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교단설교 5: 감리교회
Publish on February 26,2011홍삼열
“감리교회(Methodist Church)" (빌립보서 2:12-16)1992년에 출품된 "A River Runs through It" (강은 그곳을 통해 흐른다)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에 나오는 대화중 감리교인에 대해 설명하는 아주 흥미로운 부분이 있는데, 주인공의 형인 Norman이 장로교 목사인 자기 아버지를 회상하면서, 아버지가 감리교인에 대한 이런 평가를 내리는 것을 떠올렸다. “얘야, 감리교인이 누군줄 아느냐? 감리교인은 글을 읽을 줄 아는 침례교인(Baptists who could read)이란다. 이것이 얼마나 정확한 표현인지는 모르겠다. 왜냐하면 요즘 감리교인들보다 훨씬 더 똑똑한 침례교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적어도 사람들이 감리교회에 대해 가지는 기본 인상을 말해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감리교회를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교회로 알고 있는 것이다.감리교회와 침례교회는 상당 부분 비슷하다. 예를 들어, 이 두 교단은 교회에서 평신도의 역할을 강조하여 그들의 위상을 높이고, 성경을 신앙의 가장 중요한 표준으로 알고 따르며, 미국선교의 초창기에 부흥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급속한 교회부흥을 일으킨 교단들이다. 그러나 차이점도 많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침례교인들은 성경을 신앙의 유일한 권위로 생각하여, 성경에 있는 것은 하고 없는 것은 절대 하면 안 된다는 문자주의적 입장을 고수하는데 반해, 우리 감리교인들은 성서의 권위 아래에 이성과 전통과 경험의 역할을 존중하며, 균형있는 신앙생활을 강조한다. 이런 감리교회의 특징은 초기 영국의 감리교회 운동에서 이미 발견되고 있는데, 18세기 영국에서 감리교 운동을 시작한 존 웨슬레는 신앙의 합리성을 존중하던 사람이었다. 그가 태어나기 전 세대, 즉 17세기 유럽의 모습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유럽은 종교전쟁으로 쑥대밭이 되어 버린 상태였다. 특히 30년 전쟁으로 인해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종교문제 때문에 양쪽으로 갈리어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처음에는 가톨릭을 신봉하는 프랑스와 개신교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독일이 싸움을 시작했지만, 이 싸움이 곧 유럽 전역으로 퍼져서, 유럽 전체가 30년에 걸쳐 서로 싸우는 바람에, 대규모의 희생을 치렀다. 이 전쟁의 피해가 얼마나 엄청났던지, 당시 유럽 전체 인구의 1/3이 죽었다고 한다.이런 전쟁의 피해를 겪고 나자, 사람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전쟁을 하게 되면 끝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싸우는 양쪽이 모두 망할 지경이 되지 않으면, 절대 전쟁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종교전쟁에 진절머리가 난 유럽인들은 이제부터는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종교 때문에 싸우는 일은 절대 하지 않기로 서로 협정을 맺었다. 그것이 1648년에 체결된 웨스트팔리아 조약이다. 존 웨슬레는 이런 전쟁이 끝난 다음 세대, 즉 이성을 존중하는 18세기의 사람이다. 18세기의 특징은 그래서 종교적 관용과 이성과 상식을 중요시하고, 이성에 반대되는 광신을 경계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때 많은 철학자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칸트나 흄이나 헤겔 같은 사람들이 이 이성의 시대에 활동하던 사람들이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에서 자란 웨슬레는 자연히 신앙에서 이성의 역할을 존중하였고, 상식을 무시하는 광신의 형태를 경계했던 것이다. 또 하나 웨슬레가 이성을 존중하게 된 배경은, 그가 자란 성공회 전통 때문이었다. 제가 지난번에 언급한 대로, 영국 성공회는 신앙의 세 가지 주요 원리들이 있었다. 그것은 성서와 이성과 전통이었다. 웨슬레는 영국 성공회에서 자라서 성공회 신부가 된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세 가지 신앙의 원리들을 중요시 여겼고, 성경을 읽거나 신앙의 문제들을 해결할 때, 성서와 전통과 이성의 원리를 조화롭게 적용하였다.그러나 그는 이런 성공회의 전통에 만족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당시 성공회는 너무 이성주의로 빠져서, 개인적인 신비체험을 교회에서 몰아냈기 때문이었다. 웨슬레는 신앙생활에서 개인적인 체험을 무시하면,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를 잃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위의 세 가지 성공회 원리에 "경험"을 덧붙여서, 4가지 신앙의 원리를 제시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감리교회는 성공회 전통에 따라 성서와 이성과 전통을 중요시하지만, 그것에 머무르지 않고, 개인의 체험을 동시에 중요시해서, 감리교의 독특한 4개의 신앙의 원리를 확립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서와 전통과 이성과 경험의 4가지 원리이다.존 웨슬레가 이렇게 경험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그가 런던의 Aldersgate 가에 있는 어느 모라비안 교회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릴 때 성령을 체험한 사건이었다. 그 때가 수요일 밤이었는데, 그 교회에는 마침 목사가 없어서, 어느 평신도가 루터가 쓴 로마서주석의 서문을 읽고 있었는데, 그것이 웨슬레가 성령을 체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루터가 평생 외쳤던 진리는, 우리는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이었다. 웨슬레는 이 원리를 이미 잘 알고 있었고, 그 원리에 철저히 동의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성공회의 신부였고,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신약을 가르치던 교수였다. 당연히 루터의 칭의의 교리,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문제는 무엇이었나? 문제는 이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머리에 있는 지식이 가슴에까지 내려오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그는 구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지만, 그의 가슴으로는 그것을 몰랐고, 그래서 그의 삶에는 전혀 구원의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그러나 그가 루터의 로마서주석 서문을 읽는 것을 들었을 때, 그는 난생 처음으로 구원의 지식이 그의 가슴으로 내려와서,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된 것이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이렇게 일기에 적어놓았다. "저녁 8시 45분경,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신다는 것을 들었을 때, 나는 나의 마음이 이상스럽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주이심을 믿는 믿음이 생겼다. 그리고 그가 내 죄, 나 자신의 죄를 가져가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얻었다."이 경험을 통해 웨슬레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의 삶은 구원의 기쁨이 넘치는 삶이 되었으며, 이제부터는 아주 열정적으로 설교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사회에서 소외받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며 그들을 돕는 생활을 하던 것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예전과 다름없이 그는 계속 감옥을 심방하고, 병든 사람들을 돕고, 노예제도를 금하는 설교를 했다. 그는 계속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는 모범 기독교인이었다. 따라서 이 올더스게이트에서의 경험이, 우리가 보통 말하는 "회심의 경험"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했을 뿐만 아니라, 이때까지 계속 주님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사는 모범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이미 모범 기독교인이었고 훌륭한 신자였다. 그러나 그에게 없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구원의 확신이었다. 그가 오랫동안 목사생활을 했어도 이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의 사역에 열매가 없었던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웨슬레가 이 수요일 밤에 성령을 체험하고 나서는, 그에게 구원의 확신이 생겼고, 그는 이제부터는 좋은 기독교인의 수준을 넘어서, 온전한 기독교인이 되었던 것이다. 100% 완전히 기독교인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성령체험을 통해, 웨슬레는 감리교회를 시작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영국 사회와 미국 사회를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대단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이제 웨슬레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 하고, 감리교회의 특징들을 살펴보자. 여러 가지 특징들 중에 세 가지를 말씀드릴 수 있는데, 첫째는 평신도에게 설교권을 준다는 것이고, 둘째는 Wesleyan Quadrilateral이라고 불리는 4중 신앙의 원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고, 셋째는 칭의와 성화를 함께 강조한다는 점이다.첫 번째부터 살펴보자. 감리교회는 평신도에게 설교권을 준다. 현재 지구상에 있는 많은 교단들 중, 평신도에게 설교권을 주고 그들이 교회를 치리하게 하는 교단은 두 개밖에 없다. 침례교회와 감리교회만 그것을 허락한다. 침례교회는 당연히 평신도에게 설교권과 치리권을 준다. 왜냐하면 침례교회는 원래 개교회 중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개 교회가 각자 설교자를 선택할 권리가 있어서, 대부분의 경우 자기 교인들 중에서 설교와 목회의 은사가 있는 사람을 설교자로 선택해서 목회를 맡기기 때문이다. 그런 고로 침례교회에서는 신학교를 나와야지 목사가 된다는 원칙이 없다. 설교와 목회의 은사가 있는 평신도면 누구나 목사가 될 수 있다. 신학교육은 일단 목사가 된 후에 받아도 되는 것이다. 한편 감리교회에는 평신도 설교자를 이용하여 전도하고 교회를 세우는 전통이 웨슬레 시대부터 있었다. 웨슬레가 영국에서 감리교운동을 시작했을 때, 교회를 운영하는 기본 방법이 속회제도였는데, 이 속회제도를 통해 평신도 설교자들이 배출되었던 것이다. 당시 속회제도에서는, 모든 교인은 매주 속회에 참여해야 했고, 속장은 요즘 목사가 하는 일, 즉 설교와 심방과 상담의 일을 도맡아 했다. 이런 이유로 감리교회에서는 초창기부터 평신도 설교자들이 활동했고, 현재 연합감리교회에서도 이 제도를 계속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정식 full time 목사를 가질 수 없는 교회에서는 평신도 설교자가 파송되어 그곳에서 목회를 하게 하고, 목사가 있는 교회에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평신도에게 설교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런 취지로 우리 감리교회에서는 목사가 출타하게 되는 경우, 장로님들이나 권사님들이 설교를 할 수 있는 것이다.이런 평신도 설교제도는 아주 효과적인데, 그 대표적인 예가 19세기 초 미국이 서부개척을 할 때 이 제도가 전도의 주요 도구로 사용된 예이다. 사람들이 동부에서 중부로 그리고 서부로 계속 진출을 할 때, 주요 기독교 교단들은 이들을 따라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갑자기 넓어진 영토를 담당할 성직자들의 수가 턱없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신도 설교제도를 가지고 있는 침례교회와 감리교회만은 예외였다. 이 두 교단은 이들을 따라가면서 곳곳에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왜? 설교할 수 있는 평신도는 무궁무진했기 때문이다. 감리교와 침례교는 설교와 목회의 은사가 있는 평신도들을 발굴하여, 서부로 이동하는 사람들을 따라다니며 교회를 개척하게 했다. 이런 이유로 미국 전역에, 심지어 사람들이 별로 살 것 같지 않은 산골에도 침례교회와 감리교회는 있지만, 다른 교단 교회들은 없는 이유가 바로 이 평신도 설교제도 때문이다.두 번째 감리교회의 특징은 웨슬리의 4중 신앙의 원리, Wesleyan Quadrilateral이다. Quadrilateral이란 수학에서 사용되는 단어로 "사변형"이란 말인데, 이것이 웨슬레의 4중 신앙의 원리에 적용된 것은 20세기 웨슬레 신학자인 Albert Outler박사에 의해서였다. 이 단어는 감리교가 귀중히 여기는 4가지 신앙의 권위들을 지칭하는 말인데, 그것은 곧 성서와 전통과 이성과 경험이다. 이 4중 신앙의 원리는 영국 성공회의 소위 “세발 달린 의자”의 개념의 연장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성공회에서 성서와 전통과 이성을 중요시하는 것에 더하여, 웨슬레는 개인의 경험을 중요시해서, 성공회의 3가지 원칙을 4가지로 확장시킨 것이다. 웨슬레가 성공회의 3가지 원칙에 만족하지 않고 경험을 첨가한 이유는, 아무리 우리가 이성적으로 깨달은 것이 있다고 해도, 아무리 성경말씀을 많이 알고 아무리 교회전통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해도, 내가 직접 하나님을 경험하지 않으면, 그런 것들이 다 소용없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지식의 차원에 머물면, 실생활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웨슬레는 성서와 이성과 전통에 못지않게, 개인의 신앙체험을 중요시 여기는 것이다.자 이제 이 4중 복음의 원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간단한 예를 들어 설명드리겠다. 우리가 유아세례를 행해야 하냐 하지 말아야 하냐고 물어볼 때, 우리 감리교인들은 위의 4가지 원리를 하나씩 적용한다. 첫째는 성경이다. 성경이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 성경을 보니까, 명확히 시행하라거나 시행하지 말라거나 가부간에 전혀 언급이 없다. 우리 감리교회 측에서 생각할 때, 유아세례를 지지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성경구절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침례교회에서는 그것을 부정하니, 성경만으로는 판결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두 번째 원리를 적용하는데, 그것이 전통의 원리이다. 우리가 교회 전통을 살펴보면, 초대교회 때부터 유아세례를 시행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초대교회는 사실 유아세례를 허용한 것뿐만 아니라, 반드시 유아세례를 시행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면 이성의 입장에서 볼 때는 어떤 결론이 나오는가? 세례가 죄사함의 은총과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받는 중요한 수단이라면, 그런 은총은 어른에게만 아니라 당연히 아이들에게도 주어져야 하는 것이 합리적인 생각이다. 그것이 공평한 것이다. 어른에게 필요한 구원의 은총이 어찌 아이들에게는 필요하지 않단 말인가? 마지막으로 우리의 경험은 어떻게 말하는가? 경험상 우리는 아이들이 세례받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세례를 받으면, 우리는 의식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그 아이들을 주님의 말씀 안에서 기르게 될 확률이 더 많아지고, 아이들은 교회에서 꾸준히 기독교 교육을 받게 되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자 이렇게 4가지 원리에 비추어 생각해 볼 때, 우리의 결론은 무엇인가? 우리 감리교회는 유아세례를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유아세례는 성서적이고, 이성과 전통과 경험의 원리에 부합하기 때문이다.자 이제 감리교회의 세 번째 특징으로 넘어가자. 감리교회는 칭의와 성화, 즉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되는 것(justification)과 실제로 거룩하게 되는 것(sanctification)을 동시에 강조한다. 무엇이 가장 좋은 기독교의 형태인가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두 가지 입장이 있어 왔다. 하나는 칭의를 강조하는 것이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선한 행위를 하는 것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잡는 것,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루터교에서 이런 입장을 견지하는데, 이들은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믿음이고, 그밖에 다른 것은 전혀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사람의 행위가 좋건 나쁘건 상관없이 예수를 믿는 믿음만 있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은 칭의, 즉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지, 진짜 우리가 의롭게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반면에 가톨릭 쪽에서는 이런 식으로 칭의만 강조하면, 사람이 도덕 불감증에 빠지고 개인적인 책임을 회피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사람이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것이라면, 꼭 선하게 살 필요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것은 사랑없는 믿음은 가짜이고, 선행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에 이르기까지 매일매일 거룩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톨릭에서 말하는 성화의 교리이다.그러면 우리 감리교는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 우리는 칭의와 성화 둘 다 믿는다. 칭의가 옳으냐 성화가 옳으냐고 따지지 않고, 둘 다 중요하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 안에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러 오셨는데, 이 회복의 과정은 칭의의 은총과 더불어 성화의 은총도 함께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하늘의 평안을 허락하시는 칭의의 은총과 더불어, 우리가 매일 매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을 향하여 거룩해지는 성화의 은총이 있어야,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읽으신 본문 말씀 빌립보서 2:12절에 보면, 한번 칭의의 은총을 받아 구원받은 것에 안심하지 말고,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계속 완성시켜 가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우리 감리교회에서는 이렇게 칭의와 성화를 모두 강조하는데, 물론 이렇게 하는 것은 칭의나 성화 한쪽에만 신경쓰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왜냐하면 이 둘 사이에 균형을 잡으면서 중도노선을 걷는 것은 양쪽으로부터 공격받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둘 사이에 균형을 잡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을 반영하고, 또 실제로 이 세상의 삶을 반영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왜냐하면 어떤 살아있는 유기체든지, 그것이 생물이든지 교회와 같은 단체이 든지, 두 극단 사이에 균형을 잡고 있어야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쪽으로 기울어져서 균형이 깨어지면, 유기체는 병들게 되거나 무너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우리 감리교회에서는 그래서 균형을 대단히 중요시 여긴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기 위해 대단히 노력을 많이 한다. 그래서 감리교회 안에는, 칭의를 강조하는 보수주의자들도 있고, 성화를 강조하는 진보주의자들도 있고; 영혼구원을 강조하는 전도파도 있고, 사회구원을 강조하는 사회운동가도 있고; 또 개인의 믿음을 중요시하는 기도의 일꾼들도 있고, 거룩한 사회를 건설하려는 정치가들도 있는 것이다. 저는 이점이 감리교회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사상과 입장을 모두 포용해서, 균형있는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 교단, 이것이 감리교단인 것이다.오늘 우리는 감리교회의 세 가지 특징을 살펴보았다. 1) 감리교회는 평신도 설교운동을 지지하면서, 평신도의 위상을 높인다. 2) 감리교회는 웨슬레의 4중 신앙의 원리를 받아들여서, 신앙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3) 감리교회는 칭의와 성화를 모두 강조함으로써, 믿음과 행위가 언제나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산타클라라 교우 여러분, 이런 감리교회의 특징들을 잘 기억하시고 잘 실행하셔서, 보다 나은 감리교인, 보다 나은 주님의 제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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