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칼럼 27 페이지

본문 바로가기

목양칼럼

Total 218건 27 페이지
  • 62
    구원의 확신이있어야 구원받나요? Publish on November 05,2012홍삼열
    기존 신자들을 향해 구원파 이단이 사용하는 전형적인 무기가 있다. 그것은 “구원받으셨습니까?”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확실하게 구원받았다는 대답을 하지 못하면, 당신은 구원의 확신이 없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했다고 말해준다. 그런데 나는 구원받았다고 대답을 하면, 언제 몇 월 며칠에 구원받았냐는 질문이 이어진다. 육신의 생일보다 더 중요한 영적 생일을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 날짜를 알고 있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들에게 얼마나 구원의 확신이 중요하면 구원받은 날짜까지 알아야 한다고 하는 것일까? 이들은 구원의 확신=실제 구원이라는 등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럴까? 구원받은 사람은 반드시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하고,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다. 물론 확률적으로 볼 때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이 구원받을 확률이 높겠지만, 그렇다고 구원의 확신과 실제 구원을 동일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으로부터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판결을 받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들 중에 평소에 선지자의 일을 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고 기적을 행한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들의 죄목은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사이비 이단들의 경우를 생각해보라. 이들이 구원의 확신이 없기 때문에 지옥에 갈까? 아니다. 이들은 확신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통 기독교인들은 다 지옥 가고 자기들만 구원받는다는 확신이 너무나 투철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구원받은” 기독교인들이 차마 할 수 없는 일들도 이들은 “확신”에 차서 행하는 것이다. 구원의 확신은 꼭 필요하다. 신앙생활에 힘을 주고, 고난이 닥칠 때 흔들리지 않게 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감히 하나님께 속한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구원받고 안 받고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소관이지 나의 확신에 달린 문제가 아닌 것이다.
    Read More
  • 61
    일요일에도 장례식을 하나요? Publish on October 31,2012홍삼열
    기독교인들 중에 일요일에 장례식 하는 것을 꺼리는 분들이 있다. 일요일이 가장 바쁜 날이라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거룩한” 일요일에 장례식을 하는 것이 뭔가 기독교 신앙에 맞지 않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어떤 분들은 교회에서 장례식을 하는 것 자체를 꺼리는 분들이 있다. 장례식을 하려면 예배당에 시신이 들어와야 하는데, 이것이 “거룩한” 예배당의 성격에 맞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 기독교인은 그런 식으로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죽음을 피해야 할까?예로부터 우리 한국사람들은 죽음을 무서워했다. 그래서 고인이 돌아가시면 움직이지 못하도록 시신을 꽁꽁 묶었다. 관속에 누워있는 모습을 절대 보여주지 않았다. 장례식 때는 곡(哭)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덕스럽게 생각해서, 때로는 전문적으로 곡 하는 사람을 고용했다. 또 누군가가 초상집에서 나와 곧바로 새로 아이를 출산한 집에 가는 것도 금기시하였다. 그렇게 하면 죽음의 기운이 혹은 죽은 영혼이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로 와서 불길한 일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꼭 장례식장에 갔다 와야 하는 경우에는 곧 바로 집에 안 오고 중간에 다른 데를 들러서 따라오는 영혼을 떼어놓든지, 아니면 집에 들어오기 전에 소금을 뿌리거나 팥을 뿌리는 것이다.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죽음을 긍정적인 시각에서 본다. 특히 미국 교인들이 더욱 그러한데, 예를 들어 장례식을 할 때 죽음을 두려워하고 멀리하기보다는 죽음을 포용하고 고인의 삶을 축하(celebrate)하는 분위기를 보여준다. 왜 그런가? 기독교 신앙에서는 죽음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잠깐 잠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곧 눈물과 고통이 없는 천국으로 다시 깨어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부활이 반드시 육신의 죽음을 통과해야 한다는 점에서 죽음은 기본적으로 이땅의 삶과는 질적으로 다른, 어떤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믿음과 소망으로 붙잡아야 할 대상인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신앙안에서 죽음을 포용하며 일요일 오후에라도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르는 것을 꺼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Read More
  • 60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술 마시면 안 됩니까? Publish on October 31,2012홍삼열
    교인들 중에 또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 중에 이렇게 질문하는 분들이 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왜 술 마시는 사람을 죄인 취급합니까? 성경에 술 취하지 말라는 구절은 있어도 술 마시지 말라는 구절은 없지 않습니까?”원론적인 차원에서 성경은 술 마시는 것을 죄로 규정하지 않는다. 단지 술에 취해 사는 것을 죄로 규정한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교회에서 집사나 권사나 장로의 직분을 가질 수 없도록 되어 있다.(디모데전서 3;3,8) 또 한 가지 술을 비롯한 모든 음식에 관한 성경의 기본 입장은 사람이 먹고 마시는 문제 때문에 죄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을 더럽게 만드는 것은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음식의 종류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악한 것들, 즉 탐욕과 거짓과 질투와 음욕과 같은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술 자체가 사람을 더럽게 만들거나 죄인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그러면 과음하거나 술 취하는 것이 아니라면, 기독교인이 기호식품의 일종으로 술을 조금 마셔도 된다는 뜻인가?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개중에 정말 절제력이 탁월해서 진짜 조금 마시고 그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특히 건강유지를 위해서 집에서 혼자 마시는 경우), 현실적으로 술이라는 것이 한 잔으로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술을 마실 때 주로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와 어울려서 마시게 되는데 그럴 때 딱 한 잔만 하는 사람은 없다. 대개 술잔을 돌리면서 취할 때까지 마시게 된다. 이것이 한국 사람들의 술 문화인 것이다. 그래서 한국 사람의 술 소비량이 OECD 34개 회원국 중 최고이고, 소주를 비롯한 20도 이상 고도주(高度酒)의 소비량은 한국을 제외한 나머지 OECD 회원국 평균 소비량의 6배에 이른다고 하지 않는가?그래서 기독교인은, 특히 한국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몸을 지키기 위해서 약으로 필요한 만큼 마시는 것이 아니라면, 술을 멀리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교회의 이름으로 모인 경우나 교인들 간에는 절대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좋다. 술 마시는 것이 죄가 되기 때문이 아니라 신앙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Read More
  • 59
    교회 세습에 대하여 Publish on October 22,2012홍삼열
    최근에 한국의 감리교단 총회에서 교회 세습을 금지하는 교회법이 통과되어 교회의 자정능력에 대한 한 가닥 희망의 빛줄기를 비춰주었다. 아버지가 담임목사나 장로로 시무하는 교회에 아들이나 사위가 후임이 되는 길을 봉쇄함으로써 “권력”의 대물림으로 인해 생기는 많은 문제점들을 바로잡자는 것이 그 법의 취지이다.물론 이 법이 대상으로 하는 교회는 어느 정도 규모있는 교회들 혹은 대형교회들이다. 그런 교회들에서 후임 목사를 결정할 때 혈연적인 관계가 있다고해서 현 담임목사나 장로의 자녀에게 우선권 혹은 특혜가 주어진다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되고 교회에도 득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이다.그런데 개중에 그런 결정에 대해 이런 반론을 제기하는 분들이 있다. 아버지가 그 교회의 목사나 장로일 경우 새로 부임하는 목사의 뒤를 잘 봐줄 수 있어서 교회에 안정을 가져다 주는 장점이 있지 않은가? 사실 전혀 인척관계가 없는 분이 담임목사로 부임하는 경우 전임자와 목회방향이 너무  달라서 큰 혼란이 일어나는 경우를 경험하지 않는가? 또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 교회에서 목회를 하거나 아버지가 장로로 있는 곳에서 목회를 하는 경우 교회를 성장시키는 예들을 종종 보지 않는가? 따라서 아들이 “능력이 있다면” 굳이 교회세습을 마다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그러나 이런 주장은 나무는 보지만 산은 보지 못하고 현재는 보지만 미래를 보지 못하는 근시안적인 시각이다. 당장에는 이런 선택이 교회에 유익이 되는 것같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전체 기독교계를 고려할 때 또 미래의 기독교를 생각할 때 스스로 퇴보를 자초하는 행위이다. 왜냐하면 이는 제도적으로 교회의 현상유지를 지향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바깥 사회에서는 실패의 위험을 감수하고 무한경쟁을 하는 사람들에게 성공의 기회가 주어지는데, 교회에서는 공개경쟁을 거부함으로써 기존 세력에게만 안정적이고 쉬운 길을, 그것도 길어봤자 몇십년 못가는 길을 가자는 것인데, 이는 당장에는 좋아 보여도 결국에는 망하는 길이다. 길게 보자.그리고 믿음으로 모험을 선택하자.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다.
    Read More
  • 58
    왜 그런 하나님을 믿습니까? Publish on October 22,2012홍삼열
    성경을 읽다 보면 여러 가지 의문들이 생기는데 그 중 하나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왜 그렇게 잔인할까? 파괴적인 전쟁을 너무 좋아하는 것같다. 또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특별히 본받을 만한 고상한 존재가 아닌 것처럼 종종 묘사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신들을 섬길 경우 심하게 질투하고(출애굽기 20:5), 마치 혈기 있는 사람처럼 크게 분노하고(스가랴 8:2), 타당한 이유 없이 이스라엘을 편애하는 등 신의 품격에 잘 맞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이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선 우리는 성경이 수 천년 전에 생긴 문서라는 사실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성경은 당시 사람들의 윤리수준과 상식을 배경으로 하여 생겨난 문서이기 때문에 현대윤리와 상식의 잣대를 사용하여 비판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세계로 들어가서 그들의 현실과 윤리와 상식 수준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당시의 상황을 알면, 예를 들어, 성경에 나타난 전쟁의 잔인성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또 한 가지 우리는 신인동형론(anthropomorphism)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신인동형론은 신이 사람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성경에서 하나님을 어떤 인간적인 감정을 가진 것처럼 설명할 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인 표현이 아니라 제한된 능력을 가진 우리 인간들을 위한 표현인 것이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신에 관한 이야기를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자연히 사람 수준에 맞는 “유치한” 내용과 형식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아이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때 아이의 수준으로 내려가서 아이가 이해할 만한 내용과 형식으로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하나님이 질투하고 분노하고 편애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인간을 교화하고 인간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표현일뿐 하나님이 그렇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Read More
  • 57
    칭찬과 비판에 대하여 Publish on October 22,2012홍삼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이 있다. 바다에서 가장 무서운 육식동물로 알려진 범고래가 어떻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면 높이 뛰어오르는 묘기를 보여주게 되는가? 그것은 다름아닌 칭찬을 통해서라는 것이다. 오직 칭찬을 통해서라는 것이다.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책망과 비난을 하지 말고 (그냥 모른 체 하고) 잘 했을 때 칭찬하고 격려하면 훨씬 효과적으로 목표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분명히 칭찬은 사람을 세우고 조직을 성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칭찬은 정말 탁월한 가치를 지닌 덕목이다. 그런데 이 칭찬이란 것이 “무조건” 칭찬일 경우에는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것을 우리가 경험으로 안다. 어떤 칭찬은 당장에는 좋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득보다 해가 되는데, 칭찬의 도를 넘어서 아첨이 되는 경우가 그렇다. 목적이 상대방의 유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나 자신에게 있을 때 칭찬이 아니라 아첨이 된다. 격려의 말, 잘 한다는 말을 해줌으로써 그 사람이 이 말을 듣고 힘을 얻어 하는 일을 더 잘 하게 하려는 선한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말을 해줌으로써 내가 장차 그 사람으로부터 무언가 반대급부를 얻고자 하는 의도로 칭찬하거나, 아니면 그 사람이 나의 사탕발림으로 제대로 현실판단을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 사람을 결국 파멸시키고자 하는 아주 사악한 의도가 있는 경우 이것은 칭찬이 아니라 아첨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칭찬과 아첨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칭찬의 형태를 보고 그것을 무조건 좋은 덕목으로 여기지 말고, 칭찬의 의도가 무엇인가에 따라 가치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건전한 비판과 불건전한 비판을 구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건전한 비판은 듣는 사람을 세우기 위한 목적이 있지만 불건전한 비판 듣는 사람을 무너뜨리기 위한 파멸의 목적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7:1-2절에서 예수님이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말씀했을 때, 그 의미는 남을 무너뜨리기 위한 비판, 즉 비난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은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을 뭐라고 부르셨는가? 회칠한 무덤, 소경을 인도하는 소경, 외식하는 자, 마귀의 자식, 독사의 자식 등 너무나 신랄한 비판을 하셨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비판의 문제에 대하여 일관성이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예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의 목적은 그들을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여 결국 살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위의 두 비판의 경우는 형태는 비슷하지만 성격은 너무나 다른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말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인가 아닌가를 구분하는 기준은 그것이 비판인가 칭찬인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것이든 남을 세우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남을 무너뜨리려는 목적이 있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가 남을 무너뜨리려는 목적으로 말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칭찬이든지 비판이든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 반면에 우리가 남을 세우기 위해 말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비판이든 칭찬이든 좋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외형적인 말의 형태, 즉 그것이 칭찬이냐 비판이냐에 너무 신경쓰지 말고, 그것이 어떤 것이든 사람을 세우는 목적으로 사용되느냐 아니면 사람을 무너뜨리는 목적으로 사용되느냐에 신경써서 오직 사람을 세우고 사람을 살리는 말만 해야 할 것이다.
    Read More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