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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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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양칼럼] 12월 19일 2022년 Publish on December 20,2022관리자
    어둠의 틈새로 빛이 새어 나올 수 있도록 조금씩 찢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라 할것도 없이 그 빛은 절망의 심연에 갇힌 이들에게 길을 여는 희망입니다. 호젓한 기쁨으로 한껏 들뜨게 만드는 화려한 장식과는 차원이 다른 빛입니다. 물론 아련하게 들려오는 캐럴송과 함께 은은한 불빛은 분잡한 생활에 거칠어졌던 마음을 숙지근하게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땅의 어둠을 찢고 빛으로 찾아 온 예수의 탄생은 그저 가볍게 사람의 감성이나 자극하려고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만삭의 여인을 위해 누구도 문을 열어 주지 않던 베들레헴의 비정한 어둠을 찢어 내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무너진 그 틈 사이로 빛이신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오랫동안 어둠에 갇혀 무감각해진 세상에 희망의 빛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 빛을 통해 우리도 어둠을 가르고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시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시야 바깥에 존재하던 벼랑 끝의 사람들이 보이고, 비스듬히 서 있는 나를 받쳐 주기 위해 묵묵히 곁을 지키던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님이 더이상 멀리 서서 관망만 하지 말고, 빛 가운데로 들어오라고 우리를 부르신 까닭입니다. 이제 희망의 빛을 머금지만 말고, 가서 나누어 주라는 것이지요. 척박한 현실 속 어둠에 갇힌 자들, 곧 배고픈 사람과 헐벗은 사람 그리고 병자와 나그네를 돌보며 희망의 빛을 나누어 주라는 말씀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야말로 큰 것에도 충성된 자라는 가르침을 생각해 보면, 작은 나눔 하나에도 대자대비하신 하나님의 큰 뜻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깊어지는 어둠만큼, 희망의 빛을 나누는 작은 돌봄과 보살핌도 소자에게는 큰 위로와 기쁨이 되는 법입니다. 성탄의 축제를 온기가 절실한 시기의 한 가운데 마련한 것도 그런 깊은 뜻이 있었던 이유가 아닐까요? 여전히 찢어내야 할 어둠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모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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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양칼럼] 12월 12일 2022년 Publish on December 12,2022관리자
    세밑이 가까이 다가오니 괜스레 사랑에 관한 시 한편이 떠오릅니다. 이정하의 ‘별에게 묻다’입니다. ‘밤이면 나는 별에게 묻습니다/ 사랑은 과연 그대처럼 멀리 있는 것인가요/ 내 가슴 속에 별빛이란 별빛은 다 부어놓고/ 그리움이란 그리움은 다 일으켜놓고/ 당신은 그렇게/ 멀리서 멀리서/ 무심히만 있는 겁니까’ 마음에 써 놓은 것도 아닌데, 애꿎게 창문의 성애에 썼다 지우기를 반복한 이름.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입니다. 흘려 보낸 건 세월만이 아니었는지, 문득 지나간 기억도 멈추어 서서 마음을 두덕거립니다. 일상의 분주함 속에서 무심했던 자신을 좀 살펴보라고 치근대는 것이지요. "인생수업"의 저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가장 하고 싶어하는 위시리스트는 결코 크거나 화려한 것들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전에 가보았던 푸른 바다를 한 번만 보고 싶다"거나, "오래 전 함께 했던 그리운 얼굴을 한 번이라도 다시 보고 싶다"는 아주 소소한 바램이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의 가까이에서 쉽게 볼 수 있거나, 늘 해오던 익숙한 것들에 대한 아련함이 너무나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에게 상실감을 주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그 순간에 대한 애틋한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금을 늘 상실한 채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비극적 상황이라고 말합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옛사랑에 머물러, 지금 자신의 옆을 서성이는 그 사람의 사랑을 눈치채지 못하는 새드 엔딩 무비처럼 말이지요. 대신에 저자는 독자들에게 현실을 직시해 보라고 권면합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바다와 하늘과 별 또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한 번만 더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Just do it!" 생의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원하게 될 그것을 지금 행하라고 독려합니다. 이것이 바로 상실한 기억으로 방치된 ‘지금’을 되찾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성도의 자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래 전 팔레스타인 땅에서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억에 머물러 있어서는 곤란합니다. 다시 반복할 수 없는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상실감에 빠져 사는 것은 오히려 주님의 뜻에서 멀어지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최선의 길은 기억의 지평선 너머에 갇혀서 버둥거리는 삶이 아니라, 그렇게도 바라던 그 기억을 지금 실현해 내는 것입니다. "Just Do It!" 해피 엔딩의 스토리를 현재 진행형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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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양칼럼] 12월 5일 2022년 Publish on December 06,2022관리자
    ‘일단 나부터 칭찬합시다.’ 일본인 카운슬러 작가인 데즈카 치사코의 책 제목입니다. 칭찬을 받고 기뻐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칭찬의 말'을 들으면 뇌에는 행복 호르몬이 늘어난다고 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칭찬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뇌는 누구에게든 칭찬의 말을 하면 반응하여, 기분을 좋게 만드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칭찬받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칭찬하는 습관을 들이는 게 행복한 삶의 비결이라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말만 바꾸어도 삶이 달라 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거에요. 예를 들어 '오늘 아침에 10분 일찍 출근했다'라는 문장에는 설명만 있고 칭찬의 말은 없지만, '오늘 아침에 10분 일찍 출근했다. 대단하네' 이렇게 쓰면 뇌가 칭찬의 말로 인식합니다. 그 때 생명에 잠재되어 있던 '좋은 힘과 의식'이 발현되어, 밖으로부터 자꾸 '좋은 것'을 끌어오게 된다고 합니다. 선순환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생각해 보면, 자기 스스로를 칭찬하는 건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일상의 삶에서 자신을 긍정적으로 볼 수만 있다면 얼마든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결점을 다 덮고도 남을 만큼의 장점을 한 가지 이상 가지고 있다는 것만 인정하면 말입니다. 그것을 칭찬하는 순간, 변화되는 삶의 긍정적인 힘은 생각지 못한 덤처럼 생기를 불어 넣어 주곤 합니다. 사소한 것 같지만 정말 잘 살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을 주기도 하지요. 물론 삶을 맘껏 즐기며 산다는 건 다소 꿈같은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대개 좋은 점 보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더 크게 느껴지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고난은 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찾아오는 것처럼 체감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린다는 생각이 든다고 해서 저절로 행복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잔뜩 찌푸린 흐린 날은 안되고, 하늘이 맑고 화창한 날에만 행복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지요.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유쾌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거에요. 하지만 대하는 방식에 따라 감정은 얼마든 달라질 수는 있습니다. 신앙을 일종의 연금술에 비유하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연금술(鍊金術)은 구리나 납과 같은 비금속으로 금은의 귀금속을 제조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은 별 것 아닌 삶의 여러 요소들을 소중한 기억으로 만드는 비법과 같은 거에요. 신앙이 생기면 불평의 대상이 감사의 제목이 되기도 하고, 좌절의 이유가 행복의 원천으로 둔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인이 된다는 건 삶의 연금술사가 되는 길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대단한 비법을 부리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닙니다. 그저 사용하는 말만 바꾸어도, 인생에 커다란 변화를 만들 수 있으니 말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일단 나부터 칭찬해 보라는 거에요. 주님이 주신 하루를 잘 버텨 준 나를 다독이며 칭찬해 주다 보면, 어느새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같은 자신의 삶이 떠올라 그에 대한 감사도 자연스럽게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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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
    [목양칼럼] 11월 28일 2022년 Publish on November 28,2022관리자
    [목양칼럼] 11월 28일 월요일 영어 표현에 'Even a broken clock is right twice a day'라는 말이 있습니다. 풀이하면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는 뜻입니다. 하루가 24시간이고, 시계는 12시를 기준으로 오전, 오후로 나누어 시계바늘이 돌게 되어 있으니 적어도 하루에 2번은 맞는 때가 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고장이 나 멈춰 있는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반드시 옳은 시각을 표시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일반적으로 이 표현은 항상 틀린 말만 하던 사람이 웬일로 옳은 말을 했을 때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연히 던진 말이 기가 막히게 상황과 맞아 떨어질 때, 이 비유적 표현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연한 일치만이 아니라도, 이 말의 의미를 곱십어 생각하다 보면 인생의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특히 현대사회처럼 모든 것이 특정한 방향으로 향해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세상에서는 뜻밖의 위로가 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인간 세상도 발전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시간은 기찻길처럼 어딘가를 향해 궤도를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시간도 금이라는 말은 거기에 딱 들어 맞는 표현이지요. 시간이 마치 저기 밖에 기찻길처럼 떡 하니 놓여 있어서, 일정한 방향으로 하나씩 진행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지점에 미치지 못하면 시간에 쫓기는 사람이 생기기도 하고, 한참 뒤 처지는 사람도 나오기 마련이라는 거에요. 한 순간의 착오도 없이 일정하게 움직이는 시간의 매정함은 잠시 한 눈이라도 팔 것 같은 이를 결코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시간에게 버림 받지 않으려면 무조건 매달려서라도 따라가야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된 것이지요. 물론 하나님도 시간을 제멋대로 가게 내버려 두신 거라면, 딱히 딴지를 걸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럴 것 같지 않은 게, 너무나 사랑하셔서 이 땅의 모든 피조물을 임의대로 운용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신 인간에게 시간에 대해서만 예외를 두셨을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끔씩은 뚱딴지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시간을 작은 병에 담아 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당장 왜냐고 묻고 싶겠지요. 두가지 이유인데, 하나는 시간이 사라져 가기 전에 담아서 기억날 때마다 보기좋게 옆에 보관해 두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누군가에게 선물로 주고 싶어서 입니다. 기다려 주지 않는 시간으로 인해 상처받거나, 더 이상 시간 안에 머물 수 없는 분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한 해가 저물어 간다고 아쉬워 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시간 여행이 점점 멈춰 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병상에 누워 있는 그들을 보면서, 시간을 보관해 둔 작은 병을 건네 드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 지곤 합니다. 탄탄대로를 달리듯 시간 위에서도 부족한 것 없이 맘껏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는,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을 염려하며 시간에게 조차 저만치 등 떠밀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시간의 작은 병을 나누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곤 합니다. 그러고 보면, 주님의 시간도 알 수 없는 것이라 하니 번듯한 기찻길 같은 세상의 시간 앞에서는 별볼 일 없어 보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주신 시간은 우리 세상의 기대와 달리 고장 난 시계처럼 보일 수 있겠다 생각이 드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우연처럼 보이는 두 번의 기회라도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믿는 주님의 시간 앞에서는 지금 보다 나을 것이란 소망이 생기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행여 시간에 상처를 입고 있거나, 힘들어 하시는 분들이 계시면 조그만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작은 병이지만 고이 담아 둔 시간을 아낌없이 여러분들께 나누어 드릴 테니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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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5
    [목양칼럼] 11월 21일 Publish on November 23,2022관리자
    바울은 에베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 교인들에게 세월을 아끼라는 권면을 남긴 바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아끼라‘는 말은 "엑사고라조(ἐξαγοράζω)"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엑사고라조’는 어부가 물고기를 그물로 건져 올리는 모습을 표현한 것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세월을 아낀다는 말을 다르게 바꾸어 표현하면, 세월을 건져 올리라는 의미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어 성경 번역본에는 이 부분을 ’Redeem’이라는 단어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죄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그 의미를 재해석한 것입니다. 구원의 은총을 마치 인간들이 죄라는 수렁에서 건져냄을 당하는 모습에 빗댄 것이지요. 이를 통해 우리는 스스로 구원을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선물을 아무 공로없이 얻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조건없는 사랑이 그렇게 확증된 것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바울은 믿음의 핵심을 ‘세월을 아끼는 태도’에서 찾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의 수렁에서 건져 올려주신 것처럼, 우리도 세월을 건져 올리며 살라는 거에요. 그것이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에 합당한 삶이라고 그는 힘주어 강조합니다. 구원의 은총을 받은 이가 당연히 거쳐야 할 성화의 과정이라 본 것이지요. 이제는 더 이상 세상의 풍조를 쫓는 허송 세월이 아니라, 욕망의 수렁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거에요. 그래서 날마다 자기 자신을 영적인 제물로 올려 드리는 신실한 예배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라는 권면입니다. 그것이 세월을 아끼는 길이라고 본 것이지요. 교회력에 따르면, 금주부터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대림(Advent, 待臨)은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기다림이란 행복한 설렘을 주기도 하지만, 원치 않는 지루함과 초조함을 안겨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다림의 뒤에는, ‘그 때가 언제 올 것인가’ 라는 질문이 늘 따라붙기 마련입니다. 애타게 메시야를 구하던 유대 백성들이 예수께 물었던 질문도 대부분은 ‘그 날이 언제 올 것인가‘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언제’라는 질문에 직접적으로 답을 해주시기 보다 ‘어떻게‘라는 말로 그들에게 도전을 주시곤 했습니다. 오는 때를 막연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모습으로 그날을 준비할 것인지를 물으셨던 것이지요. 세월이란 게, 시계태엽 같아서 돌려놓으면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다가도 조금만 눈길 주지 않으면 꼼짝 안고 거기 멈추어 서 버리지요. 아무리 마음 속 시계바늘을 돌려 보아도, 기다림은 먼저 다가오는 법이 없습니다. 거기서 꼭 때를 채울 때까지 말도 걸어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애꿎은 시간을 붙들고 하소연만 늘어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그러니 세월은 거기에 그냥 놔두고 지켜 보는 게 아니라 건져올려야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유입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거에요. 그것이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성탄의 기쁨에 도취되기 전에, 지금은 먼저 세월을 건져 올려야 할 때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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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
    [목양칼럼] 11월 14일 월요일 Publish on November 15,2022관리자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 가운데는 가공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재료를 활용하면서도 멋과 효용성이라는 측면에서 전혀 손색이 없는 건축물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개심사의 범종각이나 청룡사 대웅전에 사용된 휜 나무는 불안하고 흉해 보일지 몰라도, 곧은 나무와 다름없이 기둥의 역할을 거뜬히 해내고 있습니다. 비정형적인 질서로 가득 차 있는, 날 것 그대로를 크게 손대지 않고도 쓸모를 잘 활용한 것이지요. 굳이 곧은 것만을 활용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골라 사용하는 현대 사회의 인위적이고 효율적 가치관과는 큰 차이가 나는 부분입니다. 우리의 옛 장인들은 뒤틀리고 휜 나무도 손대지 않은 그대로 기둥과 대들보의 용도로 쓰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곧거나 휘거나 상관없이 나름대로 제 몫이 다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지요. 이러한 생각은 초석을 놓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었습니다. '덤벙주초'라고 해서 자연상태의 돌을 손대지 않고 가져다가 기둥의 기초로 쓴 것입니다. 산에 박혀 있던 울퉁불퉁하고 모난 돌을 다듬지 않은 채 가져다가 초석으로 사용한다는 발상은 현대인의 시각으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양이 없는 것은 둘째치고 안정성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휜 나무라고 해서 특별히 구조적 안정성에 더 큰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둥의 밑동이 박히는 부분을 잘 다듬어 놓고, 나무가 꼭 맞게 끼워질 수 있도록 최소한의 작업을 거치기 때문입니다. 휜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자연석을 크게 손대지 않은 채로 초석을 삼는 것은 기존의 표준화된 생각에서 많이 벗어난 방식입니다. 자연이 우리에게 준 모든 사물들은 다 나름대로의 가치와 쓰임새가 있기 마련이라는 믿음 없이는 쉽게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지요.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이야기를 전해 주시며, 당시 유대 사회의 80%이상을 차지하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소중한 존재가치를 언급하신 바 있습니다. 겨자나 누룩의 비유는 단순히 작은 물질이 뻥튀기처럼 크게 된다는 성장이나 성공의 스토리를 말하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존재가치가 미비한 사람들도 사람답게 존중받는 공의로운 세상을 보여주고자 하신 말씀이라는 거에요. 비록 여러모로 부족해 보이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덤벙주초처럼 하늘의 나라를 세우는 초석으로 사용하실 것이란 놀라운 이야기였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자들을 택하셔서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천한 자들과 멸시 받는 자들 그리고 없는 자들을 택하셔서 있는 자들을 폐하시는 공의로운 분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절망의 늪 같으면서도, 나름대로 숨쉬며 살만 한 소망이 남아 있는 곳입니다. 이제 뿌린대로 거두며 소산의 기쁨을 나누는 시점을 맞이하여,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지난 순간을 세심하게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부족한 것도 많고 허점 투성이 같은 우리가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밑동을 다듬어 놓고 기다려주신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실 수 있을 거에요. 꼿꼿이 서야 할 자리를 지키며 있는 그대로 자기 몫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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