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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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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단에 속한 사람을 만났을 때 Publish on May 07,2017홍삼열
    집에 있을 때 가끔 이단종교에 속한 사람들이 문을 두드릴 때가 있다. 그럴 때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안면이 있는 사람 혹은 친구 중에서도 어느 날 자신의 이단 사상을 드러내며 나에게 접근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바울은 갈라디아서1:8-9절에서 이단에 대해 아주 강경한 자세를 취했다.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바울이 이렇게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선언하는데 왜 이렇게 심한 말을 할까? 그만큼 이 이단의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한 번 이단에 넘어가면 다시 제정신 차리게 하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 주변에서 “너 정상이 아니야. 너 이단에 빠져 있어. 정신 차리고 빨리 나와야 해.” 이렇게 말을 해주면, 그 사람은 그런 말 듣는 것을 자신이 올바른 신앙을 가진 증거로 이해한다. 예수 잘 믿는 사람은 세상에서 박해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기 때문에 잘못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따돌림을 당할수록 자기는 정말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단에 빠진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보면 꼭 정신병자와 비슷하다. 정신병자에게 “너 정신이 이상해. 병원에 가봐야겠어.” 이렇게 말을 해주면 그가 인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이면 병이 심하지 않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단에 빠진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 중에 남의 이야기가 들리고 자기가 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면 아직 희망이 있는 사람이다. 성경을 잘 설명해주면 이단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그런데 이미 완전히 이단에 빠져버린 사람은 남의 말을 절대 듣지 않는다. 이단에 빠져서 가족도 버리고 직장도 버리고 학교도 떠나고 최저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돈을 받고서 노동착취를 당하기만 한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극히 정상이고 자기를 비정상으로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이 비정상이고 그들 모두 지옥에 간다고 믿는다.   그러면 우리에게 접근하는 이단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그들을 사탄으로 보아 적극적으로 배척해야 할까? 아니면 그들을 신앙으로 잘 지도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까? 일단 이단에 빠진 사람은 자신은 절대 선이고 나머지는 절대 악이라는 이원론적인 생각을 하기 때문에 정통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그들을 돌이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오히려 그들의 말을 들어주다가 이단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생긴다. 그래서 디도서 3:9-10절에는 이렇게 지시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그러나 그렇다고 이단에 속한 자들을 사람 취급도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그들 역시 사랑의 대상이다. 인격적으로 대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반 기독교인들에 대해 마음의 상처가 크게 남아서 나중에 돌아오는데 큰 어려움이 생긴다. 정통교회로 돌아온 사람이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다. 보통 교회 문패가 붙어 있는 곳이면 일부러 그곳을 찾아가서 전도도 하고 책자도 나누어주고 하는데 대개 보면 문을 열어주지 않거나 아니면 욕을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다짜고짜로 부엌에 가서 칼을 가지고 나오더니 “이단 마귀새끼들은 저리 꺼져!” 라고 하는 경우도 보았다는 것이다. 그때 자기 머릿속에 왜 자기들이 기성교인들을 이단이라고 하는지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단을 만나면 디도서의 말씀대로 한두 마디 훈계한 후에 정중하게 그냥 돌려보내거나 멀리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모욕을 주지 말고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니 다른 분들에게 가서 전도하라고 말하거나 “올바로 믿으셔야 합니다.” 라고만 말하고 말싸움을 벌이지 않는 것이 좋다. 어쨌든 이단에 빠진 사람들도 예수님의 은총이 절실히 필요한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언젠가 하나님의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그들을 되돌이키실 때 그들이 더 잘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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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4
    정말 믿음으로만 구원 얻나요? Publish on April 30,2017홍삼열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구원이 선물이라고 하는 이유는 우리가 선한 행위를 많이 행했기 때문에 구원을 보상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은혜로 구원 얻는다는 말이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나의 죄짐을 지고 고난 당하고 죽으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것으로 구원의 충분조건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 대신 왜 그런 믿음의 방법을 통해 구원하시기로 정하셨는가? 그 이유는 우리 자체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킬 가망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내가 어떤 종류의 죄를 지었든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고 내 삶의 주님으로 영접하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절대 과거의 죄 때문에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흔들리고 구원의 확신이 흔들릴 때마다 로마서 8:1절 말씀을 굳게 붙잡을 필요가 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런데 이 말씀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교회 다니는 사람”에게 정죄함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과거에 예수님 믿는다고 한 번 고백한 사람”에게,  “성경 많이 아는 사람”에게, 혹은 “선행을 많이 행한 사람”에게 정죄함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에게 정죄함이 없다고 하였나?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였다. 현재형이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러면 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우선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 안에 들어가 있다는 뜻이다.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어 영접하고 이제 피난처 되시는 그 주님의 품 안에 내가 들어가 있을 때 절대 안전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 있다는 말이 단순히 그런 내적 믿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내적 믿음과 동시에 외적 믿음 즉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도 포함한다. 그래서 이어지는 로마서 말씀에 보면 육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모습이 강조되는 것이다. 8:4절,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영을 따라 행하면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살면 율법의 요구사항을 제대로 실행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 그런데 이 믿음은 단순히 머리의 믿음이거나 입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 삶에서 하나님의 영을 따르는 실제적인 믿음이다. 또한 그 믿음은 과거의 믿음이 아니라 현재의 믿음이다. 그래서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가이다. 구원이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에도 나에게 역사하는 구원이라면 당연히 지금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현재 내가 하나님의 영을 따라 살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해 이렇게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 구원의 시작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선행으로는 안 되고 오직 믿음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러나 현재의 구원과 미래의 완성된 구원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절)이 있어야 가능하다. 현재 성령을 따라 행하는 구체적인 순종의 삶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현재 제대로 빛의 삶을 살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합리화하기 위해 “오직 믿음”만을 강조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원래 의도에 역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 얻지만, 그 구원의 삶이 영원히 지속되기 위해 현재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 혹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에 따라 사는 것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정말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가? 그렇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 그러나 그 믿음이 진실한 믿음이라면 반드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으로 발전하게 되고, 내가 현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습이 되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순종의 삶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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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3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를 용서하셨는데 왜 그의 아들이 죽었을까? Publish on March 20,2017홍삼열
    사무엘하 11장에 보면 솔로몬이 충신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고 급기야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밧세바의 임신 소식을 듣고서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 취한 비밀 작전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야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 바로 그는 밧세바를 데리고 와서 결혼식을 올리고 얼마 후에 아들이 태어난다. 완전범죄가 성립된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에 나단 선지자가 그를 찾아 와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해준다. 한 성읍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그곳에 부자가 한 사람이 있었고 그 옆에 사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이 부자가 아주 못된 짓을 했다는 것이다. 부자에게 손님이 찾아왔는데 자기 소유의 양을 잡아서 손님 대접하기가 아까워서 옆에 양 한 마리 달랑 기르는 가난한 사람의 양을 억지로 빼앗아다가 자기 손님을 대접했다는 것이다. 이 말이 떨어지자 마자 다윗은 노발대발하였다. 그런 사람은 죽어야 한다고 말하며 당장 그 사람이 누군지 말하라는 것이다. 이때 나단은 “그게 바로 당신입니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다. 칼이 다윗의 집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겠고 그의 집에 재앙이 임해서 다른 사람이 다윗의 아내들을 취할 것이라는 엄청난 비극의 예언을 한다. 이때 다윗은 그런 예언을 하는 나단을 죽여서 입을 막을 수 있었다. 물론 지금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은 나단 선지자뿐이 아니다. 요압 장군도 이것을 알고 있다. 다윗의 명령으로 우리야를 죽게 한 사람이 바로 요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압은 꿀리는 것이 있기 때문에 절대로 이 사건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이전에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다윗과 평화협정을 맺은 아브넬을 죽이면서 다윗에게 큰 정치적 부담을 안겨주었는데 다윗이 이걸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가 주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다윗이 이걸 문제 삼으면 요압은 그날로 죽은 목숨이다. 다윗은 이렇게 요압의 약점을 잡고 있기 때문에 요압에게 비밀리에 우리아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고, 당연히 요압은 이 비밀을 영원히 간직하고 남들에게 이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나단 선지자는 다윗에게 약점 잡힌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다윗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비밀을 알고 있는 나단 선지자를 그냥 놔두면 그를 통해 비밀 이야기가 어떻게든 새어나갈 위험이 있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최선의 방법은 그의 입을 막는 것일 수 있다. 우리야를 죽인 것 같이 손쉽게 나단 선지자도 죽일 수가 있었다. 그래도 유대 왕궁의 선지자인데 어떻게 그렇게 맘대로 선지자를 죽일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질 수 있지만, 사실 알고 보면 선지자의 힘이 그렇게 세지 않았다. 아무리 궁중을 자주 드나드는 선지자라고 해도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는 목숨 걸고 하는 것이다. 심지어 사울을 왕으로 세운 위대한 사무엘 선지자도 사울을 무서워했다. 삼상 1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내가 사울을 버렸고 다른 사람을 왕으로 세울 테니 가서 이새의 아들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을 때 사무엘이 뭐라고 대답했는가?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이게 사무엘의 말이다.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의 왕을 세운 사무엘도 사울이 자기를 죽일까 봐 무서워했다면 나단 선지자는 어떠했을까? 당연히 그도 다윗을 무서워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자기를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충신인 우리야도 죽인 사람이 나단을 못 죽이겠는가? 나단은 이걸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숨 걸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그 길을 택하지 않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길을 택했다. 나단 선지자로부터 “그게 바로 당신입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곧 바로 죄를 지었다고 인정을 했다. 이렇게 죄를 인정하는 모습을 본 나단은 하나님께서도 다윗의 죄를 용서해주신다고 말을 해주었고, 이것 때문에 다윗이 죽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언을 해주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런데 나단의 예언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고 다윗의 마음을 찌르는 내용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다윗의 범죄 때문에 밧세바와의 간음으로 태어난 아기는 죽을 거라고 말을 했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다윗의 모습을 보시고 다윗의 죄를 용서하신다고 했는데 어찌하여 그 죗값으로 아들이 죽게 된다고 하셨을까? 나중에 보면 알겠지만 이것 말고도 다윗에게 예언된 다른 모든 사항들이 그대로 이루어진다. 칼이 그의 집을 떠나지 않겠다고 했는데 실제로 다윗의 아들 세 명이 칼에 죽는데 이들 중 두 명은 자신의 형제에게 살해당한다. 또 다윗의 집에 재앙이 임해서 다른 사람이 다윗의 아내들을 취할 것이라고 했는데 그 장본인이 바로 자기의 첫째 아들 압살롬이 되고 만다. 우리는 죄 용서 받는 것과 죗값을 치르는 것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면 내가 죄를 짓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인가? 마치 애초에 죄를 짓지 않았던 것처럼? 그래서 죄를 용서하신다는 말과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말이 서로 모순이 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용서해주신다고 해서 모든 것이 그냥 없던 것처럼 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누구를 살해했다고 치자. 이것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셔도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해서는 내가 죗값을 치러야 하는 것이다. 또 내가 누구의 물건을 도둑질하고 나서 회개했다면 그 도둑질한 물건을 배상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진정한 회개는 언제나 두 가지 요소를 함께 충족시켜야 한다. 우선 하나님께 진심으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무슨 죄든지 용서하신다. 그 다음 내가 해를 끼친 사람에게도 회개하고 그 사람의 용서를 구해야 한다. 어떤 피해를 입혔다면 그에 대한 적절한 배상을 해야 한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충족되어야만 내가 진심으로 회개한 것이 되는 것이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은 양심의 자유이다. 죄책감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여기까지는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일이다. 이제 인간이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는데 죗값을 치르고 피해를 배상하는 일이다. 여기까지 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이고 완전한 양심의 자유를 얻게 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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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2
    사도 바울은 어느 정도까지 공부한 사람일까? Publish on March 06,2017홍삼열
    초기 기독교인들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는 일반적인 오해가 있다. 그것은 초기 기독교인들은 모두 사회의 하층민이었다는 생각이다. 당시의 고등교육하고는 별로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성경도 이런 생각을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린도전서 1:26절) 영적인 측면에서는 기독교인들이 당연히 세상사람들에 비해 월등하지만 “육체를 따라” 즉 세속적인 기준에 따라 본다면 기독교인들이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적어도 현재 바울의 이 설교를 듣는 기독교인들의 수준이 그렇다는 말이다. 이에 더하여 바울 자신도 마치 자기가 고등교육을 받지 않은 것처럼, 그래서 수사학을 사용할 줄 모르는 것처럼 말을 하고 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고린도전서 2:1,4) 여기에 보면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이란 어구들이 나오는데 모두 당시 최고의 학문인 수사학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세상 사람들은 수사학적 웅변술을 사용하여 사람들에게 연설하지만 바울 자신은 그런 방법과는 상관없는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만 설교하고 전도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자연히 그 내용도 순수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만을 전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2절) 그런데 바울의 글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는 온갖 수사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글을 쓸 줄 아는 수사학의 대가인 것을 확인하게 된다. 심지어 위의 내용, 자신은 말의 기술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순수하게 십자가의 복음만을 전한다는 표현 자체도 고도의 수사학적 기법인 것이다.   사도행전 22:25절 이하에 보면 천부장이 바울을 채찍질하라고 명령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때 그 명령을 수행하려는 백부장에게 바울이 한 말이 있다.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않고 채찍질 할 수 있느냐?” 이 말을 들은 백부장은 화들짝 놀라서 곧장 천부장에게 가서 이 사실을 말하고 천부장은 바울에게로 와서 갑자기 특별대우를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울에 묻는다. “나는 돈을 많이 들여서 시민권을 샀는데 너는 어떻게 로마의 시민이 되었는가?” 이때 바울은 “나는 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한 가지 얻게 된다. 그것은 바울은 상류층 혹은 적어도 중류층 이상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이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는데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자라고 하는 말은 그가 아주 부유하고 세력 있는 집에서 태어났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렇게 부유하고 세력이 있는 집안 출신이라는 말은 그가 당시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는 뜻이다. 당시 로마의 주요 도시들마다 로마 학교가 세워졌는데 이 학교는 아무나 다닐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옛날에는 무상교육이란 것이 없었다. 다 돈을 내고 다녀야 하는데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아서 평민들은 학교를 다닐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따라서 당시에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면 자동적으로 그 사람은 아주 돈이 많은 집안의 자녀라는 뜻이고, 그들 중에서 가장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요즘의 대학 혹은 대학원 과정에 해당하는 철학이나 수사학을 배운 사람들인 것이다. 바울은 당시 수사학의 중심지 중의 하나인 소아시아 다소(Tarsus)에서 유력한 유대인 집안에 태어났다. 그것도 로마 시민권자로 태어났다. 당연히 그의 위상에 맞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실제로 그의 글을 읽어보면 논리의 전개나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나 자신의 권위에 입각하여 설득하는 등 다양한 수사학적 기법이 사용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이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해도 크게 잘못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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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사울에서 바울로 이름이 바뀌었을까? Publish on March 06,2017홍삼열
    사도행전에 9장에 보면 사울이 다메섹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러 가는 장면이 나온다. 사울은 유대교에 대한 지나친 열심 때문에 누가 명령한 것도 아닌데 자발적으로 산헤드린의 군대를 요청해서 그들을 이끌고 다메섹으로 갔다. 그곳에 있다고 알려진 기독교인들을 색출해서 감옥에 가둠으로써 예수 운동을 진압하고 그럼으로써 유대교를 지키고 더 나아가 유대교를 부흥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그의 인생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는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바로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난 사건이었다. 바울이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내리는 강한 빛을 보고 그 즉시 눈이 멀었다. 그리고 타고 가던 말에서 떨어졌다. 눈이 감긴 상태에서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바울이 대답하였다. “주님, 누구십니까?” 그 때 들리는 대답이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이제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그곳에 가면 네가 앞으로 행할 것을 알려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고 사흘 후 그곳에서 아나니야를 만나서 그의 기도로 시력이 회복되었다. 그 다음 그는 세례를 받고 이제부터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 사울의 회심과 관련하여 자주 언급되는 사항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 회심 사건을 기점으로 그의 이름이 사울에서 바울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도행전에서 이 부분까지는 사울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지만 그 다음부터는 바울이라는 이름이 사용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궁금해한다.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는데 이런 극적 변화를 그런 이름의 변화로 표현한 것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일까? 우선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사도행전에서 바울이라는 이름이 처음 사용된 것은 사도행전 9장의 바울의 회심 직후가 아니라 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하는 중간인 13:9절이라는 사실이다. 사도행전 9장은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회심하는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그로부터 3년이 지난 후를 설명하는 9:26절에도 역시 사울이란 이름이 계속 사용되고 있다.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떠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때만 해도 여전히 사울이란 이름이 사용된다. 그러다가 13장 중간에 가서 그가 구브로에서 전도하는 동안 바울이라는 이름이 처음 사용된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마술사 엘루마]를 주목하고 이르되...”(13:9) 그 다음부터는 죽 바울이란 이름만 사용된다. 무슨 이유로 사울이 바울로 이름이 바뀐 것일까? 성경에는 왜 이름이 그렇게 바뀌었는지 전혀 설명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그것은 바울의 이방인 전도 때문이다. 바울이 본격적으로 이방인 전도로 방향을 잡고 이방인 전도에 100% 헌신하게 되면서 자연히 이름을 바울로 바꾼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이방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울은 히브리 이름이지만 바울은 그리스나 로마 제국에서 흔히 사용하는 그리스식 이름이다. 만일 그가 유대인들을 위해 복음 전하는 사람으로 남아있었다면 사울이란 이름을 계속 사용했을 것이지만, 자기는 전적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바울이란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래야 복음전도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현재 미국에 사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영어 이름을 사용한다. 필자도 영어 이름을 사용한다. 만일 본인이 계속 한국에 살고 있다면 영어 이름을 사용할 이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미국에 살고 있기 때문에 영어 이름을 사용하는 게 맞는 것이다. 왜 사울이 바울로 이름이 바뀌었는가 하는 문제는 그런 문화적 상황의 차이 때문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180%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바울로 바뀐 것이 아니라 순전히 실용적인 이유 때문에, 즉 다른 문화권에서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사울이 바울이 된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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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법의 일점일획까지 지켜야 한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Publish on February 13,2017홍삼열
    마태복음 5:17-18절에 보면 우리가 율법의 “일점일획”까지 소홀히 여기지 말고 모두 지켜야 한다는 의미의 말씀이 나온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여기에 “일점일획”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이 정확히 무슨 뜻일까? 구약의 율법을 빼먹지 말고 다 지켜야 한다는 뜻일까? 예를 들어 유대인들이 코셔 음식만을 먹기 위해 일상생활에서 큰 불편을 감수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구약의 음식법을 철저히 지켜야 하고, 안식일 법을 완벽히 지키기 위해 금요일 저녁 해질 때부터 그 다음날 해질 때가지 모든 종류의 일을 금하고 그런 규정의 일환으로 예배당까지 걸어가서 예배를 드리고, 또 할례를 행하고 부림이나 숙곳 같은 절기들을 지켜야 한다는 뜻일까? 아니면 그 일점일획이란 것이 성경의 글자 하나하나를 완전한 하나님의 뜻을 담은 신탁으로 떠받들어 성경을 문자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말일까? 예를 들어 출애굽기 21:23절 이하에 보면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갚을지니라.” 라고 했는데, 이것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글자 그대로 가해진 해에 상응하는 복수를 하거나 보상을 요구해야 한다는 말일까? 또 레위기 25:37절에 보면 “이자를 위하여 돈을 꾸어 주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네 양식을 꾸어 주지 말라.”고 했는데, 정말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현대에도 절대 이자를 취급하는 은행 같은 곳에서는 일하면 안 되는 것일까? 한편 어떤 사람들은 이 일점일획의 원칙을 흠정역 성경(King James Version)과 연결시킨다. 다른 성경들은 본래의 말씀을 현대적 사상들로 가감했기 때문에 다 오염된 것이고 오직 흠정역 성경만이 일점일획의 가감도 없는 완벽한 순순한 성경이라고 주장하는데, 과연 마태복음 5:18절의 “일점일획”이란 것이 그런 뜻일까? “일점일획”이 정확히 무슨 뜻일까?   “일점일획”이란 표현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한 점 한 획에 이르기까지 아무리 작은 부분까지도 하나님의 영감을 담고 있어서 반드시 성취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한 단어 한 토씨까지 소홀히 여기지 말고 모든 것을 완벽히 이해하고 완벽히 따라야 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하면 일점일획이란 표현은 어디까지나 성경의 외형적 형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 의미를 말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이 되는 것은 어느 특정 문자의 형태가 아니라, 즉 히브리어나 그리스어 원문이 정확히 어떻게 되어 있느냐가 아니라, 그 문자가 담고 있는 성령의 의도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들은 이 일점일획을 히브리어의 모음부호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일점일획이라는 표현 자체가 당장 그것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이다. 히브리어를 조금 공부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히브리어 문법에서는 점이 몇 개냐에 따라, 또 점과 작은 획을 어떻게 연결하느냐에 따라 모음의 음가가 달라진다. 그리고 모음의 음가가 달라지면 자연히 단어의 의미도 달라지게 된다. 그러나 히브리어를 조금 더 많이 공부한 사람은 이 일점일획이 그런 뜻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모음부호는 (점과 획은) 원래 히브리어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중세시대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옛날에도 히브리어에 모음 음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누구도 모음 없이 자음만 가지고 히브리어 혹은 다른 어떤 언어를 발음할 수는 없다. 단지 글로 쓸 때 대다수의 언어들은 자음과 모음을 함께 사용지만 히브리어는 자음만 연결하여 사용하는 방식을 취하였고, 히브리어를 읽는 방법을 배운 사람은 그렇게 자음들만 연결해 놓은 글을 각자가 알아서 모음을 붙여서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중세시대에는 히브리어를 읽기 편하게 하기 위해 히브리 학자들이 점과 획으로 된 모음 체계를 만들어서 그것을 자음 밑에 붙여 놓았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볼 때 일점일획은 히브리어의 모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율법의 일점일획이 히브리어의 모음부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다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 표현이 성경말씀의 세세한 부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5:18절에서 일점일획이란 표현에 사용된 그리스어 단어를 생각해보면 이 사실이 명확해진다. 그리스어 원문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 “하나의 이오타(iota), 하나의 케라이아(keraia)”로 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구약 즉 히브리어 성경을 말한다. 그렇다면 그리스어의 가장 작은 단어인 이오타(i)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글자는 요오드, 즉 숨표 비슷한 모양의 글자이고, 그래서 “일점”(하나의 이오타)까지 지켜야 한다는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 중 가장 작게 보이는 것을 무시하지 말고 그것까지도 신경써서 다 지켜야 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또 “일획”(하나의 케라이아)은 글자의 끝까지 자세히 보고 해석하라는 의미가 된다. 왜냐하면 “케라이아”라는 단어는 “작은 뿔” 즉 글자의 끝부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히브리어에는 끝에 꼬부라지는 부분만 다르지 대충 보면 비슷한 글자들이 있는데 그런 상황에서 “일획”까지도 신경써서 지키라는 말은 곧 하나님의 계명을 대충 읽고 넘어가지 말고 마지막 부분까지 자세히 읽고 이해하여 지키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이 일점일획의 원칙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한다. 마음에 부담이 된다고 특정 말씀을 빼먹고 넘어가든지, 아니면 성경에도 없는 내용을 자기 마음대로 집어넣어서 성경말씀을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잘못 이용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2:18-19절이 바로 그것을 경고하고 있다.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한편 어떤 사람들은 이 일점일획의 원칙을 1611년에 발행된 흠정역 영어성경(King James Version)에 연결시킨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까지 중요하기 때문에 절대 더하거나 빼거나 하면 안 되는데, 오직 흠정역만이 그렇게 가감없이 완벽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고 나머지 성경들은 다 원본을 수정한 잘못된 성경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그렇지 않다. 더 정확한 성경의 사본이 발견되었는데도 불완전한 후대의 사본에 기초한 흠정역을 마치 하나님이 주신 성경으로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잘못인 것이다.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흠정역 성경을 직접 주셨을까?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 원본은 아쉽게도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그 원래의 성경을 몇 대에 걸쳐 여러 번 베껴 쓴 5500여개의 사본들뿐이다. 그리고 흠정역 성경이 사용한 그리스어 성경은(Textus Receptus, 1623년) 그 많은 사본들 중 일부를 기초로 해서 정리편집한 하나의 판본일 뿐이다. 따라서 만일 이전에는 5세기에 기록된 사본이 가장 오래된 사본이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사용했다면, 그러나 지금은 2-3세기에 기록된 더 정확하고 더 원본에 가까운 사본이 새로 발견되었다면, 우리는 그 새로 발견된 사본에 기초하여 더 정확한 번역을 하는 것이 맞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성경의 “원본”에 보다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사본이 발견될 때마다 성경의 일부가 바뀌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나 성경의 원본이 없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인다면, 현재까지 우리에게 있는 사본보다 더 오래되고 저 정확한 사본이 발견될 때는 당연히 그것에 맞추어서 성경을 개정해야 한다는데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 사실 이렇게 새로운 사본이 발견될 때 성경의 의미가 바뀌는 예는 극히 드물다. 누구나 성경을 베끼는 사람은 정말 최고의 경외의 마음으로 베끼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통 정통 교회에서 인정하는 성경들은 어느 것이나 믿고 사용해도 안전하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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