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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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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신교단들의 차이점을 알고 싶은데요 Publish on August 09,2010홍삼열
    이 글은 제가 [섬기는 사람들] 13:2, pp. 14-15 (http://www.nxtbook.com/nxtbooks/unitedmethodist/inservice_20100304/#/14)에 기고한 글입니다. --------------------------------------------------------------------------얼마 전에 이발을 하고 있는데 필자가 목사인 것을 아는 이발사께서 느닷없이 교단 간의 차이를 묻는 질문을 하셨다. "장로교와 감리교가 어떻게 다릅니까?" 독자들 중에 이와 비슷한 의문을 가지고 계시거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꼭 집어서 설명해 줄 말이 없어서 난처했던 적이 있다면 이 글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각 교단 간의 차이를 자세히 설명할 만큼 지면이 허락되지 않아 여기서는 교단들을 구분 짓는 가장 중요한 특징들을 두 가지씩만 간단히 설명하려 한다. 이 글은 한국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발표한 "한국의 종교현황"에 나오는 개신교단들 중 상위 5개와 모든 개신교단의 모태가 되는 루터교를 중심으로 진행된다.루터교는 16세기 종교개혁가인 루터에게서 시작된 교단으로 가톨릭교회의 선행(善行)구원 사상에 반대하여 "오직 믿음으로"의 원칙을 강조한다. 즉 로마서 1:17절의 말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에 기초하여-그리스 원문에는 "오직"이란 단어가 없지만 루터가 독일어로 성서를 번역하면서 뜻을 강조하기 위해 이 단어를 첨가하였다-구원은 행함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다는 원칙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루터교의 특징은 "오직 성서로만"의 원칙이다. 가톨릭교회는 성서에 명확한 근거가 없어도 교회전통에서 진리로 선포한 것은 믿고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예를 들어, 연옥설, 교황무오설, 마리아승천설, 7가지 성사제도 등), 루터는 성서만이 진리의 유일한 표준이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그런 교리들을 비성서적인 것으로 부정한다. 그래서 루터교의 두 가지 특징을 들라 하면 "오직 믿음으로만" 그리고 "오직 성서로만"의 원칙을 들 수 있다.두 번째로 살펴볼 교단은 장로교이다. 장로교의 특징은 그 이름에도 나오듯이 장로가 중심이 되는 교회라는 점이다. 가톨릭교회는 교황과 주교가 중심이 되어 목회자를 개교회에 보내는 중앙집권적 체제인데 반하여 장로교회는 개교회가 목회자를 초청하고 장로회의가 최고 의사결정권을 갖는 개교회중심의 교회체제이다. 그래서 장로교회에는 두 종류의 장로가 있다. 하나는 가르치는 장로로 불리는 목회자이고 또 하나는 치리와 행정을 담당하는 일반 장로이다. 또 한 가지 장로교의 특징은 "예정론"에 있다. 구원에 관한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이론이다. 만세 전에 하나님이 구원받을 자를 미리 예정하시고, 그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그가 구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보존의 은총을 주시고, 마지막에는 실제 구원을 얻도록 이끄신다는 것이다. 이 교리는 구원의 영역에서 인간의 자만심이 들어갈 여지를 없애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한다는 장점이 있다.그런데 성경에는 예정론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요소들이 많이 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도 다 예정된 것이라면 하나님이 어떻게 아담을 벌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했는데 원래 지옥 가기로 예정된 사람은 예수 믿어도 소용없단 말인가? 예정론이 설명해주지 못하는 이런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하는 교단이 생겨났는데 그것이 감리교이다. 감리교는 "복음적 신인협동설"을 가르친다. 즉 구원을 위해서는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일한다는 이론인데, 쉽게 설명하면 하나님이 먼저 사람에게 복음에 응답할 수 있는 예비적 은총을 주시면, 그는 그 은총에 힘입어 자신의 의지력을 발동해 복음을 받아들여야 하고, 그러면 하나님이 구원의 은총을 주신다는 것이다. 감리교의 두 번째 특징은 성서와 이성과 전통과 경험의 조화에 기초한 신앙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성서가 신앙의 가장 중요한 원리가 되지만 성서를 독단적으로 해석하면 엉뚱한 결론에 도달하므로 균형 잡힌 성서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 하라는 말을 글자 그대로 강요한다면 여자는 교회에서 입도 뻥긋 하지 말고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을 이성과 전통과 경험에 비추어 이해하면 성령의 의도에 맞는 올바른 해석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침례교는 개인적 신앙의 결단을 가장 중요한 원리로 가르치는 교단이다. 그래서 교회의 문제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을 철저히 금하고(정교분리의 원칙) 유아세례의 가치를 부정한다. 우선 침례교는 국가교회의 개념을 거부한다. 종교개혁기에는 왕이 가톨릭과 루터교와 장로교 중 하나를 선택하면 그가 다스리는 나라 전체가 그 교단을 선택해야 했다. 이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이단자로 박해를 받거나 처형되었다. 침례교인들은 신앙을 철저히 개인적인 선택사항으로 여기기 때문에 이런 국가종교의 개념을 거부하였고, 그래서 이단자로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현재는 거의 모든 나라가 정교분리의 원칙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것은 침례교 신학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침례교는 다른 교단들과는 달리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아는 개인적인 신앙의 결단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신앙의 배경 때문에 현재 침례교에서는 예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 혹은 신앙의 자유를 대단히 중요시 여기고 철저히 개교회 중심으로 교회를 치리한다.오순절교회 혹은 순복음교회는 성령운동을 주로 하는 교단으로 다음의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로 오순절교회는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구분하여 이 둘을 다 받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즉 물세례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하고 두 번째 세례인 성령세례를 받아야 능력이 임해서 확신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성령세례의 가장 대표적인 현상이 방언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오순절교회에서는 방언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오순절교회의 두 번째 특징은 예수님의 재림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예수님께서 곧 오실 것이기 때문에 교인들은 매일의 삶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근신하며 깨어 기도하는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성결교는 감리교에 뿌리를 둔 교단으로 웨슬리의 신학 중 성결/성화의 교리를 특별히 강조한다. 감리교가 점점 성경보다는 이성을 중시하고 개인보다는 사회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경향을 띠게 되자 이에 반발하여 개인의 성화와 구원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모여 성결교회를 구성한 것이다. 그래서 성결교인들은 외부사람들로부터 "담배 안 피고 술 안 먹고 파티장에 안 가고 극장에 안 가는 사람들"로 불릴 정도로 거룩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성결교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이른바 "사중복음"을 성경해석과 신앙생활의 요체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사중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는 중생의 복음, 신자는 성령세례를 받아 죄를 이기고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성결의 복음,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거룩하게 살 수 있도록 우리 몸을 건강하게 치유해주신다는 신유의 복음, 그리고 믿는 자는 마지막 때에 공중재림과 지상재림을 경험하게 된다는 재림의 복음을 의미한다.이상 주요 개신교단들의 특징을 간단히 살펴보았는데 이들 모두가 개신교라고 불리는 이유는 구교 즉 가톨릭과 비교해 볼 때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사람이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 것은 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의 은총을 의지하는 믿음을 통해서라는 것, 우리의 신앙과 삶의 형태를 결정하는 것은 교회의 전통이 아니라 오직 성서라는 것, 예수님이 성사(聖事)로서 제정하신 것은 세례와 성만찬 두 가지뿐이라는 것, 목회자의 독신을 강요하는 것은 비성서적이라는 것 등 개신교회들 사이에는 뚜렷이 구분되는 공통점들이 많다. 따라서 위에서 설명된 개신교단들 간의 차이점들은 필자가 설명하지 않고 넘어간 수많은 공통점들을 전제로 하여 이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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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사이야기11: 근대사회의 도전과 기독교의 대응 Publish on August 04,2010홍삼열
    이 글은 제가 한인연합감리교회 웹사이트(http://master.korean.umc.org/interior.asp?ptid=5&mid=5562)에 기고한 글입니다.-----------------------------------------------------------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증기기관이 발명되면서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은 삽시간에 유럽사회 전체로 퍼져나갔고 19세기 초에는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곳곳에 세워진 공장에서 상품들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왔고 그 상품들은 유럽과 그들이 점령한 식민지에서 소비되었습니다. 또 이 시기에 과학기술이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풍요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이때 철도와 기관차의 발명, 비행기구와 낙하산의 발명, 전기(電氣)의 발견, 원소주기율표 작성 등 과학기술 전반에 걸친 놀라운 진보가 있었습니다. 이제 19세기 사람들은 더 이상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역사는 더 이상 퇴보하지 않고 항상 진보할 것이며(헤겔), 자연도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라 진보한다고 믿었습니다(다윈). 그런데 문제는 아직도 교회만은 비이성적인 “미신”에 사로잡혀서 사회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계속 과거만 바라보며 현실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랑스혁명(1789-1815)은 이성의 법칙에 따라 무력으로 교회를 개혁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혁명에 동조하지 않는 성직자들을 단두대에서 처형시켰고 성경의 계시에 기초한 종교대신 합리적 이성에 기초한 종교를 강요하였습니다. 1815년에 나폴레옹이 워털루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한 후에도 혁명의 기본 정신인 자유, 평등, 박애의 사상은 계속 남아서, 이후 사람들은 그 기준에 맞지 않는 기독교에 대해 비판의 수위를 점점 더 높여갔습니다.사람들이 과학과 이성에 기초하여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에 대해 개신교와 가톨릭의 반응은 아주 달랐습니다. 개신교 신학자들은 이런 근대 사상의 도전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서 과학과 이성의 방법으로 기독교 신학을 정립하려고 노력했지만, 가톨릭 신학자들은 정반대 방향으로 진행했습니다. 그들은 근대사상의 도전을 무시하거나 정죄하였고 심지어 교황무오설(敎皇無誤說) 같은 극단적인 교리들을 만들어냈습니다. 1) 개신교의 대응: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슐라이어마허(1768-1834)는 기독교와 근대사상을 조화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이 노력했습니다. 우선 그는 죄를 실체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미발달(underdevelopment)의 상태로 보았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죄로 부를 경우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죄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보다 높은 단계로 발달해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죄로 부른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어떤 심각한 죄의 문제가 생겨났을 때 그것을 너무 비관적으로 다루는 대신, 좋은 상황과 좋은 교육을 통해 사람의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데 관심을 가지는 것이 더 낫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죄는 사탄에게서 나오는 어떤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단순히 미발달의 상태를 표현하는 용어이니까요. 인간의 죄성에 대한 너무 안이한 생각이죠. 또한 슐라이어마허는 종교의 본질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감정”으로 정의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감정”은 물론 일시적인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절대자에 대한 깊은 의존의 감정을 말합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성경과 기독교가 비이성적이라는 비판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만일 종교의 본질이 신의 특별계시나 도덕적 교훈이나 합리적 논리가 아니라 그에 대한 전적인 의존의 감정이라면, 우리는 성경의 역사성이나 문자적 의미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내용이 글자 그대로 역사적인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그것이 "절대자에 대한 전적인 의존"을 가르치는 것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슐라이어마허는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고는 믿지 않지만, 그것이 어떻게 해석되든 모든 피조물이 신에게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다는 것으로 해석되기만 하면 제대로 된 해석이라는 것입니다.헤겔(1770-1831)은 역사는 정/반/합(正反合, thesis/antithesis/synthesis)의 과정을 통해 발전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기독교를 "절대종교"(the absolute religion), 즉 가장 마지막에 출현하는 완성된 종교로 보았습니다. 모든 종교의 중심에는 인간과 신의 관계성이 있는데 기독교에는 그 관계성의 완성격인 성육신(Incarnation)이 있기 때문이지요. 또한 그는 삼위일체 역시 정반합의 과정을 거친 마지막 완성품이라고 주장했습니다: 1) 정: 성부는 영원한 존재,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존재; 2) 반: 성자는 시간과 공간 안으로 들어온 존재,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존재; 3) 합: 성령은 하나님이 영으로 신앙공동체와 영원히 함께 계시는 것. 다음 세대의 바우르(1792-1860)도 같은 방법론을 이용하여 기독교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1) 정: 베드로의 유대주의적 기독교; 2) 반: 바울의 헬라주의적/보편주의적 기독교; 3) 합: 2세기의 기독교.이상 개신교 학자들의 예를 들어보았는데 우리는 그들에게서 다음의 두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19세기의 사상적 분위기를 대표하는 진보론과 낙관론이 그것입니다. 당시 개신교 신학자들은 세속 사상가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역사는 일시적으로 퇴보할 수는 있어도 장기적으로 볼 때는 항상 발전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인간의 죄성을 그리 심각하게 보지 않았습니다. 역사의 진보와 함께 인간의 도덕성과 합리성도 진보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비록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여러 사회적 문제들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또 식민지 개척으로 인한 부작용들이 많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그런 문제들은 일시적인 현상이고 더욱 발전된 형태의 근대화가 이루어질 때 그런 문제들은 자동적으로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고 나서 이런 낙관론이 후퇴하게 됩니다. 역사는 반드시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인간의 죄성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2) 가톨릭의 대응: 개신교 신학자들이 근대사회의 요구를 받아들여 자유주의 쪽으로 기운 반면 가톨릭은 철저히 보수주의를 유지했습니다. 근대사회의 요구들을 들어주면 교회의 권위가 무너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18세기 말 프랑스혁명이 일어났을 때 교황은 이 혁명의 정신이 다른 나라에 퍼지는 것을 최대한 방해하였습니다. 프랑스에서 주장하는 자유, 평등의 사상이 교황권에 절대적으로 반대되기 때문이지요. 당시 프랑스의 혁명정부는 교회제도를 합리적으로 개혁하기 위해 종교법을 발표하고 모든 성직자에게 교황 대신 프랑스 정부의 지배를 받도록 하였습니다. 이제부터는 국가가 직접 성직자를 공무원처럼 임명하고 월급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혁명정부는 비합리적인 가톨릭 종교에 대항하여 "이성의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성경에서 합리적인 것만을 뽑아서 믿겠다는 것이죠. 그리고 프랑스 정부는 이에 그치지 않고 1798년 군대를 보내서 로마시를 점령하고 로마를 공화국으로 선포해버렸습니다. 이제부터는 미신(迷信)의 우두머리인 교황이 남의 나라 일에 간섭할 수 없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이 사건 이후 로마의 교황들이 근대사상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지는 뻔한 이치입니다. 그들은 프랑스혁명에 데어서 민주적/공화적 이론들을 몽땅 배격하였습니다. 근대이론을 받아들이는 신부가 있으면 그들을 모두 파문시켜버렸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더욱 보수적으로 나갔습니다. 피우스 9세(1846-1878)는 자신의 재임기간 중 로마가 공화국으로 선포되면서 바티칸 이외의 모든 지역을 잃어버렸는데, 어느 날 난데없이 “마리아 무흠수태 교리”(無欠受胎敎理, Dogma of the Immaculate Conception of Mary, 1854)를 발표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로 선택된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이론이지요. 사실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이론이기 때문에 가톨릭교회 내에서도 오랫동안 결론이 나지 않았던 것인데 피우스는 공의회도 거치지 않고 자기 혼자서 이것을 단숨에 교회의 교리로 공포해 버린 것입니다. (참고: 마리아 승천의 교리는 1950년 피우스 12세 때 발표되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교리가 발표되었을 때 사람들은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종이호랑이로 변해버린 교황의 말에 대꾸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교황은 이것을 좋은 징조로 받아들여서 이제는 더욱 대담하게도 “오류목록”(syllabus of errors, 1864)을 발표하고 그것을 통해 가톨릭교회가 금하는 근대사상이 무엇인지 명확히 제시하였습니다: 자유주의(신학방법론이 현재의 상황에 맞지 않는다는 것), 합리주의(종교도 이성의 척도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 개신교도 기독교의 일부라는 주장, 교회가 세속권력/군사력을 가지면 안 된다는 주장, 각국이 자체의 교회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는 주장, 신학교를 제외한 모든 학교 운영에 교회가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 국가와 교회가 서로 분리되어야 한다는 주장, 종교의 자유를 허락해야 한다는 주장 등. 그리고 피우스는 1870년 교황무오설(papal infallibility), 즉 교황이 교리로서 선포하는 내용은 신적인 무오성(divine infallibility)이 있다는 교서를 발표하였습니다. 물론 교황이 이런 주장을 해도 별 저항이 없었습니다. 이미 교황이 힘을 다 잃었기 때문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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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사이야기10: 대각성운동과 그것이 미국사회에 끼친 영향 Publish on August 04,2010홍삼열
    이 글은 제가 한인연합감리교회 웹사이트(http://master.korean.umc.org/interior.asp?ptid=5&mid=5561)에 기고한 글입니다.-----------------------------------------------------------요한 웨슬레(1703-91)가 영국에서 부흥운동을 일으킬 즈음 미국에서도 유사한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소위 대각성운동(大覺醒運動, The Great Awakening)이라 불리는 영적 부흥운동입니다. 이 대각성운동은 한 지역에서 연속적으로 일어난 운동이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장기간에 걸쳐 산발적으로 일어난 운동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흥운동들이 “대각성운동”이란 한 가지 용어로 불리는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 중요한 공통된 특징들, 즉 1) 모두 회개와 영적 부흥을 위해 노력했고, 2) 그 결과 미국사회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특징들 때문입니다.당시 대각성운동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이미 초기 청교도적인 신앙심을 많이 잃어버린 상태에 있었습니다. 영국과 비교해 볼 때 영국에서는 교구(parish)를 중심으로 종교생활이 질서 있게 이루어질 수 있었지만 미국에서는 그와 같은 시스템이 전혀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우선 땅이 넓어서 유럽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교구 시스템을 운영할 수가 없었습니다. 교인들이 교회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살고 있고 교인들 간에도 거리가 너무 멀어서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교인들을 심방한다거나 영적인 문제를 체크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아야지요. 교인들 입장에서도 교회의 권위나 신학적인 문제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대부분 각자가 땅을 개척해서 농사를 지어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먹고사는 것 자체가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또 각자가 독립적으로 살아야 했기 때문에 교회이건 정부이건 누구의 권위를 인정한다거나 누구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몸에 배어있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초기 청교도 이민자들의 이후세대들은 교회의 영향권으로부터 멀어져갔고 청교도적인 이상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청교도들이 처음 아메리카에 왔을 때는 이곳에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거룩한 사회를 건설하려는 목표가 있었는데, 이제 두서너 세대가 지나고 보니까 자녀들이 교회에 나가지 않고 대신 술집이나 파티장에 가던지 아니면 이성친구와 함께 들로 놀러 가는 일이 다반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대각성운동은 이런 영적 나태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일어난 영적 정화운동/회복운동이었습니다.1) 대각성운동은 1734년경 매사추세츠의 노르탬프턴에서 목회를 하던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로부터 시작됩니다. 당시에는 청교도적인 경건성이 많이 쇠퇴한 것과 더불어 이성을 중시하며 종교적 열정을 무시하는 풍조가 있었는데, 에드워즈는 그런 경향에 반대하여 죄와 회개와 구원의 경험을 강조하는 설교를 하였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그는 회개하지 않은 인간의 상태를 거미에 비유하여 사실적(寫實的)으로 묘사하였는데, 인간은 뜨거운 불 위에서 거미줄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거미와 같이 지옥불의 위험에 처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언제든지 지옥 불에 떨어져 죽을 사람들이니까 빨리 회개하라는 것이죠. 이런 주제로 설교하는 에드워즈의 어조는 차분하고 논리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예상외의 반응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설교 도중 갑자기 통곡을 하면서 회개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에드워즈의 교회에서 회개/부흥운동이 일어났고, 이 운동은 이곳에서 그치지 않고 곧 커넥티컷 전체로 퍼지게 되고 그 후 미국 전역으로(당시에는 13개 주)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에드워즈의 부흥운동은 잠잠해졌는데, 1739년경 영국 출신의 부흥사인 조지 휘트필드가 이곳을 방문하게 되면서 다시 한 번 미국 땅에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휘트필드는 영국에서 웨슬레와 함께 부흥운동을 주도하던 사람으로서 목소리가 크고 웅변술이 뛰어난 전형적인 부흥사입니다. 그가 미국에 오자마자 에드워즈는 그를 자기 교회에 초청해서 설교를 시키고 이를 계기로 다시 한번 개인적 회심의 경험을 외치는 부흥운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휘트필드의 설교 내용은 참 종교는 머리로 믿는 종교가 아니라 가슴으로 믿는 종교, 이성적으로 따지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몸으로 체험하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는 신자가 구원받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아는 방법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뚜렷한 회심의 경험, 구원의 경험이 있느냐 없느냐를 보면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이 없으면 십중팔구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이죠.물론 기존교회 목사들은 이런 운동에 거부감을 가지고 온갖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우선 부흥사들을 초청하여 집회를 여는 것은 예배의 경건성을 해치는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보통 부흥회가 열리면 사람들이 도중에 소리 지르고, 웃고, 울고, 어떤 사람은 심지어 입신(入神)하거나 발작까지 하는데 이것이 정상적인 예배의 모습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이들이 가한 보다 근본적인 비판은 대각성운동이 사람들에게 성경말씀보다 감정을 의지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감정은 수시로 변하는데 그것이 어떻게 진정한 신앙의 척도가 될 수 있겠느냐는 것이죠. 특히 휘트필드가 기존 목사들이 회심의 경험과 구원의 경험을 교인들에게 요구하지 않음으로써 간접적으로 그들을 지옥으로 내몰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에 대해, 기존 목사들은 휘트필드를 위시한 부흥사들을 무식한 열광주의자들이라고 공격하였습니다. 2) 18세기가 끝나갈 무렵 다시 한번 대각성운동이 일어나는데 이번에는 미국 남부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나게 됩니다. 이전세대의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신학자는 이때 배출되지 않았지만 대신 수많은 부흥사들이 캠프집회(camp meeting)를 통해 많은 개종자들을 배출했습니다. 캠프집회가 열리는 모습은 대충 이렇습니다. 우선 수천 명이 한꺼번에 모일 수 있는 넓은 지역을 선정하고 그곳에 그들을 수용할 수 있는 간이천막들을 칩니다. 10명에서 30명되는 목사들이 자발적으로 이곳에 와서 4-5일간 밤낮으로 예배를 인도하며 설교합니다. 어떤 때는 집회를 3-4주간 계속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 한 사람이 설교할 수 없을 때는 목사들이 그룹을 나누어서 여러 장소에서 동시에 설교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즉 어떤 사람들은 은혜 받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놀음하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모여서 술 마시기 위해 이곳에 옵니다. 하여튼 모두가 이 캠프집회의 열광적인 분위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모이는 것이죠. 여기서는 사람들이 울고 웃고 소리 지르고 별 짓 다해도 별로 문제가 될 게 없기 때문입니다.장로교회에서는 이런 열광적인 분위기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신자들에게 금족령(禁足令)을 내렸습니다. 특히 이런 집회에 참석하는 장로교 목사들을 징계에 회부한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러나 감리교와 침례교는 이 부흥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평신도뿐만 아니라 목회자도 이런 집회에 참여하는 것이 자기들 신앙에 전혀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신앙생활에서 감정이 가지는 역할을 인정한 것이고 그만큼 체험의 중요성을 인정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장로교와 감리교/침례교의 운명이 갈리게 되는데, 교세가 월등했던 장로교는 이 부흥운동을 거부함으로써 단시일 내에 감리교와 침례교에게 우위를 빼앗기게 됩니다. 또 한 가지 감리교와 침례교가 이 시기에 급속히 성장하게 된 이유는 이 두 교단만이 평신도 목회자 제도를 인정하고 이를 적극 활용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서부로 진출할 때 다른 교단들은 안수받은 목사가 없어서 목회자를 보내지 못했지만, 이 두 교단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어도 누구든지 은사가 있고 설교할 능력이 있으면 그를 목회자로 선택해서 교회를 맡겼던 것입니다. 3) 이제 대각성운동의 의의를 다음의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① 첫째로 정치적인 면에서 볼 때 대각성운동은 미국역사상 최초로 13개 주(colonies)를 통합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전에는 13개의 주가 따로 놀았지만 이제는 미국 전역을 돌며 부흥운동을 하는 사람들 덕분에 처음으로 공동체 의식이 생겼습니다. 또한 이 대각성운동 덕분에 교파별 차이가 어느 정도 극복되었습니다. 부흥운동에서 강조하는 것이 구원의 경험, 회심의 경험이기 때문에, 자연히 어떤 사람이 특정 교파에 소속되었는가 아닌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고, 대신 그가 분명한 종교적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아닌가가 중요한 사항이 된 것입니다. ② 둘째로 대각성운동을 통해 감리교와 침례교가 급성장하였습니다. 이 운동은 비록 칼빈주의에서 시작했지만(조나단 에드워즈는 장로교회 목사였습니다) 중간에 칼빈주의 교권으로부터 큰 저항을 받아 중도하차했고, 대신 감리교와 침례교가 이 운동에서 “은혜”를 받고 열심을 내어서 결국 많은 신자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③ 셋째로 대각성운동으로 인해 많은 비영리단체들이 생겨났습니다. 사람들이 구원의 기쁨을 경험하게 되면 자연히 생각과 삶이 변하게 되고 선교와 봉사로 열매가 나타나게 되는데, 이때 많은 비영리단체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미국성서공회(1816), 미국해외선교부(1812), 미국식민협회(1826, 노예해방운동을 하는 단체), 미국절제협회(1826, 금주운동을 하는 단체), 여성기독교절제협회(1874, 여성운동을 하는 단체)등이 대각성운동의 결과로 생겨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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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사이야기9: 개신교 정통주의 Publish on August 04,2010홍삼열
    이 글은 제가 한인연합감리교회 웹사이트(http://master.korean.umc.org/interior.asp?ptid=5&mid=5559)에 기고한 글입니다.--------------------------------------------------------------------------사람들은 개신교의 16세기와 17/18세기를 대개 이렇게 구분합니다. 잘못되어가고 있는 교회를 종교적 열정을 가지고 바로잡으려 시도했던 시기가 16세기였다면, 그 다음 세기는 그런 종교적 열정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후 개혁운동을 영구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교리와 조직을 체계화는 시기였다고요. 그래서 그들은 17/18세기 유럽의 개신교를 가리켜 “개신교 정통주의”(protestant orthodoxy) 혹은 “개신교 스콜라주의”(protestant scholasticism)라고 불렀습니다. 개신교 교파들이 가톨릭으로부터 그리고 서로에게서 분명히 구분되는 자체의 교리로 무장했다는 의미에서 “정통주의”란 표현을 사용하였고, 중세 스콜라주의의 경우에서와 같이 학교를 배경으로 어려운 철학 논리에 기초하여 교리체계를 세웠다는 점에서 “개신교 스콜라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죠.당시 유럽의 개신교는 크게 봐서 루터의 사상을 따르는 루터파와 칼빈의 사상을 따르는 개혁파(장로교회)로 구분됩니다. 1) 루터교 정통주의: 루터는 1세대 개혁가로서의 자신의 임무와 2세대 조직가로서의 멜랑크톤의 임무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의 일은 들에서 나무를 베어내고 큰 돌들을 제거하는 것이고, 멜랑크톤의 일은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것이다." 사실 루터는 성격이 급하고 선동적인 어투를 사용하는 전형적인 개혁가였지만 멜랑크톤은 될 수 있으면 싸움을 피하는 차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루터가 죽은 후 개혁의 바통이 멜랑크톤에게 넘겨졌을 때 그는 온건한 정책을 폈습니다. 칼비니스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고 심지어 가톨릭교회와도 진지한 대화를 시도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루터교 내의 강경파 사람들은 멜랑크톤이 루터를 배반했다고 비난했습니다. 루터가 그토록 반대했던 철학적 이성(理性)을 다시 교회로 끌어들여서 신앙을 설명하려고 했고, 그것도 모자라서 가톨릭교회와 대화하기 위해 루터의 성만찬이론이나 “오직 믿음으로만”의 교리까지도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비판에 대해 멜랑크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성경에는 본질적인 것(the essential)과 비본질적인 것(the peripheral)이 있는데 이 둘을 똑같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본질적인 것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지만 비본질적인 것은 때에 따라서는 양보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강경파 사람들은 그런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런 구분은 “정상적인 상황”에서나 할 수 있는 것이고, 한창 가톨릭과 개신교가 대립하여 싸움을 벌이고 있는 판에 그런 식으로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구분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때에는 그 둘을 구분하지 말고 가톨릭에 대해 개신교의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주장이 다수의 호응을 얻게 되어서 1577년 루터란들이 모여서 자체의 신앙고백(Formula of concord)을 작성했을 때, 성경에는 비본질적인 것들이 들어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박해의 상황에서는 그것도 양보해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습니다. 예를 들어, 루터의 성만찬 이론이 “오직 믿음” “오직 은총” “오직 성서”와 같은 수준의 본질적인 가르침은 아니지만, 현재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는 철저히 루터의 사상만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루터의 성만찬 이론은 공재설[共在設, consubstantiation theory]로 불리는데, 이는 목사가 제단 위에 놓인 떡과 포도주를 놓고 성별의 기도를 할 때 예수님이 빵과 포도주와 함께 계시기 위해 실재로 내려오셔서 그것들과 함께 계시고, 그것들이 신자들에게 전해질 때 예수님도 함께 전해진다는 이론입니다.)다음 세대에도 비슷한 논쟁이 지속되었는데 역시 비슷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조지 칼릭스투스(George Calixtus)는 본질적인 것(구원에 필수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구원에 필수적이지 않은 것)을 구분해서 본질적인 것만을 사람들에게 강요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편의상 5세기 이전의 초대교회에서 만들어낸 신조들을 본질적인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고 그 외의 것들은 권고사항으로 받아들이면 된다고 했습니다. 구원에 꼭 필요한 것들 중 초대교회에서 빼먹고 강조하지 않은 것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논리이지요. 이런 신념 하에 칼릭스투스는 루터의 성만찬 교리나 “오직 믿음으로”의 교리는 구원에 필수적인 가르침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이 문제를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죠. 물론 그도 개인적으로는 루터의 주장이 옳다고 믿고 있지만 그것을 근거로 다른 사람들을 이단으로 몰아서 그들과 관계를 끊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본질적인 교리를 부정하는 이단(heresy)과 비본질적인 데서 잘못을 저지르는 오류(error)를 구분했고, 가톨릭이나 칼비니스트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이단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그러나 대다수 루터란들은 그런 생각에 반대했습니다. 예를 들어, 비텐베르크의 아브라함 칼로프(Abraham Calov) 교수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교리 중 비본질적인 것이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하고 의문을 던지면서, 성경에서 가르치는 모든 것은 구원에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에서 신조를 만들었던 이유는 당시 이단들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는데, 현재 루터란들이 만든 신조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했습니다. 초대교회 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루터란들도 가톨릭과 칼빈주의 이단을 바로잡기 위해 신조를 통해 성경의 진리를 명확하게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루터교의 신조는 단순한 권고사항이 아니라 본질적인 진리를 정리한 신앙고백이므로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2) 개혁교회 정통주의: 이런 강경한 입장은 개혁교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칼빈주의를 가르치던 알미니우스(Arminius) 교수가 칼빈의 예정론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을 때, 다른 칼빈주의자들은 그를 반박하며 예정론을 더욱 강경하게 표현했습니다. 알미니우스는 이중예정론(어떤 사람은 천국 가기로 예정되었고 어떤 사람은 지옥 가기로 예정되었다는 이론)이 성서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의 모습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이 아무 이유 없이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내시기로 예정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그가 죽은 후 1610년에 그를 지지하던 46명의 목사들이 모여서 항의서(Remonstrance)를 작성했는데 그 중심 내용은 이렇습니다: 1)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와 무관하게 누군가를 구원하기로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행위를 미리 아시고(foreknowledge) 그것에 기초하여 예정하시는 것이다; 2)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을 거부할 수 있고 은총을 받았더라도 잘 못하면 그것을 잃을 수도 있다; 3) 그리스도는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을 위해서만 죽으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이 문서가 발표된 후 칼비니스트들은 1618년 네덜란드 도르트(Dort)에 총집합을 해서 이 문제를 놓고 토의를 벌인 결과 다음의 5가지 사항에 합의를 보았습니다. 후대 사람들은 그것을 TULIP이란 용어로 설명합니다: 1) Total depravity(전적 타락: 인간은 완전히 타락해서 절대 스스로 선한 것을 선택할 능력이 없다); 2) Unconditional election(무조건적인 선택: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나 믿음에 상관없이 어떤 사람들 구원받기로 선택하신다); 3) Limited atonement(제한된 구속: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들만을 위해 죽으셨다); 4) Irresistible grace(불가항력적인 은총: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구원시키기로 예정하시고 그 사람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시려 할 때 그 사람은 그것을 절대 거부할 수 없다); 5) Perseverance of the saints(성도의 보전: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셨다면 그 사람은 절대 그 은총을 잃어버릴 수 없다. 반드시 구원받는다). 이와 유사한 내용이 1647년 영국에서 확대/정리되어 다시 신조로 발표되는데, 그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입니다.3) 개신교 정통주의의 특징: 17/18세기 개신교 정통주의는 이전 세대와 비교할 때 다음의 특징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① 첫째로 개신교 정통주의는 자체의 명확한 신앙고백을 만들어서 그것을 교인들에게 강요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루터교인들은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을 받아들여야 했고, 개혁교회 교인들은 도르트회의의 신앙고백이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또한 개신교 교파들끼리 서로 대화를 피하고 심지어 자기들 신앙고백을 받아들이지 않는 다른 교파 사람들을 이단시하는 풍조까지 생겼습니다. 루터란들은 칼빈주의자들이 루터의 공재설을 부인하는 것을 용서할 수 없는 불신앙으로 공격하면서 칼비니스트들의 잘못과 가톨릭의 잘못을 비교하면 칼비니스트의 잘못이 훨씬 더 크다고 주장했고, 칼비니스트들은 루터란들이 교황제도의 나쁜 잔재들을 아직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공격했습니다. ② 둘째로 개신교 정통주의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철학방법론,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방법론을 이용하여 16세기 개혁가들의 사상을 조직/체계화했습니다. 루터는 신학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먼저 버려야 한다고 공언하였지만 (성경말씀을 그대로 믿지 못하고 이상한 철학논리로 자기주장을 합리화하는 것을 경계하는 말), 16세기 말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인기를 끌게 되면서 대부분 개신교 신학자들은 그의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이용하여 루터와 칼빈의 신학을 정리했습니다. 결국 내용은 가톨릭 신학과 다르지만 방법론은 아주 비슷하게 되어 버린 셈이죠.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당시 개신교 신학자들은 중세의 스콜라 신학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주로 학교를 기반으로 신학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그에 따른 방대한 양의 책들을 저술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독일 예나대학의 교수였던 요한 게르하르트는 Loci Theologici라는 9권의 조직신학 책을 썼는데 나중에는 그것을 23권으로 확대하여 출판하였습니다. ③ 셋째로 개신교 정통주의는 축자영감설을 만들어냈습니다. 초기 개혁가들은 성경이 당연히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라고 믿어서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고, 단지 성령의 영감을 문자 자체가 아닌 “문자 속에 담긴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후대 사람들은 성경이 성령의 영감으로 쓰였다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성경의 한 글자 한 글자, 더 나아가 일점일획까지도 성령이 모두 지시하신 것이기 때문에 성경에는 인간적 요소가 전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마치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편지를 받아쓰게 하는 것처럼 성령이 사람의 손을 빌어서 성경을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 저술과정에 사람의 생각이 전혀 끼어 들 틈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각 저자마다 독특한 문체나 신학사상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개신교 정통주의의 대답은, 그것은 성령이 미리 개인의 문체나 인성이나 상황을 고려해서 글을 받아 적게 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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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사이야기4: 언제부터 교황이 최고의 권위를 가지게 되었을까? Publish on July 31,2010홍삼열
    이 글은 제가 한인연합감리교회 웹사이트(http://master.korean.umc.org/interior.asp?ptid=5&mid=5372)에 기고한 글입니다. ------------------------------------------------------------------------------------ 마태복음 16장 17-19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듣고 그의 믿음을 칭찬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시니 나의 아버지시다. 또한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세력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전통적으로 가톨릭교회에서는 이 마태복음의 구절, 특히 “하늘나라의 열쇠”에 대한 구절을 들어서 교회에서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있는 사람은 베드로이고, 따라서 모든 교회는 그의 뒤를 잇는 교황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말씀 전후 문맥으로 볼 때 이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칭찬한 것은 베드로 개인이 아니라 그의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진짜 베드로 개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셨다면, 위의 마태복음 구절에 바로 뒤에 나오는 장면에서 예수님이 고난의 길을 부정하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신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그러면 예수님이 사탄에게 천국 열쇠를 주신다는 말씀입니까?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볼 때 베드로는 초대교회에서 절대 최고의 권위를 지닌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어 있는 예루살렘 공의회 사건을 보면, 당시 교회를 이끌었던 사람은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형제였던 야고보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종교회의로 일컬어지는 이 예루살렘 공의회는 이런 연유로 열리게 되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유대지역에서 사람들이 와서 난데없이 기독교인이 되려면 먼저 유대교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할례와 음식법과 안식일 법을 지켜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안디옥 교회에서는 이런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너무 심해져서 마침내 바울과 바나바를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에 보내서 이 문제에 대한 결정을 받아오게 하였습니다. 얼마 후 이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그곳 지도자들과 회의를 하였는데, 바울과 베드로와 다른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오고간 후에 마지막으로 야고보가 나서서 최종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예루살렘 교회를 지도한 사람은 베드로가 아니라 야고보였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에서는 이 사건 후에 베드로가 로마에 와서 25년 동안 목회를 하다가 네로의 박해 때 순교하였다고 주장하면서 그를 초대 교황으로 치켜세웁니다. 성경에는 바울이 로마에 갔다는 기록은 있어도 베드로가 로마에 갔다는 기록은 없는데도요. 하여튼 가톨릭교회는 바울과 베드로가 네로의 박해 때 순교했다는 전설을 역사적 사실로 내세우면서 그 중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제시하고 그로부터 현재의 교황까지의 족보를 제시하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교황의 권위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사실 로마교회는 2세기부터 정치적, 경제적인 면에서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제국의 수도에 위치한 교회라는 이유로, 그리고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지는 베드로와 바울의 권위에 힘입어 로마교회는 전체 교회에서 권위를 내세우며 점점 입지를 확고히 다지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4세기가 되어 로마교회는 대체로 라틴어권 전체에서 가장 권위있는 곳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동방에서는 그런 로마교회의 권위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라틴어권에서 대주교(patriarch)가 있는 곳으로 내세울 만한 곳은 고작 로마 한 곳 뿐이었지만, 그리스어권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을 비롯하여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이 있었고, 신학적으로도 볼 때도 동방과 서방은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서방신학은 동방신학을 베끼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방에서는 한 번도 로마감독을 교회 전체의 우두머리로 인정한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로마의 권위를 인정하는 라틴어권에서도 로마감독의 독재를 인정하지 않는 예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북아프리카 히포의 감독 어거스틴은 로마의 교황을 전체 교회가 아닌 “서방교회의 지도자”로 불렀고, 밀란의 감독 암브로스도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로마감독이 지니는 권위가 신앙고백 차원에서의 권위이지 계급 차원에서의 권위는 아니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7세기 이후가 되면 로마의 감독이 “교황”(pope)의 이름을 즐겨 사용하며 교회 전체에서 전권을 휘두르게 되는데, 교황의 권위가 그토록 세진 것은 330년부터 시작된 로마의 특수한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콘스탄틴 황제는 330년에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기게 되는데, 그 덕분에 로마교회는 동방의 교회들에 비해 황제의 간섭을 덜 받게 되었고 그런 면에서 교권을 세워나가기가 비교적 수월해졌습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5세기에 접어들면서 로마교회의 세력이 급격히 증가했는데, 그 원인은 로마의 쇠약과 야만족들의 잦은 침입에 있었습니다. 정치세력이 유명무실한 상태에서 로마와 그 주변지역이 야만족들의 침입과 약탈로 인해 혼돈에 빠졌을 때, 사람들은 자연히 교회를 의지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우선 407년 반달족은 라인 강을 건너서 프랑스와 스페인을 휩쓸고 지나갔고, 급기야는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서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점령하였습니다. 북아프리카에 거점을 확보한 반달족은 455년에 배를 타고 로마를 침입해서 엄청난 약탈을 자행했는데, 이 때 이들이 로마에 입힌 피해는 410년 발칸반도 쪽에서 침입한 서고트족이 로마에 입혔던 피해보다 더욱 심했습니다. 그 후 로마는 476년에 그나마 이름이나마 유지했던 황제 Romulus Augustulus가 고트족에게 폐위당하게 되면서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330년 로마제국의 수도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가게 되면서 그곳에서 황제 한 사람이 제국 전체를 다스리다가, 395년부터는 테오도시우스의 두 아들이 각각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에 살면서 서방과 동방을 나누어 다스렸습니다.)   이렇게 로마 정치권력에 공백이 생기고 야만족들이 로마로 침입하여 온갖 약탈행위를 자행할 때, 그 공백을 자연스럽게 채워준 사람이 바로 로마교회의 감독이었습니다. 현대적 의미에서 최초의 교황으로 일컬어지는 레오(Leo the Great)는 452년 훈족이 이태리의 아퀼레이아를 점령하고 로마로 진격해 들어올 때, 두 명의 부관만 데리고 직접 그들을 만나러 나가서 아틸라장군과 담판을 벌였습니다. 로마의 황제는 이미 힘을 잃어버린 지 오래고 콘스탄티노플에서도 개입하지 않겠다고 의사를 밝힌 이상, 로마교회 감독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나마 조직력과 자금을 확보하고 있던 단체는 교회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담판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지만, 레오 덕분에 아틸라장군은 방향을 돌려 북쪽으로 진군하였고 로마는 재난을 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455년 반달족이 로마를 침입해 들어왔을 때, 이번에도 레오는 다시 한 번 정치력을 발휘하였습니다. 비록 그들이 로마에 들어와서 두 주간 약탈행위를 하는 것은 막지 못했지만, 반달족 장군과 담판을 벌여서 로마에서 살인과 방화가 일어나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 후 여러 세대가 지나고 그레고리(Gregory the Great, 590-604) 감독이 다시 한번 본격적으로 정치력을 발휘하게 되는데, 이때는 롬바르드족이 이태리를 침입해서 온 나라를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이제는 로마까지 위협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또한 설상가상으로 로마에 큰 홍수가 나서 식량이 동이 났고 그 후 전염병이 돌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던 때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레고리는 세속 정치가가 해야 할 일들을 도맡아서 하게 됩니다. 현실적으로 그가 아니면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교회의 감독의 일을 하면서 동시에 도시의 상하수도 및 위생시설의 개선을 위해 일했고, 전염병으로 죽은 시체를 매장하도록 지도했고, 양식 조달 및 배급의 과정을 감독했으며, 심지어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훈련시키고 더 나아가 롬바르드족과 협상을 벌이기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로마교회의 감독은 세속 정치권력이 사라진 상태에서 그 빈 공간을 채우며 로마의 최고 지도자가 될 수 있었고, 그런 정치력을 배경으로 자신을 교황, 즉 전체교회의 머리로 내세우면서 베드로에게 주어진 “하늘나라의 열쇠”를 맘대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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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사이야기8: 종교개혁기의 유아세례 논쟁 Publish on July 31,2010홍삼열
    이 글은 제가 한인연합감리교회 웹사이트(http://master.korean.umc.org/interior.asp?ptid=5&mid=5558)에 기고한 글입니다. --------------------------------------------------------------------------------------------------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체험을 한 후 사람들 앞에서 설교하는 장면이 나오고, 곧이어 백성들이 마음에 찔려서 베드로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베드로는 그들에게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권면하면서 그렇게 하면 죄를 용서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38절). 그 다음 베드로는 이 약속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설명해주는데 그들은 곧 “여러분과 여러분의 아이들과 또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례를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성인(成人)들 뿐만 아니라 글자 그대로 아이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란 것입니다. 또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이 빌립보에서 전도한 내용이 나오는데, 바울은 그곳에서 두아디라성 출신의 루디아와 그의 온 가족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얼마 후 바울이 옥에 갇혔을 때 옥을 지키던 간수와 그의 온 가족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추측할 수 있는 바는 그 “온 가족”에 당연히 아이들도 포함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가족의 구성을 생각해볼 때 보통 가정에는 아이들이 있었을 것이고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면 당연히 아이들도 세례를 받았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와 중세교회는 유아세례를 성서적이고 전통에 부합하는 것으로 인정했지만 믿음의 순수성을 지나치게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은 유아세례를 비성서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배척하였습니다. 중세말의 왈덴시안파(Waldensians)나 카타르파(Cathars)가 좋은 예입니다. 이들은 성경에 아이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분명한 예가 없기 때문에 유아세례는 비성서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후에 16세기에는 이런 “비성서적”인 이유에 덧붙여 어린아이에게는 생각하거나 판단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세례를 줄 수 없다는 이론이 생겨났습니다. 어린아이는 생각하거나 결단을 내릴 능력이 없기 때문에 믿음을 가질 수 없고 믿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신앙고백을 할 수 없고 신앙고백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세례를 받을 수 없다는 논리였지요. 이렇게 유아세례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대개 재침례파(Anabaptist)라는 딱지가 붙었는데, 그 이유는 유아세례받은 사람들을 교인으로 받을 때 다시 세례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은 자기들이 재침례를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신앙고백이 없는 세례는 세례가 아니었으니까요.   16세기 재침례파 운동은 스위스 쥬리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쥬리히에는 이미 쯔빙글리라는 사람이 종교개혁운동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재침례파 사람들은 그의 개혁운동이 시원치 않다고 보고 그에게 보다 확실한 개혁을 요구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거나,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읽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전통이나 신학교육은 불필요하다거나, 유아세례나 오르간이나 4부합창 같이 성경에 명확히 설명되어 있지 않은 것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거나, 자기가 위험에 처했어도 절대 칼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쥬리히를 개신교 도시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쯔빙글리는 그런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가톨릭이나 모슬렘이 침입해도 절대 칼을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요구와 새로운 사회 건설에 긴요하게 사용될 유아세례 제도를 거부하라는 요구는 절대 들어줄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이전에 쯔빙글리의 개혁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그에게서 돌아서서 자기들끼리 따로 모임을 가졌고 여러 문제들 중 유아세례 문제를 가지고 본격적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이들 중 가톨릭신부였던 조지 블라우락(George Blaurock)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벌써 한참 전에 세례를 받고 사제서품까지 받았지만, 재침례파 운동에 가담하고 나서는 이전에 자기가 가졌던 신앙이 진짜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세례받기를 원했습니다. 그 모임에 자기 외에 성직자가 없었기 때문에 당시 그 모임을 지도하던 평신도인 콘래드 그레벨(Conrad Grebel)에게 세례를 요청했고 그에게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세례를 받은 블라우락은 자진해서 나머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후 이들은 전역을 돌아다니며 개울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재침례파운동이 점점 퍼져나가자 쥬리히시는 모든 재침례파 사람들을 잡아서 물에 빠쳐 죽이라는 법을 발표하였고 (불법적으로 물로 세례를 주었기 때문에 물로 죽여야 마땅하다는 논리이지요),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잡혀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운동이 유럽 각국으로 침투해 들어가게 되면서 그곳에서도 유사한 법이 발효되고 그 법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잡혀서 죽었습니다.   재침례파 사람들은 유아세례를 비성서적인 것으로 부정했지만 대부분의 개혁가들은 (가톨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아세례를 성서적이고 전통에 부합하는 것으로 인정했습니다. 성경에 유아세례에 대한 명백한 가르침이나 예가 없고 이성적으로 따져도 믿음의 결단을 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재침례파 사람들에게 종교개혁가들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1) 첫째로 루터는 유아는 믿음이 없지만 그의 부모나 후견인의 믿음으로, 더 크게 봐서는 교회 전체의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별로 말발이 서지 않는 것을 감지하고 후에 생각을 바꿨습니다. 즉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거니까 하나님은 어른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에게도 똑같이 믿음을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아도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고 그래서 아이가 세례받는 것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칼빈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믿음은 말씀을 듣고 이해해야 생기는 것이지만 때로는 하나님은 자기가 믿음을 주고 싶은 사람에게 믿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물론 아이들도 포함되는 것이죠. 예를 들어 아이가 세례받지 못한 상태에서 죽었을 경우 하나님은 그 아이를 세례받지 않았다고 지옥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일방적으로 구원의 믿음을 주시고 구원시키신다는 것입니다.   2) 둘째로 쯔빙글리를 제외한 모든 개혁가들은 세례는 믿음을 증진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 좋다고 주장합니다. 세례예식 자체에 그런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세례예식에 부가된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그리고 세례에 따르는 성령의 역사 때문에 믿음이 증진된다는 것입니다. 유아세례를 받으면 이런 유익이 있는데 왜 그것을 마다하느냐는 것이죠. 3) 셋째로 칼빈과 쯔빙글리는 신약성서에 유아세례에 대한 명백한 예가 없기 때문에 유아세례를 시행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논리로 따지자면 여자에게도 성찬을 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 됩니다. 성경에 어디 여자에게 성찬을 주었다는 명백한 예가 있습니까? 성경에 어디 여자에게 성찬을 주라는 가르침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여자에게 성찬을 주었다는 “글자”나 실제적 예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모든 사람에게 성찬을 받도록 명령하셨다는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례의 경우에서도 명백한 예나 글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제공되는 세례의 의미가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4) 넷째로 쯔빙글리는 세례는 구약시대에 행한 할례의 연장이기 때문에 영적인 의미에서 유아세례가 꼭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할례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할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구원의 언약을 맺으신다는 표시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영적인 할례인 세례는 하나님이 영적인 이스라엘과 구원의 언약을 맺으시는 표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따라서 만일 구약시대에 할례를 통해서 아이들이 구원 공동체에 가입했다면, 신약시대에도 세례를 통해 아이들이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5) 다섯째로 세례는 하나님의 칭의(稱義) 또는 구원의 약속이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도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인을 용서하시고 의롭게 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은 어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말 못하는 아이에게도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칼빈은 세례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세례를 받으면 그 즉시로 죄가 우리를 괴롭히지 않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않게 해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지할 때 우리가 실제로 점점 죄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6) 여섯째로 종교개혁가들은 아이들이 믿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세례를 줄 수 없다는 논리는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잘못된 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재침례파 사람들의 주장대로 세례받는 사람들은 온전한 믿음이 있어야 하고 그뿐만 아니라 세례 후에도 죄없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면, 이 세상에 세례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느 누가 구원의 징표인 세례를 받을 만큼 충분히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나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세례를 받을 자격이 있고 아이들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세례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오직 은총으로” 구원받는다는 근본적인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루터는 세례받을 때 필요한 믿음은 내가 가진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스스로 구원을 받기에 충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기에, 세례받는 사람은 자신의 믿음에 의지하여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에 “의지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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