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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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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재림의 날을 알 필요가 있을까? Publish on October 23,2017홍삼열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데살로니가전서 5:1-2절에 나오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언제 재림하시는가에 대해서는 바울이 알려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울도 모르고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3:32-33절에도 같은 말씀이 나온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 날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꼭 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매 시대마다 이런 사람들이 나타나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해서 그들의 인생을 망치는 일들을 반복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이상한 말을 하는 이단들에게 넘어가지 않는다. 예수님이 오시는 날과 때를 안다고 하는 사람은 100% 가짜다. 예수님도 그 날을 모른다고 하셨는데 감히 어떤 사람이 이걸 안다고 하는가? 그러면 예수님이 언제 오실 줄 모르니까 그냥 막 살면 되는가? 영원히 안 오실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도 되는가? 아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주님이 오실 것을 기다리며, 언제 오시든지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5:2절에서 예수님이 도둑같이 오신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도둑은 예고하지 않고 갑자기 들이닥친다. 물론 요즘에는 미리 예고하는 오는 도둑들도 있지만, 그런 예고를 받는 입장에서는 역시 모르기는 마찬가지이다. 도둑의 말을 어떻게 믿겠는가? 중요한 것은 도둑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아무도 예상하지 않은 방법으로 들이닥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언제 도둑이 나타날지 모르니까, 더 나아가서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원히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안 나타난다고 생각하고 편안히 살면 되는가? 아니다. 평소에 문단속 잘 하고 평소에 도둑이 침범할 빈틈을 주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도둑이 언제 들이닥치든지 안전하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자는 평소에 깨어 있으면 된다. 평소에 빛 가운데서 살면 된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데살로니가전서 5:5-6절) 이렇게 깨어 있으면 언제 예수님이 오시든지 전혀 상관이 없다. 왜? 이미 다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꼭 생각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평소에 준비할 생각은 안 하고, 예수님이 언제 오시는지 때와 시기에만 관심이 가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 때와 시기를 알아서 뭐 하려고 하는 것일까? 대충 살다가 막판에 바짝 정신 차리고 예수님에게 가장 예쁜 모습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일까? 날과 때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평소에는 제대로 살지 않겠다는 심산인 것이다. 마치 공부 못하는 학생이 평상시에는 놀다가 언제 시험 보는지, 정확하게 어디에서 시험문제가 나오는지를 알아내는데 관심이 많은 것과 같다. 그래야 충분히 놀다가 며칠 전부터 열심을 내기 시작하고 그 전날에 밤을 새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참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다. 내가 어떤 상태에 있을 때 예수님이 오시면 좋을까? 식당에서 친구들과 갈비를 구워먹고 있을 때? 아니면 집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 아니면 교회에서 예배 드리거나 기도하고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뭔가 교회와 관련된 일을 하는 동안 예수님이 오시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게 정상이 아니다. 제대로 된 신자라면 때와 장소가 전혀 상관이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자는 평소에 준비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평소에 준비된 사람은 예수님이 어디에 오시든지 언제 오시든지 관심이 없다. 그래서 내가 현재 제대로 신앙생활 하는지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예수님이 언제 오셨으면 좋겠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것이다. “언제라도 좋다. 나는 준비되어 있으니까.” 이런 생각이 들면 신앙생활 잘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특정한 때나 특정한 장소에 있을 때 예수님이 오시면 좋겠다고 생각이 되면 신앙생활 잘 못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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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0
    귀신도 믿음이 있는가? Publish on September 04,2017홍삼열
    야고보서 2:19절에 보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귀신에게서나 발견되는 가짜 믿음이라는 충격적인 표현이 나온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잘못하면 우리도 귀신의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더 나아가 믿음이 좋다고 착각할 수 있다.  귀신의 믿음의 특징이 무엇인가? 귀신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을 믿는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만이 참 신이고 다른 신은 가짜라는 것을 귀신도 믿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그 믿음이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귀신의 믿음은 철저히 머리의 믿음이지, 가슴의 믿음이거나 손발의 믿음이 아닌 것이다. 종교개혁 시기에는 믿음을 세 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했다. 곧 Notitia(정보), Assensus(지적 동의), Fiducia(개인적 신뢰)이다. 우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씀이 있을 때, Notitia로서의 믿음은 이런 형식을 가진다. “나는 기독교인들이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다.” 이것은 객관적 정보로서의 믿음이다. 한편 Assensus로서의 믿음은 이런 형식을 가진다. “나는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교리가 진리임을 믿는다.” 이것인 지적으로 동의하는 차원이다. 그런데 Fiducia의 믿음은 그 교리가 나의 영혼을 살리는 것으로 믿는 차원이다. 신뢰로서의 믿음이다. “나는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나의 목숨을 바쳐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한다.”  만일 우리가 두 번째 단계의 믿음, Assensus로서의 믿음으로 그치면 귀신의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실상은 죽은 믿음이다. 그러나 우리가 Fiducia(절대 신뢰)로서의 믿음을 가질 때 참된 구원에 이른다. 왜냐하면 그 믿음은 개인적 결단과 행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Fiducia의 믿음만이 참 믿음, 살아 있는 믿음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실제 순종의 삶을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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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9
    예정인가 자유의지인가? Publish on July 30,2017홍삼열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에베소서 1:3-5) 여기에 보면 엄청난 내용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미리 예정하셨는데, 언제 그렇게 하셨다고 하는가 하면 “창세 전에”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기 전에, 해와 달과 별을 창조하시기 전에,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시기 전에 구원받을 자를 미리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순종의 여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정하신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이 예수를 믿지 않아도 무조건 구원받게 된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예정된 사람은 예수를 믿고 영접하는 것과 상관없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예수 안에서” 구원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위의 짧은 세 절 안에 “그리스도 안에서”가 두 번 나오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가 한 번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해 구원받도록 예정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미 구원받기로 선택된 사람은 다 예정되어 있으니까 선한 의지를 가지고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다. 자유의지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는 예정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를 가르치는 구절들도 많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요한복음 3:14-16절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누구든지--예외가 없다. 누구든지--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고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통해 예수를 영접하지 않으면 절대 구원을 얻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는 자유의지가 대단히 중요하다. 빌립보서 2:12절에 보면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였다. 구원받은 신자에게도 순종의 삶이 꼭 필요하다는 말이다. 뭐를 위해서?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구원을 칭의의 측면과 성화의 측면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칭의는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의 은총을 믿을 때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변하는 것이다. 이것은 법적인 변화이다. 그리고 이렇게 법적 변화가 일어날 때 동시에 내적으로는 거듭남의 역사가 일어난다. 내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다. 한편 성화는 이렇게 새로 생명이 시작된 후에 점점 어른으로 자라가는 과정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해질 때까지 계속 자라가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의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닮아가는 과정, 이것이 성화의 과정이고, 여기에 우리의 의지적 노력이 필수적인 것이다.   빌립보서 2:12절의 “구원의 이루라.”는 의미가 바로 이 성화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믿음으로는 부족하니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 믿고 새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시작하였다면 당연히 성화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우리가 예수를 영접함으로 칭의의 차원의 구원을 받게 될 때 그것은 구원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예수 안에서 새 생명이 태어난 것이다. 이 구원이 더욱 풍성해지고 온전해지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지적 순종이 필요하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완성하는 성화의 과정이 필요하다. 만일 칭의의 차원의 구원만 받고 의지적 순종의 삶을 살지 않으면 아마 천국에 가서 면류관을 받지 못하고 대신 “개털모자”를 받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한국에서 8-90년대에 이런 이야기를 들으신 적이 있을 것이다. 경상도 어느 시골 산기슭에서 개를 200여 마리 키우던 계 장로님이라는 분이 계셨다고 한다. 당시 그분의 교회에서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어서 교인들 모두가 작정 헌금을 하는데 계 장로님도 동참해야 했다. 장로님이 해 왔던 사업이라야 개 키우는 것 밖에 없으니 개를 팔아서 헌금을 해야 했다. 그런데 개를 키우느라고 이것 제하고 저것 제하다 보니 먹고 살기가 힘들다고 생각해서, 개 한 마리 값만 헌금하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이 작정 헌금을 본 담임목사님은 대단히 실망하셨다. 장로가 되어서 개 한 마리라니... 본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에 계 장로님이 꿈을 꾸었다. 천사의 인도를 따라 면류관이 진열된 방으로 안내되었다. 그 다양한 면류관에는 아름다운 보석이 박혀 있었다. 내 것은 금 면류관일까 은 면류관일까 생각하다가 천사에게 물었다. “어느 것이 저의 면류관입니까?” 천사의 대답이 “본인의 머리에 꼭 맞는 것이 자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하나 들어서 써 보는데 머리에 맞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내 머리에 맞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니까 천사가 저쪽에 있는 것들을 살펴보라고 했다. 천사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거기에는 개털모자들만 진열되어 있었다. “저것을 쓰라고요? 어떻게 그런 걸 씁니까?” 그래도 한 번 써보라는 천사의 말에 하나를 들어서 써 보니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내가 명색이 장로인데 이것은 아니야!” 라고 소리치는데 꿈이 딱 깨었다는 것이다.   구원받아 천국에는 갔는데 개털모자라... 어떤 생각이 드는가?  이 세상에서 차별받고 사는 것도 분통 터지는데 천국에서도 그런 차별을 받아야 해? 이런 생각이 드는가? 물론 천국에는 차별이 없을 것이다. 정말 개털모자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계시록에 보면 구원받은 사람들이 자기 머리에 있는 면류관을 벗어서 주님의 보좌 앞에 다 던진다고 했는데, 그걸 보면 상급은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현재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그런 부끄러운 구원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것이다.   정말 성경에 기록된 그런 빛나는 면류관을 상으로 얻을 정도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정말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완성한다는 결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만일 자기는 구원받기로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막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산다면, 최상의 경우 천국에서 개털모자 수준의 구원을 받을 것이고 최악의 경우 구원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과연 구원받은 사람이 나중에 타락하여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입장이 다르다. 장로교에서는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받는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믿기 때문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은 잠간 타락하여도 하나님께서 다시 강권적으로 은혜를 주셔서 돌아오게 하시고 천국에까지 이끌어 주신다고 믿는다. 한편 감리교에서는 구원의 은혜를 맛보고서 세상으로 돌아가서 타락한 사람은 구원을 잃어버린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이 둘 중의 어떤 경우에도 나 자신의 현실적인 차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내가 과거에 예수님 영접하고 구원을 받았지만 이제는 방탕하게 살다가 죽어서 보니 지옥에 갔다고 할 때, 장로교식으로 설명하면 그 사람은 원래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다. 원래는 지옥 가기로 예정된 사람인데 그 동안 스스로 구원받았다고 착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감리교식으로 말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총을 주셨는데 그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셨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확실히 모른다는 것이다. 단지 현재 내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성화의 삶을 살고 있으면 장로교 식으로 설명하든 감리교 식으로 설명하든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인 것이다. 적어도 현재는 그렇게 믿어도 되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의 순종의 상태가 중요한 것이다. 현재 내가 매일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삶을 살면 그것으로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이미 다 해 주셨다. 우리가 할 일만 남았다.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성화의 삶을 열심히 살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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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8
    행위인가 믿음인가? Publish on July 30,2017홍삼열
    신약성경에 보면 오직 믿음을 강조하는 부분이 있는 반면에 믿음에 합당한 행위를 강조하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서 바울서신은 오직 믿음을 강조한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이고 신앙의 진실성도 믿음의 유무가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에베소서 2:8) 반면에 마태복음이나 야고보서나 요한서신은 행함을 강조한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야고보서 2:14) 이런 차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왜 같은 성경 안에서 한쪽에서는 믿음을 강조하고 다른 쪽에서는 행위를 강조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메시지를 바는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바울이 편지를 쓸 때는 주로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글을 썼다. 성경 지식이 거의 없는 사람들, 신앙의 훈련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글을 썼다. 그러니 자연히 신앙생활의 시작 혹은 토대가 되는 믿음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간단한 메시지를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믿음이 확실하지 않으면 신앙생활 자체가 시작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야고보나 마태는 이미 성경을 알고 있고 비록 구약식으로나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글을 썼다. 그러니 자연히 믿음보다는 믿음의 진실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상황에 비교하자면, 초신자들에게는 “예수 믿고 영접하면 구원받는다”는 단순한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 맞다. 믿음이 없는 상황에서 행위를 강조하면 건강하지 못한 신앙인으로 자랄 수가 있다. 그러나 오래 신앙생활 한 신자들에게는 “당신이 주님으로 믿는다고 하는 예수를 정말로 믿는 것인가? 정말 믿음에 합당하게 살고 있는가?” 이것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성경은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에게 일관된 메시지를 전해준다. 그러나 성경은 큰 테두리 안에서 특정 대상에 따라 각 상황에 맞는 맞춤형 메시지도 함께 전해준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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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7
    그리스도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가? Publish on July 30,2017홍삼열
    그리스도께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가에 대해 역사적으로 세 가지 이론이 있었다. 역사적으로 가장 먼저 나온 이론이 승리자로서의 그리스도(Christus Victor), 그 다음이 배상자로서의 그리스도(Christus Satisfactor),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육자로서의 그리스도(Christus Educator)의 이론이다.  우선 승리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이론을 살펴보면, 이 이론은 초대교회의 Gregory of Nyssa나 Rufinus 같은 신학자들이 고안해 낸 설명 방법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마귀하고 일종의 거래를 했다는 것이다. 마귀에게 예수님을 내어줄 테니 지옥에 잡혀 있는 모든 영들을 대신 내주라는 거래였다. 마귀는 이 거래가 자기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해서 이에 응했다. 자기가 잡아 둔 많은 영혼들을 내주는 대신에 예수님을 잡아 두면 큰 이득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마귀가 예수님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그를 자기의 본거지로 끌어들인 것이었다. 예수님은 마귀의 본거지에 들어가셨을 때 그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추어 버렸다. 어둠에 빛을 비추니까 마귀가 힘을 전혀 쓰지 못하고 자기가 잡아 두던 영혼들을 그대로 빼앗기고 예수님도 잡아 두질 못하게 된 것이다. 이제 예수님은 승리자가 되어 많은 영혼들을 이끌고 하늘로 승리의 깃발을 올리며 올라가셨다는 것이다. 사탄의 세력을 정복하는 승리자 예수님의 이미지를 아주 재미있는 스토리로 설명한 것인데 물론 성경에는 없는 이야기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는데 낚시꾼의 이야기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일종의 낚시밥으로 사용해서 물에 던졌더니 마귀가 이걸 물었다는 것이다. 마귀를 잡기 위한 하나님의 작전인데 마귀가 여기에 걸려든 것이다. 어떻게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시는가를 이야기 식으로 설명한 것인데, 이런 이야기들의 초점은 예수님께서 마귀의 영역으로 침범해 들어가서 영혼들을 구출해 내시는 승리자의 이미지로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설명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설명한 두 번째 이론은 배상자로서의 그리스도이다. 11세기 말의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Anselm이 정리한 이론으로서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기독론이다. 그는 “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나?”(Cur Deus Homo) 라는 책에서 이 이론을 자세히 설명하는데, 중세 봉건제도를 배경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설명하였다. 이 이론에 의하면, 사람이 죄를 지을 때 그 죄의 심각성은 해를 입은 자의 위대성에 따라 결정된다. 예를 들어, 똑같은 죄를 지어도 거지에게 해를 입힌 것과 왕에게 해를 입힌 것의 심각성은 천지차이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죄를 지었을 때 이것의 심각성은 우리가 감당할 만한 수준을 훨씬 넘는다. 죄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명예에 먹칠한 것이고,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죄는 무한한 것이 된다. 문제는 사람이 이 무한한 죄의 대가를 치를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가해진 죄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는 존재는 사실 무한하신 하나님 자신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서야 했다. 한편 정의의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한 아무런 처벌 없어 인간을 용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반드시 값을 치러야 한다. (현대적 입장에서는 처벌 없이 용서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되겠지만, 중세시대의 영주와 농노의 관계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농노가 영주에 대해 어떤 죄를 지었는데 그것에 대해 처벌하지 않고 그냥 용서해주는 것은 당시의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다. 지은 죄는 그에 걸맞는 정도로 반드시 배상해야 한다. 이것이 정의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지은 죄의 심각성은 본질상 무한하고, 그 죄는 무한하신 하나님만이 처리할 능력이 있고,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는 신-인(God-Man)의 사건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죄 값을 치르는 배상자(Satisfier)가 되셔서 스스로 자신의 죄값을 치를 능력이 없는 인간을 대표하여 죄값을 치르신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대속이라고 부른다.   그 다음 기독교 역사에 등장한 세 번째 구속론은 교육자로서의 그리스도이다. 이 이론은 12세기 초의 프랑스 신학자인 아벨라드(Peter Abelard)가 정리한 이론이다.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무엇보다도 사람들에게 도덕적 감화를 주는 위대한 스승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안셀름의 주장대로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배상의 성격을 띠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교육의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안셀름은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신 것은 인간의 죄에 대한 처벌의 성격이 있다고 가르치지만, 아벨라드는 그것을 부정하면서 십자가 자체가 인간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자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큰 감명을 받아 자발적으로 예수를 따랐다는 것이다. 아벨라드가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아벨라드가 판단할 때 안셀름이 설명하는 하나님은 좋게 말해서 정의의 하나님이지 사실은 잔인한 하나님, 믿을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벨라드는 자유주의 신학의 대표자로서 심판 없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다. 기독교 전통에서 주로 받아들인 구속론은 안셀름의 배상자로서의 그리스도 이론이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구속론도 기독교 역사에 반복되어 나온다. 예수님은 사탄에게서 영혼들을 구출해내는 승리자라는 이미지도 있고, 인간이 되셔서 온 인류의 죄값을 치러 주신 배상자라는 이미지도 있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모범이 되시는 분으로 우리가 따라가야 할 위대한 스승이라는 이미지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종합적으로 이렇게 이해하면 된다. 기독교 대부분이 인정하는 기독론은 안셀름의 배상이론이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이신 God-Man으로서 죄 값을 치러주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교리를 부정하지 않는 선에서 승리자 그리스도와 교육자 그리스도의 개념도 성서에 기초한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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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등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Publish on June 10,2017홍삼열
    데살로니가전서 5:16-17절에 보면 기독교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구절 중 하나가 나온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여기에 기독교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이 설명되어 있는데 그것은 상황과 상관없이, 시간과 상관없이, 장소와 상관없이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믿는 사람으로서 변화된 모습을 가지고 살라는 뜻이다. 데살로니가전서에 또 한 군데 하나님의 뜻을 설명하는 구절이 나온다. 4:3절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별되게 사는 것이다. 그렇게 살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신앙생활 제대로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할 때 그런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 하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내가 주님을 위해 뭔가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가? 뭔가 내가 눈에 띄는 행동을 하고, 뭔가 특별한 업적을 이루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가?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하나님의 뜻은 그런 외형적인 성과/결과물 이전에 나의 내면의 사람, 속사람에 관한 것이다. 즉 항상 기뻐하는 사람이 되는 것, 쉬지 말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는 것,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 하나님이 보실 때 자녀로 거룩하게 사는 것, 이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로마서 12:2절도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을 뜻을 언급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기서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속사람, 새로운 인생관, 변화된 마음에 관한 것이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영혼의 상태, 마음이 새롭게 변화 받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사는 것,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절대로 내가 하나님을 위해 뭔가 위대한 업적을 이루는 차원이 아닌 것이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병이 있다. 바로 “1등 병”이다. 한국 기독교인들도 기도할 때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고...” 라고 기도한다.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구절인가? 신명기 28:13-14절에 그 내용이 나온다.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이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하는데, 우리가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지향하거나 그것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순종의 삶을 살 때 그렇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영혼의 상태, 속사람이 새롭게 변화된 상태,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하게 살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될 때, 그런 복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똑바로 알아야 한다.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을 위해 뭔가 굉장한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지, 그것을 목표로 하면 절대 그런 복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마가 9:35)고 말씀하신 것이다. 세상에서 1등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사업에서 1등을 하고, 공부에서 1등을 하고, 정치에서 1등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렇게 될 수도 있고 그렇게 안 될 수도 있다. 변함없는 하나님의 뜻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이다. 내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다. 내가 세상에서 거룩하게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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