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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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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리성의 추구가 신앙생활에 방해가 되는가? Publish on August 22,2010홍삼열
    이 글은 제가 [섬기는 사람들] 9:2 (2006) (http://master.korean.umc.org/interior.asp?ptid=5&mid=10886)에 기고한 글입니다.-------------------------------------------------------------------------------- 인디아나 존스 3편 최후의 성전(聖戰)을 보면, 주인공 인디(Indy)가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에서 사용했다는 성배(聖杯)를 찾으러 떠나서 결국 여러 난관을 거친 후 성배가 있는 신전에 도착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그는 큰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기 앞에 놓인 깊은 계곡을 건너갈 다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에게 남긴 일기장의 내용을 굳게 믿고 그는 무작정 허공에 발을 내디딘다. 그러자 놀랍게도 자기 발밑에서 다리가 자기를 떠받치는 것이 아닌가? 앞으로 보이는 계곡의 벽 모습에 완벽하게 조화가 되도록 다리에 색깔이 칠해져 있기 때문에 이전에는 다리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종교적으로 중요한 시사를 던져준다. 이성(理性)의 명령을 거부하고 순전히 믿음에 기초하여 허공에 발을 내디딜 때 착시(錯視) 현상이 없어지면서 길이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때 가끔 이런 “맹목적 믿음”의 문제에 부딪친다. 이성적으로 따져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미신으로 치부해야 할까, 아니면 잠시 이성의 역할을 정지시키고 믿음의 발을 내디뎌야 할까? 우리가 교회에서 합리성을 추구하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범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이 교회의 건전한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인가? 이런 질문에 대해 우리는 두 가지 다른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첫째는 “오직 믿음으로만”의 원칙을 내세우면서 교회에서는 이성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태도이다. 교회에서 합리성을 추구하는 것은 신앙생활에 절대 방해가 된다는 입장이다. 둘째는 이성은 신앙생활에 필수적이라는 입장이다. 현재 교회에서 생기는 문제의 대부분은 비이성적인 미신이나 비합리적인 습성 때문에 빚어진다는 것이다.   2세기 말에서 3세기 초 카르타고에서 활동한 터툴리안(Tertullian)은 첫 번째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이다. 그는 “아테네가 예루살렘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아카데미[철학학교]가 교회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라고 외치면서 신앙의 영역과 이성의 영역을 철저히 구분하였고, 심지어는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주장하면서 합리성의 가치를 지나치게 폄하하였다. 예를 들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부활, 재림 같은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는 절대 이성의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 되고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강하게 자기주장을 펴는 터툴리안이 실제로는 세상학문의 최고 단계인 수사학과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랬기에 그도 신앙의 문제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면서 이단에 대항하여 기독교를 수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는 믿음을 인정하지 않는 이성의 오류와 한계를 철저히 인식했을 뿐이다.   두 번째 입장을 대변하는 인물로서 13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를 들 수 있다. 그는 스콜라신학의 대가(大家)로서 이성과 신앙은 절대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인간은 원죄를 범한 타락한 존재이지만, 그렇다고 올바른 것을 추구하는 선한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이성을 이용하여 나름대로 선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고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합리적 사고는 인간생활에 필수적인 요소이며 신앙생활에서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지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이성의 가치를 인정하는 나머지 이것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이 설명할 수 있는 대상과 이성이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이 상당 부분 겹치지만, 이성이 설명할 수 없는 신앙의 범위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퀴나스는 세상학문, 특히 철학을 신학의 예비단계 또는 시녀(侍女)로 취급하였고, 세상학문에 정통하는 것이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이성의 역할을 어느 정도 인정하느냐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모두가--심지어는 터툴리안 같이 합리적인 생각이 신앙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조차도--실제로는 합리성의 기준에 따라 믿고 생활한다. 아무리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만”의 원칙을 주장하더라도 믿음을 설득력있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논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하는 것이 좋은가? 필자는 11세기말 베크(Bec) 수도원의 안셀름(Anselm)의 중도적 입장, 즉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fides quaerens intellectum)의 입장을 취하기를 권한다. 안셀름은 신앙에 관계된 사항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믿음이 있어야 하고(credo ut intelligam),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인 다음에는 그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기본적인 믿음 없이 이성의 잣대로 신앙을 평가하는 것은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어서는 것이고, 어떤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후 그것으로 만족하여 더 이상 합리적인 이해를 시도하지 않는 것도 그에 비등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의 자세는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다음에 우리가 믿는 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합리성의 추구가 신앙생활에 방해가 되는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신앙은 비이성(非理性)이 아니라 초이성(超理性)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이성이 설명할 수 없는 것까지도 설명할 수 있는, 이성의 상위개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어떤 것이 합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이 인간적인 욕심에서 나온 비이성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이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역사 때문에 그런 것인지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만일 전자의 경우라면 우리는 합리적 이성을 이용하여 비합리적인 요소들을 없애야 한다. 만일 후자의 경우라는 우리는 우선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 다음에 합리적 이성을 이용하여 그것을 이해하려고 시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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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개신교는 연옥을 부정하는가? Publish on August 17,2010홍삼열
    이 글은 제가 [섬기는 사람들] 9:1 (2006) (http://master.korean.umc.org/interior.asp?ptid=5&mid=10644)에 기고한 글입니다.----------------------------------------------------------------------------- 마태복음 12장에는 귀신 들려서 눈이 멀고 말을 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고치시는 내용이 나온다. 이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으로 그런 기적을 행하는 것이라고 비난하였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누구든지 성령을 거역하여 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때,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귀신의 일로 몰아붙이는 바리새인들의 행위가 절대 용서받지 못할 죄라는 가르침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이 말씀을 연옥(煉獄, purgatory)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구절로 받아들인다. “이 세상에서도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죄를 논한다는 것 그 자체가 “오는 세상”에서 용서받을 수 있는 어떤 죄가 있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해하에 가톨릭신학자들은 치명적인 죄(mortal sin)와 사소한 죄(venial sin)를 구별하면서, 치명적인 죄는 절대 용서받을 가능성이 없으나 사소한 죄는 지은 사람이 회개할 기회없이 갑자기 죽은 경우에 “오는 세상”에서 즉 연옥에서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설명은 자연스럽지 못한 해석이다. 가톨릭교회의 신학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없는 의미를 억지로 짜낸 것이다. 전후 문맥을 고려할 때 “이 세상에서도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은 “절대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는 어법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당신 할아버지가 와서 빌어도, 당신 고조할아버지가 와서 빌어도 절대 용서 못해!” 라고 말한다면, 이 논법은 그 사람의 할아버지나 고조할아버지의 생존 여부와 상관없이 그 사람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강조하는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왜 이런 식으로 억지해석을 하면서까지 연옥의 교리를 가르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연옥의 교리가 가톨릭교회의 일곱성사 중 하나인 고해성사(告解聖事, penance)를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즉 죄를 지었으면 반드시 죄값을 치러야 하고 (죄값은 대개 사제가 고해성사를 통해 정해준다) 죄값을 치를 때 생겨나는 공적(功績, merit)이 있어야 죄사함도 받고 천국에도 갈 수 있다는 이른바 보속(補贖, satisfaction)의 교리를 이 연옥의 교리가 보충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연옥(purgatory)이란 단어는 원래 purgare라는 라틴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정화의 장소”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람이 갑작스런 죽음을 당하게 될 때 미처 죄값을 치르지 못하고 죽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사람들을 위해 꼭 필요한 곳이 연옥이라는 것이다. 아직 완전히 용서받지 못한 연고로 천국에 그냥 받아줄 수는 없고, 그렇다고 지옥에 갈 만큼 큰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그냥 지옥으로 보낼 수도 없고, 그래서 천국에 들여보내기 전에 연옥에서 일정기간 자신을 정화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연옥에 들어간 사람은 100% 천국으로 간다고 보아야 한다. 각자의 죄질에 따라 어떤 사람은 긴 정화의 과정을 거칠 것이고 어떤 사람은 비교적 빠른 시일 내에 그 과정을 끝내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언젠가는 연옥에 있는 모두가 천국으로 올라가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때 현세에 사는 사람이 연옥에 있는 사람을 위해 미사를 올려주거나, 기도를 드려주거나, 순례를 떠나거나, 그 사람 이름으로 면죄부(免罪符, Indulgence)를 사주면 이 과정이 단축된다는 것이다.   개신교회는 연옥의 교리를 부정한다. 이 연옥의 교리가 어떤 점에서 비성서적이고 비기독교적인지 두 가지 면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는, 연옥의 교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성서의 진리에 위배된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가톨릭교회는 연옥이 있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죄를 지었으면 죄값을 치러야 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생겨나는 공적이 없으면 절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런 가르침은 사람이 선한 행위로 구원얻을 수 있다는 잘못된 신학에 기초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절대로 자기 힘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것인데(로마서 3장 23절), 어떻게 우리가 구원받을 만큼의 충분한 선행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스스로에게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과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용서받는 것이 스스로 죄의 대가를 치렀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 대가를 치르셨기 때문이고,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 선행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의 옷을 덧입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갈라디아서 3장 27절) 따라서 죄값을 치러야 용서받을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은 자신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연옥의 교리는 비성서적이고 비기독교적이다.   둘째로, 연옥의 교리는 잉여의 공적(surplus merit)의 개념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거부되어야 한다. 가톨릭 신학자들은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적이 필요한데, 우리에게 공적이 조금 모자라면 다른 사람이 쓰고 남은 공적을 빌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의 공적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면 문제될 것이 전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그들이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는 사람들, 심지어 일반 사람들도 잉여의 공적을 만들어낼 수 있고, 이렇게 해서 모아진 공적은 소위 “공적의 창고”에 저장되어서 교황이 지정하는 사람에게로 전달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문제이다. 이런 신념에 기초하여 종교개혁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돈을 주고 면죄부를 구입하였다. 면죄부 판매 수익금은 교황청 금고에 들어가서 꼭 필요한 일에 사용될 것이고, 면죄부를 구입한 사람에게는 이 헌금이 공적이 되어 “공적의 창고”에 임시 저장되었다가 현재 연옥에서 불의 단련을 받고 있는 죽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로 전달되어서 그들이 보다 빨리 천국으로 들어가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의 상식으로 생각해 볼 때, 이것은 말도 안되는 논리이다. 과연 우리에게 “남아도는 공적”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아무리 선하게 살아도 그것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데, 어찌 나에게 남아도는 공적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공적을 자기를 위해 써도 모자랄 판에 남을 위해 쓴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는 인간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루터는 신앙인이 용서를 받았다 해도 여전히 죄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용서받은 신자는 “완전한 의인”이 된 것이 아니라 “용서받은 죄인”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개과천선하고 거룩하게 되었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이 절대 천국 가는 보증수표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명백히 한 것이다. 신자의 선행은 언제나 불완전한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남아도는 공적이 있을 리 없고, 남아도는 공적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연옥에 있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잉여의 공적이란 개념은 환상에 불과한 것으로 연옥의 교리와 함께 배척되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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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
    가톨릭은 이단인가? Publish on August 17,2010홍삼열
    이 글은 제가 [섬기는 사람들] 10:3 (2007), 14-15에 기고한 글입니다.--------------------------------------------------------------------------교회생활을 하다보면 가끔 가톨릭교회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을 접하게 됩니다. 한 때 가톨릭 교인이었던 사람, 부모나 형제가 가톨릭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 현재 가톨릭교인이지만 친구를 따라 가끔 개신교회에 나오고 있는 사람, 여러 경우가 있을 겁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어떤 교우는 다짜고짜 가톨릭은 이단이니까 가톨릭교회에 나가면 안 된다고 충고합니다. 반면 다른 교우는 다 같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니까 괜히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키기 말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좋다고 말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옳을까요?   우선 “이단”이란 용어에 대해 살펴봅시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을 이단이라 부를 때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거의 같은데 결정적인 데서 몇 가지 틀리기 때문에 이단이란 용어를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구원파나 몰몬교에 대해서 이단이란 용어를 사용하지만 불교나 이슬람교를 이단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우리와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지요. 또 한 가지 우리가 알아둘 필요가 있는 사항은 이단이란 용어는 원래 기존의 종교단체가 자기에게서 파생되어 나간 소수의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구별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파생되어 나간 소수의 무리가 자기보다 오래된 기존단체를 가리켜 이단이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기존단체가 파생되어 나간 무리를 가리켜 이단으로 부르는 것이 더 자연스럽겠지요.   그렇다면 개신교의 입장에서 볼 때, 상당부분 같은 신학과 전통을 공유하고 있지만 몇 가지 중요한 대목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가톨릭을 이단으로 불러야 할까요? 위에서 설명드린 대로, 아마 그보다는 가톨릭이 개신교를 향하여 이단이라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듯싶습니다. 어쨌든 개신교는 가톨릭 전통에서 파생되어 나온 공동체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개신교에서 가톨릭교회의 잘못을 지적할 권리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분명 성서에 비추어 볼 때 가톨릭전통이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단 이 경우 “이단”이란 용어보다는 “오류”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단이란 용어는 배척의 뜻을 함축하고 있지만 오류라는 용어는 개선의 여지를 남기는 일종의 포용의 자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볼 때, 개신교를 시작했다고 인정되는 마틴 루터도 끝까지 가톨릭교회에 남아서 개혁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교 전통에 대해 취하신 입장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유대교 자체를 배척하신 것이 아니라 참 유대교를 회복하려고 시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 17절에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까?: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제 2차 바티칸 회의(1962-5) 이후 가톨릭교회에서는 개신교를 더 이상 이단으로 부르지 않고 “갈라진 형제들”(Separated Brethren)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 호전적인 용어를 계속 사용할 경우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해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겠지요. 개신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우리도 가톨릭에 대해 이단이라는 호전적인 용어를 사용할 경우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목회적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우리 교회에 가톨릭을 믿는 사람이 오게 될 경우 가톨릭을 이단이라고 공격해서 그나마 교회에 정착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자극해서 몰아내는 것보다는, “오류”라는 보다 순화된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그 사람이 점차적으로 개신교의 진리가 성서적이라는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더 득이 되는 일이 아닐까요? 따라서 “가톨릭은 이단!”이라는 호전적인 태도 대신 “가톨릭은 몇 가지 중요한 사항에서 오류가 있다”는 유화적이고도 어느 정도 가능성을 열어놓는 태도가 목회적/선교적인 차원에서 보다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개신교와 가톨릭 교회의 차이점들에 대해서는 담임목사 칼럼 내용중 "교회사 이야기 7 (종교개혁 사상의 주요 논점)"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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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
    성경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인가? Publish on August 17,2010홍삼열
    이 글은 제가 [섬기는 사람들] 8:6 (2005), 14-15에 기고한 글입니다.--------------------------------------------------------------------------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의 차이가 있다. 필자는 본 지면을 통해 이러한 의견 차이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우선 두 가지 극단을 피하는 방법으로 설명하고 그 다음에 올바른 감리교적/개신교적 입장을 제시해 보겠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글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글자 그대로” 믿고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명 근본주의자로 불리는 사람들의 입장이다. 이들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문자들, 심지어 성경의 “일점일획”에도 하나님의 진리가 담겨 있기 때문에 성경을 읽는 사람은 현미경적인 눈을 가지고 성경을 구석구석 살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토록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려는 신앙적인 자세에도 불구하고 근본주의자들은 다음의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첫째로, “일점일획”이란 개념은 성경의 원어(原語), 즉 구약의 경우 히브리어와 신약의 경우 헬라어에만 국한해서 적용해야 하는데,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원어에는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이 개념을 원어에서 번역된 한국어성경 혹은 영어성경에 잘못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번역에는 항상 번역하는 사람의 주관적 해석이 들어가기 마련인데, 그렇다면 어떤 번역본을 진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근본주의자들은 영어 번역본으로는 흠정역(King James Version)을, 한글 번역본으로는 개역한글판 만을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집하고 다른 번역본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일점일획”의 개념을 잘못 적용하는 것이다. 둘째로, 이들은 성경의 모든 글자를 소중히 여긴다고 하지만, 왜 어떤 경우에는 성경에 기록된 사항을 글자 그대로 지키지 않아도 되는지 쉽게 설명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돼지같이 새김질하지 못하는 짐승이나 오징어같이 비늘없는 물고기를 먹지 말라는 레위기의 음식법(11 장 7,10절)이나 여자는 교회에서 머리에 수건을 쓰고 예배드리라는 고린도전서 11장 5절의 경우 그들은 이것을 “영적”으로 해석하고 “글자그대로” 해석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이들 스스로 자신들이 주장하는 “일점일획”의 원칙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문자주의적인 견해가 성경의 문자를 우상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면, 로마가톨릭교회(이하 가톨릭교회)는 성경보다 교회전통을 우선시하는 또 다른 오류를 범하고 있다. 가톨릭교회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 것은 교회가 그것을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즉 교회가 없었다면 진리의 표준으로서의 성경의 개념도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톨릭교회는 성서만이 하나님의 계시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전통에도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고, 더 나아가 교회의 권위가 성서의 권위에 절대 뒤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교황무오설(교황의 말은 언제나 진리라는 설), 마리아 무흠수태설(예수님처럼 마리아 자신도 죄없이 잉태되었다는 설), 마리아 승천설(마리아도 예수님처럼 승천했다는 설)의 경우와 같이 성경에 기록된 바가 없어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전통도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런 의미에서 교회가 어떤 사항을 진리로 선포하면 그대로 진리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가 이렇게 성서의 문자에 매이지 않고 문자 이외의 새로운 계시의 가능성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 자체로 잘못은 아니다. 사실 하나님은 성서의 문자에 갇혀있을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교회의 전통을 강조하는 나머지 성서의 권위와 교회전통의 권위를 동등하게 생각하면서 성경에도 없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장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어찌 교황으로 대표되는 가톨릭교회의 전통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의 권위와 견줄 수 있단 말인가? 16세기 종교개혁가인 부처(Bucer)의 말을 인용하자면, 성경과 교회전통의 관계는 왕과 왕의 편지를 전달하는 사자(使者)의 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 왕이 어떤 지역에 사자를 보내어 편지를 전달할 때, 그것을 받는 사람은 그것을 왕의 권위가 담긴 편지로 받아들인다. 왜 그런가? 편지를 전달하는 사자가 권위가 있기 때문에 그런가? 아니면 그가 왕이 보낸 편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가? 물론 정답은 후자다. 왕이 보낸 편지의 권위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리고 전달자는 왕의 권위로 인해 덩달아 권위가 인정되는 것뿐이다. 마찬가지로 성경의 전달자로서 교회가 권위가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교회자체의 권위 때문이 아니고 성경의 주인인 하나님의 권위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서의 권위가 교회로부터 나온다거나 교회가 성서와 동등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은 어불성설인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입장을 선택해야 하는가? 앞의 두 가지 오류를 피하는 중도적인 입장이 올바른 선택일 것이다. 글자와 하나님의 말씀을 동일시하는 오류도 피하고 성서 밖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찾는 오류도 피하는 입장, 즉 루터와 웨슬리의 입장이 그것이다. 이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이유는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구약의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그것을 유대인의 성서로서 읽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될 구원의 예비단계로서 읽고, 신약성서를 읽을 때도 단순히 글자 자체가 가리키는 내용을 중심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그 글자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가르침을 주시는 것으로 읽어야 하는 것이다.   근본주의자들에게는 글자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가톨릭신자들에게는 성서와 더불어 교회전통도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서에만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은 문자가 아니라 그 문자가 담고 있는 구원의 메시지라는 것을 믿는다. 따라서 우리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구원에 관한 지식을 얻기 위해 성경을 읽으면 잘못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원래 성서는 소설책이나 과학책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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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례/유아세례는 비성서적인가? Publish on August 17,2010홍삼열
    이 글은 제가 [섬기는 사람들] 8:3 (2005), 14-15에 기고한 글입니다.--------------------------------------------------------------------------수년 전 필자가 어느 초교파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우연히 침례교 목사님과 점심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던 중 세례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게 되었는데, 서로 간에 좁힐 수 없는 의견 차이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독자들 중 이와 유사한 경험을 가진 분들이 있을 터이기에, 이 지면을 통해 감리교에서 믿고 있는 세례에 대해 간단히 설명 드리고자 합니다.   침례교에서 세례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교회에서는 “세례”(洗禮, 씻는 예식)라는 용어대신 “침례”(浸禮, 담그는 예식)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하고, 침례는 신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입으로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어른들에게만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의 예를 보면, 그 예식에 참여하는 사람은 언제나 강물에 몸을 담그는 방식을 취했고, 또 그 예식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어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침례교 교인이 되기 원하는 사람이 어릴 적에 세례를 받았거나, 아니면 어른이 되어서 다른 개신교회나 가톨릭교회에서 침례가 아닌 세례를 받았을 경우, 침례교에서는 그에게 침례를 다시 받을 것을 요구합니다. 세례를 비성서적인 것으로 보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성경에 명백히 제시된 예가 없으면 그것은 무조건 비성서적인 것이고 따라서 그것을 교회에서 시행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는 사실 그 자체로 아주 위험한 “비성서적”인 발상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그런 논리가 옳은 것이라고 가정합시다. 성경에는 물을 머리에 붓거나 뿌리는 “세례”의 예가 없기 때문에 세례는 비성서적이고, 몸을 물에 담그는 침례만이 성서적이라고 가정합시다. 그렇다면 성서의 예를 어디까지 정확하게 모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곧 봉착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참여하셨던 방식을 그대로 따라서 하는 것이 가장 성서적인 것이라면, 어떤 사람은 물에 온 몸을 담그기만 하면 성서적인 침례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반드시 “흐르는 물”에서 몸을 담가야 한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세례 받은 곳이 강물이었기 때문이지요. 또한 어떤 사람은 반드시 “예루살렘에 있는” 흐르는 물에서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딴 나라 이야기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죠. 반면 어떤 사람은 반드시 “요단강 흙탕물”에서 침례를 받아야만 진짜 침례를 받은 것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이렇게 제각기 자기 방식대로 “성서에 있는 그대로” 시행해야 진짜 성서적이라고 주장할 터인데, 어느 주장을 성서적이라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리는 “성서적”이라는 말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무엇이 성서적입니까? 무조건 성경의 글자를 고집하는 것이 성서적입니까? 성경에 명확한 예가 나오지 않으면 그것을 무조건 비성서적으로 생각하고 버리는 것이 성서적인 것입니까? 그런 논리로 따지자면, 여자는 교회에서 성찬식에 참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약성서에 여자가 성찬을 받았다는 예가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요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비성서적인 것으로 금지해야 할 것입니다. 언제 예수님이 주일 예배를 드리신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토요일 안식일 예배만을 드리셨을 뿐이죠. 따라서 우리는 “성서적”과 “문자적”을 구분해서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할 때 비성서적으로 빠질 위험이 다분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바울은 고린도후서 3장 6절에서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영은 사람을 살린다”고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례/침례는 어떻게 시행해야 성서적인 것이 되는 것일까요? 이 문제는 예식을 행하는 특정 방식이나 특정 장소에 따라 결정될 것이 아니라, 올바른 영적 의미를 가지고 시행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결정될 사안입니다. 즉 강물에 몸을 완전히 담그거나 혹은 요단강 흙탕물에서 예식을 행해야 그 예식이 성서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예식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깨끗이 씻어 죄사함을 받고 영적으로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을 믿을 때 그것이 성서적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침례라는 용어보다는 세례라는 용어를 더 적합한 성서적 용어로 이해하고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침례는 “담근다”는 문자적 의미를 표현하는데 반해 세례는 “씻는다”는 영적인 의미를 표현하기 때문이지요. 이런 이해 하에 연합감리교회에서는 물을 머리에 붓든지 뿌리든지 아니면 온 몸을 물에 담그든지 상관하지 않고, 그 세 가지 방법을 세례라는 한 명칭으로 부르면서 시행하는 것입니다.   유아세례의 문제에서도 위와 같은 원칙이 적용됩니다. 성경에 명백하게 아이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유아세례를 비성서적인 것으로 금지해야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비성서적인 논리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주장은 문자를 중시하지만 세례의 영적 의미는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세례가 무엇입니까? 세례는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칭의(稱義) 또는 구원의 약속을 받는 외적인 표현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을 용서하시고 의롭게 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약속을 세례를 통해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구원의 약속은 어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말 못하는 아이에게도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에게도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요. 같은 맥락에서 아이들은 이해력이 없기 때문에 믿음을 가질 수 없고, 믿음이 없기 때문에 세례를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총이 아닌 자신의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세례 받는 어른들 중 세례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구원이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라면, 구원의 표식인 세례는 더욱 더 값없기 주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또 세례를 구약시대에 행한 할례의 연장으로 볼 때, 우리는 유아세례를 꼭 필요한 교회의 예식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할례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구원의 언약이었다면, 그리고 구약시대의 모든 유아가 그 언약을 받았다면, 우리의 자녀들이 영적인 할례인 세례를 받는 것이 더욱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구약시대의 언약보다 신약시대의 언약이 더욱 뛰어난 것이라면, 하나님이 영적 이스라엘과 구원의 언약을 맺으시는 표시인 세례를 통해 우리의 아이들을 구원 공동체에 가입하는 것이 성서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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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합감리교회(United Methodist Church) 약사 Publish on August 13,2010홍삼열
    연합감리교회는 18세기 영국사회를 복음으로 변화시킨 요한 웨슬레(1703-1791)의 감리교운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웨슬레는 가정에서부터 철저한 경건의 훈련을 받았고, 대학시절에는 "신성클럽"을 통해 개인적 경건생활뿐만 아니라 사회적 봉사활동을 적극 실천하였고, 그 후 마음이 뜨거워지는 은혜체험을 통해 개인적 회심의 경험을 중시하게 되었다. 이런 웨슬레의 경험을 바탕으로 감리교전통의 중요한 특징이 한 가지 만들어지게 되는데, 그것은 감리교회에서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칭의(稱義)의 교리와 그 믿음이 실생활에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성화(聖化)의 교리가 함께 강조된다는 점이다.   미국에서의 감리교운동은 요한 웨슬레와 그의 동생 찰스가 1735년 미국 조지아 주로 선교를 떠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곳에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영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얼마 후 각자 개인적인 회심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제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된 웨슬레 형제는 예전과는 다른 리더십을 발휘하면서 영국에서 부흥운동을 주도하였고 삽시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감리교운동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 부흥운동에 은혜받은 사람들 중 미국으로 이민 간 사람들이 다수 있었는데, 이들이 1760년경부터 미국에서 교회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한편 미국에 감리교인들이 많아지는 것을 본 요한 웨슬레는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1769년과 1771년에 네 명의 평신도 설교자들을 골라서 미국에 파송하게 되는데, 그중 미국 감리교의 방향을 결정짓게 될 가장 중요한 인물인 애즈베리(Francis Asbury)가 있었다.   1773년에는 미국감리교회 총회가 빌라델피아에서 처음 열렸는데 이때 참석한 10명의 평신도 설교자들은 미국 내의 감리교회가 웨슬레의 신학전통을 따를 것과 자신들이 아직 평신도이기 때문에 교인들에게 성례전을 베풀 수 없는 고로 대신 교인들이 주변의 성공회에 가서 성만찬과 세례식을 받게 할 것을 결정했다.   1775년 미국이 영국에 대항하여 독립전쟁을 일으켰을 때 미국 감리교회는 제도적인 면에서 중요한 변화를 일으킬 필요가 있었다. 영국 왕실을 지지하고 미국의 독립을 반대하는 성공회가 신부들을 본국으로 불러들이자, 당장 미국의 감리교인들은 성만찬과 세례식을 받는 길이 막혀버렸다. 이때까지 미국의 감리교 운동은 안수받은 목사가 전혀 없는 평신도 운동이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독립이 완결된 후 요한 웨슬레는 코크(Thomas Coke)를 미국으로 보내면서 다른 두 명에게 목사안수를 주어 그를 대동하게 하였고, 그들이 그곳에서 자유로이 감리교인들에게 성례전을 베풀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이것이 미국감리교회가 독립하게 되는 실질적인 수단이 되었다. 1784년 볼티모어에서 “크리스마스 연회”(Christmas Conference)로 불리는 첫 번째 미감리교회(Methodist Episcopal Church) 연회가 열렸는데, 이 회의는 웨슬레의 사상을 따를 것을 천명하지만 사실은 웨슬레와 영국 감리교회에서 독립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때 교단의 명칭을 Methodist Episcopal Church로 정했고 애즈베리에게 목사안수를 줌과 동시에 그를 총감리사로 세웠다. 그리고 다른 많은 평신도 설교자들에게도 목사안수를 주어 독립교단의 배경을 가지고 전도에 힘쓰게 하였다.   이때부터 감리교회가 남북으로 갈라지는 1844년 이전의 시기는 제2차 대각성운동이 전 미국을 휩쓸 때였다. 감리교는 신학적으로 신앙체험과 엄격한 제자의 도를 강조하고, 제도적으로 평신도 설교자들이 서부개척자들을 따라 자유로이 부흥운동을 하며 교회를 설립하게 하였기 때문에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단기간에 급성장할 수 있었다. (1790년 당시 미국인구의 1.47%가 감리교인이었고, 1820년에는 2.79%, 1850년에는 5.37%가 감리교인이었다.) 이 때 속회제도를 비롯해서 주일학교, 신학교, 출판사, 국내외선교단체들의 설립 등 교회생활 전반에 걸쳐 감리교회의 성장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이런 교세확장과 더불어 심각한 갈등이 빚어지기도 하였는데, 인종차별을 견디다 못한 흑인들이 감리교에서 분리하여 1816년에 African Methodist Episcopal Church를 만들었고, 그와 비슷한 이유로 1821년에 African Methodist Episcopal Zion Church가 생겼다. 1830년에는 5000명가량의 목사와 평신도들이 감독의 권한을 견제하고 연회행정에 평신도의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Methodist Protestant Church를 만들었다. 이들은 1939년에 남감리교회와 북감리교회가 합칠 때 여기에 함께 연합하여 Methodist Church가 되었다.   1844년에는 감리교회가 노예제도 때문에 남북으로 갈라서게 되었다. 당시 5명의 감독 중 James O. Andrew란 감독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결혼을 통해 노예를 소유하게 되자 이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총회가 그가 노예를 풀어줄 때까지 감독직을 정지시키기로 결정하자, 노예제도를 지지하는 남부지역들은 따로 모여서 1845년에 남감리교회(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를 조직하였다. 시민전쟁이 북쪽의 승리로 끝나고 노예제도가 폐지된 후에도 이 두 교단이 합하지 못한 채로 계속 지속되다가 1939년에야 비로소 “감리교회”(Methodist Church)로 통합을 하게 된다.   1968년에 이 “감리교회”와 독일 경건주의에 뿌리를 둔 복음연합형제교회(Evangelical United Brethren Church)가 통합을 하면서 연합감리교회가 창설되었는데, 2007년 현재 연합감리교회는 웨슬레안 전통에 속한 교단 중 가장 큰 교단으로 미국 내 820만명,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지에 350만명, 총 1170만명의 교인수를 가지고 있다. 미국 내에서는 가톨릭, 남침례교회 다음으로 세 번째로 큰 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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