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이야기5: 중세 스콜라신학
Publish on July 31,2010홍삼열
이 글은 제가 한인연합감리교회 웹사이트(http://master.korean.umc.org/interior.asp?ptid=5&mid=5373)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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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콜라신학(scholasticism)은 중세기에 유행했던 대표적인 신학방법론으로서, 9세기 샬레마뉴(Charlemagne, 742-814)의 문예부흥기에 본격적으로 체계를 갖추기 시작하여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 때 절정을 이루었고 그 후 14-15세기 때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이 유행하게 되면서 점차적으로 세력을 잃어버리게 된 신학학풍입니다. “스콜라”이란 단어 자체에서 우리가 이미 짐작할 수 있듯이, 스콜라신학은 학교(schola)를 중심으로 한 신학입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한 신학이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啓示)를 강조한다면, 학교를 중심으로 한 신학은 자연질서를 통한 보편적 이성(理性)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스콜라 신학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스콜라 신학은 학교를 배경으로 한 신학으로서 신앙과 이성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며 논리적 이성으로 신앙을 설명했던 신학입니다.
스콜라신학은 대개 다음의 세 단계로 구분되는데, (I) 첫 단계는 플라톤 철학에 근거한 실재론(實在論, realism)으로서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안셀름이 대표적인 예이고, (II) 둘째 단계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근거한 실재론으로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대표적인 예이고, (III) 셋째 단계는 실재론을 거부하면서 나온 유명론으로서 대표자는 오캄입니다. 스콜라신학의 세 단계를 설명하기 전에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우선 (1) 플라톤 철학, (2)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3) 유명론을 간단하게 설명해보겠습니다.
(1) 플라톤 철학: 플라톤은 보이지 않는 이데아(Idea)의 세계가 진짜고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계는 가짜 혹은 그림자라고 가르칩니다. 가령 우리 눈앞에 책상이 하나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눈으로 보는 그 책상은 그림자에 불과하고 진짜는 이데아의 세계에 있는 “책상”의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이것도 책상으로 인식하고 저것도 책상으로 인식하는 이유는 이미 우리 관념 속에 책상의 모형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플라톤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우리 마음 속에는 보편적인 개념들(universals)이 담겨진 이데아의 세계가 있는데, 우리는 그런 개념들 때문에 사물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플라톤은 보편적인 개념들이 실재한다고 가르치고, 그런 개념들이 이 세계가 아닌 하늘 어디엔가 이데아의 세계에 실재한다고 가르칩니다.
(2)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약간 다른 이론을 전개합니다. 보편적인 개념들이 실재한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그런 것들이 이데아의 세계에 있다는 것은 거부합니다. 즉 보편적인 개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사물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여러 종류의 책상을 공통적으로 책상으로 인식하는 이유는 어떤 보편적인 개념이 있기 때문이지만, 개별적인 책상이 없다면 보편적인 개념으로서의 책상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책상의 개념은 개별적인 책상이 있을 때에만 그리고 개별적인 책상 “안”에서만 논의의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정리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적인 개념들이 실재한다고 가르치고, 그런 개념들이 이데아의 세계가 아닌 개별적인 사물 안에 실재한다고 가르칩니다.
(3) 유명론: 오캄은 보편적인 개념이 실재한다는 이론을 거부하면서, 보편적 개념은 단지 이름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nominalism의 nomen은 이름을 의미하는 라틴어입니다.) 보편적인 개념들은 단지 사람들이 편의를 위해 만들어낸 허구(虛構)라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사람들이 여러 종류의 나무 제품을 보고 그것을 모두 책상으로 부르는 것은 편의상 그렇게 하는 것이지, 엄격하게 따지자면 이 책상과 저 책상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오캄은 보편적 개념이란 존재하지 않고 그것은 단지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이제 위에서 설명한 내용을 바탕으로 중세 스콜라신학의 세 단계를 살펴보겠습니다.
(I) 안셀름(1033-1109)은 플라톤의 실재론을 배경으로 신학을 전개한 사람입니다. 플라톤이 그러하듯이 안셀름도 이데아의 세계에 보편적인 개념이 실재한다고 믿고 그것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보통 존재론적 증명(ontological argument)이라고 불리는 그의 이론은 개념의 세계에서부터 출발하는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누군가 "하나님"이란 용어를 사용한다면 그는 분명히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존재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더 이상 위대한 존재를 생각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그가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던 존재보다 더 위대한 존재가 나타나게 된다면, 그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닌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란 개념 자체에 최고의 존재라는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개념이 하나님이 현실세계에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에 어떤 해답을 줄 수 있습니까? 안셀름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에만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현실세계에도 존재하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이 사람의 생각에만 존재하고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분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이란 개념 자체가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는 최고의 존재”를 의미한다면, 그리고 사람의 생각에만 존재하는 하나님보다 사람의 생각에도 존재하고 현실세계에도 존재하는 그런 하나님이 더 위대하다면, 당연히 하나님은 현실세계에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안셀름은 하나님이란 보편적인 개념이 이데아의 세계에 실재하고 동시에 현실세계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합니다.
(II)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도미니칸 수도사로서 파리에서 오랫동안 교수생활을 한 학자입니다. 그는 철학과 신학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철학과 신학은 같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으로 절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닙니다. 즉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공동의 목표를 지향합니다. 차이점은 철학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을 다루지만 신학은 철학이 다루는 것들을 포함하여 이성의 한계를 넘는 것들, 즉 계시의 문제들도 다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학이 철학의 방법론을 이용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계시의 방법으로 명확한 가르침을 제공하지만, 하나님의 존재는 그런 방법말고도 이성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합니다. 안셀름이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의 세계에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였다면, 아퀴나스는 눈에 보이는 감각의 세계로부터 출발하여 그의 이론을 전개시킵니다.
아퀴나스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는 5가지 방법이 있는데, 첫째는 운동(motion)을 통한 증명입니다. 이 세상에는 움직이는 것이 많이 있는데 그것은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어떤 것 때문에 움직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움직임의 원인을 계속 찾아가다 보면 마지막에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것을 움직이는”(the unmoved mover) 최초의 동인(動因)이 나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둘째는 원인과 결과를 통한 증명입니다. 이 세상의 일들은 연속적인 원인과 결과의 사슬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사슬을 거슬러 올라가면 언젠가는 맨끝에 첫 번째 원인자(原因者) 하나님이 나옵니다. 셋째로 가변성(可變性)과 절대성(絶對性)을 통한 증명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이 일시적이고 가변적이라고 믿고 있는데, 그것을 믿는다는 것은 곧 어디엔가에 절대자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절대자를 상정하지 않고 어떻게 가변성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넷째로 완전의 단계를 통한 증명입니다. 이 세상에는 한 종류의 선(善)만 있는 것이 아니고 수많은 종류의 선들이 존재합니다. 그것을 순서대로 나열해서 점점 더 완전한 선으로 진행해나가면 마지막에 가장 완전한 선이 나오게 되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목적론(目的論)적 증명(teleological argument)입니다. 이 세상의 만물은 일정한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데, 그것이 스스로 그렇게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어떤 외부의 힘이 그것을 일정한 방향으로 이끄는 것인데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지금까지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을 살펴보았는데,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중요한 특징은 아퀴나스는 눈에 보이는 감각세계로부터 출발하여 보편적인 개념인 하나님을 증명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 아퀴나스는 관념의 세계를 중시하는 안셀름과 차이가 납니다.
(III) 오캄(1285-1349)은 유명론자(唯名論者)로서 안셀름과 아퀴나스의 실재론(實在論)을 부정합니다. 즉 보편적 개념이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름일 뿐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할 때, 오캄은 기독교 신학자로서 심각한 문제에 부딪힐 법합니다. 하나님도 일종의 보편적 개념인데,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일종의 보편적 원리(原理)인데, 그렇다면 하나님도 단지 이름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캄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은 이성을 이용하여 보편적 개념이 실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증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하나님이 실재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 이성으로 증명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문제이지 증명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캄은 하나님의 능력을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절대적(absolute) 능력을 가지고 계신데, 이 점에 있어서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절대적 능력은 그야말로 한계가 없는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여 행동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을 우리가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제한적(ordered) 능력을 가지고 계시는데, 이점에서만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자연 질서에 따라 운행하시며 합리적으로 행하시는 것들은 우리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이성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대부분은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신학체계를 성경을 통한 계시에 기초하지 않고 자연을 통한 이성에 기초하여 세우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이겠습니까? 오캄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기존의 신학자들이 이성으로 신학체계를 세우려고 시도하는 것을 비판하였고, 교리는 합리적이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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