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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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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꼭 결혼을 해야 합니까? Publish on November 03,2013홍삼열
    우리 주변에 보면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결혼에 대해 압박을 받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남들은 그 나이에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는데 왜 너는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는거니?”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자녀들은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어떤 자녀들은 결혼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기까지 한다. “결혼을 꼭 해야 합니까? 혼자서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는데...”남자나 여자가 결혼할 나이가 지났는데도 결혼하지 않을 때 뭔가 모자라기 때문에 결혼을 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받는다. 남자의 경우 능력이 없거나 성격적으로 미성숙하기 때문에 혹은 무절제한 생활을 즐기기 위해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의심을 받고, 여자의 경우 매력이 없기 때문에 아니면 생각이 이기적이기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는 거라는 의심을 받곤 한다.과연 그럴까?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은 다 비정상인 사람일까? 기독교인의 경우 꼭 결혼을 해야만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는 “정상적인” 신자가 되는 것일까? 성경에 보면 독신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일을 충실히 잘 감당한 사람들을 보게 된다. 대표적으로 예레미야 선지자를 들 수 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결혼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고(렘 16:2) 그런 이유로 독신의 상태에서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이 내리실 심판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이유로 극한 고난을 당한 것을 고려할 때 왜 하나님이 그에게 독신생활을 명령하셨는지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루디아라는 여인이 등장하는데 그녀는 바울의 사역을 최선을 다해서 도운 사람이다. 그런데 이 루디아는 옷감 장사를 하는 사업가였는데 남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으로 봐서 독신의 상태로 주님의 일을 도왔다고 추측할 수 있다. 반면에 결혼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일을 충실히 감당한 예들도 많이 나온다. 대표적으로 주님의 사업을 위해 일곱 집사중 하나로 선택되어서 복음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한 빌립을 들 수 있다. 그는 결혼하여 가이사랴 지방에 살았던 사람이다. 사도행전 21:8-9절에 보면, 빌립에게는 딸이 네 명 있었는데 모두 예언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 사실로 비추어보건대 빌립은 분명히 경건한 가정을 이룬 상태에서 하나님을 섬긴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에 보면 결혼과 독신의 문제에 대하여 서로 상반되는 듯한 구절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창세기 2:18절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결혼을 하는 것이 태초부터 하나님이 정하신 뜻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7:7-8절에 보면 하나님의 뜻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또 마태복음 19:11-12절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평생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질문을 했을 때,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특별한 목적을 가질 때에만 가능한 일이라는 의미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여기서 “고자(eunuch)”라는 단어는 독신으로 지내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세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첫째는 태어날 때부터 고자인 사람, 즉 생물학적인 이유로 처음부터 이성에 대한 욕구가 전혀 없는 사람을 말한다. 둘째는 사람의 실수에 의해 고자가 된 사람이 있다. 원래는 이성에 대한 욕구가 있지만 어떤 사고나 병으로 인해 중간에 결혼이 불가능하게 되는 경우이다. 셋째는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가 있는데, 이성에 대한 욕구도 있고 충분히 결혼하여 자녀를 낳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스스로 독신생활을 선택한 사람의 경우이다.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나 수도사들, 수녀들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자 그러면 창세기에서는 결혼해서 자녀를 낳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고 고린도전서나 마태복음에서는 그냥 독신으로 지내는 것도 좋다고 하는데 우리는 어떤 가르침을 따라서 살아야 할까? 결혼을 하지 않으려는 우리 자녀들에게 뭐라고 말을 해주어야 할까? 우리는 독신을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한 은사(gift)라는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창세기에서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정하신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적용이 되는 삶의 원리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독신으로 지내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은사, 즉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한 어떤 특별한 소명으로서의 독신생활이 가능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19:12절에서 독신의 은사를 가리켜 “받을 만한 자는 받을 지어다”라고 한 것이고, 고린도전서 7:7절에서는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라고 하면서 독신생활을 각자의 임의의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로 규정하고 있다.하나님이 주신 은사의 개념에는 한 가지 전제가 있다. 그것은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당연히 주신 분의 의도에 맞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은사는 개인적인 만족이나 유익을 위해 사용될 것이 아니라 교회에 덕을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 도움이 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취지에 잘 부합하는 것으로서 가톨릭교회의 신부나 수사들, 교회 사역을 위해 재혼하지 않는 과부들, 위험한 선교지에 들어가서 사역을 감당하는 선교사들의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독신의 상태로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눈이 너무 높아서 혹은 정말 맘에 드는 사람이 없어서 결혼 하지 않는 사람의 경우, 아니면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 독신생활을 선택하는 경우는 성경에서 말하는 독신의 은사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 사람은 배우자를 찾아서 결혼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독신생활을 통해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는 독신의 은사를 받은 것으로 이해해도 좋고, 그런 사람은 독신의 상태를 유지하며 주님께 헌신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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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보기도(中保祈禱)에 대하여 Publish on October 16,2013홍삼열
    우리가 남을 위해서 기도할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 기도를 가리켜서 중보기도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런 기도를 하는 사람을 가리켜 중보기도자라 부르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행사를 중보기도 컨퍼런스 라고 부른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서 그 용어의 사용을 문제삼는 분들이 생겨났다. 중보기도는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는 기도이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남을 위한 기도를 지칭할 때 중보기도라는 이름대신 다른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이런 주장을 펴는 분들이 제시하는 중심 성경구절은 디모데전서 2:5절이다. “하나님은 한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중보자(中保者)의 뜻은 글자 그대로 “중간에서 돕는 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의 중간에 서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주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이런 중보의 사역은 이 세상에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 한 분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 “중보”라는 단어를 다른 사람에게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감히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의 중간에 서서 예수님의 고유한 역할인 중보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러면 남을 위해서 하는 기도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중보기도 사용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 기도를 그냥 “남을 위한 기도”라고 하든지, 아니면 대부분의 분들이 주장하는 대로 디모데전서 2:1절에 나오는 “도고”(禱告)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런데 이 “도고”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ἐντεύξεις(enteukseis)를 옮긴 것으로서 개역성경에서만 딱 한 번 사용되고 있다. 다른 성경번역본들에서는 다른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새번역은 이것을 “중보기도”로, 공동번역은 “간청”으로 번역하고 있고, 대부분의 영어성경은 이것을 “intercession”(중재)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만큼 이 도고라는 단어는 아주 생소해서 한국사람들이 사용하고 있지 않고 한국어 사전에도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중보기도라는 표현을 사람에게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그 표현대신에 도고기도를 사용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도고라는 단어가 그리스어 enteukseis의 의미를 제대로 옮기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 그리스어 단어는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도고라는 단어에는 기도한다는 의미만 있지 “누군가를 위해서”의 의미는 없기 때문이다. 도고(禱告)라는 단어는 글자 그대로 “기도하여 고한다”는 뜻만을 지니고 있어서, 사실 이 단어만으로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단어인 “기도”와 별 의미의 차이가 없는 것이다.따라서 현재로서는 이 도고라는 단어 이외에 중보기도의 대체표현으로 제시되는 마땅한 표현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남을 위한 기도”라는 표현을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한 약간 불만족스럽지만 중보기도라는 표현을 계속 사용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쨌든 현실적으로 아무도 들어본 적이 없는 생소한 단어인 도고보다는 많이 들어본 중보기도라는 단어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 또 어찌 생각하면 우리가 “중보기도”라는 단어를 그렇게 너무 엄격하게 적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과 어떤 사람 사이에 서서 그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은 예수님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때는 자신의 위치에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그 유일하신 중보자를 통해서 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남을 위해서 기도할 때는 어느 정도 우리가 하나님과 그 사람 중간에 서서 기도를 한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영어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예수님은 유일한 중보자 The Mediator가 되시지만 우리는 그 중보자를 통해서 작은 중보자 A mediator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사역적인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중보자가 되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시다) 어느 정도의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우리가 남을 위해 하는 기도도 중보기도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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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전자 조작으로 품종개량을 하는 것은 반기독교적인 행위인가요? Publish on September 26,2013홍삼열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종묘회사에서 일하고 계시던 분이 이런 질문을 하신 적이 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동물과 식물을 각기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고 되어 있고 또 사람이 마음대로 이 창조질서를 어지럽히지 말라고 되어 있는데, 자신은 종자개량 사업에 종사하고 있으니 혹시 내가 성경이 금하는 반기독교적인 일을 하는 것은 아닌지 물어보신 적이 있다. 사실 레위기 19:19절에 보면 하나님이 품종개량을 금하시는 것 같은 내용이 나온다.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전통적으로 인류는 농업과 축산의 분야에서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종자를 만들어 양질의 수확을 얻을 수 있을까를 고민해왔다. 그래서 농사 짓는 사람은 올해에 거둔 수확 중에서 가장 실한 종자를 골라서 내년을 준비하였고, 가축을 기르는 사람은 튼튼하고 새끼를 많이 낳는 닭이나 돼지를 씨암탉이나 종돈으로 사용함으로써 점점 개선되는 유전자를 통해 더 좋은 품종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하였다. 이것이 전통적인 품종개량의 방법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눈부신 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유전자 조작을 통한 품종개량을 많이 시도한다. 이전의 방법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시도로서 일명 GMO(genetically modified organism)로 불리는 식물이나 동물을 만들어내고 있다. 현재 유전자 조작 식품이 많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인간에게 큰 이익을 (특히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와이에서는 1990년대 말에 파파야를 병들게 하는 특정 바이러스 때문에 파파야 산업이 거의 소멸할 지경이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와이대학에서는 유전자 조작을 통해 개량된 파파야를 만들어내었다. 이것이 현재 유통되는 레인보우 파파야이다. 그밖에 유전자 조작을 통해 인류에게 유익한 약품들이 많이 개발되었는데 예를 들어 B형 간염백신, 인슐린, 성장호르몬 같은 것들이다.이렇게 인류는 품종개량을 통해 점점 편안한 삶을 개척해나갔고 경제나 보건 같은 영역에서 큰 유익을 얻었다. 그런데 과연 성경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종교적 양심으로 이것을 거부해야 할까? 성경에 “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고 했으니 품종개량은 무조건 거부해야 할까?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올바른 성경해석 방법에 있다. 성경을 당시의 상황과 상관없이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 문자적 해석을 그대로 현대의 행동지침으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문자에 담긴 그 내면의 의도, 즉 성경이 전달하고자 하는 본뜻을 읽어내서 그것을 현대의 옷을 입혀서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품종개량을 사탄에게서 온 독사과로 거부할 수도 있고 아니면 하나님이 자연이성을 통해 주신 선물로 환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아버지가 소금가마니를 지고 개울을 건너라 하면 그대로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것을 표면적 문자의 차원으로만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버지가 소금을 운반해오라고 하면 반드시 그것을 등에 지고 개울을 건너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그 문자에 담긴 본뜻에 집중하는 사람은 이것이 소금에 대한 말이 아니라 효도에 대한 말이란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즉 자식의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버지가 말씀하시면 순종할 줄 아는 효성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것이다.그러면 위에서 인용한 레위기의 명령 “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종자개량이나 품종개량을 해서는 안 되고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진 식품을 먹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명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본뜻에 집중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결론이 도출된다. 위의 명령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라는 의미, 즉 하나님 신앙과 다른 신앙을 섞지 말라는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위의 구절은 품종개량의 이슈와는 별 상관이 없는 것이다.현재 유대인들이 지키는 코셔음식법(Kosher)도 동일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레위기서에 보면 돼지고기나 낙지나 갑각류 같은 음식은 부정하기 때문에 먹어서도 안 되고 만져서도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은 현대에도 그런 것들을 먹지 않기 위해서 안간 힘을 쓴다. 그런데 레위기의 음식법은 위의 종자를 섞지 말라는 명령과 마찬가지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라는 의미가 있다. 매일 음식을 먹을 때 아무거나 먹지 말고 하나님이 깨끗하다고 하신 음식만 먹어야 한다는 명령 안에는, 하나님의 백성은 선택된 백성이기 때문에 반드시 순수한 혈통과 신앙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정한(깨끗한) 존재라는 인식을 가지고 부정한 음식을 멀리하는 것처럼 부정한 사상과 종교를 멀리하라는 뜻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문자 안에 담긴 본뜻에 집중하기 때문에 구약의 음식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고, 같은 맥락에서 이종교배와 종자를 섞지 말라는 레위기의 명령도 품종개량을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영적으로 불순한 것과 섞이지 말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그렇다면 성경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현대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품종개량을 하는 것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기독교인들 중에 유전자 조작에 대해 극단적인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있다. 유전자 조작은 사탄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너뜨림으로써 세상을 자기 권세아래 두는 핵심 도구가 되기 때문에 유전자를 다루는 생명공학은 그 자체로 현대판 적그리스도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이런 주장을 펴는 이유는 유전자 조작을 통한 품종개량은 기존의 유전자에다가 인위적으로 다른 유전자를 삽입하거나 삭제함으로써 일반 자연생식의 방법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성질의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창조물에 대한 성경의 기본 가르침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인간은 그것을 대신 다스리고 관리하는 역할을 위임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다스리고 관리하는 역할이 창조물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나님의 뜻 안에서는 인간의 창조적 과학이 설 자리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나님을 닮은 성질인 창조성을 부여하셨다. 그래서 인류의 시초때부터 예술이 있는 것이고 과학기술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의 창조성과 관련하여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는가? 기독교의 중심인 사랑의 원리로써 이 문제에 답할 수 있다. 인간의 창조성이 사랑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면 정당화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제3세계의 기아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병충해에 강한 식물/동물을 개량한다든지 혹은 치명적인 질병을 막는 백신을 만든다면 이것은 사랑의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허용될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어느 특정집단에게 경제적인 부를 가져다 주기 위해, 궁극적으로 인류나 생태계에 치명적인 해를 끼치면서까지 유전자 조작을 한다면 이는 반기독교적인 행위로써 금지되어야 한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유전자조작을 통한 품종개량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을 사랑하고 그 생명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목적이라면 성서의 정신에 부합하는 것으로서 허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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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하나님은 선한 사람에게 고난을 주시나요? Publish on August 27,2013홍삼열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인데 어째서 고난이 끊이지 않는가?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우리는 가끔 이런 한탄을 듣곤 한다. 우리는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기 때문에 당연히 선행의 정도에 따라 공정하게 상벌을 내리셔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그렇지 않다. 악한 사람은 벌을 받아야 마땅한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는 반면에, 선한 사람은 큰 복을 받아야 하는데 선하다는 이유로 오히려 불이익을 당하고 고난 당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는가?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욥이다. 욥은 하나님에게서 동방의 의인이란 평가를 받을 만큼 완벽한 사람인데 인간이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엄청난 고난을 당하게 된다. 적어도 욥의 입장에서 볼 때 그런 고난을 받을 만한 죄를 지은 적이 없다. 그러니 너무나 불공평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평성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정말 공평하신 분이십니까? 왜 선한 사람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까?”이 질문에 대해 성경이 주는 대답은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고 사람이 고난받는 것은 그가 선한 것과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 세상에는 “선한”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선한 사람에게 내리는 고난의 부당성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인간의 기준으로 사람들을 구분한다. 정말 선한 사람, 덜 선한 사람, 조금 악한 사람, 정말 악한 사람 등으로 구분한다. 그런데 이런 구분은 잘해보았자 상대적이다. 우리들끼리 경쟁해서 우열을 가려서 선악을 구분하기 때문에 객관적인 판단이 될 수 없다. 객관적으로 선악을 규정하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진정 우리가 인간의 선함을 논하기를 원한다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어떤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특히 우리 중에 정말로 선한 인간을 어떻게 평가하시는가? 로마서 3:10-12절과 전도서 7:20절은 이 세상에서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않는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볼 때 이 세상에는 선한 사람이 하나도 없고 자신의 선행으로 구원받을 사람도 당연히 하나도 없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선한 사람에게 고난을 주시는가?”에 대해 성경이 주는 두 번째 대답은 그런 고난을 접할 때 그것이 우리에게 경고가 된다는 것이다. 적어도 내 눈에 선하게 보이기 때문에 복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느껴지는 그 사람이 재난을 당할 때, 나는 하나님의 불공평성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와서 이런 보고를 했다. 빌라도 총독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선한 갈릴리 사람들을 무참히 학살해서 그들이 피가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제물에 섞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이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렇게 된 줄로 생각하느냐? 아니라는 것이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충분히 그런 종류의 일들이 일어나게 될 거라고 말씀하셨다. 이어서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서 (누군가 부실공사를 해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무고한 사람들 18명이 돌무더기에 치어서 죽었는데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런 비극을 당한 줄로 생각하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너희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와 같이 망하게 될 거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이 이야기는 우리의 시각을 바꿀 것을 요구한다. 선한 사람들은 “당연히” 복을 받아야 한다는 시각에서, 우리 중에 선한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적어도 하나님의 판단기준으로) 누군가에게 복이 내린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 은총이라고 보는 시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재난이 내리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복이 내리는 것이 이상한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특별 배려라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특히 내 눈에 선하게 보이는 사람에게 재난이 닥칠 때, 우리는 그것을 불공평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나도 그런 종류의 재난을 당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나를 어여삐 여기셔서 도리어 복을 주신 것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더 나아가 나에게 회개할 것이 없는지를 살피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사람에게 닥치는 고난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사탄에게서 오는 고난으로 사람을 절망하게 하고 죽이는 목적이 있다. 또 하나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고난으로 사람을 단련시키고 궁극적으로 사람을 살리는 목적이 있다. 야고보서 1:13절에 보면 하나님은 절대 사람을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그런데 정말 하나님이 사람을 시험하시지 않는가?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 100세 때 낳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을 주셨다. 그렇다면 성경의 이 두 내용이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닌가?그렇지 않다. 야고보서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시험하지 않는다고 할 때 이 “시험”이란 단어는 “유혹”(temptation)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마치 사탄이 사람을 넘어뜨리기 위해 유혹하는 것같이 그런 목적을 가지고 유혹하시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은 테스트의 성격이 있다. 마치 선생님이 학생을 테스트할 때 그 목적이 학생을 좌절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테스트를 통해 그가 다음 단계로 성장하도록 돕는 목적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 테스트하시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1:7절에서는 이 테스트의 과정을 용광로 속의 “연단”의 이미지를 빌어 설명한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따라서 “선한” 사람들에게 닥치는 고난의 문제를 접할 때 우리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세를 가지고 그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해치기 위해 시험/유혹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 성숙을 위해 테스트/시련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신뢰를 바탕으로 고난을 대면할 때, 그 고난은 우리에게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을 만들어내는 귀한 정련소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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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한국 기독교인들은 유태민족의 역사와 종교를 믿는 건가요? Publish on July 29,2013홍삼열
    어떤 분이 기독교에 대해 이렇게 문제제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한국인이라면 한국 고유의 역사를 알고 한국의 종교를 믿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요? 그런데 왜 한국 기독교인들은 한국의 역사도 제대로 모르면서 유태민족의 역사를 달달 외우고 다니고 또 단오제 같은 한국의 고유한 풍습을 무시하는 것인가요?이런 문제제기는 기독교가 처음 한국에 소개될 때부터 있어 왔다. 18세기에 천주교가 실학자들을 통해 한국에 소개될 때 많은 사람들이 당시 조선사회를 지배하던 유교사상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종교로 인식되는 천주교가 전혀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외래종교인 천주교를 배척하였다. 이런 현상은 19세기 말에 개신교가 한국에 들어올 때도 지속되어서 백인 선교사들이 서양세력을 등에 업고 도입한 이 “서양 종교”를 배척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후 일제시대 때 기독교가 한국민족의 편에 서서 한국인들의 애환을 서양에 전달하고, 학교와 병원 사업을 통해 그리고 농촌계몽운동을 통해 한국인들의 정신적, 물질적 성장을 돕는 모습을 보이면서 기독교에 대한 사회인식이 어느 정도 개선되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기독교는 한국의 고유문화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는 외래종교라는 인식이 지속되었다.이런 인식이 지속된 데에는 어느 정도 한국 기독교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를 도입한 초기 선교사들과 그들을 돕는 한국 기독교인들은 사실 기독교의 보편적 진리를 집중적으로 전달하지 않고 서양의 문물과 종교적 상징들도 마치 기독교의 본질인양 전달하고 강요하는 예가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예배당을 서양식으로 짓는 것, 예배 의식에서 한국적 의복과 음악과 전통 악기들을 제외시킨 것, 절이나 무속신앙에서 사용되는 모든 것을 (그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까지도) 미신과 우상숭배로 배척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분위기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비근한 예가 한국 교회에서는 추수감사절은 크게 지키면서도 추석은 별로 지키지 않는 것, 그리고 현재 교회에서 국악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상황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기독교를 외래종교로 배척하는 입장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이전의 한국의 주요 종교들도, 예를 들어 불교나 유교나 도교도, 따지고 보면 다 외래종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종교들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한국인들의 심성과 삶에 토착화하고 발전하여 “한국적” 종교가 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어느 특정 종교가 토착종교인가 외래종교인가가 아니라, 그 종교가 한국인들의 심성과 삶에 토착화하였느냐 아니면 한참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대로 외래종교로 남아 있느냐를 살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한국 기독교는 충분히 토착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이다.필자가 “충분히”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한국 기독교는 이미 100년 이상의 역사가 있기에 당연히 “어느 정도” 토착화 과정을 거쳤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 기독교에는 서양의 기독교로부터 구별되는 여러 가지 특징들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한국교회에만 독특한 새벽기도회가 있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새벽에 정화수를 떠놓고 지성을 올리는 토속신앙에 기원을 둔 것이다. 그밖에 두드러지는 것이 한국 교회의 유교적 권위주의 (목사를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교회 내의 직분을 계급같이 여기는 태도), 법의 원리보다 덕의 원리로 교회를 운영하는 풍토 (회의에 익숙하지 않은 문화), 사회정의보다는 개인구원과 복에 치중하는 기복적/샤마니즘적 경향 등을 들 수 있다. 원래 기독교는 팔레스타인에서, 즉 동양(Orient)에서 발흥한 종교이다. 그런데 이 동양종교가 서양으로 이동하면서 (처음에는 로마로, 그 다음 유럽으로, 그 다음 미국으로) 서양문명의 일부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한국으로 왔을 때는 당연히 한국 문화의 일부가 되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토착적이지 못한 외래종교라는 비판 속에 기독교의 보편적 진리, 즉 누구든지 예수를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가 잠겨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가 가르치는 교훈이 있다. 전통문화는 우리가 배격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 할 대상이란 인식이다. 이런 인식이 있을 때 토착화가 이루어지고, 토착화가 이루어질 때 종교가 민족의 종교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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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메이슨(Freemasonry)이 뭔가요? Publish on July 15,2013홍삼열
    2001년에 일어났던 9.11 테러사건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일으킨 장본인이 오사마 빈 라덴이 아니라 미국 정부였다고,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미국 정부를 뒤에서 조종하는 프리메이슨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역사에 존재했던 수많은 음모설 중의 하나인데 대개 어떤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나 대형 인재(人災)가 발생할 때 일부 사람들이 그런 논리를 편다. 프리메이슨 같은 비밀조직이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비밀리에 그런 일들을 꾸미고 실행한다는 것이다.이런 음모설이 사람들의 생각에 그럴 듯하게 보이는 이유는 전 세계를 움직이는 각계각층의 지도급 인사들 중 상당수가 프리메이슨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대통령들(조지 워싱턴, 에이브라함 링컨, 리처드 닉슨, 빌 클린턴 등), 영국의 윈스턴 처칠, 프랑스의 나폴레옹 등이 프리메이슨이고, 종교계에도 이 세력이 널리 퍼져서 이단인 몰몬교와 여호와의 증인의 창시자들을 비롯하여 정통 개신교 목사인 빌리 그래함, 제시 잭슨, 로버트 슐러 등도 프리메이슨이라는 것이다.역사적으로 볼 때 프리메이슨은 그 이름에도 나와 있듯이 중세의 석공(mason)길드에서 시작하였다. 그들의 기본 문양이 석공이 사용하는 컴퍼스와 직각자이고, 예식을 행할 때 앞치마를 두르고, 그들이 만날 때 다양한 종류의 악수를 하는 것 등이 석공길드의 기원을 말해준다. 현대적 형태의 프리메이슨은 1717년 영국에서 시작한 것으로 엘리트 남자들의 사교클럽으로 발전하여 각계의 유명인사들과 개신교 신자들이 대거 이 단체에 가입하였다. 이들이 외형적으로 표방하는 가치는 형제애와 진리와 구제사업이다. 이런 가치에 따라 이들은 회원 상호간의 우호증진을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자선과 박애를 목표로 인도주의적 사업을 추진한다.그런데 음모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런 인도주의적 구제사업과 친목활동은 눈속임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프리메이슨은 기본적으로 비밀결사이기 때문에 하급자들이 상급자들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고 그들이 무슨 활동을 하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프리메이슨을 좋지 못한 눈으로 보는 것은 그들의 비밀주의에 기인한다. 프리메이슨은 처음 가입할 때 절대로 비밀을 누설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 시작한다. 또 전체 구조가 33도(계급)로 구성되어 있는데 (1에서 3도까지는 견습생 정도의 위치이고 4도부터는 프리메이슨의 조직과 사상의 비밀을 보존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들이다), 중요한 점은 이들이33도의 각 단계를 통과해 올라갈 때 통과의례가 있고 이 의례는 그 때가 되어야만 알 수 있는 비밀사항이라는 것이다. 현재는 일부 프리메이슨들이 그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불식시키기 위해 자체의 조직과 의식을 어느 정도 공개하는 노력을 보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조직의 중심은 비밀에 싸여있다.비밀주의에 기초한 음모설을 정당화하는 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탈리아에 기반을 둔 비밀 프리메이슨인 P2(Propaganda Due)의 국가장악 시도였다. 이들은 실제로 정치/경제의 거물급들을 이용하여 이탈리아 정부를 장악해서 나라를 극보수 독재국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계획이 중간에 발각되어서 1976년경에 단체가 공식 해체되었다. 그리고 그 후 교황 요한 바오로 1세가 교황이 되어 33일 동안 재임하다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게 되었는데, 그것이 사실은 P2세력이 교황을 독살한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요한 바오로 1세가 교황이 되고 나서 보니 이미 교황청 깊숙이 P2와 연결된 추기경들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들을 제거하려고 하자 그들과 연계된 P2 세력이 이탈리아의 마피아와의 힘을 빌어 교황을 제거했다는 것이다. 교황이 죽은 다음날 부검도 없이 급하게 장례식을 치렀는데 이것이 독살설을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그밖에 이탈리아에서 P2가 연루된 여러 사건들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욱 프리메이슨을 건전하지 못한 사교집단으로 혹은 국가전복 세력으로 이해(혹은 오해)하게 되었고, 이들을 정부 뒤에 존재하는 진짜 비밀정부, 언어와 화폐와 종교를 통합하여 새로운 세계질서를 꾀하는 비밀 엘리트 그룹(일루미나티)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음모설을 제기하는 사람들의 주장대로 프리메이슨이 세계통합의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새로운 세계질서(New World Order)를 창조하기 위해 비밀리에 (그리고 불법적으로) 각국의 정치와 경제와 문화계에 침투하여 활동하는 것인지, 아니면 프리메이슨의 변명대로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이해하기 힘든 일들을 설명하기 위해 사람들이 엉뚱하게 프리메이슨에게서 희생양을 찾는 것인지 필자로서는 분명하게 가타부타 결론을 낼 수가 없다. 왜냐하면 프리메이슨의 중심에는 비밀주의가 있어서 그 비밀 안으로 들어간 사람이 아니고서는 확실하게 진위를 밝힐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비밀주의는 언제나 반사회적이고 반인륜적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문제이다.그러나 적어도 이미 외부에 알려진 프리메이슨의 의식과 사상을 검토해 볼 때 프리메이슨은 기독교가 믿고 지향하는 것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못한다. 프리메이슨에게는 기독교는 많은 종교 중에 하나일 뿐이고 기독교의 신은 다른 종교의 신과 특별히 다를 바 없는 총칭적인(generic) 신이다. 이런 신념이 잘 나타나 있는 곳이 그들의 제단이다. 누군가 프리메이슨이 되고자 한다면 그는 반드시 신을 믿어야 하고 (즉 종교를 가져야 하고), 그가 믿는 종교의 경전은 자동적으로 프리메이슨의 제단위에 놓여지게 된다. 결국 프리메이슨이 가르치는 가치는 종교적 상대성 혹은 다원주의이고, 더 나아가 프리메이슨 체계를 통한 종교 통일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역사적 독특성을 부인하는 프리메이슨의 가치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구원이 무엇인가? 사람은 예수나 여호와 하나님과 특별히 연결될 필요가 없는 선행을 통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닌가? 프리메이슨은 이것을 부인한다. 만일 프리메이슨이 일반 자선단체라면 상대성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자체의 교리와 예식이 있는 종교체계라면 (필자는 그렇다고 본다)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멀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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