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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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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도 술을 드셨을까? Publish on May 30,2016홍삼열
    필자가 미국인 교회를 담임할 때의 일이 생각난다. 어느 날 예배를 마치고 예배당을 문을 나와서 중간 뜰에 들어서는데 중년의 한 교인이 교회 창문 앞에 서서 시가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있었다. 남 보란 듯이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고 죄의식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었다. 많은 교인들이 그의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며 그냥 그전부터 그랬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서서 시가를 피웠다. 물론 지나가는 사람들 중 몇은 그에게 부드럽게 타이르고 지나갔다. 건강을 생각해서 담배를 줄이라고 하며 지나갔다. 어떻게 교회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냐고 큰 소리를 내는 사람도 없었고, 그런 죄인을 교회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요구하는 사람도 없었다. 단지 건강에 해로우니 본인이 스스로 담배를 멀리하는 것이 좋지 않느냐는 정도의 권고뿐이었다.   만일 똑같은 일이 한국교회에서 일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난리가 났을 것이다. 건강에 해롭다는 차원을 넘어서 거의 그를 범죄자 취급을 하였을 것이다. 누군가 큰 소리로 그를 꾸짖든지, 교회 중직들이 모여서 문제를 의논하고 징계를 결정했을 것이다. 똑같은 기독교회이지만 담배 피우는 것에 대한 정서가 이렇게 다르다.   술 마시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개중에 목회자가 개인적으로 혹은 공개적으로 술을 마시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목회자는 자신이 술을 마시는 것을 공개하지 않고, 만일 술을 마시는 것이 알려지면 목회자의 “도덕성”이 상처를 입게 된다. 어떤 경우에는 그것 때문에 목사가 교회를 사임하게 되기도 한다. 일반 교인들의 경우도 술을 마신다고 알려지면 마시는 정도에 따라 신앙심이 의심을 받는다. 그런데 미국교회의 정서는 다르다. 필자의 경험을 예로 들면, 언젠가 교인 집에 식사 자리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었다. 그 집에 가 보니 식탁 위에 포도주 병이 놓여 있었다. 그분은 목사에게 함께 한 잔 하자고 권하는데 그것이 일부러 목사를 시험해보려는 것이 아니라 대단히 자연스러운 제안이었다. 저는 술을 하지 않습니다 라고 하며 거절을 하자 그분은 자연스럽게 다른 가족과 함께 술을 마시며 목사와 대화를 이어갔다. 일반 한국교회에서는 상상이 안 되는 장면이다.   한국교회에서는 술과 담배의 문제가 신앙의 진정성에 중요한 이슈가 된다. 아무리 신앙생활에 열심이 있는 사람도 술을 마신다거나 담배를 피우는 것이 발견되면 뭔가 신앙에 결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시각은 한국에 처음 기독교 신앙이 전해진 때부터 존재하였다. 기독교가 한국에 전해진 것은 구한말/일제시대였는데 당시의 통계를 보면 한국은 그야말로 담배와 술 때문에 망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문제가 심각하였다. 열심히 일하고 번 돈을 저축해야 가계살림이 좋아질 텐데 번 돈의 상당분을 담배와 술에 소비하니 가계는 피폐해지고 국가 경제는 휘청하였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한국에 기독교를 전하기 위해 온 외국 선교사들은 하나같이 금주금연(禁酒禁煙)을 강조하였다. 본인들이 대개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선교사들이어서 그런 태도를 가지기도 하였겠지만, 그보다는 한국인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는 영혼의 문제만 신경 쓸 것이 아니라 금주금연을 통해 그들의 육신을 살리는 것이 시급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교회에서는 자연스럽게 처음부터 금주금연이 신자가 되는 조건 중의 하나가 되었고 이를 어기는 사람은 “죄인” 취급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정작 예수님은 어땠을까? 예수님 당시에 담배는 없었으니까 예수님이 담배를 피웠을까 하는 질문은 불필요한 것이고, 술에 대해서는 물어볼 만하다. 예수님은 술을 드셨을까? 드셨다면 얼마나 드셨을까? 이 질문은 교회에서 술 마시는 것을 정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즐겨 묻는 질문이다. 만일 예수님도 술을 드셨다면 나도 마셔도 되는 것이 아닌가? 만일 예수님이 술을 즐기셨다면 술 마시는 것이 절대 죄가 될 수 없지 않은가?   신약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술을 드셨을 가능성이 많이 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문화는 연한 포도주를 음료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광야지역 많아서 물이 귀하고 수질이 좋지 못하기 때문에 포도주를 만들어서 일반 음료로 사용하였다. 이는 물에 석회 성분이 많은 독일 지역에서 물을 그냥 마시지 못하고 맥주를 만들어 음료로 사용했던 것에 비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첫 번째 기적을 행하신 것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였다. 당시 관례상 혼인잔치에 꼭 필요한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보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요청하였고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을 행하셨다. 만일 술 먹는 것이 죄라면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포도주를 만들어주시지 않았을 것이다.   또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 대해 여자가 낳은 이 중에 가장 큰 사람이라는 극찬을 하신 후에 사람들이 요한과 자신을 비교하며 악담하고 있는 사실을 언급하신 적이 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마태 11:18-19)   이 구절을 보면 사람들이 금욕주의자인 요한과 비교하며 예수님을 반대 극단에 서 있는 사람, 즉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한국어 번역에는 그렇게 점잖게 번역했지만 원래는 술꾼 혹은 술고래라는 의미의 단어를 사용하였다. 보통의 경우 누군가를 비난할 때 과장해서 비난하는 경향이 있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예수님은 술고래가 아니겠지만 당시 보통 사람들의 경우처럼 술을 드셨다는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성경의 문화는 술을 허용하였고 예수님도 술을 드신 것이 사실이라면 현재 기독교인도 술 먹는 것을 문제 삼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닐까? 원칙적으로는 그렇다. 술을 먹고 안 먹고는 신앙의 본질에 별로 상관이 없다. 마치 과하면 건강에 해롭다고 알려진 동물 기름을 먹는 문제도 신앙의 본질에는 큰 상관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술을 마시는 것 자체를 가지고 신앙을 평가하는 것은 성경의 원칙에 어긋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 취하는 것은 성경이 엄격하게 금지하는 사항이다. 술 취하는 사람은 분명히 신앙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에베소서 5:18)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린도전서 6:10)   성경의 원칙은 기본적으로 무엇을 먹고 안 먹고가 사람의 신앙을 세우거나 무너뜨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는 것은 음식이 아닙니다.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손해 볼 것도 없고, 먹는다고 해서 이로울 것도 없습니다.”(고린도전서 8:8) 또한 예수님도 술을 드셨을 가능성이 많고, 적어도 술을 금하시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기독교인이 개인적으로 술을 마시는 것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개인적으로 마셔도 절제하지 못하므로 술에 취해서 실수를 하고, 더 나아가 그것 때문에 본인에게 해가 되고 가정에 해가 된다면 (실제로 우리 주변에 이런 경우가 너무나 많이 있다) 그건 분명히 죄를 짓는 것이다.   더 나아가 어떤 교인은 예배에 관련된 장소나 신자들의 모임에서까지 술을 마시려고 하는데 이것은 정말 문제가 크다. 예를 들어 속회나 구역예배를 마치고 그 장소에서 일부 속회원들과 함께 술을 마셔야 하는 사람, 또는 선교회를 비롯한 교회의 이름으로 모이는 행사에서 술을 마시지 않고는 뭔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사람은 이미 술에 대한 절제력을 상실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술을 좀 멀리 하면 좋은 것이 아니라 정말 술을 끊어야 할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술은 마시지만 취하지는 않는다”는 논리를 가지고 계속 술을 마시려는 사람, 특히 한국 사람은 다음의 두 가지를 심각하게 고려할 것을 권면한다. 첫째는 예수님 당시 유대문화에서 포도주를 허용했다는 사실을 가지고 현대 사회에 그걸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 유대지역은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물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 포도주 문화가 발달하였지만 현재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과 한국에서 깨끗한 물을 얻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이다. 둘째로 한국 사람들은 문화의 특성상 갈증 해소나 건강을 위해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주로 취하기 위해서 마시기 때문에, 더 나아가 폭음을 권하는 문화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더욱 술을 멀리할 필요가 있다. 특히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하는 기독교인들은 일반 한국인들 사이에서 절제의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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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인들끼리 비즈니스 거래를 해도 되나요? Publish on May 11,2016홍삼열
    사회의 일반 모임과 마찬가지로 교회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행해지는 모든 종류의 일들이 교회에서 이루어진다. 그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교인들 간의 비즈니스 거래이다. 교인들은 정기적으로 교회에서 만나서 얼굴을 익히고 신앙의 친구가 되었으니까 어떤 물건이나 서비스가 필요한 경우 이왕이면 아는 교인에게서 사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어떤 물건이나 비즈니스를 판매해야 하는 사람의 경우도 이왕이면 잘 아는 교인에게 파는 것이 용이하지 않겠는가? 따로 비즈니스를 목적으로 시간을 내어서 만나지 않아도 자연히 교회에서 만나게 되는데 그런 좋은 기회를 이용하는 것이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에게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교회 안에서의 상거래 행위는 편의성이 있는 동시에 부자연성 혹은 위험성을 많이 포함한다. 왜냐하면 잘 아는 교인이 어떤 것을 사달라고 부탁할 때 실제로 이걸 거절하기가 힘 들기 때문이다. 아예 모르는 사람이 와서 사달라고 하면 필요 없다고 거절하면 그만인데 교회 안에서 이런 저런 일로 협력해왔고 신앙으로 묶여 있는 사람이 와서 사달라고 할 때 이걸 딱 잘라 거절하기가 너무나 힘든 것이다. 그래서 교회 밖에서는 절대 사지 않을 물건도 같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부탁하기 때문에 사는 경우가 생기게 되고, 이 때문에 나중에 후회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물건이나 서비스를 파는 사람의 경우 더 이상 교인이 교인으로 보이지 않고 고객으로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에게는 같은 교회에 다니는 모든 사람들이 신앙의 동반자라기보다는 잠재적 고객이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하는 말이나 행동은 더 이상 순수하지 못한 동기, 즉 경제적 동기로 채색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의 신앙생활은 비정상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신앙이 변색된다.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기 때문에 교회를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고 예수님이 경고하셨는데, 교인들을 (잠재적) 고객으로 보는 것은 이런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교회의 기본 목적인 기도와 예배를 등한시하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신앙이 퇴보하게 된다.   교회의 본래 목적을 뒤로 한 채 교회를 비즈니스의 장소로 보고 교인들을 상대로 비즈니스 거래를 시도하는 것은 본인에게뿐만 아니라 다른 교우들에게도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친다. 기도와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게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 안에서 다단계 판매망을 구축하는 경우는 폐해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이는 단순히 개인적으로 물건을 사고 파는 차원을 넘어서 조직적으로 비즈니스 거래를 시도하는 것인데 순식간에 교회 전체를 장사판으로 만들고 일순간에 교회를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할 수 있다.   다단계 마케팅의 핵심은 소비자가 물건을 소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곧 바로 판매자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소개로 판매자가 된 사람, 그 사람을 통해 또 판매자가 되는 사람, 또 그 다음 사람을 통해 판매자가 되는 사람 등 앞으로 자신의 밑에 있게 될 모든 사람이 창출하게 되는 수익의 일부를 내가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자기 밑에 소비자/판매자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소득이 늘어나게 되는데, 다이아몬드 급 정도가 되면 일년에 수 억 원의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 다단계의 매력이다.   교회는 이미 긴밀한 인간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는 곳이기에 교회 전체가 이런 다단계 마케팅을 받아들이는 경우 엄청난 수익이 예상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암암리에 교인들을 대상으로 다단계 마케팅을 벌인다. 어떤 경우에는 교회에서 아예 공식적으로 마케팅을 추진한다. 돈도 벌고 하나님의 사업을 위한 자금도 마련하니 얼마나 좋은가? 그래서 어떤 교회에서는 선교자금을 확보하자는 차원에서 목회자가 직접 판매를 독려하기도 하고, 교회의 중직들이 속회/구역 같은 공식 모임에서 다단계 상품 설명회를 열기도 한다.   그러나 교회가 복음의 순수성을 잃어버리면 영적 능력이 사라진다. 십자가의 복음이 선포되어야 할 장소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곳으로 변하면 이미 교회의 기능은 정지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교인은 어디까지나 사랑의 대상, 사역의 대상이 되어야지 절대 비즈니스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교회 내의 상거래 행위와는 약간 종류가 다르지만 이와 관련하여 교인들간의 금전 거래의 문제가 있다. 누가 누구에게 돈을 꾸어 주었는데 그 돈을 갚지 않아서 서로 관계가 나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다. 교회 내에서는 금전 거래를 하면 안 되는 것일까? 원칙의 차원에서 말하자면 성도들끼리는 금전 거래를 할 때 무이자로 돈을 꾸어주는 것이 맞다.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오직 너희는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누가 6:34-35) 이 말씀이 기록될 당시의 상황과는 많이 다른 현대의 복잡한 화폐경제를 고려해볼 때, 다른 교인에게 돈을 꾸어주는 사람은 적어도 사회에서 요구하는 이자보다는 낮은 이자를 요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경험상 보면 교회 안에서 돈 거래를 해서 얻는 유익보다는 해가 훨씬 더 많다. 돈 거래 때문에 성도들의 관계가 어려워지는 것을 너무나 자주 본다. 하지만 정말 어려운 사정이 있어서 급하게 돈을 빌려 달라고 할 때는 거절하기가 힘들다. 이럴 경우 두 가지 원칙을 가지고 대처할 것을 제안한다. 첫째는 돈을 빌려달라는 사람이 상습적으로 여기 저기서 정기적으로 돈을 빌려서 생활비로 쓰고 갚지 않는 사람인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만일 그런 경우라면 안 빌려주는 것이 그 사람을 돕는 길이다. 왜냐하면 그건 돈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잘못된 생활방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원칙은 정말로 급하기 때문에 돈을 빌려주기로 결정했다면 되돌려 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구제의 마음으로 빌려주는 것을 권하고 싶다. 그 돈을 못 받았을 때라도 내 생활에 지장이 생기지 않을 정도의 금액 만을 빌려주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방이 돈을 갚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져도 관계가 깨어지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도 종종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이 생기는 것을 본다. 돈을 꾸어준 사람은 괜찮은데 돈을 꾼 사람이 마음이 불편하여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교인들 간의 돈 거래는 정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래야 신앙생활에 지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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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는 독선적인가? Publish on May 03,2016홍삼열
    최근 들어서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특히 한국에서 개신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그렇다. 이런 부정적인 시각은 상당부분 교회와 교인들의 이중성에 기인한다. 하나님의 공의를 외치는 교회가 정당한 사회법을 어기고, 윤리성을 외치는 목회자가 스스로 윤리적 타락의 주범 혹은 공범으로 전락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자부하는 신자들이 세상을 변혁시키기는커녕 세상의 권력과 부의 가치에 편승해서 십자가대신 세속적 영광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일 때, 비기독교인들에게는 이것이 기독교의 민낯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더하여 일부 기독교인들이 타종교인들에게 행하는 이해할 수 없는 무례한 행동들은 가뜩이나 기독교에 대해 호의가 부족한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독선과 배타성을 확인시켜주는 증거가 되고 있다. 예를 들어, 절에 몰래 들어가 불상을 부수거나 불상에 붉은 페인트로 십자가를 그리고 “오직 예수”라는 글자를 쓰는 행위는 일반 사람들에게, 특히 비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에 대해 반감만 증폭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극단적인 행동에 대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이것이 일부 몰지각한 교인들의 문제이지 기독교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수의 비기독교인들은 이것이 단순히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 교리 자체의 문제라고 본다. 일찍이 칼 마르크스가 종교는 민중의 마약/아편이다 라고 외쳤듯이, 잘못된 교리가 편협하고 독선적인 교인을 만든다는 것이다.   사실 성경에 보면 기독교를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로 설명하는 구절들이 여럿 나온다. 대표적으로 이런 구절들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사도행전 4:12) 일반 사람들의 시각에서 볼 때 바로 이런 구절들이 기독교의 독선과 배타성을 증명하는 것이고, 이것이 과거와 현재 기독교의 폭력성과 무례함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과연 기독교는 독선적인가? 우리가 독선이란 단어를 사용할 때는 전제가 있다. 그것은 나만 옳은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도 똑같이 옳다는 사실의 전제이다. 예를 들어서 제주도에서 서울로 가는 길이 많이 있는 상황에서 비행기 타고 이동하는 것만이 옳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독선이다. 그런데 만일 실제로 그 한 길만이 존재한다면 그런 상황에서 그 길만이 진리라고 주장할 때 이건 독선이 아니라 사실을 말한 것뿐이다. 달과 지구의 관계를 빌어서 설명하자면 지구를 도는 위성이 달 하나뿐인 상황에서 달은 지구를 도는 유일한 위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절대 독선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오직 예수로만 구원받는다고 가르칠 때 그것이 독선인지 아닌지는 그 주장 자체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그 주장의 전제가 사실인지 아닌지를 밝혀야 한다. 즉 실제로 구원의 길이 하나라면 기독교의 주장은 독선이 아니라 사실인 것이고, 구원의 길이 많이 있는 상황에서 오직 예수로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분명 독선인 것이다.   어느 한 종교에 구원이 있는지의 여부는 그 안에 내가 들어가서 깊은 경험을 해보지 않은 이상 확인이 불가능하다. 또 모든 종교는 겉모양만 다르지 실제로는 같은 신으로 향하는 다양한 길이라는 주장도 본인이 그 모든 종교 안으로 들어가서 구원의 경험을 해보지 않은 이상 역시 확인이 불가능하다. 이런 경우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각 종교에서 믿을 만한 대표자들의 의견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기초하여 모든 종교는 같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결국 어느 특정 종교에 대한 구원의 여부는 객관적 사실이 아닌 경험적 사실의 차원에서밖에 증명할 수 없다. 따라서 신학적/객관적인 측면에서 기독교가 독선적이라는 주장은 외부인으로서는 알 수 없는 문제이다. 단지 그들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일부 기독교인들이 타종교에 대한 배려심 없이 무례하게 배타적으로 행동하는 예들이다. 그런 행동들은 분명히 잘못된 독선이다. 아무리 내가 가진 것이 옳다고 해도 기본 예의를 지키지 못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을 기초로 기독교 신앙은 독선이라고 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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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예수님이 하나님이 됩니까? Publish on March 20,2016홍삼열
    사람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종교를 크게 셋으로 구분한다. 힌두교 같이 모든 만물이 신이라고 믿는 범신교, 도교 같이 여러 신들을 믿는 다신교, 그리고 이슬람교나 유대교 같이 오직 하나의 신만을 섬기는 유일신교, 이렇게 셋으로 구분한다. 기독교는 이 셋 중에서 스스로를 유일신교로 본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삼위일체의 개념이 많은 사람들에게 의문을 일으킨다. 어떻게 하나의 신을 섬긴다고 하면서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특히 기독교는 유대교와는 달리 하나님 이외에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를 역시 하나님으로 믿기에 “기독(基督)교”가 된 것인데, 논리적으로 따져서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은 현재 우리의 사고방식과는 많이 다르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이 베데스다 못 가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시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때가 마침 안식일이었는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일”을 했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특히 예수님이 “내 아버지” 즉 하늘의 하나님께서 안식일에도 일하시니 “나”도 당연히 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이것을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자신이 부자관계라고 말씀하는 것을 스스로 하나님과의 동등한 존재, 즉 자신을 하나님으로 주장하고 있다고 이해한 것이다. 5:17-18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이것을 보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내가 하나님이다.” 혹은 “내가 아버지다.”라는 말과 같다고 이해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논리가 성립하는가?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면 그건 두 사람이지 절대 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상식에 의하면 내가 누구의 아들이라고 할 때 그것은 두 사람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지 나와 아버지가 동일인물이라는 의미는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이 세상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절대 시작이 같을 수 없고 같은 공간에 동시에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의 아들이라고 하면, 그분은 내가 존재하기 이전에 이미 어느 공간에 계셨고, 나는 나보다 먼저 세상에 존재한 그분 이후에 다른 공간에 존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 세상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시간적으로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신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아버지와 아들은 동시에 같은 장소에 존재하고 그 둘은 언제나 동일한 것이다. 왜냐하면 시간과 공간이란 개념은 인간 세상에만 적용되는 것으로서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시간도 창조하시고 공간도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으로 하나님을 규정하거나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을 가리켜 “내 아버지”라고 부르시고 본인은 그분의 “아들”이라고 하실 때, 이 부자관계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원인과 결과의 측면에서는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보다 우선하지만 (즉 성부가 성자의 원인이 되지만), 실제로는 그 둘이 동일하다는 메시지이다. 왜냐하면 일단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이야기하려면 그 전제조건이 성자와 성부가 함께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만일 “아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아버지”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자녀가 없는 사람을 어떻게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아들이 존재하기 전에는 “남자”가 존재할 뿐이지 “아버지”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영원하신 성부와 비교해 볼 때 성자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는 없는 것이다. 성자는 영원히 성부와 함께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1:1절이 이렇게 선언한다. “태초에 말씀[그리스도]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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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사는 축복권과 저주권을 가지고 있는가? Publish on February 22,2016홍삼열
    신명기 27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그리심 산에서는 축복을, 에발 산에서는 저주를 선포하라는 모세의 명령이 나온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축복이 임하고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저주가 임할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순종을 선택해서 복 받으라는 의미이다. 후에 여호수아 8장에 보면 여호수아는 실제로 모세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을 둘로 나누어서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서게 하고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서게 한 후에 각각 축복과 저주의 말을 선포하였다. 물론 백성들의 귀에 직접 축복과 저주의 말을 전해주는 것은 레위인 혹은 제사장들의 몫이었다. 여호수아가 먼저 말씀을 낭독하면 레위인과 제사장들이 그것을 그대로 받아서 다시 큰 소리로 외친 것이다.   현재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목회자가 구약시대의 레위인 혹은 제사장 전통을 잇는다고 믿고 목회자의 축복을 받는다. 예배가 끝난 후에 목사의 축도를 받고, 아이의 백일잔치에 목사를 초청해서 축복기도를 받고, 개업이나 결혼이나 생일잔치 같은 행사에 목사를 초청해서 예배를 드리며 축복기도를 받는다. 어떤 경우에는 가족의 어른이 예배를 인도하며 축복을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회자가 아닌 사람이 축복을 한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심지어는 담임목사가 아닌 부목사가 축복하는 것도 왠지 이상하고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과연 목사, 특히 담임목사에게만 축복권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일반 신자들에게도 축복권이 있는 것일까?   또 한 가지 이와 관련되는 문제는 저주권이다. 목사에게는 저주권이 있는 것일까? 가끔 인터넷이나 신문에 보면 “저주 설교”에 대한 글이 실리곤 한다. 목사가 설교를 하면서, 목사를 괴롭히거나 욕하면 저주를 받아서 사업이 망하고 교통사고를 당하고 암에 걸리는 등 천벌을 받는다고 외칠 때, 듣는 신자들의 마음속에 심각한 의문이 일어난다. 하나님은 목사에게 축복권만 주신 것이 아니라 저주권도 주신 것일까? 그래서 목사에게는 무조건 잘 해야 하는 것일까?   우선 축복권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축복권은 목사에게만 주어진 것인가? 그래서 목사가 아닌 사람이 다른 사람을 축복하면 아무 효력이 없고, 더 나아가 좋지 못한 부작용까지 생기게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성경에는 모든 사람이 축복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구약시대에는 이삭과 야곱 같은 족장/아버지가 자녀들을 축복하고, 모세와 여호수아 같은 지도자가 백성을 축복하고, 아론으로부터 시작된 제사장들이 온 이스라엘을 축복하였지만, 신약시대에는 모든 성도가 서로를 축복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특정 제사장을 의지할 필요 없이 직접 하나님께 기도하고 직접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미 제사장인 것이다. 이것을 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는 “만인제사장”이란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베드로전서 2:9절,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신약시대에는 예수 믿는 사람은 모두 제사장이다. 그래서 구약의 제사장이 가진 하나님과의 직접 소통의 역할과 더불어 축복권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 교회에서 목사가 교인들을 축복하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신약시대에는 전혀 필요가 없다고 말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성도들의 영적 지도자로서 양무리를 축복하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적 지도자로서 그렇게 하는 것이지 옛날 제사장에게만 주어진 특권을 행사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엄격히 따져서 신약시대에는 모든 성도가 서로를 축복할 수 있고, 아니 축복해야 마땅한 것이다.   로마서 12:14절에 보면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고 했는데, 이는 목사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일반 신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야고보서 5:16절에도 보면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고 했는데, 이것도 일반 신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따라서 성경의 가르침대로 부모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녀들을 축복하고, 신자들은 서로를 축복하고, 더 나아가 원수들까지도 축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은 저주권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치는가? 목사에게는 신자들을 저주할 권리가 있는 것일까? 이성적인 방법으로 도무지 설득이 안 되는 신자들을 인도할 마지막 수단으로 목사에게 저주권이 주어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 목사는 영적 지도자로서 교인에게 경고도 하고 책망도 할 수 있지만 저주하는 것은 선을 넘는 것이다.   물론 목사가 어떤 교인 때문에 너무나 큰 고통을 당해서 목회를 지속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때 저주의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그를 제어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수 있다. 저주의 방법을 통해 그의 마음에 두려움을 심어주어서 더 이상 목사나 교회에 해를 끼치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의도를 가지고 저주하는 것은 샤만(무당)이 자기를 거역하는 사람을 저주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예를 들어 샤만이 인형을 하나 만들어서 그것을 바늘로 찌르면 그 사람의 팔이 마비되고 심장이 마비되고 심지어는 목숨을 잃게 된다는 미신이 있는데, 만일 목사가 저주의 방법으로 자신을 대적하는 사람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공포심을 조장한다면 이는 샤만이 사용하는 방법과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정말 하나님의 교회를 해치고 목사를 부당하게 괴롭히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그를 다루실 것이다. 목사가 관여할 일이 아닌 것이다.   갈라디아 3:13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라고 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가 받을 저주의 문제를 다 해결해 주셨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더 이상 저주가 없다. 누가 나를 저주하더라도 절대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만일 내가 못된 짓을 하다가 큰 고난을 당한다면 이는 누가 나를 저주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심판하시기 때문인 것이다. 누가 여러분을 저주하는가? 그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선악을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목사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분명하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로마서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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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행사와 주일 예배가 겹칠 때 어떻게 해야 하나요? Publish on February 01,2016홍삼열
    현대 사회는 과거에 비해 대단히 복잡하다. 옛날에는 생활의 패턴이 극히 단조롭고 삶의 속도가 느리므로 사람들이 비교적 한가하게 살았지만, 현대에는 각 개인에게 관련한 중요한 일들이 동시에 여러 군데서 일어나기 때문에 다들 바쁘게 산다. 또 예전에는 사람이 하루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대단히 제한되어 있었다. 그래서 멀리 있는 사람의 사정을 알려고 해도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요즘은 다르다. 마음만 먹으면 자동차나 비행기를 타고 하루 이틀 내에 지구 어디든 갈 수 있다. 그래서 가야 할 곳도 많아지고 참여해야 할 일들도 많아졌다.   매 주일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런 사회적 변화가 작지 않은 도전으로 다가온다. 주일날 어디에선가 교회 예배와 동시에 이루어지는 일들이 상당히 많아졌다. 아이들 운동경기와 연주회로부터 시작하여 동창회나 각종 경축행사, 그리고 결혼식이나 장례식 같은 중요한 일들이 주일에, 그것도 먼 곳에서 행해지는 예들이 너무나 많이 생긴다. 또 각종 가족행사에 참여하거나 명절에 부모님을 찾아뵙기 위해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도 많이 생긴다. 이럴 때 기독교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제대로 된 기독교인은 무조건 주일성수(主日聖守)를 해야 하니까 절대 예배를 빠지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예배는 매 주일 있는 것이니까 그런 특별한 일이 있을 때는 본교회의 주일예배를 빠지고 그런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맞는 일일까?   명절이나 중요한 가족 행사 때문에 먼 곳으로 여행하는 경우는 그곳에 있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성도의 기본 의무이다. 혹 주일 당일에 가족 행사가 열리는 경우에는 먼저 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나서 그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만일 가족 행사를 준비하거나 그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예배를 빼먹을 수밖에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더 나아가 가족 행사가 아니더라도, 친구 결혼식이나 장례식이나 40주년 동창회 같은 중요한 행사를 준비하거나 그런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주일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이라면 성도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선택일까?   주일 예배와 중요 행사가 겹쳐서 한 날에 그 두 가지를 다 할 수 없는 경우에는, 원칙적으로 성도는 최선을 다해 예배 드리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성도로서의 의무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의 일원으로서(그것이 가족이든 친구관계이든 직장관계이든)의 의무도 절대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후자를 소홀히 하게 되면 복음의 진위와 상관없이 교회가 비기독교인들에게서 불필요한 비난을 초래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의무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한 의무도 충실히 수행해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지혜가 필요하다. 주일 예배와 중요한 행사가 겹치는 경우, 우선 본 교회에서 제공하는 예배가 여러 번 있다면 그 중 하나를 드리고 다른 시간에 행사 준비를 돕거나 그 행사에 참여하면 된다. 만일 본 교회에서 예배 드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면 이웃 교회나 혹은 고향에 있는 교회에 가서 가능한 시간에 예배를 드리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것이다. 만일 이런 방법도 가능하지 않다면, 즉 아무리 생각해도 그 두 가지를 다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예배를 선택하는 것이 믿음 있는 성도의 자세일 것이다.   그러나 부득이 이런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성도는 가족이나 친구에 대한 의무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여러 가지 대소사와 주일 예배가 겹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무조건 교회에 가야 한다고 하면서 그런 행사들을 모른 체 하고 지나가고, 가족이나 친구로서 마땅히 담당해야 하는 의무를 져버린다면 이는 옳지 못한 행동이다.   부득이하게 그런 중요한 행사에 빠지고 교회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경우에는, 사전에 미리 양해를 구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서 생일잔치나 결혼식 같은 행사가 주일 예배와 겹치는 것이라면 섭섭하지 않을 만큼 미리 돈으로 시간으로 몸으로 봉사하고 준비하는데 적극 참여하는 것이 좋다. 장례식의 경우 주일 이전에 미리 고인의 가족을 찾아가서 조의를 표하고 나중에 마음이 안정되어 갈 즈음에 다시 찾아가서 위로하고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아주 바람직한 모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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