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교단설교1: 가톨릭교회
Publish on February 13,2011홍삼열
"가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 (요한복음 6:53-58)오늘부터 7번에 걸쳐 기독교의 여러 교단들을 주제로 설교를 하게 된다. 제가 이 설교 시리즈를 구상하게 된 이유는, 많은 분들이 기독교에 왜 그렇게 많은 교단들이 있는지 궁금해 하시기 때문이다. 대개 그런 의문을 가지고 계신 분들은, 똑같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왜 그렇게 서로 분리되어 있는지, 그리고 교단들 간의 차이점들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하신다. 그래서 저는 이 설교 시리즈를 통해, 그런 궁금증을 풀어드리고자 한다.그런데 이 시리즈를 시작함에 있어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제가 이 교단 설교를 하는 목표가, 다른 교단들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밝히거나, 아니면 감리교가 얼마나 뛰어난지를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저의 목표는 각 교단들을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함으로써, 우리가 그들에게서 배울 점이 있으면 겸손하게 배우자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배움의 자세를 가질 때, 우리는 각 교단들의 장점들을 제대로 발견할 수 있고, 그럴 때 우리 자신이 그들에게서 잘 배움으로 보다 나은 교인, 보다 나은 교회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여러 기독교 교단들을 접하는 것은 마치 큰 가족행사에서 낯선 친척들을 만나는 것과 비교할 수 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친척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참석할 때면, 그때마다 내가 모르는 분들을 꼭 만나게 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런 경우 저는 아버지께 물어본다. “아버지, 저기 계신 분이 누군지 모르겠는데, 그분이 저희와 어떻게 연결됩니까?” 그러면 집안 가계에 대해 잘 아시는 아버지가, 그분이 어떻게 저의 할아버지와 연결되고, 과거에 어디에 사셨고, 아버지와는 어떤 관계성을 가지셨는지 등등 상세하게 설명해주신다. 이런 설명을 듣고 나면, 저는 그 사람과 내가 진짜 혈연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것을 기초로 그 분과의 관계모색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장로교나 침례교나 가톨릭에 다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과연 우리가 그들 교단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우리가 과거의 역사를 배우고 알게 될 때, 그런 의문점들이 많이 풀리게 되는데, 바라기는, 우리가 이렇게 서로와의 관계를 확인함으로써, 서로에게서 배울 점들은 겸손히 배우고, 상대방의 실수는 반복하지 않는 지혜를 배우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해 생각해보겠다. 가톨릭교회는 현재 지구상에 있는 가장 큰 기독교 교단이다. 교인수는 약 11억 명이 되는데, 이 숫자는 세계 인구의 약 1/7, 그리고 전체 기독교인의 과반수가 되는 대단한 숫자이다. 미국만 따지면, 가톨릭교회는 6,700만 이상의 교인을 가지고 있는데,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교단인 남침례교와 비교할 때 (남침례교의 교인수는 1,600만명), 가톨릭교회가 4배 이상의 교인수를 가지고 있다.이제 개신교회와 비교하여 볼 때 가톨릭교회의 특징을 들라 하면,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로, 가톨릭교회는 교회의 표식을 4가지로 설명한다. 즉 교회를 하나(one)이고, 거룩(holy)하고, 사도로부터 전해지고(apostolic), 보편성이 있는(catholic) 단체로 설명한다. (개신교회도 이 교회의 4가지 표식을 믿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에서는 다르게 해석한다.) 둘째로, 개신교에서는 2개의 성사만을 인정하지만 가톨릭은 7개의 성사를 인정한다.먼저 교회의 4가지 표식을 생각해보자. 하나님의 교회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들을 설명하라고 하면, 가톨릭교회는 보통 니케아신경에 나오는 네 가지 교회의 표식을 이야기한다. 1) 첫째로, 그들은 교회는 하나라고 믿는다. 왜 교회가 하나인가? 그 이유는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실 때 하나만 세우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만을 말하는 것이고, 이 사실은, 전 세계 교인들이 교회의 위계질서를 받아들이고, 교황이 지시하는 한 종류의 예배 형식만을 따르는 것으로 증명된다는 것이다. 2) 둘째, 교회는 거룩하다. 교회가 거룩하다는 의미는, 교회를 구성하는 교인들이 모두 거룩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가 거룩하시고, 그분이 교인들에게 거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는 의미에서, 교회가 거룩하다고 하는 것이다. 3) 셋째, 교회는 사도로부터 전해진 교회이다. 현재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맨 처음에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12 사도들에게 그 교회를 맡기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12사도의 머리는 베드로이니까, 베드로가 초대 교황이 되어서 교회를 치리하였고, 우리는 그 뒤를 잇는 교황들의 치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4) 교회는 catholic 즉 보편적이다. 여기서 catholic이란 말은 그리스어로 보편적이란 뜻으로, 교회는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곳이라는 뜻이다. 인종이나 나이나 성별이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교회에 나와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의 특징이라는 것이다.교회의 이 4가지 표식은 이미 니케아신경에 나오는 것으로서, 모든 기독교 교단들이 이것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우리 개신교에서는 이것을 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예를 들어, “교회는 하나”라고 할 때, 가톨릭에서는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만이 진짜 교회이고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라고 주장하지만, 개신 교단들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뭉친다는 의미에서 교회가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라는 것은 교황제도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교회는 보편적" (catholic)이라고 할 때, 가톨릭교회에서는 이것을 대문자 C로 이해해서 그것이 로마 가톨릭교회를 의미한다고 말하지만, 개신교에서는 그리스어의 원래 뜻인 “보편적”(kata holos)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서,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보편적인 교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믿는다.그래서 이 교회의 4가지 표식에 대해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점은, 가톨릭교회에서는 이 표식들을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가시적인 제도의 측면에서 해석하지만, 우리 개신교에서는 교회의 머리 되시는 예수님과 그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측면에서 해석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또 하나 가톨릭교회가 우리 개신교회와 다른 점은,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이 세례와 성찬식만을 직접 제정하셨다고 믿고 그 두 가지만을 성사(sacrament), 즉 "거룩한 은총의 수단"으로 인정하지만, 가톨릭교회에서는 그것에 5가지를 더하여 7개의 성사를 가르치고 있다. 1) 우선 세례는 물이라는 상징물을 통하여 세례 전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는 예식이다. 2) 견진성사는 세례를 받은 후에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서, 스스로 예수의 제자가 되기로 결단하는 예식이다. 3) 성찬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예식인데, 개신교와 가톨릭이 이것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가톨릭에서는 성찬식 때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빵과 포도주속에 들어오신다고 믿지만, 개신교에서는 예수님이 "영적으로" 임하시는 것으로 믿는다. 4) 네 번째는 고해성사인데, 세례 이후에 지은 죄를 이 방법을 통해 용서받는다는 것이다. 5) 그 다음 병자성사는 병든 사람이나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기름을 발라 치유의 은총과 위로를 주는 예식이고, 6) 신품성사는 신부를 세우는 예식이고, 7) 혼배성사는 남자와 여자를 부부가 되게 하는 예식이다.이제 우리 개신교회가 가톨릭교회에서 배울 점들을 살펴보자. 저는 오늘 세 가지를 말씀드리겠는데, 첫째가 가톨릭교회는 의식을 중요시한다는 점이다. 여러분들이 가톨릭교회에 들어가서 예배에 참여하면, 우리 개신교 예배와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되는데, 가톨릭교회에서는 우리가 개신교 예배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과는 약간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경험한다. 즉 거룩한 의식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한다.우리 개신교인들은 가톨릭교회의 의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말씀이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 모든 예배 순서는 그 선포되는 말씀을 잘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짜여 져야 하며, 그런 의미에서 그 목적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예식들은 모두 없애버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신교 예배에서는, 특히 침례교의 예배에서는, 말씀선포 이외의 것들은 최소한도로만 허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침례교의 예배에서는 가운을 입는 것, 향을 피우는 것, 손으로 십자가를 긋는 것, 성가대의 입장 또는 퇴장 이런 것들이 없고, 성찬식도 아주 간단하게 거행한다. 어떤 경우에는 빵 대신 아이들이 먹는 물고기모양의 과자를 사용하기까지 한다.개신교에서 이렇게 의식대신 말씀 위주로 예배를 진행하는 것은 16세기 종교개혁의 결과이다. 루터를 비롯한 당시 종교개혁가들은 가톨릭교회에서 말씀을 무시한 채 의식만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옳지 않다고 주장하며, 말씀 중심의 예배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쳤다. 당시 가톨릭교회의 예배는 설교가 없이 성찬식 위주로 예배가 진행되었다. 그것도 사람들이 알아듣는 언어가 아닌 라틴어로 예배가 진행되었다. 성경봉독이나 기도도 모두 라틴어로 이루어지니, 모든 것이 신부 혼자서 다 하는 것이었다. 가끔 교인들 중에 라틴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있는 경우, 그 사람은 라틴어 성경을 읽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교회의 공식 가르침에 위배되게 성경을 잘못 읽을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에서는 성경말씀은 신부가 읽어주는 것을 통해서만, 신부가 해석해주는 것만 받아들이도록 강요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가들은 성경은 성직자의 것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의 것이라고 믿었다. 결국 성경말씀을 이해하고 실천해야 할 사람들은 성직자가 아니라 일반 신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는 의식위주가 아닌 말씀위주의 예배가 되어야 하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개혁가들은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였고 일반 사람들에게 성경을 읽도록 장려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아울러, 성경에 기초하지 않고 신앙생활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예식들을 모두 없애버렸다.현대의 개신교에서는 이런 16세기의 전통을 이어받아 별로 의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보수 장로교 전통에서는 교회에서의 예술 활동을 모두 금지시켰다. 그래서 진짜 원조 장로교회에서는 그림이나 조각이나 예복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것을 성경대로 한다는 이유로, 교회에서 오르간을 모두 없애버리고, 음악의 형식을 최대한 간단하게 사용하였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올갠을 사용했다는 예가 없고, 4부로 성가를 불렀다는 내용이 없기 때문에, 예배에 그런 것들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으로 알고 있듯이, 의식이라는 것은 삶의 리듬이 되고, 우리가 안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기본 틀이 된다. 좋은 예가, 교회력이다. 교회력은 12월 대림절로부터 시작해서,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오순절 등으로 연결되는데, 우리는 그런 순서를 따라, 시기에 적절한 예식들을 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도구를 사용하여 우리 자신과 자녀들의 신앙이 안정적으로 자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우리 연합감리교회에서는 이런 의식의 중요성을 재발견하여, 말씀선포와 더불어, 의식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들을 다양하게 제공해왔다. 그래서 교회력에 따라 각 계절에 다른 색깔을 사용한다. 그래서 성탄절이나 축제의 날에는 하얀색을 사용하고, 사순절에는 자주색을 사용하고, 오순절에는 붉은 색을 사용한다. 또 대부분의 연합감리교회는 성찬식을 이전보다 더 자주 시행하는데, 여러분이 기억하시겠지만 한국에 있을 때는 일 년에 서너 번만 성찬식을 했다. 그런 이유로 저희 교회에서도 그런 패턴을 따르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대부분의 연합감리교회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성찬식을 하는데,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의식 자체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게 사용하면 악한 것이고, 말씀에 맞게 사용하면, 우리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의식에 대해 너무 색안경을 끼고 볼 필요가 없다. 교회에서 어떤 특별한 의식을 거행하면 그것이 자동적으로 가톨릭적이라고 규정하여 거부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성경의 원칙에 맞는지, 현재 우리 교회의 상황에 맞는지, 우리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지 이런 것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사용을 결정해야 할 것이다.이제 가톨릭교회에서 배울 두 번째 것을 생각해보자. 가톨릭교회는 성만찬을 대단히 귀중히 여긴다. 왜냐하면 성만찬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성육신의 사건이 다시 한 번 재연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성육신이란 것이 무엇인가? 성육신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형태를 입고 우리에게 다가오신 사건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주셔야 하는데, 우리 수준이 너무 낮아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기에, 눈으로 보이는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 오신 것이다. 그런데 이 성육신 사건은 예수님의 육체를 통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두 가지 다른 통로를 통해서도 일어난다. 그것이 곧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 즉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나타나고, 또한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를 통해서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의 형태를 빌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기도 하고,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입으로 느낄 수 있는 형태로, 즉 빵과 포도주의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기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는 방법은 세 가지가 되는데, 첫째가 예수님의 육체를 통해서, 둘째가 성경말씀을 통해서, 셋째가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는 예수님의 육체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성육신을 경험하는 방법은 말씀 듣는 것과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교회에서는 성경말씀에 못지않게 성만찬을 귀중히 여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귀중히 여기는 선을 넘어서, 말씀보다 성만찬을 차이 나게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기지만, 가톨릭교회는 그것이 실제로 예수님의 몸과 피가 되었다고 믿는다. 신부가 성별의 기도를 드리는 순간, 빵과 포도주의 겉모습은 변하지 않지만, 그 내용이 진짜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신자들이 그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으면, 영적인 축복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축복을 받아서, 그것을 먹는 사람에게 "불멸의 약이요 죽음의 방부제"가 되어, 영생을 얻게 한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 개신교회에서는 이런 물질적인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성만찬을 통해 예수님이 우리에게 영적으로 임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성찬을 먹지 않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이 성만찬을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주요 수단으로 여긴다는 점은 본받아야 한다. 비록 그들이 말씀보다 지나치게 성만찬을 중요시여기는 오류를 범하고 있지만, 우리는 반대로 성만찬을 지나치게 무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만찬은 예수님이 직접 제정하신 은총의 수단이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잡혀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제자들을 모아 놓고 성찬식을 행하시면서, 이것을 되도록 자주 시행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성경말씀에만 치중하느라 상대적으로 성찬식을 경시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예수님이 성만찬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셨나?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내 피다.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3) 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우리가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찬식을 통해서도 똑같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성찬식에 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가톨릭교회에서 배워야 하는 것이다.가톨릭교회의 세 번째 장점은, 고해성사를 통해 개인의 도덕적 책임을 묻는 것이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어떤 신자가 죄를 지었을 때, 그냥 속으로 잘못을 깨닫거나, 하나님께 잘못했다고 회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반드시 신부에게 가서 죄를 고백하게 함으로써, 개인의 도덕적 책임을 묻도록 되어 있다.가톨릭에서는 이 과정으로 네 단계로 설명하는데, 첫째가 Contrition이다. 통회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 많은 개신교인들이 이것을 회개의 전부라고 착각한다.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서 진짜 통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눈물로써 회개하면, 모든 죄가 용서받고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그것이 잘못이라고 가르치면서 다음 단계를 제시한다. 그것이 Confession, 죄의 고백이다.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을 사람 앞에서, 특히 믿을 수 있는 성직자에게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다. 초대교회 때는 이런 죄의 고백을 온 교회 앞에서 시행하였다. 죄를 지은 사람이 이런 식으로 회개할 때, 얼마나 강력한 효과를 내었을지는 쉽게 상상하고도 남는다. 이렇게 회개한 사람은 절대 같은 죄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그야말로 피나는 노력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입으로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도 회개를 다 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가톨릭교회에서는 다음 단계를 제시하는데, 그것이 Satisfaction의 단계이다. 죄의 대가를 치르는 단계이다. 도적질 했으면 도적질 한 것을 되갚아주어야 하고, 잘못을 저질렀으면 그에 상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개신교인들이 잘 하지 못하는 부분이 이것이다. 우리는 죄의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해결하려고 하지, 실제로 우리가 피해를 입힌 당사자하고는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진정으로 회개한다면, 당연히 그 회개의 효력이 상대방에게 느껴져야 하지 않겠는가? 가톨릭교회에서는 우리가 이런 단계들을 다 거치고 나야 하나님이 완전히 용서해주신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신부는 이런 과정을 다 검토하고 나서야, 회개하는 사람에게 사죄의 선포를 해주는 것이다.우리 개신교인들은 죄사함을 받기 위해 목사에게 죄를 고백한다거나 위의 단계들을 거치면서 회개하지는 않는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가톨릭교회에서 요구하는 정도의 개인의 거룩성을 잘 유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가톨릭에 비해 개신교에 사기꾼들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개신교회에 개인의 윤리적 책임을 요구하는 제도가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니다. 개신교회에서 가톨릭교회의 고해성사제도의 효과를 대신하는 좋은 제도가 있는데, 그것이 소그룹 제도이다. 많지 않은 수가 함께 모여 서로 말씀을 나누고 삶을 나누면서, 죄를 지은 것이 있을 때는 사랑으로 지적해주고 잘 한 것은 더욱 격려해주는 소그룹 모임들이 있다. 속회나 각종 성경공부모임이나 기도회 같은 모임들이 그런 역할을 감당하고 있고, 아니면 그런 공식적인 모임은 아니더라도, 개인적으로 신앙을 상담하며 삶을 깊이 나누는 신앙의 친구들이 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성도의 거룩성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그래서 개신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가장 나쁜 상황은, 교회에 다니면서 아무 소그룹에도 참여하지 않는 것이다. 넘어져도 일으켜줄 사람이 없고, 죄를 져도 아무도 말해주는 사람이 없고, 일을 잘 해도 칭찬해주는 사람이 전혀 없는 상태, 이것이 개신교인이 처할 수 있는 최악의 상태인 것이다. 개중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다. "뭐 복잡하게 다른 사람들하고 그런 관계를 맺으면서 신앙생활 해? 혼자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것이야! 싫은 소리 들을 필요도 없고, 괜히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도 없고, 얼마나 좋아? 나 혼자서도 기도도 잘 하고, 성경도 읽고, 선행도 잘 해!"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은 아직 자신을 모르시는 분이다. 아직 주제파악이 안 되시는 분이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중에 그렇게 영적으로 대단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사람 없이, 우리의 삶에 깊이 관여해서 우리를 이끌어주는 사람 없이, 혼자 신앙생활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따라서 우리 개신교인들은 필수적으로 소그룹 모임을 찾아가서 참여해야 한다. 신앙생활은 절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군가 나의 잘못을 지적해주고, 잘한 것은 격려해주는 관계를 만들어서, 서로를 도와야 한다. 현재 우리 교회에서 제공하는 여러 가지 소그룹의 기회들이 있다. 매달 모이는 속회가 있고, 매주 말씀을 묵상하고 나누는 QT모임이 있고, 여러 단계의 성경공부들이 있고, 각선교회 모임이 있고, 성가대가 있고, 기도회 모임들이 있다. 여러분들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반드시 한 가지 이상의 소그룹에 참여하시기 바란다. 우리가 이런 소그룹 모임에 참여할 때 주님 안에서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며 서로의 삶을 챙겨주는 관계가 형성되고, 그렇게 될 때, 우리의 신앙이 퇴보하지 않고 날마다 앞으로 전진하게 되는 것이다. 서로의 신앙을 챙겨줌으로 함께 자라가는 주님의 거룩한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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