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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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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믿으면 복을 받는가? Publish on October 01,2012홍삼열
    기독교인들이  전도할 때 사용하는 말 중에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라는 표현이 있다. 이 표현의 일반적인 의미는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믿으면, 하는 일이 잘 되고 건강하게 살고 자녀가 성공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이해한다. 그런데 진짜 그럴까? 믿는 사람은 물질의 복, 건강의 복, 자녀의 복을 얻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가난하고 병들고 자녀들이 잘못되는 것일까? 구약성경에  나오는 욥이 이해할 수 없는 온갖  고난을 당할 때 그의 친구들이 그런  논리를 들이대며 욥을 괴롭혔다. 아무리 욥이 동방의 의인처럼 살았을지라도 뭔가 숨겨진 죄가 있기 때문에 그런 엄청난 재앙을 만나지 않았겠는가? 그러니 잘 생각해서 솔직하게 회개하라는 것이 친구들의 집요한 요구였다. 욥의 친구들의 머리에는 하나님을 진실되게 믿으면 언제나 복만 받아야 한다는 신념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너무나 단순한 논리이다. 사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사는 사람이 사회에서 더 성공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는가? 이것 때문에 우리가 매일 고민하는 것이 아닌가? 사업을 하면서 부정한 거래를 하지 않고 세금 꼬박꼬박 내고 나보다 남의 이익을 더 생각해주는 사람, 과연 이런 사람이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렇게라도 성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경우에 얼마나 크게 성공할까? 대형 기업만큼 그렇게 크게 성공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러면  예수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이것은 세속적인 복이  아니라 하늘의 복, 영적인 복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느라 세상에서는 고난당하지만 영혼에는 더 없는 만족과 기쁨으로 보답받는 그런 복, 이 세상에서 보답을 받지 못하면 천국에서 하나님이 보답해주시는 그런 복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그런 복을 받으신 분이다. 예수님은 비록 가난하고 고난받고 일찍 죽었기 때문에 세상적인 기준으로는 철저히 실패한 인생이지만, 영적인 기준으로는 가장 복받은 인생인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가장 완벽하게 실천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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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5
    희망고(HIMANGO) 이야기 Publish on October 01,2012홍삼열
    얼마 전에 카작스탄으로 단기 선교여행을 가는 중에 우연히 ‘희망고’에 대한 감동 스토리를 읽게 되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디자이너 이광희씨, 어느 날 아프리카 남수단 톤즈를 방문하게 되고 그곳에서 망고나무를 심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이 일을 지속하기 위해 희망을 주는 망고나무라는 의미의 ‘희망고’ 재단을 만든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제 3세계 나라들이 대개 그렇듯이 수단은 아주 못사는 나라이다. 기초 생계가 이루어지지 않는 나라이다. 그곳에 생필품들을 사다 주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장기적인 도움을 주고 싶어서, 이광희씨는 한 그루에 15불하는 망고나무들을 심어주었다. 이 나무는 한번 심겨지면 불모지에서도 100년을 살며 계속 망고열매를 생산해낸다고 하니, 이보다 더 훌륭한 도움이 어디에 있겠는가? 망고나무 한 그루만 있으면 일년에 두 번 수확하는 양으로 시장에서 높은 가격에 팔아 온 가족이 지속적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니, 이 보다 더 효율적인 투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정말 망고는 수단 사람들에게 희망의 열매인 것이다. 유대인의 탈무드에 이런 유명한 가르침이 있다. “자식에게 물고기를 주면 한 끼를 먹을 것이지만,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면 평생을 먹을 것이다.” 당장 시급한 필요를 채워주는 것으로는 효과가 오래가지 못하지만, 스스로 필요를 채우는 법을 가르치면 그것이 장기적이고도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너무나 성급하다.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는 대신 당장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고 필요를 채우기에 급급하다. 예를 들어, 아이를 양육할 때 당장의 효과를 얻기 위해서 지식을 억지로 주입하고 기술을 강요하지 않은가? 사업을 할 때도 장기적인 정책 대신에 반짝 효과를 위해 성과위주의 정책을 펴지 않는가? 또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에서 선행을 할 때도 당장 눈앞에 보이는 가시적인 효과를 보기를 원하지, 미래에 풍성한 열매를 생산해내기 위해 오늘 나무를 심고 몇 년을 열매없이 기다리는 선택 같은 것은 회피하지 않는가?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희망의 나무를 심자.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지속적인 열매를 기획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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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리교인이 꼭 알아야 할 웨슬리 신학 Publish on September 25,2012홍삼열
    요즘 기독교인들은 교파간의 차이점들이나 교리에 대해 이전 세대보다 덜 민감하다. 그래서 교회를 선택할 때 특정 교파를 선택하는 대신에, 아이들 신앙교육에 더 많은 편의를 제공하는 교회, 자신이 좋아하는 예배/음악 스타일을 제공하는 교회, 혹은 친구들이 다니는 교회를 찾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지나치게 감리교의 교리를 부각시키며 다른 교단들과의 차별을 두는 것은 현실적으로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기본적인 것은 알고 있어야 한다. 무작정 모든 교회는 같다거나 모든 교파들의 신학은 비슷하다는 식의 생각은 교회생활에 혼란을 가져다주고 일관성없는 신앙의 길을 가게 할 위험성이 있다. 그래서 필자는 제한된 지면을 통해 감리교인으로서 꼭 알고 있어야 할 기본 웨슬리 신학을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우선 웨슬리 신학의 두 중심 기둥으로서 칭의와 성화를 설명하고, 그 다음에 인류의 타락 이후에 하나님이 어떻게 인류를 구원시키시는지 그 구원의 과정을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신앙에 관한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감리교인이 사용할 사중 방법론을 설명하겠다.     1. 웨슬리 신학의 두 중심 기둥: 칭의(Justification)와 성화(Sanctification) 감리교의 신학체계를 건물로 가정할 때 이 건물을 떠받치는 두개의 중심 기둥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칭의와 성화이다. 루터교는 “오직 믿음으로만”의 원리를 주장하며 칭의를 강조하지만 성화를 소홀히 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가톨릭은 루터교와는 정반대로 성화의 삶을 강조하지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칭의의 교리를 소홀히 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우리 감리교회는 칭의와 성화 중 그 어느 것도 놓치지 않고 그들 사이의 연속성, 균형을 강조한다. 칭의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이 그 믿음을 우리의 의로 인정해주시는 것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칭의의 교리를 가장 명확하게 제시하는 성경구절은 로마서 1:17절인데, 루터는 이 구절을 보통 우리가 읽는 것과 다르게 읽는다. 보통 우리는 이 구절을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Ὁ δὲ δίκαιος ἐκ πίστεως ζήσεται)로 읽지만 루터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ἐκ πίστεως)라는 구절이 뒤의 “살리라”라는 동사를 꾸미는 대신에 앞의 “의인”을 꾸미는 것으로 해석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된 자는 살리라”로 읽는다. 이렇게 읽으면 칭의의 개념이 더욱 명확해진다. 우리가 살게 되는 것은 (즉 구원받는 것은)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으로 인정받기 때문인 것이다. 존 웨슬리 목사님이 1738년에 올더스게이트가에 위치한 교회에서 회심의 경험을 한 것이 바로 이 루터의 칭의의 교리를 듣게 되면서부터였다. 이전까지는 성화의 삶을 통해서 구원을 추구하였지만 이런 시도가 철저히 실패로 돌아가게 되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확신이 생긴 것이다. 그로부터 웨슬리의 설교는 행함을 강조하는 설교에서 성령의 역사와 회심의 경험을 강조하는 쪽으로 바뀌었고, 이런 변화된 설교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고 삶이 변화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변화를 시작으로 감리교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웨슬리의 회심의 경험이 성화를 추구하는 삶에서 칭의를 추구하는 삶으로 180도 방향을 바꾼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것은 오해이다. 그가 성화의 삶을 추구하는 것은 회심 이전이나 회심 이후나 전혀 차이가 없다. 차이가 있다면 성화를 추구하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에 있는 것이다. 이전에는 자신이 노력해서, 인간적인 의지와 힘으로 성화를 이루려는 차원이었다면, 이제는 구원받은 자녀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힘으로, 칭의의 은총의 힘으로 성화를 추구하는 차원으로 변한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웨슬리는 이전에 교수시절에 신성클럽에서 하던 활동들을 회심 이후에도그대로  지속했다. 가난한 이웃을 돕고, 감옥에 있는 죄수들을 방문하고, 더 나아가 노동자를 위한 휴게소를 설치하고, 빈민금고를 창설하고, 고아원을 세우고, 금주 운동을 벌여 술집 문을 닫게 하고, 노예폐지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2. 구원의 과정 (Order of Salvation)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에 인간이 어떻게 다시 천국을 회복하느냐의 문제는 일명 “구원의 과정”(ordo salutis)이라고 불리는 도식으로 설명되어 왔다. 각 교단마다 다른 구원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데 감리교가 제시하는 구조는 1) 선행은총(prevenient grace), 2) 회개, 3) 믿음, 4) 성화, 5) 완전성화 (entire sanctification), 6) 영화(glorification)의 단계로 이어진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다. 이제는 하나님이 원래 계획하신 인간으로서 제 구실을 못하는 존재, 즉 스스로 하나님의 의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은 인간들을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구원하기를 원하셔서 방법을 마련해주셨고 사람들은 이 방법을 통해 실제로 구원을 얻게 되는데, 여기에서 장로교와 감리교의 설명이 갈리게 된다. 어떤 사람은 구원 받고 어떤 사람은 멸망 받게 되는데, 장로교는 이것이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무조건적인 예정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반면에 감리교는 이것을 선행은총으로 설명한다. 선행은총이란 글자 그대로 인간이 믿음으로 응답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보다 앞서 가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미처 깨닫기도 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미리 은총을 주셔서 (즉 이성과 양심과 자유의지를 어느 정도 회복시켜주셔서) 우리가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이다. 사람이 이 선행은총에 긍정적으로 반응하여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리는 것을 회개라 부른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총을 구할 때, 즉 회개하는 심령으로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우리가 믿음을 가질 때 칭의의 은총을 주신다. 이때 우리는 순간적인 구원의 경험을 하게 된다. 또한 우리가 칭의의 은총을 받을 때 그시로부터 성화의 과정이 시작되는데, 나중에 어느 순간엔가 죽기 전에 완전성화를 체험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전체 구원의 과정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은 성화인데, 웨슬리의 표현을 빌자면, 기독교를 집으로 가정할 때, 회개는 기독교의 현관이고 믿음은 문이고 성화는 기독교 그 자체이다. 그만큼 성화의 삶이 중요한 것이다. 웨슬리가 완전성화를 지상에서의 신앙의 목표로 제시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에 의문을 표시했다. 육체의 제한성을 지닌 인간이 어떻게 이 땅에서 완전을 이룰 수 있단 말인가? 웨슬리가 의미했던 바는 무의식적인 실수를 비롯한 모든 육체의 연약성까지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절대적 완전”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이런 완전은 천국에서 영화의 단계에 이를 때에야 가능한 것이다) 더 이상 우리가 의도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 “상대적 완전”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웨슬리는 완전성화의 특징을 의도의 순수성 (100% 의도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 상태) 그리고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온전한 사랑으로 설명했다.   3. 웨슬리 사중 신학방법론 (Wesleyan Quadrilateral) 감리교신학은 성서의 문자적 의미에 갇히지 않기 위해 교회전통과 개인경험과 보편 이성의 도움을 다각도로 이용하며 다양한 신앙의 전통을 존중하는 특징이 있다. 웨슬리는 일찍이 신앙에 관한 지침을 주는 권위(authority)로서 성서뿐만 아니라 전통과 경험과 이성의 도구를 사용했는데, 20세기 웨슬리 학자인 아우틀러(Albert C. Outler) 박사는 이것을 개념화하여 웨슬리 사중 신학방법론(Wesleyan Quadrilateral)이란 용어를 만들어내었다. 감리교인으로서 어떤 신앙에 관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전통적으로 위의 네 가지 방법을 사용하게 되는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사항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사중 신학방법론을 따른다고 할 때 성서와 전통과 이성과 경험 이 네 가지를 동등한 권위를 지닌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선적인 권위는 언제나 성서에 있는 것이고, 성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부차적으로 전통과 이성과 경험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현 시대에도 세례를 베풀어야 할까? 우선 성경을 보면 예수님 자신이 세례를 받으셨고 또 제자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셨다. 성경의 권위가 세례를 베풀라고 하였으니 당연히 우리도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 그러면 유아세례도 역시 시행해야 할까? 먼저 성경을 보면 성경에는 아이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명백한 구절이 없다. 그러면 유아세례를 시행하면 비성서적인 것이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여기에 이성의 도움이 필요하다. 성경에 “온 가족”이 한꺼번에 세례를 받았다는 구절이 많이 나오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그 “온 가족”에 당연히 아이들도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다. 교회 전통은 어떻게 증언하는가? 이단을 제외하고는 2000년 역사동안 교회에서 줄곧 유아세례를 베풀었다. 구약의 교회가 할례를 통해 아이를 구원 공동체에 가입시켰다면 신약의 교회는 세례를 통해 아이를 구원 공동체에 가입시킨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현재 경험은 어떻게 말하는가? 유아세례를 받게 하는 것이 받지 않게 하는 것보다 더 신앙의 유익이 있다. 유아세례를 통해 부모는 아이들을 신앙으로 양육할 것을 결단하는 것이고, 아이는 세례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믿음 가운데서 더 잘 자라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중 방법론을 거치게 되면 유아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상 감리교 신학을 세 가지로 정리하였다. 누군가 감리교 신학이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면 간단히 세 가지를 설명하면 된다. 감리교는 칭의와 성화중 어느 것도 등한시하지 않고 둘다 동시에 강조하며, 선행은총으로부터 시작하여 완전성화에 이르는 구원의 과정을 가르치고, 성서와 전통과 이성과 경험을 통해 신앙의 문제를 결정하는 균형잡힌 교회인 것이다.(이 글은 제가 [섬기는사람들] 2012년 9-10월호 20-21쪽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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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3
    화장(火葬)해도 천국에 갈 수 있나요? Publish on August 26,2012홍삼열
    가끔 연세드신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화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예수님 믿고 육신의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나중에 부활의 몸으로 천국에 들어간다고 믿고 있는데, 화장을 한 사람은 육체가 없으니 어떻게 천국에 가느냐는 것이다. 이런 논리에 근거하여 실제로 기독교인들 중에 화장을 비성경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화장을 기피하는 분들이 있다.그런데 정말로 화장한 사람은 부활의 몸을 가질 수 없으니 천국에 갈 수 없는 것일까? 정답은 천국에 갈 수 있다이다. 이유는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에게 주실 몸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썩는 몸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질적으로 다른 몸, 즉 썩지 않는 몸이기 때문이다.조금만 생각해보면, 육신이 불에 타 없어졌으니 부활하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 매장을 해야 한다는 것은 대단히 비논리적인 주장임을 알 수 있다. 우선 육신을 땅에 매장하면 그 육신이 얼마나 땅에 남아 있을까? 화장을 하는 것보다는 훨씬 오래 땅에 남겨지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육신도 다 없어져버린다. 길게 보면 매장이나 화장이나 마찬가지다. 또 과거에 믿음을 지키다가 화형을 당한 신앙인들이 많이 있는데 그들은 육신이 없으니까 천국에 못 간단 말인가? 초대교회 때 많은 신앙인들이 사자에게 찢기고 먹혔는데, 그러면 그들도 천국에 못 갈까? 아니면 사자에게 먹힌 부분만 빼고 불구의 몸으로 천국에 갈까?우리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하는 부활의 몸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우선 이 몸은 현재 우리가 가진 썩는 몸이 아니라 썩지 않는 영적인 몸이다. 질적으로 다른 몸이다. 또한 하나님은 각자가 사는 생활환경에 꼭 맞는 몸을 주시는 분이다. 그래서 물고기에게는 물의 환경에 맞는 특정한 몸을 주시고, 동물에게는 지상의 환경에 맞는 그런 몸을 주시고, 새에게는 하늘의 환경에 맞는 몸을 주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부활하게 될 때 하나님은 하늘나라에 꼭 맞는 몸, 즉 영광스럽고 영적인 몸을 우리에게 만들어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화장을 해도 장차 하나님이 신령한 몸을 만들어 주실 것을 믿고 안심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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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2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하기만 하면 구원 받을까? Publish on August 26,2012홍삼열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시던 부모님의 임종을 앞두고, 자녀들은 부모님이 천국에 가시지 못할까 봐 안타까운 심정에 억지로라도 부모님이 입으로 예수님을 시인하게 하려고 다방면으로 노력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로마서 10:10절에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그런데 정말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기만 하면 구원 받을 수 있는 것일까? 고백의 힘이 그렇게 절대적일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이 말로만 예수 믿는다고 시인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또 자기가 입으로 고백하는 내용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고백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엄격하게 따져서 사람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지 입의 고백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물론 짧은 시간이지만 제대로 복음을 제시받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후에 그것의 표현으로서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면, 그렇게는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입으로 시인하는 것을 마치 천국에 들어가는 입장권처럼 생각하는 것은 성경을 오해하는 것이다.우리는 성경에서 자주 사용하는 어법인parallelism(평행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두 가지 연속된 동일구조의 표현을 사용할 때 그것이 두 가지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내용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잠언 2:21절)는 구절이 있을 때, 이것이 정직한 자와 완전한 자 두 종류의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직한 자=완전한 자라는 한 종류의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같은 이치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말은 한 가지 내용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어법인 것이다. 아무리 마음으로 예수를 잘 믿어도 그것을 입으로 시인하기 전까지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믿음이 있으면 구원받는다는 뜻인 것이다. 마음으로 믿는 것은 입으로 시인하는 것을 뜻하고 의에 이르는 것은 구원에 이르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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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
    하나님께만 회개하면 다 용서받는가? Publish on August 13,2012홍삼열
    기독교 신앙에서는 용서가 대단히 중요하다. 용서는 사람이 새롭게 변할 수 있다는 절대 희망의 표현이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는 적극적인 사랑의 표현이다. 그런데 용서의 이런 선한 의도를 악용하는 사람들이 꼭 있다. 잘못된 행동을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말로만 잘못했다고 용서해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말조차 하기 싫어서 당사자에게는 용서를 구하지 않고 하나님한테만 용서를 구하는 사람도 있다. 2007년에 만들어진 [밀양]이란 영화가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영화의 여주인공은 신애라는 사람인데 남편이 죽은 후에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아들을 데리고 간다. 그런데 이 아들이 유괴범에게 납치되어 살해당하게 된다. 나중에 신애가 기독교인이 되어 성경의 말씀대로 용서할 마음을 갖고 아들의 살인자를 용서하려고 교도소에 찾아가게 되는데, 이 살인자는 자기가 이미 하나님께 회개했고 하나님은 이미 자신의 죄를 용서했다고 하면서 평온한 미소를 짓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다 용서해주었으니까 신애의 용서는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것이다. 기가 찰 노릇이다.이 사람은 성경을 자기 멋대로 이해한 것이다.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것만 알지, 그런 용서가 피해자의 마음과 입을 통해 전달된다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과의 깨어진 관계를 해결하지 못하고 하나님하고만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사람은 아무리 기도 열심히 하고 선행 열심히 해도 말짱 헛것이란 걸 모르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께 죄를 고백함과 동시에 실제로 죄 값을 치르는 행동을 포함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만일 내가 누구의 돈을 훔쳤다면 하나님께만 회개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피해를 본 사람에게 가서 돈을 갚아야 하는 것이다. 누구에게 말로 상처를 주어 낙심시켰다면 하나님께 눈물 흘리며 회개기도 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반드시 그 사람을 찾아가서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이 용서하신다. 용서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가서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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