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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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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6
    믿음 좋은 사람은 인간적인 감정을 가지면/나타내면 안 되는 것인가요? Publish on September 04,2010홍삼열
    얼마 전에 어떤 권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현재 가족에게 닥친 어려움을 생각하면 마음에 걱정이 끊이지 않는데, 이것을 보면 자기가 믿음이 좋지 않은 것 같다는 것이다. 믿음 좋은 사람이면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기 때문에 절대 걱정 같은 것은 없어야 하는데 자기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읽어 보면 믿음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걱정 없는 삶, 근심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똑같이 어려움을 당하고 똑같이 근심하고 똑같이 걱정하는 것이다. 단 차이점은 믿음 좋은 사람은 그런 인생의 문제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큰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문제가 “문제”가 아닌 것이 되는 것이다. 즉 문제가 자신의 영혼을 짓누르는 상태로까지 악화되지는 않는 것이다. 마음속에 생기는 실망이나 부러움이나 의심 같은 감정들도 동일한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기대한 것에 못 미칠 때는 실망을 하고, 남들이 잘 되는 것을 보면 부럽고,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의심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런 인간적인 감정들은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인간적인 한계”이기 때문이다.성경에서 이런 인간의 기본 감정들이 가장 잘 표현된 곳이 시편이다. 시편을 읽어보면 온갖 원초적인 감정들이 잘 묘사되어 나온다.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개라고 부르며 그들이 멸망하기를 구하는 기도, 하나님이 왜 나를 버리셨냐고 통곡하는 기도, 죽는 것이 두려우니 빨리 구해달라는 기도 등등, 시편을 기록할 정도로 믿음이 좋은 사람들(다윗, 아삽, 솔로몬외 여럿)에게서 발견될 수 없을 것 같은 내용들이 많이 나온다.한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면 아삽이 시편 73편에서 묘사한 시기/부러움의 감정이다. 아삽이 신앙생활 하면서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그것은 왜 착하게 사는 사람은 고난을 당하는데 악인은 잘 되는가 하는 문제였다. 하나님은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셔야 마땅한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악인은 악행을 한 대가를 톡톡히 받아야 하고, 오래 살지 말아야 하고, 죽을 때는 고통스럽게 죽어야 하는데, 이런 기대와는 정반대로 그들은 사는 동안 별 큰 어려움 없이 살고, 오래 살고, 죽을 때도 비교적 건강한 몸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왜 하나님은 악인들에게 빨리 벌을 주시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악하게 사는 것이 인생을 잘 사는 것으로 생각하여 악인들을 부러워하고 그들의 방식을 따르게 하냐는 것이다.아삽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인데 이런 것을 생각할 때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아플 뿐만 아니라, 그런 식으로 악하게 살면서 잘 되는 사람들이 솔직히 너무 부러웠다. 자기도 악한 사람같이 잘 되고 건강하고 오래살기를 바랬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마음이 더 아팠고, 기도의 시를 통해 이 감정을 솔직하게 표출하였던 것이다.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악한 일을 하는 오만한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고 그를 부러워했기 때문입니다.” (73편 2-3절)우리가 악행하는 사람들이 부러운 마음이 들 때, 혹은 그에 비등한 마음의 의문이나 불만이나 고통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하나님께 솔직한 기도를 올리는 것이 정상이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다 쏟아놓는 것이 건강한 사람의 자세이다. 자기 마음이 괴롭고 마음에 불만이 가득차 있는데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는 안 그런 척 딴청을 피우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태도이다. 문제 해결에 절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음에 불만이 있고 부러움이 있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따지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도와달라고 간청도 해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그러면 우리가 그렇게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어놓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모른 척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우리와 함께 해주신다. 비록 당장에는 자초지종을 다 보여주시고 왜 그런지 이유를 설명해주실 수는 없어도,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헤아리시고 우리를 위로해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계속 의지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것이다.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시다. 그런 아버지께 못할 말이 없고 쏟아놓지 못할 문제가 없다. 우리는 무슨 문제든지 하나님께 솔직하게 내어놓고 그 문제를 놓고 씨름해야 한다. 그러면 그런 문제들이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해결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모든 것을 털어 놓으면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하늘의 평안으로 우리를 위로해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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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
    기도에 응답이 없을 때 Publish on August 28,2010홍삼열
    이 글은 와싱톤한인교회를 담임하시는 김영봉 목사님의 글([섬기는 사람들] 12:4; http://www.koreanumc.org/site/apps/nlnet/content3.aspx?c=kqLSIYOxGnF&b=5687987&ct=7532221)입니다. 중보기도에 대한 좋은 글이어서 여기에 다시 카피해서 올립니다.  ---------------------------   얼마 전, 교우들과 함께 오랫동안 간절히 기도해 온 분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떤 분은 혈액암으로 3년 넘게 투병을 하다가 떠나셨고, 뇌종양으로 투병하던 열 네 살 된 소년도 허망하게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이 일로 인해 적지 않은 교우들이 큰 충격과 혼란을 경험했습니다. 그 소년의 아버지가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매일같이 새벽 제단에 나와 눈물로 기도했던 것을 기억한다면, 그리고 많은 교우들이 그 소년을 위해 기도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그 영혼을 데려가신 하나님의 처사가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교우께서는 제게 직접 메일을 보내셨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면 어려움을 당한 교우들을 위한 중보 기도는 다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 질문의 요지였습니다.   교회 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같은 혼란과 의문을 직면하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중보기도는 교회의 중요한 책임 중 하나이며, 중보기도에 열심일수록 기대하지 않은 응답에 대해 실망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제가 정답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제 생각을 몇 가지 나누려 합니다.   첫째, 사실 저는 이런 일을 만날 때마다 “내가 그렇게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왜 응답해 주시지 않았을까?”라는 질문보다는 “혹시나 내 기도가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 내가 뭘 졸 달리 했더라면 그 교우가 회복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이 더 앞섭니다. 물론,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개입하여 불치의 병이 완치되는 일이 오늘날에 여전히 일어나지만, 그것은 다만 예외적인 일이며, 대부분의 경우에는 죽음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아무리 신유의 은사가 강력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기도하는 사람마다 치유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예외적으로 개입해주었으면 하는 경우가 있고, 그런 경우에 기도에 응답이 없으면 하나님께 실망하거나 분노하게 됩니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그럴 자격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도대체 우리가 기도를 했으면 얼마나 했다고, “하나님, 왜 제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습니까?”라고 투정할 수 있겠습니까?   둘째, 중보기도를 통해서 기적적인 치유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한 어떤 기도나 봉사 때문에 주신 대가가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어떤 이적이든, 하나님께서 원하셔서 일어나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을 강제하여 일어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결정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실 지는 하나님께서 결정할 일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저는 저 자신에 관한 문제나 교우에 관한 문제를 위한 기도에 응답을 받으면, “하나님, 제가 그렇게 열심히 기도했더니 이렇게 응답해 주셨군요!”라고 기도하기 보다는, “하나님, 제 기도가 이 같은 응답을 받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했습니다. 이건 제 기도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저 주신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셋째, 오래 도록 교회적으로 중보기도를 해 온 병자가 세상을 떠나면, 때로 “그렇다면 중보기도는 다 무슨 소용인가?”라는 질문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기도를 너무 좁게 보는 데서 생기는 질문입니다. 위에서 말씀 드렸지만,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움직이려는 몸부림이 아니라, 하나님께 바치는 사랑의 제물입니다. 포사이스(Forsyth)는 <영혼의 기도>(The Soul of Prayer, 복 있는 사람 간)에서 “중보기도는 내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님께 옮겨다 놓는 일이다”라고 정의한 적이 있습니다. 중풍병자를 들것에 실어 지붕을 뚫고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린 친구들처럼, 우리도 중보기도를 통해 내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님 앞에 옮겨다 놓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결정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분이 원하시면 치유해 주실 것이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흔드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기도의 용사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가 중보 기도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처분을 받아드릴 준비를 한 상태에서 사랑의 제물을 올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의 처분을 받아들일 수 있고, 기도에 응답이 있을 때라도 자기의 공로를 주장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넷째, 기도의 초점은 그 사람의 전인적인 구원에 맞추어져야 합니다. 저는 신유의 은사로 유명했던 박재봉 목사님의 이야기를 마음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그분은 부흥집회를 갈 때마다 자신을 통해 치유 받은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해 두었다고 합니다. 말년에 그 수를 헤아려 보니 수만 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후에 자신이 집회를 했던 교회들을 순방하면서 예전에 치유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알아보았습니다. 그 결과, 열에 일곱 여덟은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 박 목사님은 신유의 은사를 가져가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부흥회를 인도한 것은 영혼 구원을 위해서였는데, 신유의 은사 때문에 오히려 영혼 구원에 장애가 있었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보듯,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교우를 위해 기도할 때, 우리의 간구의 초점을 치유에 집중하는 동시에, 그 사람의 존재 전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설사, 우리가 그 사람의 병 치유만을 위해 기도했다 하더라도, 그 기도는 그 사람의 영혼까지도 살리는 사랑의 제물로 쓰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올리는 사랑의 기도는 절대로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구했던 병의 치유가 일어나지 않았다 해도, 그 기도는 어떤 방법으로든 그 사람을 위해 사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 우리의 기도는 그 사람의 영혼을 붙들어주는 큰 힘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가 드린 기도가 헛수고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우리의 기도의 초점을 그 사람의 영혼의 구원에 맞추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혼란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습니까? 의문이 조금 풀렸습니까? 그 문제를 마음에 품고 더 깊이 묵상하시고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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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
    교회가 갈라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인가? Publish on August 28,2010홍삼열
    이 글은 제가 [섬기는 사람들] 11:6 (2008) (http://www.koreanumc.org/site/apps/nlnet/content3.aspx?c=kqLSIYOxGnF&b=5687987&ct=8059175)에 기고한 내용입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갈라지는 진통을 경험하고 대단히 가슴아파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오랫동안 한 교회에서 서로 성도의 교제를 나누며 함께 하나님의 일을 했던 사람들과 안 좋게 헤어지게 될 때 그 마음이 어떻겠는가? 또 그런 사람들이 떠나는 것을 보는 다른 성도들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한 교인이 오랫동안 섬기던 교회를 떠난다면, 그는 이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했고 더 이상 가망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기에 떠나는 것이다. 물론 개중에 이런 불행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이 있다. 자기를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들을 밀어냄으로써 자기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사람도 있고, 더 이상 기존교회에서는 자신이 충분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을 모아 나가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교회에 남아있는 사람이건 교회를 떠나는 사람이건--가슴에 깊은 상처를 받고 그 때문에 괴로워한다.   기존 교회에서 주도권을 쥔 사람들은 나가려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교회를 가르는 죄를 범하는 죄인이라고 비난을 퍼붓는다. 그들의 집단행동은 그리스도의 몸을 갈라서 다시 한 번 그리스도에게 깊은 상처를 입히는 죄라고 공격한다. 그러나 나가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이전에 이미 교회는 갈라져 있었고 그런 비극을 초래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니라 자신들을 밀어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반격을 가한다. 그리고 이런 처참한 상황을 지속시키는 것보다는 이 시점에서 갈라서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은 선택이 되지 않겠냐는 절충안을 제시한다. 마지막 상황에서 이 절충안이 받아들여져서 그래도 모양있게 갈라서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극한 대립의 상황이 급격한 분열로 끝나게 된다. 그리고 교회가 갈라진 후 몇몇 사람들은 비록 분열 때문에 사람들이 큰 아픔을 겪었지만 그래도 교회의 분열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의견을 제시한다. 이것이 기독교의 확장을 위한 하나님의 비밀스런 뜻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일부 목회자들을 포함하여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이런 의견에 동조를 한다.   교회가 갈라질 때는 많은 아픔이 있지만, 결국 그것을 통해 많은 교회들이 생기고 많은 신자들이 생기게 되기 때문에 교회가 갈라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봐야 할까? 이는 아주 위험한 발상이라고 본다. 결과가 좋으면 좋지 못한 방법이 사용되어도 괜찮다는 논리인데, 이는 기독교인으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논리이다. 왜냐하면 로마서 3장 8절에 나오는 대로, 선을 위해서 악을 행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룟 유다의 예를 들어보자. 만일 우리가 그런 결과론적 논리를 받아들인다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해서 예수님을 돌아가시게 한 것은 잘 한 일이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셔야 세상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는데 큰 역할을 한 유다는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시행한 일등공신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이런 논리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유다가 한 일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람이 잘못한 것까지도 이용하셔서 선한 목적을 이루신 것일 뿐이다. 따라서 마지막에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해서 나쁜 방법을 사용한 것이 자동적으로 선한 방법으로 변하지는 않는다. 잘못된 방법을 사용한 것은 영원히 잘못된 것으로 남아있는 것이고, 하나님이 그것을 이용하여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신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은혜 덕분인 것이다.   어느 한 교회가 심한 진통을 겪고 급기야 둘로 갈라졌을 때, 이것은 절대 하나님의 뜻일 수 없다. 둘로 갈라진 것이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선의의 목표를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만, 그렇지 못하고 서로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고 싸우다가 다른 해결책을 찾을 수 없어 갈라졌다면, 이는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행위로서 양측이 철저히 회개해야 할 사항이다. 교회를 떠난 그룹이나 남아있는 그룹이나 서로 사랑하지 못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교회의 분열을 하나님의 뜻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서로 사랑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는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우리가 앞으로 또 다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사람의 마음을 찢는 일을 하지 않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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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3
    교회는 재산을 가지면 부패하게 되는가? Publish on August 28,2010홍삼열
    이 글은 제가 [섬기는 사람들] 8:5 (2005) (http://www.koreanumc.org/site/apps/nlnet/content3.aspx?c=kqLSIYOxGnF&b=5687987&ct=8061295)에 기고한 글입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오직 저에게 필요한 양식만을 주십시오.” 잠언 30장 8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교단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개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교회/교단도 돈이 너무 없거나 너무 많은 경우 종종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교회가 돈이 없으면 양육과 선교를 할 수 없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돈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돈이 너무 많으면 역시 부패하게 되는 것도 우리가 역사에서 반복하여 보아오는 사실입니다. 돈은 필요할 때는 약이 되지만 너무 많으면 해가 되는 것이죠.   돈이 너무 많아 해가 되는 경우를 교회역사에서 하나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교황청이 부와 권력을 한창 누리던 1300년경의 일입니다. 교황 보니페이스(Boniface) 8세는 1300년을 희년으로 선포하면서 사람들에게 “영원한 도시”인 로마를 방문하여 성베드로 성당과 성바울 성당에서 예배드리라고 설교하였습니다. 1년 안에 그곳을 방문하여 예배드리는 사람은 모든 죄를 용서받는다는 공개적인 약속과 함께 말이죠. 그러자 예상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로마로 몰려들었고 교황청은 막대한 금액을 헌금으로 거두어들이게 되었습니다. 어느 한 역사가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 성바울 성당이 걷은 헌금만 해도 엄청나서 성직자 두 명이 매일 밤낮으로 돈을 자루에 담아 넣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합니다. 물론 공식적으로 이 돈은 교황청 금고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이 돈이 교황 개인재산이 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겠지요. 이정도의 엄청난 재산을 손에 넣은 보니페이스는 상상을 초월하는 사치행각을 벌였습니다. 그는 무슨 죄든지 용서받는다는 약속을 믿고 로마로 몰려드는 수많은 순례객들 앞에 여러 번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때 그는 화려한 옷을 입고 48개의 루비, 72개의 사파이어, 45개의 에메랄드, 66개의 진주가 박힌 관을 머리에 쓰고 “나는 군주다. 나는 황제다”고 외치곤 했답니다.   그러나 보니페이스는 이 일이 있고 나서 3년도 채 못 되어 교황이 당할 수 있는 가장 심한 모욕을 당하고 죽게 됩니다. 사치에 눈이 멀어 세상 돌아가는 정세를 읽지 못했던 것이죠. 누가 감히 교황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겠는가 하는 자만심에 빠져서 자기가 처한 위험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것입니다. 당시 보니페이스는 로마의 뜨거운 햇볕을 피해 고향인 아나그니(Anagni)에 있는 별장에 가서 피서를 즐기고 있었는데, 그곳에 프랑스 군대가 갑자기 들이닥쳐서 교황을 며칠동안 방에 가두고 모욕을 주었던 것입니다. 다행히 며칠 후 그곳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고 교황을 구출해내었지만 보니페이스는 모멸감을 견디지 못해 곧 죽고 맙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갑작스런 죽음을 당한 보니페이스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여우같이 비밀리에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가서, 사자같이 군림하다가, 개같이 죽었다.”   현재 우리 교회들의 모습을 생각해 볼 때, 혹시 보니페이스와 같이 갑작스런 멸망을 눈앞에 두고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현재의 교회도 돈에 눈이 멀어서 “개같이 죽을” 위험에 처해있는데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계속 “사자같이 군림”하려고만 드는 것은 아닌지 불안한 생각을 금치 못합니다.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면 갑작스런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는데, 교회가, 특히 성직자들이, 일반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면 일순간에 파멸을 맞이하게 되는데 말입니다.   어느 교회/교단이든지 처음 시작할 때는 전도와 봉사의 사명에 불타서 순수하게 시작합니다. 목회자의 헌신과 교인들의 희생어린 헌금으로 건물을 사고 지속적인 선교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그리고 불어나는 조직과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위계구조를 만들게 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서부터 교회는 선교와 교인들의 영적 성숙보다는 자체 체제유지를 위해 더 많은 신경을 쓰게 되고 고위성직자들은 교회의 사명을 망각한 채 부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비성서적인 수단을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교회에 환멸을 느껴서 교회를 떠나게 되고 교회는 그 때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는 것이죠. 이런 시나리오를 잘 아는 사람들은 교회의 개혁을 열심히 부르짖습니다. 교회가 회개하지 못하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세상보다 추악한 모습을 보이면서 망해가기 때문이지요.   가톨릭교회의 경우 수많은 부조리와 악행이 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세력을 유지해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필요할 때마다 개혁가들이 나타나서 개혁운동을 일으켰고 그것이 어느 정도 효과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직자 독신제도도 그런 개혁운동의 일환으로 시행되었습니다. 11/12세기에 힐데브란트(Hildebrand)를 중심으로 한 수도사들이 교황청에 개혁의 바람을 일으켰는데, 이들은 교회가 재산이 많아지고 규모가 커지면서 점점 교회 본연의 모습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고, 교황청에 진출하여 교회 전체 개혁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들이 시도한 개혁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이 성직자 독신제도인데, 그들은 이것을 교회법으로 확정할 경우 많은 교리적, 윤리적 부작용을 낳을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강행했습니다. 결혼을 통해 자연스레 형성되는 세속적 연결고리를 끊는 것이 교회의 건강에 꼭 필요하다는 결론에 다다랐기 때문이지요. 사실 아무리 거룩한 사람이라도 결혼을 통해 생겨나는 세속적 연결고리를 이용하여 자신의 부와 권력을 유지하고 더 나아가 자식과 친척에게 그것을 세습하고픈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당시 교황과 그 밑의 고위 성직자들은 자기 자식이나 친척에게 부당하게 요직을 물려주는 일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소명대로 능력대로 직임을 수여하는 것이 아니라, 직임을 재산과 권력의 유지 수단으로 이용했던 것이죠. 가톨릭 개혁가들은 이런 행태가 교회의 건강에 치명적인 해가 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많은 반대를 무릅쓰면서도 독신제도를 교회의 법으로 정한 것입니다.   “교회는 재산을 가지면 부패하게 되는가?” 반드시 그렇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재산을 선하게 이용하여 선교와 봉사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지나치게 재산을 많이 모으지 못하게 하는 제도가 확립되지 않는 한, 또는 재산을 많이 가져도 그것이 집안 내에서 혹은 계파 내에서 세습되지 않게 하는 제도가 확립되지 않는 한, 교회는 부패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제도는 자동적으로 생겨나지 않습니다. 순수한 열정을 지닌 개혁가들의 희생어린 노력과 투쟁이 있어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이 이 시대가 요청하는 그런 개혁가가 아닐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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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살하면 지옥에 가는가? Publish on August 22,2010홍삼열
    이 글은 제가 [섬기는 사람들] 11:3 (2008)에 기고한 글입니다. --------------------------------------------------------------------------------    요즘 자살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학교성적이나 폭력 때문에 자살하는 학생들,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자살하는 젊은이들, 심지어 기독교인으로 알려진 연예인들 중에 우울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 그들은 지옥에 갈까? 아니면 사랑 많으신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시어 그들에게 천국의 안식을 주실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살은 분명히 지옥에 이르는 심각한 죄 중에 하나다.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할 생각으로 이 글을 읽어서는 안 된다. 대신 그리스도를 내주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진정 살아야할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반면 우리는 자살하는 사람을 성경이 허용하는 수준 이상으로 지나치게 죄악시함으로써 그를 두 번 죽이는 과오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남겨진 유족이나 친구에게 이중의 고통을 안겨주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사실 자살하는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심한 우울증이나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다. 정신적인 병도 육체적인 병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병 때문에 자살한 사람을 지옥에 갔다고 판단하는 것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선을 넘는 것이다. 따라서 자살한 사람에 대해 함부로 지옥 갔다고 말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중세시대에 자살한 사람은 장례식의 혜택을 누릴 수 없었다. 스스로 지옥행을 선택한 사람에게 천국의 소망을 의미하는 장례식이 걸맞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면 지옥에 간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성경 어디에도 자살한 사람은 지옥에 간다는 말이 없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자살하면 지옥 간다고 믿고 있는 것일까?   흔히 이야기되어지는 이유들 중 대표적으로 다음의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성서적 신앙이 있다. 이것에 근거하여 유대 전통에서는 피를 먹는 것을 절대 금하고 있다(창세기 9:4; 레위기 7:26-27). 모든 생명의 소유자가 하나님이시라면 사람이 생명에 대해 가지는 권리는 사용할 권리뿐이고, 따라서 사람이 생명의 소유권자인 하나님의 허락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서 절대 용서받지 못할 죄라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자살을 지옥 가는 죄로 정죄하는 이유는 자살한 사람은 심각한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못하고 죽는다는 사실이다. 회개하고 싶어도 회개할 시간이 없어서 죄인으로 죽는 고로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런 이유들 때문에 자살한 사람은 지옥에 가야 마땅할까? 그렇지 않다. 만일 자살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거부하기 때문에 지옥 가는 것이라면 그런 비난은 자살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자살 말고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는 다른 죄들이 얼마나 많은가? 또 회개하지 못한 채 죽기 때문에 지옥 간다는 논리도 잘 생각해보면 이치에 맞지 않는다. 예를 들어, 농약을 먹었다고 사람이 그 순간 바로 죽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얼마의 시간이 지날 텐데 그 동안 그 사람이 회개했는지 안 했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또 깨끗한 상태로 죽어야--아니면 적어도 자살 같은 심각한 죄의 문제는 해결해 놓고 죽어야--천국 간다는 논리는 절대 성서적이지 못하다. 우리가 심각한 죄를 짓고도 그것을 모른 채 죽는 경우가 있을 텐데, 그런 경우는 어떻게 되는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자신은 선한 상태로 죽기 때문에 천국가야 하고 자살한 사람은 악한 상태로 죽기 때문에 지옥가야 한다는 논리는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선한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잘못된 신학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살한 사람을 두고 그가 자살했기 때문에 무조건 지옥에 갔다고 단정 짓는 대신에, 그런 판단은 겸손히 하나님께 맡기면서 유족과 함께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간구하는 자세를 지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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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개는 한번으로 족한가? Publish on August 22,2010홍삼열
    이 글은 제가 [섬기는 사람들] 9:6 (2006) (http://master.korean.umc.org/uploads/documents/korean_umis_2006%20NovDec%2011.pdf)에 기고한 글입니다.-------------------------------------------------------------------------------- “선생님은 죄인입니까, 아니면 의인입니까?” 혹시 이런 질문을 받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받을 때 우리는 대부분 “이 세상에 의인이 어디 있습니까? 물론 저는 죄인이지요” 라고 대답합니다. 이때 상대방은 “그럼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으니까 선생님은 지옥으로 가겠군요” 라고 몰아붙입니다. 이런 대화는 구원파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에게 접근하여 그들을 난처하게 만드는 상투적인 시나리오 중 하나입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철저히 교회에게 속아서 살아온 것이고, 자기들이 제시하는 진리를 깨달아야 구원의 확신을 얻고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어떤 신학적 근거에 기초하여 구원파 사람들이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만들어낸 독특한 회개이론에 근거해서입니다. 구원파에서는 일단 죄사함을 받으면 의인이 되었으므로 다시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일반 기독교인들의 경우와 같이 죄사함을 받았다고 하면서 계속 죄인이라고 고백하며 회개하는 것은 그들이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회개의 이론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오류임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파는 성경이 한 가지 종류의 회개만을 가르치고 있다고 믿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두 가지 종류의 회개, 즉 구원의 확신을 주는 일순간의 회개와 성화(聖化)를 위한 반복적인 회개를 함께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죠. 다윗은 밧세바 사건 때 구원파가 말하는 그런 종류의 회개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다윗의 회개가 끝났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나중에도 계속 회개를 했습니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한 후 하나님께 벌을 받았을 때 회개한 것이 좋은 예가 됩니다.(사무엘하 24:10). 바울은 어떻습니까? 디모데전서 1:15절에 보면 현재형으로 나는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이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회개했는데 여전히 죄인이라뇨? 구원파의 논리에 따르면 아직도 스스로 회개할 만한 죄가 있다고 생각한 바울은 지옥에 가야 마땅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는 구절은 어떻게 이해해야합니까? 구원파에서는 이 구절 때문에 주기도문을 아예 외우지 않고 있는데, 이는 자기들 논리에 맞지 않는 구절은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이라도 성경에서 빼버리는 나쁜 습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 13장 10절에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우리는 예수님이 이곳에서 두 가지 종류의 회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온몸을 목욕한다는 것은 구원을 위해 회개한다는 뜻이고, 발을 씻는다는 것은 구원받은 이후에 매일 매일 지은 죄들을 고백하며 회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한번 회개하는 것이고 회개한 다음에는 의인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불러서도 안 되고 다시 회개해서도 안 된다는 논리는 철저히 비성서적입니다. 루터의 개념을 빌자면 우리는 여전히 "의인인 동시에 죄인" 혹은 “용서받은 죄인”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함으로 의롭다고 인정받게 될 때 그 순간 우리가 완전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완전한 의인이 될 수 있는 중요한 고비를 넘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위한 회개를 한 후 그리스도의 완전함을 향해 성화의 길을 가게 되는데, 이때 계속적인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누군가 “당신은 모든 죄가 용서받았습니까? 그래서 더 이상 회개하지 않습니까?” 라는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나는 예수 안에서 다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나 계속 회개합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날마다 거룩해지기 위해 계속 회개합니다” 라고 대답하는 것이 정답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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