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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사이야기4: 언제부터 교황이 최고의 권위를 가지게 되었을까? Publish on July 31,2010홍삼열
    이 글은 제가 한인연합감리교회 웹사이트(http://master.korean.umc.org/interior.asp?ptid=5&mid=5372)에 기고한 글입니다. ------------------------------------------------------------------------------------ 마태복음 16장 17-19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듣고 그의 믿음을 칭찬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시니 나의 아버지시다. 또한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세력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전통적으로 가톨릭교회에서는 이 마태복음의 구절, 특히 “하늘나라의 열쇠”에 대한 구절을 들어서 교회에서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있는 사람은 베드로이고, 따라서 모든 교회는 그의 뒤를 잇는 교황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말씀 전후 문맥으로 볼 때 이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칭찬한 것은 베드로 개인이 아니라 그의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진짜 베드로 개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셨다면, 위의 마태복음 구절에 바로 뒤에 나오는 장면에서 예수님이 고난의 길을 부정하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신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그러면 예수님이 사탄에게 천국 열쇠를 주신다는 말씀입니까?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볼 때 베드로는 초대교회에서 절대 최고의 권위를 지닌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어 있는 예루살렘 공의회 사건을 보면, 당시 교회를 이끌었던 사람은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형제였던 야고보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종교회의로 일컬어지는 이 예루살렘 공의회는 이런 연유로 열리게 되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유대지역에서 사람들이 와서 난데없이 기독교인이 되려면 먼저 유대교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할례와 음식법과 안식일 법을 지켜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안디옥 교회에서는 이런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너무 심해져서 마침내 바울과 바나바를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에 보내서 이 문제에 대한 결정을 받아오게 하였습니다. 얼마 후 이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그곳 지도자들과 회의를 하였는데, 바울과 베드로와 다른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오고간 후에 마지막으로 야고보가 나서서 최종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예루살렘 교회를 지도한 사람은 베드로가 아니라 야고보였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에서는 이 사건 후에 베드로가 로마에 와서 25년 동안 목회를 하다가 네로의 박해 때 순교하였다고 주장하면서 그를 초대 교황으로 치켜세웁니다. 성경에는 바울이 로마에 갔다는 기록은 있어도 베드로가 로마에 갔다는 기록은 없는데도요. 하여튼 가톨릭교회는 바울과 베드로가 네로의 박해 때 순교했다는 전설을 역사적 사실로 내세우면서 그 중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제시하고 그로부터 현재의 교황까지의 족보를 제시하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교황의 권위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사실 로마교회는 2세기부터 정치적, 경제적인 면에서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제국의 수도에 위치한 교회라는 이유로, 그리고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지는 베드로와 바울의 권위에 힘입어 로마교회는 전체 교회에서 권위를 내세우며 점점 입지를 확고히 다지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4세기가 되어 로마교회는 대체로 라틴어권 전체에서 가장 권위있는 곳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동방에서는 그런 로마교회의 권위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라틴어권에서 대주교(patriarch)가 있는 곳으로 내세울 만한 곳은 고작 로마 한 곳 뿐이었지만, 그리스어권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을 비롯하여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이 있었고, 신학적으로도 볼 때도 동방과 서방은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서방신학은 동방신학을 베끼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방에서는 한 번도 로마감독을 교회 전체의 우두머리로 인정한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로마의 권위를 인정하는 라틴어권에서도 로마감독의 독재를 인정하지 않는 예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북아프리카 히포의 감독 어거스틴은 로마의 교황을 전체 교회가 아닌 “서방교회의 지도자”로 불렀고, 밀란의 감독 암브로스도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로마감독이 지니는 권위가 신앙고백 차원에서의 권위이지 계급 차원에서의 권위는 아니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7세기 이후가 되면 로마의 감독이 “교황”(pope)의 이름을 즐겨 사용하며 교회 전체에서 전권을 휘두르게 되는데, 교황의 권위가 그토록 세진 것은 330년부터 시작된 로마의 특수한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콘스탄틴 황제는 330년에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기게 되는데, 그 덕분에 로마교회는 동방의 교회들에 비해 황제의 간섭을 덜 받게 되었고 그런 면에서 교권을 세워나가기가 비교적 수월해졌습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5세기에 접어들면서 로마교회의 세력이 급격히 증가했는데, 그 원인은 로마의 쇠약과 야만족들의 잦은 침입에 있었습니다. 정치세력이 유명무실한 상태에서 로마와 그 주변지역이 야만족들의 침입과 약탈로 인해 혼돈에 빠졌을 때, 사람들은 자연히 교회를 의지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우선 407년 반달족은 라인 강을 건너서 프랑스와 스페인을 휩쓸고 지나갔고, 급기야는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서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점령하였습니다. 북아프리카에 거점을 확보한 반달족은 455년에 배를 타고 로마를 침입해서 엄청난 약탈을 자행했는데, 이 때 이들이 로마에 입힌 피해는 410년 발칸반도 쪽에서 침입한 서고트족이 로마에 입혔던 피해보다 더욱 심했습니다. 그 후 로마는 476년에 그나마 이름이나마 유지했던 황제 Romulus Augustulus가 고트족에게 폐위당하게 되면서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330년 로마제국의 수도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가게 되면서 그곳에서 황제 한 사람이 제국 전체를 다스리다가, 395년부터는 테오도시우스의 두 아들이 각각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에 살면서 서방과 동방을 나누어 다스렸습니다.)   이렇게 로마 정치권력에 공백이 생기고 야만족들이 로마로 침입하여 온갖 약탈행위를 자행할 때, 그 공백을 자연스럽게 채워준 사람이 바로 로마교회의 감독이었습니다. 현대적 의미에서 최초의 교황으로 일컬어지는 레오(Leo the Great)는 452년 훈족이 이태리의 아퀼레이아를 점령하고 로마로 진격해 들어올 때, 두 명의 부관만 데리고 직접 그들을 만나러 나가서 아틸라장군과 담판을 벌였습니다. 로마의 황제는 이미 힘을 잃어버린 지 오래고 콘스탄티노플에서도 개입하지 않겠다고 의사를 밝힌 이상, 로마교회 감독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나마 조직력과 자금을 확보하고 있던 단체는 교회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담판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지만, 레오 덕분에 아틸라장군은 방향을 돌려 북쪽으로 진군하였고 로마는 재난을 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455년 반달족이 로마를 침입해 들어왔을 때, 이번에도 레오는 다시 한 번 정치력을 발휘하였습니다. 비록 그들이 로마에 들어와서 두 주간 약탈행위를 하는 것은 막지 못했지만, 반달족 장군과 담판을 벌여서 로마에서 살인과 방화가 일어나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 후 여러 세대가 지나고 그레고리(Gregory the Great, 590-604) 감독이 다시 한번 본격적으로 정치력을 발휘하게 되는데, 이때는 롬바르드족이 이태리를 침입해서 온 나라를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이제는 로마까지 위협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또한 설상가상으로 로마에 큰 홍수가 나서 식량이 동이 났고 그 후 전염병이 돌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던 때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레고리는 세속 정치가가 해야 할 일들을 도맡아서 하게 됩니다. 현실적으로 그가 아니면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교회의 감독의 일을 하면서 동시에 도시의 상하수도 및 위생시설의 개선을 위해 일했고, 전염병으로 죽은 시체를 매장하도록 지도했고, 양식 조달 및 배급의 과정을 감독했으며, 심지어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훈련시키고 더 나아가 롬바르드족과 협상을 벌이기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로마교회의 감독은 세속 정치권력이 사라진 상태에서 그 빈 공간을 채우며 로마의 최고 지도자가 될 수 있었고, 그런 정치력을 배경으로 자신을 교황, 즉 전체교회의 머리로 내세우면서 베드로에게 주어진 “하늘나라의 열쇠”를 맘대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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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사이야기8: 종교개혁기의 유아세례 논쟁 Publish on July 31,2010홍삼열
    이 글은 제가 한인연합감리교회 웹사이트(http://master.korean.umc.org/interior.asp?ptid=5&mid=5558)에 기고한 글입니다. --------------------------------------------------------------------------------------------------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체험을 한 후 사람들 앞에서 설교하는 장면이 나오고, 곧이어 백성들이 마음에 찔려서 베드로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베드로는 그들에게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권면하면서 그렇게 하면 죄를 용서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38절). 그 다음 베드로는 이 약속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설명해주는데 그들은 곧 “여러분과 여러분의 아이들과 또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례를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성인(成人)들 뿐만 아니라 글자 그대로 아이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란 것입니다. 또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이 빌립보에서 전도한 내용이 나오는데, 바울은 그곳에서 두아디라성 출신의 루디아와 그의 온 가족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얼마 후 바울이 옥에 갇혔을 때 옥을 지키던 간수와 그의 온 가족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추측할 수 있는 바는 그 “온 가족”에 당연히 아이들도 포함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가족의 구성을 생각해볼 때 보통 가정에는 아이들이 있었을 것이고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면 당연히 아이들도 세례를 받았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와 중세교회는 유아세례를 성서적이고 전통에 부합하는 것으로 인정했지만 믿음의 순수성을 지나치게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은 유아세례를 비성서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배척하였습니다. 중세말의 왈덴시안파(Waldensians)나 카타르파(Cathars)가 좋은 예입니다. 이들은 성경에 아이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분명한 예가 없기 때문에 유아세례는 비성서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후에 16세기에는 이런 “비성서적”인 이유에 덧붙여 어린아이에게는 생각하거나 판단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세례를 줄 수 없다는 이론이 생겨났습니다. 어린아이는 생각하거나 결단을 내릴 능력이 없기 때문에 믿음을 가질 수 없고 믿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신앙고백을 할 수 없고 신앙고백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세례를 받을 수 없다는 논리였지요. 이렇게 유아세례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대개 재침례파(Anabaptist)라는 딱지가 붙었는데, 그 이유는 유아세례받은 사람들을 교인으로 받을 때 다시 세례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은 자기들이 재침례를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신앙고백이 없는 세례는 세례가 아니었으니까요.   16세기 재침례파 운동은 스위스 쥬리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쥬리히에는 이미 쯔빙글리라는 사람이 종교개혁운동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재침례파 사람들은 그의 개혁운동이 시원치 않다고 보고 그에게 보다 확실한 개혁을 요구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거나,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읽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전통이나 신학교육은 불필요하다거나, 유아세례나 오르간이나 4부합창 같이 성경에 명확히 설명되어 있지 않은 것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거나, 자기가 위험에 처했어도 절대 칼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쥬리히를 개신교 도시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쯔빙글리는 그런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가톨릭이나 모슬렘이 침입해도 절대 칼을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요구와 새로운 사회 건설에 긴요하게 사용될 유아세례 제도를 거부하라는 요구는 절대 들어줄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이전에 쯔빙글리의 개혁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그에게서 돌아서서 자기들끼리 따로 모임을 가졌고 여러 문제들 중 유아세례 문제를 가지고 본격적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이들 중 가톨릭신부였던 조지 블라우락(George Blaurock)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벌써 한참 전에 세례를 받고 사제서품까지 받았지만, 재침례파 운동에 가담하고 나서는 이전에 자기가 가졌던 신앙이 진짜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세례받기를 원했습니다. 그 모임에 자기 외에 성직자가 없었기 때문에 당시 그 모임을 지도하던 평신도인 콘래드 그레벨(Conrad Grebel)에게 세례를 요청했고 그에게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세례를 받은 블라우락은 자진해서 나머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후 이들은 전역을 돌아다니며 개울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재침례파운동이 점점 퍼져나가자 쥬리히시는 모든 재침례파 사람들을 잡아서 물에 빠쳐 죽이라는 법을 발표하였고 (불법적으로 물로 세례를 주었기 때문에 물로 죽여야 마땅하다는 논리이지요),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잡혀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운동이 유럽 각국으로 침투해 들어가게 되면서 그곳에서도 유사한 법이 발효되고 그 법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잡혀서 죽었습니다.   재침례파 사람들은 유아세례를 비성서적인 것으로 부정했지만 대부분의 개혁가들은 (가톨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아세례를 성서적이고 전통에 부합하는 것으로 인정했습니다. 성경에 유아세례에 대한 명백한 가르침이나 예가 없고 이성적으로 따져도 믿음의 결단을 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재침례파 사람들에게 종교개혁가들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1) 첫째로 루터는 유아는 믿음이 없지만 그의 부모나 후견인의 믿음으로, 더 크게 봐서는 교회 전체의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별로 말발이 서지 않는 것을 감지하고 후에 생각을 바꿨습니다. 즉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거니까 하나님은 어른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에게도 똑같이 믿음을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아도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고 그래서 아이가 세례받는 것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칼빈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믿음은 말씀을 듣고 이해해야 생기는 것이지만 때로는 하나님은 자기가 믿음을 주고 싶은 사람에게 믿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물론 아이들도 포함되는 것이죠. 예를 들어 아이가 세례받지 못한 상태에서 죽었을 경우 하나님은 그 아이를 세례받지 않았다고 지옥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일방적으로 구원의 믿음을 주시고 구원시키신다는 것입니다.   2) 둘째로 쯔빙글리를 제외한 모든 개혁가들은 세례는 믿음을 증진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 좋다고 주장합니다. 세례예식 자체에 그런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세례예식에 부가된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그리고 세례에 따르는 성령의 역사 때문에 믿음이 증진된다는 것입니다. 유아세례를 받으면 이런 유익이 있는데 왜 그것을 마다하느냐는 것이죠. 3) 셋째로 칼빈과 쯔빙글리는 신약성서에 유아세례에 대한 명백한 예가 없기 때문에 유아세례를 시행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논리로 따지자면 여자에게도 성찬을 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 됩니다. 성경에 어디 여자에게 성찬을 주었다는 명백한 예가 있습니까? 성경에 어디 여자에게 성찬을 주라는 가르침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여자에게 성찬을 주었다는 “글자”나 실제적 예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모든 사람에게 성찬을 받도록 명령하셨다는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례의 경우에서도 명백한 예나 글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제공되는 세례의 의미가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4) 넷째로 쯔빙글리는 세례는 구약시대에 행한 할례의 연장이기 때문에 영적인 의미에서 유아세례가 꼭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할례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할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구원의 언약을 맺으신다는 표시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영적인 할례인 세례는 하나님이 영적인 이스라엘과 구원의 언약을 맺으시는 표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따라서 만일 구약시대에 할례를 통해서 아이들이 구원 공동체에 가입했다면, 신약시대에도 세례를 통해 아이들이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5) 다섯째로 세례는 하나님의 칭의(稱義) 또는 구원의 약속이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도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인을 용서하시고 의롭게 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은 어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말 못하는 아이에게도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칼빈은 세례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세례를 받으면 그 즉시로 죄가 우리를 괴롭히지 않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않게 해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지할 때 우리가 실제로 점점 죄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6) 여섯째로 종교개혁가들은 아이들이 믿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세례를 줄 수 없다는 논리는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잘못된 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재침례파 사람들의 주장대로 세례받는 사람들은 온전한 믿음이 있어야 하고 그뿐만 아니라 세례 후에도 죄없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면, 이 세상에 세례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느 누가 구원의 징표인 세례를 받을 만큼 충분히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나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세례를 받을 자격이 있고 아이들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세례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오직 은총으로” 구원받는다는 근본적인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루터는 세례받을 때 필요한 믿음은 내가 가진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스스로 구원을 받기에 충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기에, 세례받는 사람은 자신의 믿음에 의지하여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에 “의지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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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사이야기7: 개신교 종교개혁 사상의 주요 논점 Publish on July 31,2010홍삼열
    이 글은 제가 한인연합감리교회 웹사이트(http://master.korean.umc.org/interior.asp?ptid=5&mid=5375)에 기고한 글입니다. -----------------------------------------------------------   유럽의 종교개혁운동은 한 위대한 지도자가 이끄는 조직적인 운동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구심점이 없는 무질서한 운동도 아니었습니다. 개혁가들 사이에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공통된 특징들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여러 표현들 중 “다수의 평행운동들”이란 표현이 아마 유럽 종교개혁운동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용어일 것입니다. 각자가 전체그림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개혁운동을 진행했지만 결국에는 모두가 비슷한 목표를 향해 움직였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 바로 16세기의 종교개혁운동이었습니다. 그러면 각국의 개신교 종교개혁가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했던 사항들이 무엇일까요? 대표적으로 네 가지가 있습니다. 1) 첫째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고, 2) 둘째는 최고의 권위는 교회조직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성서에 있다는 것이고, 3) 셋째는 교회의 본질은 안수받은 성직자를 중심으로 하는 위계구조가 아니라 말씀과 성례전이 제대로 실시되는 데 있다는 것이고, 4) 넷째는 가톨릭교회에서 주장하는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은 비성서적이기 때문에 배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네 가지 주요 논점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톨릭교회는 사람이 선행을 많이 하고 성례전과 고백성사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면 죄사함받고 구원받는다고 가르쳤지만, 종교개혁가들은 구원은 그런 것들과 상관없이 이루어진다고 가르쳤습니다. 꼭 무엇을 해야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믿는 믿음이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스스로 구원을 얻을 만큼 충분히 선한 공적(功績)을 쌓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또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교회에서 요구하는 고백성사를 거치면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우선 고백성사를 받는 사람은 자신의 죄를 모조리 기록하고 그것을 일일이 회개해야 하는데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다 기록합니까? 잊어버린 죄는 어떻게 합니까? 모르고 지은 죄는 어떻게 합니까? 또한 고백신부가 지정하는 벌을 받으면 죄에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된다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단 말입니까? 사람이 무슨 능력이 있어서 하나님께 죄를 저지른 대가를 치를 수 있단 말입니까? 교회가 그런 식으로 신자들에게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에게 잘못된 믿음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그들 마음속에 미신(迷信)을 부추기는 것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신부에게 가서 죄를 고백하면 심리적인 위안을 얻고 그것으로 용서받았다는 착각을 하겠지만, 실제로 용서받기 위해서는 믿음과 회개와 그에 따른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이유로 종교개혁가들은 고백성사를 비성서적인 미신행위로 거부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참된 죄사함과 구원을 얻게 될까요? 종교개혁가들은 우리가 선한 양심과 선한 행위를 통해 그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외부로부터 오는 그리스도의 의(義)를 통해 가능하다고 가르칩니다. 마치 사람이 새 옷을 입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히시면 우리가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아직 우리 몸이 완전히 깨끗해지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은 것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중세의 고백성사 제도를 기초부터 무너뜨리는 사상입니다. 죄의 문제에 대한 중세 교회의 기본 입장은 신자는 평생 죄인이거나 의인 둘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즉 고백성사를 하고 죄의 값을 치르면 의인이고 그렇지 못하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뭔가를 해야 의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루터는 이 세상에서 의인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용서받은 신자는 평생 “의인인 동시에 죄인”의 신분을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즉 실제 행동에서는 항상 죄인일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은총으로는 의인으로 인정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이 아니면 또 그 은총을 의지하고 받아들이는 믿음이 아니면, 우리는 용서함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의인에게 주어지는 하늘나라도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최고의 권위는 성서: 두 번째 종교개혁사상의 특징은 최고 권위는 교회조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서에 있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처음부터 가톨릭교회의 권위에 도전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단지 면죄부 판매가 성서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는 결론을 가지고 시정을 요구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카톨릭교회가 교권(敎權)으로 그의 주장을 묵살하자 그는 권위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였고 그 결과 교회제도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당연히 더 권위가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루터는 “교황, 루터, 어거스틴, 바울, 심지어 하늘의 천사도 성서의 주인이거나 재판자이거나 조정자일 수는 없고 단지 성서의 증인들, 제자들, 고백자가 될 뿐이다”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부처(Bucer)는 왕과 그의 편지를 전달하는 사자(使者)의 비유를 들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왕의 편지를 전달하는 사람이 그 편지의 진실성을 보장하는가 아니면 그 편지 때문에 전달자가 대접을 받는 것인가? 누가 권위를 더 가지는 것인가? 당연히 왕의 편지이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성서에게 권위를 제공한다거나 교회가 성서보다 더 권위가 있다는 생각은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따라서 모든 교리는 성서에 비추어봐서 그 진위(眞僞)를 판단 받아야 하고 만일 성서에 위배된다면 당장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 종교개혁가들의 공통 주장이었습니다.   신앙의 절대적 권위가 더 이상 교회조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서에 있는 것이라면 당연히 모든 사람들의 손에 성서가 주어져야 마땅한 일이겠죠.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평신도들이 성서를 읽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성서읽기를 절대 권하지 않았습니다. 성서는 기본적으로 수많은 신비가 담긴 어려운 책인데 신학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 섣불리 성서를 읽다가 이단을 빠지게 될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종교개혁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가톨릭교회가 평신도에게 성경을 주지 않은 실제 이유는 그들이 성서를 읽고 가톨릭교회의 수많은 오류들을 발견할까봐 두려워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은 어려운 책이 아닙니다. 글을 깨우친 사람이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책입니다. 단지 성서를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중심으로, 즉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시는 것을 중심으로 읽으면 절대 잘못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서가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책이기 때문에 읽는 사람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령의 도움을 구하면서 읽어야 하겠지요. 어쨌든 이런 이유로 종교개혁가들은 성서를 자국어로 번역한 후 대량으로 출판하여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성서를 구입하여 스스로 읽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3) 말씀과 성례전이 제대로 시행되는 곳이 교회: 가톨릭교회는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위계구조를 교회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과 그 밑에 성직자들이 있으면 그것이 교회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참 표식은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선포되고 예수님이 제정하신 성찬과 세례가 제대로 시행되는 곳이면 그곳이 교회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표준을 가톨릭교회에 적용해볼 때 가톨릭교회는 진정한 교회가 아닌 셈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성찬과 세례가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더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교육되고 선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개 신부들은 주일에 설교를 거른 채 미사만 드리고, 그렇다고 평신도들에게 성경을 주어 읽게 하지도 않고, 또 가끔 건전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신부들이 성경대로 설교할 경우에 그것을 금지시키는데, 그런 교회가 진정한 교회일 수가 있겠습니까?   이에 덧붙여 가톨릭교회는 잘못된 성직자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직자를 일반신자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별종의 사람들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성직자가 무슨 말을 하던지 절대 반대의견을 낼 수 없게 합니다. 그러나 종교개혁가들은 베드로전서 2장 9절의 말씀, “여러분은 택함을 받은 민족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평신도들도 “제사장”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믿음을 가지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이미 영적인 기독교인이 된 것이고, 그런 사람은 이제 하나님께 직접 기도드리고 예배드릴 수 있는 제사장의 권리를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교의 문제에 있어서 성직자의 의견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도 성서의 가르침에 기초하여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직자나 평신도나 마찬가지라는 말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교회에서는 누군가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 일을 위해 특별한 은사가 있는 사람이 선택되어 사역을 위임받게 되는데 그것이 성직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직자는 영원히 지속되는 타이틀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직무(職務)인 것입니다.   4) 가톨릭교회의 성찬식은 비성서적: 가톨릭교회는 신자가 매주 성만찬(미사)에 참여해서 떡을 받아먹으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평신도에게 포도주를 주지 않습니다. 행여나 예수님의 피를 땅에 흘리는 실수를 저지르면 큰일나니까요.) 즉 신자가 믿음이 없어도 떡을 받아먹으면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그에게 물질적으로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화체설(化體說)입니다. 신부가 성별의 기도를 하는 순간 제단 위의 포도주와 빵이 실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하기 때문에, 그 빵을 받아먹는 사람은 믿음과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몸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가들은 이런 이론이 철저하게 비성서적이라고 비판합니다. 어떤 외적인 종교의식도 그 자체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조건이 될 수 없기에 하나님의 은총은 그야말로 우리의 공로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은총이 선물이라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선한 공적(功績)이 아니라 당연히 믿음이겠죠. 이점에서 개신교 성찬론이 가톨릭 성찬론과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믿음이 없이도 미사에 참여해서 떡을 받아먹으면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는다고 믿지만, 개신교 신자들은 믿음이 없이 아무리 예배를 드리고 성찬을 받아먹어도 아무 효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개신교에서 주장하는 성찬식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개신교 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바는 성찬식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약속의 징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찬식이 중요한 것은 빵과 포도주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이 의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구원사역이기 때문에, 성찬식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은 의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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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사이야기6: 16세기에 종교개혁이 일어난 이유 Publish on July 31,2010홍삼열
    이 글은 제가 한인연합감리교회 웹사이트(http://master.korean.umc.org/interior.asp?ptid=5&mid=5374)에 기고한 글입니다. -----------------------------------------------------------------------------------------------------------   “종교개혁”이란 용어는 유럽의 기독교를 가톨릭과 개신교로 나누게 한 16세기의 독특한 종교운동을 가리킵니다. 물론 이전에 이와 유사한 방향의 개혁운동들이 있었습니다. 12세기의 왈덴시안파(Waldensians), 14세기의 위클리프파, 15세기의 후스파가 그런 예입니다. 그러나 이런 개혁운동들은 16세기의 종교개혁과 비교할 때 파급효과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그런 연고로 “종교개혁”(the Reformation)하면 으레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운동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16세기 이전에 이미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힘을 합쳐 교회의 개혁을 시도했는데, 왜 그들의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고 16세기의 개혁은 대성공을 거두었을까요? 16세기의 개혁이 유럽전체를 뒤흔들어 놓을 정도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종교개혁 전야의 상황이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최악의 상태였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예를 들어, 영국 국왕 헨리 8세는 자신의 개인 의사인 리나커에게 네 교구의 담임자의 직책, 세 성당의 부담임자의 직책, 요크대사원의 성가대장의 직책을 주었습니다. 리나커가 아직 신부 서품을 받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여러 개의 성직을 하사받은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왕이 자기 주머니에서 직접 월급을 주지 않고 교회의 여러 직책에서 나오는 돈으로 월급을 지급하기 위해서였죠.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프랑스 외교관 안트완은 상(Sens) 교회의 대주교로 임명받았지만 생전에 자기의 교회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죽어서 자기 장례식할 때 딱 한 번 교회에 들어가 봤습니다. 이상의 두 가지 예에서 우리는 당시 교회의 부패상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곧 pluralism(한 사람이 여러 직책을 겸임하면서 여러 군데서 월급을 받는 행위)과 absenteeism(목사가 임지에 가서 직접 목회를 하지 않고 다른 곳에 거주하면서 월급은 꼬박꼬박 받아가는 행위)입니다. 그밖에도 가톨릭교회에는 고질적인 성직매매(simony)의 문제, 성직자의 불륜 혹은 불법결혼문제 등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이런 교회의 부패문제가 16세기에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주요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런 종류의 부패는 그 때만 발견되는 문제가 아니라 중세 내내 지속되어 온 고질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매번 개혁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개혁가들은 위에서 언급한 부패들을 해결하자고 단골메뉴로 외쳤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16세기에야 이르러 종교개혁운동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요? 16세기 종교개혁기에만 해당되는 특수한 요인들이 무엇이 있을까요?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첫째는 민족주의의 발생과 근대국가의 형성이고, 2) 둘째는 르네상스와 인쇄술의 발달입니다.   1) 민족주의의 발생과 근대국가의 형성: 16세기 초에 있었던 가장 중요한 정치적 현상은 근대국가의 탄생입니다. 당시 가장 힘이 세었던 스페인의 예를 들면, 스페인은 15세기말 이사벨라 여왕이 아라곤의 페르디난드와 정략결혼을 한 후 그 둘이 힘을 합쳐 그라나다에서 무어족을 몰아내고 스페인 반도를 통일합니다. 그리고 그 후 포르투갈과 나바르까지 정복하게 됩니다. 이렇게 스페인의 세력이 강화되자 이사벨라는 교황에게서 종교재판권(Inquisition)을 얻어내서 스페인 영토내의 모든 감독들을 감시하는 권리를 얻게 되고, 그러면서 스페인 교회의 실질적인 치리자가 됩니다. 비록 명목상으로는 교황이 스페인 교회의 머리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스페인 국왕이 스페인의 모든 종교문제를 관할하게 된 것입니다.   프랑스의 경우도 스페인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미 아비뇽교황청 시대(1305-1378)에 교황청을 프랑스 영토로 옮겨올 정도로 국왕의 세력이 대단했고 그 후에도 프랑스 왕은 프랑스 교회에 대한 권리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516년에 프랜시스 1세는 교황과 볼로냐협정을 맺었는데, 내용은 프랑스 내의 모든 고위 성직자들을 프랑스 왕이 임명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프랑스 국왕의 힘이 막강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사정은 영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영국 국왕은 15세기에 이미 주요 감독들을 임명할 권한을 교황으로부터 얻어냈고, 16세기에는 로마로 가는 돈을 금지시키고 영국 자체교회인 성공회를 탄생시켰습니다. 독일의 경우는 아직 16세기말까지 통일국가를 형성하지는 못했지만, 전반적으로 서서히 민족주의를 키워가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유럽 각국이 자체 세력을 키워나가고 종교의 문제에서 교황의 간섭을 거부할 수 있다는 것은 곧 교황청의 쇠퇴를 의미합니다. 교황은 더 이상 파문장으로 각 나라를 협박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가령 교황이 프랑스나 스페인의 교회로부터 어떤 중요한 것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파문장의 위력만으로는 안 되고 그들과 막후에서 협상을 벌여야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유럽 각국의 수도에 교황의 사절들(nuncios)을 파견되어 상주(常主)하기 시작한 것이죠. 또한 이 시기에 교황청은 경제적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미 아비뇽교황청 시대에 아비뇽에 교황청을 새로 짓고 운영하기 위해 막대한 돈을 지출했고, 그 후 교황청이 둘로 갈라졌을 때 두 명의 교황이 각자의 입지를 견고히 하기 위해 재정을 축냈고, 또한 르네상스 시대의 교황들도 예술을 후원하거나 전쟁을 하느라 교황청 재정에 심한 손실을 입혔습니다.   그러면 이런 교황청의 쇠퇴가 16세기 종교개혁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종교개혁가들의 입장에서는 교황권이 줄어들고 각국 국왕의 권한이 늘어가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우선 개혁을 거부하는 교황을 거슬려 개혁을 시도할 경우 국왕이 방패막이가 되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루터가 맨 처음 교황을 공격하는 글을 썼을 때 보통의 경우 같았으면 당장 파문당했을텐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독일 제후인 프레데릭이 그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당시에는 황제를 선출하는 선거철이었고 교황은 유럽의 세력균형을 위해 프레데릭이 황제가 되기를 바래서 루터를 특별히 봐주었던 것입니다. 만일 이런 정치적 상황이 무르익지 않아서 초창기에 루터가 파문당했다면 그의 종교개혁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후에 스페인의 찰스가 황제가 된 후 교황이 루터를 파문하고 (더 이상 봐줄 이유가 없으니까) 보름스 국회에서조차 루터에게서 정치적 신변보장을 철회했을 때, 보름스 국회가 끝나고 돌아가는 루터를 비밀리에 납치해서 바르트부르크 성에 보내어 안전하게 살게 한 사람도 다름 아닌 프레데릭이었습니다.   종교개혁가들로서는 사실 교황에게 개혁을 호소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교황이 남의 나라에 간섭할 힘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부패의 주범이기 때문에 절대 개혁을 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국왕에게 부탁하면 그가 단칼에 개혁의 문제를 처리해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1501년 프랑스의 드 암바스 추기경은 파리에 소재한 어느 한 수도원을 개혁하려고 시도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개혁을 위해 두 명의 감독을 보냈는데, 그곳 수도사들은 그들을 보자마자 예배실로 달려들어가서 성만찬을 하고 계속 찬송을 불러댔습니다. 4시간이 지나도 끝나지 않아서 할 수 없이 두 감독들은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 파리 시장이 100명의 궁수(弓手)와 경찰들을 데리고 들이닥쳐서, 예배드리는 척하면서 딴청을 피는 수도사들을 제지시키고 포고문을 낭독했습니다. 이로써 수도원 개혁이 효과를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2) 르네상스와 인쇄술의 발전: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이 터키족에게 멸망했을 때 많은 비잔틴 학자들이 이태리로 피신을 했는데 그 때 그들은 그리스 문학과 철학을 가지고 피신했습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이태리에서 르네상스(문예부흥)가 일어났습니다. 르네상스의 관심은 고전(古典)으로 돌아가서 그것을 현시대에 다시 일으키는 것이었는데, 당시 우연히도 이들에게 아주 중요한 발명품이 하나 생겼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구텐베르크의 인쇄활자입니다. 이전에는 책을 만들려면 일일이 손으로 다 베껴야 했습니다. 당연히 책의 숫자가 적을 수밖에 없었고 값도 비쌌습니다. 제대로 된 책 한 권 가지고 있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인쇄활자가 발명되어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책이 다량으로 출판되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책을 구하기가 쉬워졌습니다. 본문비평(textual criticism)은 이런 변화된 출판문화를 배경으로 발전한 학문방법입니다. 갑자기 책의 수가 많아지게 되면서 같은 책을 여러 권 구해서 서로 비교해 볼 기회가 생기게 되는데 이때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같은 책이면 한 글자 틀림없이 서로 같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책들 각각이 다른 필사본(筆寫本)에 기초하여 출판되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진본을 가리기 위해 학자들이 여러 가지 방법을 고안해냈는데 그것이 바로 본문비평입니다.   이 방법이 신약성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종교개혁가들은 이 방법을 사용하여 신약성서의 진본을 가리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 가톨릭교회의 오류를 지적하였습니다. 가톨릭교회는 Vulgate 라틴어성서를 공식성경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종교개혁가들이 본문비평을 통해 검토해본 결과 그곳에 심각한 오류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가톨릭교회에서는 결혼을 성사(聖事, sacramentum)로 가르치는데 이는 에베소서 5장 32절의 결혼의 “신비”(mysterion)를 “성사”로 잘못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3장 2절과 4장 17절의 “회개하라”(metanoeite)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가톨릭교회의 라틴어성서는 그것을 “고백성사를 하라”(paenitentiam agite)는 말로 오역(誤譯)을 하고 그것을 기초로 신자들에게 고백성사를 강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가들은 고전으로 돌아가자는 르네상스운동 덕분에 그리스어 원전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그랬기 때문에 위의 예와 같이 결혼성사와 고백성사의 성서적 근거가 철저히 오류임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언급해야 할 점은 루터는 당시의 출판문화의 덕을 톡톡히 본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가 가톨릭교회의 오류를 지적하기 위해 라틴어로 95개조를 작성했는데, 이 문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독일어로 번역되어 삽시간에 전국에 배포되었고, 곧 이어 각국어로 번역되어 유럽 전역에까지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출판물의 힘을 직감한 루터는 그 후 인쇄기를 염두에 두고 글을 썼고 이것이 유럽의 종교개혁에 대단한 효과를 보았습니다.   이상 16세기 종교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두 요인을 검토해 보았습니다. 만일 유럽에 민족주의가 강하게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국왕이 종교개혁가들을 보호할 능력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은 쉽사리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당시 문서비평을 통해 그리스어 원본에 기초한 성서가 출판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인쇄활자의 발명으로 다량의 문서가 단기간에 배포될 수 없었다면 종교개혁의 전개양상은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 모두 하나님이 때를 맞추어주신 덕분입니다. 하나님이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도록 미리 정치적, 학문적 상황을 만들어놓으셨고, 그런 상황을 이용할 수 있는 인물들을 역사의 무대에 등장시키셨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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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사이야기5: 중세 스콜라신학 Publish on July 31,2010홍삼열
    이 글은 제가 한인연합감리교회 웹사이트(http://master.korean.umc.org/interior.asp?ptid=5&mid=5373)에 기고한 글입니다. --------------------------------------------------------------------------   스콜라신학(scholasticism)은 중세기에 유행했던 대표적인 신학방법론으로서, 9세기 샬레마뉴(Charlemagne, 742-814)의 문예부흥기에 본격적으로 체계를 갖추기 시작하여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 때 절정을 이루었고 그 후 14-15세기 때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이 유행하게 되면서 점차적으로 세력을 잃어버리게 된 신학학풍입니다. “스콜라”이란 단어 자체에서 우리가 이미 짐작할 수 있듯이, 스콜라신학은 학교(schola)를 중심으로 한 신학입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한 신학이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啓示)를 강조한다면, 학교를 중심으로 한 신학은 자연질서를 통한 보편적 이성(理性)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스콜라 신학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스콜라 신학은 학교를 배경으로 한 신학으로서 신앙과 이성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며 논리적 이성으로 신앙을 설명했던 신학입니다.   스콜라신학은 대개 다음의 세 단계로 구분되는데, (I) 첫 단계는 플라톤 철학에 근거한 실재론(實在論, realism)으로서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안셀름이 대표적인 예이고, (II) 둘째 단계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근거한 실재론으로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대표적인 예이고, (III) 셋째 단계는 실재론을 거부하면서 나온 유명론으로서 대표자는 오캄입니다. 스콜라신학의 세 단계를 설명하기 전에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우선 (1) 플라톤 철학, (2)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3) 유명론을 간단하게 설명해보겠습니다.   (1) 플라톤 철학: 플라톤은 보이지 않는 이데아(Idea)의 세계가 진짜고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계는 가짜 혹은 그림자라고 가르칩니다. 가령 우리 눈앞에 책상이 하나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눈으로 보는 그 책상은 그림자에 불과하고 진짜는 이데아의 세계에 있는 “책상”의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이것도 책상으로 인식하고 저것도 책상으로 인식하는 이유는 이미 우리 관념 속에 책상의 모형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플라톤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우리 마음 속에는 보편적인 개념들(universals)이 담겨진 이데아의 세계가 있는데, 우리는 그런 개념들 때문에 사물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플라톤은 보편적인 개념들이 실재한다고 가르치고, 그런 개념들이 이 세계가 아닌 하늘 어디엔가 이데아의 세계에 실재한다고 가르칩니다.   (2)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약간 다른 이론을 전개합니다. 보편적인 개념들이 실재한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그런 것들이 이데아의 세계에 있다는 것은 거부합니다. 즉 보편적인 개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사물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여러 종류의 책상을 공통적으로 책상으로 인식하는 이유는 어떤 보편적인 개념이 있기 때문이지만, 개별적인 책상이 없다면 보편적인 개념으로서의 책상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책상의 개념은 개별적인 책상이 있을 때에만 그리고 개별적인 책상 “안”에서만 논의의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정리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적인 개념들이 실재한다고 가르치고, 그런 개념들이 이데아의 세계가 아닌 개별적인 사물 안에 실재한다고 가르칩니다.   (3) 유명론: 오캄은 보편적인 개념이 실재한다는 이론을 거부하면서, 보편적 개념은 단지 이름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nominalism의 nomen은 이름을 의미하는 라틴어입니다.) 보편적인 개념들은 단지 사람들이 편의를 위해 만들어낸 허구(虛構)라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사람들이 여러 종류의 나무 제품을 보고 그것을 모두 책상으로 부르는 것은 편의상 그렇게 하는 것이지, 엄격하게 따지자면 이 책상과 저 책상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오캄은 보편적 개념이란 존재하지 않고 그것은 단지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이제 위에서 설명한 내용을 바탕으로 중세 스콜라신학의 세 단계를 살펴보겠습니다. (I) 안셀름(1033-1109)은 플라톤의 실재론을 배경으로 신학을 전개한 사람입니다. 플라톤이 그러하듯이 안셀름도 이데아의 세계에 보편적인 개념이 실재한다고 믿고 그것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보통 존재론적 증명(ontological argument)이라고 불리는 그의 이론은 개념의 세계에서부터 출발하는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누군가 "하나님"이란 용어를 사용한다면 그는 분명히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존재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더 이상 위대한 존재를 생각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그가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던 존재보다 더 위대한 존재가 나타나게 된다면, 그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닌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란 개념 자체에 최고의 존재라는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개념이 하나님이 현실세계에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에 어떤 해답을 줄 수 있습니까? 안셀름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에만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현실세계에도 존재하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이 사람의 생각에만 존재하고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분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이란 개념 자체가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는 최고의 존재”를 의미한다면, 그리고 사람의 생각에만 존재하는 하나님보다 사람의 생각에도 존재하고 현실세계에도 존재하는 그런 하나님이 더 위대하다면, 당연히 하나님은 현실세계에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안셀름은 하나님이란 보편적인 개념이 이데아의 세계에 실재하고 동시에 현실세계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합니다.   (II)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도미니칸 수도사로서 파리에서 오랫동안 교수생활을 한 학자입니다. 그는 철학과 신학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철학과 신학은 같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으로 절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닙니다. 즉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공동의 목표를 지향합니다. 차이점은 철학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을 다루지만 신학은 철학이 다루는 것들을 포함하여 이성의 한계를 넘는 것들, 즉 계시의 문제들도 다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학이 철학의 방법론을 이용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계시의 방법으로 명확한 가르침을 제공하지만, 하나님의 존재는 그런 방법말고도 이성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합니다. 안셀름이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의 세계에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였다면, 아퀴나스는 눈에 보이는 감각의 세계로부터 출발하여 그의 이론을 전개시킵니다.   아퀴나스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는 5가지 방법이 있는데, 첫째는 운동(motion)을 통한 증명입니다. 이 세상에는 움직이는 것이 많이 있는데 그것은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어떤 것 때문에 움직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움직임의 원인을 계속 찾아가다 보면 마지막에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것을 움직이는”(the unmoved mover) 최초의 동인(動因)이 나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둘째는 원인과 결과를 통한 증명입니다. 이 세상의 일들은 연속적인 원인과 결과의 사슬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사슬을 거슬러 올라가면 언젠가는 맨끝에 첫 번째 원인자(原因者) 하나님이 나옵니다. 셋째로 가변성(可變性)과 절대성(絶對性)을 통한 증명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이 일시적이고 가변적이라고 믿고 있는데, 그것을 믿는다는 것은 곧 어디엔가에 절대자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절대자를 상정하지 않고 어떻게 가변성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넷째로 완전의 단계를 통한 증명입니다. 이 세상에는 한 종류의 선(善)만 있는 것이 아니고 수많은 종류의 선들이 존재합니다. 그것을 순서대로 나열해서 점점 더 완전한 선으로 진행해나가면 마지막에 가장 완전한 선이 나오게 되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목적론(目的論)적 증명(teleological argument)입니다. 이 세상의 만물은 일정한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데, 그것이 스스로 그렇게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어떤 외부의 힘이 그것을 일정한 방향으로 이끄는 것인데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지금까지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을 살펴보았는데,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중요한 특징은 아퀴나스는 눈에 보이는 감각세계로부터 출발하여 보편적인 개념인 하나님을 증명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 아퀴나스는 관념의 세계를 중시하는 안셀름과 차이가 납니다.   (III) 오캄(1285-1349)은 유명론자(唯名論者)로서 안셀름과 아퀴나스의 실재론(實在論)을 부정합니다. 즉 보편적 개념이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름일 뿐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할 때, 오캄은 기독교 신학자로서 심각한 문제에 부딪힐 법합니다. 하나님도 일종의 보편적 개념인데,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일종의 보편적 원리(原理)인데, 그렇다면 하나님도 단지 이름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캄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은 이성을 이용하여 보편적 개념이 실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증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하나님이 실재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 이성으로 증명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문제이지 증명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캄은 하나님의 능력을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절대적(absolute) 능력을 가지고 계신데, 이 점에 있어서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절대적 능력은 그야말로 한계가 없는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여 행동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을 우리가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제한적(ordered) 능력을 가지고 계시는데, 이점에서만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자연 질서에 따라 운행하시며 합리적으로 행하시는 것들은 우리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이성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대부분은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신학체계를 성경을 통한 계시에 기초하지 않고 자연을 통한 이성에 기초하여 세우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이겠습니까? 오캄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기존의 신학자들이 이성으로 신학체계를 세우려고 시도하는 것을 비판하였고, 교리는 합리적이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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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사이야기3: 초대교회 이단들의 주장과 교회의 대응 Publish on July 26,2010홍삼열
    이 글은 제가 한인연합감리교회 웹사이트(http://master.korean.umc.org/interior.asp?ptid=5&mid=5159)에 기고한 글입니다.  -------------------------------------------------------------------이단(hairesis)은 기독교시대 이전부터 사용되던 용어인데 원래 “선택”을 의미하는 단어였답니다. 여러 가지 이론 중 한 가지를 선택한다는 의미였지요. 그러다가 기독교에서 본격적으로 이 단어가 “정통”(orthodoxy)의 반대 개념, 즉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이론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사도들이 활동하던 시기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벌써 각종 이단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그 이단들이 교회에 큰 해를 입혔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1) 영지주의(Gnosticism), 2) 마르시온주의(Marcionism), 3) 에비온주의(Ebionism), 4) 몬타누스주의(Montanism)입니다.   1) 영지(靈知)주의자들은 지식(gnosis)이 있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교회 안팎에서 크게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이 말하는 지식이란 이성을 통한 깨우침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비밀리에 받은 특별계시를 말하고, 그 내용은 어떻게 이 물질세계가 창조되었으며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는지에 관한 것들입니다. 영지주의 내에 여러 가지 다양한 이론들이 있지만, 공통적인 특징은 이렇습니다. 우선 이들은 이 세상의 창조를 “지혜”(Sophia)라는 열등한 신의 실수 또는 유산(流産)으로 설명합니다. 최고의 신은 물질과 상관없는 영적인 존재인데, 열등한 신인 지혜가 어느날 정욕에 사로잡혀 괴물을 출산하고 그 괴물이 이 물질 세계를 창조하였다는 겁니다. 이 물질 세계에 사람도 포함되어 있지만, 사람은 육체로만 이루어지지 않고 육체 속에 최고의 신이 몰래 집어넣은 “작은 빛”도 함께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가 이 “작은 빛”을 지니고 있는 것을 모른 채 마치 수면상태에서와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이 때 최고의 신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기 위해 그리스도를 보냅니다. 이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잠에서 깨우고 그들에게 구원에 필요한 신비한 지식을 전해주는데, 그 내용은 이 세상이 열등한 신인 지혜(구약의 하나님)의 소산물이라는 사실과 자기를 보낸 참 하나님(신약의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육체로부터 탈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영지주의자가 되어야 구원받는다는 뜻이지요. 예를 들어, 발렌티누스같은 사람은 인간을 세 종류로 구분하는데, 영적인 인간은 “충만의 세계”(pleroma)로 구원받아 올라가도록 이미 결정된 자들 곧 영지주의자들을 말하고, 혼적인 인간은 일반 기독교인들로서 영지주의자들을 통해 영적인 지식을 전달받으면 “충만의 세계” 보다 약간 못한 하늘나라로 구원받을 수 있는 자들이고, 육적인 인간은 아무리 해도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는 자들을 말합니다.   물론 교회에서는 이런 사상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겠죠. 왜냐하면 성경에 이런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들은 육체를 악한 것으로 보고 구원을 육체로부터 탈출하는 것으로 설명하는데, 그것은 기독교 신앙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육체는 진짜가 아닙니다. 어떻게 참 하나님이 보낸 그리스도가 악한 육체를 입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육체는 일종의 허깨비에 불과한 것이죠. 또 이들은 결혼생활을 악한 것으로 봅니다.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는 것은 물질세계를 창조한 악한 신에게 협조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지요. 또한 이들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구분하는데, 이것도 성경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주장하는 숙명론도, 즉 영적인 사람은 무조건 구원받고 육적인 사람은 무조건 구원받지 못한다는 주장도, 하나님은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2) 영지주의의 영향을 깊이 받았으면서도 영지주의에서 발견할 수 없는 독특한 문제를 만들어낸 사람은 마르시온이었습니다. 마르시온은 영지주의의 이원론(영과 육을 극단적으로 구분하여 영은 선이고 육은 악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을 그대로 따랐지만, 영지주의에서 주장하는 그리스도의 비밀계시 대신 성경을 통한 공개계시를 믿었습니다. 즉 영지주의자들에게서부터 비밀계시를 전수받아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공개적으로 사람들에게 주신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이 이단사상에 물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유대교적 이단사상이 성경 전체에 침투해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시온은 자기 맘대로 성경의 여러 책들을 선별하여 자체 성경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을 확정한 최초의 시도였고, 정통 교회에서는 이런 잘못된 작업을 금지시키기 위해 부랴부랴 성경을 확정했답니다.) 우선 구약은 열등한 신이 이스라엘에게 준 것이니까 모두 없애버리고, 복음서 중 구약의 요소가 가장 적은 누가복음만을 체택하고 (누가복음에서도 구약의 예언을 인용한 부분을 모두 삭제한 후에), 그리고 엄격한 율법 대신 사랑과 믿음을 강조한 바울의 글들을 체택하여 자체 성경을 만들었습니다.   3) 영지주의와 마르시온주의가 영적인 것에 치중하는 헬라적인 이단이라면 에비온주의는 육적인 것에 치중하는 유대교적인 이단입니다. 이미 사도행전에 헬라파와 유대파의 갈등이 기록되어 있지만, 에비온주의자들은 기독교인이 되려면 먼저 유대교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헬라파 기독교인들을 비판했습니다. 어쨋든 예수는 기독교의 창시자이기 이전에 유대교인이었고, 그분 스스로도 말씀하셨듯이 율법을 없애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들은 예수님이 원래부터 하나님이 아니고 단지 위대한 선지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동정녀 탄생을 믿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예수가 요셉의 아들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너무나 완벽하게 율법을 잘 지켜서 하나님이 그를 중간에 (세례를 받을 때) 메시야로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에비온주의자들은 예수를 율법의 완성자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가장 싫어한 사람은 믿음을 강조한 바울이었고, 이들이 애용했던 성경은 가장 유대적 요소가 많이 들어있는 마태복음이었습니다.   4) 2세기 말 소아시아를 거점으로 아프리카의 카르타고까지 번져간 과격한 성령운동/예언운동이 있었는데 그것이 몬타누스주의입니다. 몬타누스는 소아시아 프리지아 출신으로 어느 날 갑자기 성령이 자기를 통해 직접 말씀하신다고 하면서 이제부터 성령의 시대가 열렸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보통 과격 성령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재림에 심취하게 되고 예수님이 재림할 날짜를 계산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데, 몬타누스도 자기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이제 새 예루살렘이 내려 올테니 짐싸들고 프리기아의 페푸자라는 동네로 가자고 예언했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예언에 따라 그곳으로 이사했고 새 예루살렘을 준비하는 자세로 철저한 금욕주의를 실시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이에 환멸을 느꼈지만, 몬타누스의 열광적인 성령운동은 그곳에서 사라지지 않고 다른 곳으로 번져나갔습니다.   위에서 살펴본 여러 이단사상들에 대응하기 위해 교회는 여러 가지 방법들 중 대표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첫째로 교회는 사도적 전통 혹은 공개적 전통을 주장하면서 신앙의 다양성을 수용하였습니다. 진리는 어느 한 사도에게 비밀리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도 전체에게 공개적으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자기들에게만 전해진 비밀계시를 주장하고, 마르시온주의자들은 바울만을 고집하고, 에비온주의자들은 유대 전통만을 강조하고, 몬타누스주의자들은 성령의 직접 계시만을 믿지만, 정통교회는 진리는 그런 식으로 어느 한 사도에게 혹은 한 무리에게 비밀리에 전해진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통해, 성경을 통해 공개적으로 전해졌다고 선포했습니다. 둘째로 교회는 이단에 대응하기 위해 정경화 작업(canonization)을 시도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확정한 마르시온 덕분에 정통 교회는 정경화 작업을 서두르게 되었고 그 결과 구약과 4복음서와 바울서신과 공동서신을 모아서 정통교회의 성경을 만들었습니다. 셋째로 교회는 신경(symbol or creed)을 만들어서 이단에 대항하였습니다. 현재 사용하는 형태의 사도신경은 6세기경에 만들어졌지만, 그 중심 뼈대는 그보다 훨씬 전에 확정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4세기에 로마교회에서는 Roman Symbol로 알려진 신경을 사용하였는데, 두세 구절을 제외한 전체가 이미 2세기의 Irenaeus에게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creed라는 단어 대신 symbol이란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symbol은 원래 군대에서 사용하는 암호를 뜻하는 단어였습니다. 내편인지 적군인지 구별하기 위해 암호를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단인지 정통인지를 구분하기 위해 교인들에게 신경을 암송할 것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현재 우리 주변에 활동하는 이단들은 이미 초대교회 때부터 있던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모든 이단적 요소들은 이미 교회 안에 존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을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가 위에서 본 4가지 이단적 요소들이 그대로 재연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지주의자들같이 “알아야” 구원받는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은 마르시온주의자들같이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은 에비온주의자들같이 “똑바로 살아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몬타누스주의자들같이 “성령체험”을 하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해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합니다. 모두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믿고 있는 것만 옳고 다른 것은 틀리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단에 빠지게 됩니다. 여러 가지 신앙의 요소를 조화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한 가지에만 치중하려 한다면 그것은 이단으로 가는 지름길이 됩니다. 이단(異端)이 무엇입니까? 잘 나가다가 한쪽 끝으로 이상하게 빠지는 것이 이단이 아닙니까? 여러 신앙의 행태를 조화하지 못하고 한쪽 끝으로 빠지게 되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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