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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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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리스길라의 영적 리더십 Publish on December 16,2018홍삼열
    사도행전 18장 1~3절에 보면 바울이 고린도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부부는 바울과 함께 천막 만드는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처음부터 쉽게 바울과 동역을 할 수 있었다. 이 두 사람은 바울을 만나서 고린도에서 함께 사역하였고 바울을 따라 에베소로 가서 그곳에서도 함께 사역하였다.   브리스길라 부부는 글라우디오 황제 때 로마에서 고린도로 이주하였다(사도행전 18:2). 2세기의 역사가 Suetonius에 의하면 Claudius 황제가 ‘Chrestus’라는 사람의 일로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축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 Christus(그리스도)를 잘못 표기해서 ‘크레스투스’라고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어쨌든 그리스도 때문에 혹은 ‘크레스투스’라는 사람 때문에 유대교 회당에서 소동이 일어나고 이것이 로마 사회에 해가 된다고 생각해서 글라우디오 황제가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에 관련하여 독특한 것이 하나 있다. 당시 사회에서는 가부장적 사회이기 때문에 부부 이름이 나오면 언제나 남편 이름이 먼저 나오는데 이 부부는 성경에 딱 한 번을 제외하고 모든 경우에 부인 이름이 먼저 등장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사도행전 18:18). “그가 [아볼로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사도행전 18:26).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로마서 16:3).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디모데후서 4:19). 그런데 고린도전서 16장 19절에서는 딱 한 번 아굴라의 이름이 먼저 나온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왜 사회 관습과는 정반대로 교회 안에서는 아내인 브리스길라 이름이 남편 이름인 아굴라보다 먼저 나오는 것일까? 결혼하기 전에 브리스길라의 신분이 아굴라보다 더 높았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평등사상이 있는 교회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그런 표현이 사용된 것은 아내인 브리스길라가 그 가정의 영적 리더라는 의미일 것이다. 보통 교회에는 여자 성도의 수가 남자 성도에 비해 많다. 평균적으로 가정의 영적 리더 중에 여자들이 많다는 뜻이다. 또 부부가 함께 신앙생활 하는 분들도 부인이 가정의 영적 리더인 경우를 많이 발견한다. 하나님께서 다른 것은 몰라도 신앙 면에서는 부인을 그 가정의 영적 리더로 세우는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그래서 부인이 그 가정의 영적 리더가 된 경우 그것을 극구 부정할 필요가 없다. 영적 리더이면 그런 줄 알고 리더의 책임을 다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누가 가정의 영적 리더가 되었든 그 사람에게는 영적 리더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만일 부인이 가정의 영적 리더라면, 그가 신앙적으로 가정을 잘 이끌어야 한다. 말을 많이 해서 이끌라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이끌라는 말이다. 남편이 잘못된 선택을 하려 할 때 그것에 동조하지 말고 성경적 원리에 따라 그가 바른길로 방향을 바꾸도록 힘써야 한다.   그런데 남편이 잘못 갈 때 그것을 막지 못하고 도리어 함께 가는 경우가 있다.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예가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이다. 이 경우는 보통의 관례대로 남편의 이름이 먼저 나왔다. 남편이 베드로 앞에서 거짓말하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더욱 비극적인 일은 아내가 이것을 막지 못하고 함께 거짓말에 동조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부부가 한 날에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그 둘 중에 영적 리더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제대로 분별하고 영적 리더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성령님께 죄짓는 것을 막았다면,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부부는 영적으로 함께 살든지 함께 죽는다. 영적 리더의 책임을 가볍게 보지 말고 가정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잘 이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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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하나님은 죄 없는 웃사를 죽이셨나요? Publish on October 01,2018홍삼열
    사무엘하 6장에 보면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여호와의 궤는 아비나답의 집에 있었는데 그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다윗왕의 명을 받들어 소가 끄는 새 수레에 여호와의 궤를 싣고 다윗 성으로 출발하였다. 그런데 중간에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 소들이 갑자기 뛰는 것이다. 그래서 궤가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웃사는 급히 손으로 궤를 잡았는데 이것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자 다윗은 여호와의 궤를 다윗 성으로 가지고 오는 것을 중단하고 궤를 오벧에돔의 집에 두도록 하였다.   이 이야기를 읽을 때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뭔가 불공평한 일을 하신 것처럼 느낀다. 웃사는 하나님의 궤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비상조치를 취한 것뿐인데 왜 하나님은 선한 일을 한 웃사를 죽이신 것일까? 또한 웃사가 이렇게 소가 끄는 수레를 몰게 된 것도 자기가 계획해서 한 일이 아니고 다윗왕의 지시에 따라서 했을 뿐인데 하나님이 책임을 물으신다면 다윗에게 책임을 물으셔야 하지 않을까? 한편, 다윗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여호와의 궤가 당연히 있어야 할 성전에 있지 않고 다른 곳에 있을 때 마음이 너무나 불편했다. 그러던 중 어느 정도 정치적 안정을 되찾았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궤를 성전으로 옮겨오는 일이었다. 다윗은 오로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여호와의 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도록 명령한 것인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선한 마음을 보시고 웃사의 실수 같은 것은 눈감아 주셔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떻게 보면 웃사가 비상조치를 취한 것이 그렇게 심각한 죄가 아니고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일이라면 하나님도 정상참작을 해 주셔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웃사를 죽이신 것일까? 왜 하나님은 웃사를 죽이시고 다윗에게 큰 좌절감을 안겨주신 것일까?   우선 다윗이 잘못한 것을 먼저 살펴보자. 사무엘하에서 웃사의 사건 바로 전에 나오는 이야기는 다윗이 블레셋과 전쟁을 하는 이야기이다. 다윗이 블레셋과 전쟁하게 될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이었나? 바로 하나님께 물어보는 것이었다. “지금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려고 와서 진을 치고 있는데 적극적으로 나가서 그들과 싸워야 합니까 아니면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까?”(삼하 5:19) 하나님은 다윗에게 나가서 싸우라고 하셨고 다윗은 그대로 순종하고 나가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다음 블레셋이 다시 한 번 전쟁을 하러 올라왔다. 이때도 역시 다윗은 하나님께 여쭈었다.(삼하 5:23) 이때는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을 치실 테니 좀 기다렸다가 그들을 치라고 하셨고 다윗은 그대로 순종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 이야기가 끝나고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것이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꼭 있어야 할 내용이 빠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다윗은 하나님께 물어보는 일을 하지 않았다. 당연히 이 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니까 물어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위기에 처했을 때는 열심히 기도하다가 평안해지니까 기도를 잊은 것일까? 같은 내용을 다루는 역대상 13장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해서 물어보지 않았지만 부하들과는 의논했다고 되어 있다. “다윗이 천부장과 백부장 곧 모든 지휘관과 더불어 의논하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온 회중에게 이르되.”(13:1-2)   다윗이 실수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런 중요한 일이 있으면 당연히 하나님께 물어보고 또 성경에(당시에는 모세오경에)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먼저 찾아봐야 하는데 그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결정한 것이다. 민수기 7:9절에 보면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운반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여호와의 궤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천으로 덮고 네 사람이 어깨에 메고 운반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 나름대로 더 좋은 생각이 있었다. 새로운 수레를 사용해서 운반하는 것이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생각이 블레셋에게서 배운 것이라는 사실이다. 블레셋이 여호와의 궤를 이스라엘에게 반납할 때 바로 그 방법을 사용했다.(삼상 6:7)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본인의 선한 뜻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 겸손히 물어보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법대로 순종해야 한다. 사실 하나님의 방법이 엄연히 있는데도 하나님께 물어보지도 않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를 생각도 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선한 의지”가 없는 것이다. 정말 선한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뜻대신에 하나님의 뜻을 따를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   다윗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의지로 여호와의 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는 일을 했다고 하지만사실은 자신의 의지대로 일을 추진한 것이다. 그래서 일을 망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웃사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 다윗을 처벌하시면 되지 왜 시키는 대로 했던 웃사를 죽이신 것일까? 그 이유는 웃사도 역시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봤어야 하는 것이다. 민수기 4:15절에 보면 여호와의 궤를 메는 직무를 맡은 고핫 자손도 절대로 그것을 만지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만질 때는 죽는다고 되어 있다. 여호와의 궤를 20년 동안 자기 집에 모신 웃사는 당연히 이것을 알고 더욱 조심했어야 했다. 한편, 하나님의 계명을 전혀 알지 못하는 블레셋 사람들의 경우는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가서 그것을 보고 만지고 나중에 수레로 옮길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처벌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웃사의 경우는 다르다. 당연히 율법을 알고 그 방법대로 순종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는 사람에게 더 큰 책임을 물으신다. 제사장 교육을 받은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 이상한 향불을 드려서 죽임을 당했다. 자기 생각에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더 좋아하실 향불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생각을 앞세웠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웃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했어야 했다. 기도로 구하고 말씀으로 구했어야 했다. 하나님은 많이 받은 자에게 더 많은 것을 기대하신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는 자에게 그에 합당한 순종을 요구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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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1
    시신을 화장(火葬)해도 부활에는 지장이 없나요? Publish on October 01,2018홍삼열
    가끔 연세 드신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나는 절대 화장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하시는 분이 있다. 몸이 불에 타서 없어지면 부활할 때 지장이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부활의 몸이 없으니 어떻게 천국에 가서 살 수 있느냐는 말이다. 그런데 정말 화장한 사람은 부활의 몸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을까?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우리가 천국에서 가지게 될 몸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썩을 몸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질적으로 다른 몸, 하나님이 새로 만들어 주시는 썩지 않는 몸이기 때문이다.   화장하면 부활하지 못한다는 논리는 조금만 생각해보면 대단히 비논리적인 주장임을 알 수 있다. 우선 육신을 땅에 매장하면 그 육신이 얼마나 땅에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화장하는 것보다는 좀 오래 남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육신도 다 없어져버린다. 길게 보면 매장이나 화장이나 마찬가지다. 또 과거에 믿음을 지키다가 화형을 당한 순교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육신이 없으니 천국에 못 갔을까? 또 초대교회 때 많은 신앙인들이 사자에게 찢기고 먹혔는데 그들도 몸이 없으니 천국에 못 갔을까? 아니면 사자에게 먹힌 부분은 빼고 그 나머지 몸으로만 천국에 갔을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그들은 온전한 형태로 부활해서 천국에 갔을 것이다.   이 진리를 쉽게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사도 바울은 자연에서 일어나는 한 가지 예, 씨앗의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해주었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고린도전서 15:36-38) 우리가 씨앗을 뿌릴 때 지금은 그것이 단지 씨앗의 형태이지만 나중에는 열매가 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우리가 뿌린 것은 단순히 씨앗이 아니라 장차 생겨날 몸 즉 열매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현재의 씨앗과 장차 그 씨앗에서 생겨날 열매는 같은 것이기도 하고 다른 것이기도 하다. 본질적인 면에서는 같지만 겉으로 보이는 형태에서는 다르다. 현대적인 개념으로 설명하자면 DNA는 같지만 각각의 성장과정과 환경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부활의 몸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장차 구체적으로 어떤 몸의 형태로 부활하게 될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에 대해 미리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을 주제넘게 참견하는 것이다. 씨앗이 어떤 모습으로 열매 맺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추수 때까지 기다려봐야 아는 것처럼 우리의 부활이 어떤 형태로 이루어질 지에 대해서도 최후 심판 때까지 기다려봐야 알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현재의 몸과 부활의 몸 사이에는 분명히 연속성도 있고 불연속성도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씨앗과 열매가 형태는 다르지만 DNA가 같은 것처럼 현재의 몸과 부활의 몸은 서로 형태가 다르지만 일종의 동일한 “영적 DNA”를 공유하고 있다는 말이다.   일찍이 3세기에 이 문제로 씨름했던 오리겐(Origen)이란 신학자는 이것을 “에이도스”(εἶδος, form)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 사이에는 이 영적 DNA 혹은 eidos가 있어서 이것을 통해 그 둘이 서로 연결이 된다는 것이다. 즉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가 이 eidos 때문에 동일한 나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구체적으로 이런 혹은 저런 특정한 몸의 형태를 지니는 것은 상황에 따라 변한다. 이 eidos가 이 땅에서는 땅에 맞는 육신의 형태를 만들어내고 천국에서는 천국에 맞는 육신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현재 우리가 가진 몸은 육신의 삶을 살아가는데 적합한 형태의 육의 몸(physical body)으로 되어 있다. 생로병사를 경험할 수밖에 없는, 썩고 욕되고 연약하고 제한된 땅의 몸이다. 그러나 장차 우리가 부활해서 얻게 될 몸은 영의 몸(spiritual body)이다.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 지배하는 신령한 몸으로서 하늘의 삶에 적합한 형태의 몸, 영원히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강한 하늘의 몸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몸을 주신다는 원리는 고린도전서 15:39-41절에 잘 설명되어 있다.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몸이 있는데 각각의 몸은 그 몸이 처한 환경에 따라 특별히 제공된다는 뜻이다. 물속에 사는 존재에게는 물의 환경에 맞는 몸이 제공되고 하늘에 사는 존재에게는 하늘의 환경에 맞는 몸이 제공되고 땅에 사는 존재에게는 땅의 환경에 맞는 몸이 제공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천국에 가면 천국에 꼭 맞는 형태의 몸이 제공될 것이다. 현재의 나와 천국에서의 나가 서로 연속성이 있고 현재의 몸과 천국에서의 몸이 일종의 같은 영적 DNA로 연결되어 있지만 그 나타나는 형태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그 몸이 사는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현재의 몸은 땅의 삶을 위한 육의 몸(physical body)이고 미래의 몸은 천국에서의 삶을 위한 영의 몸(spiritual body)인 것이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하는 부활의 몸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썩는 몸이 아니라 썩지 않는 영원한 몸이다. 각자가 처한 환경에 꼭 맞는 몸을 주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부활하게 될 때 우리에게 하늘나라에 꼭 맞는 몸, 영의 몸을 만들어 주실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화장하는 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 화장해도 부활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 그때가 되면 천국의 삶에 꼭 맞는 영의 몸을 새로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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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0
    왜 하나님은 발람에게 진노하셨을까? Publish on July 30,2018홍삼열
    민수기 22장에 보면 모압 왕 발락이 발람에게 자기에게로 와서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요청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결국 발람은 발락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에게로 가지만 정작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스라엘을 향한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분명히 발람은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발락에게로 갔는데 왜 하나님은 그에게 진노하셨을까? 발람은 처음부터 하나님께 물어보고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간 건데 왜 하나님은 허락해 놓으시고 나서 나중에 발람에게 진노하신 것일까?   이스라엘이 모압 평지에 이르렀을 때 모압왕 발락은 잔뜩 긴장하였다. 이들의 숫자가 생각보다 많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곳에 오기까지 많은 족속을 점령하고 멸망시킨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한 가지 방법을 발견하였다. 입으로 말한 모든 말이 성취된다고 하는 하나님의 선지자를 통해 그들을 저주하게 하면 그들이 모압을 멸망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발락은 선물 보따리를 꾸려서 신하들을 발람 선지자에게로 보냈다.   큰 선물 보따리를 본 발람은 그들을 당장 물리치지 않고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님께 물어봐야 한다고 하면서 그들에게 하룻밤을 머물라고 요청했다. 그날 밤 발람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은 발람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분명하게 알려주셨다.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민22:12) 다음 날 아침 발람은 발락이 보낸 신하들에게 하나님이 자기를 가지 못하게 하신다고 전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내용은 빼고 전했다. 이스라엘은 원래 하나님이 복 주신 백성이므로 절대 저주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해주었어야 하는데, 발람은 그 말은 쏙 빼고 단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니 못 간다고만 한 것이다. 그 말을 해주었으면 이 사람은 아무리 설득해도 안 되겠구나 하고 그들이 일찍 포기했을 텐데... 발람은 왜 그 말을 빼먹었을까? 그들이 가지고 온 은금이 탐났기 때문이다.   발락의 신하들이 발람을 데려오지 못하자 발락은 두 번째로 다시 신하들을 보냈다. 이번에는 더 높은 사람들을 보내면서 발람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해줄 테니 와서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유혹의 강도를 높였다. 발람은 이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당장 그 제안을 거부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발람은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물어봐야 한다고 하면서 다시 한 번 내일 아침까지 시간을 달라고 하였다.   하나님께 물어볼 필요도 없는 것을 물어보는 발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민수기 20:20절이다. 일종의 조건부 형태의 말씀이다.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오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 (“오거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완료형이나 미래형 양쪽으로 번역이 가능한데 문맥상 미래형 번역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KJV이 그렇게 번역했다.) 이로써 하나님은 발람에게 다시 한 번 순종의 기회를 제공하신 것이다. 만일 바락의 신하들이 아침에 일어났을 때 발람에게서 아무 소식이 없으면 이제 가망성이 없다고 생각하고 짐 싸서 발락에게로 돌아가게 될 것이고, 그러면 발람이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이다. 발람은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발람은 자기가 먼저 나서지 않으면 그들이 화가 나서 그냥 발락에게로 돌아갈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기다리지 못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자 마자 먼저 그들에게로 가서 그들을 재촉해서 발락에게로 떠난 것이다. 돈을 싸들고 온 발락의 신하들에게 그가 했던 말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18절) 자기는 은금을 좋아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만 전적으로 순종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지금 정반대로 행동하고 있는데 이게 참으로 비정상이다. 사실 정말 은금을 좋아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만 순종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말 조차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을 저주해달라는 말이 들리자 마자 곧 바로 그 제안을 거부했을 것이다.   왜 하나님은 발람이 두 번째 물었을 때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절대로 가면 된다고 딱 잘라 말씀하시지 않고 “그 사람들이 다시 너를 부르러 오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고 말씀하셨을까? 하나님은 발람이 자발적으로 순종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이는 마치 안 되는 것을 계속 요구하는 아이에게 부모가 “이런 이런 조건이 되면 그렇게 해도 된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부모의 대답은 여전히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는 무조건 되는 쪽으로만 생각하고 허락 받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뜻은 분명하다. 이스라엘은 복 받은 민족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저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발람이 하도 요구하니까 그에게 마지막으로 자발적 순종의 기회를 주신 것이다. “내일 아침에 그들이 먼저 너에게 와서 함께 가자고 간청하면 그때는 가도 좋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걸 미리 아시고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끝까지 은금이 좋아서 하나님께 순종할 의도가 없었던 발람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발로 차버리고 자기가 먼저 가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계속 불순종하는 발람에게 진노하신 것이다.   발람의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은 여호와의 선지자가 그런 식으로 돈에 눈이 어두워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다는 것을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개중에 발람이 진짜 여호와의 선지자가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만 빌린 가짜 점술가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분명히 발람은 여호와와 말씀을 주고 받는 진짜 선지자였다. 말과 행동이 다른 것, 이것은 사실 너무나도 현실적인 신앙인의 모습인데 여호와의 선지자라고 해서 예외가 아닌 것이다. 발람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마음이 반쪽으로 나뉘어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동시에 세상을 섬긴 사람이다. 두 마음을 품어 부정하게 된 사람이다. 이런 상황에서 발람은 일정 부분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부정한 마음 때문에 결국 칼로 죽임을 당하게 된 사람인 것이다.(민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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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Publish on July 17,2018홍삼열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와 후서를 통해 고린도교회가 고민하며 씨름하던 여러 문제들에게 대해 기독교적 해답을 제시하였다. 파벌의 문제, 결혼과 이혼의 문제, 소송의 문제, 은사 사용의 문제 등 간단히 답변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다루었다. 그 중 고린도후서 6:14절에서는 믿지 않는 자와 함께 멍에를 메는 문제를 다루었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무슨 뜻일까? 불신자와는 결혼하지 말라는 뜻일까? 함께 사업을 운영하지 말라는 뜻일까? 아니면 계나 클럽활동도 같이 하지 말고 학문 연구도 같이 하지 말고, 더 나아가서 그들과는 어떤 종류의 관계도 갖지 말라는 뜻일까? 이제는 속세로부터 완전히 떠나서 사막이나 산 속에 들어가서 혼자 “순수하게”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아야 한다는 말일까? 이 정도까지 생각이 발전할 수 있는 것이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명령 뒤에 나오는 설명이 극명하게 대립적이기 때문이다. 신자와 비신자의 관계는 의와 불법, 빛과 어둠, 그리스도와 벨리알, 성전과 우상의 관계와 같이 상대적이라기보다는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린도후서 6:14절에서 말하는 것이 신자는 불신자와의 모든 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의미일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현실에서의 도피를 조장하지 않고 반대로 현실 속에서의 변혁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7:15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제자들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세상을 떠나는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세상 가운데서 악에 빠지지 않는 방법을 통해, 더 나아가서 세상 안에서 소금과 빛이 되어 능동적으로 세상을 변혁시키는 방법을 통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도 전적으로 같은 생각이다.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린도전서 5:10절)   불신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것이 세상 사람들과의 모든 관계를 끊으라는 의미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결혼하지 말라는 의미일까? 역사적으로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왜냐하면 멍에를 함께 멘다는 이미지가 둘이서 고된 인생길을 함께 간다는 느낌을 주고 있고, 더 나아가 고린도후서 6:14절의 원문에 사용된 그리스어 단어가 ἑτεροζυγοῦντες(heterozuguntes)인데 이와 동일한 단어가 딱 한 번 레위기 19:19절(그리스어 번역본)에서 사용되기 때문이다. 이 단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어울리지 않는 멍에 메기”(unevenly yoked)가 된다. 레위기 19:19절에서는 이 단어를 한 짐승을 다른 종류와 교배하는 의미로 사용하면서 나중에 고린도후서 6:14절이 결혼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를 남겨준 것이다.   그런데 멍에 메기를 그런 결혼이라는 좁은 의미로만 해석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 단어가 사용된 레위기 19:19절은 단순히 동물의 혼합교배만 다루지 않고 종이 다른 모든 것들의 연합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또 신명기 22:10절에 보면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라”고 했는데, 이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들을 억지로 한 “멍에”에 끼워 맞추지 말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어울리지 않는 멍에를 함께 메는 것은 곧 육적 혹은 영적 “불양립성”(incompatibility)를 의미하는 것이다.   믿지 않는 자와 함께 멍에를 메지 말라는 말은 우리가 세상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서는 신앙의 본질을 훼손시키는 어떤 중요한 관계도 피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늘의 가치 대신에 세상의 가치를 함께 추구해야 하는 관계, 거룩을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 세상의 우상을 섬겨야 하는 관계, 빛 되신 예수님을 버리고 어둠의 일을 해야 하는 관계, 이런 관계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맺어서는 안 된다. 결혼이든 동업이든 친구 관계이든 상관이 없다. 신앙의 본질 상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멍에(중요한 관계)는 반드시 피해야 한다는 것이 고린도후서 6:14절의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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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의 인구조사, 무엇이 문제인가? Publish on July 04,2018홍삼열
    역대상 21장에 보면 다윗왕이 전체 유다와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큰 벌을 받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왕으로서 전체 인구수를 아는 것이 잘못된 일인가? 전체 인구수를 알아야 미래의 정책을 구상하고 실행할 것이 아닌가? 만일 이렇게 스스로 현재 상황을 파악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현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현재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여 미래를 계획하면 안 되는 것인가? 그렇게 하면 믿음 없는 행동이 되는 것인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다윗이 명령한 인구조사의 성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윗이 명령한 인구조사는 현대적 의미의 인구 센서스가 아니다. 국민의 복지를 위해 갓 태어난 아기부터 노인까지 전체 사람의 수를 세는 것이 아니다.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장정, 즉 군인의 숫자만 세라는 의미이다. 그랬기 때문에 이 명령을 받은 요압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윗의 휘하에 있는 장군으로서 자기도 당연히 이스라엘의 군사의 수가 많아지고 군대가 강해지는 것을 바라지만, 현재 다윗이 그 숫자를 알아서 뭘 하겠느냐는 의문이 든 것이다. 당장 외적이 쳐들어와서 전쟁을 해야 하는 상황도 아닌데, 왜 굳이 시간과 돈을 들여서 군인들의 숫자를 파악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별로 신앙적이지 않은 욥의 생각에도 이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한데, 어찌하여 그렇게 믿음이 좋다고 이름이 난 다윗이 이걸 깨닫지 못하는가 의아해했다. 그래서 요압은 다윗에게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충언을 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요압과 다른 군 사령관들을 재촉해서 빨리 숫자를 세라고 명령하였다. 하는 수 없이 요압은 거의 10달에 걸쳐서 이 일을 완수하고 왕에게 최종 숫자 130만명을 보고하였다. 그리고 요압의 예상대로 다윗왕은 이 일 때문에 큰 벌을 받았다. 백성들 사이에 사흘간 전염병이 돌아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그럼으로써 오히려 다윗이 의지하려고 한 군사력에 큰 치명타를 입게 되었다.   하나님은 왜 다윗의 인구조사를 기뻐하지 않으셨는가? 인구조사는 왕이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을 의지한다는 교만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지켜 주셔야 나라가 가장 안전하고 왕위가 가장 견고하다는 믿음을 버리고, 말로는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군사력을 의지하는 교만한 마음이 그런 식으로 표출된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왕이 반드시 피해야 할 하는 것으로서 군사력을 의지하지 것을 들고 있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사 31:1)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 20:7)   하나님 대신에 자신의 힘을 의지하려는 교만한 마음은 이미 에덴동산에서부터 아담을 타락하게 만든 원초적인 죄였다. 하나님이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고 나 자신이 모든 계획의 중심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영혼에게 하나님은 심판을 내리신다. 에덴동산의 아담을 그렇게 심판하셨고 통일왕국의 다윗을 그렇게 심판하셨다.   따라서 다윗의 인구조사 이야기를 읽을 때 그것을 미래를 계획하지 말라는 메시지로 이해하는 것은 저자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잘못된 해석이 된다. 이 이야기는 미래를 계획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당연히 미래를 계획해야 하지만 그럴 때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윗같이 하나님 없는 교만한 계획을 세우지 말고 과연 하나님께서 이 계획을 기뻐하실까를 먼저 생각하는 기본 신앙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현실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치밀한 현실적 분석위에 미래를 향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단 하나님이 제외된 계획은 교만의 표현이기 때문에 아무리 잘 세우더라도 죄가 된다. 우리의 모든 계획은 항상 하나님 중심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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