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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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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 Publish on June 12,2019홍삼열
    데살로니가전서를 읽어보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신앙의 목표가 어디인지를 분명하게 말해준다.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데살로니가전서 3:13).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는 상태, 너무 심한 요구가 아닐까?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4:3).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5:16~18).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5:23-24). 데살로니가인들이 지향해야 할 목표, 하나님의 기대치가 무엇이라는 말인가? 바로 완전성화인 것이다. 그들이 온전한 거룩함에 이르러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게 도대체 가능한 일일까? 그것도 최근에 기독교로 개종한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이런 요구를 한다는 것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 현재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상태를 보면 절대 그런 완전성화에 도달할 수 없을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봐주신다. 하나님은 너무나 믿음이 좋으신 분이어서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사람들이 그런 거룩의 상태에 이를 것을 믿어주신다.   우리가 ‘믿는다’라는 동사를 사용할 때는 주로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때 그 단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믿는다는 표현도 가능하다는 것을 아는가? 우리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우리를 믿어주신다. 하나님은 정말 믿음이 대단하신 분이다. 매일 실패하고 매일 넘어지는 우리를 믿어주신다. 우리가 예수 안에 거하면 조금 죄 짓는 횟수가 줄고 죄의 강도가 줄 것을 믿으실 뿐만 아니라, 언젠가 우리가 완전성화에 이를 것까지도 믿으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정말 믿음이 대단하신 분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믿어주시는 것은 우리를 자녀삼아 주시는 것에 연결된다. 주기도문의 첫 문장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시작한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인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면 이는 육신의 아버지와는 약간 다른 의미일 것이다. 영적인 의미에서의 아버지 혹은 비유적인 의미에서의 아버지일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니 육신의 아버지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고 더 잘 보호하시고 더 사랑해주시는 아버지로 믿고 그렇게 아들 행세를 하라고 하신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신 것처럼 우리도 마치 내가 예수님인 양 그렇게 똑같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가장(假裝, pretending)이 있다. 첫째는 모조품이 진짜를 밀어내는 나쁜 종류의 가장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처럼 행세하라고 하신 것은 이런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가짜로 아들 행세를 해서 하나님의 얼굴에 먹칠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 행세를 하라는 것은 좋은 의미의 가장이다. 진짜에 가깝게 다가감으로써 진짜에게 영광 돌리는 좋은 의미의 가장이다. 예를 들면, 여러분의 자녀가 초등학교 때 축구를 하는데 어른의 눈으로 보면 정말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에게 “야, 너 어쩜 그렇게 잘하니? 정말 훌륭한 축구 선수가 될 거야. 너는 소질이 있어.” 이렇게 격려하지 않는가? 아이가 아직은 수준 미달이지만 자신이 정말로 소질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훈련에 임할 때 그런 과정을 통해 아이는 실력자로 성장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소꿉놀이도 비슷한 예가 된다. 아이는 스스로 어른을 흉내 내면서 자란다. 그런데 아이를 믿지 못하는 엄마가 “너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니? 내가 그럴 줄 알았다. 가장하지 마. 너는 아니야.”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아이는 나중에 정말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으로밖에 성장하지 못한다. 왜? 건강하게 가장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가장하도록 격려하신다. “야, 너는 내 아들도 아니면서 왜 아들처럼 행동하니?”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는다. 비록 내가 진품 아들인 예수님처럼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못하지만, 내가 그런 줄 알고 아들 행세를 하면 하나님께서 열심히 박수 쳐주신다. 왜냐하면, 이런 과정을 통해 내가 점점 예수를 닮아가고 완전성화를 향해 전진하기 때문이다. 성경에 보면 이런 가장의 모티브가 상당히 많이 발견된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 믿는 사람은 정말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나?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그런 줄 알고 가장하라는 말이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정말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 정말 내 안에 그리스도께 사시나? 그런 줄 알고 살라는 말이다. 로마서 6장 11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λογίζεσθε).” 이렇게 자신을 죄에 죽은 사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사람으로 가장할 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믿어주심을 확신할 때, 정말로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의 상태를 너무나 잘 아신다. 앞으로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잘 안 된다는 것도 잘 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믿어주신다. 내 인생이 50점 밖에 안 되는데도 주님은 “야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네 인생은 나같이 100점이 될 수 있어.” 이렇게 믿어주시고 격려해주신다. 이렇게 예수님이 나를 믿어주신다면 나도 나 자신을 믿어야 하지 않을까? 내가 부족해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죄를 범하지만 나를 믿어주시는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 다시 한 번만 믿어주십시오. 내가 주님의 자녀같이 살겠습니다”라고 믿음의 기도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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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 세상적인 복을 구하는 것은 잘못인가요? Publish on January 09,2019홍삼열
    현재 한국에서 기독교의 위상이 추락하는 것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자성(自省)하고 있다. 왜 기독교의 위상이 예전만 못한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현재 한국 기독교의 모습이 한국사회가 점점 부해지면서 나타나는 자연적 현상이라고 분석한다. 이에 더하여 도덕적 타락을 원인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부해지면 생각과 삶이 나태해지고 그렇게 되면 자연히 퇴락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이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모든 종교는 생로병사의 사이클을 거치기 때문에 기독교도 예외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역사상 이런 사이클과는 별도로 한 번도 침체기를 겪지 않은 종교집단이 없기 때문에 한국 기독교도 현재 일시적 혹은 장기적 침체기를 겪는다는 분석이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한국 기독교는 한국 특유의 샤머니즘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기복주의(祈福主義)를 추구했는데 그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현재 부정적 열매를 거두고 있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생활이 어렵고 이성적 사고가 덜 발달된 상태에서는 샤머니즘에 기초한 기복주의가 사람들에게 큰 매력이 있지만, 현재와 같이 생활이 편해지고 시민들의 의식수준이 높아질 때는 더 이상 기복주의가 힘을 쓰지 못한다는 설명이다. 더 나아가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은 기복주의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진실한 기독교인, 성서적 기독교인은 세속의 복을 추구하지 않고 언제나 영적인 복을 추구하며, 심지어는 반(反)세속적인 하늘의 복만을 추구하고 주님을 위한 고난의 길을 간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세속의 복을 지향하는 샤머니즘적 기독교를 믿어 왔기 때문에 당연히 침체기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위의 분석들이 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한국기독교의 샤머니즘적 특성을 지적한 분석이 한국 기독교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지역의 기독교에 비해서 왜 한국의 기독교가 그렇게 급성장하고 급쇠락하는 현상을 보이는지 잘 설명해준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점에서 기복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께 세속적인 복을 구하면 안 되는 것일까? 신앙이 올바른 사람은 하나님께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복, 예를 들어 자녀의 복, 재산의 복, 장수의 복과 같은 세속적인 복을 구하면 안 되는 것일까?   성경을 읽어 보면 성숙한 신앙의 사람도 세속적인 복을 구하고, 하나님께서도 그의 소원대로 응답하시는 예들을 많이 발견한다. 아브라함의 경우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셨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세기 12:2)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이 영적인 복뿐일까? 큰 민족이 되는 것, 그의 이름이 창대하게 되는 것이 육적인 복과는 상관이 없을까? 그렇지 않다. 그에게 약속된 복은 당연히 육적인 복, 특히 자녀의 복과 재산의 복을 포함한다. 신명기 28장에도 보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에게 약속된 복이 나열되어 나오는데 당연이 이 목록에는 세속적인 복이 포함된다.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28:4-5)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28:7)   그러면 신약성경에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신약성경은 우리가 영적인 복을 위해서만 기도하라고 가르치는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응답의 내용이 육적인 것 곧 음식에 관한 것이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태복음 7:9-11) 또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가르쳐 주실 때도 “일용할 양식”을 위해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기도할 때 그것만 구하면 곤란하다. 먼저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위해 기도하고, 그다음에 먹을 것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것이 맞다.   신앙이 올바른 사람은 하나님께 영적인 복만 구해야지 세속적인 복은 구하면 안된다는 주장은 성서적 가르침이 아니다. 성경은 세속적인 복 자체를 정죄하지 않는다. 단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목적에서 벗어난 복의 추구를 정죄할 뿐이다. 많은 사람이 “기복신앙”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기독교인으로서 재산, 건강,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면 떳떳하지 못하게 혹은 송구스럽게 기도한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복 받는 것뿐만 아니라 세상적으로도 복 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어떤 아버지가 자기 자녀가 영적으로만 복을 받고 세상적으로는 힘들고 어렵게 살기를 원하겠는가? 그런 아버지는 없다. 자녀가 잘못 사는 것이 아니라면 이왕이면 세상적으로도 복 받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더욱 그러하시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으로뿐만 아니라 육적으로도 잘 되고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을 보면, 기도문의 전반부는 하나님에 관한 기도, 후반부는 우리의 요구에 관한 기도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구분할 수 있다는 이유로 전반부는 신령한 기도이고 후반부는 세속적인 기도라고 규정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포함한 여러 일상적인 문제를 놓고 기도할 때도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위해서 구하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복을 위해 구하는 기도도 목적이 올바르면 신령한 기도 즉 영적인 기도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린도전서 10:31절은 이렇게 권면하는 것이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께 세상적인 복을 구하는 것은 잘못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건강을 위해서, 물질을 위해서, 자식 성공을 위해서 당연히 기도해야 한다. 단 이것이 나쁜 종류의 기복신앙이 되지 않기 위해 그 목적이 올바라야 한다.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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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사람들 Publish on January 09,2019홍삼열
    빌립보서 4장 2절에 보면 빌립보교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두 여성 지도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바울이 이 두 여자의 이름을 대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냥 “빌립보교회 지도자들을 권하노니” 아니면 “빌립보교회 여자들을 권하노니”라고 해도 될 것을, 왜 이렇게 두 사람의 실명을 대면서 공개적으로 경고하는 것일까? 그들이 여성들 중에 지도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인데(3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싸우던 저 여인들”) 이 두 사람이 서로 대립하기 때문에 교회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아마 유오디아는 순두게가 교회를 어지럽히는 장본인이라고 비난했을 것이다. 순두게도 역시 유오디아 때문에 교회가 어려워진 것이라고 비난했을 것이다. 안 봐도 뻔하다. 그런데 바울이 볼 때는 어땠나? 둘 다 똑같이 문제다. 둘 다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한쪽 편을 들지 않고 그 두 사람에게 모두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한 것이다. 순두게의 마음으로 합쳐도 안 되고 유오디의 마음으로 합쳐도 안 되고 오직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합쳐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단순히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하지 않고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한 것이다. 그들에게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하면 자기 유리한 대로, 자기 좋은 대로 생각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문제가 뭔가?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자기 마음’ 대로 행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정말 “주 안에” 거하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주님의 마음을 품어야 하는 것이고, 주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라면 그런 식으로 서로 싸우면서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교회에 두 여자 권사님이 있었다. 이 두 분은 서로 라이벌이다. 사사건건 대립을 하는데 이 두 사람 때문에 교회가 평안한 날이 없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둘을 불러다놓고 간곡하게 부탁하며 타일렀다. 그리고 거의 억지로 두 분을 서로와 화해하게 하고 악수를 하게 하였다. 그리고 헤어졌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을까? 그다음부터 이 둘이 싸우지 않고 교회에서 서로 잘 협력했을까? 목사 앞에서 서로 악수를 한 그 두 사람은 조금 지나자 옛날로 돌아가버렸다. 여전히 서로 대립하며 계속 교회에 문제를 일으켰다. 언제 싸움이 그쳤을까? 둘 다 나이 들고 힘이 빠질 때 싸움이 그쳤다. 이런 분들은 목사에게 골치거리이고 교회 전체에게 골치거리이다. 당연히 예수님에게도 골치거리이다. 그러니 바울이 빌립보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공개적으로 그 둘(유오디아와 순두게)이 싸우지 말고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경고한 것이다. 그런데 이 편지는 빌립보교회만 읽는 편지가 아니다. 나중에 다른 교회들도 돌아가면서 이 편지를 읽을 텐데 이게 무슨 창피인가. 심지어는 2000년 후에 다른 대륙에 사는 우리까지도 이 편지를 읽고 유오디아와 순두게에 대한 이야기를 알게 되지 않는가? 바울이 이 두 사람의 이름을 편지에 적어 넣은 이유가 있다. 이 문제는 빌립보교회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당시에 다른 교회들에도 똑같은 문제가 있었고, 현재 빌립보서를 읽는 교회들도 똑같은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예수님의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주님의 마음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혹시 자기 마음대로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교회 일을 했으니까 하나님이 좀 봐주지 않으실까? 절대 아니다. 그건 세상에서 자기 맘대로 죄를 짓는 것과 전혀 차이가 없다. 사실대로 말하면 질이 훨씬 더 나쁘다. 왜냐하면, 자기 맘대로 하면서 하나님 이름을 팔았으니 세상 사람들이 자기 맘대로 행동한 것보다 더 악질적인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그런 이유로 예수님의 혹독한 책망을 받은 것이 아닌가? 세상에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았다면 다른 죄인들과 같이 심판받으면 된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마음대로 일을 했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예쁘게 봐주실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회칠한 무덤이니,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사람이라느니, 자기도 지옥에 들어가고 다른 사람도 천국에 못 들어가게 막고 지옥으로 보낸다고 엄청난 책망을 들은 것이다.   에베소서 2장에 보면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 즉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이렇게 표현했다. 2장 2~3절, “그 때에 너희는 그 [허물과 죄]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여기에 보면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어떤 죄를 지었다고 하는가? 주님의 마음은 없고 자기 마음만 있어서 자기 마음대로 행한 것이 그들의 죄였다는 것이다. 사사기의 주제도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의 생각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이 사사기 시대의 문제였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사사기 17:16, 21:25).   그러면 어떻게 주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 빌립보서 2:5~8절이 주님의 마음을 잘 설명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의 마음이 무엇인가? 낮아지는 것이다. 자신을 비우는 것이다. 이 마음을 품는 사람은 주님같이 낮아질 수 있다. 내가 지금 낮아지면 나중에 높아질 테니까 조금만 꾹 참고 낮은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그를 구원하기 위해 내가 낮은 사람으로 지내는 것이다. 잠시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낮아짐의 삶이 나의 기본 생활 패턴인 것이다. 이게 가능한 정도에 따라 예수님의 마음을 내가 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대립하고 경쟁함으로 교회 질서를 어지럽힌다면 그건 내 마음대로 교만히 행동한다는 뜻이고 주님의 겸손한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주님의 마음은 낮아지는 마음이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진 사람은 절대 싸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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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사람 Publish on December 16,2018홍삼열
    바울에게는 아주 독특한 면이 있다. 고난이 오면 오는 대로 평안하면 평안한 대로 모두 만족한다는 것이다. 감옥에 갇히든 자유인이 되든 상황에 상관없이 항상 기뻐하고, 심지어는 자신이 죽든 죽지 않고 살든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다.    먼저 바울이 고난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살펴보자. 옥중서신에 보면, 바울이 고난을 거부하지 않았고 오히려 고난을 통해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고백한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로새서 1:24절).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11~13). 심지어는 이런 말까지 한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4:18).    지금 바울이 어디에서 이 글을 쓰고 있나? 감옥에서 글을 쓰고 있다. 그런데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하다”고? 정말 바울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혹시 편지니까 좀 그럴싸하게 쓴 것이 아닐까? 바울에게 있어서 고난은 꼭 피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고난은 하나님이 버리셨거나 벌 주신다는 싸인이 아니다. 때로는 고난이 하나님의 뜻일 수 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립보서 1:29). 복이 오면 하나님이 은혜 주신 것이고 고난이 오면 벌을 주신 게 아니라는 말이다. 고난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다. 그러니 고난이 올 때 꼭 그것을 피하려고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바울에게는 고난은 오나 안 오나 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감옥 생활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이다. 바울에게는 감옥에 갇히거나 풀리거나 전혀 상관이 없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된다면 자기가 어떤 상태에 있든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서 1:12~18절에서 자신의 옥중 생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어도 기뻐하는 사람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감옥에 갇혀 있는데도 기뻐한다는 것이 이해가 잘 안 된다. 부당하게 감옥에 갇혀서 자유를 제한받고 음식도 맘대로 먹지 못하는데 뭐가 그리 기쁠까? 더구나 바울이 감옥에 갇힌 상황을 이용해서 자기들 세력을 넓히는 ‘비양심적인’ 사람들이 있는데 얼마나 괘씸한가? 감옥에 갇혀서 꼼짝 못하는 바울을 깎아내리고 바울이 무대에서 잠간 사라져 있는 동안 자기들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인데, 이에 대해 바울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바울의 반응은 그것도 너무나 감사하다는 것이다.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립보서 1:18). 참 속도 없는 사람이다. 이런 상황에 기쁘다는 소리가 나오다니! 바울은 어쩔 수가 없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 마음속에서부터 솟아나는 기쁨이 있기에 기뻐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반복해서 넘치는 기쁨을 표현하는 것이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복음 전파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된다면 자기가 감옥에 갇히든 아니든 전혀 상관이 없다. 어떤 경우에도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옥에 갇힌 것도 기뻐한다고 하면서 심지어는 자신이 죽는 것도 기뻐한다고 말한다. 빌립보서 1:20-21절,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바울에게는 사나 죽으나 큰 차이 없다. 내가 살아 있으면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살아서 역사하실 것이고, 내가 죽는다면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죽는 것이기 때문에 전혀 손해가 아니라는 것이다. 전혀 슬퍼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사는 사람, 이런 사람은 아무도 못 말린다. 아무도 이런 사람 못 당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렇게 철저히 헌신된 사람을 통해서 전파되고 세워지는 것이다.   바울은 꼭 이래야 된다는 법이 없는 사람이다. 살면 주님을 위해 더 봉사하고 충성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고,죽는다면 거기에도 다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자기가 죽는 것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설령 그것을 받아들이더라도 “내가 죽으면 복음전도는 어떻게 하나? 내가 무대에서 사라지만 복음전도가 왕창 무너질 텐데...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 있어야 돼!”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주제파악을 못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신다. 나는 어느 기간 동안 어느 특정 장소에서 필요한 역할을 할 뿐 내가 주체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여기에서 헷갈리니까 무대에서 사라져주어야 할 사람이 끝까지 안 물러나서 하나님의 교회를 망치고 하나님의 사역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무대에서 사라질 때는 그냥 아무 말없이 사라지기 바란다. 죽어야 할 때 아무 말없이 죽기를 바란다. 그다음 일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적당한 사람을 선택해서 처리하신다.   바울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사람이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줏대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는 정말 자기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는 사람이다. 그러나 자기가 사라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다. 보통의 경우 사탄은 재물을 가지고 협박한다. “부정을 행하지 않으면 네 재산 다 없어진다.” 아니면, 체면이나 명예를 가지고 협박한다. “내 말을 안 들으면 체면 깎인다. 명예가 실추된다.” 이것저것도 안 먹히면, 궁극적으로 생명을 가지고 협박한다. “죽기 싫으면 내 말 들어!” 그러나 바울같이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선포하는 사람에게는 사탄이 두 손 두 발 다 들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통해 당신의 교회를 세우신다.   우리는 무엇이 가장 두려운가? 자식이 가장 두려운가? 돈이 가장 두려운가? 체면이 가장 두려운가? 죽는 것이 가장 두려운가? 사탄은 우리가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지 잘 안다. 그래서 반드시 그것을 가지고 우리를 유혹하고 협박한다. 우리는 이 두려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하나님께 그것을 정직하게 내어놓고 치유 받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 바울이 하나님께 그렇게 귀하게 사용된 이유가 무엇인가? 바울은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내가 살면 내 안에 주님이 사는 것이고, 내가 죽으면 주님의 영광을 위해 죽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나 유익이라고 믿고 있으니, 그런 사람을 사탄이 어떻게 하겠는가? 사탄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사람 요리하기가 가장 힘들다. 두려움의 문제가 해결될 때 사역의 자유가 주어진다. 두려움이 없는 만큼 사역의 범위가 커진다. 두려움의 공포가 없는 만큼 하나님이 더 크게 역사하신다. 두려움의 문제를 해결함으로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는 우리들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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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3
    브리스길라의 영적 리더십 Publish on December 16,2018홍삼열
    사도행전 18장 1~3절에 보면 바울이 고린도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부부는 바울과 함께 천막 만드는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처음부터 쉽게 바울과 동역을 할 수 있었다. 이 두 사람은 바울을 만나서 고린도에서 함께 사역하였고 바울을 따라 에베소로 가서 그곳에서도 함께 사역하였다.   브리스길라 부부는 글라우디오 황제 때 로마에서 고린도로 이주하였다(사도행전 18:2). 2세기의 역사가 Suetonius에 의하면 Claudius 황제가 ‘Chrestus’라는 사람의 일로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축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 Christus(그리스도)를 잘못 표기해서 ‘크레스투스’라고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어쨌든 그리스도 때문에 혹은 ‘크레스투스’라는 사람 때문에 유대교 회당에서 소동이 일어나고 이것이 로마 사회에 해가 된다고 생각해서 글라우디오 황제가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에 관련하여 독특한 것이 하나 있다. 당시 사회에서는 가부장적 사회이기 때문에 부부 이름이 나오면 언제나 남편 이름이 먼저 나오는데 이 부부는 성경에 딱 한 번을 제외하고 모든 경우에 부인 이름이 먼저 등장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사도행전 18:18). “그가 [아볼로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사도행전 18:26).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로마서 16:3).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디모데후서 4:19). 그런데 고린도전서 16장 19절에서는 딱 한 번 아굴라의 이름이 먼저 나온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왜 사회 관습과는 정반대로 교회 안에서는 아내인 브리스길라 이름이 남편 이름인 아굴라보다 먼저 나오는 것일까? 결혼하기 전에 브리스길라의 신분이 아굴라보다 더 높았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평등사상이 있는 교회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그런 표현이 사용된 것은 아내인 브리스길라가 그 가정의 영적 리더라는 의미일 것이다. 보통 교회에는 여자 성도의 수가 남자 성도에 비해 많다. 평균적으로 가정의 영적 리더 중에 여자들이 많다는 뜻이다. 또 부부가 함께 신앙생활 하는 분들도 부인이 가정의 영적 리더인 경우를 많이 발견한다. 하나님께서 다른 것은 몰라도 신앙 면에서는 부인을 그 가정의 영적 리더로 세우는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그래서 부인이 그 가정의 영적 리더가 된 경우 그것을 극구 부정할 필요가 없다. 영적 리더이면 그런 줄 알고 리더의 책임을 다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누가 가정의 영적 리더가 되었든 그 사람에게는 영적 리더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만일 부인이 가정의 영적 리더라면, 그가 신앙적으로 가정을 잘 이끌어야 한다. 말을 많이 해서 이끌라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이끌라는 말이다. 남편이 잘못된 선택을 하려 할 때 그것에 동조하지 말고 성경적 원리에 따라 그가 바른길로 방향을 바꾸도록 힘써야 한다.   그런데 남편이 잘못 갈 때 그것을 막지 못하고 도리어 함께 가는 경우가 있다.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예가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이다. 이 경우는 보통의 관례대로 남편의 이름이 먼저 나왔다. 남편이 베드로 앞에서 거짓말하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더욱 비극적인 일은 아내가 이것을 막지 못하고 함께 거짓말에 동조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부부가 한 날에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그 둘 중에 영적 리더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제대로 분별하고 영적 리더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성령님께 죄짓는 것을 막았다면,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부부는 영적으로 함께 살든지 함께 죽는다. 영적 리더의 책임을 가볍게 보지 말고 가정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잘 이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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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2
    왜 하나님은 죄 없는 웃사를 죽이셨나요? Publish on October 01,2018홍삼열
    사무엘하 6장에 보면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여호와의 궤는 아비나답의 집에 있었는데 그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다윗왕의 명을 받들어 소가 끄는 새 수레에 여호와의 궤를 싣고 다윗 성으로 출발하였다. 그런데 중간에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 소들이 갑자기 뛰는 것이다. 그래서 궤가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웃사는 급히 손으로 궤를 잡았는데 이것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자 다윗은 여호와의 궤를 다윗 성으로 가지고 오는 것을 중단하고 궤를 오벧에돔의 집에 두도록 하였다.   이 이야기를 읽을 때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뭔가 불공평한 일을 하신 것처럼 느낀다. 웃사는 하나님의 궤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비상조치를 취한 것뿐인데 왜 하나님은 선한 일을 한 웃사를 죽이신 것일까? 또한 웃사가 이렇게 소가 끄는 수레를 몰게 된 것도 자기가 계획해서 한 일이 아니고 다윗왕의 지시에 따라서 했을 뿐인데 하나님이 책임을 물으신다면 다윗에게 책임을 물으셔야 하지 않을까? 한편, 다윗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여호와의 궤가 당연히 있어야 할 성전에 있지 않고 다른 곳에 있을 때 마음이 너무나 불편했다. 그러던 중 어느 정도 정치적 안정을 되찾았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궤를 성전으로 옮겨오는 일이었다. 다윗은 오로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여호와의 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도록 명령한 것인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선한 마음을 보시고 웃사의 실수 같은 것은 눈감아 주셔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떻게 보면 웃사가 비상조치를 취한 것이 그렇게 심각한 죄가 아니고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일이라면 하나님도 정상참작을 해 주셔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웃사를 죽이신 것일까? 왜 하나님은 웃사를 죽이시고 다윗에게 큰 좌절감을 안겨주신 것일까?   우선 다윗이 잘못한 것을 먼저 살펴보자. 사무엘하에서 웃사의 사건 바로 전에 나오는 이야기는 다윗이 블레셋과 전쟁을 하는 이야기이다. 다윗이 블레셋과 전쟁하게 될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이었나? 바로 하나님께 물어보는 것이었다. “지금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려고 와서 진을 치고 있는데 적극적으로 나가서 그들과 싸워야 합니까 아니면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까?”(삼하 5:19) 하나님은 다윗에게 나가서 싸우라고 하셨고 다윗은 그대로 순종하고 나가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다음 블레셋이 다시 한 번 전쟁을 하러 올라왔다. 이때도 역시 다윗은 하나님께 여쭈었다.(삼하 5:23) 이때는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을 치실 테니 좀 기다렸다가 그들을 치라고 하셨고 다윗은 그대로 순종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 이야기가 끝나고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것이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꼭 있어야 할 내용이 빠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다윗은 하나님께 물어보는 일을 하지 않았다. 당연히 이 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니까 물어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위기에 처했을 때는 열심히 기도하다가 평안해지니까 기도를 잊은 것일까? 같은 내용을 다루는 역대상 13장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해서 물어보지 않았지만 부하들과는 의논했다고 되어 있다. “다윗이 천부장과 백부장 곧 모든 지휘관과 더불어 의논하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온 회중에게 이르되.”(13:1-2)   다윗이 실수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런 중요한 일이 있으면 당연히 하나님께 물어보고 또 성경에(당시에는 모세오경에)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먼저 찾아봐야 하는데 그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결정한 것이다. 민수기 7:9절에 보면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운반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여호와의 궤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천으로 덮고 네 사람이 어깨에 메고 운반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 나름대로 더 좋은 생각이 있었다. 새로운 수레를 사용해서 운반하는 것이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생각이 블레셋에게서 배운 것이라는 사실이다. 블레셋이 여호와의 궤를 이스라엘에게 반납할 때 바로 그 방법을 사용했다.(삼상 6:7)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본인의 선한 뜻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 겸손히 물어보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법대로 순종해야 한다. 사실 하나님의 방법이 엄연히 있는데도 하나님께 물어보지도 않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를 생각도 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선한 의지”가 없는 것이다. 정말 선한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뜻대신에 하나님의 뜻을 따를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   다윗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의지로 여호와의 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는 일을 했다고 하지만사실은 자신의 의지대로 일을 추진한 것이다. 그래서 일을 망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웃사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 다윗을 처벌하시면 되지 왜 시키는 대로 했던 웃사를 죽이신 것일까? 그 이유는 웃사도 역시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봤어야 하는 것이다. 민수기 4:15절에 보면 여호와의 궤를 메는 직무를 맡은 고핫 자손도 절대로 그것을 만지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만질 때는 죽는다고 되어 있다. 여호와의 궤를 20년 동안 자기 집에 모신 웃사는 당연히 이것을 알고 더욱 조심했어야 했다. 한편, 하나님의 계명을 전혀 알지 못하는 블레셋 사람들의 경우는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가서 그것을 보고 만지고 나중에 수레로 옮길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처벌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웃사의 경우는 다르다. 당연히 율법을 알고 그 방법대로 순종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는 사람에게 더 큰 책임을 물으신다. 제사장 교육을 받은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 이상한 향불을 드려서 죽임을 당했다. 자기 생각에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더 좋아하실 향불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생각을 앞세웠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웃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했어야 했다. 기도로 구하고 말씀으로 구했어야 했다. 하나님은 많이 받은 자에게 더 많은 것을 기대하신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는 자에게 그에 합당한 순종을 요구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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