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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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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인은 라스베가스에 가면 안 되나요? Publish on September 30,2014홍삼열
    도박의 도시 라스베가스에 자주 가시는가? 비행기를 타고 라스베가스에 도착하여 공항에 내리면 그 즉시로 “아 이게 라스베가스구나” 하는 느낌이 확 든다. 공항 대합실에 들어서면서부터 요란한 소리를 내는 슬롯머신들이 보이는데, 아마 공항에 첫 발을 들여놓는 사람의 눈에 이렇게 슬롯머신들을 보이게 해놓은 곳은 이곳이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라스베가스라는 도시는 태생적으로 비기독교적인 성격이 강하다. 땀 흘려 돈 벌 생각 대신에 일확천금(一攫千金)을 꿈꾸는 사람들을 불러들여 비즈니스 하려는 동기로 도시가 계획되었다. 이곳은 이전에는 금광을 찾아 서부로 이동하는 사람들의 중간 기착지였다. 그러다가 1905년 솔트레이크 시티와 로스 엔젤레스 사이를 잇는 철도가 건설되면서 도시가 시작되었고, 그 후에 주변에 후버댐이 건설되고 카지노가 합법화되면서 본격적으로 이곳이 “카지노의 도시” “죄의 도시”(sin city)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곳에는 모든 것이 카지노를 위해서 존재하는 듯하다. 음식이나 숙소는 최고 수준이지만 값은 대단히 저렴하다. 도박에 모든 승부수를 거는 것같다. 그런데 요즘에는 라스베가스라는 단어가 연상시키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탈피하고자 여러 가지로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다. 예를 들어 라스베가스는 더 이상 도박만을 위한 도시가 아니라 친 가정적인 도시라고 홍보를 한다. 이곳은 성인들만을 위한 도시가 아니라 어린 아이들도 와서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건전한” 도시라는 것이다. 이런 취지 하에 가족을 위한 놀이들, 쇼핑몰들, 다양한 볼거리들을 제공한다. 심지어는 도박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하여 스포츠 채널인 ESPN을 통해 “포커 경기”를 중계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인은 라스베가스에 가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죄의 도시”에 가는 것 자체가 죄이기 때문에 라스베가스는 근처에도 가지 말아야 할까? 아니면 그곳에는 얼마든지 건전하게 즐기고 볼 것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도박에 빠지지만 않으면 별 문제가 없는 것일까?   기독교인이 라스베가스에 가는 문제에 대하여 두 가지 서로 다른 입장이 존재한다. 첫째 입장은 절대 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라스베가스가 “친 가정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끼”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가정을 버리고 혼자 라스베가스에 가서 도박을 한다는 비난을 방지하기 위해, “그러면 온 가족이 함께 라스베가스로 오면 되지 않습니까? 도박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곳이 라스베가스입니다.” 이런 식으로 유혹을 하는데 그런 것에 절대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실 도박에 빠진 사람에게 유일한 해결책은 라스베가스에서 완전히 발을 끊는 것일 텐데 그렇게 되면 라스베가스가 망하니까 그 방법 대신에 계속 와서 도박을 할 수 있도록 친 가정적인 모습의 “미끼”를 던진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이 미끼를 물면 안 되는 것이다. 심지어 라스베가스에서 잠을 자든지 음식을 먹든지 구경을 하든지 하는 것은 결국 그곳의 도박사업을 간접적으로 후원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기독교인으로서 그곳에 가는 것은 절대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반면에 도박에 빠진 사람이 아니라면 라스베가스에 가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입장이 있다. “너무 인생을 빡빡하게 살 필요가 어디 있는가? 재미 삼아 슬롯머신에 몇 푼 ‘헌금’을 하고, 대부분의 시간은 그곳에서 가족과 편안히 쉬고 먹고 여행을 즐기면 된다”는 입장이다. 사실 라스베가스에 도박 이외의 목적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곳을 거점으로 숙식을 하면서 그랜드캐년이나 후버댐등 주변 지역을 관광하기 위해, 최고급의 쇼핑을 하기 위해, 라스베가스의 카지노 건물들 안에 인공으로 만들어 놓은 멋진 조형물들을 구경하기 위해, 컨퍼런스에 참여하기 위해, 아니면 골프나 스카이다이빙 같은 스포츠를 즐기기 위해 라스베가스에 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렇다면 성경을 믿는 기독교인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곳에 가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고려하고, 그 다음으로 도박의 유혹에 쉽게 빠지는 개인차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인이 라스베가스에 가도 되는가의 문제는 그가 무슨 목적으로 라스베가스에 가는지를 생각해보면 대충 답이 나온다. 만일 도박하기 위해서 또는 기독교 신앙에 위배되는 어떤 유흥을 즐기기 위한 목적으로 라스베가스에 간다면 (이것이 주된 목적이든 부차적인 목적이든 상관없이) 이는 잘못된 것이다. 기독교인으로서 금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좋은 목적으로 그곳에 간다면, 예를 들어서 가족과의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기 위해 여행을 한다거나, 중요한 컨퍼런스에 참여하기 위해서라거나, 골프선수가 그곳에서 열리는 경기에 참가한다든가, 혹은 단순히 바람을 쐬기 위해서 그곳에 간다면, 아니면 그곳에 교회를 개척하거나 섬기기 위해서 가는 것이라면, 이는 기독교인으로서 전혀 금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사실 장소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목적으로 그곳에 가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천사의 도시’라는 이름을 가진 로스엔젤레스에 간다고 하는데 그 목적이 기독교 신앙에 반대되는 어떤 비윤리적인 목적을 위해서라면, 예를 들어 마약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서라든가 반기독교적인 범죄행위를 하기 위해 그 ‘천사의 도시’에 간다면 이는 아무리 “좋은” 도시라고 해도 기독교인으로서 출입을 금해야 하는 곳인 것이다.   또 한 가지 고려해야 할 것은 개인의 차이이다. 개인의 성향상 도박의 유혹을 많이 받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도박중독에 빠진 사람이라면 아무리 좋은 목적을 가지고 있어도 라스베가스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이는 마치 술 중독에 빠진 사람이 비즈니스 거래를 해야 한다면, 거래 장소로 다른 곳을 선택해야지 술집을 선택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자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라스베가스에 가도 되는가 아니면 가지 말아야 하는가? 올바르고 건전한 목적으로 라스베가스에 간다면 이는 잘못된 일이 아니다. 기독교인으로서 그곳에 가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일지라도 도박을 비롯한 어떤 비윤리적인 죄의 유혹을 많이 받는 사람이라면 라스베가스를 피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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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파가 뭔가요? Publish on September 30,2014홍삼열
    최근에 한국에서 세월호 침몰 사건이 발생해서 수많은 학생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를 계기로 그 선박의 실소유주인 유병언과 그가 교주처럼 지배하고 있는 “구원파”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필자에게도 구원파가 뭐냐고 묻는 분들이 있어서 이 지면을 통해 간단하게 정리해드리고자 한다.   구원파는 네델란드 선교사인 케이스 글래스와 미국 선교사인 딕 욕의 영향으로 1960년대 초에 한국에서 시작된 기독교 이단이다. 현재 유병언파(기독교 복음 침례회), 이요한파(생명의 말씀 선교회), 박옥수파(기쁜 소식 선교회) 이렇게 세 계열로 나뉘어 활동하고 있는데 그 시작은 권신찬 목사이다. 권신찬은 예장통합측 장로교 목사로 활동하다가 “죄사함을 깨달아” 침례를 받음으로써 (사람이 회개와 믿음이 아닌 “깨달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구원파의 주요 교리중 하나이다) 장로교 총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받아 목사직을 박탈당한 인물이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유병언은 권신찬의 사위로서 권신찬의 뒤를 이어 기독교 복음 침례회를 이끌고 있다. 한편 이요한은 유병언이 자신의 사업을 위해 교회를 이용하는 것을 비판하다가 권신찬이 유병언을 지지할 때 그들에게서 분리되어 나와서 방계그룹을 형성한 사람이다. 그리고 박옥수는 권신찬-유병언 계열과는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지만 그들이 선생으로 모신 동일한 외국인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교회를 형성했는데 같은 선생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교리적인 면에서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들 모두가 침례교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지만 정통 침례교와는 상관이 없는 이단들이다.   자 그러면 왜 구원파가 이단으로 정죄되었는가? 우선 유병언파에게만 해당되고 나머지 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사항이 있는데 그것은 교회와 사업의 동일시의 문제이다. 현재 매스콤을 통해 잘 알려져 있는 사항이지만 유병언은 교회를 이끄는 수장인 동시에 기업의 총수이다. 사업가인지 전도인인지 헷갈린다. 유병언은 교회와 기업을 구분하지 않고 교회헌금으로 사업을 하고 또 신도들에게 구원파 기업체에 참여하는 것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서 기업활동과 신앙생활을 동일시하고 있다.   두 번째로 구원파가 이단으로 정죄되는 이유는 구원받은 날짜를 알아야 구원받은 것이라는 주장 때문이다. 주로 이 이유 때문에 이들이 “구원파”로 불린다. 물론 문제있는 사람들에게 붙여진 이름의 대다수가 그렇듯이 이 “구원파”라는 이름도 그들 스스로가 자랑스럽게 붙인 이름이 아니다. 이 이름은 그들을 비판하는 사람들, 특히 지금은 작고한 종교문제연구소장이었던 탁명환씨가 붙여준 것으로 현재는 사람들이 그들을 부르는 공식 명칭이 되었다.   구원파 사람들이 정통 기독교인들을 만나면 사용하는 단골 질문이 있다. “선생님, 구원받으셨습니까?” “예, 구원 받았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 이어지는 질문이 “언제 어디서 구원받으셨습니까?”이다. 이에 대해 정확히 확신있게 대답하지 못하면 “죄송하지만 선생님은 구원받지 못하셨습니다.” 라고 말해준다. 자신이 육신적으로 태어난 날은 정확히 기억하여 매년 지키면서 어떻게 우리의 영생을 좌우할 영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구원받은 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직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한 증거라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일까? 구원받은 날짜가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구원받은 날짜를 아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성경에는 그런 걸 주장하는 내용이 하나도 없는 것일까? 우리가 분명히 알아두어야 하는 것은 구원받은 날짜와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재 내가 구원받은 상태에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바울이나 빌립보 감옥의 간수같이 극적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 구원을 체험한 사람들, 그래서 구원받은 날짜와 장소를 정확히 댈 수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반면에 디모데나 루디아같이 그런 극적인 회심의 경험이 없이 (물론 본인이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나름대로 회심의 순간이 있었겠지만 적어도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에 그 사건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조용히 예수님 믿고 회심하고 구원받게 된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구원받았느냐를 아는 것이 아니라, 현재 내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안에 들어와 있느냐 아니냐인 것이다.   세 번째로 구원파가 이단으로 정죄된 이유는 한 번 회개하고 죄사함 받은 사람은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들은 회개(metanoeo)와 자백(homologeo)을 구분한다. 회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을 때 단 한 번만 하는 것이고, 그 이후로는 일상적인 죄들에 대해 자백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어떤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는가? 요한일서 9절을 근거로 든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homologeo)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러면 성경에 정말 회개는 한 번만 하면 되고 자백은 반복해서 하라고 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다. 우선 위의 요한일서 9절을 검토해보면, 거기에서 말하는 “자백”은 사실 구원파가 주장하는 “회개”와 동일한 개념이다. 우리가 자신의 죄를 “자백”할 때 하나님이 모든 불의(adikia, 여성형 단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신다고 했는데, 이 “불의”는 의롭지 못한 개별행위들(복수)이 아니라 그런 행위들의 뿌리인 “불의”(단수)인 것이다. 이렇게 “자백”이 그런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준다면 이건 구원파에서 말하는 “회개”와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이다.   또 성경 곳곳에 보면 일상적인 죄들을 씻는 것을 가리킬 때 “회개”라는 동일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12:21절을 보라.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하지 아니함 때문에 슬퍼할까 두려워하노라.” 또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들을 보라. 이미 예수를 영접한 교회/사람들에게 계속 “회개”하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수님 자신이 매일 회개하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렇게 많은 곳에서 회개하라고 하고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매일 회개하라고 말씀하시는데, 구원파만은 이걸 부정하고 회개는 단 한 번만 하면 된다고 하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주장이다.   그러면 왜 구원파는 이런 성경의 명백한 예들을 부정하면서 한 번의 회개만을 고집하는 것일까?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칭의의 교리를 왜곡함으로써 정통 교회에 대항하여 자기들만이 올바른 구원의 교리를 가르치고 자기들만이 구원받는다는 이단의 체계를 세우기 위함이다.   구원파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칭의(justification)를 철저히 오해한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의”가 필요하고 이 “의”는 우리의 선한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통해 주어진다는 것이 칭의의 교리의 핵심이다. 그런데 구원파는 이 칭의의 교리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완전히 다른 의미로 이해한다. 즉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의가 주어질 때 우리 속에 있는 “죄덩어리”가 단번에 완전히 없어져서 이제부터는 다시 회개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뜻으로 이해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칭의가 그런 의미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가 십자가의 은총으로 죄가 용서받고 의롭게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서 죄가 완전히 없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에게 죄가 남아있지만 더 이상 하나님이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마치 법정에서 범죄를 저지른 피고가 그 범죄에 대한 형벌을 면제받는 것과 같다. 그런데 형벌을 면제받았다고 그 범죄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하나님이 우리의 형벌을 면제해주시고 의인으로 선언해주셨다고 해서 우리의 죄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만일 그런 식으로 단번에 우리의 모든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어진다면, 한번 회개한 다음에는 우리가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말인가?   우리는 칭의를 위한 회개와 성화를 위한 회개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구원파에서는 한 가지 종류의 회개, 즉 칭의의 회개만을 알고 있는데, 그것은 성경에 맞지도 않고 우리의 경험에 맞지도 않는다. 바울이 구원받은 후에도 자신의 죄성과 싸우는 모습을 보였고 다윗도 여러 번 회개한 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듯이, 회개는 한번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반복해서 해야 하는 것이다.   네 번째로 구원파가 이단으로 정죄되는 이유는 전인적인 회개(즉 지정의를 모두 아우르는 회개) 대신에 지적인 차원에서만 하는 “쉬운” 회개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즉 죄에서 돌아서려는 의지가 필요 없는 “깨달음”만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 깨달음이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의 전부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권신찬은 일찍이 빌리 그래함 목사가 여의도전도대회에 와서 죄사함을 깨달으라고 설교하지 않고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라는 의지적인 결단을 촉구하자, 그가 성경을 잘못 이해했다고 하면서 그도 구원받지 못했다고 한탄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구원파가 주장하는 구원의 과정은 이렇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실 때 인류의 모든 죄가 일시에 용서되었다. 이 용서는 우리가 회개를 하든 하지 않든 상관이 없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다 용서해주신 것이다. 그러면 구원파에서는 결과적으로 누가 구원을 받는가? 우리가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 순간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고 거듭나고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파에서는 회개의 고된 투쟁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깨달음만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회개는 어떤 모습인가? 구원파에서 말하는대로 회개는 지적인 차원의 “깨달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머리와 가슴과 의지를 동원하는 전인격적인 회개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주님께로 방향전환을 할 때 이 회심/회개는 세 가지 측면이 있는 것이다. 머리로 복음을 이해하는 것(mental assent), 가슴으로 복음을 체험하는 것(inner experience), 그리고 주님께로 의지적인 위탁(trust)을 하는 것을 동시에 포함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정적이고 의지적인 회개의 모습이 구원파의 구원론에는 빠져 있는 것이다. 바울이 사도행전 20:21절에서 자신의 복음전도의 핵심으로 설명한대로 우리는 깨달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부단한 회개와 십자가의 은혜에 나 자신을 의탁하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다.   다섯 번째로 구원파가 이단으로 정죄된 이유는 오랫동안 기독교 전통으로 내려오는 경건의 모습들을 “종교행위”로 규정하면서 배척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십일조제도, 직분제도(장로, 권사, 집사), 새벽기도, 철야기도, 축도, 심지어는 주기도문까지 “종교”와 “율법”으로 규정하면서 복음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그런 규정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기성교회는 그런 복음에 반대되는 율법행위를 가르치기 때문에 구원이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런 종교의식들이 알맹이가 빠진 형식에 그치는 경우 구원파의 지적이 맞을 수 있다. 나의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이해가 없이 그저 무슨 짓을 하든 소득의 1/10만 바치면 된다고 한다면, 아니면 직분제도를 마치 계급이 올라가는 것으로 이해한다거나 새벽기도나 철야기도를 하면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건 분명히 예수님이 경계하신 율법적 차원의 신앙생활인 것이다. 바리새적인 가식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그런 경건의 수단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을 악용하는 것이 문제이지 그것을 잘 사용하면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천 년을 거쳐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지키도록 도움을 준 그런 수단들을 그것을 악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악한 것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구원파는 (특히 유병언계열은) 기도 자체를 율법적 종교행위로서 부정한다. 기도는 마음에 있는 것을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지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이 아니고, 또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 이에 더 나아가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기도문도 거부한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것도 율법적 형식이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실제 이유는 구원받은 사람은 더 이상 회개하지 않는다는 구원파 교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매일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내용 중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구절을 구원파의 교리에 맞지 않는다고 주기도문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단은 항상 성경의 전체적인 시각 대신에 편향된 시각을 제공한다. 어느 사안을 볼 때 성경 전체의 입장에서 보지 못하고 성경의 한쪽만을 붙잡고 억지로 해석을 한다. 예를 들어, 구원파는 칭의를 위한 회개는 아는데 성화를 위한 회개에 대해 무지하니, 회개는 한번만 하면 되는 것이고 계속 회개기도 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엉뚱한 주장을 편다. 또 “구원받은 날짜”를 아는 것도 극적인 회심의 과정을 거친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을 일괄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을 하니 이것도 전체 그림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무식하게 말하는 것이고, 자신들의 교리에 맞지 않는 경건의 모습들을 모두 “율법”이라든지 “종교”라는 이름을 붙여서 치워버리는 것도 기독교 전통을 무시하는 편협하고 교만한 태도인 것이다. 그래서 이단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성경 전체에 대한 교육과 성경 전체를 보는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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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금 제대로 내면서 어떻게 비즈니스 합니까? Publish on September 30,2014홍삼열
    필자가 오래 전에 섬기던 교회에 세무사로 일하시던 장로님이 계셨다. LA에서 이름이 나신 분이어서 굵직굵직한 사건이 있을 때면 사람들이 그분께 의뢰를 해서 사건을 처리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그런데 이분이 60세가 가까웠을 때 지금까지 하시던 일을 정리하고 타주로 가셔서 호텔업을 시작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께 여쭈어보았다. “아니 타운에서 성공적으로 세무사 일을 하시던 분이 어떻게 직업도 바꾸고 사는 지역도 바꾸어서 살려고 하십니까?” 그러자 장로님께서 이런 이유를 대셨다. 나이가 점점 들어가니까 예전처럼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고, 전에는 안 그랬는데 중요한 숫자들을 깜박깜박 하신다는 것이다. 잘못하다간 큰 실수를 저지를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것이 이유의 전부가 아니었다. 아니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는데, 세무사로 일하는 것과 교회의 장로로서 하나님 앞에 서는 것 사이에 평생 갈등이 있었다는 것이다. 고객들이 정당한 방법으로 세금을 절약하는 정도를 넘어서 세무사를 이용하여 거짓으로 세금보고를 하게 해달라고 계속 요구를 하는데 이걸 거부하기가 굉장히 힘들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고객중에 교회에서 중직을 맡고 있는 것을 뻔히 아는데 그런 분이 나라를 상대로 거짓 보고를 하기로 마음 먹고 세무사인 자신이 중간에서 그 일을 처리해달라고 요구를 하는데, 이게 너무나 괴로웠다는 것이다. 솔직이 그런 요구를 거부할 수 있는 용기는 없고 그렇다고 은퇴할 때까지 그런 일을 계속하자니 양심이 불편하여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직업을 바꾸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이런 솔직한 고백을 듣고 저는 그 장로님을 다시 보게 되었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세무사이건 아니면 다른 개인사업을 하시는 분이건) 심각하게 이런 고민을 하며, 더 나아가 그런 정도의 결단을 하는 것을 저는 그때까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 기독교인들은 정말로 세금을 정직하게 내야만 할까? 주변의 상당수의 사람들이 세금을 속이고 있고 기독교인들 중에도 세금을 적당히 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나만 세금을 제대로 낸다면 나만 손해보는 바보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고도 비즈니스에 성공하기를 바랄 수 있을까?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으려고 머리를 쓰다가 큰 어려움을 당하는 예들을 가끔 접한다. 소득을 속이기 위해 현금을 보고하지 않고 그걸 침대 밑에 넣어두었는데 도둑이 들어서 다 털렸다든지, 뒤뜰에 땅을 파고 항아리에 현금을 숨겨놓았는데 정원사가 그것을 우연히 발견하고서 그것을 파가지고 도망갔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또 어떤 사람은 세금을 속인 것이 들통나서 몇 년치의 세금과 벌금을 내느라 너무나 힘들게 산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예들을 접하면서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세금을 속인다. 들통이 나는 경우보다 들통이 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고, 다른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는데 나만 정직하게 세금보고를 하면 나만 손해 보는 일이라는 이유 때문인 것이다.   그러면 기독교인들은 이런 논리에서 자유로울까? 슬프게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렇지 못하다. 그런 세상 논리에 많이 동조하는 것 같다. 적은 금액을 훔치는 것에 대해서는 심히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큰 금액이 걸린 세금 문제에 있어서는 “대세”를 따라가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가? 경제적 이익을 위해 남을 속이는 행위를 명백한 죄로 규정한다. 예를 들어, 잠언 20:23절을 보면 “한결같지 않은 저울 추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라고 하였다. 속이는 것은 아무리 그럴 만한 이유를 대도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인 것이다.   또 마태복음 22:21절을 보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였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않는 것과 국가에 내야 할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을 거의 비슷한 수준의 심각한 죄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세금을 속이는 것이 그렇게 심각한 죄가 되는 것일까? 그렇다. 하나님에게나 국가에게나 당연히 내야 할 것을 내지 않는 사람의 마음에는 물질에 대한 탐심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마음에는 정직성을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재물을 더 높은 가치로 섬기는 우상숭배의 동기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이 절대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는 없다(마태 6:24절)고 하였다. 탐심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은 누가 뭐라 해도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기독교인은 정직하게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경제활동의 영역에서 정직하게 거래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명령에 순종하려 할 때 곧 바로 실제적인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우리가 진실된 신앙인으로서 하나님께 소득의 십일조를 바치고 국가에 정직하게 세금을 납부한다면, 과연 그렇게 하면서 같은 직종의 다른 경쟁자들보다 앞설 수 있을까? 아니 그들과 경쟁하여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수입은 고만고만 비슷한데 비용을 더 지출하게 되면 (세금도 비용의 일부이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뒤쳐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분명히 하나님은 신앙인들이 남들보다 뒤쳐지거나 사업에 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실텐데,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정직하게 세금을 내면서 사업에 성공할 수 있을까?   우선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직성만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실성도 요구하신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잠언 6:6)고 하였다. 우리가 정말 정직하게 살 수 있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더 성실하게 일해야 한다. 만일 정직하기는 한데 성실하지 못하면 분명히 사업에 실패한다. 왜 나는 정직하게 세금 내면서 살았는데 실패했냐고 불평해도 소용없다. 하나님의 뜻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정직성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성실성도 필요한 것이다.   아울러 세금을 정직하게 내면서 사업에 성공하려면 지혜가 필요하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어느 부정직한 관리인이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 정말 놀라운 계책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칭찬하신 일이 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눅 16:8) 예수님은 그가 살아남기 위해 지혜롭게 행동한 것을 예로 드시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그만큼 지혜롭지 못한 것을 간접적으로 책망하신 것이다. 기독교인에게 정직성은 기본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더 성실해야 하고 더 지혜로워야 한다. 이걸 못하기 때문에 정직하지 않겠다는 것은 불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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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9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데 왜 기도해야 하나요? Publish on September 30,2014홍삼열
    기도는 소원성취의 도구?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이겠지만 기독교에서도 역시 기도를 강조한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영적 감응력이 뛰어나고 신의 세계에 더 가까이 다가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렇게 신의 세계에 가까이 가 있다는 것은 종종 남다른 기도의 효험으로 증명된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은 신령한 기도를 통해 기도응답을 많이 받는다고 생각된다. 마치 무당이 특별한 주술로써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도록 신의 마음을 조종하는 것과 같이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은 일종의 그런 비법을 알고 사용하기 때문에 기도 응답을 많이 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기도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된다. 과연 기도가 그런 것인가? 나의 노력으로 신을 설득해서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이 기도일까? 기독교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기도를 강조하는 이유는 기도를 통해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때문이 아니라 정반대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내가 순종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기도의 초점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요 나의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기도를 소원성취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통 혹은 사귐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성경은 대표적으로 하나님을 사랑으로 표현한다. 그 이유는 이 사랑이란 개념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쌍방의 거래가 아니라 사랑의 사귐인 것이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사랑의 대상과 끝없이 대화하고 교통하고 언제나 함께 있기를 원한다. 우리가 자녀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것은 우선적으로 서로간의 정신적, 감정적 교통과 사귐이지 절대로 상대방에게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아니다. 친구 중에서도 사랑하는 친구는 특별히 만날 이유가 없어도 매일 만나고 싶고 매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사랑의 본질은 이렇게 깊은 사귐이고 매일의 교제이다. 기도의 성격도 이와 똑같은 것이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는 도구라기보다는 하나님과의 일상적인 교제와 사귐인 것이다.   부르짖어 기도하라는 의미   이렇게 기도가 나의 소원성취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귐의 시간이라면, 그러면 열심히 기도하라는 성경의 많은 예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과부를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관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에 보면 과부가 실망하지 않고 끈질기게 호소함으로써 마침내 공정한 재판을 이끌어 내듯이 우리도 그렇게 끈질기게 기도해야 한다는 교훈이 나온다. 예레미야 33:3절에 보면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라고 하였다. 마태복음 7장에도 보면 열심히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면 하나님의 응답이 내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런 구절들을 보면 내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절대 포기하지 말고 기도의 응답이 내릴 때까지 끈질기게 기도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이해된다.   그런데 마태복음 6장과 10장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시는 분이고 우리의 사정을 너무나도 잘 아시는 분이기 때문에 (심지어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도 우리가 뭘 필요로 하고 무슨 기도를 할 것인지까지 다 아시는 분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처럼 먹을 걱정, 입을 걱정, 사는 걱정을 하며 그런 기도제목을 가지고 오래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자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서로 상반되는 듯한 구절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한쪽에서는 열심히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하고 한쪽에서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사정을 다 아시기 때문에 말을 많이 하며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하고, 어느 쪽에 장단을 맞추어야 할까?   우선 하나님께 끈질기게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마치 아이가 부모가 들어줄 수 없는 것을 해달라고 떼를 쓰는 것처럼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의미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은 아무리 우리가 열심히 기도해도 들어주실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는 의미는 하나님과의 사귐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부르짖어 기도할 때 그때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의미인 것이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데 왜 기도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여기에 기도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왜 하나님은 우리가 열심히 기도해야 응답해 주시는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면,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도 그걸 다 알고 계시다고 하는 하나님께서 미리 응답해주시면 안 되는 것인가?” 맞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이미 다 알고 계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시는 분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응답해주셔도 그것이 응답인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기든지 우연으로 여긴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이미 수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의 건강, 가족, 교회, 친구 등등 우리가 미처 기도하지 않았어도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복을 주셨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그런 복을 하나님의 응답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영안이 열리기까지는 축복으로 주신 것들을 보고도 그걸 하나님의 축복으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복을 복으로 알고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하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에 대해 다음의 세 가지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첫째는 기도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무언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우리 삶에 이루는 것이라는 점이다. 즉 기도의 목적이 나의 영광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 사귐의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뭔가를 달라고 하기 이전에 평소에 하나님과의 사랑의 대화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셋째는 사귐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위해 열심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그렇게 응답하실 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감사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런 이유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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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8
    신앙이 있는 사람은 우울증에 걸리면 안 됩니까? Publish on September 30,2014홍삼열
    우리 주변에 보면 신앙생활을 잘 하던 사람이 언제부터인가 점점 교회의 공식행사에 참석하지 않고 다른 교인들과의 관계가 뜸해지는 것을 보게 된다. 이유를 알고 보니 그 사람이 우울증에 걸렸다는 것이다. 이 경우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든다. 제대로 된 신앙인이라면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지 우울증 같은 것에 걸리면 안 되는 것이 아닌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 5:16-18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립보서 4:4절) 또 마음에서 기쁨과 감사가 사라지는 것은 죄가 마음에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닌가? 제대로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병에 걸리는 것이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우울증에 걸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성경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았다는 뜻이고, 그런 병에 걸린 사람은 자동적으로 좋은 신앙인이 아니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과 더불어 우리 마음속에 또 다른 생각이 든다. 병원치료가 필요한 정도의 우울증은 우리가 보통 “우울하다” “기분이 다운되었다”고 말하는 정도와는 현격한 차이가 나는 정신병적 질환이란 사실이다. 그렇다면 신앙과 우울증의 관계를 마치 수학등식처럼 우울증=불신앙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심장병이나 대장암에 걸린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은 믿음이 좋지 못해서 그런 병에 걸렸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울증에 걸렸다고 그것이 곧 신앙이 좋지 못한 증거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평소에 자기 관리를 잘 하지 못해서 그런 병에 걸렸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대개는 그런 병을 유발하는 어떤 선천적 유전인자가 그의 몸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런 병이 생긴 것이라고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입장에서 우울증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성경은 이 우울증의 문제에 대해서 그리고 현재 우리 주변에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말해주고 있는가? 성경에서 우울증에 빠진 대표적인 사람을 들라 하면 엘리야 선지자를 들 수 있다. 우울증, 특히 심각한 병적인 우울증은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고 절대 피해가지 않는다. 기적을 행하는 선지자도 우울증에 빠질 수 있고 목사도 우울증에 빠질 수 있다.   엘리야의 예를 살펴보면 그는 갈멜산에서 우상을 섬기는 선지자 850명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정말 위대한 선지자이다. 그가 기도할 때 3년 6개월 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던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이세벨의 협박을 받고서 공포에 사로잡힌다. “내일 이맘때까지 네가 죽인 선지자들과 같이 네가 그렇게 되지 않으면 나의 신이 나에게 저주를 내릴 것이다.” 이 협박을 받자마자 엘리야는 사막으로 도망을 친다. 자신의 수발을 들던 종도 동네에 남겨두고 혼자서 사막 한 가운데로 들어가서 로뎀나무 아래에 쓰러진다. 그리고 하나님께 항의를 한다. “하나님. 왜 나 혼자 싸워야 합니까? 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죽고 싶습니다.” 그리고 한없이 계속 잠을 잔다.   다른 사람들을 떠나서 혼자 있고 싶어하는 것, 자살충동을 느끼는 것, 계속 잠만 자는 것, 이런 것들이 전형적인 우울증의 증상인데,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선지자 엘리야도 이런 우울증에 빠졌다면 신앙심이 강하지 못한 일반 기독교인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우리가 공개하기를 꺼려서 그렇지 사실 우리 주변에는 기독교인들이 우울증에 빠지고 더 나아가 자살하는 예가 얼마든지 있다. 한 동안 한국의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 사건이 매스콤에 많이 오르내리었는데 그렇게 자살한 사람들 중에 상당수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에 새삼 놀란 분들이 많이 있었다.   통계적으로 보면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나 우울증이 생기는 비율에는 큰 차이가 없다. 단지 그것을 극복하는 데 차이가 있을 뿐이다. 신앙이 있는 사람이 신앙이 없는 사람보다 우울증을 더 잘 극복하는데 그 이유가 기독교 신앙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고독이나 좌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창조적인 에너지로 바뀔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우울증에 빠진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위해 고난 받으셨다는 사실이 큰 힘이 된다. 예수님이 인생의 패배자이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어떤 하나님의 뜻 이 있어서 그런 고난을 당하신 것이라면, 내가 현재 느끼는 고독이나 고통도 꼭 내가 패배자이기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부족함과 죄의 짐을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예수님이 주신 참 자유를 나의 삶에서 완성하는 과정을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심각한 우울증”은 기도를 많이 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성령충만 하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몸의 암도 고치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이 있을 때는 정신과적인 우울증도 고침을 받을 수 있지만, 대개의 경우 그런 심한 우울증은 감정을 다스리는 뇌 부분의 물리적, 화학적 균형이 깨져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신과적 전문치료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다, 성령충만 하면 그 문제가 없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상태를 더욱 악화시키기만 할 뿐이다. 이미 신앙의 방법으로 치료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선 사람에게 그런 처방을 내리는 것은 마치 중병이 든 환자에게 음식 조절하고 운동 잘 하면 병이 낫는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래서 심각한 우울증이 있는 사람은 다각적인 치료의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우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 영적으로 보살펴주는 양육관계를 지속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 방법은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기 이전에 하면 가장 효과적인, 일종의 예방 차원의 방법이지만 여전히 정신과적인 치료와 병행하면 좋다. 정신과적인 치료의 일환으로는 상담치료를 통해 열등감이나 죄의식 등의 우울증의 원인을 밝히고 그것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 또 필요하면 약물치료도 병행해야 한다. 우울증을 영적인 문제라고만 생각해서 말씀과 기도로만 고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의술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대개 우울증 약물은 중독성이나 습관성이 없기 때문에 전문의의 관리하에 일정기간 복용하면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신앙인이 병이 들었을 때 신앙의 방법과 의술을 함께 사용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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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인은 록음악을 들으면 안 되나요? Publish on April 09,2014홍삼열
    기독교 신앙을 가진 청소년이나 젊은 층들 중에  록(Rock)음악을 즐겨 듣는 사람들이 있다. 기성세대가 볼 때는 이 시 끄럽기만 한 음악을 왜 좋아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록음악에 대해 크게 두 가지 입장이 존재한다. 한쪽에서는 록음악은 사탄의 음악이기 때문에 절대 들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반면 다른 쪽에서는 그건 단순히 일정한 형태의 음악적 미를 표현하는 장르이기 때문에 특별히 내용에 문제가 없으면 록음악을 즐기는 것이 아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어느 입장이 옳은 것일까?   록음악은 록(rock)이란 단어 자체가 말해주듯이 “흔드는 음악”이다. 절대 편안한 자세에서 가만히 앉아서 들을 수 있는 음악이 아니다. 클래식 콘서트장의 분위기와 록 콘서트장의 분위기를 비교하면 이 특징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기성세대는 이런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아서 불편한 것도 있지만 가장 큰 문제점으로 인식되는 것이 록음악과 관련된 저항성, 폭력성, 비윤리성이다. 사실 록음악은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저항의 성격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기존 체제의 근간이 되는 자본주의와 기독교와 사회도덕을 비판하고 술과 마약과 성의 문제에 있어서 완전한 자유와 해방을 추구한다. 그래서 록음악을 하는 가수들 중에 실제로 그런 방탕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그들이 부르는 노래가사에도 그런 불건전한 삶의 방식을 찬양하는 내용들이 많이 발견된다.   특히 Thrash Metal이나 Black Metal로 불리는 극단 하드록(Hard Rock)의 경우에는 대놓고 반기독교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사탄을 숭배하는 장식과 표현들을 공개적으로 사용하기까지 한다. 이들에게는 기독교는 통제와 금욕을 대표하는 억압의 상징이지만 사탄은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대표하는 자유의 상징인 것이다.   록음악의 이런 반사회적, 반기독교적 성격 때문에 어른들은 자녀들에게 록음악을 듣지 말라고 요구한다. 더 나아가 기독교인들 중에는 록음악을 들으면 귀신에 들린다고까지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록음악은 그 자체로 사탄의 음악일까? 그렇지 않다.   모든 장르의 음악에는 질서와 무질서의 요소가 함께 배합되어 있다. 그런데 록음악에는 질서보다 무질서/혼돈의 요소가 많이 담겨 있는 것뿐이다. 사실 이런 특성이 그 자체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무질서와 혼돈에서부터 창조와 변혁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실 때도 혼돈과 공허에서부터 질서의 세계인 우주를 만드시지 않았는가?   그러면 이렇게 질서보다 무질서를 지향하는 록음악을 우리 자녀들이 즐겨 감상해도 되는 것일까? 폭력과 살인과 마약 등 기독교 정서에 맞지 않는 내용의 가사가 아니라 건전한 내용을 노래할 경우에도, 혹시 이 록이란 음악장르 자체가 반기독교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록음악은 클래식음악과는 대조되는 공격성 혹은 혼돈의 성격이 두드러지는 음악이다. 그래서 클래식을 들으면 머리가 맑아지거나 마음이 차분해지고 아니면 일종의 “부작용”으로 심신이 나른해지거나 졸리게 되지만, 록음악을 들으면서 그렇게 나른해진다거나 졸게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록음악 자체가 가지는 소리의 레벨과 비트의 공격성 때문이다. 또한 같은 이유로 식물에게 클래식음악을 들려주면 식물이 잘 자라지만 록음악이나 소음을 들려주면 성장에 방해가 된다는 실험 결과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엄격하게 따져서 음악의 장르는 중립적이다. 우리가 그것을 어떤 목적을 위해 사용하느냐에 따라 유익할 수도 있고 해로울 수도 있는 것이다. 클래식음악 중에서도 성적 불륜을 미화함으로써 우리에게 해로움을 주는 경우가 있는 반면에 록음악 중에서도 건전한 변화를 추구함으로써 유익이 되는 음악도 있는 것이다. 후자의 예가 일명 “크리스천 록”으로 불리는 음악이다. 젊은층에게 익숙하고 호소력이 있는 음악 장르를 사용하여 기독교 메시지를 전하는 선교의 도구인 것이다. 따라서 록음악이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음악장르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음악을 사용하는 목적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록음악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그 매체를 통해 전달하는 메시지가 유익한 것이라면 청소년들이 록음악을 듣는 것을 금지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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