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교단설교 7: 성결교회
Publish on March 08,2011홍삼열
“성결교회(Holiness Church)" (데살로니가전서 5:23-24)오늘은 기독교 교단설교 시리즈의 마지막 7번째 시간으로 성결교회의 교리와 특징들을 살펴보는 시간을 갖겠다. 현재 배이지역에 여러 성결교회들이 있는데, 성결교회는 여타 교단들과는 달리 한국에서 생긴 교단이란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감리교와 장로교의 경우는 19세기 말에 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가서 교단을 세우고 그들이 주도가 되어 한국에서 선교사업을 진행시켰는데 성결교의 경우는 교회역사 초기에 외국 선교사들이 뒤에서 보조만 했지 실제로 교단을 세우고 운영을 한 것은 한국인들이었다는 독특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한국에서 시작된 성결교회의 시초는 1907년 5월 30일이다. 교단의 역사가 1885년에 시작된 감리교와 장로교에 비해 20여년 정도 늦는데, 1907년에 김상준과 정빈 두 사람이 일본 동경성서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후에 종로 염곡, 지금의 무교동에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설립하고 성결교회를 시작하었다. 해외 선교사가 들어와서 교회를 조직한 것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있는 사람들이 자체적으로 교회를 시작한 것이어서, 초창기에는 이들이 부흥회나 노방전도를 통해 사람들을 예수 믿게 하면, 그들을 성결교인이 되게 하는 대신에 다른 개신교회들에 소개시켜주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전도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급속히 늘어나게 되자, 더 큰 전도관을 마련해서 자리를 옮겨갔고, 그 후 계속 성장해서 1921년에 성결교단을 조직하기에 이르게 된다. 1930년도 초에는 대대적인 부흥운동을 통해 성결교단이 급성장하게 되었고, 그 후 꾸준한 성장을 거듭해서 현재 한국의 개신교 교단들 중 장로교와 감리교 다음으로 3번째로 큰 교단이 되었다.그러면 김상준과 정빈을 비롯한 초기 성결교의 선구자들이 해외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체적으로 모든 일을 진행했을까? 그렇지는 않다. 이들이 처음 성결교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성결교 신학을 공부하게 된 것이 일본에서였는데, 1901년에 미국인 선교사 카우만(Cowman)과 일본인 나카다 쥬지가 설립한 동양선교회, 그리고 1905년에 카우만과 길보른(Gilbourn)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동경성서학원을 통해서 성결교가 전해졌다. 김상준과 정빈이 이 단체들에서 신학을 배워 한국에 들어왔고, 중요한 시점마다 이 단체들이 지속적으로 재정지원을 해서 한국내의 성결교회가 자라게 된 것이다. 그러면 일본에 있던 이 동양선교회와 동경성서학원의 신학적 뿌리는 어디일까? 19세기 후반 미국에 일었던 근대 복음주의 부흥운동, 특히 웨슬레 계통의 성결운동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 성결교회의 시작에 대해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성결교는 일본에서 공부한 한국인들이 주도적으로 시작한 자생적 교회이지만, 신학과 재정은 많은 부분 일본과 미국에서 제공되었다고 보면 된다.이제 역사적 설명은 그만하고, 성결교회의 기본 신학인 4중복음의 교리에 대해서 살펴보자. 성결교회는 자신의 핵심교리로 4가지를 말하고 있다. 첫째로 예수님을 믿고 거듭남을 통해 죄성을 벗어야 한다는 중생의 복음, 둘째로 성령 세례를 받아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성결의 복음, 셋째로 말씀과 기도를 통해 몸의 치유를 받는다는 신유의 복음, 넷째로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확신하며 전도와 선교에 열심을 내야 한다는 재림의 복음이다. (오늘 읽으신 데살로니가전서 5:23절에 이 내용이 요약되어 나온다. 하나님이 성도를 구원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영과 혼과 몸을 건강하게 보전하신다는 내용이다.) 이것을 한 가지씩 설명드리겠다. 중생(regeneration)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는 것을 의미한다. 본래 의롭지 못한 사람이 법적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으로, 신학적인 용어로 칭의(justification)라고 부른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우리가 객관적으로 봐서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해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기 때문이란 말이다. 요한복음 3:5절이 이것을 설명해준다. 구원을 갈망하여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또 요한복음 5:24절에 보면,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되며, 모든 죄 사함을 받고 일시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된다고 말씀했다. 그래서 성결교회에서는 이 중생을 “기독교의 입문이며 천국시민의 자격을 갖추는 유일한 도리”로 규정하고 있다.둘째는 성결(sanctification)의 복음이다. 사도행전 1:4-5절,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주님을 믿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은 거듭난 상태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제2의 축복인 성결로 이어져야 한다. 즉 구원 받았으면 당연히 삶의 선한 열매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결교회에서는 통계를 낼 때마다 “중생자 몇 명, 성결자 몇 명”이라고 따로 표시를 할 정도로 성결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성결교에서 말하는 이 “성결”은 우리 감리교에서 말하는 성결 혹은 성화와는 개념적인 차이가 있다. 둘 다 성도의 거룩한 삶을 지칭하는 단어들이지만, 성결교에서 말하는 성결은 성령세례 혹은 불세례를 통한 성결을 말한다. 성령세례를 받아야 성령의 선한 열매들을 맺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감리교회에서는 이렇게 성령세례로써의 성화/성결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 감리교회에서는 신자가 거듭남의 체험을 할 때 성결의 은혜도 같이 받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우리가 거듭남의 체험을 할 때 그때부터 성결의 과정이 시작되는 것이지, 중생 이후의 어느 한 시점에 성령세례를 받을 때 성결의 은혜가 내리는 것으로는 믿지 않는 것이다.또 한 가지 성령세례에 관해 우리가 알아둘 필요가 있는 것은 이 “성령세례”라는 용어가 오순절교회에서도 똑같이 사용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오순절교회를 다룰 때, 오순절교회의 특징 중 하나로 성령세례를 설명했는데, 성결교회의 성령세례와 오순절교회의 성령세례는 같은 의미일까? 그렇지 않다.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만 서로 의미하는 바가 다르다. 오순절 교회에서는 성령세례를 은사위주, 특히 방언위주로 설명하는데 반해, 성결교회에서는 성령세례를 내적인 성결의 은혜, 그리고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9가지 성령의 열매와 같은 종류의, 신자의 삶에 나타는 삶의 열매로 설명을 한다. 그래서 전통적인 성결교회에서는 오순절 식의 방언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세 번째는 신유(divine healing)의 복음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중생의 은혜로 구원하시고 성결의 은혜로 거룩하게 하셨다면,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그 거룩의 상태를 유지하며 살 수 있도록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육신이 병이 들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주시고 치유해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면 병이 낫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병들었을 때 기도만 하고 의학적인 처방을 거부하라는 말은 아니다. 의사들도 하나님의 지혜로 병을 다스리는 능력을 받은 사람으로 알고, 신자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의사의 치료를 함께 받아야 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재림(second coming)의 복음이다. 성결교에서는 구약성경의 중심이 그리스도의 성육신 (즉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오시는 것)을 예언하는 것이라면, 신약성경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을 예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예수님의 공중재림과 지상재림을 가르친다. 즉 마지막 때가 오면 7년 대환란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 환란 직전에 믿는 사람들이 모두 하늘로 들려 올려져서 공중으로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것이고, 이때 휴거하지 못하고 지상에 남겨진 사람들이 땅에서 7년 환란을 겪은 후에, 예수님께서 휴거한 사람들과 함께 하늘에서 지상으로 다시 한 번 재림하심으로써 이 땅에 1000년 왕국이 시작된다는 것이다.성결교회는 이렇게 예수님의 재림을 믿고 있기 때문에, 종말론적인 신앙생활을 할 것을 가르친다. 즉 당장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실 때 그분을 기쁨으로 맞이할 준비를 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예수님 맞을 준비를 하며 사는 것일까? 그것은 주님 앞에 떳떳한 성결한 삶을 사는 것이다. 신앙의 양심에 부끄럼 없이 사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죽어가는 영혼들을 되도록 많이 구원하기 위해,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열심히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이다.이상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성결교 4중복음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러면 이것이 다른 개신교단들, 특히 우리 감리교회와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우선 첫째와 둘째 사항인 중생과 성결의 복음은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레에게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웨슬레는 칭의와 성화를 감리교 신학의 두 중심 기둥으로 설명했는데, 성결교회에서는 이 웨슬레의 개념을 그대로 이용하여 성결교의 신학의 두 토대로 삼은 것이다. 단 위에서 설명드린대로 성결을 성령세례를 통한 성결로 본다는 점에서는 감리교와 차이가 난다. 그러면 나머지 두 가지 신유와 재림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이 두 가지는 19세기 미국의 복음주의 부흥운동에서 나온 것이다. 19세기 후반의 미국 복음주의운동은 신유운동과 재림사상을 강조했는데, 미국의 성결운동 내에 이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그룹이 만국성결연맹이고, 이 단체가 일본의 동양선교회를 통해 한국성결교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래서 한국 성결교회의 신학적 뿌리가 어디에 있느냐고 할 때, 둘을 들면 된다. 하나는 감리교를 시작한 존 웨슬레의 신학이고, 또 하나는 19세기 후반의 미국의 복음주의 부흥운동인 것이다.이상 우리는 성결교회의 첫 번째 특징으로 4중복음을 살펴보았는데, 이제부터는 두 가지 더 성결교회의 특징을 말씀드리고자 한다. 하나는 성결교회는 개인구원을 강조한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성결교회는 실천위주, 성결위주의 신앙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우선 개인구원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자. 성결교회의 지론은 부흥운동의 출발은 개인의 철저한 죄에 대한 영적각성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먼저 교역자가 심령의 부흥을 경험할 때 교회에 부흥이 일어나고, 신자 개인이 영적 부흥을 경험할 때 사회가 변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성결교회는 전통적으로 문화나 사회나 정치 변혁에 대한 관심보다는 인간의 개인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영혼구원에 전심전력을 기울인다.성결교 잡지인 [활천] 1932년 3월호에 이명직목사가 쓴 글에 벌써 이런 생각이 잘 표현되어 있다. “오늘날에 있어서 신자가, 교역자가, 교회가 너무 현대를 좋아해서, 심지어는 사회화를 부르짖고 있다. 사회보다 뒤떨어졌다고 탄식한다. 교회가 무엇을 표준하여 사회보다 뒤떨어졌다고 하는가? 사회보다 뒤떨어져도 하나님께만 떨어지지 않으면 두려울 것이 없고, 사회보다 앞선대도 지옥으로 앞서 들어가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큰 문제라 할 것이다.” 우리 감리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런 성결교회의 노선은 너무 순진하고 현실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진짜 개인의 영혼구원에 집중을 하여 개인이 예수 영접하고 새사람이 되면 사회도 자동적으로 변하게 될까? 한국교회 역사를 볼 때,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고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던 것을 보게 된다. 1903년 원산에서 감리교회가 부흥운동의 불을 붙이고 1907년 장로교의 길선주 목사가 이것을 이어받아 평양에서 부흥운동을 일으킨 사례를 보면, 실제로 개인 영혼이 은혜 받고 구원받았을 때, 가정이 변하고 동네가 변하고 사회가 변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사람들이 회개할 때, 술과 도박을 끊고, 더 이상 기생집에 드나들지 않게 되고, 첩을 둔 사람들이 첩을 돌려보내고, 몰래 도둑질 한 사람들이 도둑질 한 것을 돌려주고, 빚 안 갚고 도망 다니던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가 빚을 갚고, 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나서 서로 죄를 고백하는 모습들이 선교사들의 기록에 그대로 남겨져 있다.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지역의 모습이 이렇게 변하는 것이다.그런데 길게 봐서 개인구원에만 집중하는 것이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는 것 역시 우리가 역사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사실이다. 해방 이후 한국교회의 대부분은 비정치화의 노선을 걷고 개인영혼 구원에만 초점을 맞추어 사회, 정치, 문화에 대해 신경을 꺼버린 상태에서 수십 년을 지나게 되는데, 그 결과 어떻게 되었나?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라는 주님의 명령을 철저히 망각하고 교회만 키웠다. 세속의 가치가 교회에 그대로 적용되어서, 교회 안에서도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공장에서 일꾼들을 착취하든 말든 교회에 헌금 많이 하면 대접받고, 교회 주변에서 어떤 사회 문제가 발생하든 거기에는 신경을 끄고 열심히 전도에만 열중하면 되는 거고, 돈이 있을 때 교회 주변에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대사회적인 책임을 수행할 생각은 하지 않고 기도원 사고, 묘지사고, 땅 사고... 이런 교회의 모습에 현대인들은 개신교에 대해 실망하며 점점 교회를 떠나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그러면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영혼구원에 힘써야 할까, 사회구원에 힘써야 할까? 이것은 사실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둘 다 해야 하는 사항이다. 성경은 이 두 가지를 다 강조하고 있다. 사도행전 16:16절에 보면 구원받기를 원하는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라고 말씀하고 있고, 요한삼서 1:2절에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고 했다. 개인 영혼이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이 먼저다. 그래야 가정도 구원받고 사회도 구원받고 범사가 잘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런 개인구원에 관한 말씀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마지막 날에 심판대 앞에서 양과 염소가 갈린다고 되어 있는데, 어떤 기준에서 양과 염소가 갈리는가? 예수 믿고 개인 영혼이 구원받으면 양이 되고 아니면 염소가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사회적인 관심이 없는 사람,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 홈리스, 외국인, 병자, 죄수, 가난한 사람, 이런 사람들을 돕지 못하는 사람이 염소가 되어서 지옥에 가는 것이고, 이런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며 뭔가를 하는 사람이 양이 되어서 천국에 간다고 되어 있다. 우리는 개인구원이나 사회구원 하나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두 가지를 함께 추구하는 균형잡힌 신앙생활을 해야, 건강한 교회, 책임있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그 다음 우리는 성결교회의 특징으로 실천위주, 성결위주의 신앙관을 들 수 있다. 성결교회라는 이름에 이미 나타나 있듯이 성결교회에서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의 성결한 삶을 강조한다. 성결교회가 한국에 처음 도입될 때, 이미 한국에는 부흥운동이 한창 일어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체험을 하고 영혼이 구원받는 체험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결교회는 이보다 더욱 강력한 부흥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믿었다. 즉 영혼의 부흥운동으로 그쳐서는 안 되고 실제로 성결운동으로까지 이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성결교회에서는 처음부터 고도의 윤리의식을 요구했다. 세상 사람들과 별반 차이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뚜렷이 구분되는 성별된 삶을 살도록 요구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성결교인들은 술 안 먹고, 담배 안 피우고, 댄스장에 안 가는 독특한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겉으로 보이는 현상에 불과한 것이고, 실제 성결교에서 강조하는 것은 성령의 은혜로 내면이 거룩하게 변하는 것이다. 내면이 성결하게 변하면, 이 성결이 외부의 행동으로도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여러분들 솔직하게 대답해보시기 바란다. 이 자리에 많은 분들이 나와 앉아 계신데, 여러분들이 사회에서 생활하실 때, 다른 안 믿는 사람들과 뭐가 다른가? 뭔가 다른 점이 있는가?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볼 때,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의 구체적인 차이점을 느낀다고 생각하시는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사람은 진짜야. 우리와는 다른 차원의 깨끗한 삶을 살고 있어!” 여러분은 이런 말을 듣는가? 아니면 “야, 너나 나나 뭐가 다르냐? 술 먹을 때 같이 먹고, 속여서 돈 벌어야 할 때 똑같이 속이고, 남 욕할 때 똑같이 욕하고, 교회 다닌다고 뭐가 다르냐!” 이런 평가를 듣지는 않는가? 우리는 성결교회로부터 성결의 중요성을 배워야 한다. 진실한 신앙은 구체적 실천으로 이어져야 하고 내면의 성결은 실제 외면의 성결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 성결교회의 가르침이다.이제 이것으로 신년 교단시리즈를 마치게 되는데,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말씀드리고 오늘 설교를 마치고자 한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다르게 창조하셨는데, 저는 그것이 다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하신 것으로 믿는다. 무슨 이유일까? 저는 하나님이 다양성을 좋아하신다고 생각한다. 한번 여러분의 가족을 생각해보시라. 여러 자녀들이 있는데, 만일 그들이 똑같이 생기고, 똑같이 생각하고, 하는 짓도 똑같다고 생각해보라. 그들 사이에 전혀 차이가 없다고 생각해보라. 그렇게 되면 좋겠는가? 되게 재미없을 것이다. 우리 집을 예로 들면, 저에게는 근서와 예린이가 있다. 그 둘을 비교하면 너무나 다르다. 생각하는 것도 다르고 하는 짓도 다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둘이 그렇게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저는 둘을 똑같이 사랑한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둘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저는 그들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우리를 더 사랑하신다고 생각한다. 교단들마다 서로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행동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찬양을 받으시고 다양한 방법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음생활의 다양성을 좋아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저는 우리들이 (이단을 제외하고는) 다른 기독교 교단들을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으로 여기고, 그들을 형제자매로 사랑하기를 바란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우리는 사랑으로 협력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아름답게 건설하게 될 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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