히려 성경이 알려주지 않는 것을 굳이 알려고 하고 설명하려고 하다가 이단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이 알려주는 분명한 사항이 무엇인가? 이생에서 예수 믿고 구원얻는 사람은 죽어서 천국에 가고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죽어서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죽은 영혼이 부활하여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서 마지막 심판을 받고 그런 후에 영원한 천국이나 지옥으로 보내진다고 기록된 내용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때 최후의 심판을 받고 가는 천국/지옥과 사람의 육신이 죽고 난 직후에 가는 천국/지옥(혹은 낙원/음부)이 같은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 성경은 이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다. 이런 것들이 성경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그 둘이 같다면 동일한 내용을 다른 개념으로 설명한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만일 다르다면 육신의 죽음 직후에 가는 천국/지옥은 최후의 심판 이후에 가는 천국/지옥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상태, 즉 각각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천상의 기쁨과 꺼지지 않는 불 속에서 영원히 고통을 당하는 경험의 시작일 것이다. 이 정도만 알아도 구원받는데 지장이 없고 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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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 때 사도신경 사용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Publish on December 24,2010홍삼열
    이 글은 제가 [섬기는 사람들] 14:1 (2011, January/February, 14) 에 기고한 글입니다.--------------------------------------------------------------------------------몇 주 전에 사도신경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우리는 가톨릭 교인이 아닌데, 왜 우리가 외우는 사도신경의 영어표현에 Catholic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습니까?”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런 저런 이유로 교회에서 사도신경을 사용해도 되느냐 안 되느냐에 대해 논란이 있어왔다. 아직 사도신경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신 분들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간단하게나마 이 지면을 통해 사도신경에 대한 몇 가지 사항을 말씀드리고자 한다.우선 사도신경의 기원에 대해 설명드리면, 사도신경은 세례 지원자들을 교육하기 위한 필요성에서 생겨났다. 정식 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신앙의 기본사항들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목회자는 세례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미리 준비교육을 시키는데, 그 교육 기간 동안 배운 내용을 세례식 때 신앙고백의 형식으로 암송하도록 한 것이 신경의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나중에 여러 가지 이단사상들이 교회에 침투하게 될 때 이 기본 신앙고백이 이단과 정통을 구분 짓는 중요한 척도로 사용되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사도신경 사용에 대한 논란이 시작되는데, 과연 사도신경에 그럴만한 권위가 있느냐, 그리고 그것을 매주 교회에서 사용해도 되느냐는 것이다.사도신경 사용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제기하는 대표적인 주장은 이런 것들이다. 1)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주기도문과는 달리 사도신경은 성경에 전혀 기록이 없다. 2) 사도신경은 진짜 사도가 만든 것이 아니고 후대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비록 이미 2세기 말에 로마교회에서 사용되던 로마신조(Old Roman Creed)를 현재의 사도신경의 전신으로 인정하더라도, 현재 사도신경에는 로마신조에는 없는 후대의 첨가부분이 들어가 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내용, 거룩한 교회라는 표현에 “가톨릭”이란 단어가 첨가된 것, 성도의 교제가 새로 첨가된 것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우선 첫 번째 주장, 사도신경은 성경에 없기 때문에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예배에 성경에 없는 사항들이 사용되고 있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타당성이 떨어진다. 예를 들어, 매 예배 때마다 찬송을 부르는데, 그 찬송 내용이 그대로 성경에 있는가? 없다. 또 복음송은 어떤가? 그밖에 현대에 들어와서 도입된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런 것들은 자율적으로 사용해도 괜찮고 교회에서 1500년 넘게 의미있게 사용된 사도신경은 안 된다는 말인가? 문제는 성서에 사도신경이 있는가 없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성서의 가르침에 부합한 성서적인 것인가 비성서적인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사도신경은 그 전체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 용어와 내용이 모두 성경에서 나온 것들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교회에서 애용해 왔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둘째로 사도신경은 후대 가톨릭교회의 작품이기 때문에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역시 사도신경의 용어와 개념이 모두 성경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때 타당성이 떨어진다. 비록 가톨릭교회에서는 그것을 자기들 유리한 쪽으로 해석해서 가르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도신경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거룩한 공교회(Holy Catholic Church)에 대해 가톨릭교회에서는 이것을 근거로 지구상에는 가톨릭교회만 있다고 주장하겠지만, “가톨릭”이란 단어는 그리스어의 두 단어인 kata와 holos가 결합해서 만들어진 단어로 “보편적”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영어로 사용할 때는 대문자 Catholic이 아닌 소문자 catholic으로 사용하는 것이 옳다. 한국 가톨릭교회에서도 어쨌든 이 구절을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로 번역해서 사용하고 있다.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구절도 가톨릭에서 이것을 이용하여 연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설명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비성서적인 것은 아니다. 그 내용이 베드로전서 3:19절과 4:6절에 나온다. 이 구절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필자가 2009년 5/6월호에 기고한 글을 참조하시기 바란다.(http://korean.umc.org/uploads/documents/korean_umis_2009%20MayJune%2014.pdf)사도신경을 교회 예배 때 사용해야 하나 하지 말아야 하나? 꼭 매 번 사용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주기도문이나 성만찬 같이 예수님이 하라고 지시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전통적으로 교회가 믿어온 신앙을 되새기고 재확인한다는 점에서 사용을 꺼릴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상은 제가 [섬기는 사람들]에 기고한 내용 전체를 인용한 것인데, 이에 덧붙여 현재 개역개정판 찬송성경책에 담겨 있는 두 종류의 사도신경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최근에 새로 출판된 개역개정판 찬송성경에는 개역판 옛날 사도신경과 새번역 사도신경이 함께 담겨져 있는데, 저희 산타클라라 연합감리교회는 1년전부터 예배때 새번역 사도신경을 사용하고 있다. 개중에 오래 신앙생활 하신 분들 중 새번역 사도신경이 영 익숙치 않아 옛날 개역판 사도신경으로 되돌아갔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계시는 분들이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본인도 아직 새번역 사도신경이 익숙하지 않아 예배 때면 스크린에 올라오는 것을 보고 사도신경을 고백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새번역 사도신경을 계속 사용하기를 권장한다.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는 새번역본이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언어로 되어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새번역본이 라틴어/그리스어 원문의 문장구조에 더 충실하다는 점이고, 셋째는 새번역본은 개역본과는 달리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개역본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형식인 "믿사오며," "믿사오니," "믿사옵나이다"로 되어 있다.) 사실 사도신경은 세례를 받을 때 모인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이 정통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하는 기도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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