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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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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사이야기2: 초대교회 시절의 박해 Publish on July 26,2010홍삼열
    이 글은 제가 한인연합감리교회 웹사이트(http://master.korean.umc.org/interior.asp?ptid=5&mid=5157)에 기고한 글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0장 16-25절에서 제자가 된다는 것은 곧 박해받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럴 경우 절대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끝까지 견디라고 제자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지만, 인내하며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예비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24절과 25절 말씀이 그점을 잘 설명해줍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제 스승만큼 되고, 종이 제 주인만큼 되면 만족스럽다. 그들이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고 불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했겠느냐!” 예수님 자신이 스승이 되어 박해를 받고 순교자가 되었다면,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어떤 각오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복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하늘의 복을 추구해야 하며, 그 목적을 위해 박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박해의 대상이 되었는데, 맨 처음에는 유대교에게 박해를 받았습니다. 로마 당국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일부라고 생각하여 관여하지 않았고, 유대교에서는 기독교를 이단으로 보아 박해를 가했던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행전에 나오는 야고보와 스데반의 순교사건인데, 이들은 로마의 정식 재판과정을 통하지 않고 유대교인들에 의해 살해당한 사람들입니다.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로마당국의 박해를 받은 것은 네로황제(54-68) 때부터인데, 이때 쯤 로마당국은 기독교가 유대교와는 전혀 다른 종교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답니다. 만일 기독교가 유대교가 아니라면, 로마는 기독교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 되겠지요. 당시 로마는 유대교에게만 종교적 자유를 허락했는데,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지독함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더이상 유대교가 아닌 것으로 판명된 이상 로마는 기독교인들을 그냥 놔둘 이유가 없고, 그래서 그들을 직접 박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된 계기는 64년 로마에서 발생한 대화재였습니다. 전체 14구역 중 10구역이 다 타버린 엄청난 화재였습니다. 그런데 타지 않은 4구역 중 2구역에 기독교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네로는 희생양이 필요하던 차에 (당시 네로가 불을 지른 장본인이고, 그가 로마를 태워버리고 자기 이름으로 도시를 재건축하기 위해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는 루머가 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불을 질렀다고 여론을 몰아가서 결국 기독교인 대학살을 연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 많은 기독교인들이 억지로 짐승의 가죽을 입은 채 성난 개들에게 찢겨 죽는 일이 허다했고, 원형경기장의 조명용으로 십자가에 달려서 몸이 타는 비인륜적인 박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바울과 베드로가 이때 박해를 받아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현재로서는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트라얀 황제(98-117)와 그의 총독 플리니가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3세기 이전의 기독교 박해의 양상이 어떠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비두니아와 본도의 총독인 플리니가 자기에게 잡혀온 기독교인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트라얀 황제에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는데 그들을 조사해본 결과 별 큰 잘못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법에 의하면 기독교는 불법이기 때문에 기독교인을 처벌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래도 그들에게 먼저 배교할 기회를 주고 그들을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또한 현재 잡혀오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상당히 많이 남아있는데, 그들을 조직적으로 색출해야 하는가 아니면 잡혀오는 사람들만 처형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남아있었습니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트라얀은 다음의 지시를 내렸습니다: 1) 기독교인들을 적극적으로 색출하지는 말 것 (그런 일을 하느라 시간과 힘을 낭비할 필요가 없기 때문); 2) 익명의 고발은 절대 받아들이지 말 것. 우리가 트라얀과 플리니의 이런 서신왕래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당시에는 아직 조직적이거나 전국적인 박해는 시행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즉 박해는 산발적이고 지역적인 사건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항상 조심해야 했습니다. 행여나 이웃에게 원한을 사서 관청에 고발이 들어가면 체포되어 처형되기 일쑤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비조직적인 박해의 양상은 데시우스 황제(249-251) 때 바뀌게 됩니다. 이전에는 박해가 정부 차원이 아닌, 개인적 차원, 집단적 차원, 또는 지방 관청의 차원에서 이루어졌는데, 데시우스 황제는 박해를 정부 차원의 조직적이고 전국적인 박해로 발전시켰습니다. 전에는 절대 쫓아다니며 기독교인들을 색출하는 일은 없었는데, 이제는 그들을 적극적으로 로마제국 전역에 걸쳐 색출해 나갔습니다. 또 한 가지 데시우스가 행한 박해의 특징은 기독교인들을 잡아 처형하는데 역점을 두는 대신 그들을 배교하게 만드는데 역점을 두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전의 박해자들보다 한 수 위의 정책을 쓰는 것이죠. 터툴리안이 말했듯이 기독교인이 피를 흘릴 경우 그 피는 씨앗이 되어 더 많은 기독교인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박해자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인들을 죽이는 것보다 배교시키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생각에서 그런 정책을 썼던 것이였죠. 데시우스의 생각은 적중했습니다. 그의 박해를 통해 교회는 내분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데시우스의 조직적인 박해에 직면하여 기독교인들은 다양하게 반응하였답니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이방 신들에게 경배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신들에게 경배할 때 배부하는 딱지를 몰래 구입하여 지니고 다녔습니다. 그래야 기독교인이란 죄로 체포될 경우 그것을 보이고 무사히 풀려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다른 사람들은 박해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도망하였습니다. 시프리안 감독이 그런 경우입니다. 물론 그밖의 다른 많은 사람들이 옥에 갇혀서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러다가 데시우스가 고트족과의 전투에서 갑자기 죽게 되면서 박해가 일시에 중지되었고, 곧 바로 옥에 갇힌 사람들이 풀려났고 도망갔던 사람들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교회에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배교한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누가 배교자들을 교회로 다시 받아들이는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였습니다. 감독들은 자기들이 교회의 지도자이기 때문에 권위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고백자들(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고수하면서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사람들)은 자기들만이 박해를 통해 신앙을 입증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배교의 문제에 관한 한 자기들이 권위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박해 때 신도들을 버리고 도망간 감독들과 비교할 때 자기들에게 월등히 권위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감독들 간에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습니다. 로마의 노바티안같은 사람은 당시 교회가 너무 쉽게 배교자들을 받아주는 것을 비난하며, 교회를 갈라나가기도 하였습니다.   데시우스 이후 많은 황제들이 기독교를 박해하였지만, 결국 하나님은 콘스탄틴이 황제가 되게 하셨고 그를 통해 기독교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콘스탄인은 비록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만들지는 못했지만 (이 일을 한 사람은 그의 아들 콘스탄티우스였습니다), 콘스탄틴은 기독교를 로마가 공인하는 종교들 중 하나로 만들었고 교회사업을 위해 재정적, 정치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답니다.   이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왜 로마의 황제들은 그토록 기독교를 박해해야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성찬식 때 아이를 죽여서 살과 피를 나눈다거나 비밀리에 모여서 서로 형제니 자매니 부르며 혼음을 즐긴다는 루머가 있었지만, 황제를 위시한 지식인층들은 그런 루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에 주목하였습니다. 즉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사상적, 종교적 체제를 뿌리부터 흔들어놓는 종교이기 때문에 철저히 박해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기독교는 전통을 무시하는 반란의 종교라는 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로마시대에 가장 중요한 덕목은 전통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대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 사람, 특히 전통적인 종교의식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로마사회에서 전혀 인정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자기의 뿌리인 유대교의 전통을 부정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전통을 귀중히 여기는 로마의 정신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정치체제에 해가 되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유대교는 그 나름대로 오랜 전통을 고수하는 집단이기 때문에 그나마 인정할 가치가 있었지만, 기독교는 유대교의 전통을 무시하는 반란의 종교이기 때문에 인정할 가치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박해한 두 번째 이유는 기독교가 로마의 종교 혼합주의를 거부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는 넓은 영토를 통일하기 위해 종교의 통일을 시도하였습니다. 즉 여러 부족들이 섬기는 신들을 제우스와 헤라의 밑에 위치시켜서 각 지역을 로마 밑에 귀속시키는 정책을 폈습니다. 그리고 각 지역의 신들에게는 수호신의 자격을 주어서 각 지역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역할을 맡겨주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완강하게 거부하였습니다.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한 분만이 진짜 신이라고 주장하며 이방신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의 이런 비타협적인 자세에 대해 로마인들은 그것이 로마의 평화에 가장 큰 위험요소가 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신을 노엽게 하면 흉년이 들거나 홍수가 나거나 전쟁에서 패하거나 하는 재난이 닥치는데, 기독교인들이 신들에게 예배하지 않는 것이 신을 노엽게하는 가장 큰 원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로마를 지키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철저히 박해해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은 로마의 박해에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 현재 우리의 삶이 얼마나 나약한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자처하였습니다. 믿음을 져버리고 세상에서 편안하게 사느니 믿음을 지키고 세상에서 고난당하며 순교당하는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믿음을 위해 순교할 수 있을까요? 세상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믿음을 지킬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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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웨슬레에 대한 역사 바로잡기 Publish on July 23,2010홍삼열
    이 글은 2010년 6월 22-25에 포틀랜드에서 개최된 서부지역 목회자가족 수련회에서 행한 강의록 중 일부를 발췌한 내용입니다. 이 강의가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고, 제가 이 강의록을 기초로 하여 부가설명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 강의록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의록을 원하는 목회자들의 요청이 있었고, 또 산타클라라 교우 여러분들중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아 이곳에 글을 올립니다. -------------------------------------------- 존 웨슬레에 대한 역사 바로잡기   John Benjamin Wesley (1703-1791)     1. “Brand plucked out of the burning,” 이 표현이 언제 나온 말인가? 1709년 웨슬리가 여섯 살 되던 해에 목사에게 불만이 있는 교인이 목사관에 불을 질렀다. 온 가족이 다 대피하고 보니까 한 명이 모자란 것이 발견됨. 웨슬리가 여전히 2층에 있었던 것. 지붕 무너지기 직전에 두 명의 마을 주민들이 웨슬리를 구출함. 그리고 그 직후 지붕이 내려앉음. 어머니 수산나는 이런 웨슬리를 가리켜 "a brand plucked from (or out of) the burning"으로 불렀다고 함.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님. 이런 이야기가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아무도 모른다.   찰스 웨슬레가 자신의 journal에서 이 표현을 사용한 적은 있다. 전혀 다른 context에서. 예배 도중 성령이 강하게 역사해서, 존 웨슬레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thunderstruck," "wounded by the sword of the Spirit," "seized with strong pain," "cut to the heart," "sunk to the earth"를 경험한 사람이 있으면, 사람들이 가서 그에게 기도를 해주고, 그가 다시 평온을 되찾게 해주게 되는데, 이렇게 평온을 되찾은 사람을 가리켜 찰스는 "a brand plucked out of the burning"(불에서 막 꺼낸 타다 남은 나무/부지깽이)이라고 불렀던 것.   또 1753년에 웨슬레는 자신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서 죽음을 생각할 때 자신의 비석에 새길 글을 미리 만들었다. (실제로 죽은 때는 1791년.) "Here lies the body of John Wesley, A brand, not once only, plucked out of the fire." 아마 스가랴 3:2절을 생각하며 이런 표현을 썼을까? (“Is not this a brand plucked out of the fire?”) 하나님이 온갖 시험환란 가운데서도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지 않고,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고 구해주시는 것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 그렇다면 웨슬레가 자신을 용서하시고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이 아닐까? *아모스 4:11절에도 같은 표현. "I overthrew some of you as I overthrew Sodom and Gomorrah. You were like a burning stick snatched from the fire, yet you have not returned to me," declares the Lord. (내가 너희 중의 성읍 무너뜨리기를 하나님 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 같이 하였으므로, 너희가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 같이 되었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결론은 이것이 웨슬레의 어린 시절에 있었던 화재사건과 연관이 있다는 증거는 없다는 사실.   2. 신성클럽은 누가 시작했나? 웨슬레는 1724년에 Oxford의 Christ College에서 학부를 졸업하고, 아버지가 목회하는 Epworth로 돌아가서 아버지의 목회를 돕다가, 1725년 deacon 안수를 받고, 그 이듬해 1726년 9월에 다시 Oxford도 돌아왔다. 목적은 Lincoln College의 fellow로 임명받아서 강의를 하기 위해서임. (그리고 이로부터 2년 후 1728년에 priest가 됨) 웨슬레가 이렇게 다시 옥스퍼드로 돌아와서 보니 자기 동생 찰스가 신성클럽을 운영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찰스는 학교에 이신론(deism)이 퍼지는 것을 보고 놀라서 사람들을 모아 경건회를 열고 있었다. 이렇게 신성클럽은 찰스가 시작해서 주도하고 있었는데, 웨슬레는 이 모임에 가담하여, 얼마 후에 이 모임의 리더가 되었다. (당시 웨슬리만 안수받은 목사였고, 교수였고, 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기 때문.) Holy Club에서 한 일은, 경건 생활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 매주 최소한 한 번의 성만찬, 개인기도, 교도소 전도, 매일 오후에 3시간씩 모여서 그리스어 신약성서 연구와 경건서적 연구하는 것 등). 이들 집단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이름을 붙여줌: holy club, methodists (methodist라는 이름이 붙은 때는, 웨슬레가 oxford에 도착하기 전에, 즉 찰스가 신성클럽을 운영하고 있을 때 붙여졌다.) 3. 웨슬레가 조지아 선교를 간 이유? 아버지 때문. 1735년 4월에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 사망; 사무엘은 조지아 식민지를 지지하는 사람이었고, George Oglethorpe에게 자기가 10년만 젊었다면 자기의 마지막 생을 조지아에서 보내겠다고 편지를 썼다. (조지아는 빚을 갚지 못해서 감옥생활을 하던 “질이 좋은” 죄수들을 위해 만든 곳. 당시 왕이 George II였기 때문에, 이곳이 조지아가 된 것). 아버지는 죽기 몇 년 전부터 웨슬레에게 자기 뒤를 이어서 Epworth에서 목회를 하라고 요청을 했는데, 웨슬레가 계속 거절을 했다. 그런데 사무엘이 죽기 직전에 웨슬레의 손을 꼭 잡고, 자기 뒤를 이어 이곳에서 목회를 하라고 부탁을 하는데,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을 했다. 그런데 학교에서도 그를 돌아오라고 말하고, 결정적으로 감독도 꼭 돌아올 것을 명령해서 웨슬레는 결국 학교로 돌아가게 됨.   그런데 7월에 학교로 돌아왔는데,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런던에서 전갈이 왔어. 돌아가신 아버지가 욥에 대한 책을 썼는데, 그 책이 곧 출판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웨슬레가 런던에 와서 끝마무리를 도와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웨슬레가 런던으로 갔는데, 이때 그에게 조지아에 가 달라는 요청이 있었던 것. (조지아의 주지사인 James Oglethorpe가 Savannah에 목사가 필요하던 차에, 웨슬레와 찰스가 친구 Dr. John Burton의 권고를 받고 이에 자원하였던 것. 이 웨슬레 형제말고 두 명이 더 자원해서 갔다) 웨슬레는 아버지가 원했던 목회를 못해서 한참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조지아에 선교사로 가면 그나마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어드리는 것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며 친구들에게 물어보니까 다들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고, 어머니는 자기에게 아들이 20명 있다면, 평생 그들을 볼 수 없다고 해도, 그들 모두가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기를 원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웨슬레는 10월에 조지아로 떠나게 된 것. (웨슬레는 the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의 선교사 자격으로 조지아에 파송됨.)   4. 웨슬레가 모라비안들이 조용히 찬송을 부르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때가 언제? 조지아에서 영국으로 배를 타고 올 때가 아니라, 처음에 조지아를 향해 배를 타고 갈 때이다. 웨슬레는 1735년 10월에 모라비안들이 조지아의 인디언들에게 선교하기 위해 미국행 배를 타고 감 (the Simmonds). 이 배에 웨슬레도 타고 있었는데, 그런데 중간에 풍랑이 일고, 모두 겁에 질리게 됨. 그런데 모라비안들은 계속 조용히 찬송을 부르면서 전혀 동요하지 않아. 이것을 보고 자기를 돌아보게 됨: "나는 이 배의 chaplain인데, 지금 내가 죽을까봐 겁에 질려 있다니!" *사바나에 도착한 후, 모라비안인 Gottlieb Spangenberg를 찾아가서 조언을 구함. 이때 그가 질문: "당신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성령의 내적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까?" 머뭇거리니까, 다음 질문: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압니까?" 웨슬레 대답: "그가 세상의 구세주이신 것을 압니다." "그러면 그분이 당신을 구원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즉 당신의 구세주인가를 묻는 것). 웨슬레: "나는 그분이 나를 구하기 위해 죽으셨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자신을 알고 있습니까?" 웨슬레: "그렇습니다." (사실은 아니었다.)   5. 웨슬레는 성령의 “뜨거운 불”을 체험하고 회심한 것일까? 1738년 5월 24일 8시 45분. 그날 저녁때 Aldersgate 거리에 있는 어느 한 교회에 들어가서 예배드림. 설교자가 루터의 로마서주석 서문을 읽고 있었다. 이때 마음이 "이상하게 따뜻해짐" (strangely warmed). 보통 부흥운동에서 표현하는대로 “성령의 불”을 받은 것이 아님. 이때 예수가 나를 위해 죽으셨고, 내 죄를 모두 용서해 주셨고, 나를 구원해 주셨다는 확신을 얻음. "In the evening, I went very unwillingly to a society in Aldersgate Street, where one was reading Luther's preface to the Epistle to the Romans. About a quarter before nine, while the leader was describing the change which God works in the heart through faith in Christ, I felt my heart strangely warmed. I felt I did trust in Christ, Christ alone, for salvation; and an assurance was given me that he had taken away my sins, even mine, and saved me from the law of sin and death."   6. “세계는 나의 교구다”의 뜻은? 세계 선교 (원주민 선교)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니라, 성공회에서 설교단을 주지 않으니까 교회 밖에 있는 모든 곳에서 설교를 할 수 있다는 뜻으로 그런 표현을 사용한 것. (아직까지는 세계선교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윌리암 케리가 처음으로 원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세계선교를 주장한 사람이다.) 런던으로 돌아온 웨슬레는 교회들에서 계속 설교를 했지만, 결과는 별로 신통치 않았다. 그 후 웨슬레는 Jonathan Edwards가 미국 Massachusetts의 Northampton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에 대해 글을 쓴 것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 후 몇 주 후에 웨슬레에게서도 그런 부흥운동이 시작되었는데, 그것이 신성클럽의 일원이었던 George Whitefield를 (웨슬레보다 9살 아래) 통해서였다.   George Whitefield는 유명한 칼빈주의 부흥사이다. (웨슬레가 사바나 선교가기 전날 밤에 신성클럽에 가입함.) 영국, 미국, 스코틀랜드 여기저기 다니면서 부흥운동 주도. 그는 대단한 웅변가이고 그의 설교는 대단히 emotional함. (당시 가장 유명한 actor인 David Garrick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I would give a £100 if I could only say 'Oh' like Mr. Whitefield." 그리고 휘트필드는 Mesopotamia라는 단어를 너무 감동적으로 발음을 해서 사람들을 전율시키고 사람들을 울게 만들었다는 이야기.) 위트필드는 교회 안에서 그런 식으로 설교하면 안 된다는 비판을 받고, 그에게 설교단을 내어주지 앉자, 그는 야외로 나가서 설교를 함. 대표적으로 브리스톨 (1739년 2월). 웨슬레는 그 후 3월에 바통을 이어받아 브리스톨로 나가서 설교하기 시작함. 당시 위트필드가 영국의 Bristol에서 하던 일을 멈추고 미국으로 가야 할 때가 되자, 일을 웨슬리에게 이 일을 넘긴 것.   웨슬리는 처음에는 야외에서 설교하기를 거절함. 이유? 자신의 웅변술이 절대 위트필드를 따라갈 수 없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성공회에서 감리교를 공격할 때 주요 공격대상이 위트필드였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니까 전통적인 질서를 지켜야한다고 생각했던 것. 즉 교회 안에서 설교를 해야지! 하고 생각. "Having been all my life so tenacious of every point relating to decency and order, I should have thought the saving of souls almost a sin if it had not been done in a church." 그러나 찰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웨슬레는 브리스톨의 야외로 나가서 3000명이 넘는 광부들을 앞에 놓고 설교했는데, 놀라운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 이것이 감리교 부흥운동이 시작이 된다. 웨슬레는 이때를 기점으로 (1739년 봄) 완전히 바뀐 설교자가 되는데, 이전에는 자신없는 불확실한 메시지를 전달했는데, 이때를 기점으로 불을 뿜는 설교자가 된 것이다. 웨슬레는 그 후 계속 개인적 영성과 회개에 대한 설교를 하다가, 기존 성공회에서 점점 웨슬레에게 설교단을 주지 않게 되자 (이때쯤 웨슬레가 브리스톨에 가서 설교를 시작할 무렵), "세계는 나의 교구다" (the world is my parish)라고 하면서 본격적으로 교회 밖에서 설교를 함. "I look upon all the world as my parish: I judge it my bounden duty, to declare unto all that are willing to hear, the glad tidings of salvation." (웨슬레가 이 말을 한 것은 그의 친구에게 편지를 쓰면서였다. 친구가 말하기를, 웨슬레도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societies에서 설교하지 말고 다른 성공회 목사처럼 교구 안에서 설교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니까, 그의 확고한 신념을 이렇게 표현한 것. 나중에 성공회 감독들이 동일한 논조로 웨슬레와 위트필드를 비판했을 때, 웨슬레는 세계는 나의 교구라는 조로 대응을 함) 그는 감옥에서 죄수들에게 설교하고, 여관에서 나그네들에게 설교하고, 배를 타고 가면서 선상에서 설교를 하고, Cornwall에 있는 원형경기장에서 3만 명 앞에서 설교를 하기도 하고, Epworth 교회에서 설교단을 내주지 않자, 교회 뜰에 있는 아버지 무덤 위에서 수백 명에게 설교를 하기도 했다. 7. 속회와 밴드는 웨슬레가 만들었다? 원래 밴드는 모라비안들이 만들어낸 개념이다. 그들이 Herrnhut를 choir란 이름으로 나누어서 소그룹을 운영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자발적으로 하다가, 나중에는 강제적으로 전체 조직을 choir로 만듦. 예, married choir, the youth's choir, little boys' choir, single men's choir, single women's choir, widows' choir 등등 전체를 10개의 choir 조직 단위로 만듦. 웨슬레는 이것을 배워서 1738년에 감리교회 운동에 적용한 것. (속회제도를 시행하기 전에 밴드를 시행하고 있었다.) 모라비안 밴드와의 차이점을 보면, 웨슬레의 band의 특징은 구성원이 일반 사람들이라는 점 (아직 완전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 계속 신앙에 의심이 있고, 때로는 wilderness state에 있는 사람까지 포함; degrees of faith를 인정하는 개념). 그러나 모라비안의 경우는 구성원들이 spiritual elite였다. 즉 모라비안의 band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이 계속 거룩한 삶을 지속하도록 관리하는 도구였다.   band는 society에 속한 사람들 중, 그리스도의 완전을 향해 열심을 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따로 모여서 죄의 문제를 나누고 서로 기도로 도움을 주고받자는 것. 그래서 속회의 경우와는 다른 직접적인 질문을 한다. (“지난주에 무슨 죄를 지었는가?”) 이 모임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모임이고, homogeneous한 모임이고 [남자반, 여자반, 소년반, 기혼남반, 처녀반 등등], 5-10명으로 구성됨. 일주일에 한번 이상 모임. (1739년 3월에 위트필드가 웨슬레에게 브리스톨의 societies를 넘겨줄 때, 많은 이들이 band 활동을 하기에 적합하다(many are ripe for bands)는 언급을 한 적이 있다. 이 말은, 자기는 대중설교는 잘 하지만, 조직은 잘 못해서, 웨슬레가 이 일을 해달라는 부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society에는 나오지만 웨슬레의 band에 소속되지 않는 사람들을 영적으로 체크해주는 장치가 없었다. 이 gap이 우연한 계기를 통해서 채워지게 된다. 그것이 속회.   속회(class)가 생긴 배경 (1742): 교회건물을 지었는데 빚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이때 리더중 하나가 제안을 했다. society를 12명씩 나누고 책임자를 한 사람씩 선정하여 그 12명의 집을 다니면서 매주 1페니씩 갹출하자는 것. 그리고 일주일에 12페니를 못 걷으면, 차액은 leader가 자기 돈으로 채우자는 것. 이것이 결정되어서 리더들이 돈을 걷으러 집을 방문하는데, 예상치도 않았던 많은 문제들을 목격하게 된 것: 가정 폭력, 술주정 등등. 웨슬레는 이 보고를 받고 이것이 좋은 목회적 기회라고 느끼고 방법을 개선했다. 이제부터는 속장이 집집이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매주 모아서 단체로 성경공부도 시키고 삶을 나누게 시키는 것. 즉 속장이 속원들을 영적으로 care하는 목회적 임무를 가지게 한 것. *속회는 society에 속한 사람은 강제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것; 지역별로 안배. 속회에서 하는 주요 임무는 각 회원의 영적 성장을 체크하고 도와주는 것. “How is it with your soul?”이 주요 질문. 그러나 성격상 band에 비하여 아직 기독교인의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더 많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속장이 그런 목회적 임무를 담당하게 된 것.   이렇게 볼 때 웨슬레는 아주 실용적(pragmatic)인 사람. 전통에 구애받지 않고 당시 사람들에게 appeal할 수 있는 방법과 제도를 고안해서 이용했다. 그래서 society, class, band 등의 제도가 처음부터 웨슬레의 지시 하에 한 package로 제시되 것이 아니라, 당시의 필요에 따라 하나씩 생겨난 것. 여기서 웨슬레의 key word는 accessibility!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그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system을 변형시키는 것이 웨슬레의 특기. 8. 웨슬레의 소그룹 운동이 어디에서 영향을 받았나? 1) 간접적으로 독일 경건주의의 영향. 스페너의 collegia pietatis. 비록 웨슬레가 collegia를 explicitly 모방하지는 않았지만 (웨슬레의 작품에 스페너나 collegia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웨슬레는 스페너에게 크게 영향을 준 Johann Arndt의 글을 읽었고, 스페너의 제자인 Franke의 글도 열심히 읽었다. 독일 경건주의의 기본 개념이 그의 속회조직에 그대로 들어가 있다. 2) 직접적으로는 부모의 영향이 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각 nonconformist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나 이 둘은 다시 영국 성공회로 회귀하였다. (그들의 아버지들 즉 존 웨슬레의 친조부와 외조부에 반대하여). 그러나 웨슬레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할아버지들의 puritan적인 신앙은 계속 지속하여서, 경건주의적인 소그룹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1670년대부터 영국에는 소그룹을 통한 경건운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날 때 영국에서도 비슷한 평행 운동이 일어났다. 아마 독일에서 영향을 받은 듯. 그러나 영국의 소그룹은 독특한 성질이 있다. 그것은 puritan적인 moralism을 강조한다는 점.   SPCK가 생겨난 이유: puritan 혁명이 실패하고 왕정복고가 되자, 사람들은 puritan 정신의 정반대로 나갔다. 사회에서 경건성이 많이 희석되었다. 그래서 왕정복고에 대한 반작용으로, 경건성을 회복하기 위해 religious societies를 만드는 운동이 생겨난 것. 그 대표가 SPCK. 영국사회의 도덕성을 회복하기 위해, 소그룹이 필요했던 것. 사무엘 웨슬레는 자기 교구의 성가대 중 일부를 선택해서, 자기 교구에 SPCK의 소그룹을 만들었다. 여기서 하는 일은 정기적으로 모여서 경건생활(기도, 성경 등등)하고 자선사업하고 병원/감옥 심방 등등 하는 것. 그리고 조직은 12명이 넘지 않도록 했다. 12명이 넘을 경우에는 society에서 두 명이 따로 나가서 다른 society를 만들도록 했다. (나중에 존 웨슬레가 이것을 배워서 12명으로 구성된 속회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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