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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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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4
    기독교인은 로또복권을 사면 안 되나요? Publish on March 16,2015홍삼열
    얼마 전에 신문에 이런 내용이 실렸다. 네바다주에 사는 어느 기독교인이 여행 중에 핫도그 집에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복권을 샀는데 그것이 당첨되어 100만불을 받게 되었다는 기사였다. 이때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이게 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당첨되게 해주신 거니까 크리스천으로서 당연히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당첨된 100만불짜리 복권은 세금을 제외하면 본인에게 67만불 정도가 지불되는데 이 사람은 세금을 제외하기 전 금액인 100만불을 기준으로 10%를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에 바치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만일 필자가 담임하는 교회의 어느 교인이 이렇게 복권에 당첨되었다고 하면서 10만불 십일조를 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을 감사히 받고서 축복기도를 해주어야 할까? 솔직한 심정으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복권당첨으로 얻은 소득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소득이 아니기 때문이다. 십일조는 열심히 땀 흘려 일한 노동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방법으로, 즉 어떤 악한 방법으로 돈을 벌거나 불로소득으로 돈을 버는 것은 그 자체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그런 소득을 인정하지 않으시니 그것의 십일조를 인정하지 않으시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방법으로 열심히 일한 수고를 받으신다. 그런데 복권당첨은 어떤가? 복권당첨은 열심히 일해서 얻은 소득이 아니라 ‘행운’을 통해서 얻은 소득이다. 일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라고 믿고 열심히 땀 흘려서 얻은 소득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불로소득을 꿈꾸며 ‘행운’을 바라다가 얻은 소득인 것이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는 것이다. 사실 복권(福券) 당첨은 복/행운이 아니라 화/불운이다. 복권에 당첨되었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살지 못하고 폐인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복권으로 불리는 것은 불로소득을 복/행운으로 보는 사회 자체가 건강하지 못한 증거이다. 비정상적인 것을 ‘행운’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선망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은 정말 건강하지 못한 모습이다. 복권을 사는 것이 특별히 나쁜 일이 아니고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고 항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우선 복권은 공식 사회구조가 인정하는 합법적인 행위라는 근거를 댄다. 사람들이 복권을 사줌으로써 시의 재정에 도움을 줄 수 있고 또 이렇게 모아진 돈을 가지고 공익사업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개인적으로도 이것이 기분전환을 돕는 오락의 성격이 있다는 것이다. 일주일에 한번쯤 사면 비싸지도 않고 재미도 있고 또 특별히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는데 왜 이것을 문제시 하느냐는 것이다. 또 복권에 당첨되어서 큰 돈을 얻게 되면 그걸 가지고 좋은 일에 사용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런 이해하에 어떤 사람들은 친구에게 로또복권을 선물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직장에서 동호회를 만들어서 매주 공동으로 복권을 사서 담첨금을 나누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정말 복권은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 해가 없는 기분전환용 오락인가? “인생역전”의 가능성을 제공함으로써 재미없는 삶에 기대감을 불어넣고 삶의 활력을 불어일으키는 좋은 오락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복권은 사람들에게 사행심을 조장하는 사회악이다. 열심히 일하는 사회가 건강한 법인데, 일하지 않고--복권을 사서 긁는 것도 일이라고 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지만--큰 돈을 벌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것은 오늘도 적은 수입에도 정말 성실히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일인 것이다. 기독교는 불로소득을 믿지 않는다. 행운으로 벼락부자가 되는 것을 믿지 않는다. 기독교는 열심히 일해서 땀 흘려 버는 “정상적인” 소득을 믿는다. 그래서 데살로니가후서 3:10절에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하였고, 시편 128:2절에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 요한복음 5:17절에 보면 하나님이 지금도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성경은 사람이 열심히 일해서 소득을 얻는 것이 정상이고, 일 자체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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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3
    성경의 장과 절은 언제 생긴 겁니까? Publish on March 02,2015홍삼열
    현재 우리가 읽는 성경을 보면 번호가 매겨진 장들과 절들로 구성되어 있고 각 문단마다 제목이 붙어 있다. 또 중간 중간에 동그라미 표시가 있어서 그것으로 새로운 소문단이 시작되는 것을 알려준다. 만일 이런 문학적 도구들이 없었다면 성경읽기가 얼마나 불편할까? 장과 절의 구분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가 원하는 성경구절을 찾아 들어간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그런데 고대 성경사본들을 검토해보면 처음에는 그런 문학적 도구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도구들은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누군가가 독자의 편의를 위해 성경에 만들어 넣은 것이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구약성경의 경우 처음의 모습은 히브리어 자음 22개만으로 기록된 형태였다. 신약성경의 경우도 그리스어의 모음과 자음의 대문자로만 기록된 형태였다. 요즘이야 종이가 흔하니까 실수하면 다른 종이를 사용하면 되고, 또 필기도구나 종이의 질이 좋아서 작은 글자까지도 정교하게 써넣을 수 있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못했다. 아직 종이가 발명되기 전이기 때문에 파피루스나 양피지에다 글을 썼는데 그런 재료들은 값이 비싼 귀한 물품이어서 성경 기록자와 필사자는 절대 실수하면 안 되는 것이고 또 글을 쓸 때는 최대한 좁은 공간에 많은 글자를 써넣어야 하는 것이다. 즉 단어와 단어 사이에 공간이 없이 빽빽하게 글을 써넣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대문자로 적어 넣어야 했는데 그 이유는 당시의 필기도구나 재료로는 정교함이 필요한 소문자를 사용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성경이 이렇게 대문자로만 기록되었고 또 단어와 단어 사이에 아무런 공백이나 부호없이 빽빽하게 연결해서 기록되었다면 성경을 읽는 것이 절대로 쉽지 않은 일인 것이다. 읽는 사람이 알아서 단어 사이를 띄어서 읽고 물음표나 마침표 같은 것을 넣어 읽어야 하는데 이게 쉽지 않은 것이다. 더구나 당시 히브리성서의 경우에는 모음이 없이 자음만을 빽빽이 붙여서 기록하였는데 (원래 히브리 사람들은 말을 할 때 당연히 자음과 모음을 함께 사용하여 발음을 했지만 글을 쓸 때는 자음만을 사용했다) 전문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은 이런 성경을 올바로 읽어내기가 힘든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사본을 만드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서기관들(scribes)이다. 이들은 글자와 글자 사이에 아무런 공간도 없고 부호도 없이 빽빽하게 기록된 성경을 원저자의 의도대로 읽고 해석하도록 특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교인들이 성경을 읽을 때 이렇게 항상 서기관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성경에 모음이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 올바로 발음하기가 어려웠고 또 어떤 단어들은 잘못 읽고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후 5-6세기 경에 구약 학자들은 본문의 발음과 의미를 확실히 해주기 위해서 모음 표기법을 만들어서 모음을 성경에 기입해 넣게 되었던 것이다. 성경을 보다 읽기 쉽게 하기 위한 또 하나의 장치는 장절을 구분해주는 일이다. 예수님 당시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쿰란문서에는 아직 장절의 구분은 없지만 초기 단계의 문단구분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즉 새로운 문단을 시작할 때 행을 바꾸어서 시작하든지 아니면 행의 중간에 몇 자를 띄어서 새로운 문단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이 발견된다. 이후 중세시대에는 다양한 종류의 장 구분법들이 시도되었고 그러다가 우리에게 익숙한 형식의 구분법은 13세기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스티븐 랭톤(Stephen Lengton)에게서부터 시작된다. 현재 형태의 장과 절을 구분한 사람은 16세기 파리의 유명한 인쇄업자였던 스테파누스(Robert Stephanus or Robert Estienne)였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장절의 구분에 너무 얽매일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원래 성경에는 장절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문장부호나 띄어쓰기도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 성경에는 ‘동그라미’로 새로운 단락의 시작을 표시해주는데 역시 이것에도 얽매일 필요가 없다. 대개 성경에 표시된 문학적 장치들을 따라 읽으면 이해에 도움이 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독자의 편의상 그렇게 만들어진 것일 뿐 원래 성경에는 없는 것이니까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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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2
    죽음을 앞두고 믿음이 흔들리면 구원받지 못한 증거입니까? Publish on February 26,2015홍삼열
    우리 주변에 보면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믿음이 흔들리는 경우를 가끔 보게 된다. 대충 교회에 다니던 사람이 말년에 하나님에 대해 의심하게 되는 경우라면 우리가 이것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원래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니까 그렇게 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평생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했던 분이 말년에 육체의 병이 들어서 이것이 우울증으로 발전하고 마침내는 아주 “이상한” 사람으로 변하는 경우를 볼 때면 이것이 우리에게 실망이 되기도 하고 큰 충격으로 다가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럴 때면 우리는 걱정이 된다. 구원받은 사람이면 죽는 순간까지 굳게 믿음을 지켜야 하는데, 과연 그분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어느 순간엔가 그렇게 구원의 확신이 흔들렸다면 그 자체로 구원받지 못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우선 신앙생활 잘 하시다가 나이가 들어 치매에 걸린 경우 또는 정신병에 걸린 경우를 가정해보자. 그런 경우 (우리의 눈으로 볼 때) 당연히 본인의 신앙이 흔들릴 수 있는데 이런 경우 그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육신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정상인에게나 가능한 일을 똑같이 병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경우 하나님께서는 긍휼의 잣대를 가지고 그 사람의 구원의 여부를 판단해주실 것이다.   구원의 확신과 실제의 구원은 절대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구원의 확신이 그렇게 절대적인 것이라면 이단은 무조건 구원받아야 할 것이다. 이단만큼 구원의 확신이 투철한 사람들이 어디 있겠는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결정해주실 사항이다. 물론 우리가 볼 때 이 세상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구원받을 확률이 훨씬 더 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한 동안 믿음이 흔들렸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그것이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고 단정 짓는 것은 유한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판단행위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말년에 믿음이 흔들리는 분을 보며 그분이 지옥에 갈까 봐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걱정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긍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올바른 자세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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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1
    기독교인들은 왜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까? Publish on February 05,2015홍삼열
    비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들을 바라볼 때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왜 기독교인들은 제사를 드리지 않느냐는 것이다. 부모에 대해 효심(孝心)이 있는 사람이면 제사를 통해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기본 예의를 표시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기독교인들의 입장은 제사는 단순히 부모님에 대한 효심의 표시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우상숭배 혹은 귀신숭배이기 때문에 제사를 드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의 차이는 처음 천주교가 한국에 도입될 때부터 있었고 이 문제 때문에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죽임을 당했다.   천주교는 한국에 처음 전파될 때 주로 서양학문을 도입하려는 서학파에 의해서 소개되었다. 종교적인 차원에서의 소개가 아니라 순전히 학문적인 차원에서의 소개였다. 당시 서학파 지식인들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것은 성리학(性理學)의 사변적 공론이었다. 실제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지식을 위한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들은 당시의 성리학에 염증을 느끼고 실용적 학문을 추구하면서 서학관련 서적들을 탐독하였는데, 그러면서 서학의 물질적 측면인 기(器)에만 관심을 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그것의 정신적 근거가 되는 이(理)의 세계, 즉 종교/철학에도 관심을 두었다. 이런 관심은 서양문화의 기초가 되는 기독교에 대한 관심으로 자동 연결이 되었는데, 이들은 천주교를 유교와 반대가 되는 사학(邪學) 즉 잘못된 학문이 아니라 유교의 상제(上帝)사상과 통하는 보유론(補儒論)적 체계로 믿었다. 즉 유교에서 하늘을 보는 입장과 기독교에서 하나님/하느님을 보는 입장이 근본적으로는 같은 것이고, 그래서 기독교는 충분히 유교를 사상적으로 보충해줄 수 있는 이론, 즉 보유론이라는 것이다. 이때까지만해도 적어도 서학파에서는 천주교를 사상적으로는 배척하지 않았다.   그런데 천주교가 보유론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증명된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것이 일명 진산사건(신해박해)이었다. 이 사건은 1791년 신해년에 전라도 진산에서 천주교인인 양반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제사를 폐지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처형된 사건을 말한다. 양반 윤지충은 1790년 말에 집안 대대로 시행해 온 조상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단지를 땅에 묻어버렸다. 당시에는 아무도 이것을 알지 못했는데 그 다음해 여름 그의 어머니 권씨가 별세했을 때 이 사실이 들통 나 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아들이 제사를 지내지도 않고 신주(神主)를 만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자초지종이 밝혀지게 되면서 그는 진산군수에게 체포되어 사형을 당했다. 이유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은 부모에 대한 효를 거부하는 것이고, 부모에 대한 효를 거부하는 것은 나라에 대한 충을 거부하는 것이고, 충을 거부하는 것은 곧 국가에 반역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의 천주교인들은 일대 신앙의 위기를 맞았다. 천주교는 조상제사를 금하는 “무군무부”(無君無夫)의 종교, 즉 아버지도 없고 임금도 없는 사악한 종교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천주교를 보유론적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시도가 허용되지 않게 되고, 유교와 천주교는 같이 갈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교인들은 박해를 받아 흩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현재 가톨릭교회는 조상제사를 고유한 풍속의 한 예로 평가절하하여 허용하고 있지만 원래는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1939년까지는 천주교에서도 조상제사를 엄격히 금했다. 그런데 개신교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조상제사를 성경에 위배되는 것으로서 금하고 있다. 기독교가 제사를 금하는 이유는 그것이 부모에 대한 효와는 상관없는 미신행위라고 믿기 때문이다. 제사가 미신이라는 의미는 사람이 제사를 드릴 때 정말 조상신이 내려와서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떠돌다가 자손들이 제사를 지낼 때 그곳에 와서 음식을 먹고 그것에 만족하면 자손들에게 복을 주고 자손들이 제사음식을 제대로 주지 않으면 진노해서 화를 내린다는 이론은 인간의 원초적 두려움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인 것이다. 왜냐하면 죽은 후에 천국이나 지옥에 가지 못하고 이생에서 떠도는 혼령이 있다면 그건 사람의 영혼, 즉 부모의 영혼이 아니라 악한 영, 즉 타락한 천사의 영이기 때문이다.   이에 더하여 기독교인이 제사를 금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효는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하는 것이지 돌아가시고 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는 “무군무부”의 종교가 아니라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정말 잘 섬기고 잘 공경하라고 가르치는 실제적인 효의 종교인 것이다.   우리들이 가끔 경험하는 것이 있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별로 효자가 아닌 사람이 부모님이 돌아 가시고 나자 장례식도 거창하게 치르고 묘도 최고 명당자리에 잡는다고 하고 제사도 격식 차려서 드리는 경우를 본다. 왜 그럴까? 그런 행위들의 배후에는 순수함보다는 순수하지 못한 동기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왜 살아 계실 때는 효도하지 못하고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효도한다고 하면서 제사에 그렇게 신경을 쓰는가? 물론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제대로 효도하지 못해서 이제 뉘우치는 마음으로 그렇게라도 해야 되겠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제사를 드리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대부분의 경우 살아계실 때의 부모의 위상과 돌아가시고 난 다음의 부모의 위상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돌아가시기 전의 부모님의 모습은 어떤가? 힘 없고 자식들에게 짐이 되는 존재이다. 적어도 그 나이대의 많은 부모님들이 그렇게 생각하신다. 자식들 중에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어떤 경우에라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연로하신 부모님은 더 이상 한창 일하실 때의 힘 있는 부모님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유교의 교리에 의하면 돌아가신 부모님은 귀신이 되어서 후손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준다는 것이다. 힘 없는 존재에서 힘 있는 존재, 더 나아가 무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녀들이 죽은 부모를 잘 섬기면 부모가 복을 주고 잘못 섬기면 벌을 주는 것이다. 따라서 자식이 제사를 정성껏 드린다는 것은 부모님이 지난 날 나에게 해주신 것들이 너무나 감사해서 “순수하게” 공경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현실적인 유익을 바라보며 행하는 기복주의 혹은 이기주의의 결과물인 것이다. 적어도 제사의 사상적 틀을 제공한 주자학의 기본 가르침이 그러한 것이다.   기독교는 부모님께서 살아계실 때 최선을 다해서 섬기고 공경하라고 가르치는 효의 종교이다.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중 제 5계명에 부모공경의 계명이 나오는데, 우리가 잘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주신 열 가지 계명 중에 아홉 가지 계명은 우리가 한 번 기회를 놓쳐도 나중에 돌이켜서 다시 시행할 수 있는 것들이다. 평생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가 시행할 수 있는 계명들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 등등 이런 계명들은 당장 내가 순종하여 시행하지 못했을지라도 나중에 회개하고 돌이켜서 다시 순종하여 지킬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 계명은 어떤가? 이 계명만큼은 부모님이 살아계실 동안에만 실행 가능한 한시적인 계명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부모님을 공경하고 싶어도, 효도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님에게 효도하라는 제 5계명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우리에게 더욱 절실해지고 우리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욱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계명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부모공경은 다른 계명에 비해 독특한 위상을 가진다. 한시적 계명이라는 독특성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부모님께서 살아계실 때 최선을 다해 효도를 다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제사 지내는 집에 시집간 며느리의 경우, 혹은 가족들은 다 제사를 드리는데 나만 기독교인인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제사는 우상숭배이니까 제사상 차리는 것을 돕지도 않고 더 나아가 그런 “가족행사”에 참여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일까? 현실적으로 볼 때 필요 이상의 마찰을 일으키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믿지 않는 가족은 우리가 결국 주님께로 인도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인은 기독교 신앙을 지키면서 동시에 가족의 화목을 깨지 않으려는 최대한의 배려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서 제사상 차리는 것은 솔선수범하여 돕지만 절은 하지 않으면서 조용히 기도를 한다든지 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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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일은 언제나 세상 일에 우선해야 하는가? Publish on December 15,2014홍삼열
    어렸을 적이 생각이 난다. 필자의 부친은 당시 시골교회를 맡아 목회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에 교인의 남편이 아버지를 찾아왔다. 아버지를 찾는 목소리를 들으니 술이 거나하게 취한 상태였다. 보통의 경우이면 아버지는 찾아오는 손님을 서재로 모셔서 함께 대화를 나누실 텐데 그날은 “선생님. 술에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술이 깨신 후에 낮에 찾아오시죠”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남자분은 꼭 따져야 할 것이 있다며 꼭 얘기를 해야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아버지는 그분을 서재로 들어오게 해서 한참 이야기를 나누셨다. 그 남자분이 따진 내용은 한 마디로 하면 자기 부인이 집안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교회에만 와서 산다는 것이다. 목사가 교회에서 어떻게 교육을 시켰기에 자기 부인이 그렇게 행동하느냐는 것이다.   교회 일과 집안 일 혹은 하나님의 일과 세상 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며 양자간에 어떤 우선순위를 정해주어야 하는지는 모든 신앙인들이 고민하는 문제이다. 어떤 사람은 단순하게 생각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세상 일은 육적인 일이고 교회 일은 영적인 일이기 때문에 당연히 세상 일에 앞서서 교회의 일을 먼저 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런 입장에 선 사람은 가정 일이 밀렸어도 회사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어도 교회에서 필요하다면 만사 제치고 먼저 교회 일을 처리하러 갈 것이다.   반면에 다른 사람은 그렇게 겉으로 보이는 형태를 가지고 이것은 영적인 일이고 저것은 육적인 일이라고 구분하는 것은 성서적이지 않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면을 보시지 않고 마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아무리 교회 일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어떤 인간적인 목적을 위해 일을 한다면 그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닌 것이다. 겉으로는 영적인 일이지만 실제 내용은 육적인 일인 것이다. 또 같은 논리로 세상 일을 하는 이유가 어떤 인간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하나님의 일, 영적인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따라서 이런 입장에 있는 사람은 세상 일과 교회 일이라는 외형적인 모습만을 가지고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할 일을 결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세상 일과 교회 일이 충돌을 일으킬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영적인 일인 교회 일을 먼저 해야 할까?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모든 일은 영적인 일이기 때문에 어떤 다른 우선순위의 기준을 생각해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세상 일이든 교회 일이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일은 동일하게 영적인 일이기 때문에 특정 시점에서 어떤 것을 먼저 해야 하나님이 가장 크게 영광을 받으실까를 생각하면서 우선순위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   세상 일과 교회 일을 각각 육적 혹은 영적인 일로 구분하는 사고방식은 물질을 악하게 보고 영을 선하게 보는 고전적인 이원론에 기인한다. 신약성경이 기록되던 당시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은 육체가 없는 신(神)의 상태를 최고의 영성의 단계로 그리고 육체에 지배당하는 상태를 가장 낮은 단계로 보았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구원은 영혼이 육체를 탈출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육체를 지니고 사는 동안에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영성의 단계는 육체의 성질을 죽이는 금욕주의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금욕주의가 지나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육체 자체가 악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결혼까지도 금하게 된다. 왜냐하면 결혼은 본질적으로 악한 육신을 재생산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편 이런 이원론은 반대 극단으로 치우쳐서 방종주의로 흐르기도 하였다. 어차피 육신은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기에 절대 구원받지 못할 것이고 오로지 선한 영혼만 구원받게 될 테니까 육신은 아무리 잘 관리해보았자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육신은 어떻든지 상관없이 영혼만 잘 관리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영혼과 육신의 관계를 어떻게 보는가? 서로 상극의 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마찬가지로 육신도 하나님의 선한 창조로 본다. 예를 들어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빛을 만드시고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그 안에 들어가는 동식물들을 만드시고 매번 “보시기에 좋았다”고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담과 이브를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에서는 물질/육체는 악한 것이 아니라 영과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선한 것이다.   교회 일과 세상 일을 본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더 나아가 적대적인 관계로 보는 시도는 16세기 종교개혁의 만인사제설로 인해 무너졌다. 만인사제설은 개신교 종교개혁을 시작한 마틴루터가 새로이 강조한 것으로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성직자라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기로는 성직자로 세움을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성직자가 교회 안에서 행하는 일만이 거룩한 일이고 또 그런 거룩한 하나님의 일을 통해서만 사람이 하나님께 직접 연결되고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그런 특권을 부여받은 것이다. 베드로전서 2:9절이 이 사실을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운명하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는데, 이것은 구약시대에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방법, 즉 반드시 성직자를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방법이 폐지되고, 이제는 누구나 예수를 영접하고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총으로 직접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는 진리를 확인해주는 사건인 것이다. 히브리서 10:19-20절이 이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은 성직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한다. 성직자는 전문적인 교회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는 부름을 받은 것이고 평신도는 세상의 직업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는 부름을 받은 것이다. 세상 직업도 역시 하나님의 소명(召命)이라는 개념은 영어의 Vocation(독일어로는 Beruf)이라는 단어에 집약되어 있다. 이 단어는 직업으로도 번역되고 소명으로도 번역되는 되는 단어이다. 세상 직업/일도 하나님의 소명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절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그리스도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다. 성직자는 평신도들이 빛과 소금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뒤에서 도와주는 사람이고, 실제로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은 평신도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져야 하는 장소는 교회가 아니라 각자의 직장과 학교와 가정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교회 일이든 세상 일이든 모든 일이 하나님의 소명이고 우리는 그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이라면, 교회 일을 먼저 할 것인가 세상 일을 먼저 할 것인가는 그때 상황에 따라 판단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교회 일인가 세상 일인가 그 자체가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기준이 아니라 이 시점에서 어떤 것을 먼저하고 그것을 어떻게 수행하는 것이 가장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인가가 선택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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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에서는 절대 물건을 사고팔면 안 되나요? Publish on December 15,2014홍삼열
    교회에서 가끔 교인들간에 어떤 물건을 사고파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이것이 성경적으로 옳은 것인가 아니면 옳지 못한 것인가? 어떤 분들은 교회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것은 그것이 선교의 목적으로 하든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든 다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무조건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입장에 서 있는 분들이 제시하는 성경구절이 누가복음 19:45-46절이다.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성전에서 장사하는 것은 성전의 원래 목적인 기도/예배를 방해하고 예수님의 표현대로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행위이기 때문에 철저히 금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에 다른 분들은 교회에서 경제활동을 할 때 그것은 언제나 내부적으로는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외부적으로는 전도나 선교를 위한 목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교회를 이용하여 교인들에게 어떤 특정 상품을 사도록 강요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취한다면 이건 누가 보더라도 잘못된 것으로 금지해야 하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굳이 선한 목적을 위한 경제활동을 금지시킬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과연 어떤 입장이 옳은 것일까? 우선 우리는 성경 구절을 문맥과 상관없이 똑 떼어서 그걸 오늘의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의 위험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1:13절에 보면 여자는 교회에서 머리에 수건을 쓰고 예배를 드리라는 말씀이 있는데,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검토하면서 왜 그런 명령이 주어졌는지를 이해할 생각은 하지 않고 성경에 그렇게 적혀 있으니 지금도 무조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성경을 잘못 적용하는 것이다. 또 고린도전서 14:34절에 보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고 사람들 앞에서 가르치지 말라는 성경말씀이 있는데, 당시의 사회규범을 고려하지 않고 여자는 현재에도 무조건 교회에서 잠잠하고 주일학교 교사도 하면 안 된다고 한다면 이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아주 케케묵은 교리로 만드는 것이다.   누가복음 19:45-46절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강도들이라고 부르시며 그들을 내어 쫓으셨는데, 우리가 이 사건의 전후 문맥과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니까 지금도 교회 안에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사고파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너무나 성경을 잘못 적용하는 것이다.   왜 예수님이 성전 안에 들어와 있는 장사꾼들을 책망하시고 몰아내셨는가? 당시 성전 제사를 둘러싼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면 예수님이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우선 성전에는 돈 바꾸는 환전상들이 들어가 있었는데 이들 뒤에 제사장들이 있었다. 당시 유대법에 의하면 모든 유대 남자들은 매년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성전세를 낼 때 한 가지 중요한 규정이 있는데 성전세는 반드시 성전에서 쓰는 특별 화폐로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사용되는 헬라화폐, 로마화폐, 시리아화폐들은 “부정한” 화폐이기 때문에 그걸로 하나님께 드릴 수는 없고 반드시 “거룩한” 성전세겔로 바꾸어서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고, 성전 제사장들의 허락 하에 아니면 제사장들이 직접 이들을 고용하여 환전을 해주면서 수수료를 챙긴 것이다. 당시 모든 유대 남자들이 성전세를 내야 했으니 일반 화폐를 성전세겔로 바꾸어줄 때 떨어지는 수수료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던 것이다.   성전에 또 누가 있었는가? 짐승 파는 사람들이 있었다. 성전에 오는 사람은 반드시 희생제물을 준비하여 가지고 와야 했는데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반드시 흠이 없는 것이어야 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그런 완벽한 동물을 찾기도 힘들고 또 그런 동물을 데리고 멀리에서부터 오게 되는 경우 동물에게 문제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혹은 성전에서 제물을 구입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래서 좋은 의미에서 볼 때 성전 측에서는 사람들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미리 흠 없는 짐승들을 사두었다가 예배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그걸 팔아서 제물로 드리게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짐승 파는 사람들 뒤에도 역시 성전 제사장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성전 제사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체험하는 통로로 주신 것인데, 당시 성전 지도자들은 돈에 눈이 멀어서 이것을 오히려 사람들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착취의 수단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비둘기를 성전 밖에서 사면 1불이면 되는데 성전 안에서 사면 그 몇 배를 더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비싸면 거기서 안 사고 밖에서 미리 준비했다가 가지고 오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밖에서 사온 것을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면서, 특히 전문가의 눈으로 볼 때 이 동물은 흠이 있다고 하면서 그걸 제물로 받아주지 않으면 참으로 난처한 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괜히 헛고생하기 싫으면 비싼 갚을 주고서라도 성전 안에서 “공인된” 제물을 사는 것이 이로운 것이다.   세상에서는 장삿속으로 사람들을 착취하는 일이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성전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 그런데 성전에서 가장 거룩하다고 하는 대제사장들이 제도적으로 그런 악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이걸 보시고 가만히 계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을 책망하시고 장사꾼들을 밖으로 몰아내시며 성전의 본래 목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치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마 예수님이 이렇게 자신들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셨기 때문에, 나중에 예수님이 잡혔을 때 제일 먼저 대제사장 안나스 앞으로 끌려간 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몰아내신 이유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행해지는 경제행위 그 자체가 예배의 권위와 경건을 해친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주신 거룩한 예배가 제사장들의 탐욕 때문에 백성들의 영혼을 더욱 피폐하게 만드는 악한 것으로 변질된 것을 보시고 참으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집에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은혜 받는 통로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배자들을 착취하는데 사용되는 것을 보시고 소란을 일으키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것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는 것이 성서의 정신에 맞는 것일까? 예를 들어 여선교회에서 선교기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바자회를 연다든가, 청년들이 단기선교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커피를 판다든가, 아니면 어떤 교회에서는 점심 식사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식권을 판매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그런 모든 행위들을 비성서적인 것으로서 금지해야 할까 아니면 성서의 정신에 맞는 것으로서 오히려 장려해야 할까?   교회에서 무언가를 사고파는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사고판다는 ‘외형’이 아니라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 하는가이다. 우리가 아무리 거룩한 예배 행위를 해도 목적이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면 그건 하나님이 책망하실 일이다. 그게 강도행위이다. 그러나 아무리 세속적인 모습의 무언가를 해도 그것의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의 일을 돕기 위한 것이라면 그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거룩한 행위, 즉 예배의 연장인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선교를 비롯한 선한 목적을 위해 사고파는 일들이 있다면, 그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금하지 말고 열심히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교회를 마치 시장터같이 만드는 것은 좋지 않다. 교회에 와서 차분하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사람들이 장사하는데 정신이 팔려서 예배를 소홀히 하게 된다면 이는 앞과 뒤가 전도된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사고파는 행위를 중지하고 예배에 집중을 하게 해야 한다. 교회에서는 질서가 필요하다. 질서는 우선순위에 맞게 일들을 처리하는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의 가치를 훼손시키지 않는 선에서 그 다음 중요한 것이 이루어져야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것에 신경 쓰느라 진짜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되면 이것처럼 미련한 일이 없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예배가 가장 중요하다. 이걸 제대로 못하고 다른 것들을 한다면 정말 잘못된 것이다. 교회에서 어떤 물건을 사고파는 일을 해야 하는가? 우선순위와 질서를 먼저 생각하고, 예배에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 그 일을 허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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