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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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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타클라라 연합감리교회를 위한 비전 Publish on January 21,2013홍삼열
    제가 지난 3월 23일 수요예배 때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교회의 비전을 함께 나눈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해서 이곳에 올려놓습니다. 그때 설교를 듣지 못하신 분들,  또 현재 우리가 3부 예배의 시작을 준비하는 시점에서 교회의 방향에 대해 알기를 원하시는 분들께 이 글이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 1. 예배가 살아 있는 교회 저는 우리 교회의 모든 예배가 살아 있는 예배, 하나님을 충만히 경험하는 예배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지난 주간에 Santa Rosa에 있는 수도원에 가 있었습니다. 주일이 되어 가까운 곳에 있는 미국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는데, 예배실이 5-600명이 들어가는 예배실이었습니다. 예배가 토요일 저녁; 주일 9:30; 11시에 세 번 있었고 box형 교회입니다. 예배형식이 굉장히 간단합니다. 10분 찬양; 5분 광고; 15분 찬양; 설교 30분; 마지막 찬양 5분. (헌금은 현관 여러 곳에 헌금함에 각자 넣게 합니다). 그리고 끝 (축도도 없습니다). 제가 예배를 드리면서 받은 인상은 찬양이 가수의 공연 같다는 점입니다. (회중이 따라 부르기 힘든 곡들, 그러나 듣기는 좋은 곡들을 연주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따라 부르지 않고, 찬양팀은 완전 professional들이고, 회중석 깜깜하게 하고, 무대는 색색 조명들을 바꾸어 가면서 분위기를 띄웁니다. 이렇게 한 동안 예배드리고 나서 밖에 나가니까 눈이 부셨습니다. 저는 이건 좀 문제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사람들의 참여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응이 없습니다. 그냥 시간 되어서 공연 보고 예배드렸다고 생각하고 집에 가는 것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여기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출석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 성인만 1000명은 족히 될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드리는 것은 일명 “구도자 중심의 예배”(seekers oriented worship)를 극단화시킨 것입니다. 좀 과하게 말하면,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철저히 비즈니스 마인드를 가지고 예배를 계획한 것입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 가기는 싫습니다.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은 좋지 않지만, 그렇다고 예배의 기본을 버리면서까지 이렇게 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방향으로는 가지 않을 것입니다. 구도자 중심의 예배이지만, 이렇게 극단으로 나가지 않은 한 예가 밴나이스의 church on the way라고 생각합니다. 오순절 계통의 교회인데 제가 밴나이스에 있을 때 여러 번 참석했던 교회입니다. 이 교회도 공식 예배가, 토요일 저녁이 1부 (주일에 봉사할 사람들 위주로); 그리고 주일에 여러 번 예배가 있습니다. 이곳의 예배 형태도 아주 간단한데, 한 30분 찬양을 하고 (찬양 중간 중간에 합심기도의 시간들이 있다); 30분 설교를 하고; 영상으로 광고를 하면서 동시에 헌금을 하고; 그 다음 찬양하고 축도하고 끝이 납니다. 이 교회에서는 찬양팀이 공연을 하지 않습니다. 회중석을 절대 어둡게 하지 않고, 극장식으로 조명을 바꾸지도 않습니다.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곡을 회중과 함께 합니다. over하지 않습니다. 저는 예배의 형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형태이든지 예배가 살아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완벽한 예배, 근사한 예배를 드렸어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으면, 그 예배는 망친 예배입니다. 전통적인 예배이든 구도자예배이든 극장식 예배이든 그 예배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그 예배는 무조건 망친 예배입니다. 그런 예배는 결국 교회를 죽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역에 따라, 문화에 따라, 연령층에 따라,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한국의 선교 초기에는 남자와 여자가 옆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면 절대 안 되었습니다. 이런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면 은혜가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만일 여자만 모이는 교회, 남자만 모이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다면, 이게 은혜가 안 되는 것입니다. 현대에는 이런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 특정한 예배 형태가 잘못된 것이라기보다는, 시대가 변했는데도 이런 변화를 조금이라도 수용하는 “겸손함”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의 본질을 생각하기보다 옛날부터 그래 왔으니까 당연히 지금도 그래야 한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교회 ministry의 본질을 망각하는 태도입니다. 교회가 왜 존재합니까? 교회는 기본적으로 남을 섬기라고 부름을 받은 것이지, 나 자신의 것을 즐기고 고집하라고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변화가 필요할 때는 변화에 순응하는 것이 예배의 본질을 지키는 신앙의 자세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전체적으로 봐서 젊어지기를 원한다면, 젊은 사람들이 원하는 예배의 형식과 내용을 도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손한 자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젊은이들에게 어필하는 예배를 하나 만들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열린 예배로 부를 수도 있고 젊은이 예배로 부를 수도 있고 구도자 예배로 부를 수도 있는데,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현대 젊은이들에게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는 형식을 우리가 도입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키타 치고 드럼 치고 청바지 입고 일어서서 찬양 드리면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이런 예배를 시도한 많은 교회들이 실패를 경험했는데, 그 이유가 본질을 취하는 대신에 형식만 따라했기 때문입니다. 열린 예배는 형식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의도에 관한 것입니다. 교회 ministry의 기본 방향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 편한 대로 자기중심의 ministry를 고집하면, 아무리 열린 예배 백 개를 만들어도 소용없습니다. 다 실패합니다. 우리가 내부지향적이 아니라 외부지향적이 되고, 현대의 젊은이들을 교회로 끌어들이는데 관심이 있다면, 우리의 마음가짐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궁극적으로 현재의 교인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라면, 밖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내부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그들을 편하게 해줄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밖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어떻게 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보다 잘 경험할 수 있게 도와주는가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되면 교회는 활기차게 성장하는 것이고, 이게 안 되면 아무리 많은 시도를 해봐도 해보나 마나 실패로 돌아갑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런 교회는 제 구실 못하는 단체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산타클라라 교회가 예배가 살아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노년층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젊은 층도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고, 2세들도 하나님을 경험하는 예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되면 우리 교회는 성장합니다.   2. 차세대를 키우는 교회 우리교회 인터넷 웹페이지에 보면, 산타클라라 연합감리교회 “사람을 키우는 교회”로 되어 있습니다. 이성호 목사님 때부터 있던 표현인데, 너무 적절한 표현이어서 저도 그대로 사용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 이민교회의 공통된 고민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 문제입니다. 1세대와 2세대가 함께 조화를 이루어 신앙생활하는 교회가 거의 전무합니다. 오랜 역사를 가진 이민교회들이 교회에서 2세들을 키웠는데, 이 1세들이 자라서 30대 40대 50대가 되었는데, 이들을 포용하고 함께 가는 교회가 거의 없습니다. 우리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가 차세대를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정의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가 집에서 아이를 사랑으로 키운다고 할 때, 그 의미는 그들에게 우선권을 준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조금 못 먹어도 아이의 미래를 위해 기쁘게 아이에게 투자하고, 내가 좀 멀리 드라이브해도 아이가 좋은 학교에 다니게 하기 위해 직장에서 멀리 집을 구하고, 내가 바쁘지만 아이의 학교에서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그쪽에 시간을 먼저 할애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아이를 사랑으로 잘 키우는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시각으로 볼 때, 우리는 우리의 2세들에게 충분한 배려를 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교회가 실수하고 있는 것이, 말로는 자녀들에게 신경 쓴다고 하고 그들이 우리의 미래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그들에게 우선권을 주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예배 시간 중 가장 편한 시간은 부모세대가 차지하고, 가장 좋은 공간도 부모가 차지하고, 아이들은 남은 것만을 줍니다. 재정도 배정을 할 때 아이들에게 우선권이 없습니다. 한인교회들이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자녀세대를 길렀으니 아이들이 스스로 움직이는 자유를 얻었을 때, 떠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제가 올해 교회수첩을 준비하면서, 우리 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하는 교회, 균형있게 성장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썼습니다. 사람의 몸에 특별한 병이 없고 건강하면, 자연히 자랄 수밖에 없습니다. 자라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균형있게 먹고 균형있게 운동하고 병이 없으면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우리 산타클라라 교회가 잘 자라기 위해서는 불균형을 치료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자녀 세대와 1세대의 불균형, 오래 믿은 사람과 새로 믿는 사람의 불균형, 나이 드신 세대와 젊은 세대의 불균형, 이것이 치유되면 자연히 우리 교회는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2세대를 키울 수 있을까요? 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녀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입니다. 건물과 시간과 재정에서 자녀들에게 우선권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들 세대가 큽니다. 현재 우리 교회는 공간의 제약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모임 공간이 부족합니다. 그럴 때 자녀들에게 우선권을 주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자녀들에게 필요하다면, 성가대 실도 양보하고, 대예배 시간도 양보하고, 친교실도 양보할 수 있는 마음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런 마음 자세가 아니면, 절대 우리 교회는 2세대를 품을 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 산타클라라 교회가 1세와 2세와 더 나아가 3세가 함께 신앙생활 하는 큰 그릇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오늘부터 자녀들에게 우선권을 주는 자세, 우리가 그들의 미래를 위해 기쁨으로 희생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되면 우리 교회는 반드시 2세를 품는 풍성한 교회가 됩니다.  3. 제자를 키우는 교회보통 교회성장에 대해서 의견이 갈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성장 하면 양적인 성장을 떠올립니다. 교인수가 늘고 매주 들어오는 헌금이 늘고 등등... 반면에 어떤 분들은 그런 양적 성장을 곱지 않은 눈으로 보면서, 진짜 성장은 그런 양적 성장이 아니라 질적 성장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배우고 세상에서 더욱 신자답게 사는 것, 이것이 교회의 진정한 성장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두 가지가 함께 가는 것이 정상적인 성장이라고 믿습니다. 요즘 현대인들은 편안히 교회에 다니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작은 교회는 더 작아지고 큰 교회는 더 커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지난 몇 년간 depression으로 사회전반이 어려워지고 교회들도 재정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는데, 이런 기간에도 꾸준히 성장하는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교회들일까요? 바로 대형교회들입니다. 작은 교회에 다니면 더 많이 헌금하고 더 많이 헌신해야 하는데 이게 부담이 되어서, 그런 거 안 해도 되는 대형교회들로 사람들이 몰리게 된 것입니다. 전체 교회들의 분포를 볼 때, 이런 식으로 양극화되는 것은 절대 건강하지 않은 현상입니다. 만일 어떤 나라에 중형 사이즈 기업은 거의 문을 닫고, 대기업과 소규모 기업만 주종을 이룬다면, 그 나라의 경제는 보나마나입니다. 아주 허약한 형태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중형교회들이 많이 있는 것이 건강한 형태인 것입니다. 숫자적으로 보면, 장년 200명 정도의 교회들이 주종을 이루면 이는 아주 건강한 형태인 것입니다. 그러면 현재 산호세 지역의 상황은 어떤가요? 이런 정도의 교회가 대부분인가요? 아닐 것으로 추측됩니다. 몇몇 큰 교회들이 있고 나머지는 작은 교회들일 것입니다. 교인수가 많다고 자동적으로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장을 이룬 교회는 아닙니다. 또 그렇다고 큰 교회는 항상 어떤 비윤리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그렇게 된 거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교회가 양적으로 커졌다면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함께 공존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산타클라라 교회의 성장을 출석인원이나 헌금의 양으로 재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얼마나 많은 제자가 양성되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싶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주님의 제자들을 키우고 그들이 맘껏 사역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교회에 주님의 제자들이 많아지면, 자연히 전도되는 숫자도 늘고 헌금도 늘게 되는 것이지, 그런 외적 현상을 목표로 추구하면 곤란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교회가 제자를 키우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말씀으로 훈련하고, 사역을 훈련하고, 직접 사역분야에서 도움을 받으며 일을 하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물질로 봉사로 헌신하는 이런 제자들이 많아지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가 제자를 키우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가 우리 교회를 생각해볼 때 현재로서 가장 필요한 것이 서로를 섬기는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시기도 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좇아내라고 하시기도 하셨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으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지만, 우리 교회의 현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서로를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발을 씻기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죠? “선생이 이렇게 했으니 너희도 이렇게 따라서 하라.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라.” 또 마태복음 20:28절에 보면, “주님은 섬김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제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남을 섬기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라기는 교회의 중직들이 먼저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목사와 장로님들이 먼저 섬겨야 다른 사람들이 섬깁니다. 정책을 결정하는 위원장님들이 먼저 섬겨야 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섬깁니다. “자기는 섬기지 않으면서 왜 나보고 섬기라고 해!” 이런 말이 자주 나오는 교회는, 예수님의 제자를 키우는 교회와는 거리가 먼 교회입니다. 그래서 목사와 장로님과 교회의 임원들이 먼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주차자리를 양보하고, 새신자들을 위해 편안한 예배시간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편안함을 포기하는 등등의 섬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럴 때 교회가 성장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의 상황에서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일자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내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남들, 특히 우리 교회에 경험이 많지 않은 사람들을 섬기는 방법입니다. 새로 교인이 오면 어느 시간이 지나면 교회에 봉사하고 싶어 합니다.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새로 봉사하려고 하면, 기존에 이미 봉사하고 있는 분들이 이걸 못 받아들입니다.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나설라고 해!” 교회마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이런 것이 교회의 전체 분위기이면 그 교회는 망합니다. 새교우들이 볼 때, 자기들끼리 꽉 쥐고 다른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되면, 아예 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이 반복이 되면 그 사람은 교회를 떠납니다. 그래서 비록 내 마음에는 안 들고 실수가 있을지라도, 새로운 사람들, 아직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일할 수 있도록 내 자리를 내주어야 교회가 성장합니다. 부엌일에서, 꽃꽂이에서, 성가대에서, 각종 봉사의 기회에서, 어떤 분야이든 기존에 열심히 일 하시던 분들이 자기 것을 남들에게 넘겨주는 섬김의 자세가 있을 때, 교회에 새사람들이 붙고 교회가 부흥합니다. 또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은 각 사역분야별로 boundary에 너무 지나치게 신경쓰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진짜 전도하고 기도하고 배우고 양육하는데 힘을 집중하지 못하고 (즉 ministry에 집중하지 못하고), 사소한 것이나 절차를 가지고 싸우고 변호하는데 시간과 힘을 낭비하면 교회가 성장하지 못합니다. 각 위원회에서 집중해야 할 것은, 내 위원회가 교회의 전체 방향에 부합하여 잘 가고 있는가? 더 잘 그쪽 방향으로 가기 위해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 이런 것들에 신경쓰며 힘을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위원회나 사람이 내 영역에 침범을 했다고 느낄 때,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런 실수가 한 두 번이고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일을 열심히 하려고 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라면, 교회의 덕을 위해 절대 소모적인 싸움을 시작하면 안 됩니다. 한두 번 실수는 그냥 넘어가주는 아량, 즉 섬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교회 전체에 이런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으면, 이 boundary 침범의 이슈로 공격을 당할 때 몸을 사리게 되고, 그 다음에는 아예 일을 하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더 이상 성장하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예배가 살아있는 교회, 차세대를 키우는 교회, 그리고 주님의 제자를 키우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하고, 그런 교회를 만드는 방향으로 목회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여러분들이 이 비전에 동참을 하신다면, 하나님은 우리 산타클라라 교회를 부흥 발전시켜 주실 것입니다. 제가 판단하기에 성인 1000명 정도가 되면 (아이들까지 1300정도가 되겠죠) 이곳에서는 교육관 2층을 올려도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 정도 되면, 제 소망은 저희 교인들 200가량을 떼어서 지교회를 세워 개척시키고 싶습니다. 이렇게 하면 좋은 점은 자동적으로 지도력이 갈려서 일할 기회가 많아진다는 점입니다. 이 정도 사이즈면 충분히 자체적으로 활동할 수 있고 경쟁력도 있게 됩니다. (또 이정도 사이즈의 교회가 많아지면 우리 산호세 교회들을 전반적으로 건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교회를 개척시키면, 하나님이 더 많이 채워주실 겁니다. 그 다음에 또 그 숫자가 차면 또 개척시키고, 이런 식으로 3-4번을 하고 싶은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저의 목회방향과 vision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었는데,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면 여러분이 기도하시는 중에 동일한 음성을 들려주실 것입니다. 함께 한 마음으로 비전을 추구함으로 이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더욱 굳건히 더욱 풍성히 세워나가게 되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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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천지 이단을 조심합시다 Publish on January 21,2013홍삼열
    최근에 산호세 지역에 신천지가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공격적으로 전도를 시도하고 있다. 심지어는 교회 목사에게까지 공개적으로 편지를 쓰고 팜플렛을 보내는 정도까지 되었다. 현재 산호세 지역의 대부분의 교회에 신천지가 들어와 있을 것으로 추측하는데, 이 글을 통해 신천지 이단의 기만적인 행태와 잘못된 신학을 지적함으로써 여러분들의 경계심을 높이고 주님의 교회를 보호하고자 한다.I. 교주 이만희의 신격화:신천지에서는 교주 이만희를 계시록에 나오는 “감람나무” “이긴 자,” 복음서에 나오는 “보혜사”로 즉 재림주로 가르친다. 신천지 홈페이지에 구약은 예수님을 약속했고 신약은 이긴 자(이만희)를 약속했다는 내용을 제목글로 넣고, 또 그들이 부르는 찬송에 “구원이 선생님께 있네, 심판이 선생님께 있네”라는 찬송까지 있다. (여기서 선생님은 이만희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그리고 계시록에 나오는 “생명책”이 곧 이만희가 가지고 있는 신천지 교적부를 의미하는 것이고, 이 교적부에 14만 4천명이 차면 인치는 역사가 시작되고 신인합일이 이루어져 이제는 신천지교인들이 죽지 않고 몸으로 영생하는 천년왕국이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이단 중에서도 아주 심한 이단의 모습이다.II. 신학의 뿌리:교주 이만희는 스스로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여러 번 밝힌 적이 있는데, 이런 학력수준에서 어떻게 현재상태의 정교한 신천지 교리가 나왔을까? 전 신천지 교육장이었던 신현욱씨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아래 인터넷 링크를 참조), 이만희가 신천지교리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이만희는 자기가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사실무근) 이전에 몸 담았던 기존의 여러 이단들에서 나온 것이다. 이만희는 57년 박태선의 전도관에 들어가서 교육을 받았고, 68년에는 유재열 장막성전에 들어갔다가, 78년 재창조교회의 백만봉 밑에 들어가서 이단사상을 배우게 되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자칭 구세주들이다. 이만희는 그들에게서 반복하여 사기를 당하다가 나중에 독립하여 “자기 가게”를 차린 것이다. 그래서 신천지교리에는 기존의 이단들의 교리들이 많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신천지신학의 근간은 전도관에서 나온 것인데, 동방, 시온, 감람나무, 두 증인, 천년성, 이긴 자의 신학, 그리고 격암유록(박태선을 메시야로 만들기 위해 조작한 가짜 조선시대 예언서)이 전도관에서 나온 요소들이다. 신천지의 기본 성경해석 방법인 짝풀이/비유풀이는 유재열의 장막성전에서 온 것이다. 그리고 통일교의 교리들도 들어왔는데, 1983-84년에 작성된 교리서인 [신탄]은 신천지의 입장에서 성경전체의 맥을 제공하는 책인데, 이 책의 저자는 통일교에서 넘어온 사람이다. (1990년 이후에 이 책의 여러 요소들에 대해 문제제기가 일어나자, 이만희는 자기가 쓴 것이 아니라고 발뺌을 함). 신천지교리는 이만희가 직접 하늘에서 계시받은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이단들에게서 배우고 종합한 체계라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III. 신천지 사람들이 전도에 올인(all in)하는 이유:신천지에서는 신자들에게 2-3년만 고생하면 종말이 온다는 기대감을 주입시켜서 그들을 직장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나오게 하여 전도에 올인하게 만드는데, 신천지는 이런 식으로 반복하여 30년을 끌어왔다. 신천지가 1980년에 시작하면서 이때로부터 계시록의 전 3년 반과 후 3년 반이 시작되어 87년에 종말이 온다고 주장했던 적이 있었다. 7년 환란이 끝나면 천년왕국이 시작되니까 사람들에게 자신을 희생하여 14만 4천의 숫자를 채우도록 독촉하였는데, 87년에 종말이 불발이 되자 이만희는 자기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발뺌을 하였다. (이미 신천지 책자에 그렇게 써놓았으면서도.) 현재 이만희가 80세가 되어 자기가 죽기 전에 14만 4천명을 채워야 하니까 (2011년 현재 신천지 교인수는 6만명 가량) 예전의 수준과는 상대도 되지 않을 만큼 대대적으로/공격적으로 전도활동을 펼치고 있다. 신천지 교인들은 죽자 사자 전도를 하는데 그 이유는 빨리 전도하여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 14만 4천의 숫자가 채워져서 천년왕국이 시작되어야 자기가 죽지 않고 육체적으로 영생하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신천지가 반사회적인 올인을 하게 되는 이유는 이 천년왕국과 육체적 영생의 교리 때문이다. IV. 신천지의 독특성:1. 무료성경신학원이단들 중 신천지만이 독특하게 성경신학원을 주요 “개종”의 도구로 사용한다. 기존의 이단들은 자체 교회를 세우고 사람들을 그곳으로 끌어들이는데 반해, 신천지는 사람들을 직접 교회로 끌어들이지 않고 그들에게 성경공부 하자고 유인하여 개인 성경공부를 하고 그 다음에 무료 성경신학원에서 공부하게 하고 여기서 완전히 신천지교리를 익힌 다음에 신천지교회로 들어오게 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사람들이 직접 신천지교회에 들어오려고 하면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신천지에서 교육을 받은 지 최소한 8개월 이상 되어야 신천지교회에 다닐 수 있다.) 직접 이단교회로 데리고 오면 이질감이 있어서 정착율이 많지 않지만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성경공부반으로 끌어들이면 초기에는 그들에게 이단성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점차적으로 신천지교리에 빠지게 하므로 대단한 효과가 있는 것이다. 2. 비유풀이신천지의 신학은 성경의 비유풀이를 통해 세워진다. (물론 다른 이단들도 이 방법을 사용한다.) 이들은 우선 종교개혁의 기본 원칙인 “오직 말씀으로만”의 가치를 기초로 하여 성경의 의미는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올바른 원칙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이 상식과 이성을 무시하고 이 원칙만을 주장하며 억지로 자의적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신천지에서는 한글개역판만이 진리라고 주장한다. 왜? 이만희가 받아먹은 책이 한글개역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마태복음 24장과 요한계시록만이 새언약이라고 주장하며 나머지 신약과 구약을 무가치한 것으로 버린다. 결국 신천지는 성경의 한 부분만을 편식하게 만들고 그것도 잘못된 해석을 제공함으로써 자신의 이단체계를 정당화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신천지에서 가르치는 것은 성경에는 짝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만이 아는 비유풀이의 방법을 통해 성경의 비밀스런 보물을 캐는 기쁨을 준다고 한다. 그렇다 보니 신천지에서 제공하는 짝맞추기/비유풀이는 기존 교회에서는 들어보지도 못하는 처음 들어보는 신기한 해석들이다. (기존교회에서는 이런 식의 해석이 말도 안 되는 것이어서 아예 언급을 하지 않으니, 새로운 해석일 수밖에!) 예를 들어보면 이렇다. 아가서 2:15절에 보면 포도원을 허무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게 무슨 뜻일까? 이사야 5:7절에 보면 포도원은 이스라엘이라고 되어 있다.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러면 현대판 이스라엘은 무엇인가? 교회이다. 그렇다면 결국 포도원=교회가 된다. 한편 여우는 에스겔 13:4절에 보면 거짓 선지자라고 되어 있다. “이스라엘아 너의 선지자들은 황무지에 있는 여우 같으니라.” 그러면 아가서에서 말하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는 의미는? 교회를 허무는 거짓 선지자들/목사들을 잡으라는 의미인 것이다. 결국 기존 교회의 목사들은 타도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각 구절이 위치한 문맥을 완전히 무시하고, 성경을 마치 수학 공식 풀듯이 해석을 하는 것이다. 더욱 황당한 해석이 있다. 신천지는 과천, 특히 과천의 청계산(淸溪山)을 성지로 여기는데, 그 이유는 청계산이 하나님이 강림하시는 곳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이런 해석이 나오는가? 청계산의 청(淸)은 푸를 청, 계(溪)는 시내 계, 산(山)은 뫼 산인데, 모세 때 “시내”산에 하나님이 임했으므로 현재도 “시내” 계(溪)자를 쓰는 청계산에 하나님이 임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Sinai가 시내/개울이란 말인데 해도 해도 너무 심한 넌센스이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영적으로 짝을 맞추어 해석한다고 하면서 자기들 원하는 의미를 만들어내는데, 이는 신비로운 해석이 아니라 대단히 잘못된 해석이다.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그래서 누군가 성경을 마치 암호코드를 연결해서 풀듯 해석을 한다면 이단일 가능성이 다분히 있는 것이다. 성경은 암호를 풀듯이 수학공식을 풀듯이 접근할 것이 아니라 앞뒤 문맥을 연결하여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 이런 식의 성경해석을 제시할 경우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반드시 그 단어나 구절로 찾아 들어가서 그것의 앞뒤 문맥을 연결하여 읽어야 한다. 그러면 신천지의 짝풀이/비유풀이가 완전 사기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3. 모략신천지에서는 전도대상에게 접근할 때 철저한 거짓말의 방법을 사용한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방법을 비윤리적인 것으로, 더 나아가 하나님이 금하시는 죄로 생각하는데, 신천지 사람들은 이것을 정당한 목적을 위한 모략 혹은 지혜로 생각한다. 대표적으로 추수꾼이라는 이름으로 가장하여 몰래 기성교회에 침투하여 교인들을 빼내가는 신천지의 비밀 침투가 이에 해당한다. 신천지는 기성교회의 비밀 침투를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이기 때문에 거짓과 위장의 “이리 옷 입기”(마 7:15 참조)라고 합리화하고, 교인 빼가기를 “도둑질 당한 밭의 우리 것 찾기”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기성교인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을 “모략”(사 19:17) 혹은 “뱀같은 슬기”(마 10:16)라고 하면서 거짓말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가르친다.우리는 신천지 사람들이 전도를 하기 위해 하는 말은 100% 거짓말이라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이들은 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접근을 한다. “내가 어제 꿈을 꿨는데 자매님 비슷한 사람을 만났어요... 자매님 전화번호가 갑자기 떠올랐어요...” 하면서 접근을 한다면 경계를 할 필요가 있다. 또 이들은 우연을 가장해서 교회로 침투하는데, 새로 이사 왔다고 하든지 본교회가 멀어서 주중에만 우리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든지 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그리고 이들이 거짓말을 할 때는 절대로 어설프게 하지 않는다. 여럿이 짜서 미리 예행연습을 하고서 접근을 한다. 때로는 설문지를 통해서 인적사항을 알아내어 다른 사람들을 통해 접근을 시도하고, 가가호호 방문도 하고, 선교를 위해 헌옷이나 성경책을 모은다고 하며 접근하고, 위장 문화센터나 복음방/카페, 혹은 정식 교단의 이름을 도용하여 위장교회를 세우는 방법들을 사용한다. 따라서 우리는 신천지가 다른 이단들과는 달리 거짓말로 무장하여 완벽하게 계획을 세우고 접근을 하기 때문에 특별히 경계를 해야 한다.그런데 이들의 정체를 잡아내기가 쉽지 않다. 쉽게 성경공부 하자고 유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완전히 상황이 무르익지 않으면 절대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또 성경공부를 하는 중에 신천지가 의심되어 혹시 신천지가 아니냐고 물으면 철저히 부인한다. 어떤 사람은 3년 정도까지 공을 들이며 준비하는 경우도 있다. 많은 경우 교회에 “고정간첩”들을 침투시켜서 (아니면 기존교인이 신천지에 빠지는 경우 교회에 남아 있으면서) 밖으로 정보를 내보내는 안테나 역할을 한다. 이 고정간첩들은 직접 성도들을 포섭하여 신천지가 운영하는 성경공부를 하자고 권유하지 않고, 단지 밖으로 고급 상세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교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며 교회에 환멸을 느끼는 사람들이 누군지, 목회자에게 불만이 있는 사람이 누군지 그 정황과 신상을 밖으로 전달하여, 다른 신천지 사람이 우연을 가장하여 그 사람을 접촉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한다.일단 기존 신자가 신천지 성경공부를 시작하는 경우 성경공부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면 절대 안 된다고 요구한다. 비밀을 누설하면 지옥에 간다고 협박한다. 이들이 즐겨 사용하는 성경구절은 마태복음 13:44의 말씀이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기뻐하며 들어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자신이 완전히 보화를 차지하기까지는 누구에게도 이것을 비밀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걸 못하면 영영 보화(영생)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신천지교리에 의하면,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교회에게도 거짓말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4. 공격적 전도하나님의 교회(안상홍과 장길자)는 교세가 20-30만이나 되지만 기존 교회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신천지는 6만밖에 되지 않는데 기존 교회에 대단한 가시적 피해를 입히고 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이들의 독특한 공격적인 전도방식 때문이다. 이들은 세상을 추수밭으로 보지 않고 기존 교회를 추수밭으로 보아서, 기존 교회에 집중적으로 추수꾼들을 보내어 그곳에서 개종자들을 만들어낸다. (즉 세상으로 전도 나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로 전도 나가는 것이다.) 이들은 일단 교회에 새신자로 등록하여 수년 동안 충성봉사하여 직분을 받고 임원이 되고 교회의 전반적인 신임을 얻은 후에는 의도적으로 목회자에 대한 문제를 일으키고 교회를 분열시킨다. 물론 이런 분열에 환멸을 느끼고 떨어져나가는 사람들은 신천지의 집중 포섭 대상이 된다. 소형교회의 경우에는 아예 임원회를 장악하여 목회자를 갈아 치우고 신천지 목회자를 후임으로 오게 하여 교회 전체를 먹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일명 “산 옮기기” 작전이다. V. 신천지를 방지하는 대책: 이렇게 공격적으로 교회에 침투해 들어오는 신천지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1. 새신자 등록시 철저한 신원확인을 할 필요가 있다. (실명, 이전 교회, 주소 등을 확인하고, 사진을 찍어둔다. 신천지는 신분이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이에 잘 응하지 않는다.) 그들은 가짜로 신상카드를 작성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심방을 통해 진실성을 확인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새로 오시는 분들이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잘못하다가는 새신자들을 내쫓는 부작용이 일어난다. 그래서 교회는 공식채널을 통해 이런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고 정중하게 그들의 양해를 구할 필요가 있다.2. 누군가 교회에서 모르거나 교회에서 허락하지 않은 성경공부로 유인하는 경우 반드시 목회자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신천지가 어떤 경로를 통해 접근을 하든지 마지막 중요한 관문은 성경공부이다. 누군가 개인적으로 성경공부를 하자고 하거나 (직장이나 가정으로까지 찾아와서 성경공부를 해준다고 함) 외부의 성경공부/집회로 유도할 경우 반드시 목회자에게 알려야 한다. 또는 자기가 잘 아는 선교사님이나 목사님 혹은 자기가 은혜 받은 전도사님이 있는데 함께 만나보지 않겠느냐며 은근하게 떠보는 것도 목회자에게 보고하도록 한다. 3. 대화중에 무심결에 씨, 보물, 밭, 나무, 새, 기름, 등불, 배도, 멸망 등의 용어를 자주 사용하는지 살펴보고, 성경의 난해한 구절을 질문함으로써 궁금증을 유발하거나 성경이야기를 할 때 특정 성경구절이나 단어들을 인용하여 그것이 마치 성경전체인 양 엮어서 해석하는 것을 발견하면 즉시 목회자에게 알린다. 성경은 문맥에 따라 해석해야지 마치 여기저기 흩어진 암호들을 연결시켜 해석하면 이단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4. 심방을 극도로 거부하는 사람, 자신의 집이나 연락처를 잘 가르쳐 주지 않고 나와서 교회에 충성봉사하는 사람, 기도할 때 안경을 벗는 사람 (하나님 앞에서 안경을 쓰는 것은 예가 아니라는 이유), 교회 비리나 목회자 비리에 많은 관심을 갖고 물어보는 사람, 혹은 목사의 설교나 목회활동에 대해 비상식적으로 비판을 하며 교회분열을 시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신천지를 의심해볼 만하다.5. 교회적으로는 이단 방지교육을 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이단들이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이나 내용은 서로 비슷비슷하다. 신천지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생겨날 이단들에 대처하기 위해 교인들을 대상으로 이단에 대해 교육할 필요가 있다.6. 교회중심, 목회자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절대 신천지에 빠지지 않는다.V. 신천지의 포교대상에서 제외되는 사람/교회:1. 성경에 전혀 관심이 없거나, 신천지 교리를 배워서 시험에 패스하기에 적절치 않은 사람 (노인층)2. 목사와 친밀하거나 목사의 설교에 은혜를 받는 사람3. 이단에 대한 경계심이 있는 사람과 신천지 이단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교회VI. 참고자료1. http://cafe.godpeople.com/onlygodsglory (서치엔진에 “갓피플 바로알자 신천지”라고 치시면 쉽게 이 사이트로 들어갈 수 있다. 신천지의 문제에 대한 온갖 자료들이 저장되어 있다.)2. 유튜브에 있는 신현욱 전 신천지 교육장의 간증, 약 2시간 가량의 분량. 이분은 신천지에서 나오기 직전에 2000여명의 교인을 가진 신천지교회를 담임했던 사람이다. 20년간 신천지에 몸담고 있다가 2006년에 신천지를 나왔다. http://www.youtube.com/watch?v=qSXxIu5QQjs&feature=results_video&playnext=1&list=PL2C482AE8DA75A2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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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우리의 선조들은 다 지옥에 갔나요? Publish on January 18,2013홍삼열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는지에 대해 분명한 가르침을 베푼다. 요한복음 14:6절에 보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방법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가르친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또한 우리가 이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이 우리가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선행을 많이 쌓으면 구원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분을 나의 구세주로 믿고 그분을 의지하여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우리는 스스로의 선행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무리 최선을 다하더라도 언제나 하나님의 수준에 미달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위에서부터 구원의 방법을 제시해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인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안 되니까 자신의 한계성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면, 그때 하나님은 예수님이라는 믿음의 대상을 주시고 우리가 그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에 이르도록 해주시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이제 선행이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선행을 많이 쌓아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게 되면 그 구원받은 자의 기쁨을 가지고 선행을 더 많이 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구원이다. 그렇다면 이런 구원에 관한 소식을 전혀 접할 기회가 없었던 과거의 사람들도 위의 기준으로 판정을 받아야 할까? 예를 들어, 고려시대에 살았던 우리 선조들은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두 지옥에 가야 할까? 또 현재에도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원주민들의 경우 그들도 복음의 길을 전혀 모르니 자동적으로 모두 지옥에 가는 것일까? 이 개념을 조금 더 확대하자면, 현재 복음이 전해진 이 미국땅에서도 자신의 선택과는 상관 없이 어떤 “합당한” 이유로 (우리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실 것) 복음을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지옥에 가는 것일까?   성경은 이에 대한 대답을 분명하게 제시해 주지 않는다. 단지 성경의 여러 군데에서 간접적으로 실마리들을 제공해줄 뿐이다. 하나님은 주로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보여주신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다. 하나님은 성경보다 크시기 때문에 성경 이외의 다양한 통로들을 통해서도 자신을 계시하신다. 대표적으로 자연을 통해 그리고 이것이 사람 속에 심겨진 형태로서의 양심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20)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도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말이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4-15) 율법이 있을 때는 율법이 기준이 되어 판단을 하지만, 율법이 없을 때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심어 주신 양심이 기준이 되어 스스로 판단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결국 여기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은 복음 이전과 이후의 모든 세대와 모든 상황에 자신의 뜻을 계시하셨고, 복음의 기회가 없는 곳에서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양심/생각의 잣대에 따라 구원의 여부를 판단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섣불리 과거에 죽은 사람들은 다 지옥에 갔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생긴다.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 사는 사람들이 다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꼭 전도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들 나름대로 천국 갈 사람은 천국 갈 것이고 지옥 갈 사람은 지옥 갈 텐데 굳이 우리가 큰 위험을 무릅쓰고 열심히 전도할 필요가 있을까?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지정하시는 어떤 척도를 가지고 그 사람의 구원의 여부를 판단해주실 텐데, 왜 굳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까?   이런 의문은 복음과 자연/양심이 가지는 근본적인 차이를 알면 해결이 된다. 원칙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은 성경이외의 다양한 통로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시기 때문에 자연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방법이 하나님이 복음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과 비교해서 너무나 불명확하고 희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곳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간에 길을 잘 못 들어 자연을 하나님으로 알고 숭배하는 토템신앙이나 우상신앙으로 빠지지 않는가? 그리고 윤리적으로도 너무나 타락한 상태에 빠지지 않는가? 이것이 다 자연이라는 통로가 가지는 계시의 불명확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복음이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가? 복음은 구원에 관한 가장 명확한 길을 제시해주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께 대적하여 고집을 부리며 거부하지 않는 한 복음의 길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비유를 들자면, 자연을 통해서는 100년간 수행을 해야 깨달을 것을 성경을 통해서는 몇분만에 깨달을 정도로 성경의 메시지가 분명하고 명확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미전도 지역이나 타종교의 영역으로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을 전할 때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100% 다 지옥 갈 사람들이라는 흑백논리를 가지고 접근하는 것은 성서적이지도 못하고 실용적이도 못하다. 흑백논리보다는 확률성을 가지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연과 양심은 너무나 불투명하기 때문에 확률적으로 그것에 의존하는 사람은 지옥갈 확률이 많은 것이고, 복음은 명확하기 때문에 그것에 의존하는 사람은 천국에 갈 확률이 많은 것으로 믿고 접근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겸손한 자세이고, 또 우리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도 배타적이지 않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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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5
    세례를 받지 않고 죽으면 천국에 못 가나요? Publish on January 07,2013홍삼열
    최근에 어느 교인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70세가 넘은 노인이 예수님은 잘 믿으셨는데 무슨 이유에선가 세례는 받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런데 이분이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자기 마음 속에 이런 의문이 들더라는 것이다. “세례를 받지 않아도 천국에 가는 데는 지장이 없을까?” “세례와 구원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중세시대에는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아담으로부터 전해지는 원죄를 용서받아야 하는데 이 원죄를 용서받는 길이 바로 세례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5) 그래서 성인이 되어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나 태어나자마자 바로 죽은 아기의 경우 혹은 혼외정사로 태어난 아이가 죽는 경우 (교회는 이런 아이에게는 세례식을 베풀지 않았다) 이들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면 현재에도 그렇게 믿어야 할까? 세례받지 못하고 죽는 사람은 무조건 천국에 못 가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세례를 받지 못해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천국에 간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믿음 때문이지 그 믿음이 외적으로 표현되는 어떤 특정 형식이나 예식 때문은 아닌 것이다. 세례란 무엇인가? 세례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표시하는 구원의 예식인 것이다.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현대적 예를 들자면 아마 결혼식이 될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여 같이 일생을 보내고자 할 때 결혼식을 하게 되는데, 사실 엄격하게 따져서 결혼식을 해야만 결혼생활을 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혼식 없이도 행복하게 결혼생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결혼식을 하는 이유는 두 사람이 서로 간의 사랑을 확증하기 위해서이다. 만인들 앞에서 부부가 된 것을 공포하고 서로에게도 최선을 다해 부부의 사랑을 유지하겠다는 서약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결혼생활을 더 잘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은 우리가 이미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녀, 구원받은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사람들 앞에 공포하는 것이다. 물론 세례를 받지 않고도 충분히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 갈 수 있다. 그러나 아주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는 한,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그 자녀됨을 확증하는 예식인 세례식을 거치게 마련인 것이다. 마치 이미 부부의 사랑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일반적으로 그 사랑을 확증하는 예식인 결혼식을 거치게 마련인 것처럼 말이다. 이제 위에서 제기된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자. 70이 넘으신 노인이 예수는 잘 믿으셨는데 세례를 받지 않고 돌아가셨는데 과연 이분이 천국에 가셨을까 아니면 가지 못하셨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왜 그분이 세례를 받지 못했는가의 이유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만일 그분이 세례를 받고 싶은 의도는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인해, 예를 들어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확증은 있지만 미처 세례를 받기 전에 급작스레 돌아가셨다든지, 아니면 세례식을 베풀 목사가 없는 미선교지역에 살고 있다든지, 아니면 집안 사정상 본인이 세례를 받으면 큰 불상사가 나기 때문에 세례받는 것을 잠시 미루다가 돌아가셨다든지, 이런 비슷한 이유로 세례를 받지 않으셨다면 그분은 천국에 들어가셨다고 믿어도 될 것이다. 세례의 본질인 죄사함의 확신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고 세례를 받고자 하는 의도가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그분이 세례를 받지 않은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녀됨의 확신이 없기 때문이라면 그분이 천국에 가지 못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사실 세례를 받았건 받지 않았건 상관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천국에 가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례와 구원을 동격에 놓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세례를 받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사함과 하나님의 자녀됨을 믿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고, 세례를 받지 못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믿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믿으면 구원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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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으로 예배 드리면 안 됩니까? Publish on January 07,2013홍삼열
    최근에 어떤 교우를 통하여 이런 질문을 받았다. “일요일에는 꼭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집에서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면 안 되는 겁니까?”   인터넷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꼭 필요한 상황들이 있다. 병이 들어 교회에 나갈 수 없을 때, 육지로 나오기 어려운 외딴 섬에 살 때, 회교권 국가들같이 종교탄압이 심한 지역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할 때, 그리고 그밖에 예배당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싶어도 여러 가지 불가피한 상황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을 때 차선책으로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이렇게라도 예배 드리는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큼 열심이 있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의 마음은 이미 예배당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불가항력적인 상황 때문이 아니라 개인적인 편의 때문에, 즉 바쁘다거나 귀찮으니까 집에서 혼자 인터넷으로 예배드리고 가끔 마음이 감동될 때 온라인으로 헌금을 하는 것은 전혀 예배의 정신에 맞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가면 보기 싫은 사람들과 마주치게 되고 더 나아가 교회 활동에 참여하게 되면 꼭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에 자신의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집에서 혼자 신앙생활하는 수밖에 없다고 느껴서 혼자 집에서 예배를 드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도 역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이런 식의 예배는 절대 오래 가지 못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마치 영양분이 골고루 들어 있는 정상적인 음식을 먹지 않고 패스트푸드를 먹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언제 패스트푸드를 먹는가? 급할 때, 정상 음식을 준비할 시간이 없을 때 편의상 먹게 되지 않는가? 그런데 이런 식으로 계속 패스트푸드를 먹으면 어떻게 되는가? 영양실조에 걸리고 온갖 종류의 성인병에 걸리게 된다. 그런 방식으로는 절대 충분히 균형잡힌 영양을 섭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패스트푸드는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상황에만 허용되어야 하는 것이지 일상적인 식사의 패턴이 된다면 반드시 건강에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마찬가지로 인터넷 예배가 그렇다. 인터넷 예배로는 정상 예배를 통해서 얻어지는 충분한 은혜가 골고루 전달되지 않는다는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가지고 예배라고 하는가? 단순히 설교 하나만을 가지고 예배라고 하지는 않는다. 설교가 예배의 중요한 부분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에 더하여 다른 성도들과 함께 드리는 찬양과 기도와 신앙고백과 성만찬 등등 이 모든 것이 합하여 온전한 예배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시는 통로는 설교말씀만이 아니다. 하나님은 설교를 포함한 모든 가능한 통로를 이용하여 우리에게 각자 필요한 은혜를 주시는 것인데, 우리가 설교를 유일한 은혜의 통로로 한정하려 한다면 이는 대단히 건강하지 못한 모습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의 몸이 예배당 안에 들어와 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예배당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예배의 부분들에 믿음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동참할 때 그것이 나의 예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편의 때문에 집에서 인터넷 예배를 드리는 분들이 과연 이런 식의 적극적인 동참의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분들은 사실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보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집에서 인터넷으로 설교를 듣는 것은 마치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를 youtube로 듣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직접 공연장에 가서 노래를 듣는 것에 비해 집에서 youtube로 음악을 듣는 것이 얼마나 쉬운가? 그런데 직접 라이브로 음악을 들으면 어떤가? 정말 다르다. 감동을 받는 정도가 천지차이이다. 마찬가지로 집에서 혼자 인터넷으로 예배드리는 것은 직접 교회에 와서 성령의 임재가운데 예배 드리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된다. 은혜 받는 정도가 천지차이이다.   또 한 가지 집에서 혼자 예배드리는 것과 관련하여 명심해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은 개인적이라기보다는 공동체적이라는 사실이다. 즉 우리의 신앙은 주님이 세우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우리는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몸의 각 지체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절대로 제자들을 따로 떼어서 개인별로 신앙을 가르치지 않으시고, 그들 모두를 함께 데리고 다니시면서 공동체에게 믿음을 가르치셨다. 신앙생활은 함께 하는 것이지 절대 개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10:25절의 경고를 새겨 들어야 한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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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아담의 죄 때문에 나도 죄인이 되어야 하나요? Publish on November 23,2012홍삼열
    성경에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는데 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내가 죄인이 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너무 불공평하고 불합리하지 않은가? 아담이 죄를 지었으면 아담 혼자서 그 벌을 받으면 되는 것을, 왜 그의 후손들이 아담이 지은 죄값을 계속 치러야 한단 말인가? 죄인이란 낙인이 찍힌 채로...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것을 원죄(原罪)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를 지니고 태어나기 때문에 죄의 행동을 하기 이전에 벌써 죄인이라는 것이다. 성경의 여러 구절이 이를 뒷받침한다. 사람이 마음으로 계획하는 것이 어려서부터 악하다고 하고(창 8:21), 다윗은 자신이 죄악 중에 출생하였으며 그의 어머니가 죄 중에 그를 잉태하였다(시 51:5)고 고백한다. 또 신약성경에도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사람이 없다(롬 3:23)고 선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죄인이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도 바울은 이것이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범한 죄에 기인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아담 한 사람 때문에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 후로 모든 사람이 이 원죄(original sin)를 전달받아 자동적으로 죄인이 되는 것이고 그 결과 모든 사람이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원죄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경로를 통해 부모에게서 자녀에게 전달된단 말인가? 전통적인 설명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원죄가 육신적으로 자녀세대로 유전된다는 설명이다. 마치 부모가 흰색 피부를 가지고 있으면 그 유전자가 자녀에게 그대로 전달되듯이, 부모의 죄성도 육신의 경로를 통해서 자녀들에게 유전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죄를 짓게 하는 성질은 육신의 DNA와 별 상관이 없을 것 같은데 너무 유물론적인 설명이 아닐까? 둘째 설명은 아담이 온 인류를 대표한다는 대표성의 원리이다. 국회위원들이 국민을 대표해서 법을 만들면 국민들은 자동적으로 자신이 그 법을 만든 것으로 간주되어 스스로 그 법의 구속을 받는 것이고, 국가대표 선수가 올림픽에서 우승을 하면 단지 그 개인이 우승을 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대표해서 우승을 한 것이기 때문에 그 선수를 통해 국민 전체가 우승을 한 것이 된다는 논리이다. 같은 이치로 아담이 인류의 조상으로서 죄를 지을 때 그것은 모든 인류를 대표해서 죄를 지은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현재 이곳에 사는 내가 죄인으로 불리는 것이 절대 억울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런 설명방법보다 다른 차원에서 이 문제를 접근하고 싶다. 즉 경험적인 차원에서 접근하고 싶다. 원죄라는 것을 위와 같이 물질/육체의 차원이나 대표성이라는 개념의 차원에서 설명하기보다는 모든 사람 속에 들어 있는 죄의 경향성으로 보면 어떨까? 우리가 경험으로 아는 사실이 있는데, 사람은 누구나 선천적으로 선과 악을 함께 지니고 태어난다. 그런데 아이를 그냥 놔두면 그 아이가 악한 쪽으로 발전할까 아니면 선한 쪽으로 발전할까? 십중팔구는 악한 쪽으로 발전한다. 선한 것은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교육시켜도 잘 습득이 되지 않지만, 악한 것은 가르치지 않아도 아이들이 알아서 습득하여 즐겨 행하지 않는가? 이것이 우리의 공통된 경험이다. 그렇다면 이 사실이 뭘 말해주는가? 인간이 행하는 악행은 단순히 나쁜 환경이나 좋지 않은 DNA를 탓하기에는 너무나 심각하고 근본적인 뿌리의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것들로 설명이 불가능한 이 근원적인 무언가가 있는데,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원죄로 설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죄인이 된 것에 대해 아담을 탓하거나 아니면 아예 원죄의 불합리성을 지적하며 원죄의 개념 자체를 부인하는 것보다는 현재 나의 죄성을 겸허히 인정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 보다 나은 미래를 지향하는 현명한 자세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의 죄성을 인정하는 것이 문제의 해결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태도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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