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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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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
    돈은 일만 악의 뿌리인가? Publish on February 10,2018홍삼열
    디모데전서 6:10절에 보면, 자족하는 마음이 있어야 신앙생활 잘 할 수 있다고 하면서 돈에 대해서 이런 교훈을 준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여기에 보면, 돈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였나? 아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하였다. 사실 돈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 얼마나 많이 할 수 있는가? 믿음 없이 돈만 가지고 뭘 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이지,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돈을 사용한다면 놀라운 사역을 이룰 수 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탐심이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돈을 사랑함 즉 탐심을 심각한 죄로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탐심은 우리의 신앙을 망치는 대단히 심각하고도 위험한 죄이다. 왜냐하면 탐심은 우상숭배이기 때문이다. 골로새서 3:5절,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여러 가지 땅에 속한 지체, 육에 속한 죄들이 있는데, 그것들 중 꼭 짚어서 탐심이 우상 숭배라고 강조하였다. 그만큼 이 탐심이란 것, 돈을 사랑함이 대단히 심각한 죄인 것이다. 우상 숭배가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을 하나님으로 생각하면서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따라가는 것, 이것이 우상 숭배이다. 우상숭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우상 숭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뜻이다. 신의 뜻이 아니다. 만일 신의 뜻과 내 뜻이 맞지 않으면, 복채를 더 얹어주면서 신의 뜻을 나의 뜻으로 바꾸면 되는 것이다. 말이 신이지 내 욕심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우상인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어떤 특징이 있는가? 하나님 예배에서는 언제나 내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중요하다.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다르면 누구의 뜻을 따라야 하는가? 무조건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 아무리 내가 헌금 많이 한다고 해도, 아무리 선행을 많이 해도 다 소용 없다. 무조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 기독교 예배의 본질이다. 세상의 가치를 따르는 사람들이 진리로 삼고 있는 것이 있다.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된다는 것이다. 돈이면 사람도 사고 학위도 사고 명예도 사고 사랑도 사고 재판장에서 악인을 선인으로 만들 수도 있고... 이게 세상 돌아가는 법칙이다. 돈이 하나님 역할을 톡톡히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늘의 가치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어떤가? 그들도 돈의 힘을 믿고 사는가? 아니면 돈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있는가? 돈과 하나님이 경쟁하면 어느 쪽을 선택하는가? 예를 들어서, 딸을 시집 보내야 하는데 신랑감 중에 한 사람은 돈은 그냥 입에 풀칠 할 정도밖에 벌지 못하는데 신앙이 아주 좋은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돈은 굉장히 많이 벌고 좋은 집에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데 신앙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 딸을 시집 보내고 싶은가? 물론 이왕이면 돈도 많이 벌고 믿음도 좋은 사람에게 시집 보내고 싶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사람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실제의 상황에서 돈과 신앙 사이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는가? 돈인가, 아니면 우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신앙인가? 우리는 이런 케이스를 너무나 많이 경험하였다. 평소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산다고 하고 기독교적 가치에 따라 산다고 하다가 결혼이나 이사나 학교나 직장선택 같은 중요한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버리고 돈을 선택하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의 평소 모습을 보고 신앙을 판단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진실한 신앙의 모습은 인생의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극심한 고난의 상황에서나 아니면 정말 세상적으로 복이 넘쳐서 주체를 하지 못하는 그런 상황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는 것, 탐심은 곧 우상숭배라는 것을 잊지 말자. 탐심에 관련하여 나의 진실한 모습은 인생의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리고 그때 탐심에 이끌려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올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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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6
    기독교인의 언어생활 Publish on January 15,2018홍삼열
    기독교 신앙에서 언어생활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할까? 신앙의 다른 모든 영역에서는 다 잘하는데 언어생활에서만 좀 문제가 있는 경우 우리는 그 사람의 신앙을 충분히 좋은 신앙으로 봐주어야 할까? 말만 좀 문제이지 다른 것들은 다 잘하니까... 아니면 말로 남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은 신앙 자체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거의 신앙이 없는 사람처럼 간주해야 할까?성경에는 무절제한 혀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많이 나오는데 그중 야고보서가 가장 집중적으로 그 문제를 다루고 있다.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가짜 믿음의 대표적인 케이스로서 거의 매 장마다 이 문제를 언급한다. 1:19-20절,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1:26절,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3:6-8절,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4:11절,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5:9절,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5:12절,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 이렇게 야고보서는 매 장마다 말과 혀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이것이 행함이 없는 가짜 믿음의 대표적인 특징이란 뜻이다. 우리 주변에 보면 교회에서 정말 일 열심히 하는데 그렇게 일 열심히 하는 만큼 말로도 큰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사람이 열심히 일 하고 지나가는 길가에는 언제나 그의 말에 상처 받아 고통스럽게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는 것이다. 야고보서의 말씀을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이런 사람의 믿음은 어떤 상태일까? 살아 있는 상태일까 죽은 상태일까? 야고보서의 판정은 대단히 가혹하다. 100% 죽은 상태라는 것이다. 혀의 문제를 다루는 야고보서의 많은 구절들 중에서 우리는 특히 1:26절을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자기 혀를 재갈 물릴 줄 모르고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감정에 이끌려 막말을 하는 사람은 자기를 속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즉 자신에 대해 완전히 착각하고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원래는 믿음이 빵점인 사람인데, 자기는 선한 일 많이 하니까 믿음이 좋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야보고서 1:26절에 보면 그런 사람의 경건은 완전 헛것이라고 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일 많이 해도 입을 제어하지 못하고 그것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면 그 사람의 모든 경건은 다 헛것, 다 가짜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서 3:1절에 말 많이 하는 선생이 되려고 노력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물론 여기서 언급하는 선생은 자신의 말과 행동이 100% 일치하는 이상적인 선생이 아닌, 불일치가 많을 수밖에 없는 현실의 선생을 의미한다. 자신의 가르침대로 행하는 것보다 남을 가르치는 말이 더 많을 수밖에 없는 선생의 상황을 절대 부러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생활과 기독교 신앙의 관계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의 언어생활은 신앙의 변두리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핵심에 해당한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명심하고 더욱 입에 재갈을 먹이는 참된 경건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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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황 탓하지 맙시다 Publish on December 11,2017홍삼열
    빌립보서는 기쁨을 강조한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2:17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4절) 빌립보서 전체를 훑어보면 보면 이렇게 “기쁨” 혹은 “기뻐한다”라는 단어가 굉장히 많이 나온다. 1장에서 4번, 2장에서 7번, 3장에서 1번, 4장에서 16번이 나올 정도로 유별나게 기쁨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 서신이 바울이 편안한 삶을 살고 있을 때 기록된 것일까? 그가 세상적으로 잘 나가고 있을 때 쓴 것일까? 그렇지 않다. 바울은 정반대의 상황에서 글을 썼다. 빌립보서는 그가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쓴 편지이다. 상식적으로 절대 기뻐할 만한 상황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의문이 생긴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서 고생하고 있는데 뭐가 그리 기쁘기에 기뻐한다는 단어를 그렇게 많이 사용하는 것일까? 너무나 고생해서 현실감각이 떨어져서 그렇게 된 것일까? 아니다. 예수 제대로 믿으면 다 그렇게 되는 것이다. 예수 잘 믿는 사람은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도 하늘의 능력을 체험하기 때문에 감사가 넘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 보면 기독교인이면서도 불평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뭐든지 부정적인 것을 보고 뭘 하든지 나쁜 것을 찾아내서 불평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워낙 태어날 때부터 천성적으로 성격이 나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일까? 아니다. 그런 고질적인 불평은 성격의 문제이기보다는 영혼의 문제이다. 기독교인으로서의 기본 신앙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생명을 받은 사람은 언제나 영혼에 기쁨이 넘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자녀로서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가지고 살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평이 영혼을 꽉 채우고 있는 사람은 이미 구원이 떠난 사람일 가능성이 많다. 아니면 적어도 기독교인의 삶과는 거리가 멀어진 사람인 것이다.좋은 신앙인은 상황과 상관없이 기뻐하고 감사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현재의 고난의 상황보다 언제나 더 크다고 믿기 때문이다. 바울의 예를 보면, 감옥이라는 상황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라지게 하지 못했다. 바울은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도 기쁨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 했다. 그 안에서 꾸준히 기도하고 찬송하고, 간수들과 다른 죄수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였다. 또 자기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였고, 끊임없이 교회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신앙지도를 하였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신자의 모습이다. 우리에게도 감옥같은 상황이 있지 않는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고 우리를 괴롭히고 재정적으로 어렵게 만들고 인간적으로 숨막히게 하는 상황이 있지 않은가? 그럴 때 그런 상황 때문에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가? 아니면 상황과 상관없이 해야 할 일을 계속 하는가? 어려운 상황 때문에 마땅해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다면 아직 정상적인 신앙이 형성되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핑계를 너무 많이 댄다. 너무 많이 불평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나는 건강이 나빠서 아무것도 못해.” 이렇게 말하는데 왜 못하는가? 그런 상황에서도 주님을 위해 할 일을 찾으면 무궁무진하다. 심지어 손발이 잘려서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도 놀랍게도 입으로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지 않은가? 눈이 멀어서 안 보이지만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니면서 찬양으로 영광 돌리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침대에 누워서 꼼짝 할 수 없지만 전화를 통해 사람들을 축복하고 격려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왜 못한다고 하는가?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충만한 사람에게는 상황이 절대 주님의 사역을 막지 못한다. 따라서 상황 탓하지 말자. 오히려 고난의 상황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를 들을 수 있고, 그 상황을 통해 우리가 다듬어질 수 있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크게 역사하실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우리도 바울같이 감옥 안에서 감사할 수 있다. 바울 같이 짧은 빌립보서 안에서 수십 번을 감사할 수 있다. 우리의 문제보다 언제나 크신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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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4
    가장 훌륭한 은사 Publish on December 11,2017홍삼열
    고린도서를 읽어보면 고린도교회는 정말 너무나 많은 은사를 가진 교회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렇게 많은 은사를 가졌는데 싸움과 다툼도 그렇게 많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은사를 많이 받은 교회는 더 평화롭고 더 부흥해야 될 것 같은데 고린도교회의 상황은 정반대인 것이다. 왜 그럴까? 이 문제에 대해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은사 사용의 원칙을 설명한다. 첫째는 은사는 다양하다는 것이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 12:4-6절)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나님의 교회에 다양한 은사를 주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다양한 사역을 감당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은사를 주시지 않았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에게 가르치는 은사를 주시지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교인들이 모두 교사나 목사일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병 고치는 은사를 주시지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교회는 병 고치는 사역만 하고 다른 사역은 하나도 하지 못할 것이다. 같은 원리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예언의 은사를 주시지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교회는 예언만 하고 직접 나가서 일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은사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내가 가진 은사만 중요하고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은 절대 하면 안 된다. 마치 발이 손에게 말하기를 “너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 너는 몸의 일부가 아니야.” 이렇게 말할 수 없고, 눈이 입에게 말하기를 “몸에서 내가 가장 중요해. 너는 쓸모 없어.”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몸에 여러 지체들을 붙여 주신 것은 다 쓸모가 있기 때문인 것이고, 각 지체는 이런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서 자신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은사에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내가 무슨 은사를 받았느냐가 아니라, 과연 내가 받은 은사를 올바른 목적을 위해 제대로 사용하고 있느냐인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목적으로 은사를 사용해야 할까? 은사 사용의 두 번째 원칙은 모든 은사는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다.”(12:6절) 누구에게 유익하게 한다는 것인가? 그 은사를 받은 사람이 아니라 교회에게 유익하게 한다는 말이다. 고린도전서 14장에 가면 방언과 예언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고린도교회에는 방언이 가장 중요한 은사라고 하면서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방언보다 예언이 더 큰 은사라고 설명했다. 그 이유는 방언에 비해서 예언은 사람들이 알아듣기 때문에 교회에 덕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왜냐하면]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14:5절)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12절) 은사 사용의 목적은 오직 한 가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란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은사 사용의 세 번째 원칙은 은사는 교회의 질서에 따라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14:26절) 우리가 보면 찬송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의 은사를 받았다. 어떤 사람은 계시의 은사를 받았고, 어떤 사람은 방언이나 통역의 은사를 받았다. 그런데 이런 각종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한 결 같이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은사를 주신 것은 사용하라고 주신 거니까 나는 이걸 여기에서 이 시간에 반드시 사용해야 해.” 이렇게 우기면 곤란한 상황이 벌어진다. 은사를 사용해야 할까를 결정하는 기준은 오직 하나이다.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즉 하나님의 교회에 덕이 되는 방향으로, 덕이 되는 방법으로 질서 있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될 때는 은사 사용에 대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은사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질서의 하나님, 화평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고전 14:33절)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4:26절에서 마지막 절까지 방언과 예언을 예로 들어서 어떻게 질서 있게 은사를 사용할 것인지를 설명했다. 바울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은사 사용의 질서를 강조하는지를 보라. 교회에서 방언을 말할 때는 최대 세 사람만 할 것; 한 사람이 그 셋을 차례로 통역을 할 것; 통역이 없을 때는 방언을 하지 말 것; 예언을 할 때도 최대 세 사람까지만 할 것; 무조건 예언을 다 받아주지 말고 반드시 분별할 것(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인지 자기 생각대로 말한 것인지 사탄이 준 것인지를 분별할 것); 어느 한 사람이 예언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면, 먼저 하던 예언은 중지시키고 새로운 예언을 하도록 할 것; 그리고 맨 마지막 절의 결론이40절이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가끔 보면 은사를 사용한다고 하면서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은사를 사용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교회에 덕이 되지 않고 교회를 무너뜨린다. 모든 은사는 교회의 질서를 따라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그 다음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이 고린도전서 13장이다. 우리가 잘 아는 사랑의 찬가가 담긴 장이다. 그런데 왜 이 사랑의 찬가가 12장의 성령의 은사에 대한 내용과 14장의 방언과 예언에 대한 내용의 중간에 들어가 있을까? 11장에 나올 수도 있고 15장에 나올 수도 있는데 왜 꼭 그 자리에 들어가 있는 것일까? 혹시 사랑도 성령의 은사란 말인가? 방언이나 예언이나 병 고침이나 능력 행함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인 것처럼 사랑도 그런 은사인가? 그렇다. 사랑도 성령의 은사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성령의 은사 중에 가장 중요한 은사이다.  사랑이 은사 중에 가장 중요한 은사라는 사실은 사랑장으로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이 어떻게 12장과 연결되는지를 보면 안다. 12장에서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에 대해 설명한 후에 마지막 31절이 이렇게 되어 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그리고 나서 곧 바로 13장에서 왜 사랑이 가장 좋은 길인지, 왜 가장 큰 은사인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14장에 가서는 은사 사용의 원칙을 설명하는데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 은사를 사용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즉 사랑의 목적을 위해 은사를 사용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2장과 14장 중간에 최고의 은사로서 사랑의 은사를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부러운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가르치는 은사가 있고, 어떤 사람은 찬양의 은사가 있고, 어떤 사람은 방언의 은사, 어떤 사람은 놀라운 믿음의 은사가 있는데, 나는 아무런 은사가 없다고 생각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은사들이 없어도 여전히 최고의 은사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받으면 사랑의 은사가 생기는데, 그것이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은사이고, 나에게 이 사랑의 은사가 있으면 이것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가장 잘 세울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은사의 목적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중 무슨 은사가 교회를 가장 잘 세울까? 바로 사랑의 은사이다. 방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교회를 어지럽히는 예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 교회를 잘못 된 곳으로 이끄는 경우를 보았을 것이다. 산을 옮길 만한 엄청난 믿음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교만해서 많은 사람들을 실족시키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사랑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교회를 어렵게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사랑이 너무 많아서 교회를 무너뜨리는 사람이 있는가? 절대 없다. 그래서 사랑의 은사가 가장 큰 은사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랑의 은사를 받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사랑의 은사가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가장 큰 은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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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예수님은 돼지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셨나요? Publish on October 23,2017홍삼열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의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 주시는 내용이 나온다. 예수님 당시 거라사 지방은 주로 이방인들이 살던 지역이다. 마태는 이곳을 가다라로 부르고 마가와 누가는 이곳을 거라사로 부르고 있는데 우리는 이곳이 정확히 어디인지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곳이 갈릴리 호수에 맞닿아 있다는 것, 그리고 이곳이 갈릴리의 동쪽 도시인 데가볼리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데가볼리는 이방인의 10개 도시를 지칭하는 이름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거라사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곳에 가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곳에 들어가실 때 도시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귀신 들린, 해안가 무덤 사이에 사는 한 사람을 만나셨다. 가끔 제정신이 들면 사람들이 와서 그에게 쇠고랑을 채워 놓지만 귀신이 다시 그를 지배하게 되면 쇠고랑을 끊어버리는 괴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너무나 난폭해서 아무도 제지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고 즉시 귀신들에게 그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다. 이때 귀신들은 자기들을 무저갱으로 보내지 말고 대신 돼지떼에게 들어가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자 그 귀신들은 2000여 마리의 돼지떼에게(막 5:13) 들어가서 돼지들을 비탈길로 몰고 가서 일시에 모두 물에 빠져 죽게 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는 마음속에 질문이 생긴다. 왜 예수님은 악한 귀신들의 요청을 들어 주셨을까? 왜 불쌍한 돼지들을 죽게 내버려두셨을까? 학자들은 이에 대해 다양한 설명을 제시한다. 그 중 대표적인 두 가지를 들면 이렇다. 첫째는 아직 귀신들을 무저갱에서 멸망시킬 최후의 심판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 요청을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이런 동물들의 갑작스런 죽음을 통해 거라사인들에게 귀신의 파괴성을 알려주시고, 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그들도 예수님을 믿도록 유도하기 위해 귀신들의 요청을 들어 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이 이야기가 우리 마음속에 불러 일으키는 질문이 있다. 예수님은 돼지떼가 불쌍하지 않으셨을까? 더 나아가 그 돼지떼를 소유한 주인은 무슨 죄가 있기에 하루아침에 전 재산을 잃어야만 했을까? 이런 의문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이 이야기는 당시의 사회문화적 가치를 배경으로 접근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같이 동물의 권리를 주장하는 시대에도 사람의 생명을 살리느냐 동물의 생명을 살리느냐 양자 택일의 상황에서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는데, 옛날에는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이 없었다. 고대시대는 노예의 인권은 물론이고 여자와 아이들의 인권도 무시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동물의 권리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동물은 오로지 식량의 목적으로 그리고 사람의 편의의 목적으로만 존재하였다. 따라서 당시에는 요즘 같이 “반려동물”의 개념은 없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에 동물의 권리를 주장하는 현대적 시각에서 이 이야기를 읽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복음서의 예수님이 한 영혼을 가장 귀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중요성의 면에서 한 영혼과 온 천하를 비교한다면 예수님은 언제나 한 영혼을 선택하셨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초점은 죽은 돼지떼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을 얻은 그 영혼에게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부정한 거라사에 오셔서(거라사는 이방지역이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부정하다), 부정한 한 사람을 만나시고(귀신들린 상태에서 무덤 사이에 있는 것은 그 자체로 부정한 일이다), 그에게서 부정한 귀신들을 내어쫓으심으로써 그를 부정에서 해방시켜주시고 그에게 생명을 주신 것이다. 대신 그 귀신들은 자기들에게 맞는 장소인 부정한 돼지들(돼지는 유대인들에게 부정한 짐승이다)에게로 들어가서 그것들을 파멸로 몰아넣은 것이다. 결국 이 이야기가 전달해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예수님은 2000마리의 돼지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온 천하보다 더 귀한 한 영혼을 살리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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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2
    천국을 위해서 고자가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요? Publish on October 23,2017홍삼열
    기독교 역사에서 성 어거스틴 이전에 초대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신학자로 인정받는 사람이 오리겐(Origen of Alexandria, 185-254)이라는 교부이다. 오리겐은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정도가 대단한 사람이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때(202년) 즉 오리겐이 17세가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 레오니데스가 순교를 당하게 되는데 오리겐은 아버지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예수를 부인하지 말고 끝까지 담대하게 순교의 길을 가라고 편지를 쓸 정도로 신앙의 열정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오리겐이 충동에 못 이겨 아버지를 따라 순교의 길을 갈까 두려워서 그가 밖에 나가지 못하게 그의 옷을 감출 정도였다. 또 오리겐은 벌써 18세의 나이로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신학교의 교장직을 맡아 학생을 가르칠 정도로 학식과 신앙이 뛰어났고, 이때로부터 그는 학교 사역과 설교 사역을 왕성하게 펼쳐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오리겐은 아무리 하나님께 철저히 헌신된 사람이라도 하지 않을 논란의 여지가 있는 행동을 한 가지 하게 된다. 바로 마태복음 19:12절에 나온 말씀을 그대로 실천해서 스스로 고자가 되는 선택을 한 것이다. 그가 이런 선택을 한 이유는 그가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들에게도 강의도 하고 설교도 해야 하는데 여자들을 대할 때 완전한 양심의 자유를 가지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는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경계하기는 하였다. 마태복음 19:3절 이하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결혼과 이혼에 대한 질문을 하고 예수님께서 명쾌히 대답해주시는 장면이 나온다. 바리새인들은 유대인의 전통에 따라 어떤 “이해할 만한” 특정한 이유가 있을 때 남자가 이혼증서를 주어서 아내를 버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입장인데 반해, 예수님은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여 한 몸이 되었으면 그것을 영원히 지속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음행의 이유를 제외하고는 절대 이혼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셨다. 이혼에 대한 예수님의 강경한 입장에 대해 제자들이 한 마디 거들었다. “이렇게 아내를 버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낫겠네요.” 이때 예수님께서 해 주신 말씀이 마태복음 19:11절이다.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독신은 자신의 선택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은사라는 말이다. 아무나 선택할 수도 없고 선택해서도 안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나서 12절에 고자가 되는 경우를 셋으로 구분하여 설명하셨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어떤 사람들은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이다. 선천적으로 독신으로 살기로 정해진 사람을 말한다. 두 번째 경우는 “사람이 만든 고자”이다. 고대 역사를 보면 사람을 강제로 고자로 만드는 경우들이 있다. 가장 흔한 경우가 궁중에서 일하는 내시 혹은 환관들이다. 세 번째가 기독교에서 논란이 되는 사안인데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가 되는 사람의 경우이다. 오리겐이 이것을 선택해서 당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면 예수님이 원래 의도하셨던 의미는 무엇일까? 헌신의 정도가 높아지면 그 정도까지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일까? 그렇지 않다. 예수님의 의도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라면 예외적으로 독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즉 물리적인 거세가 아닌 영적 헌신으로서의 독신생활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 현재 가톨릭교회의 신부와 수녀들이 이 범주에 들 것이다. 만일 누군가 이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마태복음 18:8절 이하에 나오는 내용, 즉 손과 발이나 눈이 범죄의 통로가 될 때 그것을 잘라버리거나 빼 버리라는 말씀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런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그 정도로 죄를 경계하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죄의 유혹을 이긴다는 의미로, 즉 영적인 의미로 이해해야지 그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한 것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의 표준은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이다. 현재에도 이것이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기대치이다. 그런데 예수님이나 세례 요한은 독신으로 살았다. 그들이 결혼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을 볼 때 당시 유대인들은 그들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옛날에 그랬지 않았나? 남자나 여자가 30살이 넘어서까지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면 뭔가 말 못한 문제가 있어서 그렇지 하고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 것과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는 것은 정상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독신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이고 어떤 사람은 천국을 위해 그런 독신생활을 선택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기대에 간접적으로 대답을 해 주신 것이 된다. 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특별한 목적 때문에 스스로 독신생활을 선택한 것이고, 이것은 “받을 만한 사람만 받는” 특별한 은사라고 간접적으로 설명하신 것이 된다. 후에 사도바울도 같은 맥락에서 독신에 대해 비슷한 말을 하였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고전 7:7) 보통 사람들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는 것이 정상이지만 자기 같이 하나님에게서 독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독신으로 지내는 것도 좋다고 권면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반대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 바울은 독신생활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주신 특별 은사이기 때문에 이것을 모든 사람에게 일반화시키면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우리는 천국을 위해 스스로 고자가 된 사람이 있다는 마태복음의 말씀을 하나님의 은사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물리적인 거세를 의미한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특별한 부름이 있을 때 스스로 독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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