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칼럼 30 페이지

본문 바로가기

목양칼럼

Total 218건 30 페이지
  • 44
    우리 교회는 어떤 절기를 지키고 절기들이 바뀔 때 왜 다른 색깔을 사용하나요? Publish on October 14,2011홍삼열
    제가 얼마 전에 이런 질문을 받았다. 교회에는 여러 가지 절기가 있는데 어떤 것들이 있고, 또 계절이 바뀔 때 아니면 중요한 행사 때 제단장식의 색깔이 바뀌고 목회자가 목에 드리우는 스톨(stole) 색깔이 바뀌는데 그 의미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었다.1. 우선 교회에서 지키는 절기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드린다. 1) 교회의 절기는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는 대강절(待降節, Advent) 혹은 대림절(待臨節)로 부터 시작한다. 대강절은 성탄일 직전의 4번의 주일을 포함한다. 이 기간 동안 성도들은 내면생활을 정돈하고 영혼을 정화시키도록 노력한다. 구세주를 영접하기 위한 준비기간인 것이다. 2) 그 다음에 성탄절(聖誕節, 12월 25일)이 오는데 기독교 절기 중 부활절과 함께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절기이다. 3) 그 다음으로 주현절(主顯節, Epiphany, 1월 6일)이 이어지는데, 성도들은 이 절기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것을 기념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예수님의 탄생과 요단강에서의 세례 받으심 그리고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첫 기적을 행하신 것을 통해 하나님의 현현을 기념한다. 4) 그 다음에 사순절(四旬節, lent)이 이어지는데, 성탄절 이전의 준비기간으로 대강절이 있는 것처럼 부활절 이전에 40일간의 준비기간으로 지키는 것이 사순절이다. (이때 6번의 주일은 40 숫자에서 제외된다) 이 절기는 재를 이마에 바르며 죄를 회개하는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로 시작되며, 이 기간 동안 금식을 비롯한 자기 절제와 회개를 하며 주님의 고난과 부활을 준비한다. 부활절 직전에 오는 주일은 종려주일 혹은 고난주일로 불리는데,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어 예수님을 환영한 것을 기념하는 것이고, 또 그 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지킨다. 5) 그 다음에 우리가 지키는 것이 부활절인데 부활절은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신 날을 축하하는 절기로서 매년 날짜가 다르다. 왜냐하면 춘분을 기준으로 부활절이 계산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춘분이 지난 만월(滿月) 후 첫째 주일”이 부활주일이 된다.6) 부활절 다음으로 나오는 절기는 성령강림절 혹은 오순절(五旬節)인데, 부활주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을 말한다. 이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체험을 하고 세상에 나가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연중 성령강림절이 가장 긴데 이 절기가 추수감사절 때까지 이어지고 그 후에 대강절로 연결된다.그래서 절기의 기간을 정리하면, 대강절은 4주, 성탄절은 12일, 주현절은 1월 6일부터 재의 수요일까지, 사순절은 그로부터 부활절까지 40일, 부활절은 부활주일부터 성령강림주일까지 50일, 성령강림절은 이때부터 대강절까지 이어지면서 매년 같은 사이클이 반복된다.2. 이제 그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자. 왜 우리 교회에서는 절기 때마다 강단장식과 스톨의 색깔이 달라지는가? 그 이유는 성도들이 색깔을 통해 각 절기의 기본정신을 이해하고 느끼도록 돕기 위함이다. 1) 우선 흰색/금색은 완전, 기쁨을 상징한다. 성탄절, 부활절, 추수감사절 등 축제의 기간에 사용된다.2) 붉은색은 성령의 불과 빛과 순교의 피를 상징한다. 성령강림주일이나 결혼식 또는 고난주간에 사용된다.3) 보라색은 슬픔과 회개와 내적 성찰을 표하는 것으로 대강절과 사순절에 사용한다.4) 초록색은 대자연의 푸른색을 의미하는 것으로 양육, 선교 등을 나타낸다. 특별한 일이 없는 기간에 즉 일반적인 상황에 사용된다. 예를 들어 주현절 기간 혹은 성령강림주일 이후 대강절까지.5) 검은색은 죽음과 슬픔을 상징한다. 성금요일이나 장례식에 사용한다. 이상 절기와 색깔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드렸는데 한 가지 부연설명을 드리고 싶다.  위에 설명된 사항들은 성경에서 반드시 시행하라고 명령한 내용이 아니다. 교회 전통이 우리 신앙생활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여 오랜 기간동안 만들어낸 형식이다. 그래서 반드시 이것을 따라야 한다거나 이것을 절대 따르지 말아야 한다는 양쪽 극단의 입장은 피해야 한다.  교회에서 여러가지 색깔의 장식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교회마다 생각이 다르다. 어떤 교회에서는 그런 장식들이 옛날 가톨릭의 "미신"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예배당에 아무 장식을 하지 않고 간소하게 예배를 드린다. 이런 교회에서는 당연히 목사는 가운을 입거나 스톨을 하지 않는다. 반면에 어떤 교회에서는 복음이 사람들에게 언어의 형식으로만 전달되는 것보다 오감 전체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여 음악과 색깔을 적절히 사용한다. 뭐든지 과하면 문제가 되고 의미를 모르고 무작정 따라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에서 사용하는 예전과 절기와 색깔을 이해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며 예배생활에 임하면 영적으로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Read More
  • 43
    지옥은 없다? Publish on September 03,2011홍삼열
    이 글은 제가 [섬기는 사람들] (2011, September/October, 22)에 기고한 글입니다.--------------------------------------------------------------------------------최근에 지옥의 존재를 부정하는 논조의 [사랑이 이긴다](Love Wins)는 책이 출간되어 교계에 상당한 물의를 일으켰다. 이 책의 저자는 7000명 이상의 교인이 출석하는 교회를 담임하는 Rob Bell이라는 목사인데 그는 보수주의 전통에서 활동하는 사람이어서 보수주의 계열의 교회들의 반발이 아주 거세다. 벨 목사의 주장은 기독교 초기부터 있었던 보편주의(universalism)의 연장인데 기독교 역사에서 계속 이단으로 정죄되어 온 사상이다. 보편주의란 하나님의 공의대신 사랑을 중시하며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이 창조한 사람들을 영원한 형벌의 장소인 지옥으로 보낼 수 있느냐는 의문을 던진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저항과 불신앙을 이기고 결국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에 지옥은 마지막에 없어지거나 텅 비게 될 거라는 논리를 편다. 벨 목사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동안 지구 위에 살았던 대다수의 사람들을 영원한 지옥 불에 가도록 하신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좋은 일을 많이 한 간디는 지옥에 갔을까? 그럴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간디를 비롯한 “선한 사람들”이 비록 이생에서는 예수를 믿지 않아서 지옥에 간다 하더라도 죽은 후에 복음을 들을 기회들을 제공받아서 결국 하나님의 사랑에 설득되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사랑의 하나님이 대다수의 인류를 지옥으로 보낼 수 있는가의 문제는 가족이나 친구의 죽음을 대할 때 우리에게 절실하게 다가온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구원의 은총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천국에 간다는 교리를 무슨 이유에서든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부모나 친구들의 경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마음 아프지만 예수를 안 믿었으니 영원한 불이 타오르는 지옥에 갔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결국에는 하나님이 다 구원해주실 거라고 믿고 좋은 세상에 갔으니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까?문제의 해결은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읽느냐에 달려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에서 이성과 상식에 맞지 않는 부분에는 가차없이 합리적인 해석을 가한다. 예를 들어 벨 목사는 성경의 문자를 표면적인 의미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문자 우상주의(bibliolatry)라고 규정하며 지옥을 비유적으로 해석한다. 지옥은 성경의 표현대로 사후에 영원히 형벌 받는 곳이라기보다는 단순히 하나님의 뜻이 반영되지 않은 이 땅위의 “지옥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경제적 파산 상태, 외로움, 기근, 절망, 죽음, 학살현장 등이 이에 해당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옥에 관한 성경의 기록을 이런 식으로 비유적으로 해석해도 되는 것일까? 만일 지옥을 비유적으로 해석했는데 그것이 문자적으로 사실이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잘못하다가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지옥 불에서 영원히 고생하는 비극을 경험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명백하게 설명된 사항을 자신의 신학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대신, 지옥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겸손하게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안전하다.(마 25:46, 눅 16:23, 계 20:1,15)간디는 지옥에 갔을까? 정직한 대답은 “나는 모른다”일 것이다. 하나님이 아닌 이상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성경의 전체 맥락으로 판단해 볼 때 아마 지옥에 갔을 것으로 추정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를 믿을 기회가 있었는데도 그것을 부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중에 죽어서 보니 하나님이 간디를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을 다 천국으로 들여보내셨다면 너무나 억울한 일일까? 아니다. 그렇게 모두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찬양해야 마땅할 것이다.자유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을 믿지만 그 사랑에도 한계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닫으면 안 된다.(마 7:13-14)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편적 구원이 가능할 수 있겠지만 그건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근본주의자들도 하나님이 마침내 모든 만물을 회복시키시고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둘 필요가 있다.(딤전 2:4, 행 3:21) 결국 하나님이 결정하실 사항을 우리가 관여해서 간디같은 사람은 절대 구원받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사실 우리가 인간의 위치를 망각하는 교만한 태도인 것이다.지옥은 없는가? 필자는 있다고 믿는다. 아직 확신이 없는 분들의 경우에도 지옥의 존재를 믿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생각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지옥행으로 정죄하는 극단적인 태도가 아니라면, 지옥의 존재를 믿고서 하나님의 사랑을 악용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주님이 약속하신 풍성한 구원에 더 잘 이르게 되는 방법일 것이다.
    Read More
  • 42
    기독교 교단설교 7: 성결교회 Publish on March 08,2011홍삼열
    “성결교회(Holiness Church)" (데살로니가전서 5:23-24)오늘은 기독교 교단설교 시리즈의 마지막 7번째 시간으로 성결교회의 교리와 특징들을 살펴보는 시간을 갖겠다. 현재 배이지역에 여러 성결교회들이 있는데, 성결교회는 여타 교단들과는 달리 한국에서 생긴 교단이란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감리교와 장로교의 경우는 19세기 말에 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가서 교단을 세우고 그들이 주도가 되어 한국에서 선교사업을 진행시켰는데 성결교의 경우는 교회역사 초기에 외국 선교사들이 뒤에서 보조만 했지 실제로 교단을 세우고 운영을 한 것은 한국인들이었다는 독특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한국에서 시작된 성결교회의 시초는 1907년 5월 30일이다. 교단의 역사가 1885년에 시작된 감리교와 장로교에 비해 20여년 정도 늦는데, 1907년에 김상준과 정빈 두 사람이 일본 동경성서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후에 종로 염곡, 지금의 무교동에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설립하고 성결교회를 시작하었다. 해외 선교사가 들어와서 교회를 조직한 것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있는 사람들이 자체적으로 교회를 시작한 것이어서, 초창기에는 이들이 부흥회나 노방전도를 통해 사람들을 예수 믿게 하면, 그들을 성결교인이 되게 하는 대신에 다른 개신교회들에 소개시켜주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전도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급속히 늘어나게 되자, 더 큰 전도관을 마련해서 자리를 옮겨갔고, 그 후 계속 성장해서 1921년에 성결교단을 조직하기에 이르게 된다. 1930년도 초에는 대대적인 부흥운동을 통해 성결교단이 급성장하게 되었고, 그 후 꾸준한 성장을 거듭해서 현재 한국의 개신교 교단들 중 장로교와 감리교 다음으로 3번째로 큰 교단이 되었다.그러면 김상준과 정빈을 비롯한 초기 성결교의 선구자들이 해외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체적으로 모든 일을 진행했을까? 그렇지는 않다. 이들이 처음 성결교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성결교 신학을 공부하게 된 것이 일본에서였는데, 1901년에 미국인 선교사 카우만(Cowman)과 일본인 나카다 쥬지가 설립한 동양선교회, 그리고 1905년에 카우만과 길보른(Gilbourn)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동경성서학원을 통해서 성결교가 전해졌다. 김상준과 정빈이 이 단체들에서 신학을 배워 한국에 들어왔고, 중요한 시점마다 이 단체들이 지속적으로 재정지원을 해서 한국내의 성결교회가 자라게 된 것이다. 그러면 일본에 있던 이 동양선교회와 동경성서학원의 신학적 뿌리는 어디일까? 19세기 후반 미국에 일었던 근대 복음주의 부흥운동, 특히 웨슬레 계통의 성결운동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 성결교회의 시작에 대해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성결교는 일본에서 공부한 한국인들이 주도적으로 시작한 자생적 교회이지만, 신학과 재정은 많은 부분 일본과 미국에서 제공되었다고 보면 된다.이제 역사적 설명은 그만하고, 성결교회의 기본 신학인 4중복음의 교리에 대해서 살펴보자. 성결교회는 자신의 핵심교리로 4가지를 말하고 있다. 첫째로 예수님을 믿고 거듭남을 통해 죄성을 벗어야 한다는 중생의 복음, 둘째로 성령 세례를 받아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성결의 복음, 셋째로 말씀과 기도를 통해 몸의 치유를 받는다는 신유의 복음, 넷째로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확신하며 전도와 선교에 열심을 내야 한다는 재림의 복음이다. (오늘 읽으신 데살로니가전서 5:23절에 이 내용이 요약되어 나온다. 하나님이 성도를 구원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영과 혼과 몸을 건강하게 보전하신다는 내용이다.) 이것을 한 가지씩 설명드리겠다. 중생(regeneration)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는 것을 의미한다. 본래 의롭지 못한 사람이 법적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으로, 신학적인 용어로 칭의(justification)라고 부른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우리가 객관적으로 봐서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해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기 때문이란 말이다. 요한복음 3:5절이 이것을 설명해준다. 구원을 갈망하여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또 요한복음 5:24절에 보면,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되며, 모든 죄 사함을 받고 일시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된다고 말씀했다. 그래서 성결교회에서는 이 중생을 “기독교의 입문이며 천국시민의 자격을 갖추는 유일한 도리”로 규정하고 있다.둘째는 성결(sanctification)의 복음이다. 사도행전 1:4-5절,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주님을 믿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은 거듭난 상태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제2의 축복인 성결로 이어져야 한다. 즉 구원 받았으면 당연히 삶의 선한 열매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결교회에서는 통계를 낼 때마다 “중생자 몇 명, 성결자 몇 명”이라고 따로 표시를 할 정도로 성결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성결교에서 말하는 이 “성결”은 우리 감리교에서 말하는 성결 혹은 성화와는 개념적인 차이가 있다. 둘 다 성도의 거룩한 삶을 지칭하는 단어들이지만, 성결교에서 말하는 성결은 성령세례 혹은 불세례를 통한 성결을 말한다. 성령세례를 받아야 성령의 선한 열매들을 맺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감리교회에서는 이렇게 성령세례로써의 성화/성결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 감리교회에서는 신자가 거듭남의 체험을 할 때 성결의 은혜도 같이 받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우리가 거듭남의 체험을 할 때 그때부터 성결의 과정이 시작되는 것이지, 중생 이후의 어느 한 시점에 성령세례를 받을 때 성결의 은혜가 내리는 것으로는 믿지 않는 것이다.또 한 가지 성령세례에 관해 우리가 알아둘 필요가 있는 것은 이 “성령세례”라는 용어가 오순절교회에서도 똑같이 사용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오순절교회를 다룰 때, 오순절교회의 특징 중 하나로 성령세례를 설명했는데, 성결교회의 성령세례와 오순절교회의 성령세례는 같은 의미일까? 그렇지 않다.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만 서로 의미하는 바가 다르다. 오순절 교회에서는 성령세례를 은사위주, 특히 방언위주로 설명하는데 반해, 성결교회에서는 성령세례를 내적인 성결의 은혜, 그리고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9가지 성령의 열매와 같은 종류의, 신자의 삶에 나타는 삶의 열매로 설명을 한다. 그래서 전통적인 성결교회에서는 오순절 식의 방언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세 번째는 신유(divine healing)의 복음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중생의 은혜로 구원하시고 성결의 은혜로 거룩하게 하셨다면,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그 거룩의 상태를 유지하며 살 수 있도록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육신이 병이 들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주시고 치유해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면 병이 낫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병들었을 때 기도만 하고 의학적인 처방을 거부하라는 말은 아니다. 의사들도 하나님의 지혜로 병을 다스리는 능력을 받은 사람으로 알고, 신자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의사의 치료를 함께 받아야 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재림(second coming)의 복음이다. 성결교에서는 구약성경의 중심이 그리스도의 성육신 (즉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오시는 것)을 예언하는 것이라면, 신약성경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을 예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예수님의 공중재림과 지상재림을 가르친다. 즉 마지막 때가 오면 7년 대환란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 환란 직전에 믿는 사람들이 모두 하늘로 들려 올려져서 공중으로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것이고, 이때 휴거하지 못하고 지상에 남겨진 사람들이 땅에서 7년 환란을 겪은 후에, 예수님께서 휴거한 사람들과 함께 하늘에서 지상으로 다시 한 번 재림하심으로써 이 땅에 1000년 왕국이 시작된다는 것이다.성결교회는 이렇게 예수님의 재림을 믿고 있기 때문에, 종말론적인 신앙생활을 할 것을 가르친다. 즉 당장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실 때 그분을 기쁨으로 맞이할 준비를 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예수님 맞을 준비를 하며 사는 것일까? 그것은 주님 앞에 떳떳한 성결한 삶을 사는 것이다. 신앙의 양심에 부끄럼 없이 사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죽어가는 영혼들을 되도록 많이 구원하기 위해,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열심히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이다.이상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성결교 4중복음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러면 이것이 다른 개신교단들, 특히 우리 감리교회와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우선 첫째와 둘째 사항인 중생과 성결의 복음은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레에게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웨슬레는 칭의와 성화를 감리교 신학의 두 중심 기둥으로 설명했는데, 성결교회에서는 이 웨슬레의 개념을 그대로 이용하여 성결교의 신학의 두 토대로 삼은 것이다. 단 위에서 설명드린대로 성결을 성령세례를 통한 성결로 본다는 점에서는 감리교와 차이가 난다. 그러면 나머지 두 가지 신유와 재림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이 두 가지는 19세기 미국의 복음주의 부흥운동에서 나온 것이다. 19세기 후반의 미국 복음주의운동은 신유운동과 재림사상을 강조했는데, 미국의 성결운동 내에 이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그룹이 만국성결연맹이고, 이 단체가 일본의 동양선교회를 통해 한국성결교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래서 한국 성결교회의 신학적 뿌리가 어디에 있느냐고 할 때, 둘을 들면 된다. 하나는 감리교를 시작한 존 웨슬레의 신학이고, 또 하나는 19세기 후반의 미국의 복음주의 부흥운동인 것이다.이상 우리는 성결교회의 첫 번째 특징으로 4중복음을 살펴보았는데, 이제부터는 두 가지 더 성결교회의 특징을 말씀드리고자 한다. 하나는 성결교회는 개인구원을 강조한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성결교회는 실천위주, 성결위주의 신앙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우선 개인구원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자. 성결교회의 지론은 부흥운동의 출발은 개인의 철저한 죄에 대한 영적각성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먼저 교역자가 심령의 부흥을 경험할 때 교회에 부흥이 일어나고, 신자 개인이 영적 부흥을 경험할 때 사회가 변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성결교회는 전통적으로 문화나 사회나 정치 변혁에 대한 관심보다는 인간의 개인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영혼구원에 전심전력을 기울인다.성결교 잡지인 [활천] 1932년 3월호에 이명직목사가 쓴 글에 벌써 이런 생각이 잘 표현되어 있다. “오늘날에 있어서 신자가, 교역자가, 교회가 너무 현대를 좋아해서, 심지어는 사회화를 부르짖고 있다. 사회보다 뒤떨어졌다고 탄식한다. 교회가 무엇을 표준하여 사회보다 뒤떨어졌다고 하는가? 사회보다 뒤떨어져도 하나님께만 떨어지지 않으면 두려울 것이 없고, 사회보다 앞선대도 지옥으로 앞서 들어가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큰 문제라 할 것이다.” 우리 감리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런 성결교회의 노선은 너무 순진하고 현실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진짜 개인의 영혼구원에 집중을 하여 개인이 예수 영접하고 새사람이 되면 사회도 자동적으로 변하게 될까? 한국교회 역사를 볼 때,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고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던 것을 보게 된다. 1903년 원산에서 감리교회가 부흥운동의 불을 붙이고 1907년 장로교의 길선주 목사가 이것을 이어받아 평양에서 부흥운동을 일으킨 사례를 보면, 실제로 개인 영혼이 은혜 받고 구원받았을 때, 가정이 변하고 동네가 변하고 사회가 변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사람들이 회개할 때, 술과 도박을 끊고, 더 이상 기생집에 드나들지 않게 되고, 첩을 둔 사람들이 첩을 돌려보내고, 몰래 도둑질 한 사람들이 도둑질 한 것을 돌려주고, 빚 안 갚고 도망 다니던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가 빚을 갚고, 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나서 서로 죄를 고백하는 모습들이 선교사들의 기록에 그대로 남겨져 있다.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지역의 모습이 이렇게 변하는 것이다.그런데 길게 봐서 개인구원에만 집중하는 것이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는 것 역시 우리가 역사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사실이다. 해방 이후 한국교회의 대부분은 비정치화의 노선을 걷고 개인영혼 구원에만 초점을 맞추어 사회, 정치, 문화에 대해 신경을 꺼버린 상태에서 수십 년을 지나게 되는데, 그 결과 어떻게 되었나?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라는 주님의 명령을 철저히 망각하고 교회만 키웠다. 세속의 가치가 교회에 그대로 적용되어서, 교회 안에서도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공장에서 일꾼들을 착취하든 말든 교회에 헌금 많이 하면 대접받고, 교회 주변에서 어떤 사회 문제가 발생하든 거기에는 신경을 끄고 열심히 전도에만 열중하면 되는 거고, 돈이 있을 때 교회 주변에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대사회적인 책임을 수행할 생각은 하지 않고 기도원 사고, 묘지사고, 땅 사고... 이런 교회의 모습에 현대인들은 개신교에 대해 실망하며 점점 교회를 떠나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그러면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영혼구원에 힘써야 할까, 사회구원에 힘써야 할까? 이것은 사실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둘 다 해야 하는 사항이다. 성경은 이 두 가지를 다 강조하고 있다. 사도행전 16:16절에 보면 구원받기를 원하는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라고 말씀하고 있고, 요한삼서 1:2절에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고 했다. 개인 영혼이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이 먼저다. 그래야 가정도 구원받고 사회도 구원받고 범사가 잘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런 개인구원에 관한 말씀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마지막 날에 심판대 앞에서 양과 염소가 갈린다고 되어 있는데, 어떤 기준에서 양과 염소가 갈리는가? 예수 믿고 개인 영혼이 구원받으면 양이 되고 아니면 염소가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사회적인 관심이 없는 사람,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 홈리스, 외국인, 병자, 죄수, 가난한 사람, 이런 사람들을 돕지 못하는 사람이 염소가 되어서 지옥에 가는 것이고, 이런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며 뭔가를 하는 사람이 양이 되어서 천국에 간다고 되어 있다. 우리는 개인구원이나 사회구원 하나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두 가지를 함께 추구하는 균형잡힌 신앙생활을 해야, 건강한 교회, 책임있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그 다음 우리는 성결교회의 특징으로 실천위주, 성결위주의 신앙관을 들 수 있다. 성결교회라는 이름에 이미 나타나 있듯이 성결교회에서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의 성결한 삶을 강조한다. 성결교회가 한국에 처음 도입될 때, 이미 한국에는 부흥운동이 한창 일어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체험을 하고 영혼이 구원받는 체험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결교회는 이보다 더욱 강력한 부흥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믿었다. 즉 영혼의 부흥운동으로 그쳐서는 안 되고 실제로 성결운동으로까지 이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성결교회에서는 처음부터 고도의 윤리의식을 요구했다. 세상 사람들과 별반 차이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뚜렷이 구분되는 성별된 삶을 살도록 요구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성결교인들은 술 안 먹고, 담배 안 피우고, 댄스장에 안 가는 독특한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겉으로 보이는 현상에 불과한 것이고, 실제 성결교에서 강조하는 것은 성령의 은혜로 내면이 거룩하게 변하는 것이다. 내면이 성결하게 변하면, 이 성결이 외부의 행동으로도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여러분들 솔직하게 대답해보시기 바란다. 이 자리에 많은 분들이 나와 앉아 계신데, 여러분들이 사회에서 생활하실 때, 다른 안 믿는 사람들과 뭐가 다른가? 뭔가 다른 점이 있는가?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볼 때,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의 구체적인 차이점을 느낀다고 생각하시는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사람은 진짜야. 우리와는 다른 차원의 깨끗한 삶을 살고 있어!” 여러분은 이런 말을 듣는가? 아니면 “야, 너나 나나 뭐가 다르냐? 술 먹을 때 같이 먹고, 속여서 돈 벌어야 할 때 똑같이 속이고, 남 욕할 때 똑같이 욕하고, 교회 다닌다고 뭐가 다르냐!” 이런 평가를 듣지는 않는가? 우리는 성결교회로부터 성결의 중요성을 배워야 한다. 진실한 신앙은 구체적 실천으로 이어져야 하고 내면의 성결은 실제 외면의 성결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 성결교회의 가르침이다.이제 이것으로 신년 교단시리즈를 마치게 되는데,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말씀드리고 오늘 설교를 마치고자 한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다르게 창조하셨는데, 저는 그것이 다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하신 것으로 믿는다. 무슨 이유일까? 저는 하나님이 다양성을 좋아하신다고 생각한다. 한번 여러분의 가족을 생각해보시라. 여러 자녀들이 있는데, 만일 그들이 똑같이 생기고, 똑같이 생각하고, 하는 짓도 똑같다고 생각해보라. 그들 사이에 전혀 차이가 없다고 생각해보라. 그렇게 되면 좋겠는가? 되게 재미없을 것이다. 우리 집을 예로 들면, 저에게는 근서와 예린이가 있다. 그 둘을 비교하면 너무나 다르다. 생각하는 것도 다르고 하는 짓도 다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둘이 그렇게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저는 둘을 똑같이 사랑한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둘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저는 그들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우리를 더 사랑하신다고 생각한다. 교단들마다 서로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행동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찬양을 받으시고 다양한 방법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음생활의 다양성을 좋아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저는 우리들이 (이단을 제외하고는) 다른 기독교 교단들을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으로 여기고, 그들을 형제자매로 사랑하기를 바란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우리는 사랑으로 협력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아름답게 건설하게 될 줄 믿는다.
    Read More
  • 41
    Christian Denominations 6: Pentecostal Church Publish on March 02,2011홍삼열
    The Pentecostal Church (Acts 2:1-4)   For the past five Sundays, we considered five major branches of Christianity. We began from the Roman Catholic Church as the most ancient church dating back to the first century. Then we considered various Protestant denominations in a chronological order, beginning from the 16th century Lutheran and Presbyterian Churches, then continuing to the Baptist Church, and then the Methodist Church last week. Today I want us to consider the Pentecostal church.   When someone mentions the word “Pentecostal,” what does this word evoke in your minds? It usually evokes a very lively worship service where lots of enthusiastic people raise their hands in prayer and singing and make spontaneous expressions of praise either in their native language or in tongues. Because of this lively worship style, these people have sometimes been labeled as “holy rollers.” The word “Pentecostal” also reminds us of very affective people who experience God in a most dramatic way and enthusiastically share the Good News with people they know or even do not know.   Members of other Christian denominations are not comfortable with this level of emotional exuberance and enthusiasm, and we Methodists are not an exception: we too like to keep ourselves from these enthusiastic “holy rollers.” But we need to know that this kind of enthusiasm is actually part of our Methodist genes, which we have simply lost gradually over a long period of time. For John Wesley, the founder of our Methodist movement, was well-known for his enthusiasm in worship and preaching, and people listening to his preaching had all kinds of Pentecostal experiences, such as speaking in tongues, visions, miraculous healing, shaking, etc. And of course, people back then criticized him and his Methodist followers for being “enthusiastic.” As we considered a week ago, the 18th century was called the Age of Reason, the age in which reason and common sense were valued while any decision or practice not based on rationality was discredited. So in Wesley’s days the word “enthusiasm” was almost a synonym of craziness, and an enthusiast meant someone who was too much emotional and almost crazy. And we Methodists used to be called “enthusiasts.”   This “enthusiastic” aspect of our Methodist tradition was one major contributor to the beginning of the Pentecostal movement in America. In terms of the year of the beginning, historians usually speak of the Azusa Street revival meeting led by William J. Seymour in 1906. It began with a meeting at the African Methodist Episcopal Church on Azusa Street and continued until roughly 1915. The revival was characterized by speaking in tongues, dramatic worship services, and inter-racial mingling. The participants received harsh treatment from secular media and Christian theologians for behaviors considered to be outrageous and unorthodox. Today the revival is considered to be the primary catalyst for the spread of Pentecostalism in the 20th century.   The comment of LA Times article tells us how the society at large viewed this Pentecostal movement: “Meetings are held in a tumble-down shack on Azusa Street, and the devotees of the weird doctrine practice the most fanatical rites, preach the wildest theories and work themselves into a state of mad excitement in their peculiar zeal. Colored people and a sprinkling of whites compose the congregation, and night is made hideous in the neighborhood by the howlings of the worshippers, who spend hours swaying forth and back in a nerve racking attitude of prayer and supplication. They claim to have the ‘gift of tongues’ and be able to understand the Babel.” Also hear this harsh criticism of a certain minister: “Men and women, white and blacks, knelt together or fell across one another; a white woman, perhaps of wealth and culture, could be seen thrown back in the arms of a big ‘buck nigger,’ and held tightly thus as she shivered and shook in freak imitation of Pentecost. Horrible, awful shame!” In spite of this kind of harsh criticism, however, Pentecostalism grew and spread into all parts of this country and the world, and now numbers almost 130 million including Charismatics.   Now let us turn our attention to the distinctive marks of the Pentecostal Church. Though I can share with you lots of distinctive marks of this church, due to our time limit, let me share only three of them: 1) 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 2) speaking in tongues; and 3) the second coming of Jesus Christ.    First, 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 According to the Pentecostals, there are two kinds of baptisms to receive. One is the baptism of water which signifies a new birth in Jesus Christ, and the second is 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 which is an extra work of grace in the believer’s life. Though these two can happen at the same time, the Pentecostals believe that they are two separate events. How are they separate? First of all, when we accept Jesus Christ as our Lord and Savior, we are saved, which means that we receive the Spirit of adoption, the Spirit by which we are made children of God, and water baptism is a ritual confirming it. But with the second work of the Holy Spirit upon us, we have a fuller indwelling of the Holy Spirit, and this opens us up to a closer fellowship with God and empowers us for stronger Christian service. To use an analogy, receiving the Holy Spirit is like pouring water into a cup. When we have enough water in the cup, it means we are saved. But when we add more water into the cup, it will naturally overflow and other people will notice it. This is the second baptism of the Holy Spirit which is unmistakably noticeable to people outside.   Then what is our Methodist position about this? We acknowledge the continuing work of the Holy Spirit in the life of the Christian, but do not accept the division of the first and the second work of the Holy Spirit. We believe that when we receive the Holy Spirit, we receive it all. It is not that we receive the half of it when we believe in Jesus and that when we pray more then we receive the other half. No, we don’t accept such an explanation. Instead, we believe that when we are baptized in the name of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Spirit, we receive the full grace of God, not just a portion of it. Then how do we explain the simple fact that the experience of salvation does not necessarily connect to a powerful manifestation of the Holy Spirit in our lives? We explain it this way: when we pray more and make extra effort to be better Christians, God helps us open up ourselves to a more powerful work of the Holy Spirit, and the Holy Spirit produces in us all kinds of spiritual fruit such as love, joy, peace, patience, kindness, and so forth. In this way we disagree with the Pentecostals on the question of the second baptism of the Holy Spirit.   The second distinctive mark of the Pentecostal Church is an emphasis on speaking in tongues. I remember an aged woman in one of my former churches. Reflecting on her school days, she shared her struggle over the issue of speaking in tongues. As a youth she was attending a Pentecostal church, and the minister there used to emphasize it as the sign of 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 She really wanted to speak in tongues like her friends, so she tried and tried. She prayed a lot. She even cried to the Lord, saying she really wanted to receive this gift. But God did not give it to her. How sad and discouraged she was!   But she actually didn’t need to be discouraged because statistically speaking, about 40% of all Pentecostals do not speak or pray in tongues, and in other major denominations speaking in tongues is never encouraged or even banned from their churches. But still this does not mean that speaking in tongues has no place in churches other than the Pentecostal churches. To the contrary, there are some people in mainline churches such as the Methodist Church or the Baptist Church or even the Roman Catholic Church who had this Pentecostal experience. I am one of them. In my teenage years, I as a Methodist youth had many chances to go up the mountain for annual retreats, and in one of these occasions, I came to speak in tongues. It was like you speak something in your mind and your tongue produces a different sound. One great benefit of speaking in tongues is that you can pray beyond what your human language can express. For such a prayer is not limited by grammar, syntax, word order, etc., but still can communicate something to God.   But we have to know that speaking in tongues is not the sign of the indwelling of the Spirit, not even the usual sign; it is simply one of the many ways in which the Holy Spirit comes to us and empowers us. When you consider your own experiences, you may know the truth of this statement. Some of you feel the most powerful presence of the Holy Spirit when you have a quiet time with God. Others have the same experience when working in the food pantry or homeless shelter or when building houses for the needy. Others experience the Holy Spirit most powerfully when praying aloud or speaking in tongues as some Korean or Hispanic people would do. So as a Methodist, I do not deny the value of speaking in tongues. For it has a biblical basis and also practical impact on people’s lives. But it would be wrong to present speaking in tongues as the most important sign of the Holy Spirit and expect every sincere Christian to receive it and practice it.   Now let us turn to the third distinctive mark of the Pentecostal Church, the second coming of Jesus Christ. One of their favorite passages of the Bible is 1 Thessalonians 4:16-17: “The Lord himself will come down from heaven, with a loud command, with the voice of the archangel and with the trumpet call of God, and the dead in Christ will rise first. After that, we who are still alive and are left will be caught up together in the clouds to meet the Lord in the air.” Christians throughout the history have believed in this second coming of Jesus Christ, but the day was always pushed off and they lived as if it would not happen in their own times.   But there were always those who really expected that Jesus would come before they died, especially those in the Pentecostal or Charismatic circles. This expectation of Jesus’ immediate coming is well exemplified in some Pentecostal ministers who like to send their congregations with this unusual benediction, unusual at least to us: “If I do not see you here next Sunday, see you in the clouds.” From the perspective of the Pentecostal Christians, this benediction makes perfect sense because the outpouring of the Holy Spirit, which takes places right now in their own churches, is one sure sign of the last days, and Jesus will come any moment and transport all true believes into heaven.   Now what is our Methodist position about this? We too believe in the second coming of Jesus Christ as something our Bible promises to us. Though there may be some differences about exactly how, when, and in what order it will happen, there is no difference as to the fact that Jesus will suddenly appear in front us and that only those prepared for this unexpected encounter will be saved. But we Methodists have somehow lost a sense of immediacy and thus allowed ourselves to be attached too much to earthly things. But in keeping with our temporary status of a traveler here on earth and our belief in the second coming of Jesus Christ, we need to simplify our lives and live as those who are really ready for His coming. That is what our Pentecostal friends are eager to do, and that is what we need to learn from them.   Today we have considered the Pentecostal Church. I wish and pray that we Methodists will have the same level of desire for the outpouring of the Holy Spirit upon us and the same kind of expectation of the second coming of Jesus Christ as the Pentecostal Christians do. May the Lord bless us richly that we may live in such a way that we will be able to welcome Jesus Christ anytime he comes.
    Read More
  • 40
    기독교 교단설교 6: 오순절교회 Publish on March 02,2011홍삼열
    “오순절교회(Pentecostal Church)" (사도행전 2:1-4)지난 다섯 번에 걸쳐 우리는 기독교의 여러 교단들을 공부했다. 우선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가톨릭교회를 살펴보았고, 그 다음에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여러 개신교 교단들을 살펴보았다. 우선 16세기에 생겨난 루터교회와 장로교회를 살펴보았고, 그 다음 침례교회, 지난주에는 감리교회를 살펴보았다. 제가 처음에 계획했던 교단들 중에 이제 막내격인 오순절교회와 성결교회 두 교단이 남았다. 오늘 여러분들이 먼저 오순절교회에 대한 설명을 들으실텐데, 한국의 순복음 교회를 생각하시며 들으시면 많은 부분이 이해가 가실 것이다. 순복음교회가 이 오순절교회의 일부이기 때문이다."오순절"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모습을 떠올리게 되는가? 대개 아주 열광적으로 예배드리는 모습을 떠올리실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손을 들고 기도를 하거나 찬양을 부르고, 설교시간에 아멘이나 할렐루야 같은 즉흥적인 감탄사를 연발하고, 크게 방언기도를 하는 것들을 떠올리실 것이다. 이런 열광적인 예배의 모습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오순절교회 교인들을 holy rollers, 즉 "성령으로 뒹구는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또한 "오순절"이라는 단어는 다른 사람들에게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예를 들어서, 지하철이나 도로변에서 열정적으로 전도하는 사람들을 연상시킨다.다른 교단에 속한 사람들은 이런 식의 지나친 감정의 표출과 열정을 그리 좋은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우리 감리교인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들을 열광주의자로 규정하고, 그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싶어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는 사항은, 이런 종류의 열광적인 모습은 초창기의 감리교회가 보여주었던 모습 중에 하나라는 사실이다. 현재 우리가 그런 초창기의 모습을 너무나 많이 잃어버려서 열광적인 예배의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하지만, 원래 감리교인들은 성령의 은사를 중요시하고, 예배 중에 열정적으로 감정을 표출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의 경우를 보면, 그가 인도하는 예배는 아주 열정적이었고, 그가 설교할 때면 방언과 신유와 진동과 환상 같은 오순절의 역사들이 수없이 많이 일어났던 것이다.물론 웨슬레 당시 사람들은 그를 못 마땅히 여겼고, 그를 따르는 감리교인들을 enthusiasts 즉 열광주의자들로 규정하여 비판하였다. 지난주에 설명드렸듯이 18세기는 "이성의 세기"여서, 이성과 상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이는 모든 행동, 특히 열광적인 행동을 모두 사이비로 규정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웨슬레 시대에 열광주의라는 단어는 “미쳤다는 것”과 동의어로 사용되었고, 열광주의자란 단어는 너무 감정에 치우쳐서 거의 머리가 돈 사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에 감리교인들이 어떻게 불렸다고? enthusiasts, 열광중의자로 불렸다. 우리는 이 점을 알고 있어야 한다.여러분들 중에, 제가 왜 오순절교회를 설명한다고 하면서, 여기서 감리교의 열광적인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는가 하고 의아해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제가 이렇게 먼저 감리교회의 성령운동을 설명드린 이유는, 오순절교회 운동이 감리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순절 운동은 20세기 초에 미국에서 발생했는데, 그 운동의 배경에 감리교 부흥사들이 있었다. 역사가들은 오순절 운동의 시작을 1906년 남쪽 캘리포니아의 아주사 거리에서 있었던 부흥회로 삼고 있다. 당시 흑인 목사인 William J. Seymour는 아주사 거리에 있는 감리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였는데, 이때 사람들은 다른 교회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 교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황홀경에 빠져서 방언을 하고, 열정적으로 찬송을 하고, 흑인과 백인이 한 자리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당시에는 흑인과 백인이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이 아주사의 부흥회를 기점으로 성령운동의 소식이 사방으로 퍼지자, 일반 교회에서는 그리고 사회 언론에서는 이들을 이단으로 격렬히 비판하기 시작하였다.당시 LA Times에 이 오순절 부흥운동을 비판한 글이 개제되었는데, 그 내용을 읽어보면 당시 사람들이 오순절 성령운동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들은 아주사 거리에 있는 다 무너져가는 집에서 모임을 가지고 있는데, 신자들은 이곳에서 아주 이상한 교리를 믿고 광신적으로 예배를 드린다. 설교자들은 가장 허황된 이론을 가르치고, 거의 미칠 지경의 흥분상태로 사람들을 몰아간다. 대부분은 흑인들이고 백인들도 몇 명 섞여 있는데, 밤이면 밤마다 예배드리면서 울부짖는 소리가 밖으로 들리며, 이들은 몇 시간 동안 계속 몸을 앞뒤로 흔들며 크게 기도를 한다. 이들은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면서, 바벨탑에서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기존 교단에 속한 어느 목사는 이 오순절운동을 이렇게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남자와 여자가, 그것도 흑인과 백인이, 서로 무릎을 꿇거나 서로에게 넘어져있다. 돈도 있고 교양도 있을 법한 백인 여자 하나가 뒤로 넘어져서 덩치 큰 흑인 남자의 팔에 안겨있는 모습도 보인다. 그 흑인 남자는 그녀가 오순절 역사를 모방하여 미칠 듯이 몸을 떨고 있을 때, 그녀를 꽉 붙잡고 있었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대단히 수치스런 모습이 아닌가!"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오순절운동을 이단으로, 부도덕한 운동으로 매도하며 열심히 공격하였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운동은 해를 거듭할수록 전국으로 퍼져나가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오순절 계통의 교회에 다니게 되었고, 현재에는 주요 개신교 교단중의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이제 오순절교회의 특징을 살펴보자.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지만, 시간 관계상 대표가 되는 세 가지만 말씀드리겠다. 1)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구분하여 성령세례를 두 번째 받는 세례로 설명한다는 점; 2) 방언을 성령세례를 받는 주요 증거로 삼는다는 점; 3) 예수의 재림을 강조한다는 점이다.우선 첫째 특징부터 살펴보자. 오순절교회는 성령세례를 두 번째 받는 세례로 설명한다. 오순절교회는 우리가 제대로 된 신자라면, 세례를 두 번 받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첫 번째가 물세례이고 두 번째가 성령세례이다. 어떤 사람은 이 두 가지 세례를 동시에 받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 둘을 서로 다른 시간에 받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면 이 둘을 어떻게 구별하는가? 우선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그리고 구세주로 영접하면,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고 구원받는다. 그리고 물세례를 통해서 이 사실을 사람들 앞에서 외적으로 표현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첫 번째 세례에 그쳐서는 안 되고, 두 번째 세례로 이어져야 한다. 두 번째 세례는 성령이 특별하게 역사하는 계기가 되는데, 물세례를 통해 양자의 영을 주신 성령이, 이 두 번째 세례 때 (즉 성령세례 때) 더욱 풍성한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과 더 가까운 관계가 되게 하고, 더욱 확신있는 신앙생활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로 설명하면 이렇다. 성령을 받는 것은 마치 컵에 물을 받는 것과 같다. 우리가 컵 안에 어느 정도 충분한 양의 물을 받으면, 그것은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충분한 양 이상의 물을 컵에 부으면 어떻게 되는가? 물이 밖으로 넘쳐흘러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다 목격하게 된다. 성령의 둘째 세례가 바로 이런 종류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성령세례를 받으면, 성령의 역사가 너무 강해서, 주변 사람들이 반드시 이것을 알아보게 된다는 것이다.우리 감리교회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우리는 물세례 이후에도 성령이 계속 신자의 삶에 역사한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오순절교회가 주장하는 대로, 첫 번째 성령의 역사인 물세례와 두 번째 성령의 역사인 성령세례를 구분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성령의 일부만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 전체를 받는다고 믿는다. 즉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을 반만 받고, 그 다음에 계속 열심히 기도하면 나머지 반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그때 하나님의 전체 은총을 받는다고 믿는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구원의 경험을 했어도, 아직 자신의 삶에 눈에 띄는 성령의 은사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사람의 구원은 가짜일까? 감리교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가 물세례를 받은 후에 계속 기도하고 예수를 닮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그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성령의 뜻을 따라 행하려고 노력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가 성령의 역사에 더욱 반응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갖가지 성령의 열매, 즉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 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오순절교회의 두 번째 세례로서의 성령세례를 거부하고, 대신 동일한 성령이 계속 우리 안에 거할 때, 자연히 성령의 은사와 열매가 맺히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오순절교회의 두 번째 특징은 방언을 성령충만의 대표적인 증거로 삼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면서 아직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성령충만을 받지 못한 사람이다. 방언에 대해 생각할 때면, 제가 이전에 섬기던 교회에 다니는 어떤 중년 여자분이 생각난다. 그분은 옛날에 자신이 고등학교 다닐 때를 떠올리면서, 얼마나 방언 문제 때문에 고심했는지를 저에게 여러 번 말씀하셨다. 당시 그분은 오순절교회를 다니고 있었는데, 그 교회 목사님은 설교 때마다 방언하는 것을 성령세례를 받은 증거로 설명하면서, 모든 교인들에게 방언의 은사를 받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목사님의 설교에 따라, 방언을 하려고 수없이 많이 노력했다고 한다. 기도도 해보고 금식도 해보고 집회에도 참석해보고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한다. 그런데 자기 친구들은 모두 방언은사를 받아서 방언기도를 하는데, 자기는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리 노력해도 방언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그때 얼마나 이 문제로 슬퍼하고 괴로워했는지, 중년이 되어서까지 그 아픔을 저에게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그런데 사실 그분은 그때 그렇게 절망감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통계적으로 볼 때, 오순절교회 교인들 중 약 60% 정도만 방언을 하고 나머지 40%는 전혀 방언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교단의 경우에는, 방언을 말하는 사람의 비율이 그보다 훨씬 낮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방언이 오순절교회 이외의 교회들에서 별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감리교나 침례교 같은 주요 개신교 교단들에서, 아니면 심지어 로마 카톨릭교회에서도,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상당수 있기 때문이다. 저도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 중 하나이다. 제가 13살 때였다. 매년 여름이면 기도원으로 학생 수련회를 가곤 했는데, 그때 아침집회 때 기도를 하다가 방언이 터지게 되었다. 내 마음으로는 어떤 기도를 하는데, 입에서는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다른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방언을 하게 되니까, 구원의 확신이 생기고, 진짜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리고 몇 시간씩 기도해도 기도할 내용들이 계속 생겨서 전혀 지루하지가 않았다. 방언은 이렇게 기도생활에 대단히 유익한데, 우리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내용도 하나님께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방언은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의 문법이나 어순이나 단어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서 기도생활에 유익한 은사가 된다.방언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할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방언은 성령 받았다는 대표적인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오순절 교회에서는 방언을 성령을 받았다는 가장 중요한 증거로 설명하지만, 사실 방언은 가장 중요한 성령의 은사도 아닐뿐더러, 수많은 성령의 은사들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여러분 자신의 경험을 되돌아보시면 이것을 이해하실 것이다. 여러분은 언제 성령의 임재를 가장 강하게 느끼는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분은 집에서 조용히 말씀 묵상을 할 때, 성령의 임재를 강하게 느낀다. 사회구원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노숙자보호소나 무료급식소에서 일할 때, 아니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집을 지어줄 때, 그때 가장 강력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다. 반면 어떤 사람은, 특히 한국 사람이나 멕시코 사람은, 크게 소리를 내어 기도할 때 성령의 임재를 가장 강하게 느낀다. 그래서 우리는 방언의 중요성을 부인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방언을 성령의 가장 중요한 은사로 부각시켜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방언은 성령의 은사들 중에 하나일 뿐이고, 우리가 성령을 받는 증거는 수도 없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실한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방언을 받아야 하고 방언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이제 오순절교회의 세 번째 특징을 살펴보자. 오순절교회는 예수님의 재림을 강조한다.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중 하나가 공중재림을 설명하는 데살로니가전서 4:16-17절이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신 이래로 모든 기독교인들은 항상 예수님의 재림을 믿고 기다렸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모든 믿는 사람들은, 죽은 자나 산 자나 할 것 없이, 모두 하늘로 들리어져서 예수님을 맞이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짜에 대해서는, 대개 그 날을 한참 뒤로 미루어서, 적어도 자기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가 죽기 전에 다시 오실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예가 오순절교회 교인들이다. 오순절교회 교인들은 예수님이 오늘 밤에 오셔도 예수님 맞을 수 있도록 항상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런 정신으로 신앙생활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어떤 오순절교회 목사님은 예배 마지막에 축도를 할 때면 꼭, "다음 주일에 다시 여기서 만나지 못하면, 우리 구름 위에서 다시 만납시다" 라고 말하곤 하는 것이다. 자 그러면 우리 감리교회는 이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 우리도 역시 예수님의 재림을 성경의 약속으로 믿고 받아들인다. 재림의 방법과 시간과 순서에 있어서는 오순절교회와 의견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어도, 예수님이 우리 앞에 도적같이 갑자기 나타나시고, 예수님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구원받는다는 것에는 의견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제가 감리교회에 대해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현재 우리 감리교회는 재림의 급박성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절대 안 올 거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점점 세상적인 것에 매여 산다. 이 땅이 영원한 안식처인양 생각하며 산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 가르치는가? 이 세상은 절대 우리의 영원한 집이 아니고 임시 거처일 뿐이고, 우리는 세상에서 그저 나그네일 뿐이라고 가르친다. 예수님이 반드시 다시 오시는데,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삶을 간소화해야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꼭 필요한 것만 가지고 살고, 움직이는데 거추장스런 것들은 모두 처분하며 살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항상 예수님 맞을 준비를 하면 사는 것, 바로 이점이 우리가 오순절교인들에게서 배워야 할 점이라고 생각한다.여러분들, 만일 지금 예수님이 오신다면 준비되어 있는가? 우리 감리교나 장로교회에서는 이런 식으로 직접적으로 묻지 않는다. 대충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는데, 오순절 교회에서는 그렇지 않다. 지금 예수님이 오시면 천국 갈 자신이 있는가? 지금 대답하실 필요는 없다. 다만 각자 이 질문을 받고 이미 대답하셨을 것이다. 우리가 이런 확신이 있어야, 힘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흔들리지 않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이것을 우리는 오순절 교회 교인들에게서 배워야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오순절교회의 특징들을 살펴보았다. 오순절교회는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고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모범을 보이고 있는데, 우리 감리교인들도 이런 사모의 마음, 열정의 마음이 있기를 바란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며 매일매일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삶을 삶으로, 모두 주님 앞에 정직하고 성실한 신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Read More
  • 39
    Christian Denominations 5: Methodist Church Publish on February 26,2011홍삼열
    Methodist Church (Philippians 2:12-16)   The 1992 film “A River Runs through It” has an interesting remark about the Methodists. Explaining to his son who the Methodists are, the father who is a Presbyterian pastor says: “Son, Methodists are Baptists who could read.” I don’t know how much this is true, because there are lots of well-learned Baptists out there who are much smarter than the Methodists. But such a remark at least tells us something about the general perception of people: people think of the Methodists as being reasonable and balanced. In many aspects, we Methodists and the Baptists are similar to each other: for example, we share a high regard for the laity in church life, we believe in the Bible as the primary authority of faith, we eagerly participated in the revival movement in early American mission, and so forth. But as opposed to the Baptists who acknowledge the sole authority of the Bible, we Methodists acknowledge intellect or reason as a secondary authority of faith.   This mark of Methodism is already noticeable in the early Methodist movement in England. As a product of the 18th century England, John Wesley, the founder of our Methodist movement, reveals the very characteristic of valuing rationality of faith. In the previous centuries before his birth, the entire Europe had been involved in frequent religious wars among different countries, especially the Thirty Years’ War which involved most of the major European powers. Beginning as a religious conflict between Protestants and Catholics, it gradually developed into a general war involving the entire Europe. The impact of this war was so devastating that it is said the European population was reduced by 30 percent. Now after having undergone this long period of wars, people came to realize that religious wars do not end; they continue forever until the resources of both opposing parties are totally drained. Being sick and tired of fighting for the sake of relgion, European countries now decided to make an agreement with each other and finally signed the Peace of Westphalia in 1648, thereby formally ending the Thirty Years War.   John Wesley (1703-1791) was the product of this post-war age whose virtues were religious toleration, reason and common sense, whereas any kind of religious crusade against other groups was regarded as fanatical. Many great philosophers such as Immanuel Kant, David Hume, and Hegel flourished in this Age of Reason. In addition to this changed cultural atmosphere, Wesley’s Anglican tradition also helped him appreciate the value of reason in theology. As I have mentioned before, the Anglican Church had three major authorities of faith, which are scripture, tradition, and reason. And as an Anglican priest, John Wesley took these authorities seriously and applied them to the understanding of the Bible and to his Christian life. But he was not satisfied with simply using this Anglican tradition: he added another major authority, i.e., experience. For him, it was not enough to know the Bible or tradition with his rational intellect. What should accompany this was a personal experience of God, without which all the knowledge of God would remain in the head and thus be practically useless.   John Wesley came to this realization when one night he was sitting in the pew of a small Moravian church in Aldersgate Street in London. That night, someone was reading Luther’s preface to the Epistle to the Romans, whose main message was that we are saved not by our own good works but by God’s grace alone and faith alone. As an Anglican priest, he was very familiar with this message. After all, he was a professor of the New Testament at Oxford. He knew all the theories and implications of that Lutheran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faith. But his problem was that he knew it only in his head; the knowledge did not reach his heart. In spite of his great knowledge of salvation, he had no real experience of it and thus no assurance of it.   But now as he heard a reading of Luther’s preface to the Epistle to the Romans, he felt for the first time that the knowledge of salvation did come down to his heart and gave him the assurance of salvation. He wrote this experience in his journal: “About a quarter to nine, while he was describing the change which God works in the heart through faith in Christ, I felt my heart strangely warmed. I felt that I did trust in Christ, Christ alone, for salvation; and an assurance was given me that he had taken away my sins, even mine, and saved me from the law of sin and death.”   After this experience, Wesley became a quite different person. His life was filled with the joy of salvation and his preaching became enthusiastic. In terms of his concern for the underprivileged in society, however, there was no change at all. Just like before, he continued to visit the prisoners, helped the sick, and preached against slavery. He continued to be a model Christian who was socially awake. So it would not be correct to say that this was his conversion experience per se, I mean, the experience by which a person accepts Jesus Christ as his Lord and Savior and decides to follow Him. For Wesley was already a good Christian—at least from the perspective of the majority of Christians that he knew. But still I have to say that through this special experience he became fully Christian because this experience gave him the assurance of salvation and made him all fired up. And thanks to this experience, Wesley was able to become the founder of the Methodist Church, who was fully dedicated to the preaching of the Word and changed the English society and many others as well.   So much for the personal story of John Wesley, let us now turn to the distinctive marks of the Methodist Church. Among many marks, I want to highlight these three: 1) lay preaching; 2) the Wesleyan Quadrilateral; and 3) an integration of justification and sanctification.   First, let us consider lay preaching. Currently there are two major denominations of Christianity that allow the laity to preach and take care of a church: they are the Baptist Church and the Methodist Church. As far as the Baptist Church is concerned, it is natural for them to allow lay preaching because their church polity is based on the autonomy of a local church. In other words, each local church has the freedom to choose its own preacher, and it often ends up choosing one from among them, someone who has the gift of preaching and the gift of pastoral ministry. So for them, theological education is not the precondition for becoming a pastor; any lay person with gifts can function as a pastor. On the other hand, our Methodist denomination has a long history of dependence on lay preachers. When John Wesley began the Methodist movement in England, his basic mode of operation was a class meeting. Each member was required to attend this meeting regularly, and the class leader was given the duty to function just as a regular pastor would do, such as preaching, visiting, counseling, administration, etc. So from this time on, the Methodist Church has always had lay preachers. Currently the United Methodist Church has lots of local pastors and lay preachers in various churches. These people are not ordained but allowed to preach and take care of a church.   This system of lay preaching turned out to be a very effective method of evangelization in the 19th century westward movement. When people began to leave the East Coast and move into the inland and the West Coast, major Christian denominations could not follow these people because they could not spare extra ordained pastors to do that. But the Baptist Church and the Methodist Church were an exception: they followed these people, establishing churches along the way. They were able to do so because they had the system of lay preaching. They only had to select those with the gift of preaching and pastoral ministry and let them just follow these people and establish churches. That is why in every town and village all across the nation are the Baptist Churches and the Methodist Churches, but not other denominational churches.   The second distinctive mark of the Methodist Church is the Wesleyan Quadrilateral. The word “quadrilateral” was originally coined by a 20th century Wesleyan scholar Albert Outler, and this concept refers to the four fundamental authorities of Methodism, which are scripture, tradition, reason, and experience. This Wesleyan Quadrilateral is an extension of the Anglican equivalent, the so-called Three Legged Stool, each leg representing scripture, tradition, and reason. For Wesley, however, these three principles were not enough for the best Christian life as he envisioned, because without personal experience of God all our knowledge would be powerless and thus practically useless. So in addition to these three, Wesley placed experience as the fourth principle of faith.   Now let me briefly explain how this Quadrilateral works. When, for example, someone asks whether we should practice infant baptism or not, we Methodists go through these four principles of faith. First is the Bible. How does our Bible speak of it? When we turn to the Bible, we find that it does not give us any clear answer: it does not recommend it nor condemn it. Of course, there are passages that we believe to be strongly leaning towards the approval of infant baptism, but the Baptists do not agree. Then what do we need to do? We need to turn to the next principle, tradition. How does the early tradition speak of it? A simple survey reveals that there is ample evidence that the early church practiced it; in fact, not only practiced it but also commanded it. Then what about reason? Is it reasonable to baptize infants? Yes, it is reasonable because if baptism is a major way of receiving or acknowledging the saving grace of God, this grace should be given not only to adults but also to infants. That’s fair. Then what about our experience? Our experience tells that when we baptize infants, we are more likely to rear them according to the word of God, and they get the benefit of being part of our church family. Now after going through this process, what is our decision? We decide that we practice infant baptism because it is biblical and in keeping with our tradition, reason, and experience.   Now let us turn to our third distinctive mark of the Methodist Church: an integration of justification and sanctification. Historically there have been two opposing views as to the best form of Christianity. One is to emphasize justification, meaning “being made right with God,” as the condition of salvation. This position was held by Luther and his followers, and according to this position, what is really necessary for Christians is to have faith, then they will be saved regardless of their works. On the other hand, another view finds in this a great danger of promoting lawlessness or neglecting human responsibility. According to this view, especially that of the Catholic Church, faith without love is not real; faith not accompanied by good works is dead; so we are supposed to grow in holiness each day until we reach the perfection of Jesus Christ. This is the doctrine of sanctification.   Then what is our Methodist position? We believe the both. We believe that it is not the issue of either-or, but the issue of both-and. For Jesus came to not destroy the law but fulfill it, and he came to restore the image of God that was seriously damaged in us, and this restoration process requires not only his justifying grace but also his sanctifying grace, I mean, not only the grace that forgives us and empowers us to go and evangelize people with a burning heart, but also the grace that prompts us each day to grow unto the perfection of Jesus Christ. Of course, this position of emphasizing both instead of one is sometimes very difficult to hold because we will end up displeasing both sides, but we believe that taking balance is really what our life is all about. For a healthy organism, whether it is an individual or a church, always keeps its balance between two extremes, and when this balance is broken, it becomes sick or unhealthy.   Today we have considered three distinctive marks of the Methodist Church. We believe in lay preaching; we use the method of the Wesleyan Quadrilateral; and we value balance between extremes. Let us keep these in mind and try to perfect them so that we may become better Methodists and better disciples of Jesus Christ. Amen.  
    Read More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