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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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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인가? Publish on July 01,2013홍삼열
    어떤 분이 하나님의 공평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때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이 자기에게 극심한 고난을 주시지 않았다면 (혹은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았다면) 자기는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예기치 않은 고난이 닥쳤기 때문에 자신을 깊이 되돌아볼 기회를 얻었고, 그것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육적인 영적인 복을 많이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그런데 자신의 친구를 볼 때면 너무나 안타깝고 불쌍한 마음이 든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곁에서 이 친구를 보아왔는데 이 친구의 인생은 물질적으로도 풍요로울 뿐만 아니라 큰 고난도 닥친 적이 없어서 자신의 죄성을 돌아볼 필요도 없고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아무리 비윤리적으로 살아도 그 어떤 하나님의 징벌도 없으니 자신의 삶의 패턴을 바꿀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자기를 큰 고난으로 다루신 것처럼 그 친구도 똑같이 다루신다면 그도 자신의 죄성을 깨닫고 하나님을 믿게 될 것 같은데, 왜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는 것일까? 하나님은 원래 불공평하신 분인가? 왜 나에게는 고난을 통해 회개로 이끄시는 은혜를 주시고 그 친구에게는 그런 은혜를 주시지 않는 것일까?하나님의 공평성에 대한 의문은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사람들의 마음에 끊임없이 제기된 질문이다. 물론 성경에도 이에 대한 원초적인 질문이 담겨 있다. 왜 하나님은 장자로 태어난 에서를 버리고 차자로 태어난 야곱을 선택하셨는가? 그것도 그들이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그렇게 되기로 결정되었다는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또 야곱은 간사하기 그지없는 사람인데 왜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것일까? 이것이 곧 하나님의 불공평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또 욥기에 보면 하나님이 동방의 의인이라고 인정받는 욥에게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초대형 고난들을 주시는데 너무 불공평한 것이 아닌가? 그런 재앙은 극악한 죄를 짓는 사람들에게나 내려야 할 것같은데... 하나님의 공평성에 대해 여러 가지 차원의 설명이 가능한데 그 중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것이 인간사고(思考)의 한계로 설명하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리 인간이 객관적이고 거시적으로 본다고 해도 신이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전체 그림을 보시지만 우리는 시공의 제한성에 갇힌 일부분만을 본다는 한계가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음악을 들을 때 한 박자씩 연속해서 듣고 영화를 볼 때면 한 장면씩 연속해서 보면서 전체를 이해한다. 시간을 초월해서 단번에 전체를 듣거나 볼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공을 초월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음악을 들으실 때 순차적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들으시고 영화도 단번에 다 보시는 것이다.이런 이유로 이 세상에 일어나는 어떤 사안에 대해 우리 쪽에서 불공평하게 보이는 것이 하나님 쪽에서는 충분히 공평한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잘 보아 봤자 시간과 공간의 제한 속에서 보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 위에서 보시기 때문에 전체 그림을 보시면서 계획하시고 실행하시는 것이다.가끔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불공평하다는 불만을 듣는다. 자녀들 생각에는 이렇게 하는 것이 공평한 것인데 부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정반대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진짜 불공평한 판단인가? 그렇지 않다.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보는 자녀에 비해 더 크게 보고 더 넓게 보는 부모는 공정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은 공평해야 한다는 명제를 믿는다면 그 명제 뒤에는 하나님의 시각에서의 공평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아무리 우리 쪽에서 공평하게 보이는 일도 하나님 쪽에서 볼 때 공평하지 않다면 그건 불공평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 쪽에서 불공평하게 보여도 하나님이 보실 때 공평한 것이라면 그건 공평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평성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언제나 겸손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공평성의 수준을 뛰어넘는 초월자라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하고, 비록 내가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공평한” 결정을 신뢰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자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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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3
    왜 기독교인들은 안식일 대신 주일(主日)을 지키는가? Publish on June 03,2013홍삼열
    성경에 보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명령은 있지만 주일을 지키라는 명령은 없다. 그런데 왜 성경을 믿는다고 하는 기독교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키는 것인가? 이 질문은 주로 안식교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 이단이 기독교에 대해 제기하는 질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이와 비슷한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꽤 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이 성서적인가? 구약의 안식일이 기독교의 주일이 된 것인가? 아니면 그 둘이 원래 서로 다른 것인가?또 한 가지 안식교에서 비판하는 내용이 있다. 로마황제 콘스탄틴이 321년에 일요일을 휴일로 제정했는데 이것이 기독교가 하나님 신앙을 배반한 증거라는 것이다. 일요일은 원래 이교도들이 태양을 기념하는 날(Sun-Day)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그런 이교도의 날을 거룩히 지킨다는 것은 배교행위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안식교는 계시록에 언급된 “짐승의 표”가 바로 이 주일을 지키는 “배교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주일을 지키는 사람들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지옥에 갈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이런 비판에 대해 우리 기독교는 어떻게 대답하는가? 우선 간단히 대답해 줄 수 있는 두번째 것부터 생각해보자. 콘스탄틴이 일요일을 휴일로 제정해서 기독교의 주일예배를 도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히 해둘 것은 콘스탄틴 이전에 벌써 신약시대부터 기독교인들은 주일을 지켜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때는 “일요일”이란 명칭 대신 “안식후 첫날” 혹은 “주의 날”이란 명칭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후대에 붙여진 이름을 가지고 기독교인들이 배교를 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약간 유치스런 차원에서 대답을 하자면, 만일 기독교인이 일요일(Sun-Day)을 지키기 때문에 배교자가 된다면 안식교인이 토요일(Saturn-Day)를 지키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말인가? 안식교인들과 유대인들은 농업의 신인 토성(Saturn)을 숭배하고도 배교를 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 다음 주일을 지키는 것이 성서적이지 못하다는 안식교의 비판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신약성경을 잘 읽어보면 이미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 주일을 지키는 것이 정착되었고 더 나아가 안식일에 집착하는 것이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과 정반대된다고 기록되어 있다.신약시대에 이미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후 첫날”에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들이 안식일이 아닌 주일에 모인 이유는 이 날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가장 초기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성전제사에 참여하고 그 다음날 자체적으로 말씀과 기도와 친교를 위해 모였고, 그 다음 교회가 형성되어 가면서 점차적으로 주일만 지키게 되었다. 초기 신자들이 주일에 모였다는 예는 성경에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 우선 교회의 시작으로서의 성령강림이 바로 주일에 일어났다.(사도행전 2:1) 그리고 신자들이 교회로 모일 때면 주일에 모였다.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사도행전 20:7)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고린도전서 16:2) 또한 요한은 “주일”이란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이미 주일의 개념이 정착된 것을 밝히고 있다. “주일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계시록 1:10)반면에 성경은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따르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실체는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로새서 2:16-17) 여기에 보면 안식일에 매여서는 안 된다고 하는 이유가 분명히 제시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안식일은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만 역할을 하는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이미 실체이신 예수님이 오셨으니 당연히 안식일은 폐지되어야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된 안식일을 강요하는 것은 신약성경에 반대되는 행위인 것이다. 언젠가 안식교에서 발행하는 잡지에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마태복음 12:8)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은 충실한 안식일의 수호자이고 따라서 주일을 지키려거든 안식일을 주일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런데 이런 식의 해석은 문맥과는 정반대로 가는 엉뚱한 해석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었을 때 유대인들이 이를 비난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비난을 들으시고 자신은 안식일보다 크시다는 의미로 “나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시고, 안식일에 얽매이는 것은 안식일의 원래의 정신, 즉 자비를 원하는 하나님의 뜻에 정반대로 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하시고나서 곧 바로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쳐주는 일을 하셨다. 이로 보건대 예수님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는 정반대로, 마치 일부러 안식일을 범하기 위해서 오신 분같이 행동하신 것이다.사실 신약성경을 아무리 자세히 읽어봐도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은 단 한 군데도 나오지 않는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안식교에서 주장하는대로 예수님이 충실한 안식일의 수호자라면 적어도 한번쯤은 분명하게 “안식일을 꼭 지켜라, 안 지키면 지옥간다” 이런 말씀을 하셔야 옳지 않은가? 그런데 성경에는 그와 비슷한 구절이 단 한 군데도 없다. 예를 들어 구약의 십계명은 신약에서도 계속 반복되어 강조된다. 그런데 유독 십계명중 안식일에 대한 계명만은 전혀 언급이 없다. 왜 그럴까? 예수님은 안식일을 지속하는데 전혀 관심이 없으셨던 것이다. 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나? 요한복음 5:18절에서 대표적으로 두 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는 예수님이 상습적으로 안식일을 범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스스로를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로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또한 사도들 역시 설교하거나 교회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왜 그럴까? 안식일은 구약에 속한 것이지 신약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구약성서를 살펴보아도 이 안식일 제도가 태초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영원한 율법이 아닌 것을 발견하게 된다. 즉 안식일 제도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역사의 어느 한 시점에 주신 제도인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하실 때 6일동안 만물을 창조를 하시고 7일째 쉬셨다는 내용은 나오지만, 에덴동산에서나 그후의 역사에서 모세의 시대 이전에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이 어느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에녹이나 아브라함이나 요셉이나 할 것없이 모세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안식일을 지켰다는 기록이 없다. (안식일이란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출애굽기 16:23절에서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정리하면 된다. 안식일은 분명히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지만 이것은 영원히 지속되어야 할 제도가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시작되는 새로운 세계 이전까지만 적용되어야 할 한시적인 제도인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4:9-11절에서 안식일제도를 비롯한 구약의 제도들을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부르는 것이다. 예수님의 시대, 성령의 시대에는 이제 “고등학문”의 수준으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바울은 여기에서 “날과 달과 절기와 해”에 집작하는 것이 초등학문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즉 고차원적인 자유의 복음에 반대되게 스스로 율법의 굴레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아니 적어도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안식일에 집착하는대신 예수님의 부활의 날인 주일을 지키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이제 왜 기독교인들은 주일을 지키는가에 대한 이유가 명확해졌다. 그 이유는 안식일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한시적으로 주신 “그림자” 제도이지만, 주일은 부활을 통해 구약을 완성하신 우리 주 예수님을 예배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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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2
    일요일에는 운동경기에 참가하면 안 되나요? Publish on April 29,2013홍삼열
    기독교인으로서 일요일에 운동경기에 나가도 되는가에 대한 논의가 있을 때마다 종종 언급되는 이야기가 있다. 1924년 파리 올림픽에서 400m 경주에서 우승을 한 에릭 리델(Eric Liddell)의 이야기이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철저한 주일성수를 믿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올림픽 선수로 발탁되어서 경기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주종목인 100m 경기가 주일에 열리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때 자신은 주일에 절대 시합에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고 100m 경기 대신에 평일에 열리는 400m 경주와 200m 경주를 위해 연습하였다. 그런데 실제 올림픽에 나가서 경주를 했는데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나왔다. 그는 400m 경주에서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며 금메달을 땄고 더 나아가 200m 경주에서는 보너스로 동메달을 딴 것이다. 주일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세상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더니 하나님께서 놀라운 복으로 보답하셨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마음이 편치 않은 분들이 있다. 주일에도 일을 해야 하는 경찰관들, 의사나 간호사들, 24시간 계속 돌아가야 하는 공장에서 근무하는 사람들, 스포츠 선수들, 특히 체육에 특기가 있는 아이들이 꼭 주일에 열리는 경기에 참가해야 하는 경우 등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피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 만일 주일성수를 해야 하기 때문에 주일에는 절대 일을 못한다거나 경기에 참가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이는 결국 직업을 포기하고 운동을 포기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인데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과연 내가 진짜 기독교인이라면 주일에는 무조건 일을 하지 말고, 극장이나 전시회에 가지 말고, 동창모임에도 나가지 말고, 학생들은 시합에 나가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 우선 성경에서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를 살펴보자. 현재 주일을 거룩히 지켜야 한다고 할 때 이 개념은 구약시대의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의 연장으로 이해하면 된다. (어떻게 구약의 안식일이 신약의 주일로 변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번 글을 통해 설명드리도록 하겠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의 중심에는 쉼/휴식의 개념이 있다. 출애굽기 20:8-1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7일째 쉬신 것같이 우리도 쉬어야 한다고 명령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쉼은 이 계명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뿐만 아니라 집에서 부리는 종들과 잠시 머무는 객들과 심지어 짐승들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일주일에 하루를 이렇게 철저히 쉬라고 하시는 것일까? 이유는 우리에게 쉼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엄격히 따져서 하나님에게는 쉼이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은 절대 피곤해 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태초이래로 지금까지 쉬지 않고 계속 우주를 운행하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도 이점을 강조하며 자신도 역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안식일에도 계속 일한다고 말씀하셨다.(요한복음 5:17)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안식일 계명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유익, 즉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안식일 계명이 우리에게 어떤 생명의 유익이 있는가?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우선 하나님은 우리에게 육신의 휴식을 명령하심으로써 육신의 생명을 유지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계시다. 간혹 우리 주변에 하루도 쉬지 않고 일주일 내내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중에 반드시 몸이 망가지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주일에 하루를 쉬어야 건강이 유지되도록 창조하셨다. 그런데 우리의 생명이 잘 유지되기 위해서는 몸만 쉬면 안 된다. 인간은 몸이 있는 동시에 영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몸의 안식과 더불어 영의 안식을 취해야만 한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영의 안식을 취하게 되는가? 그것은 우리의 생명을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복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배드리고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통해 죄의 문제를 해결받음으로써 영적인 안식을 취할 수 있다. 그래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명령에는 두 가지 요소, 즉 일로부터의 쉼(육신의 안식)과 동시에 예배를 통한 영혼의 쉼의 요소가 함께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육신의 안식과 영혼의 안식을 위해서 무조건 일요일에는 일을 쉬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특별한 사정이 있는 사람은 일요일 대신에 평일 중 하루를 쉬면 되지 않을까? 이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이 안식일에 대해 말씀하신 기본원리를 이해하면 해결될 수 있다고 본다. 안식일의 목적이 무엇인가? 육신과 영혼의 쉼을 통해 궁극적으로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고 증진시키자는 것이 안식일의 목적이 아닌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마가복음 2:27절) 따라서 안식일 법은 사람의 생명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이해되고 시행될 때만 의미가 있고, 그 법이 정반대로 사람의 생명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사용될 때는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셨을 때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하고 있다고 비난하였지만,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안식일에 꼭 맞는 일이라고 하시면서 계속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셨다. 또 사도바울도 어느 특정한 날에 집착하는 것보다 그 날이 가지는 영적 의미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 4:10-11) 율법을 외형적인 차원에서 지키는 것에 치중하면 율법의 원래의 정신을 잃는 과오를 범하게 된다는 경고인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보면 주일에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주일날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는 일을 해야 한다든가 소방소나 경찰서에서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의 경우 이것이 안식일의 정신에 잘 부합한다고 믿고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 일요일에 운동경기에 참여하거나 자격시험을 치러야 하는 사람의 경우는 어떤가? 개인의 믿음의 결단으로 주일에 쉬겠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기특하게 생각해서 다른 좋은 길을 열어주실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주일에 그런 것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생명(광범위한 의미에서의 생명)에 해가 된다면 그런 경우 하나님은 그것을 허용해주실 것이다. 물론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이런 하나님의 선한 의도를 언제든지 악용할 수 있다. 영적/육적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안식일을 범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노력하면 충분히 주일을 지킬 수 있는데도 인간적인 욕심 때문에 상습적으로 주일을 범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돈을 조금 더 벌기 위해, 스포츠를 즐기거나 놀기 위해, 또는 잔치나 기타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주일을 범하는 사람들) 이는 결국 자신의 영적인 생명을 죽이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일요일에 정말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함으로써 영혼의 안식을 누리고 영적인 생명을 증진시키고 싶은데 불가피한 사정으로 일을 해야 하거나 운동경기에 참여해야 하는 사람의 경우라면, 이런 사람은 반드시 다른 경로를 통해 하나님께 예배하는 길을 찾게 되어 있다. 주일에 새벽예배나 1부예배를 드리든지, 그것도 안 되면 주중에 열리는 수요예배나 목요예배를 드린다든지, 아니면 최근의 어느 대형교회들 같이 토요일 저녁에 제공되는 1부 대예배에 참석하는 길을 택할 것이다. 칼빈은 원론적인 면에서 일요일을 굳이 주일로 지킬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반드시 일요일 오전에 예배를 드려야 주일을 지키는 것이라는 주장은 미신이요 우상숭배라고까지 말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의 경우 기독교 전통이 그렇게 되어 있고 대부분의 교회에서 일요일 오전에 예배가 드려지기 때문에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남들 예배드릴 때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모습이다. 결론적으로 일요일에 일을 해도 되는가 혹은 운동경기에 참여해도 되는가의 질문은 생명의 원칙에 입각하여 판단하면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본인의 생명을 살리는데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해도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본인이 영적으로 죽게 된다면 계속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우리의 영적 생명이 충만하게 되기를 바라신다. 이 생명의 원칙에 입각하여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를 다루면 크게 잘못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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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완동물도 천국에 갈 수 있나요? Publish on April 07,2013홍삼열
    어느 뜨거운 여름날 한 노인이 개를 데리고 길을 가다가 너무나 지치고 목이 말라 쉴 곳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울타리 너머에 풀이 우거진 샘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쪽으로 가려고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하는데 울타리에 이런 팻말이 붙어 있었다. “개 반입금지!” 노인은 이 팻말을 무시하고 개를 데리고 들어갔다. 그런데 샘으로 향하는 길 위에 쇠로 된 단단한 문이 보이고 그 안에 문지기가 서 있는데, 노인이 개를 데리고 들어가려고 하자 문지기가 그를 막았다. 이곳은 천국이기 때문에 사람은 들어올 수 있지만 개는 못 들어온다는 것이다. 이때 노인은 이런 말을 하고 천국에 안 들어가는 선택을 한다. “개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면 나도 천국에 안 들어가겠습니다. 이 개는 나에게 평생 가장 충실한 동반자였는데 이제 와서 그를 버릴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많은 교회들이 애완동물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가르치는데 대한 저항의 성격을 띤다. 가끔 우리 주변에서 이런 이야기를 듣지 않는가? 어느 아이가 자기가 아끼던 강아지가 죽었는데 나중에 천국에 가면 그 강아지를 다시 볼 수 있느냐고 질문했다는 이야기, 어느 노인이 자기가 자식처럼 아끼는 고양이가 죽었는데 장차 천국에서 다시 만나기 위해 그 고양이를 자기가 묻힐 무덤에 함께 묻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는 이야기들을 듣는다. 평소에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 사안이 별로 마음에 와 닿지 않을 수 있지만, 동물을 정말 자식처럼 키우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심각한 문제이다. 과연 내가 아끼는 애완동물이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아니면 천국에는 사람들만 갈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애완동물이 가는 천국이 따로 있고 사람이 가는 천국이 따로 있는 것일까? 성경에는 뭐라고 되어 있는가? 우선 성경이 기록될 당시 수천 년 전에는 동물이 천국에 갈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에는 인권이란 것이 없어서 노예는 물건 취급을 받았고 여자와 아이는 사람 수에도 들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 집에서 키우는 개나 고양이에게까지 관심이 있었겠는가? 동물이 천국에 가는가의 문제는 당연히 성경의 관심 밖의 사안인 것이다. 사람이 천국에 가듯이 동물도 천국에 갈 수 있는가는 현대에 와서 제기된 질문이다. 사회적 이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점점 핵가족시대가 되어 가고 더 나아가 독신들이 많이 생기게 되면서 사람들이 이전 세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고독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고독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것이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인데 사람들은 집안에 강아지나 고양이를 데리고 살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식이나 배우자는 자기를 버려도 애완동물은 자기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충성을 다하는데 이 착한 동물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한가? 이런 감정을 잘 표현한 사람이 마크 트웨인이다. “개야말로 신사이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사람들의 천국이 아니라 개의 천국이다.” 과연 애완동물이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우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성경에는 동물이 천국에 간다는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아무리 “착한” 애완동물일지라도 천국에 갈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런데 이건 논리의 오류이다. 일종의 “침묵에 근거한 논증”(argument from silence)인데, 역사가 이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추론하는 것인데 분명히 문제가 있는 논리이다. 그 다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이다. 하나님이 식물과 동물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이때 하나님이 사람에게만 주신 그 어떤 특별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있기에 사람이 천국에 갈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영 혹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영과 혼과 육이 있지만(데살로니가전서 5:23) 동물에게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영이 없기 때문에, 동물은 영의 세계인 천국에 당연히 들어갈 수 없다는 논리이다. 그렇다면 정말 동물은 천국에 갈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려야 할까? 창세기에 기초한 추론으로서는 그렇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죽어서 보니 동물이 천국에 와 있다면 어떻게 할까? 왜 영이 없는 동물이 천국에 왔냐고 하나님께 따져야 할까? 오히려 동물까지도 천국으로 받아주셔서 우리의 천국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찬양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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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하나님은 에덴동산 가운데 선악과 나무를 심어 놓으셨을까? Publish on March 25,2013홍삼열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동산 이야기 중 많은 사람들이 질문하는 것이 있다. 왜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을 것을 아시면서 (아니면 적어도 따먹을 가능성이 다분히 있는 것을 아시면서) 선악과 나무를 에덴동산 중앙에 심어놓으셨을까?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고귀한 존재라고 말한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것이 없지만 사람만은 유독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형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인간의 이해력, 자유의지, 도덕성, 정치성 등 다른 동물들에 비해 사람만이 가지는 본성적 특징들을 말한다. 왜 하나님은 동산 중앙에 선악과 나무를 심어 놓으셨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아담이 가진 이 하나님의 형상, 특히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와 관련이 있다. 한번 상상해보라. 만일 하나님이 애초에 아담과 이브에게 선악과를 따먹을 수 없는 두뇌구조를 만들어주셨다면 어땠을까? 선악과를 봐도 전혀 따먹고 싶은 욕구가 생기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로보트와 같은 존재로 만드셨다면... 만일 그랬다면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을 것이고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그런 존재가 사람일까 하는 것이다. 자유의지가 없는 로보트와 같은 존재가 과연 사람일까?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신 것은 결국 사람이 사람되게 하심이다. 선택권이 없는 존재, 자율권이 없는 존재는 하나님의 형상이 결여된 존재로서 인간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선악과는 본질적인 차원에서 인간이 인간되게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논리적으로 볼 때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인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를 시행할 대상이 최소한 하나는 있어야 한다. 자유의지를 시행할 대상이 하나도 없는데 나는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적어도 자유선택의 대상이 하나는 있어야 나와 관련하여 자유의지라는 개념이 성립하는 것이다. 같은 논리로 누군가 스스로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주장할 때 실제로는 그가 무인도에서 평생 혼자 살아서 사랑의 대상을 한번도 가지지 못했다면, 자신이 사랑의 존재라는 주장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선택의 대상이 적어도 하나는 있어야 사랑이라는 개념이 성립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담과 이브에게는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시행할 대상이 최소한 하나는 있어야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유의지의 존재가 되는 것이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선악과 나무인 것이다.사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동산 중앙에 선악과 나무를 하나만 심어놓으셨다. 만일 동산 여기저기에 수많은 선악과 나무들을 심어놓으셨다면 이는 분명히 아담과 이브를 시험해서 넘어뜨리려는 의도가 있다고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고 단 한 그루의 선악과 나무만 동산 중앙에 심어놓으셨다. 필요 이상으로 인간에게 시험거리를 주지 않으시면서 동시에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온전한 자유의지의 존재가 되게 하시려고 “가장 안전한 조치”를 취해주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동산 중앙에 선악과만 심어놓으신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도 함께 심어놓으셨다는 점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그들 앞에 시험거리만 놓아두신 것이 아니라 바로 옆에 영생의 복을 얻는 나무도 심어놓으심으로 그들에게 선택권을 주셨다.(창세기 2:9, 3:22) 혹시 이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쪽으로 가다가 이 생명나무를 보고 마음을 돌이켜서 올바른 선택을 하라는 배려가 아닐까?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는 그들에게 찬송을 받으시기 위함이다.(이사야 43:21) 하나님이 창조된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명기 6:5)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인간창조의 목적이 제대로 수행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이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이어야 한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의 두뇌에 무조건 하나님을 찬송하고 무조건 하나님을 사랑하게끔 프로그래밍을 해놓으셨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고 사랑하는 것은 다른 초이스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빼앗으려고 하는 수많은 경쟁상대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강제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선악과가 있다는 것이 인간이 자유의지의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인간을 자유의지의 존재로 창조하신 것은 인간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사랑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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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위일체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Publish on February 26,2013홍삼열
    이단 중에 여호와의 증인이 있다. 이들은 정통 기독교인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삼위일체에 대해 질문 하기를 즐기는데, 이들은 기독교가 믿는 삼위일체가 비합리적이고 비성서적이라고 주장한다. “왜 당신들은 성경에도 없는 삼위일체를 믿습니까? 이 교리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사탄이 준 것입니다” 이렇게 주장한다. 사실 여호와의 증인의 지적대로 삼위일체(Trinitas)라는 단어는 성경에 없다. 그러나 이 특정 단어가 없다고 해서 성경에 그 개념도 없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삼위일체를 믿는 것은 비록 성경에 그 단어는 없지만 성경이 그 개념을 가르치기 때문이고, 우리가 이 단어를 사용할 때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관계를 더욱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사실 정통교회가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여호와의 증인 같이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들 때문인 것이다. 만일 성자와 성령을 하나님으로 고백하지 않는 이단들이 아니었다면 정통교회도 굳이 성경에도 없는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만들어 사용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이 삼위일체를 거부하는 주요 근거는 두 가지이다. 우선 그들은 이 개념이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기독교는 유일신을 믿는데 삼위일체는 이 원칙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셋인데 하나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오직 여호와만을 하나님으로 섬겨야 유일신론자가 되는 것이지, 어떻게 성부 하나님과 더불어 예수와 성령도 하나님으로 섬기면서 유일신론을 유지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삼위일체를 믿는 것은 곧 삼신론을 믿는 것이거나 우상숭배를 하는 것이라는 논리이다. 또 정통기독교가 주장하는대로 만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진짜 하나라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자기가 그렇게 간절하게 자기 자신에게 기도했다는 말인데, 이게 논리적으로 모순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 둘이 서로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삼위일체는 말이 안 되는 모순이라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여호와의 증인이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근거는 이 개념이 성서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들이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성구가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 1:1) 일단 여기에 언급된 “말씀”이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나 음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의미한다는 것에서는 정통기독교와 여호와의 증인이 이해를 같이 한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에 입장이 갈라는 것이 1절에 두 번 나오는 “하나님”이란 단어에서이다. 여호와의 증인은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에 나오는 하나님을 “하나님/전능자”(The God)로 이해하지만, 곧 이어 나오는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의 하나님은 “신/대능자”(a god)로 이해한다. 어째서 같은 하나님이란 단어를 이렇게 다르게 이해하는 것일까? 헬라어 원문에 보면 이 첫 번째 하나님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고 두 번째 하나님에는 정관사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은 The God/진짜 하나님이고 성자 하나님은 a god/유사 하나님이란 것이다. 이게 사실일까? 첫 번째에는 정관사가 있고 두 번째에는 정관사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 정관사의 유무가 진짜 하나님과 가짜 하나님을 구분하는 증거가 된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요한복음 1:1절 이후에 나오는 6,12,13,18절의 경우를 보면, 성부 하나님을 지칭하면서도 정관사가 없는 “하나님”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반면에 그들이 “신/대능자”라고 부르는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기록된 성경구절들 중에 정관사가 붙은 경우들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20:28절에서 도마가 예수님을 가리켜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ὁ θεός)”라고 했을 때 이 “하나님”이란 단어에 정관사가 붙어 있다. 디도서 2:13절에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란 구절이 있는데, 여기에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부를 때 정관사(The)가 붙어 있다.(그밖에 히 1:8절, 요일 5:20절, 롬 9:5절을 보라.) 따라서 정관사의 유무를 가지고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것은 설득력이 전혀 없다. 우리는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셋으로 구별되지만 서로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상태”라는 의미로 이해한다. 성경을 찾아보면 실제로 이 셋이 서로 구별되는 것으로 설명된 구절들도 나오고 서로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상태로 설명된 구절들도 나온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로 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대답하셨다.(마가 10:17-18) 또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성부 하나님을 “내 아버지여” 라고 부르면서 기도하셨다.(마태 26:39) 이로 보건대 성자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은 서로 구분된다. 또한 예수님은 성령을 가리켜 “다른 보혜사”라고 부르시면서 자신과 성령을 구분하셨다.(요한 14:16) 반면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상태로 표현된 구절들도 많이 있다. 요한복음 10:30절에 보면 예수님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말씀하실 때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자칭 하나님이라” 주장하기 때문인 것이다. 또 요한복음 20:28절에 보면,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내용이 나온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분명히 도마의 말을 교정해주셨을 것이다.(요일 5:20, 롬 9:5를 참조) 또한 성령은 예수의 영(갈라디아 4:6)이요 아버지의 영(고전 3:16)으로 설명되어 있고, 사도행전 5:3-4절에서는 성령을 속인 것이 곧 성부 하나님을 속인 것이 된다고 하면서 성령과 성부를 동의어로 취급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시고(마태 28:19), 바울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축복을 한다. 만일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 이름들로 세례를 베풀거나 축도하는 것은 신성모독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가르치고 있다. 삼위일체의 개념이 보통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오게 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시도가 있어왔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이렇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태양의 세 가지 속성에 비유해서 설명하는 방법이 있었다. 태양은 동시에 빛을 비추고 열을 발산하고 붉은 색의 모습을 띤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속성 중 하나가 사라지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 하나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다 없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태양의 빛과 열과 붉은 색이 셋이지만 결국 하나인 것처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 하나님이라는 설명이다. 또는 삼위의 관계를 상황/시기에 따라 다른 역할을 한다는 관점에서 설명하는 방법이 있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에는 성부로 (특히 창조와 관련하여), 신약시대에는 성자로 (특히 구속과 관련하여), 그 후에는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영원히 내주하시는 주님으로) 나타나셨지만 그 셋은 동일본질이라는 설명이다. 한 하나님이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설명이다. 이에 대한 현대판 설명은, 나는 집에서는 아버지이고 교회에서는 목사이고 학교에서는 선생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하나라는 설명이다. 이렇게 설명하는 방법을 양태론(modalism)으로 부르는데, 한 하나님이 필요에 따라 세 가지 양태(mode)로 나타난다는 이론이다. 이 설명의 강점은 삼위가 하나라는 것을 잘 설명해준다. 반면에 약점은 셋 사이의 구분이 거의 없어진다는 것이다. 사실 이 설명으로는 셋 사이에 이름만의 구별이 있을 뿐이지 실제적인 구별은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이론의 불합리성을 지적하였다. 만일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면,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셨을 때 그때 성부도 돌아가셨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에는 누가 이 우주를 운행하고 계셨단 말인가? 논리가 서지 않는다. 그래서 정통교회는 이런 양태론적 설명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제대로 설명하기에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내린 것이다. 양태론이 유일신 하나님을 설명하려다가 너무 지나쳐 삼위의 실제적 구분을 무시하는 오류를 범했는데, 이 이론에서 정반대 극단으로 가서 아예 삼위의 분리를 주장하는 이론이 있었다. 일명 양자론(Adoptionism)이라 하는 이단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 다른 차원의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성자 예수님은 원래는 우리와 똑 같은 피조물인 인간인데, 너무나 완벽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좋게 보아서 세례 받으실 때 그를 당신의 특별 양자로 입적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아니라 세례 받으신 후부터 하나님이 되었기 때문에 성부 하나님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물론 이 이론은 너무나 터무니 없기 때문에 손쉽게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는 양태론도 아니고 양자론도 아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하나님의 본질을 유지하면서 그 인격과 사역에 있어서 분명하게 구별이 된다고 믿고 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바이다. 이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일 뿐이다. 어떻게 하나님이 셋이면서 하나인가를 완벽하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논리의 허점을 지닌 불완전한 비유를 들어서까지 설명을 시도하는 것인데 양태론적 설명이 이에 속한다. 어쨌든 우리가 가장 안전하게 이 문제에 대해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 이상을 생각하지 말고 그 이상을 가르치지 말자는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요약하면 이렇다. 1) 성경은 한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가르치고 있다. 2)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인격과 사역에 있어서 서로 구분된다. 3) 이 세 인격이 모두 하나님으로 불리고 서로 하나인 것으로 즉 분리되지 않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 신비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 바로 삼위일체라는 개념이다. 우리가 성경이 가르치는 정도만 받아들이면 구원받는데 지장이 없다. 완벽하게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이에서 지나는 설명을 시도할 경우 이단으로 빠질 위험이 다분히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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