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칼럼] 11월 14일 월요일 Publish on November 15,2022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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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적인 건축 가운데는 가공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재료를 활용하면서도 멋과 효용성이라는 측면에서 전혀 손색이 없는 건축물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개심사의 범종각이나 청룡사 대웅전에 사용된 휜 나무는 불안하고 흉해 보일지 몰라도, 곧은 나무와 다름없이 기둥의 역할을 거뜬히 해내고 있습니다. 비정형적인 질서로 가득 차 있는, 날 것 그대로를 크게 손대지 않고도 쓸모를 잘 활용한 것이지요. 굳이 곧은 것만을 활용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골라 사용하는 현대 사회의 인위적이고 효율적 가치관과는 큰 차이가 나는 부분입니다.
우리의 옛 장인들은 뒤틀리고 휜 나무도 손대지 않은 그대로 기둥과 대들보의 용도로 쓰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곧거나 휘거나 상관없이 나름대로 제 몫이 다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지요. 이러한 생각은 초석을 놓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었습니다. '덤벙주초'라고 해서 자연상태의 돌을 손대지 않고 가져다가 기둥의 기초로 쓴 것입니다. 산에 박혀 있던 울퉁불퉁하고 모난 돌을 다듬지 않은 채 가져다가 초석으로 사용한다는 발상은 현대인의 시각으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양이 없는 것은 둘째치고 안정성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휜 나무라고 해서 특별히 구조적 안정성에 더 큰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둥의 밑동이 박히는 부분을 잘 다듬어 놓고, 나무가 꼭 맞게 끼워질 수 있도록 최소한의 작업을 거치기 때문입니다.
휜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자연석을 크게 손대지 않은 채로 초석을 삼는 것은 기존의 표준화된 생각에서 많이 벗어난 방식입니다. 자연이 우리에게 준 모든 사물들은 다 나름대로의 가치와 쓰임새가 있기 마련이라는 믿음 없이는 쉽게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지요.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이야기를 전해 주시며, 당시 유대 사회의 80%이상을 차지하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소중한 존재가치를 언급하신 바 있습니다. 겨자나 누룩의 비유는 단순히 작은 물질이 뻥튀기처럼 크게 된다는 성장이나 성공의 스토리를 말하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존재가치가 미비한 사람들도 사람답게 존중받는 공의로운 세상을 보여주고자 하신 말씀이라는 거에요. 비록 여러모로 부족해 보이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덤벙주초처럼 하늘의 나라를 세우는 초석으로 사용하실 것이란 놀라운 이야기였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자들을 택하셔서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천한 자들과 멸시 받는 자들 그리고 없는 자들을 택하셔서 있는 자들을 폐하시는 공의로운 분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절망의 늪 같으면서도, 나름대로 숨쉬며 살만 한 소망이 남아 있는 곳입니다. 이제 뿌린대로 거두며 소산의 기쁨을 나누는 시점을 맞이하여,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지난 순간을 세심하게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부족한 것도 많고 허점 투성이 같은 우리가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밑동을 다듬어 놓고 기다려주신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실 수 있을 거에요. 꼿꼿이 서야 할 자리를 지키며 있는 그대로 자기 몫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