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이야기4: 언제부터 교황이 최고의 권위를 가지게 되었을까?
Publish on July 31,2010홍삼열
이 글은 제가 한인연합감리교회 웹사이트(http://master.korean.umc.org/interior.asp?ptid=5&mid=5372)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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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6장 17-19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듣고 그의 믿음을 칭찬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시니 나의 아버지시다. 또한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세력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전통적으로 가톨릭교회에서는 이 마태복음의 구절, 특히 “하늘나라의 열쇠”에 대한 구절을 들어서 교회에서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있는 사람은 베드로이고, 따라서 모든 교회는 그의 뒤를 잇는 교황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말씀 전후 문맥으로 볼 때 이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칭찬한 것은 베드로 개인이 아니라 그의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진짜 베드로 개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셨다면, 위의 마태복음 구절에 바로 뒤에 나오는 장면에서 예수님이 고난의 길을 부정하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신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그러면 예수님이 사탄에게 천국 열쇠를 주신다는 말씀입니까?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볼 때 베드로는 초대교회에서 절대 최고의 권위를 지닌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어 있는 예루살렘 공의회 사건을 보면, 당시 교회를 이끌었던 사람은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형제였던 야고보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종교회의로 일컬어지는 이 예루살렘 공의회는 이런 연유로 열리게 되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유대지역에서 사람들이 와서 난데없이 기독교인이 되려면 먼저 유대교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할례와 음식법과 안식일 법을 지켜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안디옥 교회에서는 이런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너무 심해져서 마침내 바울과 바나바를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에 보내서 이 문제에 대한 결정을 받아오게 하였습니다. 얼마 후 이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그곳 지도자들과 회의를 하였는데, 바울과 베드로와 다른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오고간 후에 마지막으로 야고보가 나서서 최종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예루살렘 교회를 지도한 사람은 베드로가 아니라 야고보였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에서는 이 사건 후에 베드로가 로마에 와서 25년 동안 목회를 하다가 네로의 박해 때 순교하였다고 주장하면서 그를 초대 교황으로 치켜세웁니다. 성경에는 바울이 로마에 갔다는 기록은 있어도 베드로가 로마에 갔다는 기록은 없는데도요. 하여튼 가톨릭교회는 바울과 베드로가 네로의 박해 때 순교했다는 전설을 역사적 사실로 내세우면서 그 중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제시하고 그로부터 현재의 교황까지의 족보를 제시하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교황의 권위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사실 로마교회는 2세기부터 정치적, 경제적인 면에서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제국의 수도에 위치한 교회라는 이유로, 그리고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지는 베드로와 바울의 권위에 힘입어 로마교회는 전체 교회에서 권위를 내세우며 점점 입지를 확고히 다지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4세기가 되어 로마교회는 대체로 라틴어권 전체에서 가장 권위있는 곳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동방에서는 그런 로마교회의 권위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라틴어권에서 대주교(patriarch)가 있는 곳으로 내세울 만한 곳은 고작 로마 한 곳 뿐이었지만, 그리스어권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을 비롯하여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이 있었고, 신학적으로도 볼 때도 동방과 서방은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서방신학은 동방신학을 베끼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방에서는 한 번도 로마감독을 교회 전체의 우두머리로 인정한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로마의 권위를 인정하는 라틴어권에서도 로마감독의 독재를 인정하지 않는 예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북아프리카 히포의 감독 어거스틴은 로마의 교황을 전체 교회가 아닌 “서방교회의 지도자”로 불렀고, 밀란의 감독 암브로스도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로마감독이 지니는 권위가 신앙고백 차원에서의 권위이지 계급 차원에서의 권위는 아니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7세기 이후가 되면 로마의 감독이 “교황”(pope)의 이름을 즐겨 사용하며 교회 전체에서 전권을 휘두르게 되는데, 교황의 권위가 그토록 세진 것은 330년부터 시작된 로마의 특수한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콘스탄틴 황제는 330년에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기게 되는데, 그 덕분에 로마교회는 동방의 교회들에 비해 황제의 간섭을 덜 받게 되었고 그런 면에서 교권을 세워나가기가 비교적 수월해졌습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5세기에 접어들면서 로마교회의 세력이 급격히 증가했는데, 그 원인은 로마의 쇠약과 야만족들의 잦은 침입에 있었습니다. 정치세력이 유명무실한 상태에서 로마와 그 주변지역이 야만족들의 침입과 약탈로 인해 혼돈에 빠졌을 때, 사람들은 자연히 교회를 의지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우선 407년 반달족은 라인 강을 건너서 프랑스와 스페인을 휩쓸고 지나갔고, 급기야는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서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점령하였습니다. 북아프리카에 거점을 확보한 반달족은 455년에 배를 타고 로마를 침입해서 엄청난 약탈을 자행했는데, 이 때 이들이 로마에 입힌 피해는 410년 발칸반도 쪽에서 침입한 서고트족이 로마에 입혔던 피해보다 더욱 심했습니다. 그 후 로마는 476년에 그나마 이름이나마 유지했던 황제 Romulus Augustulus가 고트족에게 폐위당하게 되면서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330년 로마제국의 수도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가게 되면서 그곳에서 황제 한 사람이 제국 전체를 다스리다가, 395년부터는 테오도시우스의 두 아들이 각각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에 살면서 서방과 동방을 나누어 다스렸습니다.)
이렇게 로마 정치권력에 공백이 생기고 야만족들이 로마로 침입하여 온갖 약탈행위를 자행할 때, 그 공백을 자연스럽게 채워준 사람이 바로 로마교회의 감독이었습니다. 현대적 의미에서 최초의 교황으로 일컬어지는 레오(Leo the Great)는 452년 훈족이 이태리의 아퀼레이아를 점령하고 로마로 진격해 들어올 때, 두 명의 부관만 데리고 직접 그들을 만나러 나가서 아틸라장군과 담판을 벌였습니다. 로마의 황제는 이미 힘을 잃어버린 지 오래고 콘스탄티노플에서도 개입하지 않겠다고 의사를 밝힌 이상, 로마교회 감독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나마 조직력과 자금을 확보하고 있던 단체는 교회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담판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지만, 레오 덕분에 아틸라장군은 방향을 돌려 북쪽으로 진군하였고 로마는 재난을 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455년 반달족이 로마를 침입해 들어왔을 때, 이번에도 레오는 다시 한 번 정치력을 발휘하였습니다. 비록 그들이 로마에 들어와서 두 주간 약탈행위를 하는 것은 막지 못했지만, 반달족 장군과 담판을 벌여서 로마에서 살인과 방화가 일어나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 후 여러 세대가 지나고 그레고리(Gregory the Great, 590-604) 감독이 다시 한번 본격적으로 정치력을 발휘하게 되는데, 이때는 롬바르드족이 이태리를 침입해서 온 나라를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이제는 로마까지 위협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또한 설상가상으로 로마에 큰 홍수가 나서 식량이 동이 났고 그 후 전염병이 돌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던 때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레고리는 세속 정치가가 해야 할 일들을 도맡아서 하게 됩니다. 현실적으로 그가 아니면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교회의 감독의 일을 하면서 동시에 도시의 상하수도 및 위생시설의 개선을 위해 일했고, 전염병으로 죽은 시체를 매장하도록 지도했고, 양식 조달 및 배급의 과정을 감독했으며, 심지어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훈련시키고 더 나아가 롬바르드족과 협상을 벌이기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로마교회의 감독은 세속 정치권력이 사라진 상태에서 그 빈 공간을 채우며 로마의 최고 지도자가 될 수 있었고, 그런 정치력을 배경으로 자신을 교황, 즉 전체교회의 머리로 내세우면서 베드로에게 주어진 “하늘나라의 열쇠”를 맘대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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