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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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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을 믿어야 하나요? Publish on January 17,2016홍삼열
    누구든 간밤에 나쁜 꿈을 꾸면 기분이 언짢고 좋은 꿈을 꾸게 되면 기분이 좋다. 또 어떤 중요한 무언가를 고대하는 경우 그에 관련되는 것으로 느껴지는 꿈을 꾸게 되면 그것을 일의 성취 혹은 실패의 징조로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서 돼지 꿈을 꾸거나 똥 구덩이에 빠지는 꿈을 꾸면 이걸 횡재할 징조로 여겨서 복권이나 주식을 산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모든 꿈은 개꿈이라는 식으로 꿈의 역할을 완전히 무시한다. 꿈은 자신이 평소에 경험한 것들이 뇌 속에 잠재해 있다가 우연히 꿈을 통해 표출되는 것일 뿐 초자연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꿈을 믿을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도 역시 꿈을 꾼다. 창세기에 보면 야곱의 아들 요셉이 꿈을 꾼다. 11곡식 단이 자신의 곡식 단에게 절하는 꿈, 해와 달과 별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을 꾼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형들의 미움을 사서 이집트 노예상에게 팔려가게 된다. 또한 다니엘도 꿈을 꾼다. 거대한 신상에 대한 꿈, 거대한 나무에 대한 꿈, 네 짐승에 대한 꿈 등 다양한 꿈을 꾼다.   꿈과는 구별되지만 역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도구로 생각되는 신비한 환상이 있다. 성경에 보면 에스겔은 네 생물에 대한 환상,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의 환상, 마른 뼈가 살아나는 환상을 보았고, 베드로는 각종 짐승이 담긴 보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환상을 보았고, 바울은 삼층천에 대한 환상, 마게도냐에서 자기를 부르는 환상을 보았고, 또 요한은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수많은 환상들을 보았다. 성경에는 이렇게 사람이 꿈이나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고 그것을 일반 사람들에게 해석하여 알려주는 예들을 많이 기록하고 있다.   현 시대에도 “영적으로 민감한” 기독교인들이 꿈을 꾸거나 환상을 보는 예들이 있다. 그들은 꿈속에서 예수님을 보기도 하고, 기도 중에 어떤 특정한 장면이나 연속적인 사건이 파노라마처럼 전개되는 환상을 보기도 한다. 이런 경우 우리는 이걸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신적 계시를 알려주시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사람이 무언가를 너무나 열심히 원하니까 그런 것이 꿈이나 환상의 형식으로 둔갑해서 보일 뿐이라고 이해해야 할까?   성경시대에는 분명히 신비한 꿈이나 환상의 역할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어느 특정 인물들을 선택하셔서 그들을 통해 하늘의 계시를 보여주시고 자신의 뜻을 알려주셨다. 그러나 현재에는 구원에 필요한 충분한 계시인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성경이 주어진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 경로”를 통해 계시를 보여주실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이런 이유로 기독교 전통에서는 특별계시는 성경이 완성되고 난 후에는 없는 것으로 확정하였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신비한 환상이나 꿈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 그 자체를 부정하면 곤란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든지 그런 특별한 방법으로 당신의 뜻을 보여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성경보다 크신 분이다. 성경의 글자로 하나님을 다 설명하거나 그분을 가둘 수가 없다. 필자의 경험으로도 하나님이 꿈이나 환상을 통해 미래의 일들을 보여주시고 그것을 품고 중보기도를 하게 하신 구체적인 예들을 알고 있다. 또 하나님이 그런 방법들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끄시고 그들의 삶을 바꾸어놓은 예들도 알고 있다.   문제는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꿈이나 환상을 가지고, 그게 하나님이 주신 거라고 착각을 해서 그 때문에 불건전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또 본인뿐만 아니라 “내가 뭘 봤는데” 하면서 마치 점쟁이 식으로 조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마귀가 주는 꿈과 하나님이 주는 꿈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정답은 성경이다. 성경은 우리가 구원받고 신앙생활 하기에 충분한 책이다. 모든 신앙의 원칙을 담고 있는 책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어떤 꿈이나 환상을 주셨다면 그건 반드시 성경의 원리에 맞아야 하는 것이다. 일관성 있는 하나님께서 성경에 이미 알려주신 원칙과 다르게 어떤 특별계시를 보여주실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이 둘이 다르다면 성경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꿈이나 환상이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닌 것이다. 모든 신비한 은사는 성경에 비추어 해석되고 분별되어야 한다. 이 원칙을 따른다면 잘못된 꿈이나 환상의 악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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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5
    왜 우리 성경책에 구약이 들어가 있는 거죠? Publish on January 04,2016홍삼열
    구약성경을 읽을 때면 좀 마음이 불편하신 분들이 있다. 신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고 예수님도 여자나 불구자를 포함한 약자들의 권익을 보호해 주는 정말 선한 분으로 설명되어 있는데, 구약성경에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의 하나님이 나오는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정말 하나님 같지도 않은, 매정하고도 잔인한 폭군 같아 보인다. 전쟁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전쟁을 할 때면 죄 없는 어린아이들과 동물들까지 진멸하라고 하고, 제사를 드릴 때마다 매번 죄 없는 동물을 잡아서 피를 흘려서 죽이라고 하고, 성전에서 일을 하도록 특별히 정해진 레위인들 중에서도 불구자는 제사장이 될 수 없고 성전에도 들어갈 수 없도록 명령하는 비호감의 하나님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면 구약성경은 꺼리고, 교회에서도 설교자가 구약을 본문으로 하여 설교를 하면 별로 마음에 안 들고, 심지어는 왜 우리가 읽는 성경에 구약이 들어가 있어야 하냐고 근본적인 차원의 의문을 제기하기까지 한다.   초대교회 시절에 이미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 마르시온이란 이단자가 있었는데 그는 정통교회와는 다른 독자적인 교회를 세우고 자신의 독특한 이단사상을 전파하였다. 마르시온은 구약과 신약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라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구약은 율법이고 신약은 복음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이고 신약의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다. 구약의 하나님이 만든 세계는 악한 물질세계이지만 신약의 하나님이 속한 세계는 선한 영의 세계이다. 마르시온은 이렇게 구약과 신약을 대립적으로 보기 때문에 기독교 성경에서 구약을 제거해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신약성경 안에 이미 수많은 구약의 인용구들이 들어가 있는데 (그는 이단들이 이걸 신약에 몰래 삽입한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이것을 식별해서 제거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것을 싹 제거하고 자기만의 성경을 만들었다. 당시만 해도 정통교회는 성경을 확정할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마르시온이 이런 식으로 자기 맘대로 성경을 만드는 바람에 급히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기독교의 공식 성경, 즉 구약을 포함한 성경을 확정하였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창세기에서부터 말라기까지의 부분을 지칭할 때 구약이 아닌 “히브리성서”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성서에 대해 구약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왜냐하면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인들이 유대교의 허락도 받지 않고 맘대로 성경을 가져가서 사용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그것을 구약(舊約)이라고 부르는 데 있는 것이다. 즉 구약이란 표현 자체가 신약(新約)의 우월성 혹은 절대성까지 전제로 하는 말인 것이다. 마치 유대인의 옛 약속이 어떤 가치를 갖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새 약속 안에 편입되어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면 구약을 기독교 경전의 일부로 사용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신약과 마찬가지로 구약도 우리를 향한 동일한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신약이 예수님 이후에 태어난 새 시대의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라면 구약은 예수님 이전의 옛 시대 사람들을 위한 동일한 하나님의 약속인 것이다. 좀 도식적인 표현을 사용하자면, 구약은 예수님을 예언/준비한 책이고 신약은 그 예언/준비의 성취를 기록한 책이다. 신약은 고차원의 학문인 복음이 담긴 책이고 구약은 그런 고등학문을 배우기 전에 먼저 배워야 하는 초등학문과 같은 것이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어떻게 구약의 하나님이, 즉 이방민족과 전쟁을 할 때 사람들은 물론이고 동물까지 진멸하라고 하신 구약의 하나님이 사실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신약의 하나님과 똑같은 분이 될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구약의 율법은 신앙의 초보단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초등학문인 것이다. 하나님은 당시 수준을 고려하여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윤리수준만을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초등학문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는 그들이 그 수준에 영원히 머무는 것이 아니다. 나중에 고등학문인 신약의 복음의 수준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초대교회는 신약만으로 구성된 반쪽 성경이 아닌 구약을 포함한 온전한 성경을 확정함으로써, 기독교 안에서 옛 약속과 새 약속이 예수님의 복음을 중심으로 하나로 연결되도록 결정한 것이다.   우리는 구약을 읽을 때 올바른 목적을 가지고 읽어야 한다. 잘못된 목적을 가지고 읽으면 구약이 왜 기독교 성경책에 들어와 있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구약을 단순히 이스라엘의 역사로 생각한다. 사실 구약을 읽어보면 그 민족에게만 고유한 역사가 많이 발견된다. 한국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남의 나라 역사를 깊게 연구할 필요까지는 없고, 그럴 시간 있으면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는 것이 훨씬 더 가치가 있다고 느껴질 수 있다.   한편 다른 사람들은 성경을 문학책으로 읽는다. 성경은 서양문명의 기본 텍스트를 제공하기 때문에 문명을 연구하거나 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은 성경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특히 중세문학에는 성경의 인물과 사건이 배경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성경에 대한 기본지식 없이는 중세문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서 문학도는 기본 텍스트로서 성경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시각에서 보자면 구약과 신약이 함께 한 책으로 엮어져 있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신약은 기독교 문학으로, 구약은 히브리 문학으로 따로 읽어도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기독교인들은 구약을 어떻게 보는가? 기독교인들은 구약성경을 역사책으로도 보지 않고 문학책으로도 보지 않고 구원의 진리가 담긴 책, 변함없는 하나님의 약속이 담긴 책으로 본다. 물론 구약에는 신약 같이 구원의 진리가 명확히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역시 구약시대의 사람들의 수준에 맞는 정도의 진리가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이다.   예수님과 사도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구원의 진리를 가르칠 때면 구약을 많이 인용하였다. 사실 구약성경은 당시에 예수님과 사도들이 인용했던 유일한 성경이었다. (아직 신약성경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이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과 사도들도 인정했던 성경을 우리가 뭐라고 기독교 성경에서 빼라고 요구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과 사도들이 소홀히 하지 않았던 성경을 우리가 소홀히 해서야 되겠는가? 신약과 마찬가지로 구약에도 동일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구원의 진리가 담겨 있기 때문에 기독교 성경에 그 둘이 함께 들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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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4
    헌금은 꼭 본 교회에만 드려야 하나요? Publish on November 19,2015홍삼열
    헌금은 꼭 자신이 몸담고 있는 본 교회에 드려야 하는가? 특히 십일조는 다른 곳으로 보내면 안되고 반드시 본 교회에 드려야 하는가? 이 문제를 가지고 마음이 불편하신 분들이 있다. 가족 중 타 지역에서 힘들게 목회하며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경우, 친한 친구가 선교사로 나가 있는데 후원이 절실히 필요한 경우, 가장이 지방으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나머지 가족은 기존 교회를 다니고 남편은 지방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그곳 교회를 섬기는 경우, 헌금을 본 교회 대신 다른 곳으로 보내거나 본 교회에 낼 헌금의 일부를 쪼개서 다른 곳으로 보내도 되지 않을까? 어차피 헌금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니까... 아니면 헌금은, 특별히 십일조는 무조건 본 교회에만 내야 하는 것일까?   이런 경우도 있다. 교회가 재정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고 목회자를 비롯한 몇 사람만이 정보를 공유하며 헌금을 자의로 사용하는 것으로 보일 때 차선책으로 헌금을 다른 곳으로 보내는 사람이 있다. 더 나아가 교인들이 목회자를 불신임해서 목회자에게 압박을 가하는 수단으로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다. 헌금을 따로 모아 두거나 교회에는 1불씩만 헌금하고 나머지는 재정적 도움이 꼭 필요한 다른 교회나 단체로 헌금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도 되는 것일까?   사실 십일조를 비롯한 모든 헌금은 본 교회에 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런저런 특별한 이유가 생길 때 헌금을 다른 곳에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본 교회보다 다른 곳에 헌금하는 것이 더 긴급하고도 가치가 있다고 느껴지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헌금에 대한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그런 선택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할 때 왠지 마음이 편치 않다. 본 교회에서 그것 때문에 자기에게 눈총을 줄 수도 있고 하나님도 이것을 좋지 못하게 여겨서 나에게서 복을 거두어가실 것만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본 교회에도 맘껏 헌금하고 다른 곳에도 필요한 만큼 헌금을 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자신이 버는 제한된 월급을 가지고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천상 헌금을 나누어서 하든지 전체를 다른 곳에 할 수밖에 없는데 이게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다.   헌금, 특히 십일조는 본 교회에만 드려야 하는가? 꼭 그렇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성경의 상황과 현재의 상황이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십일조를 가르친 구약의 상황은 현재의 상황과 너무나 다르다. 구약시대에는 국민 전체가 성전에 십일조를 드리고 그것을 가지고 전체 레위지파가 생활을 하는 구조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금은 레위지파도 없을뿐더러 성직자를 영적 레위지파로 인정하더라도 성도들 수와 성직자 수의 비율이 너무나도 다른 것이다. 또한 신약시대에 예수님이 교회를 만드실 때도 예수님의 교회 하나만을 만드셨지 요즘 식으로 장로교회나 감리교회나 침례교회를 만드신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시대에 성도들이 교회에 십일조를 드렸다면 그것은 지구상에 유일한 “예수님의 교회”에 드린 것이지 요즘 식으로 어느 특정 교단이나 교회에 드린 것은 아닌 것이다. 또 이제는 더 이상 율법의 시대가 아니라 복음의 시대이기 때문에 율법을 문자적으로 적용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따라서 구약이나 신약의 예를 그대로 현대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십일조의 정신까지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십일조는 “전통적으로”나의 모든 소득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영적인 고백, 즉 물질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구체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나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이 주님의 것이요 주님의 선물이라는 표시로 주일을 지키는 것과 같다. 시간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주일성수라면 물질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십일조인 것이다.   그러면 어느 정도까지 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일까? 그건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사실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물질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드려야 마땅하다. 그래서 원론적인 차원에서 1/10이나 1/7이나 1/2이나 근본적인 차이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드리면 하나님은 그것을 기쁘게 받으시는 것이다. 물론 정말 이렇게 믿음으로 드리는 사람은 성경에서 제시하는 소득의 1/10이나 시간의 1/7보다는 더 많이 드리게 될 것이다.   구약의 십일조는 주로 레위지파의 생계를 위해서 사용되었지만 현대의 십일조는 목회자의 생계뿐만이 아니라 선교와 봉사와 교육과 구제 등 다양한 목적을 위해 사용된다. 그것도 국가의 차원에서 헌금이 관리되는 것이 아니라 개체교회 차원에서 관리가 된다. 따라서 헌금은 본인이 매주일 은혜받는 개체교회에 드려서 그 개체교회가 다양한 활동을 위해 헌금을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특히 본 교회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에는 그것을 모른척하고 다른 곳으로 헌금을 보내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다. 이는 마치 자기 집안 식구들이 굶고 있는데 불쌍한 이웃에게 음식이나 돈을 갖다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면 본 교회가 특별히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는 경우에는 십일조나 헌금을 다른 곳에 보내도 되지 않을까? 필자의 의견으로는 이왕이면 본인이 속한 교회를 통해서 지원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교회를 통해서 헌금을 보내게 되면 다른 교우들의 관심과 더불어 교회에서 매칭을 해줄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선교부서와 연결이 되어 개인이 하는 것보다 더 공식적이고 지속적인 도움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헌금을 다른 곳으로 보내려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교회의 재정운영에 불만이 있는 경우이다. 교인들이 헌금한 것을 교회가 성경의 원칙에 위배되게 잘못 사용하는 것으로 보일 때, 어떤 사람들은 헌금을 따로 모아두거나 다른 곳으로 헌금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은 건강하지 못한 모습이다. 만일 정말 교회의 재정운영에 문제가 있다면 교인으로서 당연히 공식적인 경로를 통해서 설명을 요구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모든 방법들을 동원했는데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경우에는 어떻게 하는가? 그런 경우에는 헌금을 유보하거나 다른 곳으로 헌금을 돌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본인이 다른 교회로 옮겨가서 신앙생활 할 것을 심각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를 믿지 못해서 헌금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최선책이 가능하지 않을 때는 차선책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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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3
    "성경"이 맞습니까? "성서"가 맞습니까? Publish on September 21,2015홍삼열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의 지침으로 삼는 책이 있다. 구약과 신약으로 이루어진 66권의 책이다. 이 책이 어떤 때는 성경(聖經)으로 불리고 어떤 때는 성서(聖書)로 불린다. 어떤 표현이 맞는 것일까?   이에 대해 크게 세 가지 입장이 존재한다. 첫째는 성경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맞는다는 입장이다. “경”(經)이란 글자는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경전”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기독교 신자는 성서라는 표현대신에 성경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맞는다는 입장이다. 둘째는 성서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맞는다는 입장이 있다. 영어표현으로 The Bible 혹은 The Holy Scripture는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경전의 의미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책(書), 그러나 역사성이 있는 거룩한 책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성서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는 입장이다. 셋째는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교회가 성서와 성경을 별 구분 없이 그리고 큰 문제 없이 지금까지 사용해왔기 때문에 이제 와서 이 두 표현 사이에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현재 한국교회에서 주로 사용하는 것이 대한성서공회에서 번역 출판한 <성경전서>인데, 이미 이 이름 안에 “경”과 “서”가 함께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역사를 보면 조선에 천주교가 처음 전파되고 한국어 성경이 만들어질 때 “경”이란 이름이 먼저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셩경직해>나 <사사셩경>이 있다. 당시 중국에서는 기독교 경전을 “성경”으로 부르고 있었는데 이런 전통이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이 된 것이다. 한편 일본 기독교는 성경대신에 성서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왜냐하면 당시 일본 문화에서는 성경은 곧 불경(佛經)을 뜻하는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일본 기독교인들은 성경이란 표현 대신에 성서라는 표현을 선택한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에서도 불경을 성경으로, 그리고 불경을 놓고 읽는 독서대를 성경대(聖經臺) 혹은 독경대(讀經臺)로 부르는 예가 있었는데, 초기 한국 기독교인들이 이 불경과 구별하기 위해 성서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나 추정할 수 있다.   현재 사람들이 기독교 경전을 지칭하는 표현을 들으면 “성경”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부류와 “성서”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부류가 좀 다른 것 같다. 매일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일반 신도들은 성경이란 표현을 주로 사용하고, 초대교회의 다양한 문헌들 중에서 선택된 책으로서 기독교 경전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성서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역사적으로 검토해 보면, 특히 신약성서의 예를 보면, 사도들이 썼다고 주장은 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들이 쓴 가짜 글들도 많이 있었다. 초대교회는 그런 글들 중에서 정말 사도들이 쓴 글을 식별해서 일정 숫자를 기독교 경전으로 확정하게 되는데 이것을 경전화(canonization) 과정이라 부른다. 그 덕분에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성서가 만들어진 것이다.   일반적으로 볼 때 “성서”라는 이름보다는 “성경”이란 이름이 교회의 권위 혹은 교회제도와 더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경이란 명칭 안에는 하나님 말씀의 법적, 규범적 성격이 강해서 개인의 사사로운 해석이 금지되고 교회가 공식적으로 해석해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반면에 성서라는 명칭을 사용할 때는 성경이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덜어진 “완벽한” 책이 아니라 역사적 산물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면서, 교회의 공식적인 해석 이전에 어느 정도의 개인적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필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성경이나 성서나 명칭 사용의 면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정작 “경”이나 “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聖)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성경/성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언약/약속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구약과 신약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이건 기독교 경전의 독특한 이름이다. 유대교나 이슬람에는 구약과 신약이 없다. 오직 기독교에만 구약과 신약이 있다. 그런 면에서 현재 한국 기독교에서 성경과 성서의 명칭을 혼용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둘 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거룩한(聖) 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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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례를 다시 받고 싶은데요… Publish on September 07,2015홍삼열
    한번은 저희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으신 분이 세례를 한 번 더 받아도 되냐고 질문을 하셨다. 자신은 이미 과거에 세례를 받았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 동안 너무나 엉터리로 신앙생활 했다고 느끼신 것이다. 그래서 이제 회개하는 마음으로 다시 세례를 받고 지금부터 신앙생활 제대로 해보고자 그런 요청을 하신 것이다.   현재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 중에 이와 비슷한 필요를 느끼는 분들이 있을 수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자신이 이전에 받았던 세례가 적합하지 않게 생각되거나 아니면 “효과”가 전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될 때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이 과거에 이단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경우, 군대에서 “집단적으로” 다른 사병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는데 그렇게 한 이유가 정말 기독교 교리를 배우고 그것을 자신의 신앙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세례를 받으면 먹을 것을 주니까 또 더 나아가 합법적으로 교회당에 가서 하루를 쉴 수 있기 때문에 세례를 받은 경우, 또 어떤 분은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니 세례 받을 당시 충분한 교리교육을 받지 못하고 “너무 쉽게” 세례를 받았다고 느끼는 경우 다시 “제대로” 세례를 받고 싶어할 수가 있다.   기독교 전통에서 세례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공통적이다. 세례는 사도신경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믿고, 어느 일정기간 그 고백대로 실천하는 삶을 살고, 그리고 그 믿음을 교회 앞에서 공개적으로 고백할 수 있는 신자에게 행해지는 것이 정상이다. 또한 절차의 면에서도 교회가 물이라는 상징물을 통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즉 교회가 역사적으로 믿고 진리로 가르치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에 기초하여) 세례를 행할 때 그 세례가 적법성을 가진다. 그리고 이렇게 적법한 내용과 절차를 거쳐서 시행된 세례는 다시 받을 필요가 없다. 아니 다시 받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두 번째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첫 번째 받은 세례가 적법하지 않다는 말이고, 전에 세례 받은 것이 적법하지 않다면 이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사칭한 신성모독죄를 범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과거 역사를 보면 세례를 다시 받는 문제와 관련해서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이 존재했다. 한편에서는 세례를 비롯한 모든 교회의 성례는 올바른 교리와 집례자의 거룩성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이단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든가 아니면 거룩하지 못한 성직자를 통해 세례를 받았다면 그 세례는 무효이고 다시 제대로 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성례는 근본적으로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불완전한 인간을 통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세례의 합법성이 집례자의 거룩성이나 정통성에 제한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재 대부분의 정통 교단에서는 이 두 번째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다.   250년 데시우스 황제 때 대대적인 박해가 이루어졌고 그때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배교를 하였다. 그런데 데시우스가 갑자기 죽게 되자 박해가 중지되고 교회에 평화가 찾아왔다. 이때 이전에 배교했던 사람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오기를 원했는데 로마의 감독인 코넬리우스는 진심으로 참회를 한 사람들이면 다시 교회로 받아줘야 하지 않냐고 하면서 그들을 받아주었다. 그런데 이때 같은 교회의 장로인 노바티안이 교회의 순수성을 외치면서 반기를 들었다. 어떻게 거룩한 교회가 그런 사람들을 다시 받아줄 수 있는가? 그런 사람들을 그렇게 쉽게 받아주는 교회는 더 이상 거룩한 교회가 아니고 그런 교회는 정통 그리스도의 교회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노바티안은 이런 주장을 펴며 따로 나와서 독립교회를 만들었고, 정통 교회에서 세례 받은 사람들이 노바티안 교회 교인이 되려고 할 때 다시 세례 받을 것을 요구했다. 거룩하지 못한 “이단”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것은 무효라는 근거에서 그렇게 요구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주장이 3세기 카르타고의 감독이었던 시프리안에게서도 발견된다. 시프리안은 이단이 행한 세례는 무효이고 따라서 이단자에게 세례 받은 사람이 정통 교회에 들어오고자 할 때는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로마의 감독인 스데반 1세는 (그리고 2세기 후의 성 어거스틴은) 물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한 세례는 집례자의 사상이나 윤리성에 상관없이 유효하다는, 현재 우리가 믿고 있는 정통교리를 역설했다.   그러면 이단 교회에서 세례 받은 사람의 경우 정통 교회로 들어오기를 원할 때 그들의 세례를 인정해주어야 할까? 그 교회의 이단성의 정도에 따라 판단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만일 다른 것은 몰라도 세례의 내용과 형식의 면에서는 성서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그들의 세례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용면에서 볼 때 그들이 받은 세례가 정통교회에서 믿고 고백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졌는지 아니면 삼위의 일부의 이름으로 혹은 (내용상) 교주의 이름으로 행해졌는지를 검토해야 하고, 또 형식면에서 볼 때도 이 세례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 받고 거듭났다는 상징의 의미로 물을 사용했는지 아닌지를 조사해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어느 교회/교단에서 발견되는 이단성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목회자마다 판단이 다를 수 있다. 신학의 경향성의 차이나 더 나아가서 신학의 변두리 사항에서의 오류까지 다 이단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목회자도 있고, 정반대 극단으로 가서 무분별하게 신앙의 일치나 타종교와의 일치까지 인정하는 다원론자도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세례를 인정할 수 없는 “분명한” 이단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스스로를 기독교 교단이라고 주장하지만 일반 교회에서 이단으로 생각하는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안식교 등이 있다. 이런 교회들에서는 세례를 줄 때 물을 사용하지만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더라도 정통교회에서는 그 세례를 인정하지 않는다. 한편 최근에 큰 물의를 일으켰던 구원파 같은 이단은 이단성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그것도 삼위일체 신앙에는 별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런 교회에서 받은 세례는 정통교회가 대개 인정한다. 단 잘못된 교리에 대해서는 정식 교인으로 받기 전에 재교육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거스틴이 이단 교회에서 세례받은 사람을 교인으로 받을 때 재세례가 아닌 안수로써 정통 교회로 받아준 것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그런 교회에서 이동해오는 사람에게 교리의 재교육과 더불어 올바른 성령의 임재를 위해 안수기도를 하고 교인으로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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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강대상에 새겨진 그 글자가 무슨 뜻입니까? Publish on July 28,2015홍삼열
    우리 교회에서 최근에 성전 개축이 이루어졌다. 성전 내부의 색과 조명이 밝아졌고 강단이 높고 넓게 확장되었으며 십자가와 강대상과 기물들이 새로이 교체되었다. 그 중에 새로 교체된 강대상에 이전 강대상에는 없던 글자(ΙΧΘΥΣ, 한국어로 익투스라고 읽는다)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본 어느 분께서 그 글자의 의미를 물으셨다. 필자는 그 글자는 그리스어인데 ‘물고기’라는 뜻이고, 실제로 물고기의 문양이 초대 기독교인들 사이에 자주 사용되었다고 말씀 드렸다.   우리들이 자동차를 타고 가다 보면 가끔 앞차의 범퍼 스티커에 물고기 문양이나 ΙΧΘΥΣ 혹은 이것의 소문자 형태인 ἰχθύς라는 글자가 새겨진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이 기독교의 정체성을 가장 명료하게 표현해주는 형태가 된다. ΙΧΘΥΣ(물고기)라는 단어 자체에 어떤 기독교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단어의 각각 알파벳이 Ι(예수) Χ(그리스도는) Θ(하나님의) Υ(아들) Σ(구세주)라는 숨겨진 의미를 전달해주기 때문인 것이다. 마태복음 16:16절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내용이 나온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신앙고백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워주셨는데, 그런 이유로 기독교 전통에서는 물고기(ΙΧΘΥΣ)의 상징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그 단어가 강대상에도 새겨지게 된 것이다.   이 물고기 글자보다 강대상에 더 많이 새겨지는 글자가 있는데 그것이 Α(알파)와 Ω(오메가)이다. 알파는 그리스어의 첫 번째 알파벳 자모이고 오메가는 마지막 알파벳 자모이다. 그래서 ΑΩ의 뜻은 처음과 마지막, 즉 전체라는 뜻이다. 요한계시록 1:8절에 보면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라고 하였고, 또 22:13절에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처음과 마지막, 즉 전체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란 신앙고백을 ΑΩ라는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교회 강대상에 새겨진 또 다른 문양은 ☧이다. 이 문양은 목사가 가운을 입고서 목에 걸치는 스톨(stole)이나 혹은 성전 내부에 걸린 배너에 사용되기도 한다. 이것을 우리는 키-로(chi-ro)라고 읽는데 ΧΡΙΣΤΟΣ(그리스도)의 첫 두 글자를 조합하여 만든 형태이다.   이 문양은 일찍이 콘스탄틴이 로마지역을 다스리던 막센티우스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일 때 군대의 깃발에 사용했던 문양이다. 초대 기독교 역사를 기록한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콘스탄틴이 낮에 기도할 때 하늘에 떠있는 그 십자가 모양(☧)의 환상을 봤는데 그 십자가 위에 “이것으로 정복하라”(touto nika, 라틴어 번역은 in hoc signo vince)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또 그가 밤에 꿈을 꿨는데 하나님이 나타나서 그에게 그 십자가 모양을 만들어서 전쟁에 사용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콘스탄틴은 그 지시대로 ☧문양을 깃발에 새겨 넣어서 군대의 공식 문양으로 사용했더니 실제로 자신보다 큰 세력이었던 막센티우스의 군대를 물리치고 로마를 점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콘스탄틴과 이후의 기독교인들은 그 문양을 기독교의 상징으로 적극 채택하였고 다른 기독교 문양들과 함께 교회의 공식 문헌과 장식물과 기물에 자주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상 교회에서 역사적으로 사용해 왔던 문양을 세 가지로 설명했는데, 우리 교회에서는 그것들에 더하여 제단 부분에 깃발 셋, 즉 성조기와 태극기와 연합감리교회 깃발을 위치시켜 놓고 있다. 제단의 장식물은 단순히 우리의 미적 감각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개별 신앙공동체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미국 교단에 속해 있는 한인들의 신앙공동체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그 세 깃발을 제단 위에 놓아 둔 것이다. 현재 미국 땅에 살면서 미국의 혜택을 보고 있다는 것, 태생적으로는 한국인으로서 한국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 또 교단적으로는 연합감리교회에 속해서 신앙생활 하고 있다는 것, 이 세 가지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 깃발 셋을 제단 위에 놓아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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