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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 교단설교 2: 루터교회 Publish on February 16,2011홍삼열
    “루터교회(Lutheran Church)" (로마서 1:16-17)오늘은 기독교 교단 시리즈 두 번째 시간으로 루터교회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겠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가톨릭교회를 다루었는데, 가톨릭교회에서는 의식을 삶의 기본 리듬으로 중요시하고, 성만찬을 영생을 얻게 하는 은총의 수단으로 여기고, 고해성사를 통해 개인의 도덕적 책임을 묻는 장점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오늘은 루터교회를 살펴보겠는데, 루터교회는 개신교회들 중에 가장 먼저 생긴 교회로서, 이름에도 나와 있듯이 16세기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로부터 시작된 교회이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약 7400만명 정도의 교인을 가지고 있으며, 북미주에만 약 770만명의 루터교 교인들이 있다. 전 세계에 골고루 퍼져 있는 루터교회는 로마가톨릭교회와 정교회를 제외하고는 최대의 교인수를 가지고 있다. 루터교인이 그렇게 많은가 하고 의아해하시겠지만, 이 숫자에는 루터교를 국가종교로 삼고 있는 몇몇 유럽의 국가들, 예를 들어,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같은 나라의 수많은 명목상의 루터교 교인들이 포함되어 있다. 기독교 역사를 보는 시각에 있어서 루터교는 가톨릭과 완전히 다른 해석을 한다. 가톨릭교회는 자기만이 초대교회에서부터 현대까지 정통을 유지하고 있고, 루터교를 비롯한 모든 개신교는 16세기에 본 줄기에서 옆으로 비뚤어져 나간 것으로 믿고 있지만, 루터교에서는 중세 가톨릭교회가 원래 초대교회 전통에서부터 비뚤어져 나갔고, 이런 상태가 16세기까지 지속되다가 루터가 나타나 그 잃어버린 초대교회 전통을 되찾아 연결시켰다고 믿는다. 사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당시 가톨릭교회는 너무 부패해서 희망의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성서와 초대교회 전통에서 너무나 멀어져서, 예수님이 처음 시작한 교회의 형태와는 너무 다른 교회가 되어버렸다. 루터는 당시 가톨릭 수도사였는데, 이런 교회의 부패를 목격하고 그것을 해결하자는 의견을 내었는데, 그 의견이 완전히 묵살당했다. 그래도 계속 부패척결을 외치자 그는 로마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당할 거라는 경고와 함께 생명의 위협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교회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더욱 강하게 개혁을 외치게 되었다.종교개혁이 처음 시작한 시점을 보통 1517년 10월 31일로 잡는데, 그 이유는 이때 루터가 95개조를 비텐베르크 대학 성당 정문에 붙였기 때문이다. *보통 루터의 종교개혁의 시작에 대해 말할 때, 많은 사람들이 루터가 망치를 들고 이 95개조를 성당 문에 의도적으로, 공개적으로 붙이는 장면을 연상하는데 실제 역사는 그렇지 않다. 루터는 이 95개조를 All Saints Day 즉 Halloween날 밤에 조용히 교회 정문에 갖다 붙였다. 어떤 학자들은 루터가 진짜 이 문서를 교회 정문에 붙였는지를 의심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이 일어난 지 29년 후에 Melanchthon이라는 후대 학자의 글에 이 내용이 처음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루터가 진짜 이 문서를 교회정문에 갖다 붙였고, 이것이 종교개혁의 시작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단 루터 자신은 이것이 종교개혁의 시작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루터는 이것을 라틴어로 작성해서 비텐베르크 대학의 학자들 사이에 학술토론이 이루어지기를 원해서 이것을 문에 갖다 붙인 것인데, 어떤 사람이 루터의 허락도 안 받고 이것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출판사에 넘기고 다량의 복사본을 만들어서 이것을 독일 전역에 뿌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루터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종교개혁이 급속히 시작된 것이다.이 95개조가 다룬 주요 내용을 보면, 가톨릭교회에서는 면죄부를 구입하여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하면 연옥에서 고생하는 부모나 형제가 빨리 연옥을 탈출해서 천국으로 올라간다고 가르치는데, 그것이 철저히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에 정반대된다는 것이다. 연옥과 면죄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고해성사 제도를 알아야 한다. 고해성사는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고 했죠? 1) contrition: 우리가 지은 죄를 슬퍼하고 통한이 여기는 단계; 2) confession: 죄를 고백하는 단계; 3) satisfaction: 죄값을 치르는 단계; 4) absolution: 신부에게서 사죄의 선포를 받는 단계. 면죄부는 이 네 단계 중 세 번째 단계인 죄값을 치르는 단계와 깊은 연관이 있는데, 가톨릭교회에서는 죄를 지은 사람이 완전한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값을 치러야 한다고 가르쳤다. 남의 돈을 훔쳤으면 갚아주어야 하고, 남을 헐뜯는 말을 했으면 찾아가서 당사자에게서 용서를 구해야 하고, 만일 보상을 받아야 할 당사자가 죽었거나 무수한 사람을 대상으로 죄를 지었을 경우에는, 신부가 그에 적절한 죄값을 설정해 준다. 예를 들어, 묵주기도를 하게 한다던가, 3일 금식을 하게 한다던가, 성인들의 무덤에 가서 철야기도를 하게 한다던가, 성지순례를 하게 한다던가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몸으로 때우는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돈으로 해결하는 방법이다. (돈이 곧 노동력이니까!) 교회에서 발행하는 면죄부를 사면, 그것으로 죄값을 치른 것으로 해준다는 것이다.루터가 95개조를 작성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바로 이 면죄부 때문이었다. 당시 교황은 레오 10세였는데, 그는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을 건축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는데,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희년 면죄부를 발행했던 것이다. (성경에 보면 희년Jubilee은 매 50년마다 선포되는데, 이때는 모든 종들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팔았던 땅들은 원주인에게로 돌아가고, 죄인들은 모두 해방된다.) 교황이 성베드로 성당을 건축하기 위해 희년 면죄부를 발행했는데, 이 면죄부를 사면,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가 용서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본인이 지은 죄뿐만 아니라, 부모나 형제가 지은 죄도 다 용서받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현재 연옥에서 불로 연단받는 과정에 있을 경우, 그들이 그 연옥의 과정이 크게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이라고 믿는 무식한 대중들은 자기 집에 있는 돈을 긁어모아 이 면죄부를 사지 않겠는가! 그러면 교황은 이 돈으로 성베드로 성당을 진짜 근사하게 지을 수 있지 않겠는가!교황은 이 면죄부를 팔기 위해, 특별 설교자들을 선별해서 유럽의 각국으로 보냈는데, 이들이 독일지역에 도달하여 무지한 군중들에게서 돈을 긁어모을 때 루터가 저항을 한 것이다. 당시 면죄부 설교자들이 설교한 내용이 기록에 남아있는데 그 일부를 발췌해서 읽어드리면 이렇다. "여러분은 아셔야 합니다. 통회하는 마음으로 죄를 고백하고 이 헌금통에 돈을 넣는 사람은 누구나 모든 죄를 용서받습니다. 그런데 왜 거기 한가하게 서 있는 겁니까? 자신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빨리 뛰어오십시오. 그리고 또한 여러분의 돌아가신 부모님들과 다른 형제자매들이 연옥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안 들립니까? '얘야,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손으로 나를 치신다. 제발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우리는 여기서 너무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네가 원하기만 하면, 조금만 헌금하면 우리가 이 고통에서 해방될 거다.' 여러분 이렇게 울부짖는 소리가 안 들립니까? 귀를 열어 그 소리를 들어보세요. 아버지가 아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딸을 부르고 있습니다." 루터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설교를 듣고 너무 화가 났는데, 결정적으로 요한 텟젤의 말에 그가 폭발하고 말았다. "동전이 헌금통에 짤랑 소리를 내고 떨어질 때, 영혼이 연옥에서 튕겨 올라갑니다. 그러니 빨리 면죄부를 사십시오."이것을 계기로 루터는 95개조를 작성하면서, 이 면죄부 판매와 더불어 가톨릭교회의 고해성사 제도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였다. 가톨릭 신학에 의하면, 구원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행 혹은 공적이 필요하다. 그것이 예수님의 선행이든지 성인의 선행이든 자신의 선행이든, 구원받기 위해서는 선행이 꼭 필요하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구원받기에 충분한 선행을 쌓지 못해서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소위 성인들로 추대되는 사람들은 너무 선하게 살아서, 자신의 구원을 위해 사용하고도 남을 정도의 충분한 선행을 쌓는다. 그런데 이런 남아도는 공적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곳에 모아지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선행의 창고" 혹은 "공적의 저장소"라는 곳이고, 교회의 최고 관리인인 교황이 이 저장소도 관리하기 때문에, 자기의 재량권에 따라, 공적이 모자라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나누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면죄부는 이 공적을 나누어주는 한 방편인데, 그냥 나누어줄 수도 있지만 그건 안 되고, 현재 성베드로 성당을 짓느라 돈이 많이 필요하니까, 면죄부를 사는 사람들에게 돈 받고 이 공적을 나누어준다는 것이다.이런 이론이 성경에 있는가? 없다. 성경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것이다. 연옥이 진짜 있느냐 없느냐, 혹은 선행의 저장소가 진짜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루터가 절대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은, 인간이 구원에 필요한 정도 이상의 선행을 쌓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로마서 3:23-24절에 분명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라고 했고, 에베소서 2:8-9절에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하지 않았는가? 만일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어느 누구도 자신의 선한 행위로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사람에게 남아도는 선행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사람에게 남아도는 선행이 있을 수 없는데, 그것을 어느 한 곳에 저장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또 모자라는 선행을 그 저장소에서 돈을 주고 구입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루터는 이것이 철저히 장삿속에 기초한 잘못된 신학이기 때문에, 그 오류를 분명하게 지적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것을 시작으로 개신교 종교개혁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면 성경에서 가르치는 구원은 어떤 것인가? 구원은 하나님과 사람의 teamwork, 즉 동등한 위치에서의 상호협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구원은 사람의 선행에 기초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이론은, 후에 루터교의 sola gratia (오직 은총으로)라는 교리로 정립되었다. 이 sola gratia와 더불어, 루터교에서 가르치는 두 가지 중심교리가 있는데 그것이 sola fide (오직 믿음으로)와 sola scriptura (오직 성서로만)의 교리이다.sola fide (오직 믿음으로)의 교리를 살펴보자. 루터는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용서받고 구원받는다고 믿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우리의 선행이 함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루터는, 우리는 선행의 유무와 상관없이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다고 가르쳤다. 그가 제시하는 성경구절은 로마서 3:28절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선한]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그리고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이런 의문이 생길 법하다. 그러면 루터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선행을 힘써서 행할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 우리가 믿음만 있으면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구원받는다는 말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진짜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사람은 자연히 선한 삶을 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 나무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좋은 나무가 되면 자동적으로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도 먼저 좋은 나무, 즉 구원받은 사람이 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선행은 자동적으로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루터는 자신의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믿음은 살아있고 바쁘고 능동적이고 강력한 것이다. 믿음이 있으면서 선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믿음은 선행을 해야 되는지를 묻지 않고, 그런 질문이 있기 전에, 이미 선행을 하고, 현재도 계속 선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이 불에 탈 때, 그 불에서 뜨거움과 빛을 분리시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믿음과 선행은 절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받고, 이렇게 구원받은 사람은, 선한 나무가 자연히 선한 열매를 맺는 것처럼, 자연히 선한 행위를 하게 된다는 가르침, 이것이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 (sola fide)의 교리이다.루터교회의 세 번째 중심 교리는 sola scriptura (오직 성서로만)의 원리이다. 루터교에서 강조하는 것은, 모든 기독교 교리는 성경에서 나온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단순히 사람이 지어낸 책이 아니고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책이고, 그리고 우리 신앙생활에 꼭 필요한 내용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지 않고 넘어갔을 리가 없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의 유일한 표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루터교에서는 성경에 기반을 두지 않은 가톨릭의 교리와 예식들을 모두 비성서적인 것으로서 부정한다. 예를 들어, 성직자는 독신으로 지내야 한다는 것, 예수님이 7개의 성사를 제정하셨다는 것, 연옥에 관한 교리, 교황은 절대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 마리아가 승천했다는 것 등, 전혀 성경에 기초하지 않은 것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오직 성서로만의 원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경은 역사의 한 시점에서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고, 1세기에서 4세기에 걸쳐 가톨릭교회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여 진짜 글들만을 선별하여 성경책을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지막 권위가 성경에만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성경을 확정한 것이 교회니까, 마지막 권위는 성경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과 교회에 공동으로 있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에 대해 루터는 이렇게 대답한다. 교회가 여러 성경의 글들을 모아 성경책을 확정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성경을 만들었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님의 영, 즉 성령의 감동으로 만들어졌기에, 예수님이 성경을 만드신 장본인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이 성경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교회도 만드셨기 때문에 교회도 어느 정도 권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교회 전통에 들어 있는 것보다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더 많이 성경에 들어 있기 때문에, 당연히 성경이 교회 전통보다 더 권위가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권위는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있다는 것이다.가톨릭교회가 오직 성서로만의 원리를 거부하는 또 다른 논리는, 성경은 대단히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라는 것이다. 가톨릭에서 가르치는 것은, 성경은 신비한 내용들로 가득 차 있어서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신학공부를 많이 한 신부의 지도를 받지 않으면 성경을 잘못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부가 설명해주는 의미와 방식과는 다르게 성경을 읽는 평신도는 성경에서 유익을 얻기는커녕 도리어 큰 해를 입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오직 성서로만의 원칙은 평신도에게 큰 해를 입히는 아주 위험한 교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루터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경의 목적이 우리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해주는 것이라면, 절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되도록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이 일부러 성경을 어렵게 만들어서 소수의 사람만 성경을 읽고 이해하게 하신다고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성경은 구원에 관한 확실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는 책이기 때문에, 글을 읽을 줄 아는 보통 사람이면, 성경을 읽고, 구원에 관한 소식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충분히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신념하에 루터는 성경을 일반인들이 읽을 수 있도록 쉬운 독일어로 번역을 하여 대량 배포하였던 것이고, 가톨릭교회는 평신도가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계속 라틴어 성경을 고집했던 것이다.지금까지 우리는 세 가지 루터교회의 원칙, 오직 은혜로만, 오직 믿음으로만, 오직 성경으로만의 원칙을 살펴보았는데, 이것이 우리 감리교회와는 어떻게 연결될까? 우리도 개신교 종교개혁의 일부이기 때문에, 이 세 가지 원칙을 모두 진리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나중에 감리교회를 다룰 때 자세히 다루겠지만, 우리 감리교회는 믿음과 행위의 문제에 대해 보다 균형있는 접근방법을 택한다. 우리는 믿음과 은혜의 원리가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인간의 책임과 선행도 역시 강조한다. 그래서 감리교회에는 두 가지 중요한 기둥이 있는데, 하나는 칭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교리)이고, 또 하나는 성화 (말씀으로 거룩하게 되도록 힘써야 한다는 교리)이다. 루터교의 세 번째 교리인 오직 성서로의 원칙에 대해서도 우리 감리교회는 역시 균형있는 접근법을 사용한다. 성경이 가장 중요한 권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성경이외에 세 가지 보조 원칙들을 사용한다. 어떤 사안을 결정할 때, 성경이외에 우리의 경험과 이성과 교회 전통을 아울러 고려하게 된다.오늘 우리는 루터교회를 살펴보았다. 루터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의 권위로 삼고,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성서로의 원칙대로 살려고 부단히 노력하는데, 우리는 이점을 본받아야 한다. 사실 현재 우리 자신을 살펴보면, 우리의 관심과 충성을 요구하는 권위들이 많이 있다. 우리의 오랜 습관, 친구들의 압력, 가족, 직장, 자존심, 이런 것들이 매일 우리의 마음을 강요하고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려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루터교의 세 가지 원칙을 명심하고 실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성서로의 원칙을 가지고,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에게 풍성한 구원의 은혜를 내려주실 것이다. 항상 주님만을 의지하는, 오직 믿음의 사람, 오직 은혜의 사람, 오직 성서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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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ristian Denominations 1: Roman Catholic Church Publish on February 13,2011홍삼열
    Roman Catholic Church (John 6:53-58)   This morning and for the next six Sunday mornings, I will preach on the various denominations of Christianity. These will be times of learning how they came into being, what characteristics they have, and how they differ from each other in terms of their teachings and practices. The purpose of doing this is not to tear them down, showing how bad they are and how good we are; rather, acknowledging them as our own brothers and sisters in the same family of God, we want to learn from them, and by studying their strengths, to improve ourselves as disciples of Jesus Christ.   Approaching different denominations is like meeting unfamiliar relatives in family reunions. While back in Korea, I often had opportunities to meet many relatives at weddings, funerals, or important anniversaries of the family patriarch or matriarch. In such occasions I almost always came to meet somebody I did not know. Then I used to ask my father: “Father, that person is not familiar to me. How does he relate to us?” Then my father used to explain it with his knowledge of family trees, which usually go up to my great-grand parents’ time. Only then I felt connected with that person and could begin a good conversation with him.   In the same way, we often do not see the necessary family connections to the different denominations of Christianity and feel disconnected with them, thereby losing valuable opportunities to meet them, share our experiences, and learn from them. That is why I have planned this sermon series. Since we all came from one source, that is, the common faith in Jesus Christ and the shared history of the early church and its tradition, we need to know our sister churches more so that we could encourage each other and learn from each other’s strengths and weaknesses.   Today we will begin by considering the Roman Catholic Church, the church in full communion with the Bishop of Rome. The Catholic Church traces its origin to the original Christian community founded by Jesus and spread by the Twelve Apostles, in particular St. Peter whom they believe to be their first Pope. Currently the Roman Catholic Church is the largest Christian denomination. Its membership is about 1.1 billion, approximately one-seventh of the world’s population and half of all Christians in the world. In the United States, there are over 67 million members. The second largest Christian denomination is the Southern Baptist Church, which has 16 million members. So the Catholic Church is about four times as large as the largest Protestant denomination in this country.   From the perspective of the Protestants, there are two characteristics of the Roman Catholic Church: 1) the four marks of the church: 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and 2) the seven sacraments as opposed to the two sacraments (Baptism and Holy Communion) that Protestants churches acknowledge.   Let us first consider the four marks of the church. When asked about the distinctive characteristics of their church, Catholics often refer to the descriptions of the church found in the Nicene-Constantinopolitan Creed: 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1) The unity of the church. According to the Catholics, church is one because Christ established only one church, the Catholic Church, and the best expression of this unity is the one hierarchical system of the Catholic Church and the one form of worship practiced by all Catholics all around the world. 2) The holiness of the church. When we say the church is holy, it does not mean that all its members are holy, but simply that its head Jesus Christ is holy and that he provides all necessary means to becoming holy. 3) The apostolicity of the church. The Catholic Church is said to be apostolic because it goes back to the Twelve Apostles chosen by Christ himself. And according to their interpretation, Peter is their first Pope and this office of Pope continues only in the Catholic Church. 4) The catholicity of the church. The word “catholic” means universal. So when we say the church is catholic, it means it is universal and thus open to all people regardless of race, sex, nationality, social status, etc.   One thing to remember here is that these four marks of the church, which are part of the Nicene-Constantinopolitan Creed, are accepted by all Christian denominations. So technically speaking, not only the Roman Catholics but also the Protestants can call themselves “catholic” because they too believe that the church is universal and open to everybody. According to this logic, we can call our own church one, holy, apostolic, catholic United Methodist Church. But for convenience’ sake, we just call ourselves Methodists and call those Christians affiliated with Rome Catholics.   Now let us consider the seven Sacraments which are accepted by the Roman Catholic Church and the Orthodox Churches. What is Sacrament? Sacrament is an outward sign instituted by Christ to give His saving grace to His people, and there are seven Sacraments. 1) Baptism, the sacrament of spiritual rebirth through the symbolism of water. 2) Confirmation, the sacrament which confers the Holy Spirit to make us strong committed disciples of Jesus Christ. In the Orthodox Church, this is called Crismation (literally anointing with oil) and it takes place right after the baptism. 3) The Eucharist or Holy Communion, the sacrament that remembers the body and blood of Jesus Christ. The Roman Catholic Church and the Orthodox Church understand the elements on the altar in a physical way, that is, as real body and real blood of Jesus Christ, while we Protestants understand them spiritually. 4) Penance, the sacrament through which Christ forgives sins and restores the soul to grace. 5) Extreme Unction or the Last Anointing, the sacrament which strengthens the sick and sanctifies the dying with oil. 6) Holy Orders, the sacrament of ordination of priests. 7) Matrimony, the sacrament which unites a man and a woman in a holy union. (Out of these seven, we Protestant Churches accept only two, i.e., Baptism and the Eucharist, as the sacraments actually instituted by Jesus.)   Now let us consider the strengths we can learn the Roman Catholic Church. I want to highlight its three strengths today. First, the importance of rituals. We Protestants do not hold a favorable opinion of rituals. For we tend to use the word “rituals” as an opposite to the Word of God. Since we believe that the Word of God is to be the center of worship, all our worship programs are designed to help understand the biblical message, and accordingly eliminate any rituals that we do not think are helpful for that purpose. That is why in a typical Protestant worship, especially in the Baptist tradition, there is no burning of incense, no making crosses, no processions, no clerical robes, and no lengthy elaborate pattern of the Eucharist.   This tendency to make our worship Word-based instead of ritual-based is the heritage of the Reformation Age. When Luther and other reformers saw what was happening in the 16th century Catholic Church, they saw more of the abusive side of rituals than their constructive side. They saw that the Word, which should be the center of worship, did not get enough attention because of an unduly emphasis on rituals. During worship the Bible was read only in Latin and the prayers said by the priest were also in Latin. In addition, if any laypersons could read in Latin, they were discouraged from reading it for themselves because they could read it against the official doctrine of the church. But the Reformers believed that the Bible belonged to people, not to the priest, and that the Word, not rituals, should be the focus of worship. So they translated the Bible in their mother tongues, encouraged people to read it for themselves, and got rid of all rituals that were not based on the Bible and thus did not help people know the truth and grow in faith.   But from our modern perspective, there was a noticeable side effect to that: the Reformers overdid it; they threw the baby out with the bathwater! Especially in the Presbyterian (Reformed) tradition, they threw out all the theatrical or visual art forms such as pictures, statues, gestures, pipe organs, complicated music, etc. But as we know, rituals, whether personal or communal, are an indispensable ingredient of life because they give us the necessary rhythm of life or the kind of stability that helps us learn and grow in faith more efficiently.   The United Methodist Church has realized this truth and tried to re-introduce some of those forgotten rituals. So now we keep the traditional church year beginning from Advent, continuing to Christmas and Epiphany, then to Lent and Easter which is followed by Pentecost. Each season is represented by a different color and the pastor and the choir wear stoles with differing color and the altar is decorated accordingly. We also celebrate Holy Communion more often than before. In former days, we celebrated it only a few times a year, but now United Methodists in general celebrate it once a month. Why? It’s because we know that ritual is neither good nor bad in itself. If we abuse it against the biblical message behind it, it becomes bad. But if we use it according to the Word, we get a great benefit from using it. So to maximize our religious experience, we need to use rituals always in a right way, that is, in a way that helps us to be firmly based on the Word of God and grow steadily in faith.   Now let us consider the second strength of the Catholic Church, the Eucharist as the source and summit of the Christian life. Catholics believe that their Holy Communion is the actual flesh and blood of Jesus Christ. Of course, we Protestants do not agree with it and understand the presence of the Christ in a more spiritual and figurative way, but forgetting all about this difference, we can at least see with what attitude the Catholics approach the bread and wine. Since they believe the Holy Communion to be “the medicine of immortality and the antidote against death,” they approach it with great faith and accordingly are much blessed by their eager anticipation.   Then suppose if we Protestants participate in the Holy Communion with the same level of devotion, how blessed would we be? If we take seriously those scripture verses that say “This is my body; this is my blood”; “Whoever eats my flesh and drinks my blood has eternal life, and I will raise him up at the last day. For my flesh is real food and my blood is real drink,” imagine what great impact would the participation in the Eucharist have upon us. Whether we understand the words in the Bible literally or figuratively, it actually does not matter, because the bottom line is that Holy Communion was instituted by Jesus and provided to us as a major means of grace, that is, no less significant means of grace than the Word of God. So whenever we have a chance to participate in the Eucharist, we need to participate, thinking “This is a major way of receiving God’s grace, and I can be really blessed by this.”   Now let’s go to the third strength of the Roman Catholic Church, a systematic approach to individual accountability. The traditional Catholic way of providing accountability is through the Sacrament of Penance, that is, individual confession to a priest. Its effectiveness comes from the fact that involving a person of authority makes people less likely to slack off or relapse. Penance involves these four steps: 1) Contrition: you really feel sorry for what you have done. Many Protestants think that this is all that is required. If we really feel sorry for what happened and pray to God with tears, we are forgiven. But we have to know that true repentance does not work that way because repentance is more than just praying. So this has to lead to the next step. 2) Confession: when you are really repentant, you confess your sin to the priest. In the early church, confession was made in front of the whole congregation. We can easily imagine what impact this public confession had on the one who confessed. He would make every effort not to commit the same sin again. But still this public or private confession is not the completion of Penance. 3) Satisfaction: if you are really repentant, you have to pay the price. This is where we Protestants show weakness. For we like to solve problems only in relation to God. But we have to know that if we stop there and don’t make any further compensation for what we have done, our repentance is not real. And 4) Absolution: when we repent of our sin, confess it, and make necessary compensation, then we receive the word of forgiveness from the priest.   We Protestants do not normally confess our sins to a pastor nor follow those four steps of Penance. This means that we do not have the same kind of detailed supervision of our lives as Catholics do. But it does not mean that there is no system in the Protestant Churches that holds us accountable before God: we have, instead, a small group system by which members share honestly with each other and help each other grow in faith. The classic case is our Methodist class meetings. This form of a small group meeting originated in German pietism in the 16th century but was fully developed by John Wesley in the 18th century. Wesley’s class meeting was composed of 12 to 15 members, and in each session, the members shared their lives, studied the Bible, prayed together, and thereby held each other accountable before God. That was how Methodists made progress in their faith and got their movement spreading throughout England and later America.   I believe the health of a church depends in large part on the ability to hold its members accountable before God. Seen with this perspective, the worst case scenario for the Protestants would be that they attend a church without participating in any small groups for spiritual supervision. Of course, theoretically we may think that we can do it alone, that we can keep ourselves holy through various personal forms of piety such as daily prayers, writing journals, meditating on the Bible, etc. But let’s face the reality. We are not that strong. We need someone to push us towards that direction of holy living. That is why we are encouraged to engage ourselves in small groups.   So let us find a small group, whether formal or informal, where we can share our lives and hold each other accountable. Currently our church provides several venues in that respect, such as Bible study and sharing groups, UMM or UMW gatherings, prayer meetings, QT meetings, or individual sharing partners at an informal level. Whatever your choice may be, please don’t be alone. Get yourselves involved in holy conversations with others. And hold each other accountable. Then God will daily increase our faith and we will become strong and faithful disciples of Jesus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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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 교단설교1: 가톨릭교회 Publish on February 13,2011홍삼열
    "가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 (요한복음 6:53-58)오늘부터 7번에 걸쳐 기독교의 여러 교단들을 주제로 설교를 하게 된다. 제가 이 설교 시리즈를 구상하게 된 이유는, 많은 분들이 기독교에 왜 그렇게 많은 교단들이 있는지 궁금해 하시기 때문이다. 대개 그런 의문을 가지고 계신 분들은, 똑같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왜 그렇게 서로 분리되어 있는지, 그리고 교단들 간의 차이점들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하신다. 그래서 저는 이 설교 시리즈를 통해, 그런 궁금증을 풀어드리고자 한다.그런데 이 시리즈를 시작함에 있어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제가 이 교단 설교를 하는 목표가, 다른 교단들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밝히거나, 아니면 감리교가 얼마나 뛰어난지를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저의 목표는 각 교단들을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함으로써, 우리가 그들에게서 배울 점이 있으면 겸손하게 배우자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배움의 자세를 가질 때, 우리는 각 교단들의 장점들을 제대로 발견할 수 있고, 그럴 때 우리 자신이 그들에게서 잘 배움으로 보다 나은 교인, 보다 나은 교회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여러 기독교 교단들을 접하는 것은 마치 큰 가족행사에서 낯선 친척들을 만나는 것과 비교할 수 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친척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참석할 때면, 그때마다 내가 모르는 분들을 꼭 만나게 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런 경우 저는 아버지께 물어본다. “아버지, 저기 계신 분이 누군지 모르겠는데, 그분이 저희와 어떻게 연결됩니까?” 그러면 집안 가계에 대해 잘 아시는 아버지가, 그분이 어떻게 저의 할아버지와 연결되고, 과거에 어디에 사셨고, 아버지와는 어떤 관계성을 가지셨는지 등등 상세하게 설명해주신다. 이런 설명을 듣고 나면, 저는 그 사람과 내가 진짜 혈연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것을 기초로 그 분과의 관계모색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장로교나 침례교나 가톨릭에 다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과연 우리가 그들 교단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우리가 과거의 역사를 배우고 알게 될 때, 그런 의문점들이 많이 풀리게 되는데, 바라기는, 우리가 이렇게 서로와의 관계를 확인함으로써, 서로에게서 배울 점들은 겸손히 배우고, 상대방의 실수는 반복하지 않는 지혜를 배우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해 생각해보겠다. 가톨릭교회는 현재 지구상에 있는 가장 큰 기독교 교단이다. 교인수는 약 11억 명이 되는데, 이 숫자는 세계 인구의 약 1/7, 그리고 전체 기독교인의 과반수가 되는 대단한 숫자이다. 미국만 따지면, 가톨릭교회는 6,700만 이상의 교인을 가지고 있는데,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교단인 남침례교와 비교할 때 (남침례교의 교인수는 1,600만명), 가톨릭교회가 4배 이상의 교인수를 가지고 있다.이제 개신교회와 비교하여 볼 때 가톨릭교회의 특징을 들라 하면,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로, 가톨릭교회는 교회의 표식을 4가지로 설명한다. 즉 교회를 하나(one)이고, 거룩(holy)하고, 사도로부터 전해지고(apostolic), 보편성이 있는(catholic) 단체로 설명한다. (개신교회도 이 교회의 4가지 표식을 믿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에서는 다르게 해석한다.) 둘째로, 개신교에서는 2개의 성사만을 인정하지만 가톨릭은 7개의 성사를 인정한다.먼저 교회의 4가지 표식을 생각해보자. 하나님의 교회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들을 설명하라고 하면, 가톨릭교회는 보통 니케아신경에 나오는 네 가지 교회의 표식을 이야기한다. 1) 첫째로, 그들은 교회는 하나라고 믿는다. 왜 교회가 하나인가? 그 이유는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실 때 하나만 세우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만을 말하는 것이고, 이 사실은, 전 세계 교인들이 교회의 위계질서를 받아들이고, 교황이 지시하는 한 종류의 예배 형식만을 따르는 것으로 증명된다는 것이다. 2) 둘째, 교회는 거룩하다. 교회가 거룩하다는 의미는, 교회를 구성하는 교인들이 모두 거룩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가 거룩하시고, 그분이 교인들에게 거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는 의미에서, 교회가 거룩하다고 하는 것이다. 3) 셋째, 교회는 사도로부터 전해진 교회이다. 현재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맨 처음에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12 사도들에게 그 교회를 맡기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12사도의 머리는 베드로이니까, 베드로가 초대 교황이 되어서 교회를 치리하였고, 우리는 그 뒤를 잇는 교황들의 치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4) 교회는 catholic 즉 보편적이다. 여기서 catholic이란 말은 그리스어로 보편적이란 뜻으로, 교회는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곳이라는 뜻이다. 인종이나 나이나 성별이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교회에 나와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의 특징이라는 것이다.교회의 이 4가지 표식은 이미 니케아신경에 나오는 것으로서, 모든 기독교 교단들이 이것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우리 개신교에서는 이것을 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예를 들어, “교회는 하나”라고 할 때, 가톨릭에서는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만이 진짜 교회이고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라고 주장하지만, 개신 교단들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뭉친다는 의미에서 교회가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라는 것은 교황제도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교회는 보편적" (catholic)이라고 할 때, 가톨릭교회에서는 이것을 대문자 C로 이해해서 그것이 로마 가톨릭교회를 의미한다고 말하지만, 개신교에서는 그리스어의 원래 뜻인 “보편적”(kata holos)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서,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보편적인 교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믿는다.그래서 이 교회의 4가지 표식에 대해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점은, 가톨릭교회에서는 이 표식들을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가시적인 제도의 측면에서 해석하지만, 우리 개신교에서는 교회의 머리 되시는 예수님과 그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측면에서 해석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또 하나 가톨릭교회가 우리 개신교회와 다른 점은,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이 세례와 성찬식만을 직접 제정하셨다고 믿고 그 두 가지만을 성사(sacrament), 즉 "거룩한 은총의 수단"으로 인정하지만, 가톨릭교회에서는 그것에 5가지를 더하여 7개의 성사를 가르치고 있다. 1) 우선 세례는 물이라는 상징물을 통하여 세례 전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는 예식이다. 2) 견진성사는 세례를 받은 후에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서, 스스로 예수의 제자가 되기로 결단하는 예식이다. 3) 성찬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예식인데, 개신교와 가톨릭이 이것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가톨릭에서는 성찬식 때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빵과 포도주속에 들어오신다고 믿지만, 개신교에서는 예수님이 "영적으로" 임하시는 것으로 믿는다. 4) 네 번째는 고해성사인데, 세례 이후에 지은 죄를 이 방법을 통해 용서받는다는 것이다. 5) 그 다음 병자성사는 병든 사람이나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기름을 발라 치유의 은총과 위로를 주는 예식이고, 6) 신품성사는 신부를 세우는 예식이고, 7) 혼배성사는 남자와 여자를 부부가 되게 하는 예식이다.이제 우리 개신교회가 가톨릭교회에서 배울 점들을 살펴보자. 저는 오늘 세 가지를 말씀드리겠는데, 첫째가 가톨릭교회는 의식을 중요시한다는 점이다. 여러분들이 가톨릭교회에 들어가서 예배에 참여하면, 우리 개신교 예배와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되는데, 가톨릭교회에서는 우리가 개신교 예배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과는 약간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경험한다. 즉 거룩한 의식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한다.우리 개신교인들은 가톨릭교회의 의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말씀이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 모든 예배 순서는 그 선포되는 말씀을 잘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짜여 져야 하며, 그런 의미에서 그 목적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예식들은 모두 없애버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신교 예배에서는, 특히 침례교의 예배에서는, 말씀선포 이외의 것들은 최소한도로만 허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침례교의 예배에서는 가운을 입는 것, 향을 피우는 것, 손으로 십자가를 긋는 것, 성가대의 입장 또는 퇴장 이런 것들이 없고, 성찬식도 아주 간단하게 거행한다. 어떤 경우에는 빵 대신 아이들이 먹는 물고기모양의 과자를 사용하기까지 한다.개신교에서 이렇게 의식대신 말씀 위주로 예배를 진행하는 것은 16세기 종교개혁의 결과이다. 루터를 비롯한 당시 종교개혁가들은 가톨릭교회에서 말씀을 무시한 채 의식만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옳지 않다고 주장하며, 말씀 중심의 예배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쳤다. 당시 가톨릭교회의 예배는 설교가 없이 성찬식 위주로 예배가 진행되었다. 그것도 사람들이 알아듣는 언어가 아닌 라틴어로 예배가 진행되었다. 성경봉독이나 기도도 모두 라틴어로 이루어지니, 모든 것이 신부 혼자서 다 하는 것이었다. 가끔 교인들 중에 라틴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있는 경우, 그 사람은 라틴어 성경을 읽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교회의 공식 가르침에 위배되게 성경을 잘못 읽을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에서는 성경말씀은 신부가 읽어주는 것을 통해서만, 신부가 해석해주는 것만 받아들이도록 강요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가들은 성경은 성직자의 것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의 것이라고 믿었다. 결국 성경말씀을 이해하고 실천해야 할 사람들은 성직자가 아니라 일반 신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는 의식위주가 아닌 말씀위주의 예배가 되어야 하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개혁가들은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였고 일반 사람들에게 성경을 읽도록 장려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아울러, 성경에 기초하지 않고 신앙생활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예식들을 모두 없애버렸다.현대의 개신교에서는 이런 16세기의 전통을 이어받아 별로 의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보수 장로교 전통에서는 교회에서의 예술 활동을 모두 금지시켰다. 그래서 진짜 원조 장로교회에서는 그림이나 조각이나 예복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것을 성경대로 한다는 이유로, 교회에서 오르간을 모두 없애버리고, 음악의 형식을 최대한 간단하게 사용하였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올갠을 사용했다는 예가 없고, 4부로 성가를 불렀다는 내용이 없기 때문에, 예배에 그런 것들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으로 알고 있듯이, 의식이라는 것은 삶의 리듬이 되고, 우리가 안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기본 틀이 된다. 좋은 예가, 교회력이다. 교회력은 12월 대림절로부터 시작해서,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오순절 등으로 연결되는데, 우리는 그런 순서를 따라, 시기에 적절한 예식들을 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도구를 사용하여 우리 자신과 자녀들의 신앙이 안정적으로 자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우리 연합감리교회에서는 이런 의식의 중요성을 재발견하여, 말씀선포와 더불어, 의식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들을 다양하게 제공해왔다. 그래서 교회력에 따라 각 계절에 다른 색깔을 사용한다. 그래서 성탄절이나 축제의 날에는 하얀색을 사용하고, 사순절에는 자주색을 사용하고, 오순절에는 붉은 색을 사용한다. 또 대부분의 연합감리교회는 성찬식을 이전보다 더 자주 시행하는데, 여러분이 기억하시겠지만 한국에 있을 때는 일 년에 서너 번만 성찬식을 했다. 그런 이유로 저희 교회에서도 그런 패턴을 따르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대부분의 연합감리교회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성찬식을 하는데,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의식 자체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게 사용하면 악한 것이고, 말씀에 맞게 사용하면, 우리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의식에 대해 너무 색안경을 끼고 볼 필요가 없다. 교회에서 어떤 특별한 의식을 거행하면 그것이 자동적으로 가톨릭적이라고 규정하여 거부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성경의 원칙에 맞는지, 현재 우리 교회의 상황에 맞는지, 우리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지 이런 것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사용을 결정해야 할 것이다.이제 가톨릭교회에서 배울 두 번째 것을 생각해보자. 가톨릭교회는 성만찬을 대단히 귀중히 여긴다. 왜냐하면 성만찬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성육신의 사건이 다시 한 번 재연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성육신이란 것이 무엇인가? 성육신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형태를 입고 우리에게 다가오신 사건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주셔야 하는데, 우리 수준이 너무 낮아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기에, 눈으로 보이는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 오신 것이다. 그런데 이 성육신 사건은 예수님의 육체를 통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두 가지 다른 통로를 통해서도 일어난다. 그것이 곧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 즉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나타나고, 또한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를 통해서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의 형태를 빌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기도 하고,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입으로 느낄 수 있는 형태로, 즉 빵과 포도주의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기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는 방법은 세 가지가 되는데, 첫째가 예수님의 육체를 통해서, 둘째가 성경말씀을 통해서, 셋째가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는 예수님의 육체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성육신을 경험하는 방법은 말씀 듣는 것과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교회에서는 성경말씀에 못지않게 성만찬을 귀중히 여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귀중히 여기는 선을 넘어서, 말씀보다 성만찬을 차이 나게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기지만, 가톨릭교회는 그것이 실제로 예수님의 몸과 피가 되었다고 믿는다. 신부가 성별의 기도를 드리는 순간, 빵과 포도주의 겉모습은 변하지 않지만, 그 내용이 진짜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신자들이 그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으면, 영적인 축복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축복을 받아서, 그것을 먹는 사람에게 "불멸의 약이요 죽음의 방부제"가 되어, 영생을 얻게 한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 개신교회에서는 이런 물질적인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성만찬을 통해 예수님이 우리에게 영적으로 임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성찬을 먹지 않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이 성만찬을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주요 수단으로 여긴다는 점은 본받아야 한다. 비록 그들이 말씀보다 지나치게 성만찬을 중요시여기는 오류를 범하고 있지만, 우리는 반대로 성만찬을 지나치게 무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만찬은 예수님이 직접 제정하신 은총의 수단이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잡혀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제자들을 모아 놓고 성찬식을 행하시면서, 이것을 되도록 자주 시행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성경말씀에만 치중하느라 상대적으로 성찬식을 경시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예수님이 성만찬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셨나?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내 피다.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3) 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우리가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찬식을 통해서도 똑같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성찬식에 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가톨릭교회에서 배워야 하는 것이다.가톨릭교회의 세 번째 장점은, 고해성사를 통해 개인의 도덕적 책임을 묻는 것이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어떤 신자가 죄를 지었을 때, 그냥 속으로 잘못을 깨닫거나, 하나님께 잘못했다고 회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반드시 신부에게 가서 죄를 고백하게 함으로써, 개인의 도덕적 책임을 묻도록 되어 있다.가톨릭에서는 이 과정으로 네 단계로 설명하는데, 첫째가 Contrition이다. 통회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 많은 개신교인들이 이것을 회개의 전부라고 착각한다.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서 진짜 통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눈물로써 회개하면, 모든 죄가 용서받고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그것이 잘못이라고 가르치면서 다음 단계를 제시한다. 그것이 Confession, 죄의 고백이다.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을 사람 앞에서, 특히 믿을 수 있는 성직자에게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다. 초대교회 때는 이런 죄의 고백을 온 교회 앞에서 시행하였다. 죄를 지은 사람이 이런 식으로 회개할 때, 얼마나 강력한 효과를 내었을지는 쉽게 상상하고도 남는다. 이렇게 회개한 사람은 절대 같은 죄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그야말로 피나는 노력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입으로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도 회개를 다 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가톨릭교회에서는 다음 단계를 제시하는데, 그것이 Satisfaction의 단계이다. 죄의 대가를 치르는 단계이다. 도적질 했으면 도적질 한 것을 되갚아주어야 하고, 잘못을 저질렀으면 그에 상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개신교인들이 잘 하지 못하는 부분이 이것이다. 우리는 죄의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해결하려고 하지, 실제로 우리가 피해를 입힌 당사자하고는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진정으로 회개한다면, 당연히 그 회개의 효력이 상대방에게 느껴져야 하지 않겠는가? 가톨릭교회에서는 우리가 이런 단계들을 다 거치고 나야 하나님이 완전히 용서해주신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신부는 이런 과정을 다 검토하고 나서야, 회개하는 사람에게 사죄의 선포를 해주는 것이다.우리 개신교인들은 죄사함을 받기 위해 목사에게 죄를 고백한다거나 위의 단계들을 거치면서 회개하지는 않는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가톨릭교회에서 요구하는 정도의 개인의 거룩성을 잘 유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가톨릭에 비해 개신교에 사기꾼들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개신교회에 개인의 윤리적 책임을 요구하는 제도가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니다. 개신교회에서 가톨릭교회의 고해성사제도의 효과를 대신하는 좋은 제도가 있는데, 그것이 소그룹 제도이다. 많지 않은 수가 함께 모여 서로 말씀을 나누고 삶을 나누면서, 죄를 지은 것이 있을 때는 사랑으로 지적해주고 잘 한 것은 더욱 격려해주는 소그룹 모임들이 있다. 속회나 각종 성경공부모임이나 기도회 같은 모임들이 그런 역할을 감당하고 있고, 아니면 그런 공식적인 모임은 아니더라도, 개인적으로 신앙을 상담하며 삶을 깊이 나누는 신앙의 친구들이 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성도의 거룩성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그래서 개신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가장 나쁜 상황은, 교회에 다니면서 아무 소그룹에도 참여하지 않는 것이다. 넘어져도 일으켜줄 사람이 없고, 죄를 져도 아무도 말해주는 사람이 없고, 일을 잘 해도 칭찬해주는 사람이 전혀 없는 상태, 이것이 개신교인이 처할 수 있는 최악의 상태인 것이다. 개중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다. "뭐 복잡하게 다른 사람들하고 그런 관계를 맺으면서 신앙생활 해? 혼자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것이야! 싫은 소리 들을 필요도 없고, 괜히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도 없고, 얼마나 좋아? 나 혼자서도 기도도 잘 하고, 성경도 읽고, 선행도 잘 해!"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은 아직 자신을 모르시는 분이다. 아직 주제파악이 안 되시는 분이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중에 그렇게 영적으로 대단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사람 없이, 우리의 삶에 깊이 관여해서 우리를 이끌어주는 사람 없이, 혼자 신앙생활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따라서 우리 개신교인들은 필수적으로 소그룹 모임을 찾아가서 참여해야 한다. 신앙생활은 절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군가 나의 잘못을 지적해주고, 잘한 것은 격려해주는 관계를 만들어서, 서로를 도와야 한다. 현재 우리 교회에서 제공하는 여러 가지 소그룹의 기회들이 있다. 매달 모이는 속회가 있고, 매주 말씀을 묵상하고 나누는 QT모임이 있고, 여러 단계의 성경공부들이 있고, 각선교회 모임이 있고, 성가대가 있고, 기도회 모임들이 있다. 여러분들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반드시 한 가지 이상의 소그룹에 참여하시기 바란다. 우리가 이런 소그룹 모임에 참여할 때 주님 안에서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며 서로의 삶을 챙겨주는 관계가 형성되고, 그렇게 될 때, 우리의 신앙이 퇴보하지 않고 날마다 앞으로 전진하게 되는 것이다. 서로의 신앙을 챙겨줌으로 함께 자라가는 주님의 거룩한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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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년도에 시행될 속회사역, QT모임, 그리고 성경공부에 대해 설명드립니다 Publish on January 16,2011홍삼열
    내년도(2011)에 시행될 속회사역, QT모임, 그리고 성경공부에 대해 설명드립니다.1. 속회사역속회(class)는 감리교운동을 시작한 웨슬레가 창안한 구조입니다. 전체 교인을 12명으로 나누어서 매주일 모임을 갖게 하고, 이 모임을 통해 속원들이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제목을 나누며 함께 기도하고, 헌금을 모아서 교회 재정부로 보내고, 서로의 신앙의 상태를 점검하게 함으로써 서로 친밀한 소속감을 갖게 하는 구조입니다. 옛날에는 삶이 그렇게 복잡하지 않아서 매주 속회로 모이는 것이 그리 힘들지 않았습니다. 교인들 대부분이 이런 모임의 형태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 이에 참여하였고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성도의 교제를 통해 많은 영적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점점 삶이 복잡해지고 바쁘게 변하게 되면서부터는 모든 교인들에게 이렇게 매주 모이는 속회에 참여하라고 강요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현재 대부분의 교회들에서는 한 달에 한 번 혹은 두 번 정도 모이는 속회제도를 시행하고 있습니다.저희 교회에서도 이런 형태의 속회모임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는데, 두 가지 중요한 점에서 원래 웨슬레가 의도한 속회와 차이가 나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는 매주일 모이지 않게 되니까 속장이 속원들의 영적 상태를 깊이 알 수 없고, 그러다보니까 그들에게 영적 문제가 생겼을 때 목회자가 빨리 보고를 받고 개입할 수가 없게 됩니다. 원래 속회의 중심 활동은 말씀공부라기보다는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시의 적절하게 성도들의 영적 필요가 채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상태의 속회로는 이것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둘째는 현재의 속회는 새신자들이 쉽게 동화되기가 힘듭니다. 원래 웨슬레의 속회는 기존의 신자들보다는 새로 들어오는 신자들을 위해 존재하는 구조입니다. 예를 들어, 당시 보통사람들이 말끔한 옷을 입고 교회에 오는 것이 힘든 상황에서 (당시에는 제대로 된 옷이나 신발이 없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웨슬레는 그들이 있는 곳으로 속회라는 구조를 가지고 들어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의 속회는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 믿지 않는 사람들, 교회로 직접 나오기 힘든 사람들에게 찾아가는 구조라기보다는, 이미 교회에 잘 나오는 신자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구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한 속에서 오랫동안 친분을 쌓은 상태로 아무 변동없이 몇 년이 지나가면 그 다음부터는 새로운 사람이 그곳에 들어와도 동화되기가 힘듭니다. 그렇게 되면 속회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찾아가는 구조도 아니고 새 사람들이 쉽게 동화될 수 있는 구조도 아닌 닫힌(closed) 상태로 변모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많은 분들의 불편함을 알면서도 교우위원회에서 속회를 재편성하였습니다. 산타클라라의 속회가 보다 유동적이고 열린 구조가 되어 새로운 사람들을 찾아가고 그들이 보다 쉽게 동화되게 하고자 하는, 일종의 선교적 정신을 가지고 재편성의 일을 추진했다고 생각합니다. 바라기는 앞으로 모이는 속회들이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영적 고민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기도하는 속회,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속회, 서로 신앙의 격려와 도움을 주고받음으로 함께 영적으로 성장하는 속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2. QT모임한편 2011년에는 속회와 병행하여 QT모임이 시작됩니다. QT모임을 시작하는 이유는 현재의 속회제도를 통해 채워지는 영적 교제의 수준을 넘어서는 더욱 심도있는 교제를 원하는 분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속회가 산타클라라 교인이면 모두 참여해야 하는 매월 한 번 모이는 모임이라면, QT모임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모임으로서 깊은 영적 교제와 삶을 나누기 위해 매주 모이는 모임입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QT모임의 리더로 자원하셨는데 각 리더는 연말까지 4명에서 8명의 회원들을 모아서 그룹을 정하시고 내년 초부터 시작해주시기 바랍니다. (나중에 숫자가 늘어나면 그룹을 둘로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교재는 두란노에서 만든 [생명의 삶]을 사용하게 됩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여러 QT교재들 중 현재 우리 교회의 상황에 비추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어 그 교재를 선택했습니다. QT리더들이 회원들을 모아서 매주 모임을 주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도 QT리더들을 모아서 한 달에 한 번꼴로 QT모임을 주관하게 됩니다. (리더들은 저와 한 달에 한 번 모이게 되지만, 저는 리더들의 수가 많기 때문에 매주 다른 리더들 그룹과 모임을 갖게 될 겁니다.) 이 모임에서는 제가 리더들에게 QT할 내용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리더들을 회원으로 삼아 동일한 QT모임을 인도하는 형태를 취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모임은 제가 성경을 가르치는 모임이 아니라 함께 기도제목을 나누고 삶을 나누며 함께 신앙의 성장을 추구하는 모임입니다. 3. 성경공부현재 우리 교회에서 다양한 소그룹의 기회들이 제공되는데 각 소그룹의 목적에 대해 분명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목적에 대한 오해가 생기면 불필요한 마찰이 생기고, 그러면 소그룹의 효율성이 많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기에서 설명드리는 속회와 QT모임과 성경공부에 관련하여 역시 목적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간단히 설명드리면 속회의 목적은 한 달에 한 번밖에 시간을 내지 못하는 분들이 모여서 영적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중점이 성경공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 교제와 기도와 친교에 있는 것입니다. QT모임의 목적은 속회에서 다루는 수준보다 더 깊은 수준의 영적 교제를 갖는 것입니다. 집에서 개인적으로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삶에 적용하고 나중에 모여서 그것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곳에서도 성경공부가 중심이 아니라 적용이 중심입니다. 체계적인 성경공부는 속회나 QT모임에서가 아니라 교회에서 공식 프로그램으로 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희 교회에서 많은 성경공부들이 진행되어 왔습니다. 평신도 교사들의 헌신을 통해 풍성한 열매가 맺힌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내년부터는 목회자들이 인도하는 성경공부 시스템이 가동됩니다. 우선 저희 교회에 새로 등록하시는 분들을 위해 5주과정의 새교우반이 있습니다. 제가 교회에서 4주를 인도하고 5주째는 저의 집에 초대하여 함께 식사를 나누며 교제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이 과정이 끝나면 기존 교인들을 대상으로 5단계 성경공부가 있습니다. 각 단계별로 6-7주 안에 마칠 수 있도록 고안을 하였습니다. 1단계는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배우는 새생명반, 2단계는 [예수님의 사람1](유기성), 3단계는 [예수님의 사람2](유기성), 4단계는 제자훈련1, 5단계는 제자훈련2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전체 단계별 성경공부들이 동시에 개설되지는 않고 1단계부터 하나씩 개설해나갈 것입니다. 이미 성경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보다는 새로 시작하시는 분들에게 기회를 드리기 위해 1단계부터 차근차근 시작하게 되니 이해해주시기 바라고, 선택과목은 당장 개설하지는 않지만 필요에 따라 한 두 과목씩 제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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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 때 사도신경 사용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Publish on December 24,2010홍삼열
    이 글은 제가 [섬기는 사람들] 14:1 (2011, January/February, 14) 에 기고한 글입니다.--------------------------------------------------------------------------------몇 주 전에 사도신경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우리는 가톨릭 교인이 아닌데, 왜 우리가 외우는 사도신경의 영어표현에 Catholic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습니까?”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런 저런 이유로 교회에서 사도신경을 사용해도 되느냐 안 되느냐에 대해 논란이 있어왔다. 아직 사도신경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신 분들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간단하게나마 이 지면을 통해 사도신경에 대한 몇 가지 사항을 말씀드리고자 한다.우선 사도신경의 기원에 대해 설명드리면, 사도신경은 세례 지원자들을 교육하기 위한 필요성에서 생겨났다. 정식 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신앙의 기본사항들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목회자는 세례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미리 준비교육을 시키는데, 그 교육 기간 동안 배운 내용을 세례식 때 신앙고백의 형식으로 암송하도록 한 것이 신경의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나중에 여러 가지 이단사상들이 교회에 침투하게 될 때 이 기본 신앙고백이 이단과 정통을 구분 짓는 중요한 척도로 사용되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사도신경 사용에 대한 논란이 시작되는데, 과연 사도신경에 그럴만한 권위가 있느냐, 그리고 그것을 매주 교회에서 사용해도 되느냐는 것이다.사도신경 사용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제기하는 대표적인 주장은 이런 것들이다. 1)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주기도문과는 달리 사도신경은 성경에 전혀 기록이 없다. 2) 사도신경은 진짜 사도가 만든 것이 아니고 후대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비록 이미 2세기 말에 로마교회에서 사용되던 로마신조(Old Roman Creed)를 현재의 사도신경의 전신으로 인정하더라도, 현재 사도신경에는 로마신조에는 없는 후대의 첨가부분이 들어가 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내용, 거룩한 교회라는 표현에 “가톨릭”이란 단어가 첨가된 것, 성도의 교제가 새로 첨가된 것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우선 첫 번째 주장, 사도신경은 성경에 없기 때문에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예배에 성경에 없는 사항들이 사용되고 있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타당성이 떨어진다. 예를 들어, 매 예배 때마다 찬송을 부르는데, 그 찬송 내용이 그대로 성경에 있는가? 없다. 또 복음송은 어떤가? 그밖에 현대에 들어와서 도입된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런 것들은 자율적으로 사용해도 괜찮고 교회에서 1500년 넘게 의미있게 사용된 사도신경은 안 된다는 말인가? 문제는 성서에 사도신경이 있는가 없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성서의 가르침에 부합한 성서적인 것인가 비성서적인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사도신경은 그 전체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 용어와 내용이 모두 성경에서 나온 것들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교회에서 애용해 왔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둘째로 사도신경은 후대 가톨릭교회의 작품이기 때문에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역시 사도신경의 용어와 개념이 모두 성경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때 타당성이 떨어진다. 비록 가톨릭교회에서는 그것을 자기들 유리한 쪽으로 해석해서 가르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도신경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거룩한 공교회(Holy Catholic Church)에 대해 가톨릭교회에서는 이것을 근거로 지구상에는 가톨릭교회만 있다고 주장하겠지만, “가톨릭”이란 단어는 그리스어의 두 단어인 kata와 holos가 결합해서 만들어진 단어로 “보편적”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영어로 사용할 때는 대문자 Catholic이 아닌 소문자 catholic으로 사용하는 것이 옳다. 한국 가톨릭교회에서도 어쨌든 이 구절을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로 번역해서 사용하고 있다.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구절도 가톨릭에서 이것을 이용하여 연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설명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비성서적인 것은 아니다. 그 내용이 베드로전서 3:19절과 4:6절에 나온다. 이 구절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필자가 2009년 5/6월호에 기고한 글을 참조하시기 바란다.(http://korean.umc.org/uploads/documents/korean_umis_2009%20MayJune%2014.pdf)사도신경을 교회 예배 때 사용해야 하나 하지 말아야 하나? 꼭 매 번 사용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주기도문이나 성만찬 같이 예수님이 하라고 지시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전통적으로 교회가 믿어온 신앙을 되새기고 재확인한다는 점에서 사용을 꺼릴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상은 제가 [섬기는 사람들]에 기고한 내용 전체를 인용한 것인데, 이에 덧붙여 현재 개역개정판 찬송성경책에 담겨 있는 두 종류의 사도신경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최근에 새로 출판된 개역개정판 찬송성경에는 개역판 옛날 사도신경과 새번역 사도신경이 함께 담겨져 있는데, 저희 산타클라라 연합감리교회는 1년전부터 예배때 새번역 사도신경을 사용하고 있다. 개중에 오래 신앙생활 하신 분들 중 새번역 사도신경이 영 익숙치 않아 옛날 개역판 사도신경으로 되돌아갔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계시는 분들이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본인도 아직 새번역 사도신경이 익숙하지 않아 예배 때면 스크린에 올라오는 것을 보고 사도신경을 고백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새번역 사도신경을 계속 사용하기를 권장한다.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는 새번역본이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언어로 되어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새번역본이 라틴어/그리스어 원문의 문장구조에 더 충실하다는 점이고, 셋째는 새번역본은 개역본과는 달리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개역본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형식인 "믿사오며," "믿사오니," "믿사옵나이다"로 되어 있다.) 사실 사도신경은 세례를 받을 때 모인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이 정통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하는 기도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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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식교 목사님의 설교가 좋은데 계속 들어도 되나요? Publish on September 04,2010홍삼열
    얼마 전 제가 아는 분으로부터 이런 전화를 받았습니다. "안식교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면 너무나 성서적이고 좋아서 계속 듣고 싶은데, 다른 사람들은 안식교는 이단이기 때문에 가까이 하면 좋지 않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전화를 받고 저는 그분에게 여러가지로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약간 미진한 느낌이 들어 후에 간단한 편지를 보내드렸습니다. 성도님들 중에 이와 비슷한 질문이 있는 분들을 위해, 제가 이전에 보냈던 편지를 여기에 다시 실어놓습니다.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어제 전화로 이야기한 것이 부족한 느낌이 있어서 다시 정리해서 제 의견을 알려드립니다. 안식교 목사님의 설교가 좋아서 그것을 읽거나 듣는 것이 감동이 된다고 했는데, 그것에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우선, 우리가 불교의 스님이나 모슬렘 성직자가 말씀하는 것을 듣고 감동을 받았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들의 전체 교리에 동의하기 때문이 아니라, 상식선에서 볼 때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감동받는 것일 겁니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보통 이단으로 규정하는 안식교의 목사님이 말씀하는 것에 감동을 받았다면, 위의 경우와 같이 상식적인 수준에서 (아니면 이 경우에는 “상식적인” 성경해석의 수준에서) 감동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안식교에서 95%는 올바른 성서해석을 하다가 중간에 5% 정도 잘못된 성서해석을 하면서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게 될 때, 신학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은 그것도 나머지 95%와 차이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냥 진리로 받아들일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그래도 현대 안식교가 그중 나은 것은 여타 이단들과는 달리 사람들을 극단적인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이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안식교인들은 대체적으로 순수하고 건강하고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단 천주교나 개신교의 정통 신학과는 다른 것을 가르친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약 5% 정도?인터넷이나 기타 서적을 참조하시면, 안식교의 이단적인 특징들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토요일을 성일로 지키는 것 (우리는 성경에서 사도들이 지켰던 “안식 후 첫날” 즉 예수님의 부활의 날을 성일로 지킵니다. 안식일/쉬는 날을 정확하게 지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고 그것을 어기면 지옥가는 것이라면, 지구를 전체적으로 볼 때 정확하게 언제를 지키라는 말인가 라는 문제점이 생깁니다. 날짜는 사람이 정한 것이기 때문에 정확한 안식일 준수를 주장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어느 특정한 날과 시가 아니라, 매일을 주님의 날로 지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 날짜를 여러 번 시도했다가 실패하자 영적인 재림으로 교리를 바꾼 것 (이단의 특징은 날짜를 맞추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천사장 미카엘이라는 주장; 모세가 예수님 이전에 부활했다는 등등의 황당한 주장은 그들이 진리의 사도로 여기는 엘렌 화이트 등 여러 선지자들의 잘못된 성서해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많습니다.이런 상황에서 만일 제가 안식교 목사라면, 그런 문제 있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설교를 안 할 겁니다. 이미 안식교인이 된 사람들에게만 그런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가르칠 것입니다. 따라서 외부적으로 알려지는 안식교 목사들의 설교에 직접적으로 신학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항목들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그 뒷배경에 그런 문제들을 간접적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결론적으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그리고 동시에 주변에 타종교인들이나 심지어 이단사상을 가진 사람들과 "별 탈 없이" 살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1) 그들을 사탄같이 대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어쨌든 공동의 사회에서 함께 살아야 하니까요. 그들에게도 종교의 자유가 있으니까요. 무례하게 대하는 대신,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2) 일반 기독교 신자들의 경우, 안식교 목사의 설교를 자주 들어서 이단 사상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에게 들어오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는, 정통교회의 목사들의 설교를 듣는 것이 안전하겠죠. 물론 정통의 옷을 입은 “사이비” 목사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3) 친구나 가족 중에 안식교인들이 있는 경우는 그쪽 방면에 공부를 많이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중에 나온 안식교의 문제점들을 설명한 책들을 읽고, 동시에 무엇이 올바른 신학인가를 알기 위해 성경과 신학서적을 읽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중간 중간 자신이 올바르게 성경을 해석하고 있는지 체크하기 위해 학식있는 목사님들이나 신학자들에게 물어보는 것도 필요할 겁니다.제 답변이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나중에 물어볼 말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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